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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보수우익 상징 나카소네 전 총리 별세 본문

Guide Ear&Bird's Eye/일본

일본 보수우익 상징 나카소네 전 총리 별세

CIA Bear 허관(許灌) 2019. 12. 1. 12:05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가 오늘(29일) 향년 101세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푸미 씨 측은 나카소네 전 총리가 이날 도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고 밝혔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지난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냈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 패전국인 일본을 냉전 기간 서방 진영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재임 기간 미-일 동맹 강화에 주력했고 일본 방위비를 대폭 증액했습니다. 특히 50년 넘게 의회 의원을 지내면서 일관되게 전후 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의 우경화를 앞장서 선도했습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그는 1985년 전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논란이 됐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곳입니다.

진행자)일본 정치의 거물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별세했군요.

기자) 네, 나카소네 전 총리가 29일 오전, 향년 101세를 일기로 도쿄 시내 한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진행자) 나카소네 전 총리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지를 넓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요.

기자) 네, 나카소네 총리는 1982년 71대 총리직을 맡아 1987년 73대 총리직까지 연속 재임했는데요. 이 기간 미국, 한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전후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넓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 재임 시절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등 세계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활동했는데요. 타고난 친화력으로 세계 지도자들과 두루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진행자) 나카소네 전 총리,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소개해주시죠.

기자) 네, 1918년생으로 도쿄제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내무성에서 근무하다 해군 회계담당 장교로 복무하던 중,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하는 것을 지켜본 전쟁 경험 세대입니다. 1947년 자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이래 무려 20선의 기록을 갖고 있는 일본 현대정치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진행자)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정치인이죠?

기자) 그렇습니다. 전후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한 총리기도 하고요. 그보다 앞서 1960년대 한국과 일본 간 국교정상화 과정에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정치인인데요. 1983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만찬연설의 3분의 1 정도를 한국어로 연설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한 일화도 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1985년 8월 15일,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로,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들의 위패가 있는 곳인데요. 하지만 도조 히데키 등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돼 있어 주변국들은 일본 침략전쟁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후임 총리들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주변국들의 항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진행자) 지금 아베 일본 총리는 일본의 이른바 '평화헌법' 조항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일본의 대표적 보수우파 정치인으로서, 이에 대한 나카소네 전 총리의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기자) 나카소네 전 총리도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총리 재임 시절 일본의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고요. 물러난 후에도 일본의 국내정치와 국제 외교 문제에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며 활발한 의정 생활을 했는데요. 지난 2003년 85세가 되면서, 56년간의 정치 생활을 접고 은퇴했습니다


 일본 정치계의 거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향년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수상 별세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국영철도의 민영화와 일미안전보장체제 강화 등에 진력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수상이 별세했습니다. 향년 101세였습니다.

나카소네 전 수상은 1918년에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나, 1941년에 구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내무성에 들어간 후 태평양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에서 입후보해 처음으로 당선된 뒤 자민당 결성에 참가해 20기 연속 당선됐습니다.

1959년의 제2차 기시 개조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것을 시작으로 방위청 장관, 운수상, 통산산업상, 그리고 자민당 간사장과 총무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85년 8월 15일에는 전후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공식 참배했으나 중국 등의 거센 비판으로 그 후에는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나카소네 전 수상은 행정개혁 등에 진력해 당시 '일본국유철도', '일본전신전화공사', '일본전매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습니다.

한편, 외교면에서는 수상 취임 직후인 1983년 1월에 당시 관계가 경색됐던 한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고,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두터운 신뢰관계를 구축해 서로 '론'과 '야스'라고 부르며 나카소네 외교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1985년 3월에는 구 소련의 체르넨코 서기장의 장례식을 이용해서 고르바초프 신임 서기장과의 정상회담도 실현시켰습니다.

그러나 1987년 4월의 통일지방선거에서 패배해 그해 11월에 퇴진했습니다.

나카소네 전 수상의 재임기간은 1806일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5년간 지속돼, 아베 신조, 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들에 이은 전후 5번째의 장기정권이 됐습니다.

그후 2003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고이즈미 수상이 비례대표의 73세 정년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아 입후보를 단념함으로써 56년간에 걸친 국회의원 활동에 막을 내렸습니다.

나카소네 전 수상은 정계 은퇴 후에도 안전보장과 국제교류 관계 싱크탱크의 회장직을 역임하며 내정과 외교에 관련해서 적극적인 발언을 계속해 왔습니다.



일본 보수원로 나카소네 전 총리 101세로 타계

일본 '전후정치 총결산'을 내세우고 5년간 장기집권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가 29일 향년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NHK와 닛케이 신문 등이 일제히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이날 오전 7시께 도쿄 시내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정계에 입문한 나카소네 전 총리는 방위청 장관과 통산상 등을 거쳐 1982년 총리에 올랐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재임 기간 행정개혁 등에 진력해 국철과 전매공사 등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였으며 외교 면에서는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 일본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나카소네 전 총리는 전후 총리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공식 참배하는 등 과거사 문제에서 강경자세를 보여 국내 일각과 한국, 중국 등 피해국의 반발과 비판을 사기도 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나카소네 전 총리는 정계의 막후 중진으로 활약했으며 2003년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에 대한 정열을 과시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100세를 맞이한 작년 5월에는 헌법개정의 실현을 기대하는 발언을 해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1918년 5월 군마(群馬)현 다카사키(高崎)시에서 태어난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41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서 내무성이 들어갔으며 태평양전쟁을 경험했다.

종전 후 1947년 중의원 선거에 군마3구에서 출마해 첫 당선한 이래 20회 연속 당선했다.



나카소네 전 수상 별세 외국 반응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수상이 29일, 향년 101세로 별세했습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9일,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나카소네 전 수상은 일본의 중요한 시기의 용기 있는 지도자이며 일미동맹과 경제관계 강화를 상징하는 미국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다"고 말했습니다.

나카소네 전 수상 재임 중에 크게 개선된 것이 중국과의 관계입니다.

1983년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는 중국의 총서기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해 정상간의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세째 아들인 후더화 씨는 "나카소네 전 수상은 양국의 평화와 우호에 크게 공헌했으며 중국의 오랜 친구이자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게도 아주 좋은 친구였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나카소네 전 수상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취임 후의 첫 외국방문은 미국이라는 관례를 깨고 취임 직후인 1983년 1월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회담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1985년에 전후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한 데 대해 한국의 연합뉴스는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한국과 중국 등의 주변국으로부터 반발을 샀다"며 비판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아베 일 수상, 나카소네 전 수상 별세 관련 담화 발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수상이 별세한 것과 관련해, 아베 수상이 조의가 담긴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담화에서는 "나카소네 전 수상은 동서 군사대립과 일미 무역마찰 심화 등 일본이 국내외 정세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5년간 수상이라는 중임을 맡아, 종전 후 역사의 큰 전환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종전 후 일본 정치의 총결산을 이끌어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의 강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견고한 일미동맹을 확립했으며, 인접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와 함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평화와 경제 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또, "나카소네 전 수상은 행정 개혁의 단행을 최우선 과제로 지정하고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 21세기를 준비하며 여러 제도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일본국유철도의 민영화를 비롯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밝혔습니다.

아베 수상은 이어, "본인은 이 비보를 듣고 깊은 슬픔을 참을 수 없다"며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나카소네 전 수상 중일관계 발전에 공헌"

중국 외교부의 겅솽 대변인은 29일 기자회견에서 "나카소네 전 수상은 식견이 높은 베테랑 정치인으로, 중국과의 우호적 교류와 협력 추진에 힘썼고, 중일관계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분"이라며 "나카소네 전 수상의 별세에 대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가족에게도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언론, 나카소네 전 수상 별세에 "정치사의 산증인"

한국의 연합뉴스는 나카소네 전 수상의 별세를 속보로 보도했습니다.

연합뉴스는 나카소네 전 수상의 이력을 소개하고, "일본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이라고 전했습니다.

또, "1960년대 초반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83년에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일 우호증진에도 기여했다는 평을 들었다"며 공적을 기렸습니다.

한편, 1985년에 전후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참배한 데 대해서는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며 비판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주일 미 대사관, 나카소네 전 수상은 '일미 파트너십 최고의 주역'

주일 미국대사관의 영 임시대리대사는 트위터에 나카소네 전 수상과 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파에 앉아 대화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게재하고,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며 "빛나는 경력과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우정을 통해, 매우 중요한 일미 파트너십에서 최고의 주역을 맡았다"고 코멘트했습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수상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전환도전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立憲君主國[民主共和國, 聯邦共和國].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國家]-"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政府.

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어: 中曽根 康弘, なかそね やすひろ, 1918527~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71·72·7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47년의 제23회 중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회 연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약력

1918527, 군마 현 다카사키 시에서 태어남.

19413,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내무성에 입성.

19418, 해군경리학교 졸업.

194411, 해군병비국 근무.

194510, 군대해산에 따라 내무성으로 복귀, 관방조사부 근무.

1947425, 23회 중의원 선거에 군마3구에서 출마해 당선.

1959618, 과학기술청 장관에 임명(2차 기시 개조내각).

196612, 신정동지회 결성에 참여, 대표로 선출됨.

19671125, 운수성 장관으로 취임(2차 사토 내각).

1970114,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3차 사토 내각).

1970914, 레어드 미국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미군기지의 반환 및 공동사용에 관한 문제를 협의.

19701021, 4차 방위력정비계획의 개요를 발표.

197175,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취임(3차 사토 개조내각).

197277, 통상산업성 장관 겸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취임(1차 다나카 내각).

1974129,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취임(미키 내각).

19771128,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취임(후쿠다 개조내각).

198089,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취임(스즈키 내각).

19821125, 11대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 다음날 제71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됨.

1983111,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 40억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

198415, 현직 총리대신으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198541, 민영화된 일본담배산업주식회사(구 일본전매공사)와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구 일본전신전화공사)가 영업을 개시.

1985815, 총리대신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1985922, 플라자합의 채택.

19851015, 한국·중국 등의 비판으로 야스쿠니 신사 추계대제의 참배를 중지한다는 의견을 표명.

19851025,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엔고·달러저를 추진하기로 합의.

198676, 38회 중의원 및 제14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각각 300석과 143석을 획득해 큰 승리를 거둠.

19861028,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철의 분할·민영화 관련 법안을 가결.

198741, 민영화된 JR그룹 7개사가 영업을 개시.

19871020, 자유민주당 후임 총재로 다케시타 노보루를 지명.

1989525, 리크루트 사건으로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 심문.

1989531, 자유민주당 탈당.

1991426, 자유민주당으로 복당.

1996년 비례구의 종신 1위가 됨.

2003527,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정년제 도입을 위해 은퇴를 요청받아 비례대표 공천을 받지 못함. 차기 중의원 선거 불출마와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여 정계로부터 사실상 은퇴.

 

2.총리 재임

(1)장기집권

1982년에 제7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뒤 행정개혁 추진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제창하여 1987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여, 역대 4위의 장기정권이다. 다만 정권 발족 초기에는 자신의 파벌 사람을 앉히는 것이 상식이라고 여겨지던 내각관방 장관직에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파벌의 고토다 마사하루를 기용하고, 당간사장에는 니카이도 스스무를 임명하여 총 7명의 다나카파 각료를 채용해 다나카소네 내각등으로 비판받았다. 한편 개헌에 대해서 총리 재임 당시에는 표명하지 않았지만, 교육기본법의 재검토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자학사관의 재검토등을 일컬어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좌파 세력으로부터 우익 반편이군국주의자라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1983년의 제37회 중의원 선거와 1986년의 제38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현직 총리이면서 1위로 당선되지 않았다(당시는 중선거구제). 이것은 역대 총리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1위로 당선된 것은 모두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인데, 총리 역임자끼리 같은 선거구(군마 3)에서 대결한 것이 된다.

 

(2).일관계

·일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측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는 미국과의 골이 깊어졌지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친밀한 관계(일명 론+야스)를 쌓는 것에 성공했다. 또한 일본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다고 발언한 것이나, “일본과 미국은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등 미·일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했다. 한편 미·일간의 통상·경제 마찰이 심각해졌기 때문에, 미국의 무역적자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국민에게 수입품(특히 미제)의 구입을 호소하기도 했다.

 

(3)민영화 추진

일본전매공사, 일본국유철도 및 일본전신전화공사를 민영화시켰다. 이를 즈음해 국민으로부터의 지지도 안정에 접어들어 1986년의 제38회 중의원 및 제14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각각 300석과 143석을 획득해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때 당칙의 총재 3선 금지 조항이 개정되어 3선에 성공하게 된다.

 

(4)퇴임

그러나 선거중에 도입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매상세를 도입하려고 한 때로부터 공약 위반이라고 지적되어 지지율이 급락했고, 1987년의 통일 지방선거에서는 자민당이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상세 도입을 철회한 뒤에는 지지율이 다시 부활해, 198710월에 뉴 리더로 불리던 다케시타 노보루·아베 신타로·미야자와 기이치 가운데 다케시타를 후계로 지명하고 11월에 퇴임한다. 나카소네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시타의 경우 대장성 장관을 오래 한데다 야당과의 절충에도 능란해 도입에 실패한 매상세를 성립시키고, 당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었으며, 당시 병상에 있던 쇼와 천황의 서거 등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고 한다.

 

 

3.정계은퇴

2003년 총선거에서 비례구로 출마하지 못하자, 불출마를 선언하고 은퇴했다.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제도가 바뀔때 그는 비례구 종신 1위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례를 누린다는 비판이 늘어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재는 당의 두 원로,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이는 당 집행부가 보장한 일을 고이즈미 총재가 일방적으로 파기해 권고한 것으로, “극히 무례한 일이다라는 비판도 불렀다.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양 전 총리는 2000년의 총선거에서는 특례로 자민당이 도입했던 정년제(73)의 대상외가 되었었다.

   

写真で見る中曽根元首相の時代

101歳で死去した中曽根康弘元首相は、憲法改正という大命題に取り組み、民営化の先鞭をつけた。外交でも「ロン・ヤス関係」で日米同盟の強化を進めたほか、韓国訪問で関係修復にも努めた。昭和の戦後政治の中で中曽根元首相が残した足跡を物語る場面を、写真を通して振り返る。

田中角栄氏と事務引き継ぎし、握手する中曽根康弘通産相=昭和47年7月8日


自民党総裁選から一夜明けた船出の朝、蔦子夫人(左)に見送られて自宅を出る新総裁の中曽根康弘氏=昭和57年11月25日、東京都世田谷区上北沢


第71代首相指名を受け、議席で手を挙げて応える=昭和57年、衆院本会議場


首脳会談が終わって会見に臨むレーガン米大統領(左)と中曽根康弘元首相=昭和58年11月10日、東京・首相官邸



ロナルド・レーガン米大統領(右)とナンシー夫人(中央)を迎えた中曽根康弘首相(左)=昭和58年11月11日、東京・西多摩の日の出山荘



レーガン米大統領をもてなす中曽根康弘元首相=昭和58年11月11日



日米首脳会談を行ったレーガン米大統領と中曽根康弘首相=昭和58年11月11日、東京・日の出山荘



昭和61年5月、議長を務めた東京サミットでフランスのミッテラン大統領(手前左)と会話する中曽根康弘首相(同右)=東京・元赤坂の迎賓館



昭和61年5月、東京サミットで記念撮影後に各国首脳と話す中曽根康弘首相(中央)=東京・元赤坂の迎賓館


衆院本会議 次回選挙も出馬予定の長老組、中曽根康弘元首相(左、85歳)と宮沢喜一元首相(中央、84歳)=平成15年10月10日



訪英中の中曽根康弘元首相とサッチャー元英首相(右)=2000年7月



インタビューに応じる中曽根康弘元首相=平成15年2月2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