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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情勢分析】台湾総統選で劣勢の韓国瑜氏、香港デモと対中姿勢が足かせ 본문
【国際情勢分析】台湾総統選で劣勢の韓国瑜氏、香港デモと対中姿勢が足かせ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24. 18:25中国国民党の韓国瑜氏。支持率が低迷している=8月21日、台北(A
台湾の野党、中国国民党の総統候補、韓国瑜高雄市長(62)が存在感の低迷に苦しんでいる。香港情勢の悪化を受けて中国への対抗姿勢を鮮明にする与党、民主進歩党の蔡英文総統(63)に支持率で引き離され、逆転の方策が見えない。国民党も一枚岩と言えず足元に不安を抱える。昨年11月の市長選で初当選した勢いで総統選に挑んだものの、ここに来て準備不足の影響が出始めている。
■二匹目のドジョウは
「台湾人に必要なのは安心感であって、亡国感ではない」
韓氏は「中華民国」の建国につながった辛亥革命を祝う10月10日、高雄市で対中政策を発表する記者会見を開き、蔡氏の対中姿勢を批判した。蔡氏は建国記念日に当たるこの日、総統府前で開いた記念式典で演説し、「一国二制度の拒絶は台湾人民の最大の共通認識だ」と反中姿勢を強調していた。
韓氏は一国二制度は自分も「絶対に反対だ」と主張。その一方で、蔡政権の3年間で、中台間の「相互信頼が失われた」とし、国交のある国が22カ国から15カ国まで減少したことで「史上最も孤立した苦境に陥っている」と批判した。現在の苦境は蔡政権の失政の結果であり、「亡国感(国が滅ぶという危機感)をあおって票を取る」のは本末転倒だという論理だ。その上で、自身が総統に当選すれば、中台当局間での対話の再開や経済貿易交流、農林水産品の中国向け販売などを目指すと訴えた。
ただ、中台関係の前提となるのは、「一つの中国」を認めた上で「中国」が「中華人民共和国」を指すのか台湾当局が主張する「中華民国」を指すのかは、双方が各自で解釈するとした「1992年コンセンサス(合意)」だとも述べた。
92年合意は、2000年に民進党が政権を取る直前、国民党政権で対中政策を担当していた人物が、「92年に『一つの中国』について中台で合意していた」と言い出したもの。この場合、「一つの中国」は「中国と台湾は不可分」であり「台湾独立に反対する」という含意がある。独立志向の強い民進党の陳水扁政権を牽制する意味合いがあった。民進党は現在も「一つの中国」も92年合意も認めていない。
一方、2000年に野党に転落した国民党は05年、中国共産党との党首会談で「92年合意に基づき両岸の対話を回復させる」ことで合意。これは、08年に国民党の馬英九氏が政権を奪還した後、中国から多くの対台湾優遇措置を引き出す基礎となった。
ただ、中国側は「各自で解釈する」の部分を認めたことはなく、近年は「一つの中国」部分を強調して解釈の幅を狭めている。中国の習近平国家主席が台湾統一姿勢を強める中、韓氏がいくら92年合意を唱えても、かつてのように中国からの優遇措置などを引き出せる「二匹目のドジョウ」がいるかは疑わしいのが現状だ。満を持して打ち出した対中政策は、新味に欠けるだけでなく実現性にも疑問符が付く。
■国際情勢は蔡氏に有利
大手テレビ局TVBSの世論調査によると、7月中旬時点での支持率は韓氏の48%に対し蔡氏が44%だったが、8月中旬以降は逆転し、9月末には蔡氏50%に対して韓氏38%まで差が開いている。
香港情勢の悪化が、対中強硬姿勢を強める蔡氏の支持を押し上げているとの見方が一般的だ。米中対立の様相が強まる中、トランプ米政権が台湾への関与を強めていることも現職の蔡氏に有利に働いている。
これに対し、韓氏はこれまで内政や経済への不満をあおり、国民党の支持者が持つ「中華民国への愛国心」に訴える手法で、コアな党支持層を固めてきたものの、中間層への広がりを欠いている。また、党内では、予備選で争った朱立倫元主席と距離があり、大票田の北部・新北市で朱氏の後継指名を受けて当選した新市長は韓氏の選挙応援に消極的だ。国民党から分裂してできた親民党も、総統選への候補者擁立を検討しており、広い意味での自陣営分裂の不安も抱える。
■日本側ともギクシャク
投票日まで100日を切っているにも関わらず、選挙戦の主軸となる主張も定まっていない。政策は、馬前政権の閣僚経験者や研究者で8月中旬に立ち上げた「国政顧問団」に丸投げしているのが実態で、準備不足感は否定できない。
党内では非主流派の韓氏の元に集まったスタッフの中には新顔も多く、経験不足も目につく。韓氏は7月下旬、日本の対台湾窓口機関、日本台湾交流協会の大橋光夫会長と面会した後、「要請に応じて秋に訪日する」と発表した。日本側が野党の総統候補に訪日を要請することは考えにくい。「言葉のやりとりの誤解」(関係者)との好意的な解釈もあったが、日本側との“摩擦”は続き、8月下旬には自民党青年局一行との面会に25分間遅刻。9月上旬には、日本人研究者一行と面会した際に今度は逆に「(一行が)遅刻したが、自分は気にしていない」と報道陣に語った。だが、実態は面会場所の変更が韓氏側の連絡ミスで伝わっていなかったためで、研究者らは不快感を表明し大きく報じられた。
韓氏の支持率低迷の原因は、「市長投げ出し」批判を恐れて「平日は市長職、選挙運動は週末だけ」と活動を制限してきたことも影響しているようだ。韓氏は今月15日、市長職の「休職」を申請し、選挙運動に本格的に乗り出すことを決めた。陣営側は「11月中旬に支持率を逆転させる」と追い上げを企図しているが、先行きは見通せない。
(台北支局 田中靖人)
[대만 총통 선거에서 열세, 국민당 총통 후보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홍콩 시위와 대중(対中) 자세가 걸림돌
대만 야당, 국민당 총통 후보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이 존재감의 침체로 시달리고 있다. 홍콩 정세의 악화를 받고 중국에 대항 자세를 선명하게 하는 여당,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에 지지율로 뒤져 역전의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당도 한 장 바위(한결같음) 라고 말 할 수 없어 발밑에 불안을 안고 있다.
지난해 11월 시장 선거에서 첫 당선한 기세로 총통 선거에 도전했지만, 여기 와서 준비 부족의 영향이 나오고 있다.
두 마리의 미꾸라지는
"대만인에 필요한 것은 안정감이며 망국감이 아니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은 "중화민국"의 건국을 주도 신해혁명을 기념 10월 10일 가오슝에서 대중국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총통(63)의 대중국 태도를 비판했다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은 건국 기념일 해당 이날 총통부 앞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일국양제의 거절은 대만인민의 최대의 공통 인식"이라고 반중 자세를 강조했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은 일국양제는 자신도 "절대 반대"라고 주장했다. 한편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 정부의 3년간 양안의 '상호 신뢰를 잃게 됐다 "며 국교가 있는 나라가 22개국에서 15개국까지 감소한 것으로 “사상최고 고립된 처지에 빠져 있다 "고 비판했다. 현재의 곤경은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 정부의 실정의 결과이며, "망국감(나라가 멸망한다는 위기감)을 부추겨 표를 가지고 가려는”는 본말전도(本末転倒, 근본적인 사항과 사소한 사항을 잘못 아는 것)라는 논리이다. 게다가 자신이 총통에 당선되면 양안 당국간 대화 재개와 경제무역 교류, 농림 수산품의 중국유통 등을 목표로 한다고 호소했다.
단, 양안 관계의 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면서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것인가 대만 당국이 주장하는 '중화민국'을 가리키는 것인가는 쌍방이 각자 해석한 “1992년 컨센서스(consensus, 합의) "이라고도 말했다.
1992년 합의는 2000년 민진당이 정권을 획듣하기 직전 국민당 정권의 대중국 정책을 담당했던 인물이 "92년 ‘하나의 중국’에 대한 양안에 합의 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것. 이 경우 "하나의 중국"은 "중국과 대만은 불가분"이며 "대만 독립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다. 독립지향이 강한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정권을 견제하는 의미가 있었다. 민진당은 현재도 '하나의 중국'도 92년 합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2000년에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당은 2005년 중국 공산당과의 영수회담에서 "92년 합의에 따라 양안의 대화를 회복시키는데“ 합의 했다. 이것은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이 정권을 탈환한 뒤 중국으로부터 많은 대만 특혜(인센티브)를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측은 "각자 해석하기"부분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 최근에는 '하나의 중국'부분을 강조하고 해석의 폭을 좁히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 통일 자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가 아무리 92년 합의를 제기해도 예전처럼 중국에서의 우대 조치 등을 꺼낼 "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이 현상이다. 만반의 준비를 내놓은 대중국 정책은 새로운 맛이 부족뿐만 아니라 실현 가능성에 물음표가 붙는다.
국제 정세는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에께 유리
주요 방송사 TVBS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7월 중순 시점에서의 지지율은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의 48%에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의 44%였으나, 8월 중순 이후에는 역전 해 9월말에는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의 50%로 올라갔고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의 38%로 두 후보간의12% 격차가 되었다.
홍콩 정세의 악화가 대중 강경자세를 강화로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의 지지를 끌어 올리고 있다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미중갈등 양상이 강해지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대만의 관계 개선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현직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총통(63)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에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은 지금까지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정부의 국내외 실정과 경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여 국민당 지지자 중심으로 '중화민국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수법으로, 핵심 당 지지층을 다져왔지만, 중산층에 확산이 부족하다. 또한 당내 예비 선거에서 싸운 주리룬(朱立倫) 대만 국민당 전 주석과 거리(소원한 관계)로 큰 텃밭의 북부 ,신베이시 (新北市)에서 주리룬(朱立倫) 대만 국민당 전 주석의 후계 지명을 받아 당선 된 새로운 시장은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의 선거 응원에 소극적이다. 국민당의 분열 생긴 친민당도 총통 선거에 후보 옹립을 검토하고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 진영 분열의 불안도 안고 있다.
일본측과도 삐걱
투표일이 100일을 접어들고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경선의 주축인 주장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전(前) 정권의 각료 경험자나 연구자로 8월 중순에 출범한 국정고문도 팽겨친(던져 버린) 실태여서 준비 부족감을 부인할 수 없다.
당내에서는 비주류의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의 곁으로 모인 직원 중에는 신입이 많은 경험 부족도 눈에 띈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은 7월 하순 일본의 대(對) 대만 창구기관 일본, 대만 교류협회 오하시 미쓰오 회장과 면담한 후 "요청에 따라 가을에 일본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측이 야당의 총통 후보로 방일을 요청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말의 교환 오해"(관계자) 고 긍정적인 해석도 있었지만 일본측과의 "마찰"는 이어 8월 하순에는 자민당 청년국 일행 접견에 25분 지각. 9월 상순에는 일본인연구자 일행을 접견했을 때 이번에는 반대로 "(일행이) 지각했지만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면회 위치 변경이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측의 연락 실수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연구진은 불쾌감을 표명 크게 보도 되었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의 지지율 침체의 원인은 "시장을 내던져" 비판을 두려워 "평일은 시장직을 수행하고 선거운동은 주말 뿐"이라고 활동을 제한 해 온 것도 영향을 주고있는 것 같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은 지난 15일 시장직의 '휴직'을 신청하고 선거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62)측은 "11월 중순에 지지율을 역전시킬 것"이라고 추격을 도모하고 있지만,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양안관계 개선과 하나의 중국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중국 국민당은 시진핑정부의 국가주석 임기제한 철폐(국가주석 연임제 도입)와 중국 공산당의 령도 조항 추가 등 헌법개정 이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등소평은 권력이 집중한 모택동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함으로 중국 모든 기관이나 단체의 장 임기를 사실상 3선 금지를 했다(국가기관 수장의 임기를 제한했다) 그리고 부패를 차단하고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초자치단체는 보통선거, 주민의 직접선거를 도입했다]
중국 국민당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를 표방하는 우파정당입니다[민주국가를 표방하는 정당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중국 국민당이 통일 중국에서 우파정당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민주국가 입장에서 중국 주민(인민)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정책으로 중국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人民共和國).
同一介中華(中國).
中華民國(中國), 中華人民共和國(中國)"[中國 建國者 孫中山 先生]
*중도 진보성향 민진당 후보 차이잉원[Tsai Ing wen, 蔡英文]
출생:1956년 8월 31일(61세). 대만
소속:대만 총통
직업:정치인, 전직 대학교수
성별:여성
학력
~ 1984 런던 정경대학 법학 박사
~ 1980 코넬 대학교 법학 석사
~ 1978 대만 국립대학교 법학과
경력
2016.5 대만 총통
- 대만 민진진보당 주석
- 행정원 부원장
-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교수
타이완 독립파 노선(타이완 공화국)
*중도 보수성향 국민당 후보 한궈위[Han Kuo-yu, 韓國瑜]
출생:1957년 6월 17일 (62세) . 대만
소속: 가오슝(高雄) 시장
직업 정치인, 직업군인 , 시장
성별:남성
학력: 중화민국 육군사관학교 (40기 / 졸업)
동오대학교 (영문학 / B.A.[2])
국립정치대학 (법학 / M.L.)
경력: 타이베이현 지방의회 의원(1990~1993)
중화민국 입법위원(1993~2002)
타이베이농산물도매공사 총경리(2012~2017)
중화민국 가오슝시장(2018~)
군사경력[군복무]: 중화민국 육군 소령 전역
종교: 불교
배우자: 리자펀(李佳芬)
자녀: 한빙(韓冰), 한칭(韓靑), 한톈(韓天)
타이완 독립 반대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연합정부론 노선(손중산 건국자 입장에서 중화민국)
노동계급 공산당 령도 사회주의 국가 반대 그리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공존(조화)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민주정부) 입장에서 하나의 중국 통일정책..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중화민국 헌법[민영자본체제]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국영자본체제]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중화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제도이다. 중국공산당의 령도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어떤 조직 또는 개인이든지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지 못한다.
-1991년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보수와 진보 성향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날짜:
1989년 6월 4일 - 1991년 12월 26일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와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중국 민족과 종교 현황 (한족과 소수민족)
1.중국 민족 개황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이 있다.
중국 민족에는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위글족, 묘족, 이족, 쫭족, 부이족, 조선족, 만족, 뚱족, 요족, 바이족, 투쟈족, 하니족, 까자흐족, 따이족, 리족, 리수족, 와족, 써족, 고산족, 라후족, 수이족, 둥샹족, 나시족, 징퍼족, 끼르끼즈족, 투족, 다고르족, 머로족, 챵족, 부랑족, 쌀라족, 모난족, 거로족, 시버족, 아창족, 프미족, 따쥐크족, 누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어윈커족, 더앙족, 보안족, 위구족, 징족, 따따르족, 두룽족, 오로죤족, 허저족, 먼바족, 뤄바족, 지노족이 망라된다. 이밖에 중국에는 아직 민족이 식별되지 않은 적은 인구가 있다.
중국에는 한족이 총인구에서 92%를 차지하며 소수민족 인구가 8% 정도 차지한다. 한족 외의 55개 민족은 상대적으로 한족보다 적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부른다. 소수민족은 주요하게 중국 서북, 서남, 동북 등 지역에 분포되어있다.
기나긴 역사 발전에서 중국 각 민족은 점차 한족을 주체로 한 대잡거, 소짐거의 국면을 형성했다.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회족, 만족이 한어를 통용하는 외 기타 각 민족은 자기 민족어거나 한어를 쓴다. 다년간 56개 민족은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위에서 함께 노동하고 생활하면서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
(1)인구가 500만명 이상인 민족
한족
한족은 중국 56개 민족가운데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며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기도 하다. 오늘 날 한족인구는 12억정도에 이른다. 한족은 원래 “화하(華夏)”의 중원 주민으로서 지금까지 5천년의 문명사를 갖고 있다. 그후 기타 민족과 점차 동화, 융합되었다. 한나라(漢朝)때무터 한족이라고 불렀다. 한족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갖고 있다. 한어는 한장(漢藏)어계에 속하며 북방말, 오어(吳語), 상어(湘語), 감어(赣語), 학카어(客家)語, 민(福建)남(闽南)어, 민북(闽北)어, 광동어(奧語) 등 8대 방언으로 나뉘며 공동어는 보통말이다. 한자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문자의 하나로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이 차츰 변화되어 오늘 날의 네모꼴 글자로 되였으며 도합 8만자 이상이다. 통용되는 글자는 7천자 좌우 된다. 한어는 지금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문자의 하나이다. 한족의 기본음식 구조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고 각종 동물과 야채를 부식물로 한다. 장기간의 발전과정에 한족은 하루 세끼의 식사습관을 형성했다. 쌀음식과 가루음식은 한족 주식의 두가지 큰 품목이다. 이밖에 기타 곡물, 예하면 옥수수, 수수, 곡물류, 감자류 등도 잡곡도 부동한 지역에서 주식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여러 측면의 영향을 받아 한족은 음식 습속에서 부동한 유형의 요리 습관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늘 한족과 기타 해당 민족의 음식 맛을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며, 동쪽은 맵고 서쪽은 시쿨다”는 말로 개괄한다. 지금 여러 지역에서 민간 입맛의 기초위에 이미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호남요리, 사천요리, 동북요리, 광동요리 등 8개 요리체계를 이루었다. 술과 차는 한족의 주요한 두가지 음료이다. 중국은 차의 고향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술빚는 기술을 제일 먼저 발명한 나라의 하나이다. 술문화와 차문화는 중국에서 역사가 오래다. 술과 차 이 두가지 주요한 음료외 일부 과일제품도 부동한 지역가 부동한 계절에 즐겨 마시는 음료로 되고있다. 한족은 명절이 아주 많다. 음력설은 제일 전통적인 명절이다. 이밖에 중대한 명절에는 또 음력으로 정월 보름날의 원소(元宵)절, 양력 4월 5일의 청명절, 음력 5월 초 닷새의 단오절, 음력 8월 보름날의 중추절 등이 있다.
쫭족(壮族)
쫭족은 중국 소수민족가운데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으로서 주요하게 중국 남방의 광서쫭족(廣西壮族)자치구에 집거하고있다. 쫭족은 쫭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쫭족은 중국 남방의 토착민족으로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수만년전에 쫭족의 선민들은 바로 중국 남방에서 생활하였다. 1958년, 광서쫭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쫭족은 주요하게 농업생산에 종사하며 벼와 옥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쫭족은 노래를 부르기를 즐기며, 좡족마을은 “노래의 바다”로 불리운다. 아름다운 쫭족비단은 쫭족인민들의 전통적인 수공예품이다. 쫭족사람들은 거개 자연과 여러 신의 원시종교를 숭배한다. 당나라, 송나라후 불교, 도교가 선후로 쫭족지역에 전해졌다. 근대에 기독교, 천주교도 쫭족지역에 전해졌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다.
만족(满族)
만족은 전국 각지에 분포되여있으며 그 가운데서 동북부의 요녕(遙寧)성에 제일 많다. 만족은 만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한족과 혼거하고 내왕이 밀접하기 때문에 지금 만족은 모두 한어를 사용하는데 습관되어있다. 다만 일부 편벽한 집거마을에서 아직도 일부 노인들만이 만족어를 할줄안다. 만족은 여러 신의 싸만교를 신앙했었다. 만족은 역사가 유구한 민족으로서 그 선민은 2천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들은 줄곧 중국 동북의 장백산 북쪽, 흑룡강 중하류, 우쑤리강 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생활하였다. 기원 12세기 당시 “여진”이라고 부른 만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1583년, 누르하치가 여진 각 부를 통일하고 8기 제도를 세웠으며 만족문자를 창립하고 1635년 민족을 “만주족”이라고 했다. 1636년, 누르하치는 황제로 되였으며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다. 1644년, 청군이 관내에 들어갔다. 청나라는 중국에서 통일된 중앙집권을 한 제일 마지막 봉건왕조로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후 정식으로 “만족”이라는 칭호가 있게 되었다. 만족은 중국의 통일, 강역의 개척, 경제문화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회족(回族)
회족은 인구가 980여만으로서 주요하게 중국 서북부의 녕하(寧夏 )회족자치구에 집거하고 있다. 중국 기타 지방에도 회족들이 많이 집거, 산재하고 있다. 회족은 전국 각지에 널려 있으며 중국에서 분포가 제일 넓은 소수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회족은 한족과 장기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때문에 거개 한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타 민족과 함께 생활하고있는 회족들 역시 그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부 회족인은 아랍어와 페르샤어에 능숙하다. 회족의 내원은 기원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랍과 페르샤 상인들은 중국에 와서 장사하고 중국 동남연해의 광주(廣州), 천주(泉州) 등 곳에 머물어 생활하였다. 수백년동안의 발전을 거쳐 점차 회족의 일부로 되었다. 이밖에 13세기 초반, 전쟁때문에 부득불 중국 서북부에 대량으로 이주한 중아시아인, 페르샤인, 아랍인들이 통혼, 종교신안 등 형식으로 부단히 한족, 위글족, 몽골족과 융합하여 차츰 회족을 형성했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신앙하며 도시, 향과 진 지어 마을에 모두 청진사가 있으며 청진사를 둘러싼 주거의 특점을 형성했다. 그들은 특수한 음식습관을 갖고있는데, 사람들은 늘 “회민(回民)”, “청진”이라는 간판을 건 식당, 식품점을 볼수 있다. 이런 식당과 식품점은 전문 회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회족의 경제문화수준은 비교적 높으며 중국의 역사발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묘족(苗族)
묘족은 인구가 약 894만으로서 주요하게 귀주(貴州), 운남(雲南), 사천(四川), 광서, 호남(湖南), 호북(湖北), 광동(廣東) 등 곳에 집거하고있다. 묘족은 묘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지난날 묘족은 통일된 문자가 없었다. 1956년, 묘족은 4가지 방언의 라틴병음문자를 창제하거나 개혁하여 통일된 묘족문자를 형성했다. 묘족은 중국에서 역사가 오랜 민족의 하나이며 4천여년전의 역사서적에 벌써 기재가 있다. 옛 역사서적에 전한데 의하면 황제, 염제와 합하거나 싸운 치우가 바로 묘족사람들이 신봉하는 선조이다. 전쟁과 기근, 질병 그리고 인구의 번성, 농경지의 황폐화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묘족은 부단히 이주하였다. 이로하여 묘족은 분포가 광범하고 방언, 옷장식, 머리장식, 습관에서 아주 큰 차이를 이루었다. 각 지방에 분포된 묘족은 많은 자칭 이름이 있는데 일례로 옷장식에서 긴 치마, 짧은 치마, 장각묘(長角苗), 홍묘(紅苗), 흑묘(黑苗) 등 이름이 서로 다르다. 묘족은 거의 모두 만물이 영험하다고 하는 원시종교를 믿는다. 묘족은 벼와 옥수수 재배를 위주로 하며 겸하여 기름오동, 유채 등 경제작물과 삼칠, 천마 등 귀중한 약재를 재배한다.
이족(彝族)
이족은 인구가 770만으로서 주요하게 운남, 사천, 귀주, 광서 이 네개 성과 자치구에 분포되어있다. 이족은 이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한족과 거주, 연계가 비교적 많은 이족사람들은 한어에 능숙하다. 이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죠적 많고 분포가 비교적 넓으며 역사가 유구한 소수민족이다. 2000여년전 북쪽에서 남하한 저족, 챵족이 남방 토착 부락과 부단히 융합되어 새로운 민족인 이족을 형성했다. 역사상 이족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장기적으로 노예점유 제도를 유지한 것이다. 1949년, 공화국이 창립된 후 민주개혁을 진행하여서야 이족사회에 남아있던 노예제도가 점차 없어졌다. 이족들속에서 지난 날 여러 신의 숭배가 유행되였으며 청나라 초반에는 도교가 성행하였다. 19세기 말, 천주교, 기독교가 전해졌으나 신자는 아주 적다.
몽골족(蒙古族)
몽골족 인구는 580여만으로서 주요하게 내몽골(內蒙古)자치구와 신강(新疆), 청해(靑海), 감숙(甘肅),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 요녕(遙寧) 등 성과 지역의 몽골족자치주, 현에 집거하고 있다. 몽골족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몽골의 칭호는 제일 오랜 것은 당나라때이다. 그때 몽골은 몽골 많은 부락에 있는 한 부락의 명칭이였다. 이 부락의 발상지는 어르구나강 동쪽기슭 일대인데 그후 점차 서쪽으로 이동되었다. 각 부락들은 서로 인구와 가축, 재부를 약탈하였으며 그칠새 없는 부락전쟁을 형성했다. 1206년, 테무진(鐵木眞)이 몽골 대칸으로 추대되였으며 칭키스칸으로 호칭하고 몽골국을 세웠다. 이로써 중국 북방에 처음으로 강대하고 안정하며 부단히 발전하는 민족인 몽골족이 나타났다. 그후 칭키스칸은 몽골족 각 부락을 통일하고 중국을 통일했으며 원나라를 세웠다. 몽골족은 거개 라마교를 신앙한다. 몽골족은 중국의 정치, 군사, 경제, 과학기술, 천문력, 문화예술, 의학 등 여러 측면에서 모두 중대한 기여를 했다.
(2)인구가 10만명 이상인 민족
중국에서 인구가 10만 이하인 소수민족은 도합 20개로서 각기 부랑족, 따지크족, 아창족, 푸미족, 어윈커족, 누족, 징퍼족, 징족, 지노족,더앙족, 보안족, 러시아족, 위구족, 우즈베크족, 먼바족, 오로죤족, 두룽족, 따따르족, 허저족, 고산족, 로바족이다.
로바족(珞巴族)
로바족은 인구가 3천명으로서 중국에서 인구가 제일 적은 소수민족이다. 로바족은 주요하게 티베트자치구 동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머퉈(墨脫)현 북부에 거주한 로바족은 티베트어를 사용하며 기타 로바족은 모두 로바어를 사용한다. 로바어는 한장어게에 속한다. 부동한 지역의 로바족은 서로 다른 방언을 갖고 있다. 로바라는 단어는 티베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뜻인즉 “남방사람”이라는 뜻이며 티베트족이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였다. 1949년, 공화국이 창립된 후 로바족은 민족평등의 권리를 향수했으며 나라와 각 민족의 지원으로 현대화한 생산의 길에 들어섰으며 경제문화가 신속히 발전하였다. 로바족은 만물이 영험하다는 원시종교를 신앙한다.
두룽족(獨龍族)
두룽족은 인구가 7400명으로서 운남성 공산(貢山) 두룽족-누족자치현 두룽강유역의 강골짜기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두룽족은 두룽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원래 본 민족 문자가 없다. 두룽족은 만물이 영험하다는 것을 신앙하며 자연물을 숭배한다. 두룽족의 족칭은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 여강로(麗江路) 풍속 조항에서 볼수 있는데 “교(撬)”라고 칭한다. 명청시기 “구(俅)”, 혹은 “곡(曲)”이라고 칭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자기 민족의 소원에 따라 자칭 “두룽”이라는 칭호를 채납하였다. 지난 날 두룽족의 사회생산력 발전은 아주 낮았으며 원시적인 목제거나 죽제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고 화전경작하는 농업생산에 종사했으며 채집과 어렵은 없어서는 안될 생산 보충이였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두룽족은 이 낙후한 모습을 철저히 개변하였다. 두룽족은 부지런하고 손님을 즐기며 친구를 중하게 여긴다. 늘 한 집에 일이 있으면 온 마을이 도와준다. 수렵한 야생동물은 수렵자들이기만 하면 모두 배당된다. 그들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약속을 존중하며 소박한 도덕관념이 있다. “밤이 되어도 문을 닫지 않고 길에서 떨군 물건을 줏지 않는것”은 두룽족의 전통적인 미덕이다.
지노족(基诺族)
지노족은 인구가 2만여명이며 주요하게 중국 서남부 운남성 시쐉판나(西雙版納)주의 한 큰 산에 집거해있다. 지노어를 사용한다.이는 한장어계에 속하며 본 민족 문자가 없다. 지노족은 지난날 만물이 영험하다는 것을 신앙했으며 선조 숭배가 성행했다. 지노는 이 민족의 자칭이다. 지노족의 내원에 문자기재가 없다. 지노족은 제갈량을 숭배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지노족은 제갈량이 남쪽을 징벌하던 부대의 일부분으로서 보이(普洱), 묵강(墨江) 지어 보다 먼 북방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공화국이 창립된후 지노족은 직접 원시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에로 진입했으며 화전경작, 죽각기재, 물물교환,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병을 치료하던 등 낙후한 모습을 철저히 개변하였다. 지금 지노족의 간부, 의사, 상인, 농업과학기술인원들은 모두 성장하였다.
오로죤족(鄂倫春族)
오로죤족은 인구가 8천여명으로서 내몽골자치구와 흑룡강성이 인접된 대소흥안령에서 살고있다. 내몽골자치구 후른베르맹에는 오로죤족자치기가 설치되어 있다. 오로죤족은 오로죤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본 민족 문자가 없으며 한문을 통용한다. “오로죤”은 민족 자칭으로, “산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청나라 초의 사료에 기재되어있다. 오로죤족은 장기간 수렵생활을 위주로 채집과 어획을 보조수단으로 한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모두 우수한 기마수와 백발백중의 사수이다. 그들은 여러 들짐승의 습성과 생활규률을 손금보듯 하며 풍부한 수렵경험을 갖고있다. 20세기 40년대 그들은 여전히 원시공사 잔여를 갖고있는 유렵민족이였다. 수렵물은 부족 내에서 평균 분배했으며 원시사회의 공동소비와 평균분배의 일부 습관을 보존하고있었다. 노인, 약자, 부상자, 장애자는 남보다 더 배당을 받을 수 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오로죤족은 단번에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다. 지금 그들은 이미 정착생활을 실현하고 수렵과 고별하였으며 삼림과 야생동물의 보호자로 되었다. 오로죤족은 손재주가 좋아 봇나무껍질로 정교한 수공예품인 옷, 신, 함, 통, 상자 등을 만들어낼수 있다. 지어 가볍고 교묘한 벗나무껍질로 배를 만들수 있다. 이런 물품에는 아름다운 도안이 있는는 가볍고 오래 견디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오로죤족 사람들은 싸만교를 보편적으로 신앙하며 자연물을 숭배하고 만물에 영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선조에 대한 숭배가 성행한다.
따따르족(塔塔爾族)
따따르족 인구는 5천명으로서 신강위글자치구에 산거했으며 비교적 집중된 곳으로는 이녕(伊寧), 탑성(塔城), 우룸치(烏魯木齊) 등 도시가 있다. 따따르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계에 속한다. 일부 노인들이 따따르어를 사용하는 외 일반적으로 모두 현지의 까자흐어거나 위글어를 사용한다. 따따르족은 아랍 자모를 기초로 한 문자가 있다. 까자흐족, 위글족이 잡거하여 있고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의 문자는 따따르족의 통용문자로 되고있다. 따따르족은 거개 이슬람교를 신앙한다. 따따르족의 선민은 중국 북방의 돌궐칸 나라의 한 부락은 “따따르”에서 왔으며 제일 일찍 당나라에서 나타났다. 기원 13세기 몽골족이 서정할때 서방사람들은 몽골인을 따따르라고 불렀다. 기원 19세기초부터 적지 않은 따따르는 러시아로부터 중국 신강에 이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또 일부 따따르가 이주하여 중국의 따따르족이 되였다. 마을에 거주하는 따따르는 주요하게 목축업에 종사한다. 따따르인들가운데서 인텔리 특히 교육사업인원들은 거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신강의 교육사업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
(3)중국정부의 민족 정책
중국은 통일된 다 민족국가이다. 중국정부는 각 민족 평등과 단결, 호조의 민족정책을 집행하며 소수민족 신앙자유의 권리와 풍속습관을 존중하고 보호한다.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중국의 중요한 정치제도이다. 이것은 국가의 통일영도하에 각 소수민족 집거지가 구역자치를 실행하며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나라에서는 민족자치지방에서 현지 실제상황에 근거하여 나라의 법률과 정책을 관철, 집행하며 소수민족의 각급 간부와 각종 전문인재, 기술노동자를 대량 양성하도록 보장한다. 그리고 민족자치지방의 각족 인민들이 전국인민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역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며 민족자치지방의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단결, 번영한 민족자치지방을 건설하도록 보장한다.
수십년동안의 실천속에서 중국의 집권당인 중국공산당은 민족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기본관점과 정책을 형성했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산생, 발전, 소실은 아주 긴 역사과정이며 민족문제는 장기적으로 존재한다.
사회주의단계는 각 민족이 공동으로 번영하고 흥성하는 시기로서, 각 민족사이의 공동 요소는 부단이 늘어난다. 그러나 민족특점과 민족 차이는 계속 존재한다.
민족문제는 사회문제의 일부분이며 민족문제는 오직 전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점차 해결해야 한다. 중국 현 단계의 민족문제는 다만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공동위업에서 점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각 민족은 인구의 다소, 역사의 길고 짧음, 발전전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두 조국의 문명에 기여했으며 모두 일률로 평등해야 한다. 응당 각 민족 인민의 대단결을 강화하고 나라의 통일을 수호해야 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의 근본 과업이며 또한 중국 현 단계 민족사업의 근본 과업이다. 각 민족은 서로 돕고 공동으로 진보와 번영을 실현해야 한다.
민족구역자치는 맑스주의 민족이론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중대한 기여이며 중국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제도이다.
도덕과 재능이 겸비한 웅대한 소수민족 간부대오를 건설하는 것은 민족사업을 잘 하고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다.
민족문제와 종교문제는 일부 지방에서 흔히 한데 겹친다. 민족문제를 처리할 때 또한 나라의 종교정책을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낙실하는데 주의를 돌려야 한다.
이밖에 중국정부는 소무민족지역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항 사업의 진보를 촉진하고 종교를 신앙하는 군중을 포함한 광범한 소수민족 군중들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소수민족의 종교신앙을 존중하고 소수민족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특별히 주의를 돌리고있다. 종교문화를 포함한 각 민족의 문화유산과 민간예술에 대해 보편조사, 수집, 정리, 연구, 출판을 진행했다. 나라에서는 또한 대량의 자금을 투입하여 소수민족지역에서 중요한 역사, 문화가치가 있는 사찰과 종교시설을 보수했다.
(4)소수민족 간부선발과 육성
중국정부는 소수민족간부에 대한 육성을 아주 중시한다. 소수민족간부의 수량은 비교적 큰 성장을 가져왔으며 많은 소수민족간부들이 현급 이상의 각급 지도자로 선발되였다. 현재 중국 5개 자치구의 주석, 30개 자치주의 주장, 119개 자치현, 기의 현장과 기장은 모두 민족간부들이 담임하고있다.
각족 인민들은 나라의 정치사회 사무 관리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 기구에서 56개 민족은 모두 자기의 대표와 위원을 갖고 있는데, 그 비중은 10% 이상을 차지한다.
2.중국 민족 경제와 사회
(1)중국의 민족경제
중국경제가 부단히 발전함에 따라 민족지역 경제도 부단히 발전하고 있다.
목축업은 중국 소수민족 지역의 주요한 산업이다. 20세기 80년대 이후 중국은 풀, 가축의 이중도거리 책임제를 실시하고 가축의 값을 매겨 세대에 귀속시켰으며 풀밭 사용권을 세대에 낙실하고 초원건설과 관리, 보호제도를 강화하였다. 현재 중국의 목장 소재지인 청해(靑海), 감숙(甘肅), 사천(四川), 신강(新彊), 녕하(寧下), 내몽골(內蒙古) 등 성과 자치구에서 목축업은 이미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 축목구와 반농업, 반축목구의 연도별 가축 숫자는 이미 1억마리에 달했다. 가축의 연령별 비례가 높아지고 활착률과 상품률이 모두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그밖에 지금 일부 목축지에는 또 가정 경영을 기초로 한 가정 목장이 나타났다. 규모화 경영과 전업화 생산이 진행되였기 때문에 가정목장의 생산능력과 효익은 모두 크게 높아졌다.
민족지역의 도시는 대량의 경제자원과 비농업의 사회경제활동이 집중된 곳으로서 민족지역경제발전의 중추로 되고 있다. 중국 기타 지역의 경제발전과 함께 20세기 80년대 이후 소수민족지역의 도시경제가 재빨리 발전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민족 자치지방의 공업기업수는 이미 백만개에 달하였다. 이런 지방에서 기본상 대형 현대화 기업, 개체기업, 상업, 봉사업 등 다종경제형식이 병존하는 기업체제가 이루어졌다. 내몽골,청해,녕하, 신강 등 지역의 도시화 수준은 이미 중국 도시들의 평균수준보다 높으며 민족지역의 전반적인 경제발전에 매우 강한 방사성 역할을 하고 있다.
비공유제경제는 이미 민족지역 도시경제발전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대상으로 되고있다. 일례로 지난 세기 말, 청해성의 국민생산총액에서 비국유경제의 비중은 40%이상에 달했다.
이밖에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족지역의 일부 도시들은 국제 경제기술 교류와 협력을 점차 확대하였으며 대외개방역시 점차 확대되고 있다. 현재 민족지역은 국내외에서 모두 일정한 지명도를 가진 많은 대기업그룹을 이루었다. 일례로 내몽골자치구의 얼둬스양털제품 주식유한회사, 신강위글자치구 천업그룹주식유한회사 등이다.
(2)중국의 민족과학기술
소수민족지역의 과학기술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일련의 특수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런 정책에는 소수민족 과학기술인원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양성하며 보통대학에서 계획적으로 소수민족 학생을 모집하거나 민족반을 꾸리며 민족대학에서 부족한 학과를 증설하고 전문기술인재에 대한 양성을 강화하는 등이 들어있다. 이와 함께 효과적인 조치와 방법을 취하여 현유의 소수민족 과학기술인원의 수준을 제고하며 소수민족과 민족지역을 도와 인재와 선진기술 설비를 인입하고 재래산업과 재래제품을 개조하였다. 또한 농촌 목축지에 과학기술보급 시스템을 구축하고 건전히 하였으며 실용 과학기술의 보급, 양성, 시범 등을 강화하고 근무조건, 생활대우 등 측면에서 우혜정책을 제정하고 민족지역에서 업적을 쌓도록 과학기술인원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전문가를 초빙하여 겸직하게 하며 과학기술인원을 조직하여 강의, 단기근무, 기술개발 협력, 인원양성을 돕게하는 등 민족지역에 대한 발전한 지역의 과학기술사업지원을 강화하였다. 지금 각 민족지역에서 국민경제와 국민생활, 민족특점 수요와 관련이 있는 과학연구 기구가 연이어 성립되였으며 이로써 종류가 비교적 구전하고 학과가 비교적 다양한 과학연구 체계와 전업기술대오가 형성되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민족자치지방에서 온 과학자와 기사가 약 10만명 된다. 소수민족 과학기술자들은 지금 국가과학기술진보를 추진하는 중요한 역량으로 되고있다. 그들 가운데는 과학원원사, 공정원원사가 있으며 또 실용기술 보급어서 뛰어난 기여를 한 인재가 있다. 일례로 중국과학원 회족원사 왕사민은 장기적으로 노인심장병과 노인 구급구조학의 임상, 과학연구, 교수 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중국 노인의학이라는 신흥분야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 중국 공정원 티베트족원사 위각은 일찍 독일 아친공업대학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해 세계적으로 전자생물학과 생물계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선도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조선족농업과학연구원 정혜옥은 장기적으로 콩 육종과 품종자원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였으며 “길림 20호” 작은 콩 우량 품종을 육성했다.
(3)중국의 민족교육
교육은 과학기술진보의 기초이다. 중국정부는 일련의 특수한 정책과 조치를 취해 민족교육을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소수민족을 도와 교육사업을 발전시키고 민주교육 관리기구를 전문 설립하며, 소수민족과 민족자치지방에 자주적으로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권리를 부여하고 존중하며 또한 민족어문 교수와 이중언어 교수를 중시하고 소수민족 문자교과서 건설을 강화하고, 소수민족 교사대오의 건설을 강화하며 경비에서 소수민족과 민족지역에 특별한 배려를 주며 민족지역과 소수민족의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각종 유형의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목적성있게 학생을 모집하는 방법을 취하여 민족지역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학생모집과 생활에서 소수민족 학생들을 적당하게 배려하며 발전한 지역이 민족지역을 지원하도록 하는 등이 망라되였다.
중국정부는 일련의 힘있는 조치를 취하여 소수민족지역의 학교교육을 발전시켰으며 모든 조건을 이용하여 각종 형식의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웠다. 그리고 민족특점에 따라 통용문자가 있는 민족들이 민족 중소학교 교육에서 본 민족언어로 교수하게 하였다. 중국 각급 각 유형 학교에서 소수민족의 재학생은 큰 폭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서북, 동북, 서남 등 소수민족의 집거지에는 모두 민족대학이 있으며 천만에 달하는 각 민족 대학생들을 양성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 55개 소수민족들이 모두 본 민족의 대학생이 있다. 일부 민족 가운데는 석박사 연구생이 있다.
(중앙민족대학)
(4)중국의 민족문화
소수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해 각 민족자치구, 자치주는 자기의 상황에 따라 연이어 본 지역의 작가협회, 연극협회, 음악협회, 무용협회, 미술협회, 영화협회, 촬영학회 등 조직을 세웠다. 일부 소수민족 자치지방의 대학과 민족대학에서는 소수민족 문학학과를 개설하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또 음악학원, 연극학원, 영화학원 등 예술학교를 세우고 많은 소수민족 문학예술인재들을 양성하였다. 민족의약을 일례로 지금까지 티베트, 내몽골, 신강에서는 모두 각기 티베트의학, 몽골의학, 위글족의학 대학과 일부 민족의약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미 소수민족 작가와 예술가대오가 형성되였다. 일례로 만족 작가 노사, 따이족 시인 캉랑영, 허저족 작가 우 베이싱 등이다. 소수민족 전문과 써클예술팀도 연이어 설립되여 소수민족 농촌과 목축지구 , 도시에서 활약하고있다.
많은 소수민족 민간문학계의 예술자료들이 출판되었다. 일례로 20여년전에 해당부문에서 발기한 “중국민간가곡 집성”, “중국희극음악 집성”, “중국민족민간악기 집성”, “중국곡예음악 집성”, “중국민족민간무용 집성”, “중국 희곡지”, “중국민간이야기 집성”, “중국가요 집성”, “중국속담 집성”, “중국곡예 집성” 등 10대 문예집성이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소수민족 문예자료들이 망라되어있다.
소수민족문학예술 간행물들이 더한층 발전되었다. 현재 중국 각종 소수민족문학예술 간행물은 100여종 된다. 일부 곳에서는 또 자기의 시가, 음악, 미술, 영화와 드라마 등 전문 간행물을 창설했는데 그가운데서 20여종은 소수민족 문자로 출판되고있다. 중국 민족자치지방에서 출판하는 도서, 신문, 간행물 등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소수민족 문자로 출판하는 도서 종류만해도 3400여종 된다.
3.중국의 중대한 민족명절
중국 소수민족의 명절은 아주 많다. 거의 민족마다 자기의 중대한 명절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티베트족의 티베트 역 신년, 따이족의 살수절, 이족의 홰불절, 바이족의 3월 거리, 쫭족의 노래장, 몽골족의 나다무 등이다. 일부 지방정부는 또 티베트력 신년, 쿠르반나이트 등 일부 민족명절을 법정 휴가일로 정하였다.
쿠르반나이트
쿠르반나이트는 이슬람교의 전통적인 명절로서 아랍어에서는 우“에이드 알 아드하”라고 부른다. “에이드”는 명절이라는 뜻이며 “알 아드하”는 “가축 도살, 희생물 헌납”이라는 뜻을 가진다. 때문에 이 명절을 “희생제” 다시 말하여 가축을 도살하여 제사에 올리는 명절이라고 하기도 한다. 쿠르반나이트는 중국에서 회족, 위글족, 까자흐족, 우즈베크족, 따쥐크쪽, 따따르족, 끼르끼즈족, 쌀라족, 둥샹족, 부안족 등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민족의 공동 명절이며 시간은 이슬람교 역서의 12월 10일이다. 명절을 지낼때 집집마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각종 명절 음식을 만들기에 분주하다. 명절날 이른 새벽 이슬람 신자들은 목욕재계하고 청진사에 가서 아훙이 설교하는 “코란경” 교의를 듣는다. 집집마다 또 양이거나 낙타, 소를 잡고 친지, 벗들에게 나눠주며 손님을 접대한다. 사람들은 함께 양고기와 기름음식, 과자, 과일 등을 먹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담소한다. 신강의 위글족은 쿠르반나이트를 지낼때 또 성대한 가무 모임을 가진다. 까자흐, 끼르끼즈족, 따쥐크족, 우즈베크족 등 민족은 명절기간에 양 빼앗기, 경마, 씨름 등 경기를 가진다.
쿠르반나이트를 쇠고 있는 무슬림군중
라마단
라마단은 아랍어로 “에이드 피투르”라는 말의 의역이다. 라마단은 중국에서 회족, 까자흐족,, 우즈베트족, 따쥐크족, 따따르족, 끼르끼즈족, 쌀라족, 둥샹족, 부안족 등 소수민족이 공동으로 즐겁게 쇠는 명절이며 시간은 이슬람교 역서의 10월 초이다. 해마다 이슬람교 역서 9월을 라마단이라고 한다. 음식을 금하는 날자는 29일간이며 어떤 경우 30일 간이기도 하다. 라마단 기간에 이슬람 신자들은 해가 뜨기전에 모두 라마단 시작전의 식사를 한다. 일출후 옹근 하루 낮동안 아무리 배고파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물 한모금 마실수 없다. 평소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잠시 금연해야 한다. 이밖에 또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 기간에 방사를 금지하고 일체 사욕을 억제하며 사악한 마음을 단절함으로써 진주 알라에 대한 신봉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금식하지 않아도 되며 여성들도 월경기간에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음식을 절제하여야 하며 절대 공개장소에서 먹고 마시지 못한다. 병이 있거나 길을 다그치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훗날 꼭 금식기간을 보충해야 한다. 보충하지 않은 사람은 재물을 바치는 것으로 속죄하여야 한다. 저녁이 되여 금식이 결속될때 청진사에서 금식을 결속짓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지어 길가는 낯선 사람들이 이때 면목을 모르는 집에 찾아 들어가도 주인의 환대를 받을 수 있다.
라마단의 경축활동은 아주 성대하다. 일찍 라마단이 내림하기전에 사람들은 집을 회칠하고 뜨락을 청소하며 이발이나 목욕을한다. 많은 젊은 남녀들은 거의 이 기간을 선택하여 혼례를 치르곤 한다.
장역 신년(藏曆新年 )
장역신년은 티베트족의 제일 성대하고 북적이는 민족명절로서 티베트 역서 1월 1일부터 시작하여 일반적으로 15일간 지속된다. 신년 이날, 날이 밝기 전에 명절 옷차림을 한 청년 남녀들이 서로 새해인사를 하며 서로 이번 해에 그 집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명절 옷차림을 한 티베트족 사람들은 부근 사찰에 가서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떼를 지어 거리에 나가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러나 손님으로 친지나 벗의 집에 찾아갈 수 없다.
(사진은 경축행사에서의 정채로운 기마술연기)
나다무 대회
나다무 대회는 내몽골, 감숙, 청해, 신강에 있는 몽골족이 한해에 한번씩 쇠는 전통적인 명절이다. 해마다 7, 8월, 물이 많고 풀이 우거지며 가축이 살찌고 날씨가 쾌청한 황금계절에 진행된다. 나다무는 몽골어로 “오락”이거나 “게임”이라는 뜻을 가진다. 나다무 대회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날 나다무 대회기간에 대규모적인 제사활동을 하였는데, 라마들은 분향하고 등불을 켜며 경을 읽고 부처님을 노래하면서 신령에게 자기들을 보우하고 재난을 없애줄 것을 빈다. 지금 나다무 대회의 내용에는 주요하게 씨름, 경마, 활쏘기 등 민족 전통종목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또 육상경기, 줄당기기, 배구, 농구 등 체육 경기종목이 있다.
二.중국 종교
1.중국 종교 현황
(1)중국 종교현황
중국은 종교가 많은 나라이다. 중국 종교 신자들이 신봉하는 것은 주요하게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이다.
불완전한 집계에 의하면 중국에는 지금 각종 종교 신자들이 1억여명 되며 종교 활동장소가 8.5만여곳, 종교 교직원들이 약 30만명, 종교단체 3000여개, 종교 학교 74개가 된다.
중국에서 전국적인 종교단체로는 중국불교협회, 중국도교협회, 중국이슬람교협회, 중국천주교애국회, 중국천주교 주교단, 중국기독교 “3자”애국운동위원회, 중국기독교협회 등이 있다. 각 종교 단체는 각자의 규약에 따라 지도자와 지도기구를 선거, 산생하며 자주적으로 종교사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종교학교를 개설하고 종교 경전을 인쇄, 발행하며 종교 간행물을 출판하고 사회공익 봉사사업을 진행한다.
(2)중국 주요 종교
불교
불교는 약 기원 1세기 전후에 중국에 들어왔으며 기원 4세기후부터 널리 유전되여 점차적으로 중국에서 영향력이 제일 큰 종교로 되었다. 중국 불교는 3대 언어계로 구성되였다. 즉 한어계 불교, 티베트어계 불교, 파리(巴利)어계(또 남방전 불교라고한다) 불교이다. 이 3대 언어계의 출가 승려들은 20만명에 달한다. 현재 중국에서 개방한 불교 사찰은 13000여채 되며 불교학교는 33개, 불교류 출판간행물은 약 50종 된다.
장전 불교는 중국 불교의 한갈래로서 주요하게 티베트자치구, 내몽골자치구, 청해성 등 곳에서 유전되였다. 티베트족, 몽골족, 위구족, 먼바족, 로바족, 투족은 보편적으로 장전 불교를 신앙하는데, 그 인구는 약 700여만명이다. 남방전 불교는 주요하게 중국 서남부의 운남성 시쌍판나 따이족자치주, 더훙 따이족-징퍼족 자치주, 사모(思茅)지역 등에 분포되여있다. 따이족, 부랑족, 아창족, 와족의 대부분은 남방전 불교를 신앙하는데, 현재 그 신자가 100여만명 된다. 한어계 불교의 신자는 한족을 위주로 하며 중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중국의 이름난 불교사원-소림사)
도교
도교는 중국 본토의 종교로서 기원 2세기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1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교는 중국 고대의 자연숭배와 선조숭배를 계승, 답습하였는데 역사상 교파가 가장 많은 종교중 하나다. 훗날 점차 전진(全眞)도와 정일(正一)도 두 큰 교파로 변화, 발전되었으며 한족 가운데서 일정한 영향을 갖고 있다. 도교는 엄격한 입도 의식과 규정이 없기 때문에 신자들을 집계하기 어렵다. 중국 현유 도교 궁전과 도교관(觀)은 1500여개 되며 도관의 도사들은 남녀 도합 2만 5천여명 된다.
(도교성지-사천 청성산)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기원 7세기에 중국에 들어왔다. 중국의 회족, 위글족, 따따르족, 끼르끼즈족, 까자흐족, 우즈베크족, 둥샹족, 쌀라족, 보안족 등 소수민족 1800여만 인구 가운데서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신앙한다. 중국의 이슬람신자 대부분은 신강위글자치구, 녕하회족자치구 그리고 감숙, 청해, 운남 등 성에 집거하고 있다. 또 기타 각 성과 시에도 분포되여 있다. 현재 중국에는 3만여개의 청진사가 있으며 아훙 등이 4만여명 된다.
(녕하 동심청진사)
천주교
천주교는 기원 7세기부터 중국에 들어왔으며 1840년 아편전쟁후 대규모적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현재 중국 천주교회가 100개의 교구, 500만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개방된 교회당과 교회소는 거의 5000개나 되며 신 철학원이12개 있다. 지난 20여년동안 중국 천주교회는 젊은 신부를 1500여명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100여명의 젊은 신부가 교회에 의해 해외에 파견되여 연수하고 있다. 이밖에 중국 천주교회에는 최초지향한 청년수녀3000명, 종신지향한 수녀200여명이 있다. 중국 천주교에서 해마다 약 5만명이 세례를 받고 있으며 300여만권의 <성경>을 인쇄하고 있다.
(베이징 왕부정거리에 있는 천주교회당)
기독교
기독교는 기원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왔으며 아편전쟁후 대량 진출하였다. 1950년 기독교는 “3자(自)”운동을 전개하고 기독교 계층에서 제국주의의 영향을 숙청하며 애국주의정신을 육성하고 중국 기독교의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위해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국에는 지금 기독교 신자 1000여만명 되며 성직자가 1.8만여명 된다. 그리고 교회당이 1.2만개, 간이 활동장소가 2.5만여개 된다.
2.중국 종교정책과 내왕
(1)중국의 종교정책
1949년 공화국이 창립된 이후 중국정부는 종교신앙의 자유 정책을 제정하고 실시하였으며 국정에 부합되는 정교 관계를 구축하였다. 중국 공민은 자유롭게 자기의 신앙을 선택하고 표달할 수 있으며 종교신분을 밝힐 수 있다. 각종 종교는 지위가 평등하고 화해로운 속에서 공존해왔고 종교 분쟁이 발생한 적이 없다.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는 공민들은 서로 존중하고 단결하며 화목하게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이렇게 규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신앙자유가 있다.” “그 어떤 나라 기관이나 사회단체, 개인이든지 중국 공민에게 강제적으로 종교를 신앙하거나 신앙하지 않도록 할 수 없으며 종교를 신앙하는 공민과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 공민을 차별시해서는 안된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헌번은 또 이렇게 규정하였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의 신체건강을 해치며 국가교육제도를 방애하는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종교단체와 종교사무는 외국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중국의 “민족구역 자치법”, “민법통치”, “교육법”, “노동법”, “의무교육법”, “인민대표대회 선거법”, “촌민위원회 조직법”, “광고법” 등 법률은 또 이렇게 규정하였다. 국민은 종교신앙에 관계없이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향유한다. 종교단체의 합법적인 재산은 법률보호를 받는다. 교육과 종교는 서로 분리하며 국민은 종교신앙에 관계없이 법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 각 민족 인민들은 모두 서로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을 존중해야 한다. 국민은 취업에서 종교신앙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다. 광고, 상표는 민족, 종교에 대한 차별 내용을 포함하지 못한다.
종교활동장소의 합법적인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1994년 1월 중국정부는 “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를 반포하였다. 그해 2월 중국정부는 또 “중화인민공화국 경내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을 반포하고 중국 경내 외국인의 종교신앙 자유를 존중하고 외국인이 종교 측면에서 중국 종교계와 진행하는 우호적인 내왕과 문화학술 교류활동을 보호하였다.
중국 해당 법률은 또 종교 성직자들이 이행하는 종교사무활동, 종교활동장소 그리고 종교습관에 따라 신자가 자기 집에서 진행하는 모든 정상적인 종교활동은 종교조직과 신자들이 자체로 처리하며 법률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였으며 그 어떤 사람도 이에 간섭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세계 많은 나라와 함께 중국에서는 종교와 교육 분리의 원칙을 실시한다. 국민교육에서 학생에게 종교교육을 진행하지 않는다. 부분적인 대학교와 연구기관에서는 종교학의 교수와 연구를 전개한다. 각 종교조직이 개최한 종교학교들은 각 종교의 필요에 따라 종교 전문교육을 진행한다.
기나긴 역사발전에서 중국 각 종교문화는 이미 중국 전통사상문화의 한 부분으로 되였다. 각 종교는 모두 사회에 봉사하고 인간을 위해 복지를 마련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2)중국의 종교내외 내왕
중국의 불교와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는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이런 종교는 모두 세계적인 종교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는 모두 많은 신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종교는 일부 나라에서 국교로 신봉되고 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종교계의 대외내왕은 부단히 발전되었다. 중국의 각종 종교와 외국의 상응한 종교사이의 내왕은 아주 광범하다. 일례로 중국 불교계와 주변나라인 타이, 한국, 일본, 미얀마, 스리랑카, 베트남 등은 늘 각종 형식의 민간 종교 교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수년동안 중국의 불교 사리는 타이, 미얀마, 스리랑카 등 곳에서 공봉되였다. 타이 종교계는 또 중국 티베트 종교계와 정기적인 불교학 교류체제를 가지고있다.
이밖에 서유럽, 북미주 일부 나라의 초청으로 중국의 각 종교단체들은 또 여러번 현지를 방문함으로써 현지 종교를 요해하고중국 종교에 대한 현지 국민들의 요해를 증진하였다.
(홍콩에서의 불교사리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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