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문재인 대통령 “카자흐스탄 비핵화, 한반도에 유용한 참고” 본문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현지시간) 누르술탄 대통령궁에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협력 증진 방안 등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악오르다 대통령궁에서 토카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국민 간 우호 및 실질협력 증진 방안, 한반도와 중앙아 지역의 평화·번영을 위한 협력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토카예프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고, 올해 양국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 10주년을 맞이해 양국 관계를 보다 내실화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토카예프 대통령은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 사임 등 카자흐스탄이 정치적·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방문해 준 문 대통령에게 환영과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앞으로 양국 간 변함없는 우정과 우호관계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자고 했다.
양 정상은 양국관계 발전이 한-중앙아 협력 증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올해로 설립 12년째를 맞는 한-중앙아 협력 포럼이 성공적인 다자협의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 제12차 한-중앙아 협력 포럼을 유치해 준 카자흐스탄 정부에 사의를 표하며 “올해 하반기 누르술탄에서 장관급으로 개최될 예정인 제12차 한-중앙아 협력포럼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력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또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동반성장의 역사를 써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지난해 양국간 교역액이 22억달러로 1992년 대비 220배 성장하고, 인적교류가 9만 명으로 최대치를 기록한 것을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은 신북방정책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라면서 “우리의 신북방정책과 카자흐스탄이 추진 중인 ‘카자흐스탄-2050’ 국가발전전략간 연계를 통해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공동번영을 함께 이루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양 정상은 양국 간 협력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중장기 신규 협력 프로그램 ‘Fresh Wind’를 채택한 것을 환영하며, 이를 통해 통관·인프라·보건의료·관광·중소기업 등 분야로 협력을 다변화해 나가기를 기대했다.
특히 양 정상은 ICT와 5G,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e-Health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도 협력을 확대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동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아울러 양 정상은 양 국민 간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수교 30주년이 되는 2022년을 문화교류의 해로 지정해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추진하기로 하고, 양국 관계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학생들 간 교류 지원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또 최근 한반도 정세와 우리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카자흐스탄 정부의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에 사의를 표했다.
이에 토가예프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한반도 평화 정착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며 “북한의 비핵화 및 국제사회로의 관여를 위해 카자흐스탄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양 정상은 카자흐스탄의 비핵화 경험이 한반도 비핵화에 유용한 참고가 된다고 보고, 이에 관한 양국간 협의를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정상회담 직후에는 정상회담 성과를 담은 ‘한-카자흐스탄 정상 공동성명’이 채택됐으며, 양국 정상 임석 하에 ‘수형자 이송 조약’ 등 7건의 조약 및 양해각서가 서명됐다.
이외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자동차 조립공장 설립 MOU 및 로봇수출기 수출 MOU 등 한-카자흐스탄 간 20여건의 MOU가 체결됐다.
-정상회담 직후 회담 성과를 담은 ‘한-카자흐스탄 정상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아울러, 양국 정상 참석 하에 7건의 조약 및 양해각서(MOU) 서명식이 있었다.
◇ 서명 조약 및 양해각서 주요 내용
*수형자 이송 조약=양국 수형자 이송을 위한 상호 협력.
*신규 경제협력 프로그램(Fresh Wind)=양국간 무역․투자 증진 및 협력 다변화.
*4차 산업혁명 협력 MOU=디지털 경제 및 4차 산업혁명 공동 대응.
*우주협력 MOU=위성개발 등 양국 간 우주협력 틀 마련.
*국제 IT 협력센터 설립 MOU=ICT 역량강화 및 IT 기업 진출 지원.
*보건의료 협력 이행계획=의료기관 개설 협력․의약품 및 의료기기 수출입․e-health 협력․의료인 연수․양국 의료인 면허체계 정보 공유 등.
*수출입안전관리 우수업체 상호인정 약정=한국 수출기업에 대한 신속통관 혜택 부여.
‘Fresh Wind’는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와 카자흐스탄의 산업인프라개발 신규협력 프로그램으로, 양국 간 다양한 분야의 중장기 협력 방향을 제시하고 추진 성과는 양국 정부 간 경제공동위 차원에서 관리하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양 정상은 ICT, 5G,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e-Health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도 협력을 확대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동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 전격 사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중앙아시아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19일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는 이날 TV로 방송된 대국민 연설에서 “대통령직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최고위직을 맡은 지 30년이 됐다”며 국민들이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카자흐스탄의 첫 대통령이 될 기회도 줬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78살인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지난 30년간 카자흐스탄을 통치해왔습니다.
이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법률에 따라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카심조마르 토카예프 상원의장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집권 여당의 총재직과 국가안보회의 의장직은 계속 유지할 예정입니다.
카자흐스탄 국민은 이번 발표를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서도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VOA 뉴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진행자) 카자스흐탄 대통령이 물러나는군요?
기자) 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전격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19일 텔레비전 대국민 연설을 했는데요. “대통령직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사임 명령에 스스로 서명했습니다. “최고 권좌에 오른 지 30년이 됐다”며, 물러난 뒤에도 “죽는 날까지 국민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어떤 인물인가요?
기자) 1989년에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이후 줄곧 카자흐스탄을 이끌었습니다. 옛 소련권 국가에서 최장기 통치자인데요. 소련 붕괴 후 카자흐스탄의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한편에서 받았습니다. 또, 비핵화 운동에 앞장서며 중앙아시아 비핵지대화 설립을 주도한 공로도 인정받는데요. 반면, 장기집권 과정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지적도 있고요. 부정부패· 비리와 인권 탄압을 일삼았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행자) 굉장히 오래 집권했네요?
기자) 네. 공산당 서기장 취임 이듬해인 1990년, 국가지도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의회 선출로 초대 대통령이 됐는데요. 이듬해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당선됐습니다. 1995년에 국민투표로 임기를 연장했는데요. 1999년에 재선됐습니다. 이어서 2005년, 2011년, 2015년 대선에서 연이어 이겼습니다. 그래서 직선제 대통령으로만 5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진행자) 5번째 임기라면, 연임 제한이 없나요?
기자) 원래 있었는데요. 2007년 헌법 개정으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출마 횟수 제한을 없앴습니다. 종신집권을 위한 조치였다고 외신들이 평가하는데요. 개헌 이후 대선 때마다, 사실상 경쟁자도 없었습니다. 형식적으로 야당 후보를 선거에 참가시켰는데요. 지난 2015년 대선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득표율이 98%에 육박했습니다.
진행자) 사임 발표에 대한 반응이 어떤가요?
기자) 카자흐스탄 국내 여론은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요. 외신들은 놀랍다는 반응입니다. 뉴욕타임스와 BBC 등은 ‘깜짝(surprise) 사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임 결정의 이유가 뭘까요?
기자) 명확한 이유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임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만, 성명에서 밝혔는데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지난달 말, “국민 생활 수준을 높이지 못했다”며 내각을 총사퇴 시켰습니다. 이게 대통령 사임을 위한 사전 준비 조치였을 것이라는 언론 해설이 나오는 중입니다.
진행자) 국민 생활 수준을 높이지 못해서, 대통령이 물러난다는 말인가요?
기자) 그게 석연치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 주요 매체들이 여러 가지 사정들을 추측하고 있는데요. 우선 대통령 본인과 측근들의 비리 문제,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난을 궁극적인 사임 배경으로 꼽고 있습니다.
진행자) 카자흐스탄의 경제 상황이 어떤가요?
기자) 최근 5~6년 동안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원래 카자흐스탄은 원유 매장량이 많아서, 중앙아시아에서 부자 나라 축에 들었는데요. 하지만 몇 년 새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다른 산유국들과 마찬가지로 타격을 받았습니다. 경제적 압박 요소가 하나 더 있는데요. 서방 측이 진행중인 대러시아 제재입니다.
진행자)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왜 카자흐스탄에 영향을 끼쳤나요?
기자) 카자흐스탄이 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강력한 실무적 관계를 지켜왔다고 로이터통신이 설명했는데요. 제재 때문에 러시아의 대외 교역이 축소되면서, 가깝게 교류하던 카자흐스탄 주요 산업을 압박하게 된 겁니다.
진행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개인 비리도, 사임 배경이라고 하셨죠?
기자) 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임기 내내 원유 수출 대가로, 국제적인 에너지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달러를 챙겨 왔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는데요. 이와 함께 대통령 본인과 가족들의 갖가지 축재 행위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럼 새 대통령은 누가, 언제부터 맡게 됩니까?
기자) 대통령 사임 효력은 20일자로 발생한다고 텔레비전 성명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새 대통령을 뽑을 조기 대선 때까지, 카심조마르 토카예프 상원의장이 정부 수반이 된다고 설명했는데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실권자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외신 관측도 있습니다.
진행자) 물러나는 대통령이 실권자로 남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뭐죠?
기자) 대통령 자리만 내놓고, 그 동안 겸직해온 다른 요직들을 지킬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사임 효력 발생 이후, 집권 ‘누르오탄(Nur Otan)’ 민주인민당 대표, 헌법위원장, 국가안보회의 위원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카자흐 상원의장, 임시 대통령 취임…"나자르바예프 노선 계승"
30년 동안 장기 집권해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전격 사임한 카자흐스탄에서 20일(현지시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전(前) 상원의장이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카자흐스탄 헌법에 따르면 선출직 대통령이 사임하면 대통령 권한은 자동으로 상원의장에게 넘어간다. 이렇게 취임한 임시 대통령은 개헌안을 발의할 수는 없다.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토카예프는 이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인 내년 4월까지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다짐했다.
토카예프는 선서 뒤 연설에서 "'엘바시'(민족 지도자)인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의 의견이 국가 전략 결정에서 우선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면서 "엘바시의 전략 노선을 계승하는데 모든 지식과 경험을 쏟겠다"고 밝혔다.
전문 외교관 출신의 토카예프는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내고 지난 2013년부터 상원의장직을 맡아왔다. 나자르바예프의 최측근 인사 가운데 한명으로 분류된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카자흐스탄 공화국(카자흐어: Қазақстан Республикасы 카자크스탄 레스푸블리카스 [qɑzɑqstɑ́n],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Казахстан 레스푸블리카 카자흐스탄[*] [kəzɐxˈstan]), 약칭 카자흐스탄(카자흐어: Қазақстан 카자크스탄, 러시아어: Казахстан 카자흐스탄[*], 문화어: 까자흐스딴)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걸쳐 있는 공화국이다. 카자흐어(국가어) 및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수도는 누르술탄이다. 카자흐인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한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로서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 북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몽골과 가까우나 인접해 있지는 않다.
1.개요
러시아, 카스피 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내륙국이다. 1850년경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1925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36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되었다. 1991년 12월 16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광대한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륙적으로 건조하며 초원·사막이 매우 넓다. 주민은 카자흐인이 절반이다. 에너지자원(석탄·석유·수력) 외에 철, 구리, 납, 아연, 금, 니켈, 크롬, 망간, 보크사이트, 인회토(燐灰土)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발달의 기초는 이들 자원의 채광 야금업이며, 화학공업(카바이드·인조고무·과린산비료·섬유·플라스틱), 기계장치제조업(농기·광산기계·압연기·석유업장치·압착기·펌프)도 발달하고 있다. 북부 카자흐스탄은 1954년부터 광대한 처녀지가 개간되어 밀·귀리·보리 등을 산출하는 곡창지대다. 카자흐스탄은 동유럽에 영토를 일부 두고 있다.
2.역사
(1)카자흐 칸국
카자흐인들이 15세기부터 이 땅에 민족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는데, 주로 유목생활을 했다.
(2)제정 러시아
19세기에 제정 러시아는 대영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일환으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행정 시스템을 도입하고 군사기지를 구축하였다. 1735년에 첫 번째 러시아 기지인 오르스크가 건설되었고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의 모든 학교와 정부기관에서 러시아어만 사용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일방적인 언어정책은 카자흐인들의 반발을 샀고 19세기 말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카자흐인들이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는 언어정책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카자흐인들의 삶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기근, 수자원 분쟁 등 여러가지 요소에 의한 것이다. 이 카자흐 민족운동은 러시아의 흡수정책에 대항하여 카자흐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데 그 중점을 맞췄다.
1890년대 이후 제정 러시아로부터 많은 수의 정착민들이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특히 세미레치에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06년 트렌스-아랄 철도가 개통된 이후 정착민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이러한 이민현상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민국(Переселен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이 감독하고 장려하였다. 19세기 동안 400,000명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고 20세기 초 약 백만명의 슬라브인, 독일인, 유대인 등이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다.
1916년 '중앙아시아 반란(the Central Asian Revolt)'이라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정착민들과의 땅과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원주민인 카자흐인들이 들고 일어나 러시아 정착민들과 군사기지 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상대방을 향한 학살행위가 있었으며, 1919년 말 공산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다.
(3)카자흐 SSR
제정 러시아의 몰락 후 잠깐의 독립기간(Alash Autonomy)이 있었지만 1920년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세웠다. 그 후, 1925년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36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3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 집단 농장화와 전통 카자흐 지도층 탄압으로 인해 카자흐스탄에 대규모 기아가 발생하였다. 1926년과 1939년 사이 카자흐 인구는 가뭄과 기아로 인해 22% 감소하였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많은 카자흐 작가, 시인, 사학자, 철학자, 정치가 등이 카자흐 정체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학살당했다. 1930년대 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수백만의 추방자들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카자흐스탄은 다섯 개의 부대를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보냈으며 1947년에는 세미팔라틴스크(현재의 세메이)에 소련의 핵실험장이 개설되었다.
(4)카자흐스탄 공화국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직후에는 알마티가 수도였다가 1998년에 수도를 아스타나로 천도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며 독재로 정치를 실행하다가, 2019년 3월 20일 집권 29년 만에 자진 퇴임하였다. 카자흐스탄은 2012년 12월에 카자흐어는 사용하는 문자를 로마자로 바꾸는 작업이 2025년까지 완성되어야한다면서 카자흐어의 문자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지만, 일부는 반발하고 있다 누르술탄의 퇴임 이후, 상원 의장을 지낸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3.경제
카자흐스탄은 제조업보다는 수출의 90% 이상을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GDP는 1인당 8,000달러 정도다. 천연자원 개발 등으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다. 밀의 총생산량은 22,732,000톤(2011년, 세계 10위, 3.23%)이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경제발전이 기대되는 국가로 손꼽힌다. 세계은행은 카자흐스탄을 중앙아시아에서 IT발전분야에서 가장 앞섰다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4.지리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9번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내륙국으로 한반도의 13배에 달하는 영토(2,724,900km2)를 가졌으며 이는 아르헨티나(2,766,890km2)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와 6846km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에 접한다. 영토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에 속하지만 카스피해에 면하는 우랄산맥 서쪽땅은 동유럽에 속한다.
광대한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륙성으로 건조하며 초원·사막이 매우 넓다. 면적이 804,500km2인 카자흐초원은 카자흐스탄 전체 면적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지대이다. 주요 강·호수는 아랄해, 발카쉬 호수, 우랄강, 시르다리야강 등이 있다.
5.행정 구역
카자흐스탄은 14개의 주(州, 카자흐어: облыстар)와 3개의 특별시로 나뉘어 있다. 각 주는 대통령이 임명한 '아킴'이라 불리는 주지사 관할이다. 특별시인 누르술탄과 알마티는 그 어떤 주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며 바이코누르시는 2050년까지 러시아에 코스모드롬(우주 기지, 러시아어: космодром)으로 임대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은 1997년 12월 10일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현재 누르술탄)로 이전하였다.
6.기후
계절변화가 뚜렷한 대륙성기후로서,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특히 평원과 골짜기 지역에 그 특징이 심하게 나타난다. 연평균 강수량이 북부가 약 250mm, 남부 산악지대가 450mm에 이르지만 사막은 비가 훨씬 적게 내린다. 스텝과 사막이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있다.
7.종족
카자흐인66%, 러시아인20%, 우즈베크인2.9%, 우크라이나인2.0%, 위구르인1.4%, 타타르인1.2%, 독일인1.1%, 고려인0.6%,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벨라루스인, 약간의 중국인, 기타 4.5%이다.
8. 언어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어가 '국가어'지만 러시아어는 '공용어'이자 '민족간 소통언어'로 사용되고 있어서, 두 언어 모두가 공용어이다. 소수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현재 정부는 카자흐어를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며, 정부의 모든 문서는 카자흐어로만 작성이 된다. 이는 카자흐민족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서 방송되는 각종 언론매체는 현재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카자흐스탄의 신문방송 언어는 카자흐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다.[5] 아직도 도시의 사람들은 러시아어가 일반적이다. 영어, 벨라루스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 소수민족의 언어 등 기타도 사용된다. 2013년 12월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교육포럼에서 카자흐어, 러시아어, 영어를 카자흐스탄의 공식 언어로 지정한다고 밝혔다.[6]
9. 종교
카자흐스탄은 다민족국가인 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있다. 2009년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인구의 70.2%가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응답하였다. 그 중 카자흐, 우즈벡, 타타르인들 등 대다수가 수니파이며 시아파는 소수에 속한다. 남부 카자흐스탄에만 2300여 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이슬람 희생제인 에이드 알-아다(Eid al-Adha)가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는 등 이슬람교가 상당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계 카자흐스탄인들 등 인구의 26.2%는 기독교를 믿는다. 그 중 러시아 정교회의 비율이 가장 높다. 카자흐스탄에는 258개의 정교회 교회가 등록되어 있으며[8] 정교회 성탄절인 1월 7일은 2005년 12월 국경일로 지정되었다.[9] 카자흐스탄 전국에 500여 개의 개신교 교회, 90여 개의 가톨릭 교회가 있으며, 그 외 소수의 유대교, 불교신자들이 있다(0.2% 미만)
10. 문화
10세기에 철학·과학·수학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작가 아부 나스르 알 파라비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필가로서 알려져 있으며, 1904년에 사망한 아바이 이브라김 쿠난바예프가 있다.
현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가로는, 시인 잠불 자바예프와 극작가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를 꼽을 수 있다. 아직도 카자흐스탄에는 서사적인 민요시와 서정시를 낭송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카자흐스탄에는 많은 예술·연극 학교가 있으며, 알마티에는 국립 미술관이 있다.
영국 <채널4>에서 <다 알리 G 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새처 배런 코언이 보랏 사그디예프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 TV리포터로 분(扮)해 미국을 탐방하는 내용의 쇼를 진행하였다. 그는 또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라는 영화를 만들어 2006년 토론토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문제는 이 캐릭터가 카자흐스탄 문화를 비난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카자흐스탄에서 여성은 버스 안에서는 여행할 수 있고, 동성애자는 더 이상 푸른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되고, 결혼 가능 연령은 8살까지 올라갔다"며 카자흐스탄 사회를 조롱해왔다. 그의 이 같은 도발에 카자흐스탄 정부는 코언을 상대로 소송을 공언해왔으며, 결국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까지 나서, 2006년 11월로 예정된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미국을 찾아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벌였다.
11.자원
우라늄 매장량이 세계 2위, 천연가스 매장량 약 322억 배럴(세계 7위), 은, 텅스텐 등 많은 광물자원을 보유한 자원강국이다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누르술탄 아비셰비치 나자르바예프(카자흐어: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누르술탄 애비슐르 나자르바예프, 러시아어: Нурсултан Абишевич Назарбаев, 영어: Nursultan Nazarbayev, 문화어: 누르쑬딴 나자르바예브, 1940년 7월 6일~ )는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이다.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재임하였다.
1940년 7월 6일 생, 알마티 근처의 우쉬코늬르에 태어났다.
1962년, 카라간다 야금 기술 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7년 - 1979년, 소비에트 연방 카라간다 주 공산당 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제2서기에 임명되었다.
1979년,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었다.
1984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고르바초프 정권하에서 중앙아시아의 대표가 되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동지였던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카자흐당 서기장을 해임했으며, 이후 러시아인 출신의 겐나디 콜빈을 카자흐당 서기장으로 임명하였는데, 한때 카자흐인의 데모가 일어날 뻔했다.
1989년 6월,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하였다.
1990년 7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에 임명되었다.
1990년 4월 24일, 카자흐스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4월, 국민투표에 의해 그의 임기가 1999년까지 연장되었다.
1999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임기는 7년)
2006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으나 야당이 이를 부정선거라고 항의했으며, 유럽계 선거감시기구도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 선거라고 비난하였다. 당선 뒤 카자흐스탄의 국가인 나의 카자흐스탄을 스스로 수정하였으며, 야당 탄압과 언론 통제를 계속했다. 이 때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개헌 직후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 여당인 누르-오탄당은 모든 의석을 차지한 데 비해 다른 정당들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야당은 이를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였다.
2009년에는 집권 여당인 누르-오탄당이 선거를 없애고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종신직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여 국제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 의회는 여당인 누르-오탄당 의원 100%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헌이 실시될 경우 통과가 확실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2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2012년과 2017년에 실시될 예정인 대통령 선거를 생략하는 대신 그의 임기를 202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2011년 1월, 카자흐스탄 유권자 과반수가 국민투표 실시에 찬성했고 여당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 또한 만장일치로 헌법 개정안에 찬성한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과 야당은 헌법 개정안이 카자흐스탄의 민주주의 후퇴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그는 결국 헌법 개정안 서명을 거부한다. 한편 카자흐스탄 헌법재판소는 1월 31일 그의 임기를 202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이 위헌임을 판결했으며 2월 4일 그는 대통령 선거를 4월 3일에 실시한다는 내용의 법률에 서명하게 된다.
2011년 4월 8일, 대통령 선거에서 95.5%의 득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을 맡게 되었다.
2015년 4월 26일, 대통령 선거에서 97.7%의 득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현재까지 27년 이상 장기집권에 성공하여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을 맡게 되었다.
2015년 4월 29일, 2015년 대선 결과에 따라 취임식을 가졌다. 헌법에 의한 임기는 2020년 4월 24일까지이다.
2019년 3월 20일, 전격 사퇴를 발표하였다.
카자흐스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
카심조마르트 케메레비치 토카예프(카자흐어: Қасым-Жомарт Кемелұлы Тоқаев, 러시아어: Касым-Жомарт Кемелевич Токаев, 1953년 5월 17일 ~ )는 카자흐스탄의 정치인이다. 소속 정당은 누르 오탄이다.
1970년 국립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에 전공하였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2013년부터 2019년까지 6대 상원의장으로 역임하였다. 2019년 3월 20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자진 사임하여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게 된다
민주화 사회(자유사회)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행정부 제1절 1항
행정권은 미합중국(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에 속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며 동일한 임기의 부통령과 함께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선출된다 [수정조항 이전 미국헌법 조항, 대통령의 임기 제한 없음]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 정책)도 국가발전[국가 경제성장과 개인 부(富)의 축적(부유층)]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 구축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존중돼야 하지만 극단적 자유주의 노선 무정부주의나 극단적 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는 국가의 빈곤과 개인의 생존 결핍(가난)만 가져올 수 있다
자유권(인민)과 사회권(생존권, 국민)
a.인민(人民)-국민 개개인 의미(기본권 향유자)-개개인의 국민-기본권 향유자로서의 국민
권리장전 사람을 지칭할때는 인민으로 사용해야 정확하다(루소 사상:회의제 정부론)
기본권 중 자유권 등의 표현(세계 각국 인민의 권리, 자유권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똑 같이 적용됨)
-신체의 자유권:실체적 보장(법률주의)과 절차적 보장(신체자유의 절차법적 보장)- 강제노역의 금지, 연좌법의 금지(친족의 행위로 인한 불이익 처우금지), 고문을 받지 아니할 권리등
-사회,경제적 자유권: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등
-정신적 자유권: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국교부정과 정교분리 원칙),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의 자유(대학 자율성 보장)등
-행복추구권과 생명권, 기본권의 초국가성과 포괄성 규정 보장(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일조권, 애정자유권, 스포츠권, 건강권등 보장):축첩(일부다처)제도나 특수신분제도 귀족이나 노예제도등 부정
-인간의 존엄성 보장:집단추방, 대량학살, 고문, 노예제도, 인신매매, 인간생체실험(뇌파로 뇌 세뇌로 각종 정치공작행위이나 테러행위, 무기확보를 위한 인간생체실험 등), 마약, 강제노동등 금지.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 화학적 물리적 생체실험사용 금지, 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행위 금지, 태아의 생명권과 낙태행위금지(사회적 합의에 의한 낙태동의)
b.국민(國民)-인민의 전체(나라 인민 전체 의미,선거권 향유자나 국가기관 대표자)-주권자로서의 국민--이념적 통일체로서 국민.
대한민국이나 중화민국, 미합중국 사람을 지칭할때는 국민로서 사용해야 한다(로크 사상: 국민 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출)
기본권 중 사회권(생존권)이나 선거권 등의 표현(자국민, 사회권은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에 따라 차등 사회보장 정책 추진)
-인간다움 생활을 할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의무교육과 평생교육)
-근로의 권리(실업자 해소)
-근로자의 근로 삼권
-쾌적한 주거생활의 보호
-최저 임금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환경권 및 주거생활에 관한 권리
-혼인과 가족생활에서의 양성평등과 보건, 모성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결혼, 여성보호, 아동보호)
-상이군경 및 전몰군경 및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에 대한 우선 취업권 부여
-노인복지와 국가보호
-장애인 보호
-생활무능력자의 권리를 보장(생활보호법이나 의료보호법)
-군 복무 예비역 군인에 대한 복지(경력이나 국가보호)
c.권리(權利)--인민 법률상 투쟁의 힘[국가나 힘(세력)이 있는 제3자에 대한 투쟁의 힘--자유권이나 생존권 등]
d.의무(義務)--인민 법률상 구속의 힘[국가에 구속--노동.국방과 납세의 의무 등]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의 대통령 임기 제한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종신 대통령직에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가 3번씩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2번의 임기만을 수행하였고,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아 있다. 이 고별사에서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민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에 대해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했다.
임기를 마친 그는 미련없이 자신의 사저가 있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친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깨고, 수정헌법 22조에 3선 출마금지, 타인의 임기로 2년 이상 대통령직에 봉직한 사람은 2번 이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할 때까지 철칙처럼 지켜온 절제의 미덕이었다.(임기는 4년으로, 최대 8년까지만 가능) 당연히 수정헌법 22조에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은 워싱턴의 전통을 계승, 강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자, 떠날 때에는 떠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이고, 귀족정치를 지지하고 비록 황제처럼 행동하여 정치를 결코 대중화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문
펜실베니아주, 게티스버그
1863년 11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A. Lincoln)이 남북전쟁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최대의 전화(戰禍)를 입은 펜실베니아주의 게티스버그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행한 연설. 그 연설 가운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또한 민주정치의 실천 이념이 되고 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 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일부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 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 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 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공화국은 링컨의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 民治, 民享之民主共和國"이다
-1958년 제헌된 프랑스 5 공화국의 프랑스 헌법에서는 프랑스 공화국을 "gouvernement du peuple, par le peuple et pour le peuple" [인민의(백성의), 인민에 의한(백성에 의한), 인민을 위한(백성을 위한) 정부]로 규정하며, 이는 정확히 링컨의 말에 대한 번역이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공화국이란 공화제(共和制)를 실시하는 국가이며,민주공화국은 국가의 주권이 다수의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가를 통치한다. 민주공화국의 효시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그 후 1789년의 프랑스혁명, 1793년과 1848년의 프랑스헌법 등으로 이어진다. 권력구조의 집권(集權) 또는 분권(分權)에 의해서 단일공화국과 연방공화국으로 구분되며, 권력분립의 형태에 의해서 대통령제ㆍ의원내각제 국가 등으로 구분된다. 민주공화국은 권력의 기초로서 국민주권의 원리,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 권력 구조면에서 권력분립주의,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한 정치 과정의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대한민국은 헌법 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세계 각국 민주공화국은 링컨의 노예제도 폐지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민주정부)에서 비롯돼 오고 있다
민주정부는 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어느 나라에서도 다 실시하고 있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 民治, 民享之民主共和國'
민주공화국 헌법(자본주의민주주의 헌법)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사회주의 헌법)을 구분해야 한다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democratic republic)은 엄격한 의미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제를 모두 다 실시하고 있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권위와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정부는 국민에게 선출된 공무원이 운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를 민주 공화국이라고 표방한 국가는 거의 자유 선거나 공정 선거를 치루지 않았다. 동독으로 알려진 독일민주공화국과 북베트남으로 알려진 베트남 민주 공화국 두 공산주의 국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또 다른 국가인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11년 프리덤 하우스의 조사에서 6.0(1.0은 완전히 자유로운 국가, 7.0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자유롭지 못한" 국가에 속한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재자가 통치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민주공화국 중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는 민주정부이며 사회주의 국가는 일당독재국가나 일인 독재국가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 노예해방선언문
1862년 9월 22일을 기하여 미합중국 대통령 링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Abraham Lincoln delivers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to his Cabinet현재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주의 일부의 예속 상태인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군 및 해군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지하고 지켜줄 것이고, 그들을 다시 억압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앞서 말한 1월 1일에 여전히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들과 주의 일부 지역을 선포에 의해 (반란주로) 지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주 또는 주민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이 투표하여 선출한 대의원들을 성의를 가지고 미국 의회에 파견하고 있다면 이를 뒤엎을 만한 다른 증언이 없는 한, 그 주와 주민은 미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통령인 나,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정부의 권위에 대한 실제 무장 반란시에 미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그리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합하고 필요한 조치로서, 1863년 1월 1일부터 그 이후 100일 동안, 미국에 대항해 반란 상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주와 주의 일부 지역을 반란주로 지명하는 바이다.
아칸사스, 텍사스, 루이지애나(세인트 버나드, Palquemines, 제퍼슨, 세인트 존, 세인트 찰스, 세인트 제임스, Ascension, Assumption, 테레본, Lafourche, 세인트 매리, 세인트 마틴, 그리고 올리언즈 지역은 제외하고 뉴올리언즈는 포함함), 미시시피, 알라바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우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버지니아(웨스트 버지니아로 지정된 45개 카운티와 버클리, 마코맥, 엘리자베스 시티, 요크, Princess Anne, 그리고 노퍽을 제외하고 노퍽 및 포츠머스의 도시들은 포함함), 그리고 제외된 지역은 현재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있는 상태이다.
상기 권한과 언급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상의 반란주로 지정된 주와 주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육군과 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앞서 언급한 자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다. 나는 자유가 선언된 상기의 노예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폭력 행위를 삼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경우에 적합한 임금을 벌기 위하여 충실히 노동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그리고 본인은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국 군대에 입대하여 요새, 진지 및 기타부서에 배치되고, 모든 종류의 선박에도 배치될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그리고 진실로 정의를 위한 행위이며 군사상의 필요에 의하여 헌법에 의해 보증된 이 선언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인류의 신중한 판단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Whereas on the 22nd day of September, A.D. 1862, a proclamation was issued by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containing, among other things, the following, to wit:
"That on the 1st day of January, A.D. 1863, all persons held as slaves within any State or designated part of a State the people whereof shall then be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shall be then, thenceforward, and forever free; and the executiv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including the military and naval authority thereof, will recognize and maintain the freedom of such persons and will do no act or acts to repress such persons, or any of them, in any efforts they may make for their actual freedom.
"That the executive will on the 1st day of January aforesaid, by proclamation, designate the States and parts of States, if any, in which the people thereof, respectively, shall then be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and the fact that any State or the people thereof shall on that day be in good faith represented in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by members chosen thereto at elections wherein a majority of the qualified voters of such States shall have participated shall, in the absence of strong countervailing testimony, be deemed conclusive evidence that such State and the people thereof are not then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Now, therefore, I, Abraham Lincol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by virtue of the power in me vested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of the United States in time of actual armed rebellion against the authority and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as a fit and necessary war measure for supressing said rebellion, do, on this 1st day of January, A.D. 1863, and in accordance with my purpose so to do, publicly proclaimed for the full period of one hundred days from the first day above mentioned, order and designate as the States and parts of States wherein the people thereof, respectively, are this day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the following, to wit:
Arkansas, Texas, Louisiana (except the parishes of St. Bernard, Palquemines, Jefferson, St. John, St. Charles, St. James, Ascension, Assumption, Terrebone, Lafourche, St. Mary, St. Martin, and Orleans, including the city of New Orleans), Mississippi, Alabama, Florida, Georgia, South Carolina, North Carolina, and Virginia (except the forty-eight counties designated as West Virginia, and also the counties of Berkeley, Accomac, Morthhampton, Elizabeth City, York, Princess Anne, and Norfolk, including the cities of Norfolk and Portsmouth), and which excepted parts are for the present left precisely as if this proclamation were not issued.
And by virtue of the power and for the purpose aforesaid, I do order and declare that all persons held as slaves within said designated States and parts of States are, and henceforward shall be, free; and that the Executiv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including the military and naval authorities thereof, will recognize and maintain the freedom of said persons.
And I hereby enjoin upon the people so declared to be free to abstain from all violence, unless in necessary self-defence; and I recommend to them that, in all case when allowed, they labor faithfully for reasonable wages.
And I further declare and make known that such persons of suitable condition will be received into the armed service of the United States to garrison forts, positions, stations, and other places, and to man vessels of all sorts in said service.
And upon this act, sincerely believed to be an act of justice, warranted by the Constitution upon military necessity, I invoke the considerate judgment of mankind and the gracious favor of Almighty God.]
미합중국 수정 제13조(노예제도 폐지)
*이 수정조항은 1865년 1월 31일에 발의되어 1865년 12월 6일에 비준됨
제1절 노예 또는 강제노역은 당사자가 정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면 미합중국 또는 그 관할 속하는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제2절 연방의회는 적당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미합중국 수정 제14조(공민권)
*이 수정조항은 1866년 6월 13일에 발의되어 1868년 7월 9일에 비준됨
제1절 미합중국에서 출생하고 또는 귀환하고 미합중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미합중국 및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
어떠한 주도 미합중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다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사람으로부터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그 관할권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제2절 하원의원은 각주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주에 할당한다
각 주의 인구수는 과세되지 아니하는 인디언을 제외한 각주의 총인구수이다
다만, 미합중국 대통령 및 부통령의 선거인, 연방의회의 하원의원, 각주의 행정관, 사법관 또는 각 주의회의원을 선출하는 어떠한 선거에서도 반한이나 그 밖의 범죄에 가담한 경우를 제외하고 21세에 달하고 미합중국 시민인 당해 주의 남성 주민 중의 어느 누구에게 투표권이 거부되거나 어떠한 방법으로 제한되어 있을 때에는 그 주의 하원의원 할당 수의 기준은 그러한 남성주민의 수가 그 주의 21세에 달한 남성주인의 총수에 대하여 가지는 비율에 따라 감소된다
제3절 과거에 연방의회, 의원, 미합중국 관리, 각 의회의원 또는 각주의 행정관이나 사법관으로서 미합중국 헌법을 수호할 것을 선서하고 후에 이에 대한 폭동이나
반란에 가담하거나 또는 그 적에게 원조를 제공한 자는 누구라도 연방의회의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 대통령 및 부통령의 선거인, 미합중국이나 각 주 밑에서의 문무의 관직에 취임할 수 없다 다만, 연방의회는 각원(각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 투표로써 그 실격(失格)을 해제할 수 있다
제4절 폭동이나 반란을 진압할때의 공헌에 대한 은급 및 하사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기책(起債)한 부채를 포함하여 법률로 인정한 국채의 법적효력은 이를 문제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미합중국 또는 주는 미합중국에 대한 폭동이나 반란을 원조하기 위하여 기채한 부채에 대하여 또는 노예의 상실이나 해방으로 인한 청구에 대하여서는 채무를 부담하거나 지불하지 아니한다
모든 이러한 부채, 채무 및 청구는 위법이고 무효이다
제5절 연방의회는 적절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미합중국 수정 제15조(흑인의 투표권)
* 이 수정조항은 1869년 2월 26일에 발의되어 1870년 2월 3일에 비준됨
제1절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 피부색 또는 과거의 예속 상태로 해서 미합중국이나 주에 의하여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제2절 연방의회는 적절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노예 해방 선언문 내용은, ①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②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③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전쟁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가지는데, 남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부 여러 주의 연방 조기복귀(早期復歸)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노예해방은 전쟁 뒤 미합중국 수정(修正)헌법 제13∼15조의 성립으로 노예제도 폐지가 확정되었다.
미합중국 헌법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선진국 대통령제나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대부분 대통령과 수상의 임기 3선 금지를 표방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 민주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권력자 부패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나 권력 남용은 대통령이나 수상 임기의 3선 허용에서 비롯돼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나만(대통령이나 수상만)의 애국자가 아닌 많은 애국 정치 지도자가 있습니다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9년도 새해부터 EAIC Staff들은 "From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to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원칙으로 생활화해야 하며 20년이상 경력자는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로 생활해도 됩니다.
EAIC Headquarters는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입니다.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는 이상주의자나 거짓말이 될 수 있으며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은 현실주의자나 정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 카자흐스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습근평 국가주석,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에게 '우의 훈장' 수여 (0) | 2019.05.04 |
---|---|
문재인 대통령,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 면담 (0) | 2019.04.23 |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0) | 2019.04.21 |
카자흐스탄 대통령 전격 사임 (0) | 2019.03.24 |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과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간 공동성명 (0) | 2009.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