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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절(淸明節 )천안문시위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청명절(淸明節 )천안문시위

CIA Bear 허관(許灌) 2018. 4. 7. 22:17


공산중국 역사에서 천안문 사태는 두 건이 있다.

첫 번째는 1976년 4월5일 발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3년 뒤인 1989년 6월4일에 벌어졌다.

현 시점에서 '천안문 사태'라고 하면 1989년의 것을 지칭한다. 1976년의 그것을 두고는 '청명절 천안문 사태'로 구별하고 있다.

두 사태는 수도 배이징 중심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고 정치 시위가 촉발시켰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불러 일으키며 유혈진압된 점이 같다.

또한 집권세력이 각각 10년 차 , 11년 차의 시점에 반대 노선과 정책을 펴온 지도적 인물의 사망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화무십일홍'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이야기다. 76년의 '죽은 공명'은 저우언라이 총리였고 89년에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극과 극으로 다르다.

'청명절 천안문 사태'는 발생 불과 2년 뒤 베이징 시당에 의해 '혁명적 행동'으로 규정됐다. 반면 '89년 천안문 사태'는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 지금도 '반혁명 동란'이란 낙인이 찍혀있다.

76년 유혈진압 세력은 그해를 넘기지못하고 '불가역적 몰락'을 당했으나 89년 유혈진압 세력은 정권을 굳건히 지켰고 그 세력의 후계자들이 여전히 공산중국을 이끌고 있다.

전자는 천하를 잃었고 후자는 '타천하(打天下)'했다. 천하를 얻었다는 뜻이다.

결정적 한 가지 원인을 찾고자 하는 '하드 보일디스트'는 당시 최고 지도자 여명의 길고 짧음이 이처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은 사태 5개월 뒤 죽었고 덩사오핑은 8년여를 더 살고 세상을 떠났다.

전자는 후계체제 구축을 이루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후자에게는 설계 실행은 물론 확실하게 다지기에도 넉넉한 시간이 었다. 따라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핵심은 전자가 시대의 흐름에 거슬렀다면 후자는 이를 더 앞서 나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집권세력 코어 그룹의 전술 차이다.

76년 진압세력이 조급하고 무모했던 반면 89년 진압세력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초조하고 불안감에 휩싸이면서도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시간을 가지고 상대 세력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도록 하고 내부의 피아를 확실하게 구분한 뒤 결정적 순간에 전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는 점이다.

전자가 프로 복싱 세계에서 '4각링 안의 아르마다'로 군림하던 조지 포어맨을 상대했던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처럼 극과 극의 차이가 났다.

조 프레이저는 상대방의 턱밑으로 탱크처럼 돌진하는 인파이터 접근 전술을 탐색전 없이 링소리가 울리자마자 시도하다 1 라운드에서 KO패 당했다. '불가역적 패배'였다.

무하메드 알리는 링사이드를 돌며 로프에 기대어 포어맨의 강펀지을 효과적으로 버텨낸 뒤 그가 지쳐 허점을 보이자 맹공격을 가하여 무너뜨렸다. 단 한 번의 기회를 포착, '불가역적 승리'를 쟁취했다.

덩샤오핑은 89년 천안문 시위를 진압하는데 마오의 4행 전술 교리를 채용한 셈이다.

시위가 거샜을 때는 대화 시도 등 유화책을 쓰는 등 후퇴했고 이어 선정 공세를 통해 교란한 뒤 피로에 지쳐 있을 때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덩은 마오의 진정한 수제자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저우언라이는 문화혁명기간 실각한 덩샤오핑 등 고급 간부들을 복권시켰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복권은 지금의 G2 중국이 있게 한 주춧돌이 됐다. 저우언라이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75113일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앞으로 중국의 발전과 개방을 위한 광범위한 정책인 4대 현대화 계획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978년 덩샤오핑은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했다.


1976년 4월5일 천안문 광장에서 4인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유혈시위가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4 · 5 운동’이라고 부른다.

이해 1월8일에 사망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 대한 추모의 정을 표하기 위해 중국 민중은 청명절을 앞둔 3월 말부터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화환, 꽃다발, 헌사 등을 바쳤으며 시낭송과 연설을 통해 저우의 업적을 기리는 행동을 벌였다.

청명절인 4월4일 저우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4인방 세력은 이날 저녁 당 원로이며 덩샤오핑(鄧小平)과 가까운 예전잉(葉劍英), 주더(朱德), 리셴녠(李先念), 쉬스유(許世友) 등이 불참한 가운데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4인방이 주도한 정치국 회의는 저우에 대한 추모 열기를‘반혁명 성격을 지닌 반격행위’라고 규정했다. 4인방은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승인을 받아 밤중에 인민영웅기념비에 바쳐져 있던 화환, 표어 등을 전부 철거했다.

다음 날인 4월5일 천안문 광장에 나온 군중은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이 깨끗이 청소된 데 대해 분노하고 “화환을 돌려달라”, “나의 전우를 돌려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면서 ‘반장칭(反江靑)’, ‘반마오(反毛)’의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민병, 경찰, 그리고 군병력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공안국의 방송선전차에 불을 지르고 천안문 동남쪽에 있는 베이징 위수구(北京衛戍區) 경위부대 막사를 점령, ‘수도 인민 총리추도위원회(首都人民總理追悼委員會)’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베이징 공안국을 파괴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공안국이 파견한 소방차와 음식운반 차량을 불지르고 경위부대에 들어가 집기와 막사를 불태웠다.

오후 9시부터 잔혹한 진압이 개시되었다. 저항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마오쩌둥과 4인방은 천안문광장 주위에 정규군 3개 사단과 약 4만명의 노동자 민병을 투입, 사건을 유혈 진압하여 3,000여명이 사망·부상 내지는 체포, 처형당하는 참극을 빚었다.

이틀 뒤인 4월7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4인방 일원으로 '문혁의 붓'으로 불린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인민일보 기자가 쓴 '현장보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천안문 사건을‘반혁명 정치사건’으로 규정했다.

공산당 부주석이며 부총리이던 덩샤오핑은 배후 조종자로 몰려 모든 직책에서 축출되었고 총리서리로 있던 화궈펑(華國鋒)이 정식으로 총리에 임명되고 당 제1부주석에 선출되어 마오의 후계자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4인방과 덩샤오핑이 사생결단의 정치투쟁 과정에서 화궈펑이 또 다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덩샤오핑으로서는 3번째 실각이었으며 화궈펑으로서는 2번째 어부지리였다.

1976년 '4·5 청명절 천안문 사건'은 13년 뒤인 1989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6·4 천안문 유혈 진압 사태'과 발단과 전개 양상에서 진압 과정까지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해 10월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덩샤오핑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이 발표되고 1977년 7월 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당 부주석 자리에 복귀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해 1978년 11월16일 베이징 시당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혁명적 행동’이란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

이와 함께 이 사건으로 박해를 받았던 이들을 복권시켰다. 이해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완전한 혁명운동'으로 선포되었다.

1976년 청명절 천안문 시위는 발발 불과 2년8개월 만에 완전히 '평반(平反)'되었다.

하지만 89 천안문 시위는 29년째를 맞는 2018년 현재까지도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평반'이 꾸준하게 제기되고는 있으나 의미할 만한 움직임은 없다.

다만 2000년 9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 젊은 대학생의 열정을 이해한다"는 발언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