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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에 담긴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배경에 대한 논란?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에 담긴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배경에 대한 논란?

CIA bear 허관(許灌) 2016. 10. 16. 19:22

 

 노무현정부 때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머리소리함은 찬성을 요구했다

북한 김정일정부는 김정은정부와 다르게 중국이나 러시아정부 입장을 수용하는 경우도 많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대화 분위기 때문에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을 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김정일정부는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독재정부(국방위원회 권력)이고 북한 주민 다수가 식량난과 자유, 인권침해를 받고 있었다

 유엔 인권결의안은 북한 정부보다는 북한 주민입장에서 동조하는 것이 관례(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찬성)이다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이 북한 군사독재정부를 옹호하고 북한 자유화 민주화 세력(개혁개방세력)을 버릴때 남북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차기대통령 선거이명박정부 등장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 경제협력으로 남북 권력층(남북 뒷거래)이 부패하여 그런 인권문제도 소홀히 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미국, 인권유린 혐의로 북한 김정은 사상 첫 제재

미국 정부가 6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장을 인권유린 혐의로 첫 제재 대상에 올렸다. 미국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를 제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이 같은 조치로 가뜩이나 경색된 북·미 관계는 더 얼어붙을 전망이다. 남북 관계도 긴장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는 이날 미 의회에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를 나열한 인권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재무부는 이를 근거로 김 위원장을 포함한 개인 15명과 기관 여덟 곳에 대한 제재 명단을 공식 발표했다

제재 대상에 오르면 미국 입국 금지와 더불어 미국 내 자금 동결 및 거래 중단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북·미 관계가 오랫동안 중단된 상태여서 이번 조치가 북한에 실질적 타격을 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을 포함해 북한 정권 핵심부를 직접 겨냥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받을 심리적 압박감과 타격은 예상보다 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우리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조치”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 이외에 제재 대상에 오른 인사는 이용무 전 국방위 부위원장, 오극렬 전 국방위 부위원장, 황병서 국무위 부위원장 및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최부일 인민보안부장, 박영식 인민무력상,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경옥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강성남 국가안전보위부 3국장, 최창봉 인민조사부 조사국장, 이성철 인민보안부 참사, 김기남 선전선동부장, 이재일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조일우 정찰총국 5국장, 오종국 정찰총국 1국장 등이다.

기관은 국방위원회(6월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폐지·현 국무위에 해당), 조직지도부, 국가보위부와 산하 교도국, 인민보안부와 산하 교정국, 선전선동부, 정찰총국 등이다. 이 가운데 대량파괴무기(WMD) 관련 등 다른 혐의로 이미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인사 4명(이용무·오극렬·황병서·박영식)과 기관 세 곳(국방위·선전선동부·정찰총국)을 제외한 신규 제재 대상자는 김 위원장을 비롯해 개인 11명, 조직지도부를 비롯한 단체 다섯 곳이다.

이번 제재는 지난 2월18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첫 대북 제재 강화법에 따른 조치로, 이 법은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인권유린과 내부검열에 책임 있는 북한 인사들과 그 구체적인 행위를 파악해 120일 이내에 의회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sunee@hankyung.com

미국 정부, 북한 김정은 사상 첫 인권 제재 대상자 지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을 참관하고 있다. (자료사진)

미국 국무부는 6일 의회에 제출한 ‘북한의 인권 유린과 검열 보고서’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정권 내 개인 15 명과 8개 기관을 인권 제재 대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국무부는 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이 비사법적 살인과 강제실종, 자의적 구금과 억류, 강제노동, 고문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보고서 발표와 관련해 가진 전화회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주민들에 대한 억압적인 정책 등 정권의 행동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제재 대상에는 김 위원장을 비롯해 국방위원회의 리용무, 오극렬, 황병서 부위원장과 최부일, 박영식 위원 등 북한의 핵심 지도부가 포함됐습니다.

또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김경옥 제1부부장, 강성남 국가안전보위부 3국장, 인민보안부의 최창봉 국장과 리성철 참사, 선전선동부의 김기남 부장과 리재일 제1부부장, 정찰총국의 조일우, 오종국 국장도 제재 명단에 올랐습니다.

 

제재 대상 기관은 제재 대상들이 관련된 국방위원회와 조직지도부, 국가안전보위부와 산하 교도국, 인민보안부와 산하 교정국, 선전선동부, 정찰총국 등 8 곳입니다.

보고서는 북한이 지난달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가 국무위원회로 대체했다는 한국과 북한의 언론보도가 있었다며, 이런 보도 내용을 계속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정부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면 미국 입국이 금지되고 미국 내 자산은 동결되며, 미국인들과의 거래도 금지됩니다.

국무부의 이번 조치는 지난 2월 미 의회를 통과한 대북제재강화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법은 미 정부가 120일 안에 북한인권 관련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 재무부는 6일 국무부의 이번 조치에 맞춰 이미 제재 대상에 올라 있는 개인 4명과 기관 3 곳을 제외한 김정은 위원장 등 개인 11 명과 5개 기관을 제재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미 재무부의 애덤 주빈 테러.금융정보담당 차관 대행은 성명을 통해, 북한이 김정은 정권 아래서 수 백만 명의 주민들에게 비사법적 살인과 강제노동, 고문 등 견딜 수 없는 잔혹행위와 고난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미 의원들 "김정은 포함한 대북 인권 제재 환영"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이(좌) 엘리엇 앵겔 의원과(우) 대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은 미국 정부가 인권 유린을 이유로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정권 핵심 인사들을 제재 대상으로 삼은 것을 환영했습니다.

이번 제재의 근거가 된 ‘2016 북한 제재와 정책 강화법’을 공동 발의한 코리 가드너 상원의원은 6일 성명을 내고,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권 유린자 김정은, 그리고 20만 명의 북한인들을 감금한 북한의 고위 관리들에게 제재를 가한 재무부의 조치를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가드너 의원은 북한 정권을 평화적으로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는 무기 확산에 가담한 이들 뿐아니라 인권을 유린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점을 대북제재법이 명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북제재법을 공동 발의한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도 재무부의 조치를 환영하면서 “국제사회의 뜻을 거스르고, 북한 주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김정은의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를 것이라는 게 미 의회의 일치된 의견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메넨데즈 의원은 전세계 미국의 동맹들과 협력국가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해 북한을 압박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도 성명을 내고 “이번 제재는 북한 내 변화를 강제로 불러올 수 있는 중요한 조치”라며 “철저히 이행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로이스 위원장은 이번 조치는 매우 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원 외교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인 맷 새먼 의원도 행정부가 김정은을 포함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인권 제재를 가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새먼 의원은 이 같은 조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 유린국을 계속 압박하고 책임을 묻는 효과가 있다며, 북한에 추가 제재를 가하고 정보를 유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먼 의원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을 학대하는 것을 국제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북한 주민들이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VOA 뉴스

 

미국 정부 "북한 제재 명단 효과 기대...대상 추가 가능"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 (자료사진)

미국 국무부는 북한 인권보고서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인권 유린 혐의로 제재 명단에 올린 조처가 효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앞으로 관련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제재 대상을 추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은 6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이라면서 인권보고서를 만들고 제재 대상을 확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커비 대변인] "But in fact..."

하지만 미국 정부가 최선을 다해 종합적인 보고서를 내고 제재 대상을 선정했다면서, 앞으로 관련 정보가 들어오는대로 제재 대상을 추가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커비 대변인은 이번 조처의 실효성은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이를 통해 북한 인권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커비 대변인] "This is not just symbolic..."

이번 조처는 그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북한 인권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지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나 기관들도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커비 대변인은 강조했습니다.

 

커비 대변인은 이번 조처가 제재 대상자들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북한과 사업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만, 김정은 정권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옳은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커비 대변인은 강조했습니다.

 

그밖에 김정은 정권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으로 보는지 묻는 말에는 북한 정권의 대응을 예상하기는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녹취: 커비 대변인] "This is another oppurtunity..."

커비 대변인은 그러면서 이번 조처가 김정은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미국 정부의 이번 조처에 대한 북한의 반발로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오히려 북한이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커비 대변인은 반박했습니다.

VOA 뉴스

 

미 관리들 "북한 인권 제재는 행태 바꾸라는 경고 메시지"

                                                            지난 2012년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북송에 반대하는 시위중인 탈북자.

미 정부가 발표한 북한 인권·검열 보고서와 관련 제재는 북한 수뇌부 뿐아니라 중간급 관리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로 풀이됩니다. 심각한 인권 유린 행태를 개선하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경고인데요. 김영권 기자와 함께 이번 보고서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 우선 이번 보고서의 의미를 어떻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자) 미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과 관련해 핵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기울였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는 핵 뿐아니라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입니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은 6일 성명에서 “강제수용소 관리자들과 경비, 심문자들, 탈북자 체포조 등 북한에서 인권 유린에 책임이 있는 모든 정부 관리들에게 이런 행태를 바꾸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그동안의 대북 제재는 핵.미사일 개발과 불법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인권 문제와 관련해 처음으로 제재를 가했다는 것도 관심을 끄는 것 같습니다.

기자) 미 고위 관리들도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 국무부 고위 관리는 이날 전화회견에서 북한 정권의 압제에 책임이 있는 관리들의 이름을 이렇게 자세히 밝히는 작업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의 끔직한 인권 문제는 이미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COI)가 최종 보고서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했고, 유엔 안보리가 두 차례나 이 문제를 논의됐을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책임자를 제재한 이번 보고서가 새삼스러운 게 아니란 겁니다.

진행자) 가장 주목을 받는 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재 대상에 올린 겁니다. 미 당국자들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기자) 북한 정권의 모든 정책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 결정권자에게 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을 인권 유린 혐의로 제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란 설명입니다. 국무부 고위 관리는 이날 회견에서 “자국민을 억압하는 정책 등 북한 정권의 행동에 궁극적인 책임이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에게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관리 역시 북한에서 인권 유린에 가장 책임이 있는 한 사람을 뽑으라면 그 답은 김정은 위원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이렇게 미 정부의 제재 대상에 오른 전례가 있습니까?

기자) 네, 여러 전례들이 있습니다. 미 재무부의 고위 관리는 6일 회견에서 최근 사례로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리비아의 전 독재자인 무아마르 가다피, 미얀마의 독재자였던 탄 슈웨 장군,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고 지도자를 제재 대상에 올리는 것은 이례적인 게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진행자) 이번 보고서는 미 의회가 채택한 대북제재강화법에 따라 발표된 거죠?

기자) 형식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 법이 304조에서 북한의 심각한 인권 유린이나 검열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과 기관들을 규명해 의회에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 국무부 고위 관리는 의회가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시기와 형식은 분명히 대북제재강화법과 연관이 있지만 이런 작업은 법안이 채택되기 전부터 여러 달에 걸쳐 진행됐다는 설명입니다.

진행자) 미 정부가 일찌감치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해 제재를 준비해 왔다는 얘긴가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 관리는 북한의 심각한 인권 문제가 이미 유엔 안보리를 통해 공론화 됐고,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가 그 책임이 김정은 위원장과 정권에 있다며 국제형사재판소 (ICC) 회부를 권고한 만큼 이번 제재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관리는 특히 인권 개선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며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북한 정권의 위협과 이런 인권 유린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진행자) 그럼 국무부 보고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북한의 주요 기구들이 모두 포함됐지요?

기자) 그렇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핵심 기관들이 모두 포함됐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발표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미 국무부 고위 관리는 북한의 강제수용소 운용과 탈북민들을 체포하는 중간급 관리들의 명단도 규명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북한 주민들의 외부 소식 접근을 차단하는 선전선동과 검열담당 관리들의 명단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들의 명단이 추가로 공개될 것이란 얘깁니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 역시 성명에서 이런 심각한 인권 유린과 검열 등 북한 정권의 압제에 관여한 개인들과 기관들을 추가 보고서들에서 계속 규명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진행자) 기관별로는 어떤 문제를 지적했나요?

기자) 국방위원회는 인권 유린으로 가장 악명 높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 등 여러 핵심 기구들을 직접 지휘하는 권한,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정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비밀기구들을 운용하는 가장 강력한 기구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검열과 사상 검증도 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앞서 말씀드린 기구들의 집행기관으로 고문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연루돼 있고, 북한 최악의 인권 유린 장소로 불리는 정치범 수용소를 운용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혔습니다.

진행자) 미 정부 관리들은 앞서 소개해드렸듯이 북한 내 인권 유린에 관한 매우 포괄적인 보고서라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럼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기자) 국무부 고위 관리는 상징적 메시지와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한 수뇌부외 그 아래급에서 중간급 관리들에게 강제수용소를 운용하고 탈북자를 추적해 계속 체포하면 당신들의 신상을 밝혀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래에 상당히 불리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란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이 관리는 이번 보고서와 제재로 당장 북한 내 문제들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재고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행자) 나중에 대가를 치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지금의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고 북한에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거나 통일이 됐을 때 국제법 기준에 따라 책임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미 관리들과 전문가들은 반인도 범죄에 관여한 책임자들은 수 십 년이 걸려도 결국 법정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 받게 하는 등 처벌하게 하는 국제 사례들을 지적합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대학살이나 보스니아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관리들이 수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처벌을 받듯이 북한에서 인권 유린에 관여한 책임자들 역시 이를 지속하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란 경고입니다.

진행자) 이번 제재로 미 정부의 제재 명단에 오른 북한 관리들의 수가 추가됐지요?

기자) 그렇습니다. 미 재무부 고위 관리는 이전까지 161건에 달하는 개인과 기관들이 제재 대상에 올랐는데 이번에 개인 11명과 기관 5곳이 추가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무부가 6일 밝힌 개인 15명, 기관 8곳과 차이가 있는 것은 이미 제재에 오른 개인과 기관이 중복됐기 때문입니다. 국무부와 재무부 관리들은 조사가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제재 대상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진행자) 네, 김영권 기자와 함께 미 정부가 6일 발표한 북한의 인권 유린과 검열 보고서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

 

"김정은 제재 포함, 북한 정권에 큰 심리적 타격"

 

지난 4월 서울에서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진이 걸려있다. (자료사진)

한국 내 북한인권 활동가들은 북한이 이번 미국 정부의 김정은 제재 명단 포함으로 인해 상당한 부담과 압박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전환기 정의워킹그룹’의 이영환 국장은 7일 미국의 이번 조치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면 북한 지도부에 1차적 책임이 가해진다는 메시지가 명확히 전달될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 국장은 다른 독재국가의 경우 대규모 인권 유린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하급 간부나 수용소 경비병 등에게 책임을 묻고 상급 간부는 빠져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국장은 이번 미국 정부의 조치로 북한의 하급 간부들이 상급자의 명령을 회피하거나 이행하지 않을 동기가 부여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이영환 국장/ 전환기정의워킹그룹] “과거처럼 잔인하고 지나치게 인권 유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좀 자제를 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상급자의 명령이 과하다, 지나치다 싶을 땐 회피하거나 명령 불이행을 할 그런 동기가 부여된다는 게 중요하고…”

이 국장은 또 미국의 이 같은 조치에 따른 ‘나비효과’가 분명 나타날 것이라며 특히 아프리카와 같은 북한의 무역 대상국들의 경우 북한과의 거래나 통상을 주저하거나 관계를 끊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아울러 북한 정권이 느끼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상당한 만큼 북한은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은 미국 정부의 이번 조치가 지난 3월 한국 국회를 통과한 북한인권법과 오는 9월 시행되는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건립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김영자 사무국장/ 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인권기록보존소와 기록센터를 만드는 건 북한 주민에게 함부로 하는 권력에 대해 북한인권 관료들도 북한 주민에게 함부로 할 수 없고 북한 주민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거든요. 김정은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는 것은 그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독일 경우도 보면 그런 감시하는 기구가 있고 너희가 하는 일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을 북한 당국이 알게 된다면 한 대 때릴 거 안 때릴 거고 그런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영자 사무국장은 다만, 김정은 위원장 이전의 통치자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재 대상에 오르지 못한 것이 개탄스럽다며 이제라도 김정은 위원장이 제재를 받게 돼 다행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함경북도 회령과 평양시 승호구역 26호 등 북한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 출신의 안명철 ‘엔케이워치’ 대표는 북한 지도부가 자신들의 최고 지도자가 제재에 포함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심리적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실제 상부의 명령을 받아 인권 유린을 저질렀던 많은 하급 관리들이 그렇게 느꼈고 지금도 느낄 것이라는 겁니다.

[녹취: 안명철 대표/ 엔케이워치] “저도 수용소에 근무할 당시에 보위부원들 속에서도 유엔이나 국제사회가 북한 수용소 문제나 가해자에 대한 제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심리적 부담으로 인해 정치범들 다룰 때 함부로 다루지 못했어요. 언젠가 그 사람들 처벌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10번 때릴 것을 한두 번 때리게 되죠. 심리적 부담이 굉장히 큰 겁니다.”

안 대표는 아울러 미국 정부가 앞으로 구체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제재를 어떻게 실행할지가 더욱 중요하다며 미국 정부의 꾸준한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탈북단체총연합회’ 한창권 회장은 북한 당국이 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인권 유린을 저지르고 있는 만큼 김정은 위원장의 제재 명단 포함에 그치지 말고 더욱 더 강하고 실질적인 압박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VOA뉴스

 

한국 "김정은 포함한 미국 정부 북한인권 제재 환영"

 

조준혁 한국 외교부 대변인이 7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미국 정부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포함한 북한 인권 침해자들을 제재한 것에 대해 공식 논평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등 북한 권력층의 핵심 인사들을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자로 지목해 제재키로 한 미 행정부의 조치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한국 외교부 조준혁 대변인은 7일 논평을 내고 개별국가나 국제기구 차원에서 취하는 북한 인권 관련 최초의 제재 조치라며 높이 평가하고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조준혁 대변인 / 한국 외교부] “이번 조치는 김정은 위원장을 포함한 북한 인권 침해에 책임 있는 관료들을 구체적으로 지정함으로써 앞으로 이들의 책임 부담을 확연히, 명확히 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 정부로선 이를 높이 평가하고 환영하는 바입니다.”

조 대변인은 미국의 이번 조치가 지난 2월과 3월 각각 대북제재법과 대북 제재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지난달 북한을 자금세탁 주요 우려 대상으로 지정한 데 이어 나와 다면적 대북 제재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또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북한인권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제고하고 국제사회의 논의와 관련 조치를 한층 강화하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도 기자들을 만나 미국이 구체적으로 책임자를 지목함으로써 경고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내 인권 침해를 억제하는 효과를 노렸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제재 대상에 포함된 배경에 대해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북한인권 침해가 광범위하게 다뤄졌고 최고 지도자의 지시가 언급돼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김 위원장이 제재 대상으로 지정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미 간에는 북한 문제에 대해 매우 긴밀하게 공조하고 있고 이번 사안도 예외가 아니라고 밝혀 미국이 제재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협의가 있었음을 내비쳤습니다.

한국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박형중 박사는 미국이 이례적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를 제재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엄중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북 핵 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 분석했습니다.

[녹취: 박형중 박사 / 한국 통일연구원] “미국의 입장에선 정권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북한이 핵 문제 등 다른 문제들에 타협적으로 나오도록 만드는 그런 과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중 박사는 그러면서 미국의 이번 조치가 김 위원장 측근들에 대해선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북한 주민들에겐 최고 지도자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녹취: 박형중 박사 / 한국 통일연구원] “인권 제재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고 그리고 김정은 자체를 제재한다는 게 북한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충성을 하고 있는 집단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른바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온 전례에 비춰 상당 기간 미국에 대한 거센 비난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양무진 교수입니다.

[녹취: 양무진 교수 /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은 체제와 존엄 문제를 가장 중시하는 특수체제이기 때문에 아마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기관에서 성명이나 담화를 통해서 충성경쟁을 하듯이 미국에 대한 비난을 퍼부을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전망합니다.”

동국대 북한학과 고유환 교수는 다만 북한의 반발이 당장 무력도발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녹취: 고유환 교수 / 동국대 북한학과] “북한 입장에서야 이젠 핵 보유국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대외관계를 풀자는 입장이니까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대내 결속이나 대미 항전이랄까, 그런 쪽으로 활용하겠죠.”

전문가들 사이에선 다음달 말 미-한 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에 북한이 당장 무력도발에 나서기 보다는 시기를 저울질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VOA뉴스

 

미, ‘인권유린’ 김정은 사상 첫 제재

 

                                                                 미국 국무부의 톰 말리노우스키 민주주의∙인권∙노동 담당 차관보

앵커: 미국 정부가 6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장을 포함한 인권 유린 가해자와 기관에 대해 제재를 단행했습니다.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북한 최고지도자를 제재 대상 목록에 올린 것입니다.

양희정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미국 국무부는 6일 심각한 인권 유린과 통제를 자행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등 북한의 개인 15명과 기관 8곳을 인권 유린의 책임자로 적시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미국 재무부도 즉각 이들을 제재 대상 목록에 올렸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미국 입국 금지와 미국 내 자금 동결과 거래 중단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번 보고서 제출과 이에 따른 제재 단행은 지난 2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첫 대북제재강화법(H.R. 757)에 따른 조치입니다.

이 법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북한의 인권 유린과 내부 검열에 책임이 있는 북한의 인사들과 그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120일 이내에 의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의 톰 말리노우스키 민주주의∙인권∙노동 담당 차관보는 자유아시아방송에 이번 제재 목록에 오른 이름 이외에 북한에서 극악한 인권유린에 가담하고 있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고 강조했습니다.

말리노우스키 차관보: 김정은(위원장)을 인권유린 가해자로 지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탈북자 체포나 정치범 수용소 가혹 행위 등 참혹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 익명의 인물들을 색출해 제재 대상에 올리고, 향후 한반도 정치 상황이 변할 때 그들에게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리고 싶습니다.

기존 대량파괴무기 관련 등의 혐의로 이미 제재 대상에 오른 리용무, 오극렬, 황병서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박영식 인민무력상 등 4명 이외에 이번 목록에 새로 제재 대상에 오른 개인은 김 위원장과 최부일 인민보안부장,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 11명 그리고 기관은 조직지도부, 인민보안부 등 5곳입니다.

미국 정부는 지난 3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현재 국무위원회에 해당하는 전 국방위원회를 비롯한 5개 기관과 황병서 총 정치국장 등 개인 11명을 특별제재대상에 올린 바 있습니다. 이어 지난달에는 북한을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했습니다.

국무부의 존 커비 대변인은 6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보고서는 인권 탄압 등 북한 정권에 의한 최악의 억압에 연루되거나 책임이 있는 개인이나 기관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보고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향후 보고서를 통해 더 많은 개인과 기관을 가려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보고서는 특히 경비와 심문 등 정치범수용소 운영에 관여하는 자, 탈북자를 추적하는 자 등 북한에서 인권 유린에 가담하는 관리들의 행동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보고서는 북한 정권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 강제실종, 임의적 체포와 구금, 강제 노동과 고문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가족까지 포함해 8만명에서 12만 명이 수감된 정치범 수용소에서 이 같은 수 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재무부의 애덤 수빈 테러∙금융정보담당차관대행은 김정은 정권은 북한 주민에게 이 같은 참을 수 없는 잔혹행위와 고통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자유아시아방송)

 

 

김정은 미국 제재(사진)

 

 

 

 

 

 

 

 

                                                                                       철부지 어린 북한 군주 김정은

                                                                                                 김정은 고아원 방문, 평양

 

                                                                                                    미사일 발사현장에서 김정은

 

                                                                                            김정은 평양 미팅

                                                                                                 군사훈련 중 김정은

 

                                                                                  제 4차 최고인민회의 김정은, 평양

 

                                                                                              연구원들과 함께 김정은

 

                                                                                                김정은 실크공장 시찰, 평양

 

 

                                                                                               미사일 발사현장에서 김정은

미국이 김정은 북한 지도자를 상대로 제재를 가했다. 또 워싱턴이 생각하기에 인권을 유린한 것으로 판단되는 22명의 고위급 관료들과 국가기관을 상대로 제재조치를 발동했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 

 

 

미국, 북한 '인신매매 최악국가' 지정[영하 25 ℃ 죽음의 생명을 작업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 생활  모습]

 

 

 

                                      중국 관광객 상대로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아동들 모습[북한 인신매매 주요 공급지와 경유지  중국]

미국 국무부가 북한을 인신매매 방지 활동과 관련해 2003년 이래 14년 연속으로 최하 등급으로 지정했습니다. 

미 국무부는 30일 연례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를 발표하고 "북한은 강제 노동, 성매매를 당하는 남성, 여성, 아동의 근원이 되는 국가(source country)"라면서 14년째 최악의 등급인3등급 국가”라고 발표했습니다.

국무부는 3등급 국가는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기준도 충족하지 않고, 개선 노력도 보이지 않는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이번 보고서는 "1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무는 북한 여성들이 인신매매에 취약하다"며 "일부 탈북 여성이 중국인이나 한국계 중국인에 의해 성 노예로 전락한다는 보고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만약 중국 당국에 적발되면 강제 북송 돼,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거나 심지어 숨지기도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보고서는 “북한에서 수용소에 갇힌 주민들이 약 8만명에서 12만명으로 추산된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올해 인신매매 보고서는 북한이 상당수의 노동자들을 러시아, 중국에 보냈으며, 중동,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국가들에도 파견된 많은 북한 노동자들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무부는 많은 해외 북한 노동자들이 위험한 기후조건 아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북한 당국의 특별 감시자들 (minders)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이동과 소통의 제한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해외 파견 북한노동자들은 임금의 극히 일부만 받고, 귀국할 때까지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당국자들의 협박과 착취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서는 지적했습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30일 이번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는 전세계의 인신 매매 근절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이어 이번 인신 매매 등급이 정치 관계와는 무관함을 강조했습니다.

존 케리:  이번에 평가한 인신매매 등급은 정치적인 관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국가들의 인신매매 방지 노력을 객관적으로 점검한 결과입니다.

올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과 함께 3등급에 속한 국가들은 알제리, 감비아, 아이티, 이란, 러시아, 수단, 시리아 즉 수리아, 우즈베키스탄, 짐바브웨 등 27개국입니다.

지난해에는 북한과 함께 3등급으로 지정된 국가는 러시아와 이란 등 23개국이었습니다

 

 

2009년 탈북여성 2명이 워싱턴 DC 내셔널프레스센터에서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북한여성 인신매매 인권보고서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겪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참혹한 고통을 눈물로 생생하게 증언해 참석자들을 울렸다. 무산광산 선전대 여배우 출신인 방미선 씨가 기자회견 중 강제수용소에서 맞은 허벅지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영하 25 ℃ 죽음의 생명을 작업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 생활  모습

영국 "데일리 메일" 23일 뉴스에 따르면, 16일 북한 수용소  경비원이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잔인한 생활을 폭로했다

이 보류 그의 이름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리 가드의 가족의 이름, 그것은 캠프는 약 2,000 정치범을 수용 사실을 알게 된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촬영 후 사망했다.

그의 가족과 함께 김정은과 국가에 대한 불만세력 일부 고위 정치 관리는 수용소로 보내졌다.전 가드는 이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족 구성원 사이의 재산을 박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범 수용소는 200 평방을 차지한다

죄수의 조건이 영하 25도를 작동하도록 강요에서 기아는 많은 사람들이 소진(사망) 될 때까지 작동하는 일반적인 일이다.

 

                                                                          사진 여성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 경비병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포로 모습이다. 그들의 사형 집행이  정치범수용소 경비원 접근이 가능하게 했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를 처벌 할 수있는 몇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이 굶주림으로 쥐, 뱀과 개미등을 잡아 먹고 생활하고 있다

 

                                                        시체보관실에 시체를 쥐들이 먹고 살아간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자료-

 

 

 

                                                                                             북한 인민군 식량난과 영양실조 모습

                                                       북한 인민군 병사가 급류에 남한으로 남하하여 유엔군이 북한으로 입북시키는 북한 병사 모습

북한정부는 아동들의 영양부족으로 인민군 입대 신체 조건을 "키 138cm이상, 몸무게 43Kg 이상"으로 실행하고 있다

14세때 징병명부 등록, 15세때 신체검사, 16세부터 인민군 입대를 하고 있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년,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년.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단,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농업과 공업국영기업)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고달픈 평양 서민(평민)들은 지금 무엇을 원할까 핵무기도 아닌 빵(개인의 생존권 衣食住)이다

북한은 1인당 GDP $2,400(2014년도,채무불이행 국가) 국영자본체제이다

 

 

 

 

 

 

 

 

 

 

북한 병원 수술실 어두운 곳에서 녹슨 메스(mes, 수술·해부·공작 등에 쓰이는 작고 날카로운 칼)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의 의과 대학 교환 학생 요시야 · 차씨는 최근 북한 병원 수술실 환경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사진을 촬영했다. 북한의 의료 연수생이 녹슨 녹슨 메스(mes, 수술·해부·공작 등에 쓰이는 작고 날카로운 칼)를 가지고 어두운 곳에서도 수술을 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2014년 12월 27일 밤 1명의 북한 탈영병이 총을 가지고 북한과의 국경에 있는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구 화룡시(和龍市 ) 마을에 들어가서 주민 4명을 총살 도주 했다. 중국 경찰당국은 그 날 북한 인민군 탈영병에게 외상을 입게 해 잡았다. 이들은 북중 국경의 모습을 촬영 한 사진이다

 

                                                         

                                                                             Female soldier to the lookout(여군의 교도소 경비)

 

 

 

 

 

 

 

 

 

 

 

 

 

 

 

The secret of North Korea's female prison emerge.

North Korea's Women's Prison is underdeveloped model

[북한의 여성 교도소의 비밀이 드러나다. 북한의 여자교도소는 후진국 모델이다]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북한은 1인당 GDP 583달러(2012년도)로 채무불이행 국가[CCC-등급이하, 신용카드 발급이 되지 않는 나라]이다 북한 전체 주민 중 33%이상이 기아와 영양실조 위기 주민이다[North Korea is a country with per capita GDP 583 defaulting dollar.(2012, CCC- rating below the credit card issuing country does not)  More than 33% of the entire North Korean population is this hunger and malnutrition crisis residents.]

 

                                                                         북한 아동들이 군사훈련 때 사용하는 목총 모습

북한 주민들은 중학교 졸업 후 17세때 군 입대 하여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군 복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군사훈련 교과 교육을 받고 있다   

 

                                                         북한 여학생들이 목총을 들고 교련 군사훈련 동원하는 모습            

 

                           

                                      

 

                                     북한  여성 병사(여군)들이 압록강 유역에서 빨래하는 모습

"북한은 남녀 징병제 국가로 의무교육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군 복무를 하고 있다"

 북한 여군생활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 여자병사는 중학교 졸업 후 17세때군 입대하여 7년간 군 복무를 해오고 있으며 하급장교는 8년 차에 가능하다 하급장교는 군사학교(대학) 출신이 대부분이고 군 복무 후 결혼을 하거나 취업, 군사교욱 후 하급장교로 생활하고 있다 

 북한 여성이 선호하는 결혼 상대자는 대학출신이나 노동당 간부(공무원), 군인(장교) 등이다

 북한 여군은 일년 내내 휴일이 없고, 평민(민간인)과 대화 금지, 심지어 가족과도 접촉을 제한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립대학 학생인 오토 프레데릭 웜비어 씨의 북한의 정치 슬로건 게시물을 훼손하는 순간 장면 공개

올해 21살인 웜비어 씨는 중국 시안에 본사를 둔 북한 전문 여행사를 통해 북한에 여행을 갔다가 지난 1월 2일 출국 과정에서 구금됐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웜비어 씨가 지난달 29일 회견에서 "양각도 국제호텔 종업원 구역에서 조선 인민에게 자기 제도에 대한 애착심을 심어주는 정치적 구호를 떼버리는 범죄를 감행했다"고 '범죄행위'를 사죄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북한 최고재판소가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운데) 씨에게 국가전복음모죄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 했다고,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한 당국이 억류 중인 미국 시민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볼모로 삼으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16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억류한 미국 버지니아주립대학 학생 웜비어 씨에게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한 데 대해 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북한이 웜비어 씨를 체포하고 구금한 이유로 제시한 혐의는 미국이나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 체포나 구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어니스트 대변인은 웜비어 씨가 형사재판 절차를 거친 만큼, 미국은 북한 당국에 그를 특별사면해 즉각 석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도 북한이 웜비어 씨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마크 토너 국무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억류 미국인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안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을 볼 때 북한이 바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토너 부대변인은 이런 상황은 북한 여행과 관련된 위험성을 보여줄 뿐이라면서, 미국과 국무부는 미국 시민의 모든 북한 여행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두 차례나 반복했다.

또 북한 여행을 고려 중인 미국인은 국무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여행경고를 반드시 읽을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토너 부대변인은 백악관과 마찬가지로, 북한 당국에 웜비어 씨를 특별사면해 인도주의적 배려 차원에서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상류층의 생활모습

                                                                        비밀한의 나이트 클럽 내부(사진)

1인당 GDP $2,400(2014년도) 국영자본체제 북한에서 서민층(평민층)은 빈곤한 생활을 하지만 상류층은 사치와 향락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빈곤한 생활을 하지만 북한 연주 나이트 클럽은 하루 종일 우아하고  행복한 환경이며 세계적 수준 나이트 클럽이다

 

  북한 주민들은 빈곤한 생활 모습이지만 그러나 북한의 풍부한 놀이 내부 나이트 클럽 흥분했다.

 

 

주체사상탑 동쪽 도로  대동강 맥주 체인 위치한 최근 개업한 독일 술집(Bar)이다

분위기 베이징 산리(삼리, 三里) 순 술집(Bar) 느낌이고 다음 독일인이 즐기는 소시지(sausage), 프랑스인 즐기는 감자튀김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술집(Bar)을 찾은 외국인과 북한 주민들은 신선한 생맥주를 즐길 수 있다

 

5월 초 평양특별시 동대원구역 매당화관(梅棠花館)이 오픈했다

쇼핑, 음식, 수영.체육, 목욕, 마사지, 미용등을 즐길 수 있는 소비구역이다

마사지 30$,  수영 15$, 찜질방 5$ 등으로 다른 곳보다는 50%(절반) 가격이다

 

평양특별시 동대원구역 매당화관(梅棠花館)은 류경호텔에 비교하면 가격은 공공적( public)으로 싼 편이다

북한 돈으로 사우나 5000원, 탁구 1000원, 목욕 100원이다[중국 돈 1위안화는 북한 돈으로 약 147원이다. 중국 돈 1위안화=북한 돈 147원]

평양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아하는 장소가 바로 매당화관(梅棠花館)이다.

어떤 축제를 벌일 상업거리, 중국이나 서구 도시의 소음에 익숙해 압도적인 포스터와 간판이 없다, 평양 사람들의 생활 조용하고 고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여행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 오락), 영화 관람, 볼링, 댄스, 많은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평양에서도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과 장소에 도움이 되는 건물이 건설되고 있다

 

북한 대다수 평민층은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상류층이 밤에 즐기는 나이트 클럽 내부를 보고 흥분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술집 호스티스(酒女)들이 보였다

중국인 관광객과 술집 호스티스(酒女)들이 노래를 하는 모습이다

북한은 경제침체와 평민층 식량위기로 각국 정부는 북한에 식량을 원조하고 있다 북한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의 나라 살고 있지만, 최근 인터넷에서 "비밀 나이트 클럽 관계자" 사이트를 보고 놀래

 

북한 상류층 여성들의 호화생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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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韓“白富美”豪宅生活

북한 상류층 여성들의 평양시내 고급주택과 수영장에서 호화생활 모습 사진입니다 북한은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평민층(빈곤층과 평민층), 상류층으로 구분돼 있으며 상류층은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평민층은 식량난과 배고픔으로 신음해오고 있습니다

북한 상류층은 핵무기 보유와 세습제 좌익군정을 옹호하고 있고 평민층은 핵무기 포기와 개혁개방화 정책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은 북한 상류층의 안보논리 자주노선보다는 평등사상 서구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 빈곤한 생활모습

 

서방 기자가 눈으로 본 북한 상류층들의 반한 항의 집회

 

 

 

 

 

 

 

 

 

 

북한 반미나 반한 항의집회는 북한 상류층(북한 전체 주민 중 대학진학 계층 30%이하 세력) 주도 집회이다

북한 평양에서 2012년 4월 20일에 수백 집회가 열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당시)이 북한 최고 지도층의 존엄성을 비방,비판했다고 한국에 사과를 요구했다. 또한 한국이 사죄을 하지 않을 때 "신성한 전쟁(神聖의 戰爭)"에 직면 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사진은 한국 이명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10 만명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일사불란 동작을 보였다.

북한에는 불법 시위 집회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항의 집회는 국가와 관련 부서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 북한정부 항의집회는 세습제 좌익군정(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주도 북한 상류층 집회이다

 북한의 항의 집회에는 대형 인원수가 많다는 것이 첫번째 특징이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참가자들이 수십 만명에 부풀어 오른다. 평양의 인구는 300만 여명으로 시가지의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자가 취재 한 결과, 항의 집회가 열릴 때마다 주민들이 마을을 비우고 정부 주도 항의집회에 참여하다 정말 장관이다.

 

두 번째 특징은 날씨가 어떻든 필요한 경우 수십 만명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들은 비나 눈 등의 환경의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자가 시위에 참여한 다음날 김일성 광장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서 있던 위치가 두꺼운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세 번째 특징은 매우 질서 것이다. 입장과 항의 집회 과정 외에도 집회 종료 후 퇴장에도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진행된다. 일단 어떤 사람은 "교통의 정비가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수십만 명의 퇴장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불분명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감탄했다.

 

네 번째 특징은 구호가 하늘을 흔들 것이다. 북한 지도자가 담화를 발표 할 때, 혹은 각 부문의 대표가 발언 할 때, 사람들은 목소리로 구호를 외친다. 기자와 같은 1980 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향해 수십 만명이 목소리로 "만세"라고 외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는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은이다. 김정은이 항의 집회에 참석 할 때마다 수십만 명이 목소리를 딱 맞춰 "김정은 동지 만세, 만세"라고 외친다. 기자는 현장을 취재하고 마음이 가물가물 했다.

 

북한 반미나 반항 항의집회는 북한 상류층 집회이다

 

북한정부도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국방위원회와 인민군총참모부, 지도자와 군벌]에서  연합군(연방군) 군정통합주의 문민정부[인민정부, 주석과 수상, 내각(인민무력부장)]으로 권력변경이 돼야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포기와 평민층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
북한 주민은 대학진학 상류층(30%이내)과 의무교육 중졸 평민층(70%이상)으로 구분 돼 있다  북한 주민 중 30% 배고픈 사람들(영양실조와 기아위기 계층)이다

북한 상류층이 반미 반한성향이라면 70% 평민층은 친한 친미성향이다

그들은 북한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 국방위원회 권력 김정은 퇴진을 원한다

 

*국영자본체제 북한(자료)

1인당 GDP $2,400(2014년도,채무불이행 국가) 국영자본체제 북한[북한은 1인당 GDP(국민소득) 583달러(2012년도)이다]

1.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중국인이나 외국인 투자가들도 상가나 고급 아파트등을 소유하고 있는 분도 많다 북한이 개혁 개방화 될 수록 임대 아파트보다는  개인 소유 아파트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표,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2.북한 남녀징병제 국가로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중국은 직업군인 지원 모병제이지만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북한 인민군 병사의 수는 120만 명으로 이 중 여성 군인은 15% 약 17만명에 달했다. 북한의 인구는 약 2400만명으로 1000명에 7명이 여성 군인, 인민군 군인 100명에 15명이 여성 군인 ​​셈이다

북한정부는 북한 아동들의 영양부족으로 인민군 입대 신체 조건을 "키 138cm이상, 몸무게 43Kg 이상"으로 실행하고 있다

14세때 징병명부 등록, 15세때 신체검사, 16세부터 인민군 입대를 하고 있다

병역 근무 자리 비리가 북한 군부내 가장 큰 비리로 알려지고 있다 

매관행위는 인민군을  감시하는 총정치국 정치 지도원이라는 유리한 자리에는 5 천 ~ 2 만 달러 (약 50 만 ~ 200 만 원), 지방 관리는 약 5 천 중국 위엔화 (약 8 만원)에 직위를 사고 파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식통은 "공직에 붙으면 뇌물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1주일에 의거을 회수 할 수 있다고 된다"고 말했다

현역군인이나 군(軍)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년,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년.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단,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3.제3공화국 헌법과 자영업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에 자영업이 늘고 있다. 1990년대 장마당 상인으로 출발한 자영업자들이 숙박업, 개인 버스, 사금융업, 아파트 매매 등으로 활동을 넓히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북한에 ‘돈주’로 불리는 신흥자본가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고 영국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지난 10월29일 평양발 기사에서, “돈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돈주가 외화를 써가며 비공식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전했다.

‘돈주’는 1990년대 후반 발생한 ‘고난의 행군’의 산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이 문을 닫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장마당으로 나와 장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바로 돈주라는 것이다.

"써비차는 개인이 하는 운송, 버스, 택시 이런 건데,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경제난 이후 개인들이 먹고 살려고 만든 건데, 이것 없이는 이동을 못해요.”

이밖에 숙박업자, 노래방 업자, 비디오 촬영업자, 매대 분양업자도 생겨난다

4.북한 부채 140억달러

미 재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30여개국에 140억달러의 빚을 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별 부채 규모는 1위 중국( 69억8000만달러), 2위 러시아(10억1000만달러), 3위 일본(3억달러), 4위 스웨덴 (3억3000만달러), 5위 이란(3억달러)과 독일(3억달러), 6위 프랑스(2억8000만달러), 7위 태국 (2억6000만달러), 8위 오스트리아(2억1000만달러), 9위 시리아(1억4000만달러), 10위 스위스 (1억달러), 11위 대만(8600만달러) , 12위 이라크 (5000만달러) 등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회의정부 인민민주주의를 포기하고 1970년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으로 인민경제 파탄 일인 장기집권과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를 수립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남한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으로 북한 전체 부채 절반 수준 69억8000만달러이다

5.북한 영화는 우리식 사회주의 김일성노선으로 군대 방식으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이나 서양사람은 적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정치 선전물로 입장료는 무료이다

북한 영화는 예술성이 없고 권력의 시녀이다

북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영화도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며 정치 선전에 적합하여야 한다.

북한 영화의 촬영은 군의 관리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연자가 하는 말과 시간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북한 헌법

1.제1공화국--인민 민주주의 헌법(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 순수 내각책임제)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 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1)제1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 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 되었다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1972년 12월 14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총사령관-김일성 내각수상(노동당 총비서=노동당 당수)

2. 제2공화국-사회주의 헌법(사회주의 공화국, 주석제 또는 신대통령제)

(1) 제2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1994년 7월 8일

ㄴ.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통수권자(총사령관)

ㄱ.김일성 국가주석 겸 내각수반,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및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 1972년 12월 15일-1991년 12월경

ㄴ.김정일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노동당 중앙 군사부위원장) 1991년 12월--1998년 9월 5일

3.제3공화국-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제3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2)인민군 총사령관과 군정(내각) 책임자(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총참모부

ㄱ.김정일 국방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총비서)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

ㄴ.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제1비서) 2012년 4월 12일--현직

*Separation of the military administration and command[軍政分離主義,兵政分離主義]

North Korea, Imperialism etc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과 군령을 분리된 국가제도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의 역할을 내각과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로 분리함으로써 군정은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에 두지만 군령은 정부나 의회보다 우월한 군령권을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군 통수권에 정치적 판단(의회통제)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최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군 인사권이 주어지고 있다

군정분리주의는 군(軍)통수권 독립이 허용되는 모델로 국가수반(국가주석이나 총통)이 군 통수권자가 아닌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다

1,중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중앙군사위원회 조직이다(당군이론)

제4절 중앙군사위원회(中央軍事委員會)

제93조 ①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는 전국 무장역량을 영도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아래 자로 구성한다.

주석·부주석약간인·위원약간인

②중앙군사위원회는 주석책임제를 실행한다.

③중앙군사위원회의 매회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회 임기와 같다.

제94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책임을 진다.[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절]

2.북한:북한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이다(당군이론)

제2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제 100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령도자이다.

제 101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임기는 최고인민회의임기와 같다.

제 102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반적무력의 최고사령관으로 되며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한다.

제 103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국가의 전반사업을 지도한다.

2. 국방위원회사업을 직접 지도한다.

3. 국방부문의 중요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4. 다른 나라와 맺은 중요조약을 비준 또는 페기한다.

5. 특사권을 행사한다.

6. 나라의 비상사태와 전시상태, 동원령을 선포한다.

제 104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명령을 낸다.

제 105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

제3절 국방위원회

제 106 조: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국방지도기관이다.

제 107 조: 국방위원회는 위원장,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제 108 조: 국방위원회임기는 최고인민회의임기와 같다.

제 109 조: 국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선군혁명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국가의 중요정책을 세운다.

2. 국가의 전반적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한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집행정형을 감독하고 대책을 세운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페지한다.

5. 국방부문의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

6. 군사칭호를 제정하며 장령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제 110 조: 국방위원회는 결정, 지시를 낸다.

제 111 조: 국방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북한 헌법 제2.3절]

3.이란

이란정부도 병정분리주의(兵政分離主義) 군사정책으로 외교·국방·언론·사법·전쟁선포권등 최고지도자 권한이며 선출직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한다

이란정부는 자유선거 제도 도입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 형태로 대통령이 외교 국방등 실질적 권한을 행사해 나가고 있다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북한 군부 실권자]

 

1.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소련군정의 치스차코프 대장] 1945년 8월 15일-1947년 2월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최용건 민족보위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47년 2월 -1950년 7월 4일 

3..김일성 군사위원회(내각 수상) 위원장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50년 7월 4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4.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5.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6.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7.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독일정부 통일정책: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으로"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공화국(자유사회 선진국)이다"1단계-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반공산주의)자본주의 3대원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시장경쟁원리등2단계-민주화 정책(민주주의=반국가사회주의)민주연합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공동정부 수립(통일정부)

"남한 김일성주의 반군무장단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민혁당의 새세대)을 제거할 것도 Guide Ear(귀, 뇌 감청기 조언과 망각.명령.능력부족-뇌 조종)팀이 아닌 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  요원 Bird's Eye(눈,해독-요원의 지적능력)이다

남한 김일성주의 반군무장단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민혁당의 새세대)란

반제동맹(김영환팀의 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1990년 1월 새세대, 민혁당 등)"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은 국제기구 요원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태어 날 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기억을 검증하는 국제기구 시스템..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Bird's Eye&Guide Ear]은 Guide Ear(귀, 뇌 감청기 조언과 망각.명령.능력부족-뇌 조종)팀이 항시 요원의 Bird's Eye(눈,해독-요원의 지적능력)을 존중해야 한다사고나 신변상 위해가 있을 때 전적으로 Guide Ear(귀)팀 책임이다.   한국 대북외교는 미국축에서 추진해야 한다 許灌

*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북한정부 통치자(실권자-군 통수권자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ㄱ.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1948년 9월 9일

 

(ㄱ)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북한 김일성 前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중국 공산당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ㄴ)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ㄷ)후세인과 김일성등 국가사회주의 세력은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 주도 소련 군부쿠데타를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군부 쿠데타를 반대했다

중국과 소련등 반미세력이 퇴진하면서 일어난 사건 임표사건, 소련군부 쿠데타등이다 북한정부는 항시 반미세력편에 가담했다(김일성세력은 임표 반란나 소련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극동소련군 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다)

a.중국정부와 미국정부, 일본정부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1971년 임표등 중국 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은래 등소평등 수교 교섭세력 승리

b.1992년 한국과 소련국교 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소련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 옐친등장

ㄴ.김일성 총리 겸 인민군 총사령관(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ㄷ.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ㄹ.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ㅁ.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ㅂ.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의회는 친미,친서방 성향이고 군부는 반미, 반서방 성향이다(구소련 권력기구 성향과 비슷하다)

 

힐러리 "중국 북핵 막지 않으면 미사일방어망 포위할 것"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3년 전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초강력 수법으로 중국을 강력히 압박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13일 AP통신 등은 최근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클린턴 선거캠프 존 포데스타 선대 본부장의 이메일을 인용, 클린턴 후보가 지난 2013년 6월 골드만삭스에서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전했다.

클린턴은 강연에서 "우리는 북한이 계속해서 미사일을 개발해 소형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손에 넣는다면 참지 않겠다는 입장을 중국에 전했다"며 "미사일이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에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이론상으로는 하와이와 서부 해안까지 도달할 수 있는 만큼 미사일방어망으로 중국을 에워 쌀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해당 지역에 더 많은 함대를 배치할 것"이라며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가 북한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발언은 클린턴 후보가 북한이 3차 핵실험을 실시한 2013년 2월 한 행사에서 북한이 미국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클린턴 후보는 또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북한의 최대 지원자로 중국군 지도부와 북한 간의 유대가 양국 관계의 핵심이 돼 왔다"면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측근들로 구성된 새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도발적 행위를 멈추라고 언질을 줬다"고 역설했다.

한편 3년 전 이런 발언은 최근 한미와 중국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조치와 연관이 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은 사드 한반도 배치가 자국을 겨냥한 것이지 북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서 자국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으며 글로벌 전략 균형을 훼손할 것이라면서 반대 입장을 거듭 표명했다.

sophis731@newsis.com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의 직접적 위협은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이다

 

                                                                                                    동아시아 국가 중국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로 동남아시아(광동성, 운남성 등), 남부아시아(티베트 등), 중앙아시아(신장 등), 동북아시아(동북3성과 내몽골등), 소중국(한족 거주지)으로 구성된 동아시아 국가이다

 

 

                                                                           러시아 극동연방관구과 북극해, 미국 알래스카

 

*박정희 前 대통령이 김일성 前 주석에게서 받은 선물은?

                                                               1972년 김일성 주석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전달한 "금강산 선녀도"(사진)

박정희는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으로부터 증정한 금강산 선녀도와 동봉된 김일성 친필 명함, 청자목문(靑磁牧文)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 이 선물들은 2009년 1월 공개되었다.

 

                                                                                                  청자목문(靑磁牧文)항아리(사진)

1970년대 남한 제4공화국 유신헌법(박정희 헌법)이나 북한 제2공화국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김일성 헌법)은 개인의 인권과 자유권을 부정하는 극단적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헌법이다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 지역)은 1932년 3월 1일  건국과 일본, 소비에트 연방(소련)등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만주국을 승인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1944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만주군 중위로 군 복무를 했다.[만주국 연합정부 5종족 중 하나의 종족 조선인이 만주군관학교에 많이 참여했다]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의 혈서 부분(사진)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국 만주군 복무 (1944~1945)기간 동안 배속 부대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로 토벌 부대는 중소연합군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 남로당 박정희, 여순사건으로 무기징역

국방부당국에서는 작년 10월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숙군을 단행하여 장교·사병 합하여 1,000여 명의 남로당 세포조직자를 체포 취조중에 있는데 그중 마산 전 제4연대장 중령 최남근 일파 73명에 대해 서울고등군법회의는 지난 8일부터 13일까지 6일간에 걸쳐 시행되었던 바, 재판장 김완룡중령으로부터 최는 총살형, 기타는 각각 무기 15년·10년·5년의 징역과 무죄 등의 판결이 언도되었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총살:중령 최남근 △무기징역:소령 김학휴, 동 조병건, 동 박정희, 중위 배명종 △15년 징역:18명 △10년 징역:24명 △5년 징역:23명 △무죄:중위 한차석, 동 박병순, 동 서정학

그런데 재판장 김완용중령은 최의 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남근은 남로당 군 세포 책임자로서 지난번 체포된 리재복의 사상적 감화를 받고 남로당에 가입한 후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중 반란사건이 발발하자 반군진압작전 임무를 수행치 않고 적의 탈주로를 터 주어 물적·인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케 한 것인데 그는 그후 38 이북으로 도주하려다 체포되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02월 17일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이 여순 (麗順) 14연대 반란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11일 좌익연루 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돼 49년 2월8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직 (육군본부 정보국 제 1과장.당시 소령)에서 파면됨과 동시에 급료몰수를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朴전대통령의 좌익연루설은 그동안 관계자들의 증언만으로 불확실하게 전해져 왔으나 중앙일보의 '실록 박정희 특별취재팀' 이 당시 '고등군법 회의 명령 제18호 (1949년 4월18일자)' 문건을 입수함으로써 재판 48년만 에 최초로 공식 확인됐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재판을 받은 인원은 박정희소령을 포함, 69명 (장교42명.사병27명) 으로 공통죄목은 국방경비법 제16조 위반 (반란기도죄 ) 이다. 朴소령의 구체적인 범죄사실은 '병력제공죄'로 나타나 있다. 문건에는 이들이 "1946년 7월께부터 1948년 11월에 걸쳐 서울등에서 남로당에 가입, 군 (軍)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해 합법적인 대한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했다" 고 기록돼 있다. 재판에서 서정학 (徐廷學.74.육사3기.예비역 육군준장) 씨등 4명은 무죄로 풀려났으며 나머지는 징역 15~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재심과 육군 총참모장의 확인과정에서 대개 징역5~1년으로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며 朴소령도 징역 15년으로 감형되면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朴소령은 수사과정에서 군내부 좌익색출에 적극 협조한 공로로 군 상층부의 도움을 받아 석방됐다. 당시 재판장 김완룡 (金完龍.79.예비역 육군소장.초대 육본법무감) 씨는 "반세기만에 처음 입을 연다" 면서 "朴소령은 남로당 가입후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는데다 군 내부에서 그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살렸다" 고 증언했다. 숙군당시의 수사자료는 6.25때 대부분 소실, 분실돼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이승만정부는 김구계열 광복군 조직을 색출하기 위하여 여수 순천군사반란 사건을 확대하여 박정희 등 광복군 김구계열 군인사를 제거 하려했지만 박정희의 만주군관출신으로 살아남았다는 의견도 있고 박헌영 조선공산당 계열 친형 박상희 권유로 남로당 군사부에 가입하여 남로당 세포책임자로 활동했다가 여수순천 군사반란 이후 남로당 조직을 한국군에 넘겨 주어 살아남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일성, 최용건등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한국전쟁 이후 박헌영을 미국 간첩으로 처형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로 박헌영보다는 김두봉을 옹호했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인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갈 때 황태성에게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다. 또한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 황태성이 보증을 서줬다.  황태성은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外務省 副相)과 상업성(商業省) 부상을 거쳐 무역성(貿易省) 부상 겸 무역상 서리(貿易相 署理)를 지냈으며, 이후 대한민국에서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통일사업을 하겠다며 대남 밀사로 내려와서 외종매(外從妹)의 아들인 김민하(金玟河)의 협조를 받으며 연락을 취하던 중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당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를 받다가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성이 사형 집행되었을 때 박정희가 황태성의 사진을 보면서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 했다고 한다.

황태성의 생질녀인 임미정과 그녀의 남편인 권상릉(權相凌)은 2006년 11월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을 접수한 바 있다[황성태은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 출생.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결성 참여. 김천 지역에서 신간회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 출옥 후 경상북도 김천에서 재활동. 해방 전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라도 책임자와  조선공산당 활동하다가 1946년 10월 월북했다]

 

김일성은 만주국이 건국되자 만주국 연합정부 5종족 중 하나의 종족 조선인 기반으로 동북항일연군(중국과 조선인등 연합군)에 참가하여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를 주도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과 만주국의 일본제국으로 편입으로 만주국과 소련 전쟁, 만주국과 중국전쟁으로 1930년 말기 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이나 중국군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1937년부터 모택동과 장개석의 연합군이 창설을 하더라도 만주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김일성은 소련(극동)으로 피신하여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88독립 저격여단 대위로참여했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초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 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김영주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김형직과 강반석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이전에는 관동군의 통역으로서 일하고 있었다. 1937년 6월 4일 일어난 보천보 전투를 만주국 조선인 치안관계자가 조사를 한 결과, "습격 사건의 주모자 김일성은,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관동군의 통역으로서 일하고 있는 김영주의 친형이다."라는 증언을 얻고, 김영주에 협력을 요구하고,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과 김영주가, 김일성에게 일본제국 육군에 투항하도록 호소했었다.

 

*일본과 소련 만주국 승인

                                                                       일본과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했다[한반도 통일이 중국정부의 이익]

1932년 3월 1일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 지역) 건국과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이해 3월 1일 성립된 만주국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일본과 일본 자신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과의 ‘일만의정서’ 협정 체결은 이날 일본 관동군(關東軍) 사령관 겸 주만(駐滿)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와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鄭孝胥)에 의해 창춘(長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시켰으나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활동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이를 승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튼 조사단의 결론이 만주국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말한다.

중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발생한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 제안으로 맞대응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는 조사단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하고,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일본은 리튼 조사단이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케 하여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조사단은 1932년 3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한커우(漢口), 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10월 1일 중·일 양국에 전달되었고 2일 공표되었다.

보고서는 '만주국'의 건국을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보고서에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리튼 보고서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 승인을 앞둔 1932년 일본에서도 큰 정치적 소용돌이가 벌어졌다.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해군의 과격 청년장교 그룹이 중심이 된 ‘5 · 15 사건’으로 피살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내각 정치는 붕괴됐다.

이후 혼란을 거듭하던 일본 정국은 이해 8월 초 수습의 가닥이 잡혔고 이는 국제여론을 무시한 만주국 승인으로 이어졌다.

9월 13일 일본 추밀원의 ‘일만의정서’ 통과에 이어 9월 15일에 협정 서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만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 2가지이다.

- 일본이 만주국 영역 내에서기존의 일-중 양국 조약. 협정, 기타 조관(條款), 및 공사 계약에 근거하여 향유하고 있는 일체의 권익을 만주국은 승인한다.

- 양국은 공동으로 국방의 책임을 지며 일본은 만주국 영역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갖는다.

의정서는 이해 3월 10일에 이루어진 일본과 만주국과의 밀약을 지속시킨 외에 일본이 만주국의 교통망, 광산, 국방. 치안 등을 위탁관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약 체결의 형식을 빌어 만주국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1932년 3월 1일에 만든 괴뢰국가이다.

만주국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둥베이(東北)지구에 있는 3성(省)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주국 성립 후에는 러허(熱河)성도 판도에 넣어, 1940년의 행정구획으로는 18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통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중심인물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등 관동군의 장교들은 사건 직후부터 당초의 만주에 대한 군사점령이라는 구상을 변경하여 괴뢰국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혁명(國民革命)에 부정적인 만주군벌의 시챠(熙洽), 장징훼이(張景惠), 창스이(臧式毅),장하이펑(張海鵬), 간츠산(干芷山), 마잔산(馬占山) 등에게 강요하여 각 성(省)을 독립시키고, 1932년 3월 1일에는 그들이 조직한 둥베이 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에 의한 '건국선언'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톈진(天津)에 은거하고 있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데려와 3월 9일 푸이의 집정(執政) 취임식이 거행되어 '만주국'의 모양이 갖추어졌다(후에 푸이 '황제'로 즉위).

만주국의 주권은 집정(황제)에게 있었으며 헌법은 없고 정부조직법이 이를 대신하였다. 입법·행정·사법·감찰의 4권분립제였으며 집정(황제)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가 있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행정권이 강력하였고 행정의 중심은 국무원(國務院)이었으며 수반은 국무총리였다. 집정(황제)에 대한 보필의 책임은 국무총리 한 사람만이 지고, 국무원 예하의 각 부 총장은 소관 사무에 대한 행정장관이었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권한이 큰 편이었으며 이 국무총리의 참모적 지위에 있는 것이 총무청(總務廳)으로서 총무장관이 국무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인사·회계·조달(調達) 등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총무장관에게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총무청 중심주의라 불렀다.

총무장관은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총무청 내의 각 처장과 행정 각부의 차장 이하의 일본인 관리를 사실상 감독하였다.

실질적 지배 주체인 일본 관동군은 4,000만 이상의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民族協和)'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의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1932년 7월에 발족시켜 민중 지배의 첨병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 1941년 12월 7일 ~ 1945년 8월 15일 ) 에 의하여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鑛工業) 원료의 생산확대가 불가피하여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탈적 요소가 더욱더 증대하였으며, 협화회가 이 수탈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43년 봄 이후부터 만주국의 물리적 기반인 관동군은 병력을 남방 각 지역과 일본 본토작전에 전용(轉用)하며 약체화하였으며, 1945년 8월의 소련 참전과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리튼 보고서

1932년 9월 30일 = 국제연맹이 만주(滿洲)의 자치를 제안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다. 중국 국민정부가 만주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 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에서 조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선임하고, 프랑스·미국·이탈리아·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1932년 3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난징(南京)·한커우(漢口)·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뒤 9월 30일 중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이해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滿洲國,Manchukuo, Manchu Stat)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 만족(여진족),몽골족, 일족(일본족)등 5종족이  1932년 3월 1일 세운 연합정부이다. 만주국은 지금의 중국 동북3성 지역 영토이며 인구 3,693만명수준이었다[1937년 자료]

만주국(滿洲國, 중국어 정체: 滿洲國, 병음: Mǎnzhōu Guó, 영어: Manchukuo, Manchu State)은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18일)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였다.

 

                                                                                      만주국 국기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9일 선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를 체포한 뒤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화민국이 이 지역들을 넘겨받았다.

만주국의 영역은 한반도 및 중화민국, 소련, 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의 괴뢰정권)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강덕제(푸이)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32년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해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으로 인한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소멸했다.

 

1.역사

(1)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漢(한)-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唐(당)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遼(요)나라-거란족:(다우르족:達斡爾族(달알이족))]->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金(금)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蒙古(몽고)나라-몽고족]->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明(명)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淸(청)나라-만주족]->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滿州國(만주국)-만주족=여진족]->소련 극동군 만주국 점령[1945년 8월 18일,8월 폭풍작전]->중국연합군 반환[1945년 11월, 소련극동군과 인민해방군이 점령 이후 소련군이 중국 연합군 동북3성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임표에게 넘겨 줌]->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 10월 1일~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2)국호

만주국 외에 대만주국(大滿洲國), 만주제국, 대만주제국(大滿洲帝國) 등으로 만주국의 공문서에서도 일정하게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국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주국'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만주국이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였다는 뜻에서 위만주국(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3)건국과 멸망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국제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창춘인 신징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로 옹립했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제정 수립으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8월 폭풍 작전)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4)건국의 배경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국가 안전보장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00년 러시아는 요시카즈단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권익을 독점했다. 이것에 대항하여 일본은 미국 등과 함께 만주를 각국에 개방할 것을 주장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영일 동맹). 마침내 일본은 1904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싸워 승리하였고(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요동 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의 조차권을 확보했다. 그 후 일본은 종래의 입장과 달리 러시아와 공동으로 만주에 대한 이익 확보에 나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반발을 불렀다

(5)멸망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8월 폭풍 작전을 전개하였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직후 8월 18일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망하였고, 8월 말 소련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1월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고, 1949년 이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2.국가체제

(1)정치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만주족(만족, 여진족),몽골족, 일본족등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에는 오족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피해 온 백계 러시아인 등도 거주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녹색 우크라이나(Green Ukraine·Zeleny Klyn)의 우크라이나인 세력은 만주국과 접촉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만주국·우크라이나의 삼국 동맹으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개시할 계획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은 러시아인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할 방침으로 변경하고 러시아인 조직과 대립이 있는 우크라이나인 조직과는 단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우크라이나인 조직과 손잡으려고 했지만 태평양 방면에서의 고전도 있어서 극동에서의 반소 무력 항쟁은 실현되지 않았다.

만주국은 일본의 계획적 지원 아래 극히 단기간에 발전했다. 내전이 계속되는 중국으로부터 한인의 이주, 새로운 환경을 찾는 조선인의 이주, 특히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만주국의 준비된 농지로 이주하는 일본 국내인의 이민이 많았다. 이러한 이주에 의해서 만주국의 인구도 급격한 기세로 증가했다. 이민 정책의 성공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만주국이 일본에 있어서 개척지였음을 나타낸다.

-북한 제3공화국 先軍정치 헌법이 공화국 모델이면서 세습제 군정(국가원수는 김일성 직계 혈통주의 군주국)이 만주국 모델이다

(2)국가기관

만주국 정부는 국가원수로서 집정(執政, 후에 황제),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参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国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 국무원

(3)국가원수

만주국의 국가원수(집정, 후에 황제)로 푸이가 취임했고 1937년(강덕 4년) 3월 1일 제위계승법 제정 이후에는 푸이의 남계 자손이 제위를 계승해야할 것로 여겨졌다. 또한 제위계승법이 상정한 상황 외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주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청조복벽파의 책모를 억제하고 관동군에게 황제 지명권을 확보시키기 위해서 남계 자손이 없을 때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서 제위 계승자를 정하는 칙지를 황제의 선언으로 하는 등을 내용으로 한 각서에 서명하였다.

 

                                                                         황궁으로 건립된 동덕전(同徳殿)

           

                                                                       만주국 초대내각

(4)역대 지도자

ㄱ.황제: 푸이 (임기: 1932년 ~ 1945년)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康德帝)가 되었다. 푸이의 황제 즉위에 아울러 국명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것이 많아졌다.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변경되었다. 만주국 측에야는 당초는 '계운(啓運)'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관동군의 간섭에 의해서 변경하였다. 동시에 자금성 시절부터의 내무부 대신이었으며 푸이와 일본 관동군과의 사이를 주선한 정샤오쉬가 국무원 총리로 취임했다. 같은 날 신징 시내에서 행해진 황제 즉위식에서 푸이는 만주국의 슬로건의 하나인 '오족협화'를 내거는데 있어서 만주족의 민족색을 내는 것을 싫어한 관동군으로부터의 강한 권유로 만주국군의 군복을 착용하였지만, 푸이의 강한 의지로 신징 시내의 순천(順天) 광장에 놓여진 특설 회장에서 즉위식에 앞서 즉위를 청조의 선조에게 보고하는 의식인 <고천례>(告天禮)를 행할 때에 푸이는 만주족의 용포를 착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것은 청조의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푸이의 황궁은 집정 당시와 같이 만주국의 수도의 신징 중심부에 있었다. 당초 푸이 부부는 집정부의 집희루(緝煕樓)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궁으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 1938년 새롭게 동덕전(同德殿)이 황궁으로서 지어졌다. 그러나 관동군에 의한 도청을 경계해 푸이 자신은 한번도 황궁으로서 이용하지 않았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관동군 장교인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나 쿠도 타다시(工藤忠)가 항상 푸이와 함께 행동해서 푸이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조언하여 황제의 칭호는 허울 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 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37년 2월 푸이와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의 사이에 만주국 황제에게 남자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하였는데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정하게 되었다. 이후 푸이는 이전에 비해 관동군에 의한 암살과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는 황제로의 교체를 경계했다고 한다. 푸이는 1937년 만주 기인 타타라씨(他他拉氏)인 탄위링(譚玉齡)을 측실로서 맞아 상귀인(祥貴人)으로 삼았지만, 1942년 사망하였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와 같이 증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단순한 병사였다고 증명되었다. 한편 푸이는 1943년 한족(漢族) 리위친(李玉琴)을 측실로서 맞아 복귀인(福貴人)으로 삼았다.

만주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로서 푸이를 지지한 정샤오쉬는 만주국의 실권을 잡은 관동군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고 푸이의 황제 즉위 불과 1년 후인 1935년 5월 사임하였다. 관동군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형태로의 만주국의 운영과 실권을 수반하지 않은 형태의 푸이의 황제 취임에 대해서는 일본 내로부터의 반발도 있었다. 당시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시아주의자의 거두로 겐요샤(玄洋社)의 총수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는 만주국의 건국 당시부터 일본 정부와 관동군의 과잉 개입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일만 우호를 촉진하는 목적과 만주국 및 푸이의 위신을 국내외에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4월 푸이는 천황 히로히토의 초대에 의해 일본을 국빈으로서 공식 방문한다. 푸이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연습 전함 히에이(比叡)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고 히로히토가 도쿄역까지 푸이를 맞이하러 나왔다. 1940년 6월 황기(皇紀) 2600년 기념 행사가 도쿄에서 행해졌을 때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히로히토와 회견하였다. 푸이의 제2차 일본 방문에서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다녀간 후에 만주국에 건국신묘(建國神廟)가 만들어져 신체로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모셔졌고 만주국 국민은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숭배를 강제당하였다. 푸이는 두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완룽을 동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방일을 하였다.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치바 현(千葉県)에 살고 있던 푸이의 동생 푸제와 일본 사가 후작의 딸이자 천황가의 친척에 해당되는 사가 히로시(嵯峨浩)의 혼담이 관동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38년 2월 6일 주일 만주국 대사관에서 결혼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초 푸이는 사가 히로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이후 2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푸제와 사가 히로시의 관계가 양호하자 사가 히로시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국공 합작(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 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국 국경선을 돌파하였다. 소련군은 동·북·서쪽 세 방향에서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노리고 침공을 시작하였다. 관동군은 <일소중립조약>에 의지해 1942년 이후 증강을 중지하고 주력 부대가 남방 전선에 있었다. 관동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 이후 대일 참전에 대비해 전진 배치된 소련군에게 결정적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본인 만주 거류민을 버려둔 채 패주한다.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휘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8월 20일 푸이의 퇴위조서를 공포할 예정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1964년 다민족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ㄴ.총리 목록

1대: 정샤오쉬 (임기: 1932년 ~ 1935년)

 

정샤오쉬(정효서)(鄭孝胥, Zhèng Xiàoxū, 1860년 4월 2일 ~ 1938년 3월 28일)는 만주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자 서예가이다.

 

2대: 장징휘 (임기: 1935년 ~ 1945년)

 

징휘 (张景惠, 장경혜, 1871년~ 1956년 1월 11일) 는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총리대신을 지낸 정치가이다.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자는 쉬우(叙五,서오)이다.

랴오닝 성 타이안 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친구사귀기에 능했고, 도박을 좋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는 만주지역의 통치력을 상실했고, 각지에서 기회를 틈타 무장세력이 발호하였다.

장징휘도 마을의 상무회장(商務會長)을 맡아서 자신의 사병격인 자위단을 조직하여 마을의 상인들과 부자들을 보호하였다. 당시 장쭤린이 토비인 진슈찬의 습격을 받자, 바자오타이(八角台)로 와서 펑더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장쭤린과 장징휘는 만나자마자 의기가 투합하였다. 장징혜는 장쭤린을 자위단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청했고, 스스로는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장징휘는 장줘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1902년 장쭤린은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기로 결정했고, 장징휘도 그것을 따랐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초관(哨官, 하급장교계급)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방대(帮带)로 승진하여 청나라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06년, 장쭤린은 후로순방영총령(後路巡防營統令)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도 같이 승진하여 관대(冠帶)에 임명되었다. 1910년 장쭤린은 장징휘, 탕위린, 장쭤샹 등에게 지시하여 현역 군관으로서 펑톈강무당(奉天講武堂, 봉천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장징휘에게는 수시로 펑톈의 군사, 정치 동향을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쭤린은 그리하여 봉계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군대를 봉군(奉軍)이라고도 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장쭤린은 제27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는 그 휘하의 연대장이 되었다. 1917년 펑위린이 장쭤린과 사이가 벌어지자, 장징휘는 장쭤린편에 섰고, 제53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18년 2월 장징휘는 53으로 이끌고 직계 군벌을 압박하였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서 7개 혼성여단을 조직했다. 장쭤린은 장징휘를 임시 편성의 봉군(奉軍) 제1사단장에 임명하였고, 그를 봉군의 지역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같은해 8월 장징휘는 양위팅과 쉬수정과 연합하여 봉군의 명의로 4개 여단을 더 모집하였고, 세력을 강화하고 장쭤린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장징휘는 봉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장쭤린의 대리역을 맡아 북경에 주재하였다. 1920년 9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쑨원의 중화민국 광둥 정부와 다름)는 장징휘를 차하얼 도통(都統)겸 육군제 16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중, 장징휘는 다시 봉군 서로총사령관의 중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이 없고, 행동이 느려서 서로군은 참패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잠시 머물었는데, 직계 군벌인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된 후,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을 신설하자, 장징휘를 이곳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이런 장징휘의 배신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925년 겨울, 장징휘의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들었지만, 감히 장쭤린이 지배하는 고향에 들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부탁하여, 장쭤린에게 용서를 빌었고, 장쭤린은 그를 용서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장징휘는 이때 펑톈(선양)에 먼저 가서, 장쭤린을 먼저 찾아가서 통곡하면서 고두사죄를 했다고 전해진다. 장쭤린은 옛 동지였던 그를 용서하고 다시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쭤린을 대리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바쁘게 일했다.

1926년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장징휘도 육군총장과 실업총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펑톈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의 음모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되었고, 장징휘도 크게 다쳤다.

1928년 말, 장쭤린의 뒤를 이어 봉군의 우두머리가 된 장쉐량은 그를 동성특별장관(東省特別長官)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후에 그는 난징으로 가서 군사참의원 원장을 맡았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여 1931년 만주 전역이 관동군에 점령되자, 장은 만주 하얼빈으로 돌아와 1931년 9월 27일에 "특별구 비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려던 일본의 의도에 동조한 것이다. 일본군에 끝까지 저항하던 동북군의 잔존세력인 마잔산이 치치하얼에서 패주하자, 장징휘는 만주가 자치령이라고 선언했다. 장은 일본인과 타협하여 만주국의 헤이룽장 성 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하얼빈을 떠나 치치하얼에서 거주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것때문에 관동군 인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2년 2월마잔산이 일본과 강화를 맺고, 그 조건으로 헤이룽장 성장으로 취임하여 장징휘는 잠시 그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마가 1932년 4월 일본에 반란을 일으키자, 장징휘는 다시 헤이룽장 성장이 되었고, 만주국의 국정부 총장(국방장관)이 되었다.

1935년 5월 21일 장징휘는 관동군의 입김으로 정샤오쉬를 이어 만주국 총리대신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 푸이는 반대했다고 한다.

만주국 총리로서 그는 수동적이고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에 의해 임명된 일본인 고문들이 만주국의 행정을 실제로 책임졌고, 그는 불경을 베끼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과거 전력때문에 그는 "두부총리대신"으로 경멸스럽게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징휘는 한번은 땅을 강제로 일본인에게 불하시키려는 의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장은 일본의 항복이후 만주국이 붕괴할 때까지 10여년간 총리대신으로 남아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주국 대표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끌려갔다가,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그에 넘겨져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 1957년 그곳에서 86세로 사망하였다.

가족으로는 제6남인 장멍스는 베이징국제관계학원의 일본학부 주임으로 일했고,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행정

1932년(대동 원년)의 건국 시에는 수상(집정제하에서는 국무원 총리, 제정 이행 후는 국무총리대신)으로 정샤오쉬가 취임했고, 1935년(강덕 2년)에는 만주의 독립선언을 발표한 둥베이행정위원회 위원장 장징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제 정치 운영은 만주 제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원수는 수상과 각료를 비롯해 관리를 임명하여 관제를 정하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관동군이 실질적으로 만주국 고급 관리, 특히 일본인이 주로 취임하는 총무청장이나 각부 차장(차관) 등의 고급 관리의 임명이나 파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할 수 없었다. 또한 공무원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인을 만주국 정부의 각 행정관청의 장·차장으로 임명시켜 실권을 잡게 했다. 이것을 내면 지도라고 불렀다(2키 3스케, 일본어: 二キ三スケ). 즉 만주국은 정치, 경재적으로도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껍데기뿐인 일본의 괴뢰 국가였다

(6)주요 도시

신징(新京·현재 창춘, 중국어 간체: 长春)

펑톈(奉天·현재 선양, 중국어 간체: 沈阳)

만저우리(중국어 간체: 满洲里)

지린(중국어 간체: 吉林)

퉁화(중국어 간체: 通化)

하얼빈(중국어 간체: 哈尔滨)

치치하얼(중국어 간체: 齐齐哈尔)

잉커우(중국어 간체: 营口)

단둥(중국어 간체: 丹东)

둔화(중국어 간체: 敦化)

하이라얼(중국어 간체: 海拉尔区)

(7)행정구역

신징 특별시(新京特別市)

지린 성(중국어 간체: 吉林省)

쓰핑 성(중국어 간체: 四平省)

퉁화 성(중국어 간체: 通化省)

젠다오 성(중국어 간체: 间岛省)

룽장 성(중국어 간체: 龙江省)

→ 현재 지린 성(吉林省) 일대

빈장 성(중국어 간체: 浜江省)

무단장 성(중국어 간체: 牡丹江省)

둥안 성(중국어 간체: 東安省)

싼장 성(중국어 간체: 三江省)

베이안 성(중국어 간체: 北安省)

헤이허 성(중국어 간체: 黒河省)

→ 현재 헤이룽장 성(중국어 간체: 黑龙江省) 일대

안둥 성(중국어 간체: 安東省)

펑톈 성(중국어 간체: 奉天省)

진저우 성(중국어 간체: 錦州省)

관동주(중국어 간체: 关东州) : 일본의 중국 조차지(1898년 ~ 1945년)

→ 현재 랴오닝 성(중국어 간체: 辽宁省) 일대

싱안 총성(중국어 간체: 兴安総省)

러허 성(중국어 간체: 热河省)

→ 현재 내몽골 자치구(중국어 간체: 内蒙古自治区) 일대

→ 현재 허베이 성(중국어 간체: 河北省) 일대

(8)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

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는 당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5명의 일본인 실력자들에 대한 별명이다. 각자의 이름이 “키”또는 “스케”로 끝나는 것에 유래하고 있다. 그 중에도 도조 히데키는 나중에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기시 노부스케도 일본 패전 후 총리에 올랐다.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닛산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을 만들었다.

도조 히데키: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호시노 나오키: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

기시 노부스케: 만주국 총무청 차장

아이카와 요시스케: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 남만주철도 총재

특히, 기시 노부스케, 아이카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의 3명을, "만주 삼각 동맹"이라고도 부른다.

(9)선거와 정당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에 따르면 만주국은 일원제(단원제) 의회인 입법원의 설치를 규정했지만 선거는 단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정치 결사의 조직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협화회라고 하는 관민 일치의 유일한 정치 단체만이 존재하였고 정책의 국민에게의 침투나 국정의 지도를 수행했다.

(10)사법제도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이나 인권보호법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을 모방한 법 제도가 정비된다. 당시의 일본 법과 다른 점은 인권보호법에서 법 아래 평등이 보증된 것, 조직법에서는 각 각료나 합의체로서의 내각이 아니고 수상 개인이 황제의 보필 기관으로 여겨진 것, 형법의 구성 요건은 거의 같지만 법정형이 일본 형법보다 약간 무겁게 규정되어 있는 것, 검찰 기구가 재판소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기관으로 여겨진 것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만주국 형법은 한국 전쟁 직후에 제정(1953년 9월 18일)된 대한민국 형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1)외교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흔히 바티칸 시국이 1934년 만주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믿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티칸 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년 작품)를 참고한 잘못이다. 지린의 주교 가오더후이(高德惠, Auguste-Ernest-Désiré-Marie Gaspais)는 바티칸 시국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이 아닌 포교성에 의해서 만주국의 가톨릭 선교를 위한 바티칸의 임시 대표로 임명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타이(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12)군사

 

                                                                                             만주국 기병대 모습

만주국에는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주둔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군을 시작으로 군대가 창설되어, 황제 호위부대인 금위대과 해군,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만주국의 성격상 군대 역시 관동군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여, 관동군 지원 부대로서의 성격이 컸다.

3.교통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일본어: 南満州鉄道株式会社 (みなみまんしゅうてつどうかぶしきかいしゃ) 미나미만쥬우테츠도우카부시키카이샤[*], 영어: South Manchuria Railways Corporation) 또는 단순히 만철(滿鐵)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1905년)에 의하여[1]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에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 - 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다른 의미로는 만철선(滿鐵線)으로 통칭하는 다롄~창춘~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남만주 본선 구간) 및 여기에 부속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각 지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 대공황(1929년~39년)의 여파가 만주에도 세차게 밀려왔다. 만철의 주요 거래품목이었던 대두의 수요가 감소하고 수송량도 급격히 줄어들어 수송운임 수입이 격감했다. [2] 게다가 푸순탄의 판매도 부진했다. [2]당시 중국 본토에서 들어오는 수출 석탄의 가격에 비해 푸순탄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만주국 수도 신킹(Hsinking) 철도역

4.사회

(1)인구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만주국의 인구는 3,088만명, 1가구당 평균 인원은 6.1명, 남녀 성비는 122:100로 추정되었다. 남성 인구가 많은 이민 국가의 측면이 강했다. 일본 식민지의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고, 대만인도 5,000명이 이주했다.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만주국(헤이룽장·러허·지린·룽장·안둥)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이었다. 인구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계의 만주인 가운데에는 68만명의 조선족도 포함한다. 또한 도시 지역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만주국이 아편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모습[아편(마약)을 전쟁물자로 이용했다]

민족 인구 수 비율

만주인(한족·만주족·조선족) 30,190,000명 97.8%

일본인 590,760명 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명 0.3%

1940년 주요 도시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통계의 주체에 따라서 수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 인구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시 인구 수 연도

잉커우 119,000명 또는 180,871명 1940년

펑톈 339,000명 또는 1,135,801명 1940년

신징 126,000명 또는 544,202명 1940년

하얼빈 405,000명 또는 661,948명 1940년

다롄 400,000명 또는 555,562명 1939년

안둥 92,000명 또는 315,242명 1940년

지린 119,000명 또는 173,624명 1940년

치치하얼 75,000명 1940년

(2)민족과 언어

만주국 시대의 공식이념인 "민족협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역사적인 만주의 이질성, 즉 만주족·한족·조선인·러시아인·몽고인뿐 아니라, 어룬춘족, 골디(Golie), 나나이족 등 십여 민족집단의 혼재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하얼빈에는 50개 이상의 민족집단, 45개의 언어가 혼재했다.  만어(滿語)라고 불리던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가 사실상의 공용어로서 사용된다. 군·관공청에서는 일본어가 제1 공용어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일본어가 교수 언어로 여겨졌다. 몽골어·러시아어 등을 모국어로 하는 주민도 존재했다.

 

                                                                             1940년대 초 만주국 쇼와 제철소

(3)민주국의 조선인

만주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독립 이후 정부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만주국 연합정부 5종족 중 하나의 종족 조선인이 만주군관학교에 많이 참여했다]

백선엽

박정희

박창암

박승환

이선근

정일권

최규하

김석범

(4)일본인 이민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만주에는 59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중 10만명은 농민이었다. 잉커우의 인구의 25%가 일본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500만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다. 이같은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일본군이 동해와 황해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자 중지된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하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본에 귀환한다. 공무원과 군인은 소련군의 포로로서 시베리아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포로교환협정이후 모두 석방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극히 적었으며 매서운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에서 대부분은 동사하였다.

(5)유대인 자치구

1930년대 일본 정부는 유대인 난민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추진한다(복어 계획, 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 1934년에 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의 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 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 군사 동맹의 결성,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

(5)국적법의 부존재

만주국은 패망까지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의미의 만주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은 배경으로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상 일본인 정착민들은 "일본계​​ 만주인"이 되어 일본 국적을​​ 포기하게 되므로 만주로 유입되는 일본인 이주민이 감소할 우려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던 조선 정책과의 일관성 문제 등이 있었다.

 

5.문화

 

(1)영화

1928년 남만주 철도가 홍보부 홍보계 영화반, 통칭 〈만주철도 영화부〉를 마련해 홍보(선전)용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937년 설립된 국책 영화 회사인 〈만주영화협회〉가 영화의 제작이나 배급·영사 업무도 행해 각지에서 영화관의 설립·순회 영사 등도 행했다

(2)잡지

징의 예문사(藝文社)가 1942년 1월부터 만주국에서 처음으로 유일한 일본어 종합 문화 잡지 《예문》(藝文)을 발행했다. 1943년 11월 《만주 공론》(滿州公論)으로 제목을 고쳤다.

(3)스포츠

1932년 만주국 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국기는 축구이며, 만주국 축구협회와 만주 축구 대표팀도 결성되었다. 야구에 있어서는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한 팀이 있었고 일본 프로 야구 첫 해외 공식전으로서 1940년 만주 리그전을 하였다. 또한 만주국은 건국 당초 올림픽의 참가도 계획하여 1932년 5월 21일 만주국 체육협회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년 7월 개최)에 선수 파견을 정식으로 신청하였지만 참가는 할 수 없었다

(4)국화(國花)

국화는 난(蘭)이다.

*만국(만주국) 정치 슬로건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만주국의 나라 표어이자 건국 이념, 정치 슬로건이다.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었던 오족공화(五族共和)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오족공화의 '오족'(五族)이 한족, 만주족, 후이족(회족), 몽골족, 티베트족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오족협화는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 만주족, 조선인(한민족), 한족, 몽골족의 협력을 뜻한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다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 괴뢰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에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은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省(성), 길림성),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3개 성(省)이 포함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漢族, 한나라 후손)이다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동북3성(만주)지역에는 자치구로 만주족(만족)과 거란족, 조선족 등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성은 김(金)씨이다 청나라 왕조 성씨를 김씨(金氏)를 많이 사용했다

 -만주족(滿洲族)이 건국한 국가(國家)
숙신. 읍루족(부여)--말갈족(발해)--->여진족(金)--->만주족(淸)--->만족(중국 56개 민족 중 한개 소수민족으로 편입)

 

                                                                                                          동아시아 국가 중국

 

*만주족(청족)이 세운 군사학교 '만주군관학교'

만주군관학교를 상징하는 문양. 가운데 5색 별은 '5족(五族)'을,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의 주곡인 '조(좁쌀, 小米)'를 상징한다. 가운데 오색별은 만주국의 슬로건인 ‘5족협화(協和)’를 상징하는 것이며, 5족(五族)은 만주족, 한족, 몽고족, 조선족, 일본족 등을 말한다.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지역의 주식(主食)인 조(좁쌀, 小米)를 그린 것입니다


만주군관학교란 만주국이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를 말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경우 조선이나 대만처럼 총독을 파견하지 않고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청조(淸朝)의 폐제(廢帝)인 선통제(宣統帝), 즉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이라는 자리에 앉히고는 관동군 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수도는 신경(新京, 현 장춘),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만주국이 처음 세운 사관학교는 1932년 옛 수도인 봉천(奉天, 현 심양)에 세운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로 흔히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한 후 군벌 장작림이 설립한 목단(심양의 옛 이름)의 군관학교를 접수하여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훈련과정을 개설했다. 시험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지리, 역사, 작문, 일본어 등이었으며, 시험은 각 군관구 사령부 소재지에서 실시하였다.

첫 3개 학년이 수료한 1년 반 이후에는 2년제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도쿄에 있는 일반참모학교를 모방한 것으로 기본훈련 4개월, 정규수업 14개월, 현장실습훈련 6개월의 교육과정을 두고 있었다.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2~3개월간 상사 계급을 달고 견습사관을 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다. 조선인은 4기생부터 입교할 수 있었는데, 1939년 만계(滿系) 군관후보 9기, 일계(日系) 군관후보 11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군수학교 졸업생 포함) 조선인으로는 3기 김정호 1명, 4기 강재호·김응조 등 7명, 5기 정일권·김백일·김석범·김일환·신현준 등 18명, 6기 양국진·최남근·박승환 등 7명, 7기 최철근 1명, 8기 석주암 등 3명, 9기 백선엽·윤수현 등 2명으로 총 39명 정도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린다. (신경 교외 라라툰(拉拉屯) 지역에 위치한 옛 신경군관학교 시설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2기생이 입교한 1941년 6월 20일 거행됐다.

예과에서는 학과 위주 교육을, 본과에서는 전술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내용과 복지 등에서 민족간에 차별대우가 있었다. 조선인은 초기에는 만계로 입학했으나 1943년 5기생부터는 일계로 편입되었는데 졸업 후 일본군 예비역 소위 편입과 동시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때까지 만계 7기, 일계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임관은 3기생까지였다. 일계 생도 가운데는 일본인 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신경군관학교(경리학교 출신 등 포함) 출신으로는 1기생은 김동하(해병 중장)·윤태일(육군 중장·국회의원)·방원철(육군 대령)·이기건(육군 중장) 등 13명, 2기생은 박정희(육군 대장·대통령)·이한림(육군 중장·건설부장관), 김재풍 등 11명, 3기생은 최주종(육군 소장·주공 사장)·강태민 등 2명, 4기생은 예관수·장은산 등 2명, 5기생은 강문봉(육군 중장·국회의원)·황택림 등 5명, 6기생은 김동훈·육굉수·김윤근(해병 중장, 호남비료 사장)·김학림 등 11명,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여주대 학장) 등 4명으로 전체 졸업생 수는 48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북한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창군 초기 군부 내에서 ‘만주파’로 불리며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함경도파,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신경2기 출신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동하·박임항·윤태일·김윤근 등 신경 출신 선후배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여 도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은 박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해 이른바 ‘반(反)혁명사건’으로 몰려 권력에서 제거됐는데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부른다.

한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당시 일본군(만주군 포함) 장교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입교자들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국주의 시대는 군인이 통치권력의 주체로 활동하던 시기로 일본 정부의 내각이나 조선·대만 총독 역시 전부 전·현직 군 장성들이었다. 당시 일본 군대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정부조직 차원을 넘어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최상층의 권력집단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장교의 위상은 평시의 ‘직업군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군관학교는 바로 그런 장교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이었다.


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다양한 입학 동기를 갖고 있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 뚜렷한 목표의식과 투철한 시국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중·고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 차원에서 군관학교를 택해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또 주변의 권유나 심지어 장교 계급장을 단 제복차림에 반해 군관학교를 입교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군관학교 입교생들이 ‘황군(皇軍)’이 되기 위해 입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일본군 장교의 임무가 무엇이었으며, 또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들의 일본군 복무 전력을 변호할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자원해서 군관학교에 입교했고, 또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전력자라면 그들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전적으로 시대적 여건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군부는 신성불가침 지대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창군의 주역’으로 이미 한국군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설사 대상자가 있었다고 해도 반민특위에서 그들을 체포,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출신들은 본의 아니게 반민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다만 2005년에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서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출신자들을 조사대상자로 규정했다. 물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단서조항은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하사관까지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만주국을 상징하는 난초꽃 문양이 컵 바닥에 새겨져 있다

만주국의 국화(國花)는 난초였으며, 이 문양은 난초 꽃잎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만주일보 1942.3.24)

 

                                                            ▲ 군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장면

만주국은 국군 간부 양성을 위해 건국하던 그 해 봉천(奉天, 현 瀋陽)에 2년제 간부훈련소(사관학교)를 세웠다. 이곳이 이른바 봉천 군관학교로, 한국인들은 4기생 때부터 입교가 시작됐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등이 5기생 출신이며, 숙군 때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백선엽은 이곳 9기생 출신이다. 봉천군관학교는 9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박정희가 예과를 마친 신경군관학교는 봉천군관학교 후신으로, 1939년 수도인 신경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였다. 이 해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한 것이 그 첫출발로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만계는 7기, 일본계는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김동하, 윤태일, 이기건, 방원철, 박임항, 이주일 최창언 등 1기생이 13명, 김묵, 이재기, 박정희, 이한림, 김재풍 등 2기생이 11명, 최주종 등 3기생이 2명, 예관수, 장은산 등 4기생이 2명, 강문봉, 황택림 등 5기생이 5명, 김동훈, 육굉수, 김윤근, 김학림 등 6기생이 9명, 그리고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 등 4명 등 총 44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정희가 5.16을 모의, 주도했을 때 주체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걸림돌이 되면서 박정희 친위세력에 의해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 처형 시신 모습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한후 중국군이 북경(北京,베이징)에서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를 체포하는데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의 배경이 엃키고 설켜 재판이 어려웠습니다. 중국인으로 친다면 매국죄로 사형에 처할수 있었으나 일본인으로 치면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가 집적 살인하거나 죄를 저지른 증거가 없었으므로 일본교민이나 보통헌병처럼 일본에 돌려보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체포 후 북평감옥에 갇히며, 1947년 10월 5일 북경 민국법정의 재판을 통하여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1948년 3월 25일 아침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판결문

1. 피고는 중국과 일본국적을 다 가지고 있지만 숙친왕의 딸로서 의심할바 없는 중국인이다. 때문에 한간죄(漢奸罪)로 처리한다.

2. 피고는 일본정객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상해"1.18"사변에 남장을 하고 간첩할동을 진행하였으며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3. 피고는 부의와 그 가족을 천진에서 빼돌렸고 위만제국의 성립을 위해 준비공작을 하였다.

4.피고는 관동군과 장기간 래왕하였고 "안국군 사령"까지 담임했다.

*만주국[滿洲國, 만주제국]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1월 장쉐량[張學良]의 반만항일의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한 후, 2월 '신국가건설막료회의'를 개최해 만주국 건국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서 관동군은 구(舊)봉천 군벌계 장성들을 앞세워 청조의 폐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이라는 자리에 앉힌 후,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이탈리아·교황청·스페인·헝가리·폴란드 등 극히 일부 국가가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후 관동군이 러허 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를 점령해 만주국의 영역은 랴오둥[遼東]·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熱河]의 4성(省)에 이르렀고 인구는 3,000만 명에 달했으며, 1934년 9월에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경제면에서도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전 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해 개발사업을 독점하는 등 일본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만주족 청나라(만주국)와 한족 중국을 구분해야 하며 전제군주국 청나라와 민주공화국 중국을 구분해야 대한민국 역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정부 내 민주공화정 세력은 중국 손문과 장개석정부를 지원했으며 국가사회주의 병정분리주의 군사정부(일본 군벌)는 청나라(만주국)를 지원했습니다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세력과 국가사회주의 세력, 전제군주제 세력등을 연구해야 일본 역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국가사회주의 세력은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을 의미합니다 총리가 군부 실세 군인으로 군과 내각등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국왕 이름으로 전쟁을 추진하는 경우이고 히틀러처럼 군이 의회와 내각을 장악한 후 군사대국을 추진하는 국가입니다] 

조선말기에도 청족세력과 한족세력 권력타툼이 조선왕실이었습니다 2차대전 추진세력이 일본, 만주국등이며 연합군이 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입니다 2차대전을 마지막까지 전쟁을 하자는 세력이 만주군벌과 일본군벌이며 항복하자는 세력이 일본왕실과 민주공화정 세력내 입헌군주제 옹호세력입니다 중일전쟁과 세계전쟁 추진세력이 일본군벌과 만주국 군벌이라는 입장입니다

대한민국은 반청(反淸), 친한족(親漢族) 국가로 민주공화국입니다

 

 

*88독립 저격여단(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 밖에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 해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리안 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연해주의 보로시로후 · 우수 리스크 교외 북쪽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А), 투르크 메니스탄의 케루키 교외 남쪽 (B) 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Б)를 설영했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이 야영지에 따라 제 88 독립 저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 · 나 · 나아 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충족 동북 항일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에서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 해, 88 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리안 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 지휘 관직 붉은 군대 장교 임명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 소총 대대
무선 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 · 파괴 공작 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여단 그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 인 수행과이 때 발휘 된 용기 및 용기 "에 김일성에 적기 훈장이 수여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1945년 8월 9일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관동군) 공격

 

                                                                  소련측 연합군 4곳에서 만주국 공격

1945년 8월 9일 0시 10분 소련 100만 대군이 중소 국경선과 중-몽골 국경선 등 4 곳을 통해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던 만주(중국 동북 지방 : 당시는 일본 괴로국 만주국이었다)로 진공했다.

소련은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 된 지 이틀만인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선전포고 다음날인 9일로 접어들자마자 만주로 진공한 것이다. 이날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로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소련 지상군의 만주진공과 함께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한반도 북부와 치시마(千島)군도로 상륙하여 지상군의 공격작전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에 일본 관동군은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소련은 이해 얄타 회의 이후 만주진공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를 대가로 소련에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기지화 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약속했다. 이는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이권을 회복하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밀약에 따라 미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에 얄타합의 이행을 약속하는 협상에 나설 것을 압박, 소련의 만주공격을 유도했다.

 

이에 앞서 8월 초 소련은 병력 150만 명, 2만 6,000문의 대포, 5,000대의 탱크를 국경선 부근에 집결시켰다. 이 같은 병력 규모는 관동군을 수적으로 크게 앞서는 것이었다.

8월 15일 히로이토 일왕(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있은 지 이틀 뒤인 17일 소련의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에프 원수는 일본군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최후통첩했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山田乙三) 대장은 18일 휘하 관동군에 소련군에 투항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일본군은 20일부터 소련군에 무기를 건네주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8월 30일까지 중국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관동군의 전면적인 무장해제가 이루어졌으며 소련군의 대일 진공작전은 21일 만에 종료됐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미 며칠 전 무조건 항복 의사를 미국 측에 전달했고 14일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수락햇다.
이로써 8월 15일은 일본에게는 패전기념일(일본은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 중국에게는 승전기념일, 그리고 한국에게는 '광복 기념일(광복절)'이 되었다.

 

 

*얄타협정

루스벨트미국 댗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원수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2차대전 전쟁 완수와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1945).
이 협정은 둘로 구성됐다.
1. ‘크리미아 회의의 의사(議事)에 관한 의정서’는 세계기구(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 대서양헌장 제원칙의 재확인,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4개국에 의한 독일의 분할점령, 배상 위원회의 설치, 전쟁범죄인의 조사, 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의 처리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에 관한 합의’에서는 소련은 몽골인민 공화국의 현상유지, 남사할린의 반환,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에 의한 우선 이용, 뤄순(旅順) 군항(軍港)의 조차(租借),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경영, 만주에서의 중국의 주권 유지, 사할린(樺太), 치시마열도(千島列島)의 할양 등을 대가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 참전할 것, 중국국민 정부와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 밖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한반도 군사 분할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양군의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으며 이는 2차 대전 종전 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남북 분단을초래하는결과를 가져왔다


*국민정부 일제 항복 앞두고 중소 우호동맹 조약 협상 개시

1945년 = 국민당 정부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이 외교부 차장 후스쯔(胡世澤)과 선훙례(沈鴻烈)과 장징궈(蔣經國)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중소 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체결 협상을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의 이러한 특사 파견은 6월 15일 주중 미대사 헐리가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얄타협정에서 미국이 소련과 맺은 비밀협약을 통고하고 소련과의 협정 체결을 권유한 데 따른 것이다.

중화민국, 즉 국민당 정부의 중국과 소련 간의 중소우호동맹 조약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인 이해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됐다.

이 조약은 얄타회담에 따라 중·소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조약은 중·소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 조건에 대한 중국의 수용을 확인박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滿洲)가 반소(反蘇)기지화 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이권을 회복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실행되고 미구그이 원폭 투하로 일본의 패전이 명백해진 뒤에서야 중국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이 조약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됨으로써 효력을 상실하였고,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은 장제스의 불가피한 선택이자 한계였다. 장제스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을 인정햇다. 1950년의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 조약은 마오쩌둥이 장제스와의 천하 쟁패 싸움에서 승리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마오는 장제스가 엄두를 내지 못한 소련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 포기를 이끌어냈다. 마오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를 성취햇다. 19 45년 조약의 중국 측 협상 주역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거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장제스는 이조약의 체결에 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 4. ~ 1945. 2. 11. )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러한 법적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마오는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년 1월 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 와 협상에 참여했다)중국 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49년 말과 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마오가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년 1월 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년 8월 5일 중국백서(中國白鼠)를 통해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민주당의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보다 일주일 앞선 1950년 1월 5일 영국은 서방 국 최초로 공산 중국을 승인햇다. 홍콩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1차적 목적이 있었으나 세계 전략 적으로 미국의 힘을 윻럽으로 집중시키자는꾐수였다. 미국은 이를 덥석 받은 것이다.

이런 국제 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이 조약은 전문(前文)과 6개조의 본 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러한 특권이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대가로 미국의 적극적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의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 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 미국의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조약은 마오가 장에 비해 더 민족주의적이라는 주장의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치외법권 등 식민주의적 특권 포기를 얻어낸 사실을 상기하면 장은 해양 세력으로부터 제국주ㅢ 트권의포기를 얻어내고 마오는 대륙 세력으로부터 제국주의 특권 포기를 얻어내는 역사적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장과 마오는국제정세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어냈다는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조약 체결 후 마오쩌둥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미국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은 2차 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으로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미 행정부 관리들, 특히 국무부 내 관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의 발발로 미국의 ‘마오의 티토화’ 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통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전진 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애치슨 노선'은 '사화산'이되지 않고 '휴화산'으로 동면햇다. 1972년 2월 말 공화당 의 리처드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이 '휴화산'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4월 11일 발효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 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이 조약의 폐기를 선언했다.

 

                                                                                               동아시아 국가 중국


2차대전때 미국축의 연합군

                                                                            1945년 8월 15일 이후 동북아시아(극동아시아) 지도[사진]

아시아 태평양지역 2차대전은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과 조선국(대일본제국 조선총독부) 등 일본축(군국주의 공화국 국왕제,軍政)과 중국과 러시아,영국(캐나다, 인도) 등 미국축(민주공화국,民政)의 대결이었다

 

1. 대일본 제2전선 구축[중국과 만주국 전쟁]

미국과 영국등 연합군은 일본군이 제1전선으로 태평양(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 오세아니아)과 미국본토[영국 식민지 국가나 아메리카 대륙]를 공격하는 입장에서 제2전선구축이 필요했다

본래부터 미국정부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중국 장개석정부를 도와주었다

소련축 모택동(소련군 전위대 홍군, 공산주의)과 장개석(국군, 자본주의) 분열로 중국내전이 일어났고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모택동과 장개석 연합이 이루어졌다

(1)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2)팔로군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동아시아 국가 중국

제2차 대전 이후 중국은 미국과 소련 도움으로 내몽골와 동북3성(만주족과 몽골족,조선족등), 티벳(티베트족), 신강(회족)등 지배하는 동아시아 국가(동아시아 지배자)가 되었다

 

2. 대일본 제2전선 구축[소련과 만주국,조선총독부 전쟁] 

일본 관동군을 맞이해 소련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만주전에서 일본 지상군을 무릎 끓리며 소련군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 의지를 꺽은 채 한국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일본군 주력군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을 점령해야 사실상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다

일본국 제2차대전 전쟁 추진세력은 일본 민정세력(국왕, 의회와 내각)보다는 군정세력(공화국 국왕제 이론, 군사평의회)으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1)소련군은 연합국 미군원조로 여름 8월(북극해의 여름 )에 일본열도와 사할린, 만주국,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했다

미군의 청탁으로 소련군 참여는 소련이 극동아시 지역 국가(아시아 태평양국가)로 등장했다

그 이후 소련은 동남아와 태평양 그리고 중국 원조국으로 등장했다

 

                                                                                          아시아 태평양국가 러시아(소련)

 

(2)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청진상륙작전 실시

1945년 8월 13일 이반 유마셰프 사령관 지휘 아래 태평양 함대 소일 전쟁 가운데 '청진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한반도 북부 연안 정친시에 소재한 일본 해군 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 기지를 진면 일본 제국 육군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인 관동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둔지에는 중위인 소키티 니시바키와 케이사쿠 무라카미가 지휘하는 해군 기지 3개 부대 등 일본 군 4천명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소련 태평양 함대 해병대는 바실리 투루신 13 여단장 바실리 투루신 소좌 지휘 아래 작전을 실시했다. 배로부터의 상륙은 스투제니치니코프 군 중좌가 지도했다.  

상륙 및 화륙 지원에는 12척의 상륙함 7척의 원양 구축함, 기뢰 부설함, 8척의 순찰함, 6척의 잠수함 보트와 18척의 어뢰 보트가 작전에 참여했다. 상공에서는 태평양함대 해군의 250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지원했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선봉 부대의 상륙과 어뢰 보트는 적들에게 뜻밖이었다.  상륙 작전 첫 째날 항구에서는 상륙 작전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도시 구역으로 바짝 다가섰다. 8월 14일과 15일 청진 항구에는 2개 대대 6천 여 명 이상의 주요 육전 부대원들이 상륙했다.

 

이반 치스치코프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1 극동전선 25여 군부대가 도시로 다가갔다. 이들은 이 시각 청진 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 육전대를 지원했으며 해군 기지를 장악했다. 그리고 작전은 끝났다. 관동군은 붉은 군대에 맞서 방어 조직 구성을 위해 병력을 철수하며 일본섬을 차단했다. 

청진를 점령하는 가운데 500여 일본국이 사망했으며 2,500명이 포로가 됐다. 소련 해병대의 경우 300명이 사망했다   

 

(3)일본은 100년 동안 홋카이도 북방의 4개 섬(쿠릴열도 4개 섬)에 대한 영토 주장을 하고 있다.

북방 4개 섬은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1) 1855월 11월 7일 러-일 통상 및 영토조약: 에토로후 섬까지 쿠릴 열도의 남쪽을 양보하고  그 북쪽에 위치한 북 쿠릴 열도는 러시아 영토로 합의(위 지도 빨간 줄).   그리고 사할린( 위지도의 노란색 지역)에서는 러시아인이 사는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쪽 지역은 일본영토로 합의. (미분할로 남겨둠)

2) 1875년 5월 7일 러-일 국경 조약: 사할린을 러시아가 갖는 대신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 측에 양도하기로 합의.

3)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을 체결하면서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분할하여 점령함.

 또한 패전국인 러시아의 동의 없이 북쪽 사할린도 일본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지명도 일본어로 개칭.

4) 러시아의 강력한 항의로 1925년 1월 20일 조약을 체결 북 사할린에 주둔하던 일본군 철수.

5) 일본이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국의 장개석 총통, 영국의 처칠 수상이 카이로 회담을 개최하여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조선과 만주 태평양상의 모든 영토를 박탈하기로 선언.

카이로 회담 이후 루즈벨트와 처칠은 소련 스탈린은 얄타에서1904~1905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전체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회수 받음.  이때 일본 영토였던 북방 4개 섬이 소련령이 되었다.

6) 1945년 8월18일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일본 영토 홋카이도 절반을 소련군이 점령할 수 있도록 동의해달라고 제안.

트루먼은 홋카이도 점령은 이미 맥아더에게 위임하여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내고 대신 미국이 전략적으로 필요한 쿠릴 열도 중 한 섬에 미군 비행장과 군항시설 건설을 요청.

스탈린은 트루먼의 요청 거절.

이때부터 꾸릴 열도를 두고 미-러 양국의 전략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되었다.  일본의 영토였던 남 사할린과 북방 4개 섬을 1946년 소련 영토에 편입 시켰다.

현재는 북방 4개 섬은 러시아의 사할린 주에 소속 되어 있다.

7) 1955년 러-일 전쟁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는 런던에서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과 단절되었던 통상 및 수교.

8)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러-일 공동선언에 합의 이때 러시아는 북방 4개 섬 중 일본에서 가까운 2개 섬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일본에 양도 약속.

9) 1960년 미국과 일본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에 육. 해. 공군을 주둔시킬 수 있고 외국과 군사충돌이 있을 경우 일본이 지원하고 자위대의 방위력 강화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오키나와 등의 일본 영토에 반영구적인 군사기지로 건설,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과 일본의 상호방위조약이 소련을 겨냥한 반공군사동맹으로 인식하고 반환 예정인 2개 섬도 군사기지로 사용 될 것을 우려 양도를 거부했다.

반면에 미-일 상호 방위조약체결 이후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은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선진국으로 도약한 일본은 이때부터 소련을 향해 강력하게 영토반환문제를 제기했다. 게다가 일본은 소련이 요구하는 평화조약과 경제협력 체결을 거부하면서  1956년 흐루시초프가 약속했던 북방 2개 섬을 즉시 양도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은 요구했던 평화조약체결 및 경제 협력을 철회하고 반환도 거부했다.

10) 1991년 코르바초프 일본 방문했다. 기회를 엿본 일본은 북방영토문제를 거론했으나 고르바초프는 북방 섬에 대한 논의 회피하고 경제적 이득만 챙기고 돌아갔다.  고르바초프가 일본을 방문할 때 소련 학계와 국회 그리고 극동 러시아 어민들의 항의  즉,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 때 약 4만 명의 전사자와 약탈해간 재산과 자원의 보상을 어디에서 받느냐는 여론을 염두에 둔 조치.

11) 경제 강국으로 변모한 일본은 자금 원조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무제한 투자 조건을 내걸고 옐친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켰다.

1993년10월13일 일본을 방문 한 옐친은 많은 이득을 보고 일본수상과 동경선언을 발표까지 공포하였으나 북방 4개 섬 반환에 대한 안건에는 침묵했다. 엄청난 자금과 정성을 쏟았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에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수억 달러의 자금만 날리고 체면도 구겨지는 노리개감이 된 셈이다.

12) 2005년부터 일본에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 일본의 광범한 경제적 투자와 권한을 인정해 주면 러시아의 행정주권을 인정해 주겠다. “

이것은 일본이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물러섰다는 말이다. 이런 전조는 1963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과 러시아가 체결한 어업조약에서도 볼수 있다.

이 어업조약은 문서화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북방 4개 섬을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실제적인 국경선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북방 4개 섬에 경제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주권은 러시아에 주겠다는 말이다

일본은 북방 4개 섬에 러시아 주권을 인정하면서 무엇때문에 자국도 아닌 곳에 복지시설을 건설하고 전기를 공급하고 주민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북방 4개 섬과 남 사할린은 한 때 일본의 영토였다.

소련과의 평화조약에서 얻은 합법적인 영토였다.

그런데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략하여 일본이 연합군의 자격으로 참전한 러시아에 이 영토를 빼앗겼고 러시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일본은 이렇게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60여 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렸다.

엄청난 외교적 노력과 천문학적인 자금을 러시아에 쏟아 부었다. 1998년 러시아 IMF 때 국제통화기금에서 제공한 자금보다 더 많은 달러를 퍼부었다.

러시아에서 제안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까지 추진했고 그 사업으로 손해본 액수가 수억 달러에 달한다.

러시아 극동 주민을 위한 의료. 식품. 주거 등 복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금 북방 4개 섬에는 일본이 무상으로 지어준 안락한 시설에서 러시아 인들이 편히 살고 있다.

또 사할린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모두를 높은 값에 수입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러시아는 2개 섬을 반환한다. 에토로우 섬을 분할하여 반환한다는 등

변죽 울리는 안건만 제시할 뿐 이득만 챙기고 나면 원론적인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러시아의 반환 발표에 들떴던 일본은 변덕스런 러시아에 모욕적인 수모를 당했으나 어쩔수 없었다.

러시아의 문 앞 개처럼 언제쯤 던져질 북방 4개 섬에 침 흘리는 형상이 지금 일본의 처지다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지도[사진]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러시아 연방 캄차카 반도의 남단에서 시작하여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동부에 이르기까지 1,200㎞에 걸쳐 뻗어 있으면서 오호츠크 해와 태평양을 가른다. 이 열도를 이루는 섬의 수는 56개이며, 그 총면적은 1만 5,600㎢이다. 이 열도는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불안정한 지질대의 일부이다.

100개 이상의 화산 중 35개는 활화산이며, 온천 역시 많다. 이 열도에서는 지진과 큰 해일이 일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흔하다. 특히 1737년에 발생한 해일의 높이는 64m에 이르렀는데 이는 기록상 세계 최고높이이다. 이 열도와 나란히 뻗어 있는 태평양 기저의 쿠릴 해구는 깊이가 1만 542m이다.

기후는 혹독한 편으로 겨울은 길고 추우며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습윤하면서 서늘하다. 연평균강수량은 760~1,000㎜이며, 9월말부터 6월초까지 내리는 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북쪽 섬들의 툰드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며, 남쪽의 보다 큰 섬들에는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다.

게잡이를 비롯한 어업이 유일하게 중요한 산업이다. 주요중심지는 가장 큰 섬인 이투루프 섬에 있는 쿠릴스크 시와 파라무시르 섬의 세베로쿠릴스크 시이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로 그들은 17~18세기에 열도를 탐험한 후 정착했다. 그러나 1855년 일본인들이 남쪽의 섬들을 점령했고, 1875년에 열도 전체를 손에 넣었고 이름을 지시마[千島] 열도라 고쳤다. 1945년 얄타 협정에 따라 쿠릴 열도는 소련에 양도되었으며,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고 대신 소련인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열도의 남단부에 있는 4개의 섬들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쿠릴 열도에 대한 소련과 일본의 분쟁으로 1956년 양국은 관계를 정상화했으나 평화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다.

 

 

미국, 하와이 일본계 주민 수용소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Honouliuli National Monument in Hawaii permanently protects a site where Japanese American citizens, resident immigrants, and prisoners of war were held captive during World War II. Located on the island of Oahu, the monument will help tell the difficult story of the internment camp’s impact on the Japanese American community and the fragility of civil rights during times of conflict. Photo by R.H. Lodge, courtesy Hawaii’s Plantation Village.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계 주민이 강제수용된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와이 주의 최대 수용소 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수용소는 진주만에 가까운 하와이 주 최대 규모로, 일본계 주민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시민 외에 약 4천 명의 전쟁포로가 수용돼 있었습니다.

백악관은 사적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일본계 주민사회에 미친 충격과 전시 중 공민권의 취약성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후인 1942년 2월 19일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계 주민을 강제수용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해 약 12만 명이 수용소에서 고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사적은 미국 역사의 아픈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제2차세계대전에서 싸운 일본계부대에 최고훈장 수여하기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군을 지원해 유럽의 격전지 등에서 싸운 일본계 미국인 부대에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중 미국에서는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적성외국인'으로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졌고, 일부 일본계 미국인은 군에 지원해 독일과 이탈리아 등의 격전지에서 싸우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법안은, 일본계 미국인 부대가 국내에서는 인종차별과 싸우고 국외에서는 파시즘과 싸워 용맹함을 보여주고 국가에 헌신했다며,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5일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서명에 입회한 육군 출신 테리 시마 씨는,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공적을 기리는 일이라며,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사회에 있어서도 기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미 의회, 일본계 노병들에 금메달 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국인 노병들에게 미 의회 금메달이 수여됩니다. 온갖 차별 속에서도 미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공로를 인정받은 건데요.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제 (5일) 관련 법안에 서명하며 이들의 무훈을 상기시켰습니다. 어떤 의의가 있는 건지 알아보겠습니다

문) 미국 정부가 다시 한번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리는 법안을 마련했군요. 이번에는 일본계를 따로 분류해서 메달을 수여하고 있네요.

답) 예. 미 의회 금메달이라고 하면 민간인 최고의 영예에 해당되는데요. 미군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6천 여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번에 그 영예를 안게 됐습니다. 어제 (5일)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공식화 됐구요.

문) 이렇게 일본계만 따로 떼어내서 상을 줘도 되나요? 차별 논란은 없을까요?

답) 차별 말씀을 하셨는데, 거의 70년 전에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미 받은 차별에 대한 보상 차원이라는 점에서 미국 내에서 충분히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적국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당시 미국에 이민 와서 살던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적국 안에 갇힌 셈이 돼 버렸습니다.

 

문) 실제로도 격리 수용됐잖아요.

답) 그랬었죠. 미국이 스스로 부끄러운 역사로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에 서명하는데요.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현 거주지에서 지정된 수용소로 이송해 그 곳에 구금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문) 그러니까 일본계 미국인들로서는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완전히 이방인 취급 당하는 일이 벌어진 거군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라고는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엄연한 미국 시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1942년 3월에서 5월까지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요. 가족이 각각 다른 수용소로 이송돼 생이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 미군에서 복무 중인 일본계 미국인이 5천 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에 이들은 모두 현역에서 제대 조치 당했습니다.

문)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된 거죠. 일본계 미국인 입장에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으로도 이해가 되네요.

답) 물론 그런 동기도 작용을 했을 겁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 이런 의사를 끊임없이 표현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나 봅니다. 미군에서 받아 주질 않았던 거죠. 군 복무 부적합, 또는 적성국가의 외부인으로 분류되기 일쑤였다고 하네요. 엄연한 미국 시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문)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계 부대가 따로 편성이 된 거죠? 이번에 의회 금메달을 받게 된 초석이기도 하구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가 주축이 된 미 육군 442연대 100대대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끝장을 본다’는 구호를 내걸고 2차 대전에 참전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요. 가족이 미 당국에 의해 격리 수용돼 있는 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미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 이 부분을 높이 사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월이 흐를수록 높아졌고 또 받아들여진 겁니다.

문) 미국 정부로서도 특정 민족을 격리 수용했던 역사의 어두운 구석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답) 맞습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지난 1988년 일본인 강제수용에 대해 사과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는 과거의 실책을 거듭 사과한다는 점을 이번에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니엘 아카카 미 상원의원은 442연대 일본계 미군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미국을 보다 관대하고 공정한 나라로 변모시키는데도 기여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 미국 정부의 양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론 일본계가 너무 피해자로만 묘사되고 있는 건 아닌가, 사실 그런 논란도 있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미국 바깥에선 반대로 일본이 타민족을 억압했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하니까요. 특히 한국에선 미국은 70년 전 일도 일본에 사과하는데 일본은 왜 일제 침략에 대해 사과할 줄 모르냐, 거꾸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무 피해자인척 하지 마라, 이런 시각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문) 미 의회에서도 그런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의원이 있잖아요. 의외로 일본계 더군요.

답) 맞습니다. 마이크 혼다 의원,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됐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미국이 사과한 것처럼 일본도 사과하라, 이런 주장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미국의 소리]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After the capitalist democracy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t(social rights, Right to life) coexist (respect) is a free society. -Freedom Society[Democratization government]-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Three principles of capitalism:Private property, pursuit of profit, Principle of free market competition Etc.[資本主義 三代原則: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Three principles of Democracy: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Etc[民主主義 三代原則:為民有、民治、民享 等等]

-Guide Ear[Intelligence, Bird's Eye&Guide Ear]-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도

팔로군(八路軍),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설립되었고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도모로 인해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1.개요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민중에 의한 혁명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에서는 1920년대 1차 국공 내전 당시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군대의 수나 그 재정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대를 이용해 상하이 쿠데타(중국어: 四·一二事件)를 부흥시켰고, 제1차 국공 합작을 붕괴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씁쓸한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해야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큰 기회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에 의한 인민전쟁 이론(「점화한 적군을, 인민의 바다안에 매장한다」―인해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의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공산당에 협조적인 지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공산당 세력은 풀뿌리적으로 증식하였고 중일 전쟁이 끝난 1945년 980,000명 정도의 게릴라 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 혁명군과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팔로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하였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 양성하였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 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하였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이 간호,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하고도 팔로군은 긴 세월에 걸쳐 징용 했고 팔로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여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역할을 완수했다.

2.활동 지역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하였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3.승전국(勝戰國)

2008년 현재, 중국 국민의 대부분이「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믿고 있다.「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하는 이유는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으나, 갑자기 터진 중일 전쟁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활발한 게릴라 작전등을 펼쳤고 이에 대해 지지를 얻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4.전신 체계

당초 조직 된 홍군(중국 공산당군)은 마오쩌둥 지휘하의 중국공농홍군과 남창 봉기로 주덕 밑의 홍군인 정강산에서 합류해 중국공농혁명홍군 제4군이 되어 후에 중국공농홍군 제4군이 되었다. 제4군은 서금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5회에 걸치는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맞아, 근거지를 떠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5.규모 및 규모 변화

팔로군은 비정규적인 게릴라 전을 구사하였으나 정규 전술을 썼던 국민당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었다. 중국측 자료주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경우는 약 300,0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로군은 소련에 의해 압수된 수 많은 일본군측의 장비와 무기들을 소련측으로부터 흡수함으로써 장비로서 정규적 전술을 펼칠수 있는 군대를 만들수 있었으며, 팔로군의 숫자를 계속 늘릴수 있었다.

(1)국민혁명군 제8로군

1937년 - 120,000명

1938년 - 156,000명

1940년 - 400,000명

1944년 - 600,000명

1945년 - 980,000명

(2)중국 공산당

1946년 - 1,200,000명

 

6.조직

(1)지휘부

사령관:주더

부사령관:펑더화이

참모장:예젠잉

정치부(제8로군정 지부) 주임:런비스

(2)예하 부대

제115 사단장 린뱌오, 부사단장 네룽전, 부대 주 지휘관 뤄룽환

제120 사단장 허룽, 부사단장 샤오기, 부대 주 지휘관 관웅

제129 사단장 류보청, 교위단장 쉬샹첸, 부대 주 지휘관 장하오

각 사단은 각각 2개 여단이 있다.

독립단- 조선인으로 구성 된 여단이다. 조선의용대 또는 1940년대 초반에 차출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기병단 - 주로 측면을 교란하던 기병대였다.

포병단 - 팔로군이 숲속이나 농촌지에 요새를 구축할 때 그 수성전은 주로 포병단이 맡았다.

타격단 - 팔로군의 주력 여단이었으며 게릴라 전술을 통한 관동군 후방 교란이 주요 목적이었다.

교도단 - 주로 경비 또는 죄수 교도를 맡았다.

특무단 - 지금의 헌병대의 역할이며 팔로군 내 군경 역할을 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7.3대 기율과 8항주의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에는 「3대 기율 8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라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팔로군이 대중에게 지지를 받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후에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인민지원군에게도 나타났다. 이 규율을 어긴 팔로군은 중형을 받게 되었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로군은 장개석 휘하의 국민혁명군과는 반대로 이 엄격한 군대 교조로 인해 게릴라 전으로 큰 전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1)3대 기율[三大規律]

1.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한다

2.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공짜로 취하지 않는다.

3.모든 전리품은 공유하여야 한다.

(2)8항주의[八項主義]

1.병사를 구타하거나 욕하지 않고 불필요한 상명하복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사람은 때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2.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3.공평하게 사고 판다[매매는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

4.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5.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말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6.빌린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7.파손한 물건은 반드시 배상한다.

8.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8.소멸

194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이 국민당군의 선공으로 붕괴하면서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편입되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당군이며,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다.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 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신사군(新四軍) 깃발

1938년 1월 6일 신사군(新四軍)이 난창(南昌)에서 정식으로 구성됐다.

신사군은 1934년 10월 홍군의 주력이 장정(長征)을 시작, 서천북상(西遷北上)한 뒤 화중(華中), 화난(華南)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해 온 홍군 잔존 부대로 구성되었다.

신사군이란 명칭은 2차 국공합작 후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0월 이들 잔존 게릴라 부대의 재편을 허용하고 이 부대에 '국민혁명 신편 제4군(國民革命新編第四軍)'이란 부대명칭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군장(軍長)에 예팅(葉挺), 부군장에 샹잉(項英), 참모장에 장윈이(張雲逸), 부참모장에 저우쯔쿤(周子昆),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임명됐으며 4개 지대를 관할했다.

3년 뒤인 1941년 1월 6일환난(皖南), 즉 안후이(安徽)성 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신사군 9,000명이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 이북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민당 군 7개 사단 8만 명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2,000명만이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부군장 샹잉과 7,000여 명은 전사하고 군장 예팅도 포로가 되었다. 이는 공산군 세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한 국민당군의 초조감의 발로로 ‘환난사변(皖南事變)’으로 불린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적인 일본군을 앞두고 벌인 동족상잔에 대해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빗대 ‘千古奇冤 江南一葉; 同室操戈 相煎何急’ 이라는 시를 신화일보(新華日報)에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이(陳毅)를 대리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장윈이(張雲逸)을 부군장으로 삼아 신사군 재건에 나섰으며 한층 강한 군대로 발전했다. 항일전쟁 후 내전 당시 화둥(華東)야전군으로 활동했다.

 

*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1950년 = =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소련의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이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앗다.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앗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1979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4대 현대화를 추진함에 있어 견지되어야 할 4가지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는 덩의 대담한 개혁, 개방 정책 추진에 대한 반대파의 공세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의 길 견지;
2. 무산계급 독재 견지;
3. 공산당의 영도 견지;
4.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사상 견지.

 

 

                                                       덩샤오핑은 "울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형 인물

9월 12일은 린뱌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1948년 9월 12일은 그의 지휘 아래 국공내전 3대 전투의 하나이자 첫 번째 승리인 랴오선 전투가 개시된 날이고 그로부터 꼭 23 년뒤인 1971년 9월 12일은 그의 마쩌둥에 대한 쿠데타 기도가 실패로 긑나 가족과 함께 항공 편으로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몽골 상공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한 날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뒤 바로 같은 날인 1982년 9월 12일 중국 공산당 12기 1중전회에서 당 주석제가 폐지됐다. 이와 함께당 주석에서 밀려나 부주서으로 있던 화궈펑(華國鋒)이 정치국에서 축출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군사위 주석으로, 당 주석으로 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주석제 폐지에 따라 당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의 대표, 즉 당수가 됐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는 당 군사위 주석을 맡은 덩샤오핑이다.

화궈펑은 정계에서 완전 축출되지 않고 당 중앙위 위원 자리는 유지햇다.

당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각기 다른 사람이 따로 맡는 최고 권력의 명실(名實) 분ㅇ리의 '2원 체제'는 1989년 11월에 그보다 5개월 전 천안문 사태로 총서기에 선출된 장쩌민이 덩샤오핑으로부터 군사위 주석 직을 인계 받으면서 종식됐다. 2002년~2004년 장쩌민 군사위 주석-후진타오 총서기 2원 체제가 잠시 부활햇으나 다시 한 사람이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함께 보유하는 1원 체제로 돌아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잇다.

덩샤오핑이 군사위 주석 직을 맡아 최고 실력자가 된 이날2인자로서 1인자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스스로 1인자가 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소련 망명 시도 중 추락사한 린뱌오의 11주기엿다.

1인자를 꿈꾸었으나 실패한 린뱌오와 성공한 덩샤오핑을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 비유한다면 린뱌오가 '울지 않는 종달새는 죽여 버려라'의 '오다 노부나가' 형 인물이라면 덩샤오핑은 '울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형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천하 통일 직전에 측근에 기습으로 할복자살했고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오다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면종 복배하며 때를 기다리다 200년 동안 지속되는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를 열엇다. 린뱌오는 다름아닌 친딸의 밀고로 사실상 암살 당한 셈이었고 때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시대'라는 마오 시대와는완전히 구별되는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있는 시대를 열었다. 9월 12일은 공통정으로 1인자가 되려는 강한 야심을 가슴에 품고 있엇던 두 2인자의 흉일이자 길일이엇더다. 또한 전자의 실패는 후자의 성공의 반면 교사임과 동시에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린뱌오의 사망은 군부 통제의 공백을 불러 일으켜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여 유배되어 있던 덩샤오핑에게 복권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린뱌오 사망과 관련,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린뱌오 일행이 베이징(北京)에서 살해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린뱌오의 군부 측근으로 그의사망 후 숙청됏던추후이줘(邱會作은 '린뱌오 사건' 40주년 이던 2011년 '린뱌오 쿠데타 기도 사건'은 조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린뱌오는 각급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50만 명의 홍위병들 앞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인도자, 위대한 영수, 위대한 원수, 위대한 조타수 마오주석(偉大的導師,偉大的領袖,偉大的統帥,偉大的舵手毛主席)"이라는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 송사를 낭독했다.

린뱌오는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국민정부 군의 쑨리런(孫立人)과 함게 사단급 이상 규모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킨 중국인 장군으로 유명하다.
린뱌오는 일본 패망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 내전 승리의결정적 전투인 3대 전투 중 첫 번째인 랴오선 전투를 지휘했고 핑진 전투에서도 중심적 역할을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 말기 인민해방군 재편성 과정에서 제4야전사 사령원이 되었으며 문화 혁명 기간 중 제4야전사 출신들이 군부 요직을 장악햇다. 이것이 제2야전사 정치위원이었던 덩샤오핑이 그의 사망후 정치적으로 부활한 배경이다.

린뱌오는 공산 정권 수립 후 계급제도 도입 때 10대 원수의 한 명이 되었다.
린뱌오는 중국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이기는 햇으나 정치적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한 수 아래엿다. 그의 정치적 책략은 마오쩌둥과 비교하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었던 셈이다. 마오는 한국 전 개입을 결정한 뒤 그를 북한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햇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회피하는 바람에 펑더화이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펑더화이는 미군과의 전투를 통해 현대전을 뼈저리게 경험한 한국전 참전 이후 마오의 인민 중시 게릴라 전술 전략에서 이탈햇고 린뱌오는 마오의 군사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지, 정치적 입지가 극과 극으로 갈렷다.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린뱌오 역시 결국 마오의 정치적 버린카드가 되어 펑더화의 전철을 밟았다.

                             린뱌오가 '울지 않는 종달새는 죽여 버려라'의 '오다 노부나가' 형 인물  린뱌오(임표) 시체 모습

 

                                                  홍위병들과 함께 한 당시 중공의 실세. 린뱌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린뱌오 사망 사건 5년 전인 1966년 8월 31일 린뱌오가 천안문 광장에서 개최된 제2차 홍위병 사열식에서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칭江淸, 세 번째가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의 직접적 위협은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이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투항 선언에 뒤이어 국공 내전이 개시되자 국민당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을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조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본부가 있던 옌안마저 함락되었다. 린뱌오는 친소성향으로 소비에트 홍군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둥베이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 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린뱌오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린뱌오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린뱌오는 1938년 3월,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 망토를 입고 승마 중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아군에게 오인 사격을 받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이후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후에 소련 모스크바까지 가서 1942년까지 요양하였다. 이때 신경의 부상으로 물과 바람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산수화까지 보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가장 흠모한 중국 군인이 린뱌오었다]

 

East Asia China

                                                                                동아시아 국가 중국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오족공화(五族共和)는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다. 이 원칙은 중국에 있는 5대 민족과 관련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국기인 오색기(五色旗)에서 빨간색은 한족,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 몽골족, 하얀색은 후이족(회족), 검정은 티베트족을 뜻한다. 여기서 회족은 무슬림으로, 위구르족을 포함한다. 청나라 때 신장 지역은 회강(回疆)이라고 불렀다. 오색기는 1928년 북양 정부가 무너지고 중국 국민당(한족)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이 있다.

 중국 민족에는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위글족, 묘족, 이족, 쫭족, 부이족, 조선족, 만족, 뚱족, 요족, 바이족, 투쟈족, 하니족, 까자흐족, 따이족, 리족, 리수족, 와족, 써족, 고산족, 라후족, 수이족, 둥샹족, 나시족, 징퍼족, 끼르끼즈족, 투족, 다고르족, 머로족, 챵족, 부랑족, 쌀라족, 모난족, 거로족, 시버족, 아창족, 프미족, 따쥐크족, 누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어윈커족, 더앙족, 보안족, 위구족, 징족, 따따르족, 두룽족, 오로죤족, 허저족, 먼바족, 뤄바족, 지노족이 망라된다. 이밖에 중국에는 아직 민족이 식별되지 않은 적은 인구가 있다.

                                                              Manchukuo[滿州國, 1932-1945]:동북3성(만주)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蒙疆聯合自治政府, 1937-1945):내몽골

                                                                         East Asia China[2016]

 

                                                  Shinjang Uyghur aptonom rayoni (新疆維吾爾自治區):신강

1933년 11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나 3개월 만에 소멸되었고, 1944년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고,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Bod-rang-skyong-ljongs( 西藏自治區):티베트(티벳)

1912년부터 1950년까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우창 지방과 서부 캄 지방)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티베트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Northeast Asia[Far East,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