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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평화상, 평화협정 이끌어낸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본문

Guide Ear&Bird's Eye/21세기 동아시아인 노벨상

올해 노벨평화상, 평화협정 이끌어낸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CIA Bear 허관(許灌) 2016. 10. 7. 19:00

 

                                                              노벨평화상, 평화협정 주역 후안 마누엘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수상

올해 노벨평화상의 영예는 콜롬비아의 반세기 내전을 끝내는 평화협정을 이끈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어 산토스 대통령을 2016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산토스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와 평화협정에 서명, 1964년 농민 반란으로 시작돼 52년간 콜롬비아에서 지속한 내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50년 이상 계속된 내전을 끝내려는 산토스 대통령의 확고한 노력을 인정해 평화상 수상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콜롬비아 평화협상은 서명 뒤 이달 2일 국민투표에 부쳐졌으나 찬성 49.78%, 반대 50.21%로 부결됐다. 반대표와 찬성표의 표차는 5만7천표였고 투표율은 37%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노벨위원회가 콜롬비아 평화협정의 정신을 지켜 평화를 이어가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산토스 대통령을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올해 노벨평화상은 역대 최다인 376명(개인 228명, 단체 148곳)이 후보로 추천받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노벨상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1억원)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올해 노벨상의 경우 생리의학상(3일), 물리학상(4일), 화학상(5일)에 이어 이날 평화상 발표가 있었고 경제학상, 문학상이 다음 주까지 차례로 발표된다.

노벨평화상은 스웨덴에서 선정하는 다른 노벨상과 달리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한다. (연합뉴스)

 

평화상 산토스는…'유혈강경파'서 '비둘기'변신해 52년 내전종식

과거 반군과의 유혈 대결에 앞장섰던 콜롬비아의 후안 마누엘(65) 산토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의 영예를 안았다.

7일(현지시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평화협정 가결 직전까지 갔던 콜롬비아 최대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협상을 이끈 산토스 대통령을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964년부터 내전을 치른 콜롬비아 정부와 FARC는 지난달 평화협정 서명식을 치르고 노벨상 유력 후보로 급부상했으나 이달 2일 국민투표에서 협정이 부결되면서 밀려나는 분위기였다.

콜롬비아 평화협정은 국민투표에서 찬성 49.78%, 반대 50.21%로 부결됐다. 반대표와 찬성표의 표차는 5만7천표였고 투표율은 37%였다.

그러나 노벨위원회는 "50년 이상 계속된 내전을 끝내려는 산토스 대통령의 확고한 노력을 인정해 노벨상을 수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국민투표 부결에도 평화협정의 취지를 지켜가라는 격려와 촉구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산토스 대통령은 FARC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와 2012년 11월부터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정부와 FARC의 역대 4번째 평화 협상을 해오면서 평화협정 타결에 전력을 쏟아왔다.

산토스 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는 실패를 맛봤지만 노벨 평화상이라는 최고 권위 상을 받으면서 다시금 내전 종전과 평화 달성에 도전할 동력을 얻었다.

영국 BBC는 산토스 대통령의 극적인 변신을 "매(hawk)에서 비둘기(dove)로"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한때 콜롬비아 정규군을 이끌고 FARC 토벌에 앞장섰던 산토스 대통령은 2010년 평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엔 전쟁 대신 협상을 진두지휘하면서 자신의 정치 생명을 평화협정 타결에 걸어 노벨상을 안았다.

산토스 대통령은 1938∼1942년 콜롬비아 대통령을 지낸 에두아르도 산토스 몬테호와 2002∼2010년 부통령을 지낸 프란시스코 산토스 칼데론 등을 배출한 콜롬비아의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산토스 대통령은 미국 캔자스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와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공부했으며 콜롬비아의 가장 강력한 경제 단체인 커피재배자협회에서 근무하는 등 전형적인 콜롬비아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가문이 소유한 콜롬비아 최대 일간 '엘 티엠포'의 부국장을 지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산토스 대통령은 1991∼1994년 대외무역부 장관, 2000∼2002년 재무부 장관 등 공직에서도 경력을 만들었다.

산토스 대통령은 역설적이게도 현재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이자 평화협정 반대파의 거목인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 재임 시기에 요직인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돼 앞으로 자신이 풀어갈 정치의 큰 틀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 상원의원인 우리베 전 대통령은 2002∼2010년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부친이 FARC에 납치돼 살해된 기억을 바탕으로 FARC 토벌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우리베 전 대통령은 공약 실천을 위해 내각을 구성하면서 콜롬비아 정부의 핵심 보직 중 하나인 국방부 장관 자리에 산토스를 앉혔다. 산토스 당시 장관은 굵직한 군사 작전 여러 건을 지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5년 넘게 FARC에 납치됐던 정치인과 인질 14명을 무사히 빼내온 것을 비롯해 2008년 이웃 국가 에콰도르 영토에 있는 FARC 기지를 예고 없이 폭격, FARC 고위 간부 라울 레예스를 사살하기도 했다.

에콰도르가 주권 침해를 주장하며 외교 분쟁이 발생했고 이 시기 콜롬비아군이 민간인을 죽이고는 반군으로 꾸며 전투 성과를 과장했다는 증거가 폭로돼 스캔들로 비화하기도 했지만 '강경파' 산토스에 대한 지지는 높았다.

장관 시절 쌓은 인기를 토대로 2010년 대선에 나선 산토스는 '민주주의적 안보'라는 표어 아래 우리베 정부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 콜롬비아 선거 사상 역대 최고 수준 득표율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선 이후 보수파 우리베 정부와 사이가 나빴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좌파 정부와 관계를 정상화하고 전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부패 등 혐의로 처벌하는 등 우리베 전 대통령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2012년 정부와 FARC가 비밀리에 협상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산토스 대통령이 이를 인정하면서 전·현직 대통령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됐고, 산토스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 2014년 우리베 전 대통령이 다른 후보를 지지하면서 관계는 극도로 악화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재선 도전 당시 '평화 협상 지속'이라는 공약으로 근소한 승리를 거뒀지만, 협상의 결과물인 평화협정은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끈 반대파의 공세 끝에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며 패배를 맛봐야 했다.

산토스 대통령과 우리베 전 대통령은 지난 4일 전화 통화를 한 데 이어 6일 수년 만에 처음으로 비공개 회동을 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과 우리베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반대파를 포용해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

 

 

노벨평화상, 콜롬비아 대통령 선정...50년 내전 종식 공헌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자료사진)

올해 노벨평화상은 50여 년 만에 반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에게 돌아갔습니다.

산토스 대통령은 공산주의 반군단체와의 평화협정으로 지난 50년 간 지속돼 온 콜롬비아 내전을 끝내는 데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산토스 대통령과 콜롬비아무장군 (FARC) 지도자 티몰레온 지메네즈는 지난달 남미 지역 최장기 내전을 끝내는 내용의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은 그러나 최근 콜롬비아 국민투표에서 부결됐습니다.

산토스 대통령은 국민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평화안을 되살릴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대다수 콜롬비아 국민들은 이 협정이 반군들에게 너무 관대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남미 출신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1992년 과테말라 인권활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가 마지막이었습니다.

VOA 뉴스

진행자) 올해 노벨평화상이 콜롬비아 대통령에게 돌아갔군요?

기자) 네.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금요일(7일) 진행된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의 수상자 발표 들어보시죠.

[녹취: 2016노벨평화상 발표]

기자)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52년 동안 이어져 온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의 내전을 끝내는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콜롬비아 정부와 반군 측이 지난달 말 서명한 평화협정은 이번 주 초 콜롬비아 주민들의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긴 했지만, 남미 최장기 내전을 마침내 종료에 이르게 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콜롬비아의 군사 전문가로서, 2006년부터 3년 동안 국방장관을 지낸 뒤 2010년 정권을 잡은 산토스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내전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진행해오다가 지난 8월 국제사회의 중재로 반군 측과 평화협정 체결에 합의했습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가운데 왼쪽)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카리브 해안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반기문(왼쪽) 유엔사무총장 등 국제사회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드리고 론도뇨(가운데 오른쪽)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최고사령관과 함께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진행자) 그런데 평화협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지 못한 거군요.

기자) 네, 당초 오랜 내전에 지친 콜롬비아 국민들이 평화협정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찬성과 반대 표 수 차이가 유효 투표의 0.5%에 못 미치는 근소한 차이로 국민투표에서 부결됐습니다. 내전 종식에는 찬성하지만, 반군이 벌인 살인과 납치 등의 범죄행위를 대부분 처벌하지 않기로 한 평화협정 조항에 콜롬비아 국민들이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현지에서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국민투표 부결 이후에도 콜롬비아 정부는 평화 정착 노력을 이어갈 의지를 밝혔고요, 유엔은 특사를 파견해 정부와 반군 양측의 재협상을 돕는 중입니다.

진행자) 콜롬비아 내전에 대해서 정리해볼까요?

기자) 지난 1964년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결성을 계기로 촉발된 콜롬비아 내전은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진행돼온 세계 최장기 무력 분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초 콜롬비아공산당(PCC) 산하 무장조직이었던 혁명군 측이, 공산혁명 좌절 이후 게릴라 전투를 중심으로 전략·전술을 수정하면서 내전으로 발전한 건데요. 초기에는 혁명군이 콜롬비아 국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지난 1993년 공산당과 결별한 뒤 마약조직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이익을 챙기면서 여론이 등을 돌렸습니다. 이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콜롬비아 정부를 지원하면서 반군 세력이 급속하게 위축됐고요, 이때부터 반군은 평화협정 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진행자)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일정이 계속되죠?

기자) 네. 다음 주 월요일(10일)에는 노벨 경제학상, 수요일(13일)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됩니다. 앞서 지난 월요일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오스미 요시노리 일본 도쿄공업대학 명예교수가 선정됐고요, 다음날 데이비드 사울레스 워싱턴대 교수를 포함해 미국 대학에서 연구하는 영국인 학자 3명이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정해졌습니다. 이어 지난 수요일에는 프랑스 출신의 장 피에르 소바주 스트라부르 대학교 명예교수 등 3명이 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시상식은 노벨재단을 설립한 스웨덴 출신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에 열립니다.

 

 

*콜롬비아의 마오(모택동)주의 무장 혁명군

                                                                                 콜롬비아의 마오(모택동)주의 무장 혁명군 모습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인민군(약칭 FARC 또는 FARC-EP)는 콜롬비아공산주의 혁명·게릴라 조직이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콜롬비아 공산당 산하 무장 단체로 남아 있었으며 지방 정부와 민간의 사회 기반 시설들을 주요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콜롬비아 정부와 미국, 유럽 연합 등으로부터 테러 조직으로 지정되었다. 중남미에서 규모가 큰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로 40여 년 동안 콜롬비아 정부에 대항해 왔으며 잠깐 동안 국제적인 지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냉전 시대(1980년대) 이후에는 마약코카인 재배와 정계 요인 납치 등의 범죄를 일삼았으므로 대중들에게 나쁜 인식을 주었다. 콜롬비아 혁명군은 콜롬비아 공산당에서 분리된 단체로, 독립된 정치 기구로 여겨진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회원 수는 7,000-10,000명으로 추산되며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가운데 25~30%는 콜롬비아 혁명군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주로 콜롬비아 정글 남동부와 안데스 산맥 평원 지대에서 활약하며 최근에는 대중들의 나쁜 인식을 개선시키기 위해 인질의 몸값을 제시, 석방하고 있다.

-원래 좌파 FARC 코스타리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상징 게릴라이지만 마약 밀매나 밀수 무역과 몸값의 연속 납치 사건을 포함하기 때문에, 명성은 더 심각되고 있다.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 (FARC)는 원래 독립적인 조직이 될 공산당에서, 때문에 마약 거래에서 지난 세기의 팔십에, 콜롬비아 공산당 군사 기관에 속한, 1964 년에 설립되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게 갖춘 최대 규모의 조직 콜롬비아 영토뿐만 아니라, 최고의 전투 게릴라이다

-콜롬비아 내전은 현재까지 40년째 진행중이다.

이 내전은 좌우익의 이념대립, 빈부격차, 불평 등에 기인하였고, 우익을 표방한 정부 및 극우 단체와 이에 대항하는 좌익게릴라와의 싸움으로 번졌다.

 내전을 주도한 3대 게릴라 단체는 다음과 같다.

1. 민족해방군 (ELN)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1964년에 결성.

2. 콜롬비아 혁명군 (FARC) : 1966년에 결성된 좌파 혁명군.

3. M-19 : 1973년 결성된 자생적 사회주의 무장단체.


FARC는 1964년 콜롬비아 공산당 산하 무력부로 설립된 남미 최대의 좌익 반군조직으로 한때 콜롬비아 영토의 절반을 장악하고  노동자,농민의 해방 반미주의를 표방해 왔다.


이들은 콜롬비아가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하며, 천연자원(석유, 커피, 에메랄드광산 등) 사유화 반대, 다국적기업들의 농민 착취 금지, 공권력의 민중 학살 금지 등을 내세워 집권을 위한 무장혁명을 외치며 총을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FARC 반군 약 2만여명이 여전히 콜롬비아 산지와 정글에서 활동 중이라고 밝혔다.


게릴라들이 순순히 투항하거나 미국의 군사지원으로 전면전 양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단기간에 내란이 종식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미국에서  콜롬비아에 대한 군사지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2의 베트남전을 피하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없이<엄청난 지원중 이지만 서방시각> 콜롬비아 정부군만으로 반군단체와 마약조직을 소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향후 전쟁세 신설 및 자체  군사력증강, 직업군인 양성 등으로 게릴라들의 투항을 유도하거나 전면전에서의 승리를 <결론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것이 중요> 끌어 내기 전까지는 현 상태에서 내란사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요원하다고  본다.

 

사진은 FARC-EP 반군 조직이 아닌 ELN 소속 반정부군들.어깨패치와 복면에 ELN마크가 붙어 있습니다.ELN 반정부군은 2,500명이나 되는 조직 으로 콜롬비아 반군 조직 중에 두번째로 큰 규모입니다.이외 800명 규모의 EPL,EGP,ERP,CAP 반정부군 조직이 있습니다.소총은 FN-FAL,AK-47소총 입니다.전술 조끼는 LBT사제로 보입니다.(5천명으로 추산)

 

ELN반정부군입니다.완장을 보면 eln은 위에는 적색과 밑에는 검은색으로 되어 있으며, eln문자가 붙어 있습니다.AUC도 ELN이나 FARC로 위장하기 위해서 ELN,FARC완장을 차는 모습이 목격 되어 습니다.ELN은 대다수가 복면을 쓰는 경우가 많으나 FARC는 복면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Juan Manuel Santos Calderón)

후안 마누엘 산토스 (Juan Manuel Santos Calderón,1951년 8월 10일 ~ )는 콜롬비아의 우파 정치인이며 알바로 우리베 벨레스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었다. 집권 여당 우리비스타연합의 후보로서 대선에 출마하여, 2010년 6월 20일에 끝난 대통령 선거의 결과 6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0년 8월 7일에는 대통령에 취임하여 재선을 통해 승리하여 2014년 8월 7일에는 다시 2번째 취임을 하였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경영학 학사,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경제개발 및 공공경제학 석사,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M.P.A.)를 받은 해외 유학파 이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의 할아버지 형제인 에두아르도 산토스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재임한 콜롬비아의 대통령이자 엘 티엠포 신문의 사장이었다. 아버지는 엘 티엠포의 편집장이었고 형은 스페인의 플라네타 그룹에게 신문사가 팔리기 전까지 국장을 하였다. 사촌인 프란시스코 산토스 칼데론은 알바로 우리베 벨레스 대통령 시절에 부통령을 하였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후안 마누엘 산토스(오른쪽)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 7일 수도 보고타의 대통령궁에서 회견을 열어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은 부인 마리아 여사.

"정치 명문, 신문 재벌가 출신의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1951년생, 올해로 65살입니다. 산토스 대통령 가문은 대대로 여러 명의 정치인을 배출해낸, 콜롬비아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입니다.

산토스 대통령의 큰 할아버지인 에두아르도 산토스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콜롬비아의 대통령을 지냈고, 사촌인 프란시스코 산토스는 알베로 우리베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산토스 가문은 또 콜롬비아의 유력 일간지인 ‘엘 티엠포’의 대주주로 산토스 대통령의 아버지는 50년 넘게 엘 티엠포의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국제 경험이 많은 정치인"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캔자스대학교에서 경제와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이후 곧바로 영국 런던에 소재한 ‘국제커피기구(International Coffee Organization)’의 콜롬비아 대표로 발탁돼 9년 동안 국제 행정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기간 중 영국 정경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귀국한 후에는 엘 티엠포 신문의 부국장으로 일했는데요. 1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권에 입문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던 산토스 대통령은 1991년, 당시 가비리아 대통령이 제의한 무역장관직을 수락하면서 정계에 투신합니다. 산토스 대통령은 2000년 안드레 파스트라나 행정부 때는 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이 시기, 콜롬비아 최대 무장반군조직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협상에 참여하는데요. 하지만 협상 과정에 실망해 곧 사임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로 부상”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2005년에 직접 새로운 당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콜롬비아의 가장 힘 있는 정당은 1840년대에 만들어진 자유당으로, 산토스 가문 역시 대대로 자유당에서 잔뼈가 굵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자 자유당은 이에 반대해 개헌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제명 처분했습니다.

당시 우리베 대통령을 지지했던 산토스 대통령은 자유당과 결별하고 우리베 지지자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국민사회연합당’이라는 이름의 신당을 창당했습니다.

2006년 헌법 개정을 통해 재선에 성공한 우리베 대통령은 산토스 대통령의 충성심에 보답해 가장 중요한 보직 가운데 하나인 국방장관에 발탁합니다.

“초강경 노선의 국방장관”

산토스 대통령은 국방장관 재임 시기, ‘민주주의적 안보’를 주창하는 우리베 대통령 아래서 FARC 등 반군을 상대로 초강경 노선을 취했습니다. 이는 산토스 대통령의 정치 이력 중 가장 논란 많은 시기이기도 한데요. 특히 2008년 3월, FARC 지도급 인사를 사살하기 위해 에콰도르 국경을 넘어가는 공습을 승인해 에콰도르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산토스 대통령이 장차 대통령의 꿈을 꾸는 발판이 된 시기기도 합니다.

같은 해 7월, 산토스 대통령은 6년간 FARC에 억류돼 있던 잉글리드 베탕쿠르 전 대통령 후보와 미국인 등 14명을 총격전 없이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국제사회의 명성과 함께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통령 당선 후 평화의 길로 노선 변경 “

우리베 대통령의 3선이 불가능해지자, 산토스 대통령은 2010년 국방장관에서 물러나 국민사회연합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그리고 우리베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69%의 압도적인 득표로 대권을 거머쥐는데요. 하지만 우리베 대통령의 계승자로 여겨졌던 산토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우리베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특히 2012년부터는 FARC와 평화협상을 개시하면서 강경 노선 일변도였던 전 정권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우리베 전 대통령은 산토스 대통령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등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반목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재선에 나선 산토스 대통령은 우리베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후보와 맞붙어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끝에 연임에 성공합니다.

“FARC와의 평화 협상”

2012년 8월, 산토스 대통령은 FARC와의 평화 협상을 재개했습니다. 이전 정부들도 간헐적으로 평화협상을 벌였지만 번번이 무산됐었는데요. 하지만 2012년 11월, 쿠바 정부의 주재로 아바나에서 양측간의 협상이 공식 진행됐습니다.

이 평화협상은 재임 기간 내내 FARC와 싸워온 우리베 전 대통령의 업적을 위협하는 모양새였고, 우리베 전 대통령과 우리베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FARC와의 평화 협상 반대 운동에 나섰습니다.

[녹취: 평화협정 서명식 보도]

약 4년간의 긴 협상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난 9월 말 50년 넘는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평화 협정 서명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화 협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양측은 다시 협정 내용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콜롬비아인들은 평화 협정의 내용이 반세기 넘게 콜롬비아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FARC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지적입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가운데 왼쪽)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카리브 해안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반기문(왼쪽) 유엔사무총장 등 국제사회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드리고 론도뇨(가운데 오른쪽)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최고사령관과 함께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 논란”

[녹취: 노벨 평화상 수상 발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 선정됐다는 발표 듣고 계십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평화 협정이 부결된 상황에서 산토스 대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국민 사이에서도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이은 또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다며 콜롬비아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줬다는 평가도 있는 가 하면, 산토스 대통령이 콜롬비아 국민은 신경 쓰지 않고, 개인의 명성에만 신경 썼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노벨 평화상 수상이 오히려 콜롬비아의 민심만 분열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모택동주의자]

                지난달 17일 콜롬비아 야리플레인스에서 제10차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대원들

"콜롬비아는 어떤 나라?"

콜롬비아의 정식 국명은 콜롬비아 공화국입니다. 남미 대륙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중미, 북미 대륙과는 가장 가깝습니다. 국토 면적은 약 113만 km 로 북한보다 조금 작고요. 인구는 2015년 기준, 약 4천700만 명입니다. 석탄과 니켈, 커피 등 자원이 풍부한데요. 특히 석탄 매장량은 중남미 국가 가운데 1위입니다. 1인당 국민 소득은 2015년 기준, 7천447달러고요. 국내 총생산은 2천920억 달러로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에 속하고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일찌감치 양당제를 채택하는 등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도 높은 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누구인가?"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흔히 'FARC'라고 불리는데요. 이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을 뜻하는 스페인어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FARC는 1964년,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공산당 산하의 무장 조직으로 출발했습니다. 처음 FARC를 결성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불만을 가진 지방의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FARC는 왜 무기를 들었나?”

콜롬비아는 오랫동안 극소수의 부유층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1950년대에 쿠바에서 발발한 혁명은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에 민족의식과 함께 정권 전복의 의지를 심어줬고요. 콜롬비아에도 공산사회주의 세력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중부 '마르케탈리아(Marquetalia)' 지역에 집단 농장을 만들고 토지 소유권을 비롯한 권리를 요구했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이런 사회주의적 생각은 정부와 대지주들에게는 위협으로 보였고요. 결국 정부는 '마르케텔리아 공화국'이라고도 불리던 이 집단 농장을 해산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마르케텔리아 충돌 이후 FARC는 본격적인 무장 반군 조직으로 탈바꿈했는데요. 하지만 공산 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게릴라 무장 조직으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FARC의 규모와 운영"

콜롬비아 정부 당국은 FARC에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반군이 약 6천 명에서 7천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또 FARC와 연계된 조직망을 통해 후방에서 지원하는 민간인은 약 8천500명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FARC가 한창 전성기였던 2002년 무렵에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직원이 약 2만 명 가량됐었는데요. 하지만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펼치는 콜롬비아 정부를 지원하면서 급격히 세가 줄었습니다.

현재 FARC는 약 10명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티모셴코라고도 불리는 '로드리고 론도뇨'가 이끌고 있습니다. 론도뇨는 1982년부터 FARC에 가담해 2011년부터 FARC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구소련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의학을 공부했다는 보도도 있고, 군사 정보 훈련을 받았다는 보도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FARC의 조직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FARC는 누구나 조직에 들어올 수 있고, 또 순전히 자원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여러 국제 인권단체들은 FARC가 가난한 농민과 어린이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FARC의 자체 발표에 따르면 2016년 5월 현재, 15세 미만의 어린이는 21명입니다. 대부분의 조직원은 가난한 시골 출신들로 남녀 불문하고 전 연령대에 걸쳐 있는데요. FARC를 떠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험과 공명심에 유혹돼 조직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FARC의 주공격 대상은 콜롬비아 보안군입니다. FARC는 경찰서와 군 초소는 물론이고, 송유관이나 전력망, 교량, 학교 등 사회시설에도 폭격을 가합니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어린이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입니다. FARC는 또 인질극도 자행해왔는데요. 특히 지난 2002년에는 유세 중이던 대통령 후보를 납치해 전 세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재정조달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전문가들은 FARC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반군 조직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콜롬비아는 주요 마약 생산국 가운데 하나로, 반군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불법 마약 거래를 통해 얻거나, 마약 거래상을 돕는 대가로 거둬들이는 이른바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또 점령지역의 지주와 기업들부터 ‘혁명세’라는 명목으로 돈도 거둬들입니다. 이들은 또 재원을 채우기 위해 갈취나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인질극도 자행해왔습니다.

"평화 협상 진행 과정"

콜롬비아는 52년간의 내전으로 약 22만 명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 실종됐으며, 800만 명이 집을 잃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4년 콜롬비아 정부와 FARC 간에 첫 평화 협상이 진행된 이래 그간 간헐적인 노력이 있어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요. 그러다 2012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이 주도해 협상이 재개된 이래, 약 4년간 협상이 오갔습니다.

FARC 지도부는 특히 최근 평화 협상에 적극적인 모습인데요. 그 배경에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콜롬비아 정부를 미국이 적극 지원하고,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또 FARC가 합법적인 정치 조직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급기야 지난 9월 26일 역사적인 평화 협정 서명식을 거행하면서 세계 최장기 내전 가운데 하나였던 콜롬비아 내전은 종료되는 듯했는데요. 하지만 콜롬비아 국민들은 협정안을 부결시켰습니다.

 

로드리고 론도뇨(가운데 오른쪽)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최고사령관과 후안 마누엘 산토스(가운데 왼쪽)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카리브 해안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반기문(왼쪽) 유엔사무총장 등 국제사회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녹취: 평화협정안 반대 여성] “Right now there’s a lot of unemployment, and they are…”

이 콜롬비아 여성은 지금도 곳곳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실업률이 높은데, 나라를 곤경에 빠뜨렸던 FARC 반군들에게 많은 특혜를 주려 한다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협상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반군들은 일상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재활 기간을 거치고, 내전 기간 자행한 행위에 대한 면책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데요. 협정 반대자들은 수십 년 간 반군에게 납치와 살해 등의 고통을 받아온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이 평화 협정안은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주장입니다.

[녹취: 평화협정안 지지 남성] “Colombia needs an opportunity to have peace so that it can…”

하지만 지지자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콜롬비아가 평화를 되찾아 발전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현재 콜롬비아 정부와 FARC 지도부는 다시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요. 과연 재협상을 통해 이번에는 콜롬비아 국민들의 마음을 잡을 합의안을 도출해 낼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