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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2차대전때 미국축의 연합군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2차대전때 미국축의 연합군

CIA bear 허관(許灌) 2016. 8. 14. 18:07

 

                                                                            1945년 8월 15일 이후 동북아시아(극동아시아) 지도[사진]

아시아 태평양지역 2차대전은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과 조선국(대일본제국 조선총독부) 등 일본축(군국주의 공화국 국왕제,軍政)과 중국과 러시아,영국(캐나다, 인도) 등 미국축(민주공화국,民政)의 대결이었다

 

1. 대일본 제2전선 구축[중국과 만주국 전쟁]

미국과 영국등 연합군은 일본군이 제1전선으로 태평양(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 오세아니아)과 미국본토[영국 식민지 국가나 아메리카 대륙]를 공격하는 입장에서 제2전선구축이 필요했다

본래부터 미국정부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중국 장개석정부를 도와주었다

소련축 모택동(소련군 전위대 홍군, 공산주의)과 장개석(국군, 자본주의) 분열로 중국내전이 일어났고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모택동과 장개석 연합이 이루어졌다

(1)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2)팔로군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동아시아 국가 중국

제2차 대전 이후 중국은 미국과 소련 도움으로 내몽골와 동북3성(만주족과 몽골족,조선족등), 티벳(티베트족), 신강(회족)등 지배하는 동아시아 국가(동아시아 지배자)가 되었다

 

2. 대일본 제2전선 구축[소련과 만주국,조선총독부 전쟁] 

일본 관동군을 맞이해 소련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만주전에서 일본 지상군을 무릎 끓리며 소련군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 의지를 꺽은 채 한국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일본군 주력군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을 점령해야 사실상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다

일본국 제2차대전 전쟁 추진세력은 일본 민정세력(국왕, 의회와 내각)보다는 군정세력(공화국 국왕제 이론, 군사평의회)으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1)소련군은 연합국 미군원조로 여름 8월(북극해의 여름 )에 일본열도와 사할린, 만주국,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했다

미군의 청탁으로 소련군 참여는 소련이 극동아시 지역 국가(아시아 태평양국가)로 등장했다

그 이후 소련은 동남아와 태평양 그리고 중국 원조국으로 등장했다

 

                                                                                          아시아 태평양국가 러시아(소련)

 

(2)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청진상륙작전 실시

1945년 8월 13일 이반 유마셰프 사령관 지휘 아래 태평양 함대 소일 전쟁 가운데 '청진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한반도 북부 연안 정친시에 소재한 일본 해군 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 기지를 진면 일본 제국 육군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인 관동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둔지에는 중위인 소키티 니시바키와 케이사쿠 무라카미가 지휘하는 해군 기지 3개 부대 등 일본 군 4천명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소련 태평양 함대 해병대는 바실리 투루신 13 여단장 바실리 투루신 소좌 지휘 아래 작전을 실시했다. 배로부터의 상륙은 스투제니치니코프 군 중좌가 지도했다.  

상륙 및 화륙 지원에는 12척의 상륙함 7척의 원양 구축함, 기뢰 부설함, 8척의 순찰함, 6척의 잠수함 보트와 18척의 어뢰 보트가 작전에 참여했다. 상공에서는 태평양함대 해군의 250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지원했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선봉 부대의 상륙과 어뢰 보트는 적들에게 뜻밖이었다.  상륙 작전 첫 째날 항구에서는 상륙 작전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도시 구역으로 바짝 다가섰다. 8월 14일과 15일 청진 항구에는 2개 대대 6천 여 명 이상의 주요 육전 부대원들이 상륙했다.

 

이반 치스치코프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1 극동전선 25여 군부대가 도시로 다가갔다. 이들은 이 시각 청진 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 육전대를 지원했으며 해군 기지를 장악했다. 그리고 작전은 끝났다. 관동군은 붉은 군대에 맞서 방어 조직 구성을 위해 병력을 철수하며 일본섬을 차단했다. 

청진를 점령하는 가운데 500여 일본국이 사망했으며 2,500명이 포로가 됐다. 소련 해병대의 경우 300명이 사망했다   

 

(3)일본은 100년 동안 홋카이도 북방의 4개 섬(쿠릴열도 4개 섬)에 대한 영토 주장을 하고 있다.

북방 4개 섬은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1) 1855월 11월 7일 러-일 통상 및 영토조약: 에토로후 섬까지 쿠릴 열도의 남쪽을 양보하고  그 북쪽에 위치한 북 쿠릴 열도는 러시아 영토로 합의(위 지도 빨간 줄).   그리고 사할린( 위지도의 노란색 지역)에서는 러시아인이 사는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쪽 지역은 일본영토로 합의. (미분할로 남겨둠)

2) 1875년 5월 7일 러-일 국경 조약: 사할린을 러시아가 갖는 대신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 측에 양도하기로 합의.

3)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을 체결하면서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분할하여 점령함.

 또한 패전국인 러시아의 동의 없이 북쪽 사할린도 일본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지명도 일본어로 개칭.

4) 러시아의 강력한 항의로 1925년 1월 20일 조약을 체결 북 사할린에 주둔하던 일본군 철수.

5) 일본이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국의 장개석 총통, 영국의 처칠 수상이 카이로 회담을 개최하여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조선과 만주 태평양상의 모든 영토를 박탈하기로 선언.

카이로 회담 이후 루즈벨트와 처칠은 소련 스탈린은 얄타에서1904~1905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전체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회수 받음.  이때 일본 영토였던 북방 4개 섬이 소련령이 되었다.

6) 1945년 8월18일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일본 영토 홋카이도 절반을 소련군이 점령할 수 있도록 동의해달라고 제안.

트루먼은 홋카이도 점령은 이미 맥아더에게 위임하여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내고 대신 미국이 전략적으로 필요한 쿠릴 열도 중 한 섬에 미군 비행장과 군항시설 건설을 요청.

스탈린은 트루먼의 요청 거절.

이때부터 꾸릴 열도를 두고 미-러 양국의 전략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되었다.  일본의 영토였던 남 사할린과 북방 4개 섬을 1946년 소련 영토에 편입 시켰다.

현재는 북방 4개 섬은 러시아의 사할린 주에 소속 되어 있다.

7) 1955년 러-일 전쟁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는 런던에서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과 단절되었던 통상 및 수교.

8)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러-일 공동선언에 합의 이때 러시아는 북방 4개 섬 중 일본에서 가까운 2개 섬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일본에 양도 약속.

9) 1960년 미국과 일본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에 육. 해. 공군을 주둔시킬 수 있고 외국과 군사충돌이 있을 경우 일본이 지원하고 자위대의 방위력 강화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오키나와 등의 일본 영토에 반영구적인 군사기지로 건설,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과 일본의 상호방위조약이 소련을 겨냥한 반공군사동맹으로 인식하고 반환 예정인 2개 섬도 군사기지로 사용 될 것을 우려 양도를 거부했다.

반면에 미-일 상호 방위조약체결 이후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은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선진국으로 도약한 일본은 이때부터 소련을 향해 강력하게 영토반환문제를 제기했다. 게다가 일본은 소련이 요구하는 평화조약과 경제협력 체결을 거부하면서  1956년 흐루시초프가 약속했던 북방 2개 섬을 즉시 양도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은 요구했던 평화조약체결 및 경제 협력을 철회하고 반환도 거부했다.

10) 1991년 코르바초프 일본 방문했다. 기회를 엿본 일본은 북방영토문제를 거론했으나 고르바초프는 북방 섬에 대한 논의 회피하고 경제적 이득만 챙기고 돌아갔다.  고르바초프가 일본을 방문할 때 소련 학계와 국회 그리고 극동 러시아 어민들의 항의  즉,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 때 약 4만 명의 전사자와 약탈해간 재산과 자원의 보상을 어디에서 받느냐는 여론을 염두에 둔 조치.

11) 경제 강국으로 변모한 일본은 자금 원조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무제한 투자 조건을 내걸고 옐친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켰다.

1993년10월13일 일본을 방문 한 옐친은 많은 이득을 보고 일본수상과 동경선언을 발표까지 공포하였으나 북방 4개 섬 반환에 대한 안건에는 침묵했다. 엄청난 자금과 정성을 쏟았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에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수억 달러의 자금만 날리고 체면도 구겨지는 노리개감이 된 셈이다.

12) 2005년부터 일본에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 일본의 광범한 경제적 투자와 권한을 인정해 주면 러시아의 행정주권을 인정해 주겠다. “

이것은 일본이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물러섰다는 말이다. 이런 전조는 1963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과 러시아가 체결한 어업조약에서도 볼수 있다.

이 어업조약은 문서화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북방 4개 섬을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실제적인 국경선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북방 4개 섬에 경제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주권은 러시아에 주겠다는 말이다

일본은 북방 4개 섬에 러시아 주권을 인정하면서 무엇때문에 자국도 아닌 곳에 복지시설을 건설하고 전기를 공급하고 주민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북방 4개 섬과 남 사할린은 한 때 일본의 영토였다.

소련과의 평화조약에서 얻은 합법적인 영토였다.

그런데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략하여 일본이 연합군의 자격으로 참전한 러시아에 이 영토를 빼앗겼고 러시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일본은 이렇게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60여 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렸다.

엄청난 외교적 노력과 천문학적인 자금을 러시아에 쏟아 부었다. 1998년 러시아 IMF 때 국제통화기금에서 제공한 자금보다 더 많은 달러를 퍼부었다.

러시아에서 제안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까지 추진했고 그 사업으로 손해본 액수가 수억 달러에 달한다.

러시아 극동 주민을 위한 의료. 식품. 주거 등 복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금 북방 4개 섬에는 일본이 무상으로 지어준 안락한 시설에서 러시아 인들이 편히 살고 있다.

또 사할린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모두를 높은 값에 수입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러시아는 2개 섬을 반환한다. 에토로우 섬을 분할하여 반환한다는 등

변죽 울리는 안건만 제시할 뿐 이득만 챙기고 나면 원론적인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러시아의 반환 발표에 들떴던 일본은 변덕스런 러시아에 모욕적인 수모를 당했으나 어쩔수 없었다.

러시아의 문 앞 개처럼 언제쯤 던져질 북방 4개 섬에 침 흘리는 형상이 지금 일본의 처지다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지도[사진]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러시아 연방 캄차카 반도의 남단에서 시작하여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동부에 이르기까지 1,200㎞에 걸쳐 뻗어 있으면서 오호츠크 해와 태평양을 가른다. 이 열도를 이루는 섬의 수는 56개이며, 그 총면적은 1만 5,600㎢이다. 이 열도는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불안정한 지질대의 일부이다.

100개 이상의 화산 중 35개는 활화산이며, 온천 역시 많다. 이 열도에서는 지진과 큰 해일이 일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흔하다. 특히 1737년에 발생한 해일의 높이는 64m에 이르렀는데 이는 기록상 세계 최고높이이다. 이 열도와 나란히 뻗어 있는 태평양 기저의 쿠릴 해구는 깊이가 1만 542m이다.

기후는 혹독한 편으로 겨울은 길고 추우며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습윤하면서 서늘하다. 연평균강수량은 760~1,000㎜이며, 9월말부터 6월초까지 내리는 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북쪽 섬들의 툰드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며, 남쪽의 보다 큰 섬들에는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다.

게잡이를 비롯한 어업이 유일하게 중요한 산업이다. 주요중심지는 가장 큰 섬인 이투루프 섬에 있는 쿠릴스크 시와 파라무시르 섬의 세베로쿠릴스크 시이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로 그들은 17~18세기에 열도를 탐험한 후 정착했다. 그러나 1855년 일본인들이 남쪽의 섬들을 점령했고, 1875년에 열도 전체를 손에 넣었고 이름을 지시마[千島] 열도라 고쳤다. 1945년 얄타 협정에 따라 쿠릴 열도는 소련에 양도되었으며,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고 대신 소련인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열도의 남단부에 있는 4개의 섬들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쿠릴 열도에 대한 소련과 일본의 분쟁으로 1956년 양국은 관계를 정상화했으나 평화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다.

 

 

미국, 하와이 일본계 주민 수용소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Honouliuli National Monument in Hawaii permanently protects a site where Japanese American citizens, resident immigrants, and prisoners of war were held captive during World War II. Located on the island of Oahu, the monument will help tell the difficult story of the internment camp’s impact on the Japanese American community and the fragility of civil rights during times of conflict. Photo by R.H. Lodge, courtesy Hawaii’s Plantation Village.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계 주민이 강제수용된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와이 주의 최대 수용소 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수용소는 진주만에 가까운 하와이 주 최대 규모로, 일본계 주민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시민 외에 약 4천 명의 전쟁포로가 수용돼 있었습니다.

백악관은 사적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일본계 주민사회에 미친 충격과 전시 중 공민권의 취약성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후인 1942년 2월 19일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계 주민을 강제수용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해 약 12만 명이 수용소에서 고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사적은 미국 역사의 아픈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제2차세계대전에서 싸운 일본계부대에 최고훈장 수여하기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군을 지원해 유럽의 격전지 등에서 싸운 일본계 미국인 부대에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중 미국에서는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적성외국인'으로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졌고, 일부 일본계 미국인은 군에 지원해 독일과 이탈리아 등의 격전지에서 싸우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법안은, 일본계 미국인 부대가 국내에서는 인종차별과 싸우고 국외에서는 파시즘과 싸워 용맹함을 보여주고 국가에 헌신했다며,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5일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서명에 입회한 육군 출신 테리 시마 씨는,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공적을 기리는 일이라며,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사회에 있어서도 기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미 의회, 일본계 노병들에 금메달 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국인 노병들에게 미 의회 금메달이 수여됩니다. 온갖 차별 속에서도 미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공로를 인정받은 건데요.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제 (5일) 관련 법안에 서명하며 이들의 무훈을 상기시켰습니다. 어떤 의의가 있는 건지 알아보겠습니다

문) 미국 정부가 다시 한번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리는 법안을 마련했군요. 이번에는 일본계를 따로 분류해서 메달을 수여하고 있네요.

답) 예. 미 의회 금메달이라고 하면 민간인 최고의 영예에 해당되는데요. 미군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6천 여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번에 그 영예를 안게 됐습니다. 어제 (5일)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공식화 됐구요.

문) 이렇게 일본계만 따로 떼어내서 상을 줘도 되나요? 차별 논란은 없을까요?

답) 차별 말씀을 하셨는데, 거의 70년 전에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미 받은 차별에 대한 보상 차원이라는 점에서 미국 내에서 충분히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적국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당시 미국에 이민 와서 살던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적국 안에 갇힌 셈이 돼 버렸습니다.

 

문) 실제로도 격리 수용됐잖아요.

답) 그랬었죠. 미국이 스스로 부끄러운 역사로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에 서명하는데요.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현 거주지에서 지정된 수용소로 이송해 그 곳에 구금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문) 그러니까 일본계 미국인들로서는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완전히 이방인 취급 당하는 일이 벌어진 거군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라고는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엄연한 미국 시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1942년 3월에서 5월까지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요. 가족이 각각 다른 수용소로 이송돼 생이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 미군에서 복무 중인 일본계 미국인이 5천 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에 이들은 모두 현역에서 제대 조치 당했습니다.

문)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된 거죠. 일본계 미국인 입장에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으로도 이해가 되네요.

답) 물론 그런 동기도 작용을 했을 겁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 이런 의사를 끊임없이 표현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나 봅니다. 미군에서 받아 주질 않았던 거죠. 군 복무 부적합, 또는 적성국가의 외부인으로 분류되기 일쑤였다고 하네요. 엄연한 미국 시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문)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계 부대가 따로 편성이 된 거죠? 이번에 의회 금메달을 받게 된 초석이기도 하구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가 주축이 된 미 육군 442연대 100대대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끝장을 본다’는 구호를 내걸고 2차 대전에 참전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요. 가족이 미 당국에 의해 격리 수용돼 있는 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미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 이 부분을 높이 사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월이 흐를수록 높아졌고 또 받아들여진 겁니다.

문) 미국 정부로서도 특정 민족을 격리 수용했던 역사의 어두운 구석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답) 맞습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지난 1988년 일본인 강제수용에 대해 사과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는 과거의 실책을 거듭 사과한다는 점을 이번에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니엘 아카카 미 상원의원은 442연대 일본계 미군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미국을 보다 관대하고 공정한 나라로 변모시키는데도 기여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 미국 정부의 양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론 일본계가 너무 피해자로만 묘사되고 있는 건 아닌가, 사실 그런 논란도 있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미국 바깥에선 반대로 일본이 타민족을 억압했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하니까요. 특히 한국에선 미국은 70년 전 일도 일본에 사과하는데 일본은 왜 일제 침략에 대해 사과할 줄 모르냐, 거꾸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무 피해자인척 하지 마라, 이런 시각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문) 미 의회에서도 그런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의원이 있잖아요. 의외로 일본계 더군요.

답) 맞습니다. 마이크 혼다 의원,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됐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미국이 사과한 것처럼 일본도 사과하라, 이런 주장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미국의 소리]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After the capitalist democracy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t(social rights, Right to life) coexist (respect) is a free society. -Freedom Society[Democratization government]-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Three principles of capitalism:Private property, pursuit of profit, Principle of free market competition Etc.[資本主義 三代原則: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Three principles of Democracy: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Etc[民主主義 三代原則:為民有、民治、民享 等等]

-Guide Ear[Intelligence, Bird's Eye&Guide 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