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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CIA Bear 허관(許灌) 2016. 2. 9. 13:13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비밀리에 압록강 넘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과 한국군 6사단  최초 교전이 되었다

 

                               1950년 11월 1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은 미군 제1기갑사단 공격 할 수 있는 39 116 사단 열등 장비를 동원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많은 한국, 미국, 영국등 16개국 유엔군이 희생 되었다

 

                                   두번째 전투를 하기 위하여 청천강을 넘어가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제40군 일부 군인들 모습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에게 유엔군 미군 25사단이 최초로 포로가 돼 흑인부대 모습

 

                                            두번째 전투에서 영하 30도 섭씨 추위를 전투를 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0년 12월 31일는 제 3 전투가 시작되었다. 38도선 남하 철조망 "군사 분계선"의 파괴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38도선 남하 철조망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한 땅을 공격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박격포(공용) 부대

  January 3, 1951, CPV 50th Army 149 division annihilated the British 29th Brigade of the Royal Rifle Regiment and 1st Battalion The Royal heavy tank battalion in the south of Gaoyang area. This is captured British soldiers.[영국군 포로 모습]

 

                                       1951년 1월 4일 저녁,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가는 모습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서 제 3전투가 시작되었다  돌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네 번째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횡성을 공격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1년 4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후퇴와 많은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군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임진강을 방어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남침은 중국 동북3성 소련측 북중연합군(조선인) 주축으로 추진했고 소련은 기권,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중공(중국 인민해방군)은 북한 인민군을 사실상 장악해왔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소련군은 미국정부(연합군) 청탁과 전쟁 군함, 무기등 원조로 대일참전을 하게 되었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식과 일본 군국주의를 파멸하고 한반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소련군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설이 해마다 한국 언론에 돌고 있다.

소련이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척한 상황'을 마치 이용해 손쉽게 극동 지역 파이 조각을 취하려 한다는 이 분명치 않은 역사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북한정부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드 배치를 일본과 러시아정부는 지지하는 입장이다

중공은 아직도 사회정부이며 북한 군사적 지원국이다

중국은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으로 북한 전체 부채140억달러 절반 수준 69억8000만달러이다

 단둥역(丹東驛) 1954 4 1일부터 북중철도 수송사업을 시작, 매주 4 개의 열차가 베이징(북경) - 단둥(단동) - 평양을 오고 가고(왕복 운행하고) 있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북중철도 승객 수는 현재까지 100만 명을 넘어 섰다.

북한  현역군인 120만명 중 여군이 북중 국경선에 배치 돼 있다 북한 남녀징병제 국가로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하고 있으며 현역 여군은 17만명이다

대부분 현역군인이 남북국경선에 배치돼 있다

 

*유엔군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