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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한미 사드배치 협의 지지…일본 도입도 검토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日정부, 한미 사드배치 협의 지지…일본 도입도 검토

CIA bear 허관(許灌) 2016. 2. 8. 22:20

북한정부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드 배치를 일본과 러시아정부는 지지하는 입장이다

 

한국과 미국 양국이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협상에 착수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8일 기자회견에서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를 위한 협의를 개시한 데 대해 "지지한다"며 "한미 협력 진전은 동북아 지역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가 장관은 또 사드의 일본 배치에 대해 "현 단계에서 자위대에 사드를 도입할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면서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의 선진적 대처와 장비를 연구하며 (사드 도입) 검토를 가속화하겠다"고 말했다.

스가 장관은 또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검토를 시사한 데 대해 "매우 중요하다"며 환영 의사를 표했다. 

북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 1차 추진체가 떨어진 곳은 백령도 인근, 2차 추진체가 떨어진 곳은 필리핀 동부 해역이다  일부 추진체 잔해가 제주도 근해 서남방에 떨어졌다[ 두 번째 단계와 발전기 커버는 제주도 섬지역 상공에서 분리됐다]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남침은 중국 동북3성 소련측 북중연합군(조선인) 주축으로 추진했고 소련은 기권,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중공(중국 인민해방군)은 북한 인민군을 사실상 장악해왔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소련군 미국의 청탁으로 일본군과 전투, '한반도 해방'에 큰 공헌"

 

 

 

 

 

 

 

 

 

 

 

 

 

 

 

 

 

 

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에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상륙 작전 실시(사진)

소련군은 미국정부(연합군) 청탁과 전쟁 군함, 무기등 원조로 대일참전을 하게 되었다

8월 15일 한국, 북한에서 각각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해방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이 날은 과거 소련 붉은군대에 있어서도 의미 깊은 날이다. 1945년 8월 독일과의 전쟁으로 수백 만의 아들, 딸들을 잃고 초토화된 구소련은 연합군의 청탁으로 새로운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 마지막 잔영을 초토화하고 극동 지역국들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유를 안겨줄 새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 관동군을 맞이해 소련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만주전에서 일본 지상군을 무릎 끓리며 소련군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 의지를 꺽은 채 한국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과 냉전은 일련의 스테레오칩을 만들며 심지어 역사적 진실마저 왜곡시켰다. 한반도 해방에 소련군이 세운 공헌 대해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 한국센터장이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식과 일본 군국주의를 파멸하고 한반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소련군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설이 해마다 한국 언론에 돌고 있다.

소련이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척한 상황'을 마치 이용해 손쉽게 극동 지역 파이 조각을 취하려 한다는 이 분명치 않은 역사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국제 정상들의 서신왕래 내용안에도 엿볼 수 있다. 이외 다른 설들은 거짓이다. 그 어떤 역사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70주년 승전과 관련해 또 다른 역사 해석이 있다. 한반도 해방과 분단을 묶으려는 시도로 역사적 사실과 그 관련 증거 문서들은 이 해석이 거짓된 논제임을 말해 준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전문가와의 2차 인터뷰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