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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수 공작원의 활동 공백기 생활 본문
신광수(辛光洙)는 북한 공작원이다. 신광수씨는 지촌보지(地村保志地村,지무라 야스시 60)와 그의 아내 부귀혜(富貴恵,후키에 60)씨,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 한 혐의가 있다며 일본 수사 당국이 국제 수배중인 용의자이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일본 각지를 전전 공작활동을 진행하고 있던 신광수 용의자는 군마현에 잠복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납치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 "특정 실종자문제조사회 (特定失踪者問題調査会)'가 7 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군마가 북한의 공작 활동 "중계"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떠오른다
신광수 용의자 일본 태생과 한국전쟁에 참여
신광수 씨는 1985 년 2월 한국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된 후 서울 지방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판결문에 따르면, 1929년 시즈오카 현(静岡県)에서 태어난 신광수 용의자는 전후 한반도에 건너와 한국 전쟁에 참가. 71 년 북한 공작원으로 선발된다.
1973년 7월 신광수 용의자는 이시카와 현(石川県)에서 밀입국. 공작원으로 고향인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그 다음은 일본 각지에서 협력자를 획득하고 공작활동을 진행한다. 그리고 북한 본국에서 납치 지령을 받고 80년 6월에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를 북한으로 납북시켰다.
신광수 씨가 군마현(群馬県)에 잠복 한 것은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 사건에서 2년 후인 82년 11월. 처음에는 다카사키(高崎) 시내에 있는 파칭코 점의 직원으로 위장 취업. 매장 2층에 있는 직원 숙소로 거처를 정했다.
83년 5월에 북한으로 돌아 군마(群馬)에서 떨어진 그해 11월 다시 일본에 동일한 파칭코 점에 다시 취직을 하고, 이듬해에는 마에바(前橋)시에 있는 파칭코 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있던 시대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잠복 처를 군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군마(群馬)의 움직임은 불명(不明)
조사위원회는 7월 24일 신광수 씨가 잠복하고 있던 타카 사키(高崎)시와 마에바시(前橋)시의 파칭코 점을 찾았다. 현재 마에바시시의 파칭코 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타카 사키시의 파칭코 점은 슈퍼마켓이 있었다.
신광수 용의자는 군마현(群馬県)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한국에서의 판결문에서는 다른 많은 지역에있는 동안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사카에 체류하던 시절에는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를 향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쿄에 있던 때 재일 조선인 협력자의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한국의 군사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 쓰여져 있다.
하지만 군마현(群馬県)에 잠복하고 있던 시대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잠복 처를 군마현(群馬県)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태평양측(太平洋側)과 니가타(新潟)를 잇는 '오마치(大町) 루트'의 존재
조사위원회 아라키 가즈히로(荒木和博) 대표는 "마에바와 고기의 파칭코 점에 신광수가 있었다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리가 없다.이 근처에 뭔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지적 군마현 지역 적인 특징에 주목한다.
군마현(群馬県)은 니가타 현(新潟県)에 접하고 있다. 니가타 현(新潟県)에서 요코타 메구미(横田 50, 납치 당시 13세)씨 외 5명의 정부 공인 납치 피해자가 북한에 끌려 있으며, 한때 북한과 일본을 연결하던 화객선(貨客船) '만경봉 호 '의 기항지가 있었다.
또한 특정 실종자를 놓고 니이가타(新潟県)와 태평양에 접한 '오마치(大町) 루트 '라고 불리는 경로의 존재가 지적되고 있다. 1976년 2월에 사이타마 현 가와구치시의 자택을 나온 채로 실종 후지타 스스무(藤田進 59, 실종 당시 19세) 씨 정보 , 2004년 조사위원회에 제보가 있었다.
정보를 제공 한 남성은 "후지타 씨의 감금 시설이었다 치바현에서 차로 (니가타 현) 이토까지 날랐다"고 말했다 한다. 치바현에서 도쿄도, 사이타마 현, 야마나시 현, 나가노 현을 거쳐 니가타 현에 빠지는 '오마치(大町) 루트 "에서 특정 실종자의 행방 불명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군마현이 '오마치(大町) 루트 '과는 다른, 태평양 측과 동해를 연결하는 루트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아라키 대표는 "오마치 (大町) 루트와 다른 니가타에 빠지는 루트로 군마현에 납치이나 공작 활동의 거점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신광수 씨는 현재 86 세. 한국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사면으로 풀려 2000 년에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2008년 9월 북한 건국 60 주년 기념 열병식을 알리는 북한 중앙 방송 뉴스 영상에 비쳐있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 다음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씨 출소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辛光洙.70)씨가 14년 10개월간의 긴 감옥생활을 마감하고1999년 12월 31일 오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이날 다른 일반 사범 58명과 함께 출소한 신씨는 지난 특사때 먼저 풀려난 다른 장기수들과 광주.전남 양심수 후원회 및 각 재야단체 회원, 학생등 50여명의 환영을 받으며 상기된 표정으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
신씨는 출소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염려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남은 여생을 남한에서 지내면서 북송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라고 짧게 말했다.
또 지난 8.15특사때 풀려나 이날 환영나온 이공순(66)씨는 "더이상 이땅에 장기수가 없게 됐다는게 무척 반가운일이며 이번 출소가 남북통일의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간단한 환영식을 마친 신씨는 광주 5.18묘역을 들러 참배한후 서울로 떠났다.
신씨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생활할 계획이다.
한편 신씨는 일본에서 출생, 지난 48년 귀국한뒤 50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의용군으로 입대한뒤 월북했다.
이후 북한 과학원 기계공업분야 연구원으로 재직, 정보요원으로 특채됐고 일본에서 활동하다 85년 서울로 잠입했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지난 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신씨의 아내와 딸, 손자, 손녀들은 현재 평양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北에 일본인 공작원 다수 존재"
과거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인 노동당 '통일전선부'에 일본인이 다수 근무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산케이신문이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과거 북한에 납치됐다가 귀국한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57)와 후키에(富貴惠.57) 부부의 증언을 통해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고 전했다.
신문에 의하면 후키에씨는 경찰 조사에서 1997년∼1998년쯤 공작원 전용병원인 평양 근교의 '915병원'에 입원했을 때 여성 환자로부터 "통일전선부에 일본인 공작원이 많이 있으며, 무역관계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지무라 부부는 자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북한 아주머니로부터도 "통일전선부에 일본인 부부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외국도 왕래한다고 들었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1970년 일본 민항기인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범인들은 북한에 건너온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무역회사를 운영했으며, 1980년대 후반까지 일본에 잠입하거나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을 드나들며 활동했다.
1988년 5월 요도호 납치범과 처가 일본에서 체포된 이후 일본인 공작원의 해외 활동이 급감했다.
일본 경찰은 요도호 납치범과 별도로 일본인이 공작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요도호 납치범들이 자신들과 사상이 같은 일본인을 모집해 북한으로 끌어들인 사례도 있는 만큼 이들 일본인이 통일전선부에 배치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요도호 납치범 외에 일본인 납북자가 공작원으로 이용된 사례가 직접 확인된 적은 없었다.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반미여성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
좌파 민족주의 책자 탐독과 모임결성->NLPDR과 김일성 책자 학습(주사파 모임)-->북한정부 대남공작부 의식화 기능기(뇌 세뇌기)로 검증과 간첩교육-->납치,월북-->반미무장단체 결성과 북한정부 대남 간첩활동.
북한정부 대남공작부는 뇌 세뇌기(의식화 기능기)로 남한 사람 납치대상을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로 규정해오고 있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가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를 뇌 세뇌기로 검증을 할때 북한 김정은 정부를 찬양하고 김일성을 신격화, 우상화 할 수준이 돼야 납치, 월북 대상자로 선발한다[남한정부 내부 김일성주의 단체-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반미단체)]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설치(반미청년회 등 반미단체 통합)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김일성주의)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새세대(김정일주의=주체사상)로 지하신문 변경
1986년에는 강철서신 등에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영환등 강철서신(반제동맹)-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
-1991년 12월 김정일 노동당 군사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김정일 북한 권력 장악)
1984년 5월 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다
-김정일 우상화 벽보 사진이 북한 곳곳에 등장
-1992년 11월 미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정부 등장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핵무기 보유설, 북폭등장 그리고 남한 한민전 서울대표부 1995년 해방 50주년 남북통일 결정적 시기 공식화 (반미자주정부와 전쟁론)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분열[김대중-찬성파, 반미단체-반대파]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사망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반미 전쟁파 민혁당 와해와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선실 사망)
1998년 9월 5일 북한 제3공화국수립-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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