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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볼 수 있는 섬 "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섬)" 본문

Guide Ear&Bird's Eye/일본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볼 수 있는 섬 "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섬)"

CIA Bear 허관(許灌) 2015. 4. 6. 21:11

 

 

 

아침에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볼 수 있는 섬 "일본 자유항구 對馬島(쓰시마 섬)"

한반도와 일본 규슈(九州)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
대마도는 동경 129도, 북위 34도 규슈본상(구주본상)에서는 132km, 부산에서는 불과 45km의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위치상으로는 한국 땅이면서도 언어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규수(九州) 최북단의 국경의 섬이다
부산에서 선박으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근대이전에는 한반도의 민족 거주지..

 

                                                                              한반도를 바라 볼 수 있는 한국 전망대

                                                                                        조선통신사비

 

                                                                                                        덕혜옹주 기념비

 대마도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해왔다 심지어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을때도 이곳을 통하여 학술과 문화가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 중에도 아메노모리호쑤는 쓰시마(대마도)에서 활약한 유학자로서 한일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불리우는 당시의 한국어 입문서를 만들었으며 <서로 싸우지 말고 속이지 말며 진실을 갖고 교류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학술과 문화 뿐만 아니라 불교도 전래 되었으며 유명한 미키와치, 하사미 도자기도 이곳을 통하여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1993년에는 <나가사키현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어 더욱 깊은 우호관계에 있다

-오랜 기간 대마도를 지배했던 소씨(宗氏)일가는 에도시대 이전까지는 도주(島主)였고, 이후에는 번주(藩主)가 되어 대마도의 모든 것을 통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양국의 강화교섭에 노력을 기울였고, 에도시대에 접어 들어 재개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당시 일본을 통일한 세력인 막부와 조선 모두에게 공을 인정받았던 지방의 토착세력이다.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적 기록 및 자료와 일본 측의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일본측의 기록을 보면, 13세기 말에 편찬된 <진대>(塵袋)에는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723년 대마도 사람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이다. (옛날에는) 신라사람들이 살았다. 개화천황(開化天皇) 대에 (신라 사람들이) 이 섬으로부터 (일본 본주로) 침략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이 도요우라궁(豊浦宮)에서 대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에는 대마도가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9세기 말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신라-일본, 고려-일본의 관계에서 국가간 왕래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없고, 민간 교류만 유지될 정도였다. 13세기 후반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로 인해 고려와의 민간교역 통로를 상실한 대마도민은 왜구로 변하여 노략질을 일삼게 되었다.
 
 김종서가 저술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책임자들에게 내린 관직명)이라는 관직을 내리고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 고려 말 공민왕 대에는 대마도주에게 만호(萬戶)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과 왜구문제에 대하여 외교적 교섭 및 회유책과 군사적 대응을 병행하였으며,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 원년(1418년)에는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대마도 정벌 후 도주에게 보낸 교유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는 본시 경상도 계림(신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우리)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다...”

대마도 정벌이 있은 다음 해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屬州)가 될 것을 요청하였고,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에게 인신(印信)을 하사한 적도 있다.
 
 성종 17년(1486년)에 왕명으로 편찬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가 우리의 고토였다고 기록하면서 동래부의 부속 도서로 취급하고 있으며, 대마도에 대한 이런 인식은 이후 지리지 및 외교 자료집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부분의 지도에는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그러한 대표적인 보기 중 하나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서도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세기 후반 대마도는 일본의 명치정부에 의해 일본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편입 당시인 1868년 대마번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에는 오히려 대마도가 조선의 번속국이었음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백년간 굴욕을 받아 왔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조선말의 혼란과 붕괴에 이어 일본제국주의의 강제 점령시대가 이어졌고,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일본의 대마도 점유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여 일본의 요시다 내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이 조약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는다는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미국측에 공식 요구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지속적인 영토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