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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KAL기 납북자 가족, 통일부에 방북 신청 본문

Guide Ear&Bird's Eye/납북자와 월북자 자료

69년 KAL기 납북자 가족, 통일부에 방북 신청

CIA bear 허관(許灌) 2014. 2. 17. 16:46

 

황인철 '1969년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대표가 14일 한국 정부서울청사 후문에서 북한 적십자사를 찾아 부친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통일부에 방북신청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시 KAL기에 탑승했던 승무원과 승객 50명 중 39명은 피랍 이듬해인 1970년 2월 14일 귀환했지만 11명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했다.

 

‘1969년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의 황인철 대표는 오늘(14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적십자사를 찾아 부친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한국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황 대표는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 김포행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북한에 납치된 황원 씨의 아들입니다. 당시 KAL기에 탑승했던 승무원과 승객 50명 가운데 39 명은 이듬해 귀환했지만 황 씨 등 나머지 11 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황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실망스럽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의 초청장 없이는 황 대표의 방북 신청이 정부 허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환용 입니다.

 

*[인터뷰: 황인철 KAL 피랍가족 대표] “피랍자 송환, 국제사회에 적극제기"

 

                                                                                       1969년 KAL 피랍자 황원 강릉 MBC  PD(사진)

‘1969년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는 오늘(5일)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국제적십자연맹에 보내달라며 청원서를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했습니다. 가족회는 청원서를 통해 지난 1969년 비행 도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KAL기 탑승객 11명에 대한 생사확인과 송환노력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요, 이 단체의 황인철 대표를 전화로 연결해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문) 먼저 청취자 여러분들 가운데 이 사건을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어떤 사건이고 현재 어떤 상황인지 좀 설명해 주시죠?

답) 저희 사건은 지난 1969년 12월 12일에 강릉 발, 김포 행 국내선 항공기가 오후 12시25분, 이륙한 지 10분만에 북한의 고정간첩에 의해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입니다. 이듬해인 1970년 2월14일에 승객 39명을 송환했는데요.  북한은 2월3일 정도에 전원 송환하겠다고 밝혔었음에도, 11명을 뺀 39명만 송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도 11명이 북한에 계속 강제 억류된 사건입니다.

문)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피랍자 가족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군요?

답) 아직도 변함 없는 아픔 속에 있죠.

문) 오늘 국제적십자기구에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대한적십자사에 내셨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답) 피랍자 중 스튜어디스 성경희 씨가 지난 2001년 제3차 남북한 이산가족상봉에서 어머니 이후덕 씨와 만났습니다. 모녀 상봉에서 같이 납북된 정경희 씨가 같은 동네에서 잘 살고 있고, 본인들의 아들도 이모라고 부르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2002년 6월에 정경희 씨가 생사확인 불가라고 나왔고요, 저희 아버지도 생사확인 불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미귀환 11명이 살아계셔도 북한에 살아계실 거고, 돌아가셨어도 북한에서일 텐데, 한국의 가족에게 생사확인 불가라는 답변을 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저희가 지난 6월17일,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실종문제에 관한 실무그룹에 저희 아버지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몇 분을 접수했습니다. 그러면서 KAL기 납치 사건이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중대한 인권범죄인지 알게 됐고요. 또 국제사회 안에서는 아직도 시효가 전혀 적용되지 않으면서, 국제 관습법 상 강행구금으로 반드시 우리 시대에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하고, 저희 아버지의 생사와 중국을 제외한 제 3국에서의 상봉과 송환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드렸습니다.

문) 그러니까 당시 피랍됐던 11명 중에 1명만 남북한 이산가족상봉에 나왔고, 나머지 사람들은 생사확인조차 해주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사실 얼마 전에 북한에 직접 서한을 전달하려는 시도도 하신 걸로 압니다. 그 이후로 북한에서 전혀 반응이 없었나요?

답) 전혀 반응이 없고요. 편지 전달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문) 아예 편지가 전달되지 않았군요?

답) 북한 당국도 인도적인 조치를 요구하니까요. 저희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가족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통일부를 통해서 보내려고 했는데요. 북한이 그 자체를 완전히 거부해버린 겁니다.

문) 그러니까 지금 북한의 인도적인 요구라는 것은, 북한이 앞서 한국으로 떠내려간 북한 주민의 송환을 요구했던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

답) 그렇습니다.

문) 최근 들어서 국제사회에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앞서 말씀 하셨듯이 유엔에도 이 문제를 신고하셨고요.  국제사회의 반응과 관심은 어떤지 좀 말씀해주시죠?

답) 유엔의 강제실종문제에 관한 실무그룹은 비공개로 움직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답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규정 상으로는 6개월 안에 답변을 줘야 하지만, 북한은 아직 답변을 하지 않은 상태고요. 다만 이것이 비공개 상태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 가족들도 현재로서는 나설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문) 일단 현재로서는 유엔 실무그룹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군요?

답) 1차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문) 사실 40년 이상 지난 사건이라서, 한국에서도 그렇고, 국제사회에서도 그렇고 사건에 대한 관심이 어떤지 궁금한데요. 어떻습니까?

답) 저희가 가장 큰 벽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소름 끼치는 침묵과 차디찬 무관심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또 심각한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조금씩 알아간다면, 저희 문제는 풀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국제기구에 계속 청원을 하시는 거죠?

답) 맞습니다.

문) 그런데 조금 대비가 되는 것이, 일본 정부의 경우 자국민 피랍 문제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이거든요? 오늘은 그런 이유를 들어서 대북 제재를 1년 더 연장한다는 발표도 있었고요. 한국 정부의 경우 그간 어떤 입장이었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답) 참 안타깝게도요, 한국 정부는 지난 2007년 10월에 납북자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제4조를 보면 국가의 책무로,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별로 없었습니다. 올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외교통상부 차관 연설에서 납북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말씀해주셨거든요. 하지만 그 배경에는 제가 외통부에 남북자를 위한 국가의 책무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전화를 했었고요. 반면에 실제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북한과 일본이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한국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그러니까 한국 정부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시군요?

답) 그렇습니다.

문)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앞서 잠시 말씀 드렸지만, 올해 초 북한에서 한국으로 표류했다가 망명한 주민들도 있고요. 하지만 돌아가겠다는 주민은 한국 정부가 북한으로 송환했거든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남 다른 심정이셨을 텐데요.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여쭙고 싶고요. 또 이 방송이 북한으로 나가는데요, 북한 당국이나 당국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이 기회를 빌어서 해주시죠?

답) 지금 세계는 인도주의가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것들의 기준이 될 수 있고요. 이번에 한국에서 망명을 원한 북한 주민 4명에 대해서도 인도적인 차원으로 진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인도주의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북한 측에 편지로 요구하려 했던 것은, 북한 스스로 인도주의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이제는 저희 문제도 인도적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북한은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했고요. 저희 가족들에게는 또 다시 반인류적인 일을 저지른 겁니다. 이런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항상 국제법에 준해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 북한도 인도주의를 논하는 한 나라로서, KAL기 피랍자 가족들의 요구도 하루빨리 들어달라는 말씀이군요.

답) 그렇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풀 수 있는 문제고요. 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피랍자 가족들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아무리 강하게 주장을 해도, 북한이 모른다고 얘기했을 때 논란이 되거든요. 그렇지만 저희 문제는 국제사회가 다 아는 납치 사건이기 때문에, 북한이 발뺌을 한다면 스스로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도 없는 사건이고요, 북한에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한국 정부가 어떠한 식으로든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 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답)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 대표 황인철 씨로부터, 피랍자 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과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송환 노력에 관해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김근삼 이었습니다.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 여객기(YS-11) 납치

1.1969년 12월 11일날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YS-11)납치 사건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직원 성경희. 정경숙등 4명의 대한항공기 직원과 승객 47명 전체 인원 51명이 탄 대한항공 여객기(YS-11)가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5분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으로 가장 맨 앞좌석에 앉아있던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당시 나이 42세)가 기장실로 들어가 권총으로 기장 유병하씨등을 협박에 의해 납치되돼 이날 오후 1시 18분 원산 근처 선덕 비행장에 착륙했다

납치사건 다응날 북한 김일성 정부는 유병하 기장과 최석만 부기장등 두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통해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사건 발생 65일만인 1970년 2월 14일 납북 민간인 중 39명(남자 32명. 여자 7명)만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고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승무원 성경희. 정경숙등 그리고 승객 황원. 채헌덕.김봉주.장기영. 임철수. 이동기. 최정웅. 조창희(고정간첩)등 12명은 북에 남았다

2001년 2월 26일 제3차 이산가족 남측 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이후덕(여, 당시 나이 77세 성경희의 어머니)씨는 26일 당시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납북된 딸 성경희(여, 당시 나이 55세)씨를 만난 자리에서 항공기 기장이었던 유병하씨와 부기장 최석만씨가 현재 북한 공군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부기장 최석만씨는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성경희씨와 함께 납북된 여승무원 정경숙씨도 평양에서 성경희씨의 인근에 살면서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고 성경희씨가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승객 7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대한항공 여객기(YS-11) 납북사건 북한에 생존자들 자료
(1)1970년 2월 14일 남북 교환 당시 북한정부에 의하여 강제로 남아야 했던 사람들 명단
유병하(기장). 최석만(부기장). 성경희(여승무원). 정경숙(여승무원). 황원(승객). 채헌덕(승객). 김봉주(승객). 장기영(승객). 임철수(승객). 이동기(승객). 최정웅(승객). 조창희(승객-고정간첩)등 총 12명
(2)생존자 명단 자료
ㄱ.유병하(유병화)---납치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 기장(조종사), 현(現) 북한공군 근무
(ㄱ)당시 38세. 서울용산. 조종사
(ㄴ)한국 기독교와 역사 "11호"를 내면서
당시 일행 중에 유병하 공군소령, 복현묵 공군소령이 참가했다
유병하 소령은 수년 후 KAL기로 옮겨 대한항공여객기 YS-11의 기장이 되어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중 무장괴한에 납북되어 생사가 궁금하다가 지난해 말 이산가족방문단에 끼여 평양을 찾아간 여승무원 어머니에 의해 생사 확인 되었다

ㄴ.최석만---납치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 부기장(부조종사), 현(現) 북한공군 근무
당시 37세, 서울 성북, 부조종사
-북한에서 1남 1녀 자녀를 두고 있음

ㄷ.성경희
당시 23세 승무원, 서울 성북, 스튜어디스
-(서울)창덕여고 졸업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 졸업
-1968년 대한항공기 여승무원 입사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여객기(YS-11) 납치와 납북
성경희씨는 사건 당일 비번이었으나 창덕여고 동창생인 정경숙씨가 "강릉에 같이 가자"고 제의해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後身) 구구전선 "구국의 소리" 방송국 "신서연" 가명으로 방송요원으로 활동함
-1992년 8월 성경희씨는 평양방송에 출연해 "의거입북용사"라며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소개함
-3차 이산가족 교환 방문때 평양에서 어머니 이후덕씨와 상봉
ㄹ.장경숙
당시 24세 승무원, 서울 영등포구, 스튜어디스
-(서울) 창덕여고 졸업
-연세대 도서관학과 졸업
-1969년 대한항공사 입사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여객기(YS-11) 납치와 납북


(3)미확인 생존자 명단
ㄱ.김봉주 당시 27세 승객, 강원 강릉. MBC 기자 출신
ㄴ.이동기 당시 47세 승객, 경남 밀양. 합동연쇄소
ㄷ.임철수 당시 49세 승객, 강원 양구. 회사원
ㄹ.장기영 당시 40세 승객, 경기 의정부. 요식업
ㅁ.채헌덕 당시 37세 승객, 강원 강릉. 병원장
ㅂ.조창희(조욱희) 당시 42세 승객, 경기 평택---당시 발표 때 고정간첩으로 함
ㅅ.최정웅 당시 28세 승객, 강원 원주. 한국슬레이트
ㅇ.황원 당시 32세 승객,강원 강릉. MBC 아나운서 출신

http://blog.daum.net/007nis/9907587

 

 

 

*영동 MBC(現,강릉 MBC)의 1970년 5월 20일자 이사회(의장 이방우) 회의록에 따르면 당사 납북된 사원 황원(방송부 근무-MBC PD), 김봉주(보도부 근무, 기자)에 대해 영동 MBC 휴직 발령을 냈다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북사원 휴직발령 승인의 건

이사회장 이방우는 정관규정에 의하여 의장이 된다.  의장은 의장석에 좌정하여 부의안건의 설명을 구한 바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로부터  작년(1969년) 12월 11일 KAL기 납북사건으로 피랍된 본 회사사원 황원(방송부 근무), 김봉주(보도부 근무) 2인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금일까지 만 6개월이 경과 되었으며 국제기구를 통한 송환촉구는 그 실효가 언제 나타날지 막연한 형편이며, 특히 피랍사원은 세칙에 의하여 처리될 적당조항이 없는 특수한 경우이므로  부득이 이사회의 의결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어 본회의 소집을 회장에 요청한 바를 고하고 좌기와 여히 조건부 휴직 발령을 의결해 줄 것을 동의한 바 전원일치의 찬동으로 의결된다.
  1. 1970년 5월20일 의결일자로 휴직발령하되 송환되는 경우 송환된 상태에 대한 당국의 의견을 참작하여 재고할 수 있다.
  2. 휴직발령 익월부터 급료지출을 중지한다.
  서기 1970년 5월20일
  영동방송 주식회사
  의장 이사회장 이방우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
  전무이사 김준영

 

                                                                                         1968년 황원 PD 부부의 모습                                            

 

 

                                                            황원 PD의 어린시절 가족 사진,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황원 PD이다       

*북으로 보내는 편지 -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1)

남한에 사는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과 이들이 북한에 끌려간 가족들에게 보내는 ‘북으로 보내는 편지’ 오늘은 그 일곱 번째 순서로 지난 69년 남한 대한항공을 타고 있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과 그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이땅에 태어난 것이 비극인 아버지!
식민치하에 년이란 세월이 지나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아버지와 우리가족들은 36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뚫린 아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69년 12월11일 당신은 출장 중에 공중에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시작하였고 1970년2월14일 39명만이 송환이 되고 12명이 돌아오지 못하여 또 한 번 찢어지는 아픔을 가져야 하는 우리 가족들의 운명 !

정부는 혹시나 간첩이 되어 돌아오지 않나 감시나 하고 자신들이 보호했어야할 우리를 오히려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이 모든 갑작스러운 충격에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편집 성 인격 장애와 정신 불안이 되었으며 우리 가족은 참으로 험하게 살아왔습니다.

억울하고 통탄스러워도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침묵만을 강요당했던 우리가족들! 할머니는 평생 당신을 생각하시면서 눈물과 한 만을 가슴에 안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빼앗기기만 하고 무지와 무관심 속에 살아왔습니다. 나라가 아닌 집단이라고 생각하였기에!"나는 국민이 아닌 세금이나 내주는 노예이다"라고 포기하며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금강산이 열렸던 때, 개성공단까지 육로가 열렸다고 할 때, 한반도기가 나부끼며 우리의소원은 통일이라 남과 북이 어우러져 부르짖을 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도 잠시 애써 잠재웠던 저의 마음은 더 크게 아픔으로만 다가 왔습니다.

과거에는 남북대치관계로 어쩔 수 없이 침묵만을 강요당했고, 지금은 통일의 방해자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다 아는 납치사건인데도 북한에는 납북자가 없다는 말에, 우리들을 먼저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우리가족들을 골치 덩어리로만 바라봅니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 발 서울 행 대한항공 ys11기를 타고 출장을 떠난 황원씨는 공중에서 북한으로 납북되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납북된 남한주민들의 수는 승무원 4명을 포함해 모두 51명이였습니다. 당시 남한의 치안국장은 대한항공의 납북은 북한 간첩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자 북한당국은 대한 항공 탑승객 51명중 39명을 남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러나 송환자 명단에는 황원씨를 비롯해 기장과 승무원 등 12명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아 납북 피해자 가족들은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이들 12명이 자진해서 월북했다고 주장 했을 뿐 별 다른 해명은 없었다고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는 말했습니다.

 

황인철: 북한에서 얘기하는 이유가 정당한 게 있는 것은 아니고 그쪽에서 주장하는 것은 의거 입북이라고 하고 당시 남한에서도 유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월북자는 곧 간첩 그리고 가족들은 간첩의 가족들 이라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황인철씨는 당시 3살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을 못하지만, 자라오면서 아버지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황인철: 가슴이 아플 정도가 아니라 피눈물 날 일이다. 3, 4학년쯤 돼서 아버지가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미국에 있는 줄 알았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납북된 사실을 얘기했더니 납북이 아니라 월북 간첩 등으로 소문이 났다...

 

1969년 12월 강릉발 대한항공을 탔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기자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의 편지 내용 이였습니다. 황원씨와 황인철씨의 사연은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북으로 보내는 편지 -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 (2)

남한에 사는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과 이들이 북한에 끌려간 가족들에게 보내는 ‘북으로 보내는 편지’ 오늘은 그 여덟 번째 순서로 지난 69년 남한 대한항공을 타고 있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과 그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을 지난번에 이어 계속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살아계신다고 하면 달을 보면서 "지금 아버지도 저 달을 보고 계시겠지" 하며 그리움 만이라도 달래 수 있으 련만 돌아가셨다면 제사라도 올릴 수 있으련만 이런 작은 소망조차도 막는 무리들이 원망스럽고 원통합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평상시 제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 하신 것을"네 애비를 생각하면 내 젖 가슴이 지금도 짜르르 하다"고 저를 끌어안으시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말씀하신 한 서린 외마디!
8년전 돌아가시면서
"나를 화장 시켜라. 그리고 뿌려라 응어리진 평생의 한을 풀어 버리련다."
하신 할머니께 둘째인 당신이 돌아오면 눈물을 흘릴 장소가 필요하다고 식구들이 애원하였기에, 눈물과 함께 안장을 허락하신 할머니!
할머니무덤 옆에 아버지의 자리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해자는 없어지고 피해자만 남아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 현실에 당신의 주검만이라도 확인된다면 이곳에 묻고 곁에 나란히 모시고 싶습니다.
두 분이 함께 나란히 누워 계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 할머니! 아버지! 두분 만이라도 평생 보고팠던 한 만은 없어지시겠지요?

 

1969년 12월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출장을 떠났던 문화방송기자 황원씨는 공중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돼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당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자 납북자 51명중 39명을 남한으로 송환했지만 나머지 황원씨를 포함한 대한항공 승무원들 12명은 북한에 억류했습니다.

또 한 차례 시련을 겪어야 했던 황씨의 가족들은 남한정부의 도움은 커녕 오히려 정부의 감시대상이 됐었다고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는 회고합니다.

황씨의 가족을 버린 것은 정부만이 아니었습니다. 황원씨가 몸담고 있던 문화방송도 황씨가 출장 중에 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씨의 가족들에게는 냉담하기만 했다고 황인철씨는 말합니다.

 

황인철: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상사가 있다. 그의 회의록에 의하면 12월10일 ‘본인은 방송부장을 겸하고 있던 터라 본인을 대신하여 황원씨를 출장토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본사에 출장을 가다가 이 사간이 발생했다.

 

황씨가 속해있던 문화방송측은 황원씨가 출장 중에 당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황씨를 휴직처리하고 지급하던 급여마저도 중단해 황씨의 가족들은 살길이 막막했었다고 황인원씨는 말합니다.

얼마 전 황인원씨는 아버지에 대한 배상을 문화방송 측에 요청했지만 지금까지도 문화방송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황인원: 87년도에 군대에 입대를 해야 돼서 납북자 가족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했다. 요번에 사건이 마무리 되지 않았으니 임금과 퇴직금을 요구하자고 했다. MBC측에서 나온 대답은 87년에 사망처리가 돼서 시효가 지나 받을 것이 없다.

 

황씨 가족들은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이 가슴을 앓으며 살아왔습니다. 황원씨의 어머니도 자식을 잃은 한을 품고 얼마 전 세상을 떴습니다.

지금까지 지난 1969년 납북당한 문화방송기자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의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황원 PD 납북 직후 아내와 어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의 아내가 안고 있는 아기가 갓 100일이 지난 황원 PD의 딸, 아들 황인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