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TV: “어버이 수령님의 이 교시가 마지막 교시가 될 줄 우리 어찌 알았겠습니까?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시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1994년 7월 8일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자 권력을 물려 받았습니다. 1974년에 후계자로 공식화 된 지 20년 만에 마침내 김정일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자신의 시대를 맞은 김정일 위원장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는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북한경제는 1980년대 말 구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과 96년에는 대 홍수 같은 자연재해까지 이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오히려 북한경제를 더 큰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친 것입니다.
북한영화 한 장면: “우리는 방금 희생된 동지의 시신을 언 땅에 묻었습니다. 피눈물을 뿌리며 시작한 이 고난한 행군이 이처럼 가슴 아픈 희생을 가져 오리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없었고…”
북한체제 선전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행군 시기의 끔찍했던 북한의 식량난을 생생히 전하는 영화로 평가되는 ‘자강도 사람들’의 한 장면 처럼, 당시 북한 전역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수십 만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 의회 산하 의회조사국의 딕 낸토 연구원은 김정일 시대 최악의 순간으로 고난의 행군 시절을 꼽았습니다.
사회와 경제를 개방해 외부사회의 지원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주민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 행렬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북한은 6년 만인 2000년에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외부세계의 대규모 원조에 의한 것일 뿐 붕괴된 경제의 기반이 재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2년, 북한은 부분적으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사상 유례 없는 경제개혁 조치에 나섰습니다. ‘7.1조치’로 불리는 이 조치의 핵심은 임금과 물가를 대폭 인상하고 기업의 자율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또 금강산 관광특구와 개성공업지구를 지정하는 한편, 종합시장 개설과 국영상점 임대, 개인상업 허용 등 유통 분야의 개혁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 조치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시장이 확산되는 등 체제위협 요소가 나타나자 2005년부터는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등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특히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 해인 2009년, 경제개혁 보다는 계획경제를 강조하는 움직임을 강화했습니다. 2009년 4월20일 시작된 대중 노력동원 운동 ‘1백50일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조선중앙TV: “모두가 1백50일 전투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자.”
또한,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커져가는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인플레이션을 막고 화폐 가치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식량 가격과 환율이 폭등하고 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지는 등 후유증이 극심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경험했던 탈북자의 말입니다.
“쌀 값이 30원까지 쭉 내려갔다가 일주일 만에 40원, 50원으로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쭉쭉 올라가서…”
이 밖에 북한에서는 화폐개혁 실패의 여파로 달러화 등 외화를 선호하는 현상이 심화됐고, 물가 상승으로 서민층의 실질적인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되면서 빈부 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엔 은 주민의 66%가 끼니를 거르고 있다며, 특히 식량난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리는 영아와 유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북한은 현재 외부 원조를 받지 않고는 당면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 샌디에이고 대학의 스테판 해거드 교수는 북한이 경제 개혁개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김정일 시대 경제정책의 최악의 실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라도 개혁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핵 야욕과 선군정치를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2005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하면서 국제 경제에서 점점 더 고립됐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주민들에게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뒤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그 같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외부세계의 지원 없이는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를 파탄시킨 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진행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해 드리는 특별기획, 내일은 두 번째 순서로 김정일 시대의 북한 핵과 정치, 안보 현안들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혐의’ 사전구속영장 본문
간첩이나 테러범 그리고 내란음모자 등은 뇌를 분해하고 있습니다(사진 뇌 분해기 모습)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이끈 지하조직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의 비밀회합에서 조직원들은 이 의원을 ‘남쪽의 수(首·우두머리)’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29일 “비밀 회합에 참가한 조직원들 사이에서 이 의원은 ‘우리의 수’, ‘남쪽의 수’라고 불렸다”며 “이런 내용이 국가정보원이 확보한 녹취록에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의 수령(首領)이 김일성 김정일이라면 이 의원은 남한에서 그에 버금가는 위치로 조직원들이 여겼다는 걸 보여준다. 조직에서 이 의원의 위상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5월 1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종교시설에서 연 비밀 회합에서 “한 자루 권총 사상으로 정신 무장해 미 제국주의와 정면으로 붙어 통일조국의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에는 “지원의(원대한) 사상, 3대 각오, 동지획득에 관한 사상, 두 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는 표현이 나온다.
공안당국의 다른 관계자는 “이 의원이 볼셰비키 혁명을 거론하면서 ‘전국적 혁명을 위해 (인명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 내용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 회합에서 “현 정세는 미 제국주의와 조선 민중의 한판 대결이라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이런 내용들이 담긴 최소 3건 이상의 음성과 녹취록을 2010년부터 검찰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수시로 감청 영장을 발부받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은 5월의 비밀 회합 이외에 2010년 말부터 최근까지 40여 차례의 회합이 있었으며 서울뿐 아니라 남양주 등 경기 지역에서도 회합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국정원은 이날 이 의원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수원지검은 곧 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내란음모 혐의로 현직 국회의원에게 구속영장이 신청된 사례는 헌정 사상 처음이다. 국정원은 또 전날 체포한 홍순석 경기도당 부위원장 등 3명에 대해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국정원은 29일 이 의원의 신체 및 국회 의원회관 집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재개했다. 이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의원단 연석회의에 참석해 “나에 대한 혐의 내용 전체가 날조”라며 혐의 내용을 부인한 뒤 “국기문란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유사 이래 있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탄압 책동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이 확보한 ‘비밀회의 녹취록’ 속 이석기 발언은?
일부 언론이 국가정보원이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녹취록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녹취록에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경기 동부연합 사람들이 중심이된 혁명 조직, 이른바 RO 모임에서 한 발언이 담겨 있다고 전했습니다.
녹취록 대부분의 내용은 전쟁 준비와 관련한 토론으로 모임을 주도한 이석기 의원이 “정치, 군사적인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무기 입수, 제조 등의 무장 방법을 토의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무기 제조 방법을 알 수 있다거나 부산에서 총을 구입하자는 등의 발언이 오갔다는 겁니다.
또 전시에는 통신 설비와 유류시설을 파괴해야 한다면서 평택 유조창의 탱크 구조와 경비 여부에 대한 정보도 공유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경비가 삼엄한 일부 국가시설 내부 근무자를 포섭해야 한다는 토론 참가자의 발언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 이 같은 토론 내용을 당장 준비하자고도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국정원의 녹취록 가운데에는 동영상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공안당국은 이 녹취록을 사법당국에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석기 이어 조양원도 민혁당 출신… 드러나는 RO의 실체
조씨, 李에 포섭… 당시 노동운동 담당, 통진당 여론조사 맡은 회사대표 활동
李, 특별사면후 2004년 RO 설립… 공안당국 “RO는 민혁당 후신” 판단
국가정보원이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조양원 사회동향연구소 대표(49)가 과거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당원이었던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내란음모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된 10명 가운데 민혁당과의 관련성이 공식 확인된 것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이후 두 번째다.
이 의원은 2003년 3월 서울고법 형사1부에서 민혁당을 창당하고 경기남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혐의(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등)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문을 보면 이 의원은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 시절 조 대표를 당원으로 끌어들여 위원회 산하 노동사업운동부를 맡긴 것으로 나타났다.
조 대표는 경희대 서반어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이 의원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대표로 있는 사회동향연구소는 이 의원의 정치컨설팅 회사 CNP전략그룹(현 CN커뮤니케이션즈)이 2010년 설립한 여론조사 회사로 통진당과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주로 좌파단체의 여론조사 용역을 수주해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의원처럼 조 대표도 과거 민혁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민혁당과 통진당, 그리고 이번 내란음모 사건의 핵심조직으로 알려진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현재 통진당 내부에는 이 의원 외에도 민혁당 출신 인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상규 의원도 민혁당 창당 멤버로 참여해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이끌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울산 북구의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했던 김창현 울산시당 공동위원장과 박경순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지난해 총선에서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이의엽 전 정책위의장 역시 민혁당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민혁당은 한때 민족해방(NL) 계열 주체사상파의 대부였던 김영환 씨가 1992년 하영옥 씨 등과 함께 만든 지하조직으로 1997년 김 씨의 전향으로 해체된 뒤 1999년 공안당국에 적발됐다. 이후 하 씨와 이석기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혁당 잔존 세력들은 ‘경기동부연합’ 등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민중민주(PD) 계열이 1997년 세운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며 차츰 세력을 확대했고, 2003년부터는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다. 이후 2006년 ‘일심회’ 간첩사건이 터지면서 PD와 NL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2008년 심상정 노회찬 씨 등이 당을 떠나 진보신당을 만들면서 민노당은 이들 세력이 주도하게 됐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은 지난해 1월 다시 통진당으로 합당했지만 경선 부정 논란이 이어지면서 다시 갈라져 통진당 역시 NL 계열이 당권을 잡고 있다.
민혁당은 당원 간에도 서로 당원인지 모르게 할 만큼 점조직으로 운영된 만큼 공안당국의 수사망을 피해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당원이 더 있을 개연성도 높은 상황이다.
공안당국은 민혁당 잔존 세력이 대외적으론 통진당에서 활동하고 RO라는 조직을 만들어 비밀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의원은 200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2004년경 RO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RO는 회합의 규칙도 엄격했다. 이 의원은 대규모 회합의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이 술을 먹은 사실을 알고 회합을 바로 취소한 뒤 다음 날 다시 소집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은 RO가 민혁당의 후신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에는 이 의원을 RO의 총책이라고 표현하면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정당과 국회, 지자체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키려 한 조직이라고 표현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성열·손영일 기자 ryu@donga.co
130명 앞에서 무장봉기 모의? 외화는 왜 준비?
국정원 “김일성에 충성맹세 한 모임… 비밀계획 새나가리라 생각 안한듯”
李오피스텔서 1억4000만원 발견… 달러-루블화 나와 배경 주목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석기 의원은 5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종교시설에서 지하조직 RO 조직원 130여 명이 모인 비밀회합을 갖고 경기 남부지역의 항만 철도 통신 유류 시설 파괴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소수가 아닌 130여 명의 많은 조직원 앞에서 주요 시설 공격이라는 은밀한 계획을 밝혔다는 것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국정원이 최소 3개 이상의 녹취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비밀회합이 2010년부터 최근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와 소규모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주요 시설 공격 계획은 소수 조직원의 핵심 모임에서 밝힌 것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비밀회합에 모인 조직원 130명은 민족민주혁명당 조직원을 비롯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핵심 그룹으로 보고 있다. 직업혁명가인 이들은 대학 시절부터 지하조직에서 함께 활동해 왔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계획이 새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은 29일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이 의원의 오피스텔을 압수수색하던 중 신발장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싸인 현금 1억4000만 원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달러와 루블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액수는 미화 600달러(약 66만 원)와 러시아 화폐 1만 루블(약 33만 원) 정도인 것으로 전해졌다. 거액이라 볼 수는 없지만 외화, 특히 루블화가 포함된 점에 국정원은 주목하고 있다. 통진당 측에선 “임차보증금”이라는 설명이 나오지만, 거액의 임차보증금을 계좌이체가 아닌 현금 뭉치로 지불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 의문을 낳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을 추종하는 세력은 국민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극렬 반미, 반일 민족주의 그룹)이거나 김일성주의자(NLPDR) 세력으로 남북협상(평화통일)보다는 전쟁통일(남침)을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평화이며 남침을 옹호하는 남한 내부 무장세력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북한정부 내 강경파 입장을 대변하는 세습제 좌익군정을 추종하는 국방위원회(김일성 가계) 소속이며 북한정부 내부 온건파 남북협상세력(개혁개방화 세력) 입장이 아닙니다
이들은 북한 상류층 생활 모습을 보고 의식화 돼 있는 세력들입니다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
오늘 한국 머리소리함 주요 인물들이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에 대하여 논의해드립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민주전선은 반독재주의(반전체주의)를 의미하며 민주화 세력 모임을 의미합니다 민주화 세력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자유권 존중=자유민주주의 세력)
와 사회주의자(사회권 존중=사회민주주의 세력) 세력 좌우익연합세력 모임입니다
민주화 세력 적은 독재자나 전체주의자임으로 전제군주, 국가사회주의 세력이나 좌익군정세력입니다 좌익군정은 사회주의 세력 내부 군정분리주의(병정분리주의) 노선으로 인민회의제 정부론(순수 내각책임제 정부론, 내각이 의회 시녀)을 부정하고 인민의회 보다 윗 권력기구 최고지도자 제도(군사위원회나 군사평의회, 국방위원회)를 도입하여 군 통수권자(국방위원회)와 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독재주의(전체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 형태입니다
북한정부는 노동당 좌익세력(사회주의 세력-인민의회)이면서 노동당 당군 인민군(국방위원회)이 북한 권력을 장악하는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군정입니다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반우파전선(반보수전선)을 의미하며 사회주의 전선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면 사회주의 세력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 윈칙으로 인민회의제 정부형태(순수 내각책임제-정부는 의회 시녀)로 의회독재(일당독재) 계급없는 사회 만민(萬民)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전선 내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생존권= 사회권 존중)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 세력이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군사평의회나 국방위원회, 군사위원회) 형태 최고지도자 중심의 권력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이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좌익군정이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될 수 있지만 민주전선이 될 수 없습니다
좌익군정은 대부분 공산주의 세력보다는 사회주의 세력으로 북한 노동당(아랍 사회당)등입니다
군(軍)이 당군이 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군대는 국군으로 국민(인민)의 군대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노동당 당군으로 노동당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는 군대이며 김일성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등) 무장력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북한 노동당 당군 김일성주의 군대로 세계 각국 김일성주의 세력을 확장하는 무장력입니다
유엔이나 선진국에서는 북한 인민군을 보고 좌익군정 테러단체(김일성주의 무장단체)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북한 협력세력은 민주전선이지 좌파전선(진보전선)이 아닙니다
북한 내부 남북협력과 평화세력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며 개혁개방세력(자유화 개방화 세력)입니다
북한 내부 전쟁세력은 좌익군정 세력이며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 김일성주의 세습제 좌익군정입니다
남한도 전쟁세력은 군정입니다
대북정책에서 좌파전선(진보전선)보다는 민주전선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민주전선은 자유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연합모임이지만 좌파전선(진보전선)은 사회주의 전선으로 세습제 좌익군정 세력도 연합세력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세습제 좌익군정 국가입니다
세습제 좌익군정은 약점은 민주전선(반독재주의나 반전체주의)입니다
민주전선 무장력은 민주화 세력입니다
유엔이나 세계 각국 대부분 국가들이 민주정부입니다
세계 각국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미국 오바마정부 조언그룹 글)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주의자)을 옹호하는 세력은 북한 상류층 생활 모습에 의식화돼 있는 인물로 북한 평민층 생활 모습을 보고 북한 자유화, 개방화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북한 평민층보다 상류층 입장을 대변함으로 세습제 좌익군정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북한 자유화 개방화 정책과 북한 평민층 입장을 옹호한다면 대한민국(남한정부) 입장을 지지할 것입니다"
北韓“白富美”豪宅生活
북한 상류층 여성들의 평양시내 고급주택과 수영장에서 호화생활 모습 사진입니다 북한은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평민층(빈곤층과 평민층), 상류층으로 구분돼 있으며 상류층은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평민층은 식량난과 배고픔으로 신음해오고 있습니다
북한 상류층은 핵무기 보유와 세습제 좌익군정을 옹호하고 있고 평민층은 핵무기 포기와 개혁개방화 정책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은 북한 상류층의 안보논리 자주노선보다는 평등사상 서구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 빈곤한 생활모습
북한 평민층들의 식량난이 심각합니다
굶주림과 배고픔 그리고 기아등으로 신음하는 북한 평민층들의 모습입니다
북한 평민층에게는 핵무기도 아닌 굶주림과 배고픔 해결할 수 있는 빵과 경제활동 생활 터전입니다
북한 식량난(영양실조) 주민은 90년대 초 420만명, 90년대 중반 700만명, 북한 경제 만성적 경제위기로 10년 후 2007년도 전체 국민 33% 780만명이 영양실조(영양부족) 상태입니다
북한정부는 과거 7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다가 요즘에는 2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고 있습니다 북한 군인들도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입대조건 신체 신장이 작아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북한 주민 금년 식량부족량은 414만톤입니다
북한 평민층은 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경험을 하고 있지만 북한 상류층은 사치 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정책과 핵무기 포기 조건으로 북미수교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함경남도 해주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영양실조 북한 평민층 자녀들 모습(上)과 북한 평양시 상류층이 거주하는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 창전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북한 상류층 교육기관 경상유치원(慶上幼稚園) 공부하고 있는 북한 상류층 자녀들 모습(下)
밥 걱정(끼니 걱정)을 하는 북한 평민층 자녀들
그리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미술공부등을 걱정하는 북한 상류층 자녀들
자유화 개방화(개혁 개방정책)만이 북한 평민층 자녀들도 끼니(밥) 걱정이 아닌 피아노나 바이올린등 음악공부나 미술공부 걱정이 될 것입니다
평양시내 아파트촌 모습입니다 북한도 토지를 제외한 모든 물건 매매가 가능하며 상속도 가능합니다 북한 시내 급속한 아파트촌 등장은 아파트 매매와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합니다
평양 평민층 아파트 주택 모습입니다
평양시내도 평민층 슬레이트 지붕[판자촌] 모습입니다
북한 상류층이 거주하고 있는 평양 만수대 고밀도(高密度) 고층 주택 모습[2012년 3월 25일]
평양사회 특권층(상류층)과 평민층(하층민) 이질적인 생활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평양에도 각종 외국음식점이 개설돼 운영돼 오고 있으며 특권층 가족들은 외국 음식에 탐닉하고 있지만 평민층은 식량난에 헤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권층은 외국 승용차나 북한정부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평민층은 대부분 자전거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도 계층간의 경제적 격차와 빈부격차로 반정부투쟁이 가중될 것이며 평민층들은 특권층 부패정부를 붕괴시키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북한정부 권력을 장악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북한 평화자동차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 광고선전입니다 북한 상류층이 구입하여 타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사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승용차는 개인 소유로 인정돼 상류층은 외국 승용차나 평화자동차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등 구입하여 타고 다닙니다 아직도 평민층은 자전거가 재산 목록 1호입니다
교통 여순경과 북한 개인 승용차 모습(상류층과 평민층 빈부격차 피부로 느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함께 그의 17년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막 내린 김정일 시대를 경제와 핵, 정치, 안보, 그리고 인권 등 3차례에 걸쳐 조명해 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이연철 기자가 파탄난 북한경제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북한 농민은 대부분 평민층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달구지로 농사를 지고 있습니다
안주시 거리의 소 달구지와 북한정부 제조한 휘파람 승용차 모습
금강산 근해 순찰하는 북한 해군들 모습
북한 인민보안부(경찰) 순찰차
북한 주민 재산목록 1호 자전거
북중(北中)공동 주최 가을국제상품전시회때 보석류 상품을 둘러보는 평양여성들 모습(사진)
북한 화면반주음악실(노래방)
북한 아동 의복(衣服) 패션(Fashion) 광고 사진
북한 최고 미인 김옥희(金玉姬, 19세)-북한 인민군 예술단무용수, 계급: 인민군 중위
조선인민군예술단 무용배우 김옥희 조선인민군예술단 무용배우 김옥희라고 기사가 났지만 사실 일본세미누드모델인 "나카시마 마리"라고 합니다.
금강산 관광지역 안마실 모습
평양시내 도로 위에서 폐품수집하는 북한 아줌마들 모습(폐품회수-재이용-재가공- 수출)[2007년 8월, 평양시 선교구]
평양 시내 평민층 모습
*민혁당과 대남정책 그리고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창당이 남북 역사에 많은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 민혁당은 통련당(통일혁명당) 창당 이래 두번째로 김일성 김정일 중심의 정당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주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등장한 정당이며 통련당이 김일성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통련당 검거와 해체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방문 성사로 남북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민혁당 검거와 해체가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통련당은 김일성 중심의 정당을 창당하고 김일성 유일사상노선 북한노동당을 추종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중심의 북한 노동당을 인정하고 전통과 계승 입장에서 주체사상 창시자이며 김일성 후계자 김정일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는데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정부는 1990년 1월 남한지역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편하여 김정일 중심으로 세력개편을 추진했으며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1992년 4월 북한국가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북한 인민군과 북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무를 맡았으며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무를 맡았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로 당선되었다.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서기 직무를 맡았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다-북한관련 중국자료)
남과 북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도 중국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사회정부로 수평적 권력교체(주석,총리등 5년 중임제)나 러시아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자유민주정부로 수직적 권력교체(대통령 임기 4년 중임제)가 돼야 하며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화 민주화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럽연합처럼 미국정부 지원으로 한중일 중심으로 국가연합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과거처럼 남한 일부세력이 김일성,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 권력승계 작업을 지원,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면 북한정부는 오판으로 핵무기 보유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남침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이가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봅니다 남한 자유화 민주화 세력이 북한 김정일 독재정부와 투쟁하는 북한 자유화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탈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세력이 돼야 남북통일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남과 북 통일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가 돼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정부등이 남북통일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화 민주화정부를 지지하고 전쟁통일모델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제거하는데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핵보유 불인정, 세습 권력승계 반대, 전쟁통일반대와 평화통일 지지"
1.통일혁명당 간첩사건
1968년 발표된 통일혁명당의 대규모 대남 간첩단 사건이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존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했으나 1968년 7월 통일혁명당과 청맥 잡지등이 체포되거나 검거됨에 따라 조직의 와해 되었다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이문규(李文奎,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정태묵,윤광수등이 활동한 통일혁명당(약칭: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재남(在南)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 1964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억눌린 변혁적 사회운동을 잠재력을 가진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많이 포함되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이관학. 송승환등 5명이 사형이 선고되고 신영복교수등 무기징역 4명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은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김질락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가 중심이 된 조국해방전선을 두었으며 전라남북도, 부산. 경상북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기관지인 <청맥>을 발간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이념. 조직활동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른데 북한의 지령을 받은 단체로 보기도 하고 독자적인 혁명세력으로서 6.25 한국전쟁 이후 남한 내에서 전위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주체형 김일성주의 정당 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혁신 정치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남한 정치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였다
통일혁명당은 1971년 재건을 기도하였으나 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전위당 문헌 해설(한민전 구국전선 통일여명 편집국 자료)
통일혁명당 선언과 통일혁명당 강령(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 1969년 8월 서울)
http://ndfsk.dyndns.org/kuguk8/ku22/ic_030202.htm
-열린우리당 한명숙의원 남편인 박성준(현 상공회대 교수)씨는 지난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북한 노동당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통혁당) 산하조직인 경제복지회 주동자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통일혁명당 경북지역 조직원 권양섭
http://ugh.or.kr/ja/jangkisu1.html
1972 년 2월 경북지역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권양섭은 22년동안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1997년 3월 18일 사망
-1968년 2월 15일(조총련 자료)
남조선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고(故) 최영도씨를 추도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임 진행 그리고 남조선통일혁명당의 김종태를 비롯한 사형수(애국자)에 대한 사형을 반대하는 재일일본 조선인 중앙대회
-1969년 7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가칭 통일혁명당(통혁당) 간부 김종태에게 <영웅칭호> 수여
-1969년 11월 25일 통일혁명당 공판을 규탄하는 평양시 집회 개최
(1)통일혁명당사건 주요 인물
ㄱ.김종태(사형)--통일혁명당 위원장(당수) 및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1926년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냉천리(동) 출생
-통일혁명당 주도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등은 모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들이었으며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ㄱ)김종태의 북한정부 한민전(통일혁명당 후신) 자료
-통일 애국전위 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02_7_11/18.htm
-충신, 전위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45/15.htm
64년 3월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창당준비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조국해방전선> <민족해방전선>과 그 산하에 <60년 대학사회> <새문화연구회> <쳥년문학가협의회> <불교도 청년회> <동창회> <청맥회> <민족주의연구회> <학사주점>등 각종 합법, 비합법 대중단체들을 조직하여..
(ㄴ)검찰변천사(연도별 주요사건)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3.htm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서울에 무장공비 31명 침투(1.21사건)
1968년 8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12월 19일까지 <통일혁명당 사건> 피의자 31명 기소
북한은 이 사건의 수괴인 간첩 김종태등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장특공대 14명을 공작선편으로 침투시켰고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영웅칭호를 부여함
(ㄷ)김종태전기 기관차공장(평양시 서성구역)
김종태는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남조선혁명전략에 따라 남한내에 지하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전신)결성을 기도했던 인물이다
-1999년 4월 27일 북한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은 궐기모임을 열고 김정일 총비서에게 충성다짐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 종업원들은 2001년 12월 6일 일본경찰의 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 중앙본부 수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평양방송이 12월 7일 보도 했다
-2002년 3월 21일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반미궐기 집회 개최
-평양지하철(역별사진) http://wesleyc.com/kr/metro/map1.shtml
평양 DK4지하철 차량이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제작되었다고 주장 함
(ㄹ)평양방문기--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www.khistory.or.kr/connection/read.asp?num=7&page=1
가묘--1969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한 김종태와 체포과정에 사망한 최영도등..
(ㅁ)통일혁명당과 김종태 미화 신격화 소설책--애국시대(상.중.하)
주인공 김종태(장준호)와 통일혁명당이 남한지역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묘사
ㄴ.김질락(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민족해방전선 총책
ㄷ.이문규(리문규, 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조국해방전선 총책
ㄹ.최영도(검거과정 사망)---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2)통일혁명당 기관지(청맥) http://ndfsk.dyndns.org
(3)통일혁명당(1968년 8월 21일-12월 19일)과 관련된 무장간첩 사건
-김종태는 북한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 미화 7만달러,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 간첩이었다 허봉학은 통일혁명당 와해 책임과 베트남식 남한점령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거되었으며 지금까지 정치 사상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ㄱ.1968년 1월 21일--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31명 북한군 제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청와대 기습사건
ㄴ.1968년 10월 30일--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은 통일혁명당 수사와 검거, 체포과정에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쳤다
김영환씨 반성문
조유식씨 반성문 |
2.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북한이 1980년대 학원가의 친북투쟁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세력들을 포섭,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민족민주혁명당>을 구축하여 이른바 <남조선혁명운동>을 사주해온 전형적인 지하당 사건으로 북한은 남한내 주사파를 대남적화혁명의 전위대로 삼기 위해 학생운동권에 영향력과 조직적 기반을 갖고 있던 김영환을 포섭, 입북시킨 후 남한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지하혁명지도부를 구축토록 지령하였고 김영환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주사파 지하조직 <반제동맹=반미청년회>의 핵심세력들을 하부망으로 포섭, 노동당에 현지 입당시켜 <관악산>등의 암호명을 부여하고 북한의 공작금으로 전국적인 조직기반을 갖춘 <민족민주혁명당>(약칭:민혁당)을 결성 암약해 왔으며 북한은 총책인 김영환이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민족민주혁명당>을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주체사상이 투철한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 하영옥을 접촉한 후 그를 통한 <민족민주혁명당>을 재결속시켜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정보원은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관련 혐의 및 1997년 10월 검거한 최정남 부부 간첩 사건 연루의혹 관련 김영환을 내사해 오던 중 1998년 12월 18일 남해에서 북한으로 복귀하다가 격침된 반잠수정에서 김영환등의 전화번호가 암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 증거확보에 주력해 오던 차에 1997년 10월부터 중국에서 체류 중이던 김영환이 정부당국에 입국허용 탄원서를 제출한 후 7월 29일 김영환이 자진 귀국함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위기하에 4회에 걸쳐 심사를 실시 <1989년 7월 북한 직파 간첩에 포섭 되어 입북 귀환 후 북한 지령에 따라 지하당을 결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받아내고 자수자에 준한 선처방침을 검토하고 있던 중 8월 16일 김영환이 돌연 <말>지에 찾아가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거짓내용의 인터뷰를 하여 관련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잠적하였다가 8월 18일 18시 35분발 대한항공편을 이용 홍콩으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공황에서 긴급체포하고 관련자 조유식.하영옥. 심재춘. 김경환등을 차례로 연행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수사과정에 김영환과 조유식은 자수와 반성문으로 대한민국정부로 귀순하였다
-1997년 김영환씨가 베이징에 있을 때 울산 간첩 최정남이 붙잡혔다
그리고 최정남이는 김영환씨를 팔아 재야인사에 접근했다고 증언.
-1998년 12월 17일 남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 격침
북한의 반잠수정은 북한 공작원 배모씨와 하영옥씨를 밀입북시키려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2사단이 이 배를 발견하고 조명탄을 쏴 확인을 시도하자 아군 고속정이 접근할 수 없는 얕은 수로를 통해 북한으로 도주해 버렸다
북한은 이때 데려가지 못한 공작원을 월북시키고 한달 뒤 여수로 반잠수정을 침투시켰던 것이다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36세), 심재춘(29세)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44세)를 여수 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하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영환씨는 지난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돼 노동당에 입당한 후 1991년 입북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학 후배인 조유식(말지 기자출신)씨와 함께 반잠수함으로 월북한 후 운동방향등에 논의하고 귀환하여 주사파 운동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뒤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발표함(예: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1990년 한국민족민주전선)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경환씨(말지 기자)는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민민투>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3차에 걸쳐 위장취업하여 노동자 의식화 활동을 하다가 1994년 4월부터 월간 말지 기자로 재직 중인자로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침투하여 서울 강남에서 <삿떼리아>라는 말레이시아식 음식점을 운영하며 암약 중이던 간첩 진운방을 1989년 9월 중순 대학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후 김영환과 진운방간의 중간 연락책으로 암약하면서 1991년 8월 원주 치악산에서 김영환의 주재로 노동당 현지 입당식을 갖고 <관모봉>이라는 암호명을 부여 받았다
1998년 10월말 진운방이 원진우로 위장하여 재차 침투하자 남파 간첩 원진우를 하영옥과 접선하도록 주선하고 그후 원진우를 여러 차례 접촉하여 그간의 활동내용과 국내정세등을 보고한 혐의이다
-1999년 9월 14일 김영환(서울대 법대 공법과)씨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과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혐의등을 받고 있던 박모(35세) 변호사 자수의사 밝힌 뒤 공소보류..
-1999년 9월 17일
8월 범민족대회와 관련하여 방북을 시도한 민족통일 부산연합의장 이성우씨 민혁당 가입죄로 추가 기소
-국가정보원은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총책 혐의를 받은 최진수씨와 고등학생 사업담당 혐의의 박정훈씨등 4명의 긴급체포했다
-1999년 10월 7일
민족민주혁명당 연루자가 100명-2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함
서울지검 공안1부(정병욱 부장검사)는 7일 북한 전위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에 지난 1996년 4월 11일 총선 및 1995년 지방선거 출마자 5명을 포함해 20여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
검찰, 민혁당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서울지역 학생운동 사업부 소속, 고등학생사업부의 활동 가담자 20여명을 추가 확보 수사 중이라고 발표함
-한나라당 박진의원 자료
국군기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0년부터 지난2004년 8월까지 검거한 간첩은 2000년 1월 교수출신 간첩 한단석을 비롯해 2002년 5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경기남부 위원장 이석기씨와 2001년 9월 재중(在中) 조선족 간첩 모씨, 2004년 4월 재일(在日) 대남공작부 지도책 모씨등 모두 4명이라고 밝혔다
-Prochosun
http://prochosun.com.ne.kr/aaa/hwanginoh.html
<95년 위원회>를 이끌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최경호씨는 자신이 조직원 변의숙씨를 북한에 보낸 사실등 모두 시인하면서 <북한 노동당이 아닌 남한의 자생적인 운동조직 한민전의 지시를 따라..>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
양심수 홈페이지 http://www.yangsimsu.or.kr/freeboard_jaryosil_read.php?num=2
부산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는 울산지역 <희망의 젊은 연대>를 비롯해 12개 조직단체, <부산노동자회>등 7개 단체, 양산지역 1개 단체등 재야 합법, 반합법 조직에 조직원을 침투 및 외곽..
http://hrights.or.kr/tanwon.html
부산보안수사대는 영남위원회가 처음에는 한민전 영남위원회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조선노동당 영남위원회 또는 반제동맹 영남위원회로 번복
-한총련 제10기 의장이 소지한 한민전 문건과 강령
http://gs.kwpolice.go.kr/news/view.asp?num
(1)한국민족민주전선 등장 과정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ㄱ.반제청년동맹기관지--강철서신(김영환씨의 편지형식 글)
강철서신은 NLPDR이론과 북한 주체철학사전, 정치사전, 역사사전등에 수록된 NLPDR 반미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작하여 만든 소(小) 선전물이다
대표적 합법단체-----삼민투위와 자민투 등 내부 주사파계열 조직원
ㄴ.반미청년회 기관지---구국의 소리
구국의 소리는 김일성주의 표방과 한국전쟁은 북침에 의한 정의의전쟁으로 묘사 그리고 각종 NLPDR, 김일성 신격화 글 등 수록
대표적 합법단체---전대협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범민련,범청련,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자단체등) 내부 주사파 조직원
ㄷ.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새세대. 여명.아리랑. 백두산등
한민전이 90년 1월 창당하여 기관지를 <새세대>를 내걸고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를 중지하고 NLPDR 김일성노선보다는 주체사상 김정일 노선을 표방함으로 김정일 노동당 비서가 1990년 말경 인민군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민혁당이 창당되었다고 본다
민족민주혁명당이 통일혁명당 모델로 창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1985년 7월 27일 <통일혁명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고,일본에서는 통일혁명당이 1986년 8월 8일 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명했고,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경 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명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인가
ㄱ.통일혁명당도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두었다 민혁당이 한민전 조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김영환씨가 반제청년동맹 지하 기관지 강철서신 저작이다
강철서신 인적 자원 토대로 등장한 조직이 반미청년회와 한민전이다
1990년 1월에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민족민주혁명당(한민전)이 창립되었으며 반미전선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구축되었다 민혁당 지도부가 바로 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 지하그룹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남한 땅에서 반미투쟁과 김일성주의 투쟁 배후세력이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 강철서신(구국의 소리)이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조직이 남한 재야 반미세력 배후이며 그들의 전위당(민혁당)이 전국적으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NLPDR 지하당으로 구축되어 왔다
ㄴ.한국민족민주전선이 통일혁명당이라는 사실 입증 자료도 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을 1980년대 왔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 개명하였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각국 해외에 주체사상 조직이나 친북세력이 결집하여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편. 개명하였다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에 왔어 확대 개편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다 한민전 조직원들은 통일혁명당 소설책자 애국시대(1.2.3권)를 학습교재로 활용하여 민족민주혁명당을 통일혁명당으로 재건하려고 했다고 본다
(3)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구국전선(청맥)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통일혁명당이 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한민전 사이트 http://ndfsk.dyndns.org
(4)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2/np202bb050.html
(5)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6)남한지역의 한국민족민주전선 변천사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반제민족민주전선(2005년 1월)
북한 반잠수함(전남 여수): 김대중정부 때 북한 반잠수함이 남해 해안 침투하다가 격침되었다 북한 반잠수함 검거로 남한지역 민전조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해체되었고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여간첩이 전두환정부 때부터 결성해 온 남한지역 한민전이 제거되었고 이선실 여간첩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북한 대남 강경파 반미구국항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이 제거한 덕분으로 그 다음해 남북정상회담이 됐다
노태우정부때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자살투쟁도 한민전 배후 세력 조종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정부때 민전조직원 운반 수단으로 반잠수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해왔다(통일혁명당 해체와 남북회담 추진-이후락 평양방문)
참고 자료:
http://blog.daum.net/007nis/8585366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잠수함 검거에 공헌한 김영환씨
김영환(1962년 ~ )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로 주체사상에 대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강철서신'이라고 부르는 글이다.
그는 19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김일성을 면담한 후 그는 북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어 반북주의자, 북한 민주화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는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라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라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강철’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이 자신의 ‘전향’ 운동사를 여과없이 털어놨다.
김 편집위원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문건과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과 민족해방(NL) 노선을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시켰던 인물. 그러나 그는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이후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전향했다.
김 위원은 26일 오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NDI·이사장 박관용)이 주최한 초청강연에서 ‘10만 주사파의 대부’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굵직굵직한 인생의 전환점들을 돌아온 강철 김영환. 80년대 운동권에게 그는 신화같은 존재였다. 강철이란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김 위원은 자신이 대학가에 민족해방운동론을 처음 전파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서울대는 불과 2, 3달만에 (민족해방-NL계열이)학생운동을 장악했고 전국에 걸쳐 8~10개월만에 학생운동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를 잡기 위해 활동한 경찰이 400명 정도가 됐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 묘소를 지키는 것은 물론 막내 이모가 세를 내준 집을 새벽에 엄습하기도 했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후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코믹한 상황까지 연출됐다는 것.
김 위원은 안기부에 검거된 후 ‘47일간의 고문’을 떠올렸다. “1월 9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인데, 바로 내가 교도소에 들어간 날이다. 교도소에 가게 됐지만, 안기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북한과 연계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공안당국의 역할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의 고문은 오히려 혁명의지를 다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했다. 고문도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그를 꺾은 것은 투옥과 고문이 아니라 ‘북한의 현실’ 그 자체였다고 한다.
김 위원은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지하당인 민혁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91년 밀입북했다.
김 위원은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은 워낙 많이 알려져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며 방북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북한과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감행한 방북이 오히려 북한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진실의 문이 되고 말았던 것. 90년대 중반부터 김 위원은 ‘북한의 수령론은 사기극’이라는 글을 말지에 게재하고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공개 전향했다.
그는 북한이 ‘사이비 종교집단과 마피아 집단을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료들 중 핵심간부만 추려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북한은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재를 펼치고 있다. 인민을 굶어죽이고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가다. 인민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인민의 적이 된 북한정권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나는 남은 인생을 북한정권을 타도하는데 바치려고 한다.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나의 벗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김정일과 함께 나의 적이 될 것이다.”
김 위원은 “그 이후 나는 북한민주화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불렀던 노래와 구호들이 지금도 한국사회 곳곳에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는 사실에는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친북이나 정통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학생운동을 벗어난 사람들”이라며 “당시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이 사회전반에 뿌리깊게 배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사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나는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가로서 이 분야에 총력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한 방청객이 김 위원에게 “대다수 국민들이 친북좌경화가 잘못된 길임을 일찍 알았는데 김영환 씨는 왜 그렇게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느냐”며 비판하자, “그런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과거 운동권의 잔재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해나가야 할 부분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동서 양 진영으로 분단했던 이른바 '철의 장막'의 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전이 동서를 실제로 격리시킨 철조망을 처음 철거한 헝가리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양 진영간에는 철조망 등이 길게 쳐져 있었으나 20년 전인 6월 27일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 양국의 국경에 있었던 철조망을 절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동독 국민이 헝가리 등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그 해 11월에 '베를린의 장벽'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27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의회에서 열린 기념식전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럽의 정상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의 쾰러 대통령이 '당시의 헝가리 국민의 용기있는 행동과 동독 국민에 대한 지원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헝가리의 쇼욤 대통령은 '유럽의 분단을 종결지은 경사스런 날'이라고 말해 철조망을 철거한 것이 그후 일련의 동유럽 혁명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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