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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레닌주의 조선 공산당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마스-레닌주의 조선 공산당

CIA Bear 허관(許灌) 2010. 10. 10. 17:39

 

 "스탈린주의자(멘세비킨= 사회민주주의 그룹)  김일성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주의자(등소평주의자) 김두봉, 최창익등과 손을 잡고 레닌주의자 박헌영, 허가이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국가 수상(주석)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 노동당과 김일성은 히틀러의 노동자의 당 나찌즘이나 후세인의 아랍 사회당처럼 국가사회주의 노선 극렬 민족주의 NLPDR노선을 견지하여 국가사회주의 정부로 변모돼 왔습니다 "

  

조선 공산당(朝鮮共産黨, 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Кореи, 영어: Communist Party of Korea)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1928년일본의 탄압과 내부분열로 해산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8월 24일 최종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다가 1946년 11월 23일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 로동당의 전신이 되었다

 

1.조선 공산당 창당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진보적인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유학기간 동안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10월혁명에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인텔리겐챠, 민족주의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이어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고, 상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을 고려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회당'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25년 11월, 김재봉이 일제당국에 의해 구속되면서 해체와 재건을 거듭한다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그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조선문제로서는 공산당 지도 아래에 노동자 농민의 결합에 의하여 공동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그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데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들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된다. 조선에서의 혁명적 의의는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민족운동을 원조함은 물론, 전술로서 민족주의적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배우고 있다. 노동운동으로, 소작쟁의로 파고들어간다. 학교의 맹휴도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조직에서는 각 방면의 야체이카를 부식하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를 만든다.(조선공산당 창당 전문)"

 

(1)1차 공산당 창당 사건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년 1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었고, 곧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북조선 학계는 1925년 조선공산당의 실패를 논하며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이러한 파벌들의 각축전이 "형식적, 행세식 공산주의자들"이 뿌린 "종파주의의 해독" 때문에 조선공산당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력히 비판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실패는 이후 김일성이 "종파주의 척결"을 내세우며 조선로동당 내에서 분파들을 숙청하는 구실이 되었다.(스탈린주의 김일성의 종파주의 척결은 부하린주의 우파세력과 연합으로 좌파 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계열 숙청을 추진하여 마스-레닌주의자 조선 공산당 소련파를 제거하고 세금 없는 국가, 극렬 반미 민족주의 운동 국가사회주의 유일 주체사상을 내세워 우파성향 조선 신민당이나 인민당 출신을 제거하고 김일성 가계 중심 정당으로 집단농장과 군사패권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1대 : 김재봉(金在鳳) 1924년4월 17일 - 1925년 11월, 일제당국에 의해 구속(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조직부장 : 조동호

선전부장 : 김참

인사부장 : 김약수

노농부장 : 정해운

조사부장 : 주종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박헌영(朴憲永) 1924년 4월 18일 - 1925년 11월,

(임시) : 박헌영(朴憲永) 1925년 11월 - 1925년 12월

     

(2)2차 공산당 창당 사건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달영당'으로 부른다. '강달영당'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강달영당'은 민족주의 진영과 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추진하였다. 1926년 6ㆍ10 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일망타진당하면서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당은 강제해산당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2대 : 강달영 1925년 12월 - 1926년 2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권오설(權五卨) 1925년 12월 - 1926년 2월

3대 : 강달영 1926년 2월 -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가담, 실패로 해산(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중앙간부 : 이준태(李準泰)

중앙간부 : 김철수

중앙간부 : 홍남표

중앙간부 : 이봉수(李鳳洙)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권오설(權五卨) 1926년 2월 - 1926년

 

(3)3차 공산당 창당 사건(ML당 사건)

12월 정우회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를 ML(M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ㆍ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ㆍ하필원ㆍ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당하였다. 이것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4대 : 김철수 1926년 9월~

5대 : 안광천

6대 : 김준연

7대 : 김세연 ~ 1928년 8월, 일제에 의해 검거,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양명(梁明)->하필원->김철(金哲)

 

(4)정우회 선언(正友會宣言)

1926년 11월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의 간부인 안광천(安光泉), 하필원(河弼源) 등이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곧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형태를 정치투쟁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며 노선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을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협동을 추진하자는 내부의 의견을 결집시켰다

 

(5)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

1927년 12월 정통파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이영(李英) 1927년 12월 ~ 1928년 6월

 

(6)4차 공산당 창당 사건

1927년 5월 근우회가 발족되었고, 1928년 1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다. 7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7명이 구속되었고, 9월에는 간도 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8대 : 차금봉(車今奉, 노동자 출신 최초의 당수), 1928년 3월 ~ 1928년 7월, 7월 일제에 의해 170명 차금봉·김재명 등 고문치사, 170명의 구속·검거로 사실상 조직이 와해됨,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고광수(高光洙)

 

(7)5차 공산당 창당 사건

1929년 2월에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탄압에 맞서 총파업을 벌였다. 그해 6월 제5차 공산당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때 안광천 등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여학생 만세시위 사건으로 근우회의 사회주의 계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8)12월 테제 이후

박헌영 1927년 12월 10일 ~ 1945년 8월 14일 :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 임시 해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의 지도자

 

(9)장안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 이영 1945년 8월 15일 ~ 1945년 8월 24일

제2비서 : 리승엽 1945년 8월 15일 ~ 1945년 8월 24일

서기 : 하월원

 

(10)재건파 조선공산당

박헌영 : 1945년 8월 16일 ~ 1946년 11월 23일

 당수 겸 총비서: 박헌영

정치국: 박헌영 · 김일성 · 이주하 · 김무정 · 강진 · 최창익 · 리승엽 · 권오직

조직국: 박헌영 · 이현상 · 김삼룡 · 김형선

서기국: 이주하 · 허성택 · 김태준 · 이구훈 · 이순금 · 강문석

중앙위원: 박창빈 · 최용건 · 홍남표 · 이주상 · 서중석 · 이인동 · 조복례 · 박광희 · 김점권 · 김용범 · 홍덕유 · 주자복 · 문갑송 · 김근 · 오기섭

 

2.8.15 광복이후

조선 공산당은 이후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박헌영등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군정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의 "1국 1당원칙"에 의거해 조선공산당을 승인하고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945년 12월 17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3.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

조선공산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1945년말 임정 요인들의 귀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4.노동당과 한국전쟁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갑자기 찬탁으로 바뀐 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조선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극단적인 폭력투쟁노선과 더불어 인민들에게 외면받는 원인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은 김일성의 빨치산파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빨치산파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자 남조선에서도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 로동당이 세워졌다.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은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합쳐졌으나 실권은 소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파에 남아 있었다. 박헌영을 지도자로 한 옛 남로당 인사들은 로동당 내에서 남로당파를 형성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모두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레닌주의 박헌영과 스탈린주의자 김일성 모습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

 러시아혁명의 주역을 맡은 볼세비킨(볼쉐비끼)는 1918년 제7차 당대회에서 그의 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공산당으로 바꾸워고 네프(신경제정책)을 채택할 무렵에는 60만이 넘는 당원을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지도적인 당원은 다음의 셋 그룹으로 나눠져 레닌이 그것을 통괄하고 있었다
첫째그룹은 트로쯔키(뜨로쯔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좌파로서 이들은 세계혁명이 없이는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공산당은 국외의 혁명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채용을 반대했다 지노비예프나 까메네프등도 기본적으로 트르쯔키 정책을 지지하였다
"네프(NEP, 신경제정책)은 소련이 1921년부터 레닌과 스탈린이 실시한 경제정책이다 1921년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한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롤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 경영이 합법화 되었다 1925-19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때에도 대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터지등 관제고시(관제고시)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 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경제정책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등이 지지했으며 좌파세력인 트로쯔키등은 반대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도 강제적 농업집단화. 국유화정책등의 극단적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둘번째 그룹은 부하린에 의하여 지도되는 우파이다
이들 역시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당면한 세계혁명의 시기가 없는 이상 현실과 타협하면서 네프(신경제정책)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하린노선이 우파민족주의 경제이론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케이즌경제학 입장에서 자국 경제발전이 없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외세종속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입장이어야 국내 경제가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자국경제규모로도 잘 살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공황을 예방할 수 있다
부하린과 스탈린은 이런 입장에서 좌파그룹 트로쯔키 계열의 공산주의 경제이론 집단농장과 무산몰수, 무산분배정책을 견제하고 제거하는데 공동 노력했다

셋째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의 지지자이다
이들은 원대한 소련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에 가령 세계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건설 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지지했다 세계 무산혁명과 강제적 농업집단농장 그리고 국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네프(신경제정책)을 반대한 좌파 트로쯔키노선과 상반된 우파 노선이었다

스탈린은 1924년말 "10월혁명과 러시아공산당의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트로쯔키에 반론하는 형태로서 이 견해를 처음으로 밝혔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를 내놓기도 하였다
레닌은 1921년말부터 중병에 걸려 공직생활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듬해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지노비예프, 까메네프와 더불어 삼두정치를 꿈꾸며 트로쯔키에 대신하여 레닌의 후계자의 지위를 노리게 시작하였다
레닌은 처(妻)에게 구술하여 기록케 한 유서에서 스탈린은 너무나 거칠고 난폭해서 서기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당원은 그를 지위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 보다도 관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정중하고 동지에 대하여 배려가 두터운 다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제안한다고 하였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했으나 그 유서는 당시의 중앙위원에게만 알린채 끝내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보고서에서였다

"스탈린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과 손을 잡고 트로쯔키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때 그는 서기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결국 트로쯔키는 1929년에는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스탈린과 삼두정체를 꾸몄던 좌파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도 우파의 부하린과 더불어 1936년에 숙청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곡물조달의 위기를 맞아 부하린. 즈이꼬프. 또스끼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면적 농업집단화 즉 위로부터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와병행하여 제1차 제2차 5개년게획(1928년, 1937년)도 추진하였고 대숙청의 선풍이 가장 격하게 휘몰아쳤던 1936년말에는 1924년의 헌법에 대신하여 이른바 스탈린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제는 농업의 집단화와 공업화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스탈린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으로써 소련의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스탈린헌법의 제정에 이어서 1938년에는 스탈린노선의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연방공산당소사(蘇聯邦共産黨小史)가 펀찬 발행되었고 그 속의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직접 집필하였다


독일과 전쟁 전후(1941년 5월)에는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 의장(수상) 이어 국가방위회의 의장, 국방인민위원등을 맡아 전쟁을 지도하였다
그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함께 테헤란(1943년). 알타회담(1945년). 포츠담(1945년)등지에서 회동하여 전쟁수행 및 전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전후에 발표된 논문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는 언어의 본질을 논하고 그의 계급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저작인 "소연방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기본적 경제법칙을 논한 것이다

 

 

*소련 군부와 북로당 그리고 소련군 대대장 출신 김일성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1.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1)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3)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4)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5)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2.연안파---중국 공산당(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1)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2)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3)김무정(무정)----함북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4)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의용대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남침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3.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1)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2)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4.조선공산당-----북조선 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