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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특집] 늙은 참전용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본문

한중 육로개척자 -延邊 藥山 진달래

[한국전쟁 특집] 늙은 참전용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CIA bear 허관(許灌) 2009. 6. 25. 08:11

오늘 25일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종종 잊혀진 전쟁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은 한국의 번영과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 때문에 한국전쟁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전쟁 59주년 특집으로, 당시 해병대 장교로 참전했던 에드워드 보체르트 전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건립재단 회장과 황치만 한미자유수호연합 수석부회장의 회고를 통해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돌아 보겠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지난 4월 말 제 6회 북한자유주간 개막식이 열렸던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앞.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 2 명이 탈북자 대표단을 포옹하며 반갑게 맞이 합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설립재단 회장을 지낸 에드워드 보체르트 씨와 미국 서부 시애틀에 거주하는 황치만 한미자유수호연합 수석부회장. 80살 가까운 이 두 노병이 탈북자들을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한 배경에는 ‘자유’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체르트 씨의 말을 들어봅니다.

“탈북자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하지 않았습니까? 탈북자들은 자유를 위해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저들 뒤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면 아직 우리의 임무가 남아있는 듯 합니다. 미국은 일본과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인들의 자유를 지켰습니다. 우리와 탈북자들이 다르지 않은 것이죠.”

평안북도 다사도 출신으로 10대 후반에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한 황치만 부회장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저도 북한에서 왔지만 저 분들이야 말로 참 행복한 사람들이 된 거죠. 아주 비참한 생활에서 탈출했으니까요. 저 분들 얼굴에 눈이 막 눈이 빛나고 있어요”

황 부회장은 북한이 남한을 무력 침공한 1950년 6월 25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그 날 말이죠. 그 날이 일요일 아닙니까?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후쯤 됐어요. 학생들이 모여 배구를 했는데, 갑자기 집사님이 달려와서 지금 인민군이 쳐들어 왔다, 이런 얘기를 해줘요. 그래서 피난을 빨리 가던가 해야 된다고요.”

당시 인천에 살며 고등학교에 다니던 황 부회장은 가족과 밤낮을 걸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사흘 후에 서울이 점령되니까 인천에서 철길을 건너 수원으로 가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걸어서요. 철길이 강을 건널 때는 침목 밑으로 강이 흐르잖아요. 침목을 돌다리 마냥 건너뛰면서 가야 되는데 그 때는 침목이 어린 학생에게 굉장히 넓더라고요. 밤인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요. 캄캄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더듬어서 하여튼 건너갔어요. 거기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해요.”

대구까지 내려갔을 때 이 어린 학생은 친구들과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피난만 갈 게 아니다. 바다에 빠져 죽기 보다는 싸워서 죽자, 이런 결의를 한 거예요. 학생들이 모여서. 그래서 같이 입대를 했습니다.”

황 부회장은 부산의 통신학교를 거쳐 1952년부터 육군본부에서 항공연락병, 즉 전령으로 복무했습니다. 주요 지역에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는 황 부회장. 지금도 낯선 땅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실려가던 미군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처참하게 보였던 것은 미군 트럭에 부상 당한 병사들이 실리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농촌에서 한국인들이 사용하던 이불을 덮고 나오더군요. 6.25 때 굉장히 추웠습니다. 이불을 그냥 뒤집어쓰고 나오는 모습인데……저 사람들이 자기 나라도 아닌데 말이야. 와서 저렇게 죽어 나가는구나. 이 것이 참 눈물 나고 그러더라고요.” 

보체르트 전 회장은 1953년 휴전 무렵 미 해병대 중위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 DMZ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휴전 후에도 매일 밤마다 교전을 치렀습니다. 적어도 250명 이상의 미군이 휴전 후에 전사했습니다. 북쪽은2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1만 7천여 개 화기를 동원해 우리 부대를 공격하곤 했죠. 우리는 그래서 그 전투를 ‘DMZ 전쟁’ 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전우들이 곁에서 숨져가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 본 보체르트 중위.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이 매우 가치 있는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전쟁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사회가 처음으로 힘을 합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움직인 첫 시도였죠. 우리는 그래서 한국전쟁을 공산주의 종식의 첫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위대한 민주주의의 태동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니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미국에서 한때 잊혀진 전쟁으로 불렸습니다. 1,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에 묻혀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체르트 씨와 동료 참전용사들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한국전쟁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80년대 초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건립 재단을 설립하고 전국적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재단의 회장을 맡고 의회에 청원서도 직접 썼습니다. 한국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죠. 건립 비용도 직접 모금하겠다고 했습니다. 1천 8백만 달러에 달하는 건립 비용은 모두 정부가 아닌 우리가 순수하게 모금한 것입니다. ”

미국 의회는 마침내 1986년 10월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건립안을 승인했고 6년 뒤인 1992년, 워싱턴을 찾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다는 링컨기념관 옆 부지에서 착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휴전 선포 42주년 기념일인 1995년 7월 27일,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영삼 한국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완공식을 가졌습니다. 

고지를 향해 진격하는19명 미군의 모습을 형상화 한 조형물 사이에서 탈북자들에게 열심히 추모비에 대해 설명하는 보체르트 전 회장. 지난 해 추모비를 방문한 관광객이 4백만 명이 넘는다며 한국전쟁은 이제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한국전쟁 59년, 하지만 참전 노병인 황치만 한미자유수호협회 수석부회장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한번 밟아볼 수 있을까. 고향 어렸을 때 놀던 곳. 북한에는 산에 진달래가 참 많습니다. 산에 올라가 진달래 꽃을 꺾기도 하고, 그 때 같이 놀던 친구들…가 보고 싶고 그러죠.”
http://www.voanews.com/korean/2009-06-24-voa15.c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