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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금속공학자인 압둘 카디르 칸은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본문

핵.잠수함.미사일.전자 지능 뇌 자료

파키스탄의 금속공학자인 압둘 카디르 칸은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CIA bear 허관(許灌) 2009. 2. 8. 10:51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1935~ )

파키스탄의 금속공학자인 압둘 카디르 칸은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아온 인물.


1935년 인도 보팔에서 태어났으나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문제로 분리되자 무슬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카라치 대학을 졸업한 후 서독과 벨기에에서 유학했으며 1972년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물리동력학연구소(FDO)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FDO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폭탄과 같은 수준의 농축우라늄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던,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이 공동 설립한 우라늄농축합동연구소(URENCO)와 정보교류가 활발했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원심분리기 제조기술을 독일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기술을 획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칸은 1976년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갑자기 파키스탄으로 귀국해 핵연구소 소장이 됐다.

네덜란드 당국은 그가 핵무기 제조기술을 훔쳐갔다고 판단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983년 1월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4년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법적 절차상의 이유로 번복됐다.


그는 1976년 귀국 이후 '칸 연구소'를 설립해 파키스탄의 국가적 과제인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인도와의 마찰로 핵무기가 절실했던 파키스탄은 칸 연구소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1998년 5월 28일 사막에서 공개적인 핵폭발 실험에도 성공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미국 등은 그에 대해 지속적인 감시를 폈으며, 이같은 압력으로 칸은 2001년 칸 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들은 칸박사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고 2003년 11월 미국 등은 파키스탄 정부에 칸박사가 리비아, 이란, 북한 등에 핵기술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부로서도 조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칸 박사 일행이 1989년 이후 북한, 리비아, 이란 등 3개국 등에 우라늄 농축 기술과 원심분리기 도면, 부품 등을 제공한 것을 밝혀냈다.

칸 박사도 2004년 2월 지난 15년간 북한, 리비아, 이란 등에 핵기술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 과정에 국가 차원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으나 파키스탄 정부는 칸박사의 밀거래와 관련하여 그를 사면하고 대신 가택연금했다.


 

이른바 '핵 암시장'의 중심인물로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자택연금 상태였던 칸 박사에 대해, 파키스탄 재판소가 어제 연금 해제를 정부에 명령해 정부도 결정을 받아들일 생각을 나타냈습니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2004년에 이란과 북한 등에 핵개발 기술을 누출한 이른바 '핵 암시장'에 중심적으로 관여했음이 발각돼 당시 무샤라프 정권에 의해 자택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누출에는 정부 관계자가 관여했다는 의혹도 제기돼 무샤라프 정권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칸 박사를 연금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칸 박사는 이슬라마바드의 자택에서 '자유를 가져오는 훌륭한 결정'이라고 말했으나 핵의 암시장에 대해서는 '과거에 발생한 일은 말하지 않겠다'며 언급을 피했습니다.

핵 암시장과 관련해서는 진상을 규명하려는 국제원자력기구와 미국정부가 칸 박사에 대한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있어, 앞으로 칸 박사가 면담에 응할지가 주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