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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과 국민자유당 의원 출신으로 독일제국 초대 국무총리 비스마르크의 "철(鐵)과 피(血)" 연설문 본문

중부 유럽 지역/독일[獨逸,德意志國=德國]

게르만 민족과 국민자유당 의원 출신으로 독일제국 초대 국무총리 비스마르크의 "철(鐵)과 피(血)" 연설문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14. 12:46

독일정부 사이트 http://www.deutschland.de
독일연방정부 수상(Federal Chancellor) http://www.bundeskanzler.de
독일연방정부 입구(안내)(The Federal Government) http://www.bundesregierung.de

1.게르만 민족
(1)게르만족
아리안족(Aryan族)에 딸리는 백색인종
게르만족은 독일(98%)과 오스트리아(98%) 민족 그리고 폴란드(1.3%), 덴마크(덴마크 독일인)등 지역에 분포하는 민족이다

(2)인도 게르만족(인도 유럽제족)과 게르만어파
ㄱ.인도 게르만족
인도게르만족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인도.이란.슬라브. 그리스 민족과 기타 유럽 여러 민족을 포함한다 지리적으로 동으로는 인도에서 서로는 유럽 서쪽 끝까지 걸쳐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확장되어 남북아메리카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그 밖의 지역에도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인종은 기본적으로 코카서스인종(백색인종)이다
인도유럽어족의 언어학적 연구에 위하여 이 어족이 공통의 조어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조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과거에는 동유럽 남부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긴 역사를 거치며 각지로 분산 이동하여 현재의 인도유럽제족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에 대해서는 자료가 적어 추정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대략 BC 2000년 이후 그들이 그리스와 인도로 진출한 뒤의 것이며 그 시점에 이미 문화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나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여러 민족의 문화적 단일성을 아주 초기단계에서부터 의심하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대단히 다종다양한 문화. 사회를 가진 여러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어 이들의 특징이었던 공통된 문화적. 사회적 요소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여기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여러 민족이 언어학적으로 논증된 인도 유럽어족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문화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언어를 바탕으로 분류한 점이다 그 때문에 인도유럽조어의 사용자를 특정문화(민족)나 신체적 특징(인종)과 결부시키는 경우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ㄱ)말의 공통성
인도유럽제족의 초기 단계 문화와 사회를 복원하는 시도가 몇 가지 이루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인도.유럽의 공통기어(共通基語)를 실마리로 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소.말.양. 개등 가축에서 공통기어를 상정할 수 있으므로 공통기어시대에 이미 그 가축들이 사육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몇가지의 곡류나 농기구의 명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농경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속에 대하여는 철의 공통기어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아직 완전한 금속기 시대에 들어가지 않았던 듯하다 사회는 부계적(父系的) 혈연사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ㄴ)신화의 공통성--인도.게르만. 로마등의 신화 비슷함
최근 프랑스의 G.뒤메질등에 의해 인도유럽제족 신화의 비교분석이 실시되어 이것들이 공통구조를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인도. 게르만. 로마등 인도유럽제족의 신화는 신들을 (a) 제사(祭祀)와 주권(제1기능) (b)전투(제2기능) (c)생산(제3기능)등에 관련된 2종류의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인도 유럽제족의 신화가 같은 구조를 갖는 것은 그들이 공통의 조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 이처럼 신들을 3종류로 나누고 각각을 특정한 사회적 기능에 결부시킨 것은 그들의 사회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인도 유럽제족이 아직 원주지(原住地)에 살고 있던 무렵 그들은 인간을 그 사회적 기능에 따라 (a)제사(祭司)=주권자 (b)전사(戰士)=지배자 (c)생산자=서민이라는 3종류의 신분으로 분류했으며 이 분류를 신계(神界)에도 적용했다고 여겨진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바로 이러한 사회관의 표출이며 사람들을 제사(브라만). 전사(크샤트리아). 서민(바이샤)으로 나누었다 또한 제4계급 수드라는 천민이라 하여 아라아인 사회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신계에서는 악마에 대응된다 또 조로아스터교의 성전(聖典) <아베스타>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3종류로 나누는 분류가 보이는데 이는 적어도 인도. 이란어파의 조상은 3종류의 신분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ㄴ.게르만어파(Germanic language family)
인도 게르만어족 중의 한 파이다
게르만족이 말하는 여러 방언을 포괄하는 어파로 현재는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및 북유럽의 여러 말이 이에 속한다
게르만 민족은 BC10세기경 발트해 연안 일대에 살았으며 공통 게르만어(게르만 祖語)를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인도 게르만 조어(祖語)로부터 분화하여 게르만 여러 방언의 직접적인 바탕이 언어이다 이 언어에 대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으며 재건 방법에 의해 추정이 가능할 뿐이지만 룬 비문(碑文)이나 고트어를 통래서 옛 인도 게르만조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게르만어파를 인도게르만어족의 다른 어파로부터 구별 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은 "그림(J.K.Grimm)의 법칙"으로 알려진 폐쇄자음(閉鎖子音)계열에 일어난 음운추이(音韻推移)와 악센트의 어간(語幹) 제1음절 고정화이다 BC 5세기경 게르만민족은 유럽의 북부. 서부로 거주지역을 확대하였으며 이에 수반하여 게르만조어에 방언분열이 생겼다 분류방법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AD 3세기경에는 이미 크게 동.북. 서의 3개 방언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ㄱ)동(東) 게르만어
이 방언은 이것을 사용한 민족이 중세 초기에 소멸하였기 때문에 사멸되고 말았다 고트어만이 4세기에 불필라가 번역한 <신약성서>에 그 일부가 남아 있어 옛 게르만어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ㄴ)북(北) 게르만어
3세기부터 룬 비문을 남기고 있는 옛 노르드어가 가장 오래된 층이며 이것이 동서로 갈라지고 전자가 다시 분화하여 현재의 덴마크어와 스웨덴어가 되었다 후자는 아이슬란드어와 노르웨어로 분화 하였다
(ㄷ)서(西) 게르만어
이 방언을 말하는 민족은 대략 현재의 독일지방에 정주하고 있었는데 일부는 5-6세기에 브리튼섬으로 진출하고 그 언어는 현재의 영어의 기초가 되었다 프리슬란트등지에서 말하는 프리지아어도 이에 속한다
독일지방의 방언은 6-7세기에 발생한 자음추이의 영향을 받은 고지(高地) 독일어와 영향을 받지 않은 저지(低地) 독일어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다시 많은 방언으로 갈라지지만 전자로부터 현재의 표준독일어가 태어나고 후자 중의 한 방언이 네덜란드어가 되었다
아프리카 보어인(人)의 언어도 저지 독일어계이다
대체로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민족이 게르만 혈통계이다
ㄷ.독일민족과 언어--독일어(독일국가에서 사용하는 게르만민족 언어)
독일인은 대부분이 게르만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게르만 민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다 민족대이동 후에 북부에는 작센인과 프리인, 서부에는 프랑켄인, 동부에는 튀링겐인, 남부에는 바이에른인, 서남부에는 말라만인과 슈바벤인등이 정주하였다 정주한 여러 부족의 차이는 오늘날 방언의 차이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부의 저지(低地) 독일어, 중부 독일어, 남부의 고지(高地) 독일어의 3가지로 크게 나뉘며 그 각각에 다시 세분화된 방언이 분속(分屬)되어 있다
표준문장어의 발전은 16세기 초 M.루터가 중부 독일어계인 작센어로 성서를 번역한 것이 기초가 되었으며 J.W 괴테, J.C.F 실러등의 문학활동과 J. 그림의 독일문법체게화에 의하여 완성되어있다

2.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Furst Von Bismarck 1815.4.1-1898.7.30) 생애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부라덴불그(쇤하우젠) 출신으로 1815년 4월 1일 융커(지방 지주귀족) 아버지와 프로이센 시(市) 공무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비스마르크는 학교에서 뛰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그는 당시의 자유주의 운동 저항적인 낭만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잠깐 동안은 급진적인 브르센샤프트 운동에 참가 하였고 열정적인 생활을 하였고 술과 결투에 빠졌었다
그리고 그는 학교 수업(학업)을 경멸하는 데 반해 그는 역사와 독일 고전을 방대하게 읽었다
그는 베를린대학. 괴팅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프로이센의 관리(1836년-1839년 프로이센 관직생활)가 되었으나 그는 관료직의 권태로움과 기강에 분개했고 얼마 안 되어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지(領地) 경영에 전념하면서 여전히 지루한 그는 방종한 생활에 빠져서 <미친 비스마르크>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는 고향에서 경건주의자 Puttkamer와 결혼하고 그녀의 영향으로 진짜 경건주의 종교적인 회심(恢心)을 경험한 것 같아 보였다 그 자신이 신의 도구라는 믿음 때문에 그는 새로운 자신감과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의 인생의 국면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1847년 연합 주(州) 의회 의원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보수정치가로서 독일의 통일과 정치개혁등 자유주의자의 요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848년 베를린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자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혁명 뒤 18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표(1851년-1859년 프로이센 대표 역임기간)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1851년 프랑크푸르트 독일연방 대표자 회의장 안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침묵의 흐름을 깨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36세의 프로이센 외교관이 담배를 꺼내들었다 회의장에서는 관례상 독일연방회의장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담배를 필 수 있었다 프로이센 대표자로 처음 회의에 참석한 사내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사내가 바로 비스마르크이며, 도전적인 일면을 신화화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의 정계 입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포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통일을 결심하게 된다
1848년 전후에는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1859년 주(駐)러시아대사, 1862년 주(駐)프랑스 대사를 역임 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1862년 9월 국왕 빌헬름 1세가 군제개혁을 둘러싸고 의회와 갈등을 빚을 무렵 빌헬름 1세는 문제해결을 위해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鐵血政策<철혈정책>"이라는 강경책으로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증강을 실시하였다 그는 유산시민(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진보당이 급진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으나 다시 혁명을 일으킬 생각이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덴마크전쟁(1864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1866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년-1871년)과 같은 일련의 전승 실적으로 국내 반대파의 비난의 목소리를 멎게 했다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1871년 그는 독일제국을 건설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시민계급의 오랜 숙원이었던 독일통일을 완성 하였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독일 산업혁명의 완성과도 일치하였다
그는 일관된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영업의 자유와 보호관세의 폐지를 추진하였으며 철도. 은행.우편등 국민경제 발전에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독일의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가 반혁명적인 정치적 목적을 갖고 독일통일을 했을지라도 옛 지배층의 대표가 신흥 시민계급의 요구를 일부 앞서 실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사정으로 독일제국의 정치구조는 강력한 왕권과 보통선거에 바탕을 둔 제국의회가 공존하였고 군주대권과 인민주권, 연방주의와 중앙집권과 같은 상반된 원칙이 팽팽하게 맞서있는 극히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모든 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헌법상 황제가 임명하는 대신(대신)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쥔 독재자였다
1870년대 중반까지 그는 제국의회의 다수파인 국민자유당을 여당으로 삼아 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그 뒤 경제불황이 심각해지자 융커(지주귀족)과 중공업자본가가 보호관세를 요구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의 사회민주당의 급성장은 지배층 사이에 불안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의 탄압에 나서는 한편 이듬해에는 철과 곡물을 중심으로 보호관세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의 국내정책 전반이 보수주의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그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외교분야였다
독일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는 프랑스를 고립시켜 유럽의 현상를 유지하려고 한 그는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동맹, 1886년 러시아와의 이중보장조약, 1886년 영국도 참가한 지중해협정등의 체결을 통하여 유럽외교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빌헬름 1세 황제가 90세의 노령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였으나 3개월여만에 사망하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빌헬림 2세가 즉위하였다
강렬한 개성을 지닌 새 황제와 비스마르크 사이에는 정책결정에서 격심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1880년 말 루르의 탄광파업 그리고 황제는 비스마르크 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폐기하고 그해 3년 만기가 된 독.러재보장조약(독일.러시아재보장조약)의 갱신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와 대립 1890년 3월 18일에 의원면직을 권고 받아 이를 거부했지만 결국 칙령으로 사직당하여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그 배경에는 국력이 튼실해진 독일이 비스마르크의 현상유지정책에서 탈피하여 세계정책에 나서려는 새로운 기운이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이후 프로이센의 지주귀족층인 융커를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 전통은 빌헬름 2세시대에 더 강화되어 그의 제국주의적 세계정책과 그에 따른 군비확장정책은 융커적 토지귀족, 독점자본가, 군부들에 환영을 받았고 지배계급 상호간의 모순과 대립을 완화시켰으며 이러한 국가지상주의 사상은 헤겔이나 트라이츠케와 같은 인물에 의해 사상적으로 합리화 되었다
결국 빌헬름 2세의 정책으로 독일인의 사고는 권위주의적이 되어 군부의 독단과 자유주의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진정한 자유주의 정책의 파괴를 가져왔고 국가사회주의 등장으로 1차대전의 전쟁 이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황제의 내외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여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1898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회상록(Gedanken und Erinnerungen)"(3권, 1898-1919)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독일) 출신 게르만이었다면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 게르만이었다

(1)비스마르크의 "독일 수호신(Shhutgeist)" 숭배--브라우어(Brauer)의 시
당신은 지금 지친 몸으로
누워 있을 수 있습니까?
와서 우리를 인도하소서
한 번 더 오소서, 독일의 독수리여!
당신의 작품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비웃어주소서, 당신은 죽어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을 비웃어주소서
비스마르크여, 오소서!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소서, 우리에게 작품들을 하나 더 만들어주소서
그 작품을 우리를 양지로 이끌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들을 축복해주소서
우리에게 당신의 정신을 주소서
우리의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를 당신의 그림자 안으로 이끌어주소서
비스마르크여, 오소서! 우리가 기다립니다
http://blog.daum.net/jsha2327/1270374
(2)독일의 비스마르크 헌법과 비스마르크의 의료보험정책
ㄱ.비스마르크 헌법
보불전쟁(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결과 프로이센이 승리하여 1871년 독일이 통일되어 제정한 헌법인데 1918년 혁명으로 폐기되었다 이 헌법에 의하면 독일제국은 연방제국가이며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인정되고 있었다
각 지방(Land)은 대부분이 군주제였으며 연방. 지방 모두 군주주의 색채가 농후하여 의회는 권한이 약하였으며 선거권도 제한된 외견상 입헌주의를 채택하는 헌법이었다
전문과 14장 78조로 구성되었으며 기본권에 관한 장은 두지 아니하고 제13조에서 입법사항과 관련하여 기본권 보장을 포괄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각주(各州)의 헌법이 이미 기본권 보장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둔 결과이다
-실용적 헌법(實用的 憲法)
이념적 헌법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이는 국가의 이념이 달성된 후에 주로 국가권력 구조면에서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한 헌법으로서 이념적으로 중립이거나 또는 순수하게 실용적일 것을 의도하고 있다 1871년의 비스마르크 헌법, 1875년 프랑스 제3공화국 헌법이 이에 속한다
ㄴ.비스마르크의 의료보험정책
의료보험방식(National Health Insurance)은 <의료비에 대한 국민의 자기 책임의식>을 견지하되 이를 사회화하여 정부기관이 아닌 보험자가 보험료로써 재원을 마련하여 의료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정부는 후견적 지원과 감독을 행하게 되며 비스마르크 방식이라고도 한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창시한 이래 독일.프랑스.일본. 한국등이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

3.비스마르크의 "철과 피"의 연설문
-도이취의 정치가로 도이취 제국 초대 제상 부라덴불그 출신으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1871년 도이취의 통일을 달성하고 유럽외교의 주도권을 잡았다 철혈재상으로 도이취 제국에 공로가 큰 분이다-

저는 국무총리로서 1862년도의 예산안에 대하여 즐거히 언급 하겠습니다만 오해를 살 설명만은 하지 않겠습니다
헌법상의 권리의 그릇된 응용은 어느 방법으로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응용을 하면 다른 방법으로 부터 반응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법으로 밝혀져 있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온당치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산의 수정도 얼마든지 배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척하는데 있어서 제한을 부치기가 곤란하여 6백만인지 또는 1천 6백만인지? 국민 자유당의 당원 중에는 그 요구가 정당하기로 매우 이름이 높은 정당입니다만 지극히 존경을 받아야 할 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상비군을 무용한 것이라 말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만일 국회가 이 같은 주장을 통괴시킨다면 이를 정부는 배척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페르샤 국민은 건실하다고 연설하였으나 개인이 크게 독립하는 것은 페르샤에 있어서 입헌정치를 행하고 입헌의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에 있어서는 우리와 매우 달라서 개인의 독립이 없습니다 헌법상의 난국은 조금도 치욕이 아니요 오히려 명예스러운 것입니다
페르샤 사람들은 헌법을 지켜 나가는데 있어서 교육이 지나친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지나치게 비평하기를 좋아합니다 국회의 수완 처분 거동을 비판하는 일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지방에는 모반자(謀叛者)와 같은 분자들이 많이 있어서 혁명운동에 크게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혹 모순된 것 같아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페르샤의 입헌제의 정치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모든 것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일반 국민은 정부 과오를 관찰하는데 너무 신경과민입니다 아무 행정관이 과오를 범하였다고 선전만 하면 일이 된다고 생각 끝에 각자가 서로 손실을 입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론은 자꾸 변화합니다 신문의 논설은 여론이 아닙니다 신문의 논설은 과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국회의원 여러분(議員諸氏)
여론보다도 의연(毅然)히 그 위에 서서 소리를 갖출수록 더욱 더 무서운 임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국민에게 대해서 말씀드리면 우리는 너무나 피가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빼빼여윈 육체에 너무나 큰 군비라는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군비를 이용하지 안으면 안될 처지로써 페르샤의 자유주의 같은 것에 조금이라도 기울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바비리아라든지 바덴은 자기 주(州)에 얼마든지 사로잡혀도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의 한 사람도 그들에게 페르샤의 임무를 짐 지우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페르샤는 좋은 시기를 이미 오늘까지 세번이나 놓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비엔나 조약을 체결한 이래로 페르샤 양(兩) 국경 건전한 국가생활을 위해서 연설이나 다수결의로써 시대적인 큰 문제를 해결될 수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은 1848년, 1849년에 있어서의 큰 과오였던 것입니다 즉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것은 철(鐵, 무기)과 피(血, 민족-게르만 민족)밖에 없습니다
전년도의 협찬(協贊-협조와 찬성,찬동하여 도움)은 성립되었습니다만 어떤 이유서냐고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성심 성의로써 타협할 일을 찾고 있습니다만 내가 이 절을 찾느냐 못하느냐는 국무총리인 나 혼자만으로는 결정짓지 어려운 일입니다
하제(下際-아래 때)에서는 그 어떠한 기정사실을 꾸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산이 성립되지 못하며 해석은 불고정(不固定)의 생고집은 부정의 생고집이며 문자(文子)는 죽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법률안의 결과로써 국회의 다른 결의에 따라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의견이 제시 되었습니다 만나도 생각하는 바로서 여기 있어서도 또한 양편(兩便)을 연락하는 다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것을 찾아낼려는지 알수 없습니다 금년도 예산의 성립은 시기적으로 보아 거의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예외라는 경우에 처해 있습니다 예산은 가장 빨리 제출되어야 한다는 주의(主義)는 정부측에서도 역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번씩이나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신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협찬(協贊)은 거치지 않는 지출을 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란 해석은 국무총리 내가 취하지 않는 바로서 여하한 해석에도 삼방면(三方面)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끝)

 

                                                                                 Chancellor of the Reich Otto von Bismarck (1815-1898)
-철혈정책(鐵血政策)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

4.비스마르크의 주요 자료
(1)비스마르크(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1815.4.1-1898.7.30)
http://100.naver.com/100.php?mode=all&id=81584
(2)비스마르크와 그의 정책
http://myhome.naver.com/sw016/we/w-ger1.htm
나폴레옹이 전쟁의 책략자라면 비스마르크는 정치의 책략가였다
비스마르크의 대내외적 정책이 동독의 붕괴와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3)비스마르크의 정책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modern/german/bisma2.htm
독일제국의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의 정책 수록
(4)독일전함 비스마르크<탱크와 야포등>
http://blog.hanafos.com/blogview.asp?blogerid=yongsahn&cateNo=35360&serialNo=82
8문의 38cm 함포가 전함 비스마르크의 주화력임
1934년에 설계된 38cm SK C/34는 독일전함에 탑재된 것 중 가장 강력한 함포염

Bundeskanzlerin Angela Merk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