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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미 94년 4월13일 병원서 자살" 본문
(금강산=공동취재단) 황재훈 기자 = 제14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어머니를 만난 김영남씨는 29일 요코다 메구미씨가 1994년 4월13일 병원에서 자살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금강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산 사람을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메구미는 처녀 때부터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서 뇌를 많이 다쳤다는 기억이 있다고 했다"며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가정생활을 진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전문병원에 보냈는데 치료사업이 잘 안돼서.."라고 말했다.
김씨는 "결혼 전부터 병적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딸 은경이) 출산 후 더 악화됐고 우울증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나타나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했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숨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러 번 자살시도가 있었다"며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은 말씀드리지 않겠는데, 결국 병원에 가서 자살한 것으로 됐다"고 강조했다.
김영남씨는 일본측에 건네준 메구미씨의 유골과 관련, "(일본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유골도 넘겨줬다"며 "당시 일본 측 단장은 유골을 받으면서 내게 직접 받았다는 것과 메구미 부모에게 책임적으로 전달하고 공표하지 않겠다는 자필 확인서도 남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골을 여기저기 나눠주며 감정놀음을 벌인 끝에 가짜라는 졸렬하고 유치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며 "남편인 나와 메구미에 대한 모욕이고 참을 수 없는 인권유린"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메구미 문제는 이것이 전부인데 자꾸 일본 정부가 나의 말을 잘 믿지 않고 딴소리를 하면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며 "2004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관계자를 만나 구체적으로 (사망경위를) 설명해 줬다"고 강조했다.
그는 메구미와 만남 과정에 대해 "사업상 특수부문에서 필요해서 일본어를 80년대 초까지 배웠고, 일어를 배우면서 이성적으로 가까워졌고 결혼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김영남씨는 은경양의 본명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메구미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어머니 이야기를 안 했다"며 "이 문제가 불거지고 대학도 다니고 사춘기 충격도 클 것 같고 개인생활이 사회에 공개된다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혜경이라고 이름을 고쳐서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경양에 대한 일본행 요구에 대해 "은경이는 메구미의 딸이자 나의 딸"이라며 "그 요구 자체가 나로서는 납득이 잘 되지 않고 일본 당국이 취하는 사태로 볼 때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스스로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jy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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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45)씨의 전처인 납북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씨의 삶보다 더 기구하고 비극적인 드라마는 없을 것이다.
제14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어머니를 만난 김영남씨는 29일 메구미씨가 1994년 4월13일 병원에서 자살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결혼 전부터 병적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딸 은경이) 출산 후 더 악화됐고 우울증에 정신이상증세까지 나타나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했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숨졌다"고 그동안 북한의 자살 주장을 재확인했다.
북한도 이미 메구미씨가 1986년 8월 김영남씨와 결혼, 이듬해 9월 딸 은경(19)양을 출산한 뒤 심각한 산후 우울증을 앓았으며 결국 부부 사이에 금이 가면서 1993년 별거에 들어갔다고 일본측에 밝혔었다.
자살하기 일년 전인 1993년 4월29일부터 6월3일, 같은해 8월3일부터 10월8일까지 각각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여러 번 자살시도가 있었다"며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은 말씀드리지 않겠는데 결국 병원에 가서 자살한 것으로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메구미씨의 사망동기와 관련 "처녀 때부터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서 뇌를 많이 다쳤다는 기억이 있다고 했다"고 설명했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자체가 메구미씨의 고통스런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메구미씨는 1977년 11월 아직은 부모 밑에서 어리광을 부려야 할 13세의 철없는 어린 나이에 고향 니가타(新潟)현에서 배드민턴을 연습하고 돌아오던 중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됐으며, 북한에서는 주로 대남공작원들을 위해 일본어와 일본 풍습 등을 가르쳤다.
북한에서 메구미씨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가 줄곧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납북됐다가 귀환한 하스이케 가오루씨는 1986년부터 1994년까지 평양 외곽의 한 초대소에서 메구미씨 부부와 함께 살았다면서 "메구미씨는 1990년대 들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호소하듯 했으며 초대소를 무단 이탈하기도 해 데려온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주한미군 복무 중 탈영, 월북했다가 일본에 정착한 미국인 로버트 젱킨스씨에 따르면 메구미씨는 납치 직후인 1978년 8월께부터 젱킨스씨의 부인인 납북 일본인 소가 히토미씨와 2차례에 걸쳐 함께 살았는데 고향 생각에 줄곧 울기만 했다고 한다.
친인척 하나도 없는 남의 나라 땅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인 남편과도 별거하면서 우울증은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30세의 젊은 그를 자살로 내몬 셈이다.
경제적으로는 여유있는 생활을 했겠지만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납치된 외국인 신분으로 항상 감시속에서 구속된 삶을 살아야 하는, 다시는 부모님과 고향땅을 볼 수 없다는 절망은 신병과 더불어 그의 삶 전체를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chs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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