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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페트병에 쌀을 채워 북으로 보내는 사람들 본문

Guide Ear&Bird's Eye/영국 BBC

10년째 페트병에 쌀을 채워 북으로 보내는 사람들

CIA Bear 허관(許灌) 2024. 6. 3. 08:05

“우리가 모은 돈을 가지고, 그것도 같은 민족이 굶어 죽는다해서 보내는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싶었어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쌀은 담은 페트병을 바다에 띄워 북한으로 보낸 사단법인 큰샘 대표 박정오(56) 씨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9일 박 씨는 일행 몇 명과 함께 쌀이 든 페트병을 차량 가득 싣고 인천 강화군 석모도로 향했다.

2023년 9월 헌법재판소가 북한과의 접경지역에서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규제하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하 ‘대북전단살포금지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후 처음으로 환한 대낮에 페트병을 보내러 가는 길이었다.

“원래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새벽에 다녀왔어요. 그냥 후다닥 하고 오는 거죠.”

박 씨는 지난 2015년, 쌀이 든 페트병을 바다에 띄워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처음으로 조직 차원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그 해 곡창지대인 황해도 주민들이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박 씨는 “농사를 다 지은 가을이 되면 군인들이 총을 차고 내려와 수확한 곡식을 다 가져간다는 얘길 들었다”고 전했다.

“예전에 동해 쪽에서 쌀을 넣은 페트병이 조류를 따라서 북한 쪽으로 흘러가는 걸 봤어요. 그래서 황해도에 닿을 수 있도록 서해에서도 해보자, 하고 물 때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해양과학연구원에도 문의하고, 강화도 주민들도 직접 만나서 물어봤어요. 뱃사람들이 얘기하기를 물 흐름이 황해도 쪽까지 올라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물 때를 잘 알아본 후에 2015년 4월 7일 시작했죠.”

이후 교회를 포함해 각종 대북 단체에서도 잇달아 비슷한 활동을 벌였다.

박 씨도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함께 2020년 6월까지 페트병 보내기 100회차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2020년 6월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등을 명분으로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하는 등 남북관계가 악화하자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발의됐다. 국내 법률 가운데 처음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위법 행위로 규정하고 처벌 조항도 갖춘 것이다.

외로운 싸움의 3년

지난 2020년 통일부는 대북전단 및 물품 살포 탈북민단체에 대해 청문회를 열고 비영리법인 설립허가 취소 처분 절차에 나섰다

2008년 대북전단 살포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교류협력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모두 8건의 개정안이 발의된 바 있었으나, 실제 법률 개정에는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20년 6월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탈북민단체의 전단 살포를 두고 남북합의 위반이라는 경고성 담화를 발표했다.

그 후 법안 마련에 나선 정부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여정 하명법’이라며 거세게 비판하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은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과 대북관계 발전을 위해 전단을 금지해야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박정오 씨의 형인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북한인권단체 27곳은 이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며 개정안이 공포된 2020년 12월 29일 당일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남북회담할 때 제1 주제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게 ‘전단을 통해 상호비방하지 말자’ 이거예요. 여태까지 북한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위대한 수령이다’라고 선전해 왔는데 전단이 확산하고 나면 정권에 치명타니까요. (북한은) 그거부터 먼저 없애고 싶었던 거죠.”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2021년 4월 대북전단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어 우려된다는 내용의 공개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서한에는 해당 법이 한국 내 표현의 자유 향유와 일부 민간단체, 인권 옹호자들의 합법적인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제정된 후 박정오 씨는 경찰서에 방문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정부는 우리가) 남북교류협력법에 어긋나게 해서 쌀을 보냈다는 거예요. 북한에 있는 특정인을 지목해서 그 사람에게 돈이나 물품을 지원하는 건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린 불특정 다수니까 어긋난게 없다, 이래도 범죄자 취급을 계속 하지 않습니까. 그 때가 제일 어려웠어요. 거의 3년 동안 경찰서에 오고가면서 피곤하고, 힘들고, 괴롭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주변에서 들어오던 지원도 모두 끊겼다.

“예전에는 교회라든가, 주변 지인들이 돈을 지원해주면 저희가 페트병에 넣을 쌀이랑 USB를 구매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게 없으니까… (같이 하는) 네다섯이서 모여서 20만원씩 걷어서 구입해 보냅니다.”

2020년 페트병에 쌀을 담에 북에 보내는 탈북자 단체를 막기 위해 경찰은 인천 강화군 석모도에서의 경계근무를 실시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이나 새벽에 페트병을 보내러 가는 일도 익숙해졌다.

“지역 주민들하고 마찰 빚는 것도 싫고… 그래서 저흰 주민들이 안 볼 때 새벽이나 늦은 밤에 페트병을 보내러 갔어요. 나쁜 걸 보내는 것도 아니고 북한 주민들의 생명 연장 의미에서 작은 도움을 주는 거니까…”

2020년 여러 국내 언론에서는 한 선교단체가 석모도에서 페트병에 쌀, 마스크 등을 넣어 보내다가 섬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모습이 보도됐다.

하지만 박 씨는 “애초에 바닷가라 집도 없는 곳인데다가 섬 안 쪽에 사는 주민들도 농사짓고 자기 할 일을 하느라 예전부터 별 관심을 두지 않아 마찰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9일 페트병을 던지기 위해 모인 탈북자 가운데 한 명은 “예전에는 경찰들이 우리 먹으라고 간식을 싸들고 오기도 하고, 마을 이장이 여기보다 저쪽이 더 물살이 좋다면서 같이 던지러 가기도 했다”며 “주민들과 오랜 마찰을 빚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은 2023년 9월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며 위헌 판결이 났다.

헌재는 해당 판결에 대해 “국민의 생명, 신체 안전을 보장하고 남북 간 긴장을 완화하며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국가 책무를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입법목적이 정당하다”면서도 “제한되는 표현의 내용이 매우 광범위하고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할 국가형벌권까지 동원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밝혔다.

법이 발의된지 약 3년만에 효력이 중지된 것이다.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폐지된 지금도 페트병을 보내러 갈 때면 경찰들이 나와 지켜본다.

취재진이 지난 9일 석모도에 동행했을 때도 경찰, 군인, 형사 등이 여럿 나와 박 씨를 맞이했다.

박 씨는 "내가 움직이면 경찰들도 알 수 밖에 없다"며 현재 지역 경찰서에서 배정된 경찰 몇 명이 자신의 외부 활동을 늘 동행한다고 전했다.

"페트병을 보내는 자체가 위험해서 동행하는 건 아니고, 북한에서 자꾸 (저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하니까..."

박 씨의 아내 권류연 씨는 이런 북한의 압력에 우려를 표했다.

"북한에서 지금 저희 남편을 자꾸 죽이겠다고 하니까 신변보호 차 경찰들을 붙여놓은 거예요. 걱정 되죠. (남편이) 어디 단체장 모임을 가거나 새벽 2시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거죠."

페트병 안에 든 것

2L짜리 페트병에는 쌀 1kg과 각종 영상물을 담은 USB, 1달러 화폐 한 장이 들어간다

박정오 씨가 북으로 보내는 페트병 안에는 기본적으로 쌀이 들어간다.

2L 짜리 페트병 하나에 쌀 1kg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 번에 200병을 보낸다고 가정하면 총 쌀 200kg이 필요하다.

또 다른 것은 USB다. USB 속에는 한국 유명 드라마를 포함해 북한 정권에 대해 해외에서 평가하는 내용의 영상들이 담긴다.

최근에는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 몇 편을 담아 보냈다.

성경과 여러 음악,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국회연설을 포함해 유튜브에 업로드 된 ‘북한과 남한 비교 영상’ 등이 주를 이룬다.

북한에서도 컴퓨터나 휴대폰 등 전자기기가 널리 보급된 상황이기 때문에 USB에 든 영상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란 게 박 씨의 생각이다.

“북한에 전기가 없다고 많이 알고 있는데, 중국을 통해 태양광 패널도 많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고, 그것을 통해 햇빛이 강한 여름에는 배터리 충전도 하고 해요.”

미국 1달러 지폐가 페트병 한 개당 한 장 씩 들어갈 때도 있다.

미화 달러는 북한의 시장인 장마당에서 중국 돈이나 북한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박 씨는 설명했다.

지난해 기준 1달러는 북한 돈 160원이지만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은 이보다 50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페트병에 진통제 30알과 마스크 등을 넣어 보내기도 했다.

 

현재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지원이 끊겼다는 박 씨는 쌀을 보내는 양이 줄었다고 전했다

페트병을 채운 후에는 정확한 물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단은 바람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제약이 있어요. 남풍이 부는 여름에는 보낼 수 있는데 북쪽에서 바람이 부는 북풍일 땐 보낼 수가 없죠. 그런데 페트병은 날짜랑 시간만 잘 맞추면 돼요. 물이 많이 들어왔다가 빠질 때 물의 흐름 속도를 보고 보내는 거예요. 물 흐름이 빠른 날은 4시간이면 북한에 도착해요.”

박 씨는 이렇게 전달된 페트병의 북한 도달률은 100%이며,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 북한의 강원도 원산시에 위치한 송도원에 놀러갔을 때도 남한에서 밀려 온 페트병이나 맥주캔 등을 종종 목격했다고 말했다.

“요 근래 탈북한 가족들이 바다에서 페트병에 든 쌀을 먹었다고 전해들었어요. USB에 든 드라마도 잘 봤다고…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진 못했는데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또 예전에 그런 얘길 들었어요. 페트병을 발견한 북한 주민들이 쌀에 독약이 있을까봐 밥을 지어서 개에게 먼저 줬대요. 근데 개가 멀쩡하니까, 그 쌀로 밥을 해먹었더니 너무 맛있어서 그걸 비싸게 시장에 팔아서 저렴한 잡곡같은 걸 양적으로 많이 구매해서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박 씨는 현재 충청도에 거주하는 한 탈북자 여성이 황해도에 거주했을 때 페트병에 든 쌀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쌀 페트병을 보내는 것이 “큰 건 아니지만 이거라도 먹고 한 끼 배라도 좀 채웠으면”하는 자신의 바람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뭐 나쁜걸 보내는 것도 아니고 생명 연장의 의미에서 자그마한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한에서 이렇게 쌀을 보낸 것을 북한 주민들이 목격한다면 ‘저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잘 살길래’ 하는 소문이 날테고 이것이 분명 정권에 타격이 될 겁니다.”

박 씨는 한국에 먼저 정착한 탈북민으로서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전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북한에선 외부 정보가 전혀 들어갈 수가 없어요.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니까 결국은 또 국가가 하라는대로 하고, 이것을 어기면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을 가니까 반기를 들 사람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