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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단체, “다부동 전투 패전 주장 김준혁 사퇴하라” 본문

-미국 언론-/한국 언론

예비역 단체, “다부동 전투 패전 주장 김준혁 사퇴하라”

CIA bear 허관(許灌) 2024. 4. 7. 13:24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경내에 건립된 백선엽 장군 동상. 본사사진.

 

예비역 단체들이 ‘막말 논란’이 제기된 김준혁(경기 수원정)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유튜브 채널에서 고 백선엽 장군이 이끈 다부동 전투에 대해 “사실상 패전”이라고 폄훼했다며 6일 후보직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국방포럼,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예비역대령연합회, 전국 구국동지회연합 등 육·해·공군·해병대 및 예비역 민간 안보단체는 이날 오후 4시 서울 용산에서 김 후보 규탄 및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문을 발표한다. 이들 단체는 “김 후보는 작년 모 유튜브에 출연해 ‘다부동 전투는 사실상 패전이다’ ‘백선엽 장군은 병법도 모르고 미군 덕분에 이겼다’ ‘육군사관학교는 나라를 팔아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등의 저질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며 “피로써 다부동과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우리 국군들을 모독하는 차마 입에 답을 수도 없는 저질 망언을 한 김준혁은 과연 어느 나라 국민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목숨을 걸고 다부동을 지켜낸 백선엽 장군님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역사를 전공한 김준혁은 6.25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육사 생도들이 전사했는지 아는가”라며 “자랑스러운 우리 국군과 육사를 모욕한 김준혁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당장 국민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후보. 연합뉴스

전날 육사 총동창회도 지난해 9월 ‘육군사관학교에 친일파가 득세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김 후보에게 후보직 사퇴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문에서 “국회의원은 민의를 잘 받들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누구보다 객관성 있고 본보기가 돼야 하므로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는 자리”라며 “망발을 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냐”고 지적했다.

앞서 김 후보는 지난해 9월 유튜브 채널 ‘스픽스’에 출연해 윤석열 정부가 다부동 전투 등 백 장군의 업적을 과도하게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가 광복군의 후예인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사관생도를 육성하는 학교가 아닌, 너무나 안타까운 학교로 전락해버린 것”이라며 “육군 장교가 기회주의적 속성만 늘어나게 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예비역 단체, “다부동 전투 패전 주장 김준혁 사퇴하라” :: 문화일보 munhwa

 

예비역 단체, “다부동 전투 패전 주장 김준혁 사퇴하라”

국방포럼,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등 성명문 발표“피로써 다부동 지켜낸 백선엽과 국군 모독 말라”예비역 단체들이 ‘막말 논란’이 제기된 김준혁(경기 수원정)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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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 중 산화한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구국용사충혼비

1.개요

195083일부터 29일까지 6.25 전쟁 도중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를 중심으로 숲데미산(이하 수암산으로 통칭) 및 유학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준장 등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2개 연대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켜냈다. 이로써 북한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 유엔군은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행정구역 명칭이 '다부동()'이 아닌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이지만 전투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따라 '다부동 전투'라 부른다.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까지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 ''을 쓰는 곳이 많았다.

 

2022년 기준 다부리는 약 350명이 사는 작은 동네이다. 이런 작은 동네를 두고 그야말로 혈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2. 전투 전 상황

부산 교두보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1일 낙동강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UN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대구를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산과 함안, 마산을 잇는 선을 돌파해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주공축선은 5개 사단이 집중된 대구 방면, 그 가운데서도 증강된 3개 사단(북한군 3, 13, 15사단과 1사단 일부)이 공격을 감행한 대구 북방의 1사단 정면이었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들을 시찰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다.

전쟁 직후 북한군 공세에 대한 방어선 형성 과정.

전투력 손실은 이 시기전까지 병력 7만여 명 손실로 전체전투력의 71%를 차지했다.

당시 참모총장부터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만군이나 일본군 출신들로 구성되어 일본군식 '정신력'을 강조하며 전술에 임했다. 일례로 육본부터 1사단 11연대까지의 과거 경력을 살펴보면,

제1사단장 백선엽은 과거, 만주군으로 활동했고 제11연대장 김동빈 또한 일본군 학병으로서 복무하였다. 이들 중 사단장 백선엽은 보급을 어느정도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는 백선엽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상술한대로 당시 국군 지휘부들은 일본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정신력을 강조했으며 이는 곧 보급경시로도 이어져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비롯한 거의 대다수의 장군들 역시 보급경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작전명령에 보급을 포함한 건수는 다음과 같다.
구분
육군본부
제2군단
제1사단
제11연대
작전명령
14건
13건
7건
16건
4항 군수 포함
5건
0
4건
4건
지휘관
정일권
유재흥
백선엽
김동빈

한편, 당시 사단 병력은 7천여 명 수준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105mm 1개 대대가 보충되었고 약간의 고참병 외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1주간의 훈련밖에 못한 수준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장비 또한 지극히 미약하였기에 임진강에서 낙동강까지 지연전 동안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7월 21일 기준 1사단 병력(육군본부 기록)
사단사령부 및 직할부대
1045
제11연대
2253
제12연대
2324
제13연대
2038
합계
7660

8월 12일 기준 1사단 총포 및 병력상황은 다음과 같다.(1사단 전진약사, 11연대 전투상보)
m1 소총
4328
카빈 소총
1931
자동소총
143
기관단총
20
권총
95
중기관총
13
경기관총
37
기관포
5
로켓포
33
대전차포
2
60mm 박격포
45
81mm 박격포
26
105mm 곡사포
12
총포 합계
6690
병력
7420

약 240명이 23일 간 사라진 것인데 도중에 보충된 병력까지 합하면 23일간 1사단이 입은 피해는 이보다 몇십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북한군 8월 공세 저지, 대구 사수 → 전차 30대 격파, 전사상자 1만 7500여 명에 달하는 전과
※ 아군 피해: 전사상자 1만여 명

3. 전투 경과-북한군의 8월 공세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제4차 작전방침은 련속적인 타격과 대담한 기동작전으로 미제 침략군과 리승만 괴뢰군을 김천, 함창, 안동지역 등에서 포위 소멸하고 빨리 락동강을 강행 도하하여 적의 기본집단을 대구 일대에서 포위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산-대구-영천-포항계선으로 진출함으로써 우리 조국 강토에서 미제 침략자들을 최종적으로 격멸소탕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원 『조선전사』 25권 231p
전선사령관 김책은 우선 사령부를 수안보에서 김천으로 이동하고 11개 사단를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여 이른바 '8월 공세'를 감행하였는데, 각 사단이 지향한 목표는 아래와 같다.
구분
예하 부대
공격 축선
제1군단
제6사단
마산-대구 축선
제4사단
영산-밀양 축선
제3사단
제10사단
왜관-대구 축선
제2군단
제13사단
제15사단
다부동-대구 축선
제1사단
군위-대구 축선
제8사단
의성-영천 축선
제12사단
기계-경주 축선
제5사단
영덕-포항 축선
지원 부대
제105 전차사단
독립기갑연대
사령부는 주공을 대구에 지향하여 대구를 경유, 부산을 점령할 기도로 공격을 가해왔다. 7월 말,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 라고 말하였고, 8월 3일 수안보를 방문하여 독전하면서 금차 공세에서 특히나 '야간 공격'을 이용하라고 지시하였다. 다부동 일대의 방어선이 끈질겨 무너지지 않았으므로, 8월 15일 명령 제82호를 내려 8월을 완전 점령의 시기로 삼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체 조선인민군과 해군들은 미국 간섭자들의 군대와 리승만 괴뢰군 패잔부대들을 종국적으로 격멸소탕하고 1950년 8월을 우리 조국강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달로 되게 하라

김일성, 명령 제82호
8월 중순, 특히 8월 15일의 전선에서의 총공격으로 다부동과 마산, 기계 등 어려 지역이 위기에 처하였으나, 8월 말에 접어들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이에 대한 역습을 개시하여 위기가 해소되고 소강 상태에 접어들게 되어 자연스레 공세종말점에 이르렀다.

이 시기 북한군은 점령한 각 지역에서 소위 '의용군' 을 징집하였으며, 부대의 절반 이상이 의용군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전투력은 지연전 이후 60% 정도로 감소되었고 전차의 손실도 커서 소련으로부터 다시 전차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실패하여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난 후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병력 집결이 곤란함으로 낙동강선의 돌파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9월 공세 때에는 이를 바탕으로 주로 야간 공격을 행하였다
 
4. 해평리의 초전
 
보1사작명 제25호 4283. 8. 2 17.00
명령
1. 생략
2. (1). 사단은 군단 명령에 의하여 금일 19시를 기하여 병력 배비를 변경하고 남하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려함
(2). 전투지경선 별지 투명도와 여함
3. (1), 각 연대장은 별지 투명도에 의하여 부대를 재배치하고 남하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라
(2). 포병대는 별지 투명도에 의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각 연대에 지원사격을 준비하라
(3). 공병대는 낙동강의 도하 가능지점에 장애물을 설치할 준비를 하라
(4). 사단 직할 각 대는 현진지를 21:00분 출발하여 명 18:00분까지 상장동으로 이동 완료하라
4. 행정사항
(1). 이동 간 보급 수송은 자대에서 담당하라
(2). 이동 후의 탄약 보급소는 투명도와 여함
5. (1) 이동 간의 통신을 전령으로 하고 통신 중대장은 이동 완료하고 동시에 유무선을 가설하라
(2). 각 연대 지휘소는 별지 투명도에 의하여 설치하라
(3). 사단 지휘소는 금일 24.00 이후 상장동에 위치함
사단장 육군준장 백선엽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은 함창에서 북한군과의 접촉을 끊고 8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생고생하며 낙동강을 도하했다. 낙동강을 건넌 1사단은 제15연대를 약목과 다부동을 연하는 선에, 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제12연대를 낙정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인민군이 1사단을 추격하여 인민군 제13사단이 낙정리로, 15사단이 구미시로, 3사단이 왜관읍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의 최초배치

"적은 해평을 점령 후 다시 신주막 방면으로 침공 대구점령을 목표로 계속 남침할 기도였었음"
제1사단 11연대 해평 지구 전투상보

 

(1)낙정리 전투

8월 3일, 연대는 사단 명에 따라 낙상리에서부터 철수하여 사단 가장 북쪽인 낙정리 부근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12연대를 사단 예비대로서 배치하기로 하였으므로 연대장 김정곤중령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낙정리 일대에서의 적을 격퇴하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사단 집결지로 이동하겠다고 하였다.
1. 지형이 하천선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 따라서 이곳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초전을 승리로 장식한다면 장병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복돋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2. 이러한 유리한 조건 하에서 지연전을 포기하면 필연적으로 사단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이다.

12연대장 김점곤 중령
연대는 우선 제3대대로 하여금 적정을 탐지케 하고 제4중대와 81mm 박격포 12문과 기관총 8개반으로 구성한 부대로 막강한 포망을 만들었다. 이때 제9중대 정면에서는 피난민들 100여명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였으나, 어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다. 해가 저물고, 적은 선발대로 추정되는 부대를 보내어 낙동강에서 수심을 측정하여 도하지점을 탐색하고 있었으나 아군의 사격으로 이를 격퇴시켰다.

4일 06:00 안개가 걷히고 적 1개대대와 증원부대가 후속되는 것을 목격하자,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이를 보고하였으며 연대장은 적에게 포화를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대전차 중대와 제17야전포병대대 제2중대장과 긴밀한 협조 하에 57mm 대전차포를 낙정리 부근에서 발사하면서 다부동 전투의 첫 교전이 펼쳐졌다.

따라서 적은, 대응사격과 동시에 강을 도하하면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아군의 예광탄이 발사됨과 동시에 전 포화가 적에게 집중되면서 낙동강은 피로 물들었으며 강에는 오로지 적의 시체가 떠다니게 되었다.

이때 9중대 1소대장은 개인호에 있다가 올라오는 적을 야전삽으로 내리쳐 물리쳤는데, 수상히 생각하여 이를 확인하여 본 결과, 적이 아군의 사각지대로 이동하여 점차 몰려오고 있었다. 발견한 즉시 이들에게도 포화를 집중하여 무찌르고 포로 11명을 붙잡았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적은 사실상 패주하였고 개전 이래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정에 장병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적을 향해 우군기가 비행하여 적들을 향해 네이팜 탄을 쏟아부어 큰 피해를 주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제11중대장이 "야, 낙동강에 오리알 떨어진다."라고 말한 데서 낙동강 오리알이란 관용어가 생겼다는 한 가지 설이 있지만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강을 도하하려던 피난민들도 이 폭격을 맞아 다수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一. 적정
적은 4일 미명을 기하여 약 1개대대 병력이 낙동강을 도하할 기도로 강변까지 진출 도하를 개시함
二. 부대의 행동
1. 아 연대 군단 경계부대로서 별지요도와 여히 방어태세 를 취하고 대기 중 3/8 17시 아 제3대대 진전에 적 전초부대가 접근하여옴을 확인 사격을 개시함
2. 적은 4/8 미명을 기하여 약 1개대대 병력이 도하를 개시함으로 9시경에 이르러 우군항공기의 폭격과 야포대의 화력지원 하에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퇴시킴
3. 4/8 17시 현재 적을 완전 격퇴하고 상사의 명에 의하여 아 부대주력은 22시경 상림동에 철수함

제1사단 낙동강 양정리 지구 전투상보

ㄱ.분견대의 고생

이 시각 제2대대에서는 조용하던 적이 갑자기 14시를 기하여 178고지 일대에 포격을 가하여 왔다. 이 때문에 고지를 수호하던 6중대장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이에 피아 간 격전이 치열하여져 장기간 교전이 펼쳐졌다. 우군기도 아군을 돕기 위해 나타나긴 했으나, 적의 맹사격으로 격퇴되었으며 상황은 더 안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대장은 우선 81mm 박격포 소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2시간 후 총성이 울렸으나 잠잠해졌다. 그러나 통신이 끊긴 터라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자정이 지나 5일 0시 30분에 연락병이 보고를 받았다. 그 내용인즉 적이 낙동강을 도하하여 소대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므로 소대 독자적으로 진지를 이탈하여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중대장은 연락병이 전투경험이 풍부하며 평소 신임이 두터운 장교였으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분견대장은 이때 여러 상황을 종합분석하였는데 적은 이미 분견대 후방으로 이동하여 퇴로를 차단하려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이를 연대에 보고하려 했으나 통신이 끊겼으므로 할 수 없이 철수하였는데, 이때 적은 예상대로 낙정리 부근으로 도하하고 있었다. 분견대를 이 부근을 수색한 결과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장자봉 일대에 아군이 배치되어있다는 사실을 얻게 되었다. 이후 4시간 동안 고생고생하며 수색하다 아군 6사단 2연대 수색대원과 마주쳤다. 분견대원들은 이들을 보곤 심히 반가워하였으며 2연대는 이들을 쉬게 하였다.

다시 행군한 분견대는 5일이 지나 6일이 되자 점점 더 지쳐갔으나, 이날 드디어 연대와의 교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연대 집결지로 출발하여 11시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연대는 4일 22시에 상림동에 철수하여 사단 예비대가 된 직후, 수색대를 파견하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행방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실상 제12연대는 군단의 경계부대로서 제1사단과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나서 장자봉에서 도개동에 이르는 지대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은 단독으로 낙동강선에 부대를 배치하고 있다가 다행히도 적을 섬멸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사단에서는 명령대로 부대배치를 하지 않고 딴 데서 전투를 한다고 말이 많았다

제12연대장 김점곤 중령

(2)해평지구 전투

8월 3일, 명령에 따라 해평지구로 철수한 제11연대는 사단 중앙에 배치되어 적의 공격을 최대한으로 저지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우선 제11연대는 이전 전투의 손실로 말미암아 학도병 300여명과 고참병 일부로 제3대대를 재편성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제1, 2대대를 보강하였다. 따라서 제1, 2대대는 낙동강 연안에 배치하고 제3대대는 보충된 신병 때문에 후방에서 2~3일 간 훈련을 한 뒤 배치하기로 하였었다.

이때 제12연대가 배치된 낙정리 부근에서는 제12연대가 사단예비대로서 상림동으로 철수하고 그 자리에는 제6사단 2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제2연대는 갑자기 넓어진 전투지경선을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제2연대와 제11연대 사이에 간격 3 km가 생겼다. 적은 이 간격에서 "너희들 가족은 모두 죽었다 그러니 너 혼자 남아서 무엇 하겠느냐! 투항하라."라는 방송을 틀어 선전하였다.

4일, 적은 선산 일대에 병력을 증강하여 점차 남하할 기세를 보였으며, 09시에는 낙동리 전방 3 km 지점에 트럭 2대와 직사포 2문으로 아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아군은 적정을 탐지한 후 송당리와 강창 도하장의 경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적정을 탐지코자 수색대를 보낸지 2시간이 되는 시각, 11연대와 2연대의 간격 중 비등봉 동쪽에 적 1개대대가 오고 있으며 적 1개중대는 구시골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8월 4일
"함창 상주방면과 옥산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은 점차 낙동리(28~98) 선산(28~83.9)에 그 수를 증가하고 있었으며 09:00 경 낙동리전방 3킬로미터 지점에 주력 5대와 직사포 2문으로 아 진지에 대하여 사격을 가하고 있었으며 연대는 적정을 탐지코자 광범한 수색망을 펴는 한편 주로 송당리(31.9~88.9) 도하장과 강창(32.2~82.7)도하장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었음."

《제1사단 11연대 해평지구전투상보》中

그리하여 적은 5일 01시를 기하여 단평동 인근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제2대대 정면에 출현하였다. 또한 02시에는 제5중대 정면에서 참병소대로 보이는 적이 포착되었는데 중대장은 이들에 대한 사격을 가하라고 지시하면서 육박전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나, 사망자 10여 명에 부상자 20여 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동이 트고 적의 시체를 살펴봤더니 총 20구 적의 손실이 더 컸음을 확인하였다.

이후 152고지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이때 74고지를 방어중이던 제7중대는 갑작스런 적의 침투로 힘없이 무너져 내려 이들 병력도 152고지로 철수하였다. 이 공격으로 제7중대가 무너지면서 비등산-하도봉-74고지가 단숨에 점령되는 비극을 격어 아군은 이를 반드시 탈환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3시에 제5, 6중대는 적이 재편성을 실시하기 전에 공격을 실시하여 16시에 74고지와 하도봉을 탈환하였다. 이날 10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아군 제11연대가 위기에 빠졌음을 알고 예비대로 주둔 중이던 제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였다.
8월 5일
야간을 이용하여 낙동리로 도하한 적 선견 1개연대는 낙동(28.2~87.2) 정미동(28.9~93.9)를 경유하여 단평동(33.7~81.2)에 이르는 도로로 남하하고 있으며 그의 일부병력은 01.00경 아 제2대대 정면에 출현하고 있었음 10.00 적은 임이 △74.4(32.6~85.1)을 점령하여 완강히 저항함으로 연대는 13.00 제5, 6중대로 하여금 낙산동(33.5~85.9)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수시간 치열한 교전 후 적은 많은 시체를 남긴 채 퇴각하여 16.00 이 고지를 점령확보하였으며 제6중대는 원진지로 철수하였음 18.00 제12연대로부터 1개대대 임시배속하여 왔음으로 △161(37~82)일대에 배치하였었음

《제1사단 11연대 해평지구전투상보》中

ㄱ.225고지 점령전

한편 제15연대 1대대는 8월 5일에 송암동으로 진출하여 평송동 남쪽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제11연대의 제2대대를 엄호하다가 6일 06시에 적과 전투를 벌였는데 적이 사격과 수류탄으로 완강하게 버티자 항공으로 적진을 강타하여 공격을 재개하고 8부능선까지 육박(肉迫)하였다. 하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표정상 40m 앞에서 결국 공격이 저지되었다.

또 8월 6일 11연대는 밤중을 이용한 적의 낙동강도하를 마주하게 되어 교전을 펼쳤고 항공기로 적을 폭격하였으나 적의 증원부대로 이를 극복하여 교전이 치열해졌다가 마침내 아래 3차례의 공격으로 225고지를 탈환하였다.
1차 공격: 이러한 파장공격으로 고전하는 제2대대를 엄호하던 임시배속된 제12연대 1대대는 06:00 제2대대가 철수하고 역습을 감행하였다. 이때 적은 대대가 돌격전을 펼쳐 올 때는 사격만 하다가, 아군이 사격준비를 하자 수류탄과 사격을 동시에 하여 아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1차 공격으로 적의 위치와 화력을 파악한 대대는 항공과 화력을 이용해 재반격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2차 공격: 08:00 적은 다시 7중대와 5중대의 진지를 향하여 돌파를 시도하여 수시간 교전이 지속되자, 제7중대는 항공지원와 포지원을 요청하여 약 30분 간 적진을 강타하였고 반격을 재개하는 즉시 8부능선까지 육박하였으나, 적의 수류탄과 사격으로 인하여 다시끔 저지되었다.

2번의 걸친 반격이 실패로 끝나자, 대대는 먼저 3개중대는 후방으로 빼 재편성을 실시하고 대대수색대를 목표고지 우편으로 보내자 이 부근에 배치된 적은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적의 측방 침투로 적을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이, 제5중대와 제7중대는 끈질긴 공격으로 17:00에 74고지를 탈환하고 적을 격퇴했다.

3차 공격: 작전을 이행하여 제3중대는 정면으로 적을 유인하고 나머지 2개중대로 하여금 적의 측방을 찔어 적을 무력화 시킨 후 22:30 드디어 225고지 정상을 탈취했는데, 공격을 시작한지 겨우 30분이었으며 이는 병력보단 전술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적은 다시 돌격을 반복하여 다시 이 고지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시체만을 남긴 채로 다시 후퇴하게 되고, 아군은 이 진지를 더욱 보강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8월 6일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낙동강을 도하한 적은 낙동-해평동을 통하는 도로로 남하하였다. 점차 그 압력은 심하여 08:00 경 제7중대와 5중대의 진지 일부를 돌파하고자 하였으므로, 7중대는 적과 교전이 수시간 계속되자 항공과 포지원으로 많은 포탄과 폭격을 가하여 적에게 가한 타격이 많으나 후속부대로 하여금 침공을 극복함으로써 피아간의 격전은 치열하게 되어14:00 배속 제12연대 제3대대로 하여금 이 적을 공격하게 하여 △225에서 저항하는 적을 격퇴시켜 17:00 경 이 고지를 점령확보하였다.

제1사단 11연대 해평 지구 전투상보
225고지에서의 혈전으로 인하여 아군 장교 4명, 병사 25명이 전사하고 장교 3명과 병사 113명이 부상하는 손실을 입었는데, 총 전투력의 35%가 날아간 셈이다. 또한 적은 160여명이 살상되었으므로 인명피해는 아군이 더 적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연대는 대대의 병력의 손실과 저하된 사기를 종합하여 영산에 대대를 배치하고 적의 우회를 막는 임무를 부여했는데, 대대에서는 비교적 손실이 가벼운 제2중대로 하여금 하달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ㄴ.제2대대의 고립

8월 7일 01시에 북한군 제13사단은 주력 2개 연대로서 제2대대와 배속된 제12연대 1대대 진지를 향하여 3차례의 걸친 공격을 하였다. 처음에는 국군이 이에 반격하여 이를 격퇴하는가 하였으나, 적은 많은 병력을 이용하여 인해전술을 사용한 까닭에 제2대대는 152고지로 철수하였고 12연대 1대대도 327고지로 철수하였다.

날이 밝고 제2대대는 배속된 12연대 1대대의 진지를 인수한 후, 대대요원 가운데 일부를 차출하여 8중대에 배속하였고 152고지에 대한 방어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제8중대는 기관총 1개소대와 81mm 박격포 소대, 탄약수 2분의 1을 배속받은 대대요원으로 2개소대를 편성하고 08시엔 재편성을 끝마쳤다.

제2대대는 미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원진지를 재차 공격하였는데, 이때 안창엽 일등중사는 대원 2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기관총 진지를 점령하였으나, 적은 152고지를 점령한 기세로 주력을 보내었으므로 할 수 없이 아군은 금호동-반포동 선으로 철수하였다.

연대의 철수 소식을 들은 사단장은 제11연대의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단 예비대인 제12연대 3대대를 증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3대대는 상림동에서 재편성을 한 후 오리동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제1대대는 168고지와 해평동 사이에 있는 진지를 점령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제3대대도 교랑동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아군은 적 접근이라는 보고를 받고 보니 제13사단의 1개 대대 병력이 낙동강을 도하하여 접근하고 있는 것이었다.

30여 분 후 은밀히 침입하여 공격을 개시한 적은 일단 아군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적은 또다시 2회에 걸친 공격을 계속 감행하였는데, 이번에도 아군이 우위를 점하면서 격퇴하는가 하였다.

그런데 24시 무렵 조명산에서 교전이 일어나더니 얼마 뒤 그 부근에 배치된 6중대 1소대 소대장이 다급하게 "적 1개대대 규모 병력이 강창 나루터로 도하하여 산양동 일대를 점령했으므로 현진지를 지탱할 수 없게 되어 철수하겠다."라고 보고하였다. 이 때문에 제2대대는 48시간 동안 보급로가 차단된 채 고립되어야 했다.

ㄷ.전차의 출현

8월 8일 01시에 적은 결국 해평동에 진출하였다. 제12연대 1대대는 부득이하게 적림동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날이 밝고 연대에서는 그 사이 강창 나루터를 이용하여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의 병력이 2개 대대나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제2대대가 현 진지를 더이상 고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다음과 같은 작전을 세웠다.
1. 168고지에 배치된 제1대대의 엄호하에 제2대대를 철수시킨 다음 제2대대를 동고지에, 제1 및 제3대대를 해평천변에 각각 배치하고 배속된 제12연대 제1대대를 금곡리 일대에 집결시켜 예비대로 확보한다.

2. 산양동-해평천 사이에 살상지대를 설치하고 야간에 연대수색대를 투입하여 적을 유인한 후 방어진지 전방에서 이를 격멸한다.

3. 주간에는 파쇄공격으로 적을 격퇴하고 어두어진 다음 주저항선으로 복귀한다.
이에 따라 일단 제2대대장에게 현진지를 금일 22:00까지 고수하라고 지시한 후 제2대대에게 화력의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13:00에 배속된 제12연대 1대대는 미 전폭기의 지원을 등에 엎고 반격을 개시하였다. 미군의 폭격으로 적은 잠잠해졌고 대대는 2시간 만에 161고지와 반포동까지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평동에는 미 공군의 활약이 없었으므로 14:00경 북한군 전차 5대가 과수원에서 빠져나와 해평동의 제방하천을 이용하여 남하하였다. 갑작스런 전차의 출현으로 연대장 김동식 대령은 직접 대전차 부대를 지휘하여 57mm 대전차포 2대로 1호, 2호 전차의 무한궤도를 명중하였고 나머지 3개 전차도 연달아 명중하였으나, 5번 전차만이 방향을 돌려 도망하였다. 대대는 전차에서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며칠 후인 8월 12일에 UN 한국위원단 인도대표 나얄 대령과 런던타임즈 기자 아이안 모리슨 런던 테일러 텔레그라프지 기자 크리토퍼 버글리 총 3명은 한국군이 전차를 격파했다는 보도를 듣고 이를 현장에서 직접 촬영하고자 11연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경계병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전차를 직접 촬영하기 위해 파괴된 전차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인근에 매설된 대전차지뢰가 폭발하였으므로 전원 순직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한국군이 적의 전차를 4대나 파괴하였다고 알려지자 UN한국위원단 인도대표 나얄 대령과 런던타임즈 기자 아이안 모리슨 그리고 런던 테일러 텔레그라프지 기자 크리토퍼 버글리 세 사람은 사진 취재차 8월 12일에 3/4톤 차량에 탑승한채로 연대군수주임 이주희 대위의 안내에 따라 현장에 접근하다가 아군이 매설한 대전차지뢰가 폭발하는 바람에 모두 순직하였다. 당시 도로상에는 적 전차의 남하에 대비하여 대전차지뢰를 매설하였고 경계병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경계병의 제지를 무릅쓰고 지나가다가 급정거하는 찰나에 폭사하였던 것이다.

김동식, 당시 제11연대장
한편, 이날(8월 8일)부터 북한군은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다. 제2대대에서는 이를 근거로 야간에는 더 격렬한 포격이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각 중대들을 보강하고 앞서 기술한 연대의 명에 따라 22시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168고지로 철수하기 위해 그 경로를 미리 탐색하였다.

그런데, 대대가 예상한 바와 다르게 이날 21시까지도 북한군의 포격은 없었다. 대대장은 대대가 철수할 절회의 기회로 판단하고 제1대대가 엄호하면서 안전하게 고지로 철수했다. 이날 제11연대의 증원 부대였던 제12연대 3대대는 17시에 다부동을 거쳐 제12연대 CP가 있는 도개동으로 집결하였다.

1950년 8월 9일 03시에 제2대대 정면에서 전차가 다시 출현하였다. 인근에 있던 제1대대도 다가오는 전차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대대장 김재명 소령은 전차특공대를 편성하고 이를 지휘하여 제1중대 구역으로 출동하였다. 04시에 북한군의 전차는 제방을 따라 남하하였는데, 이를 확인해본 결과 총 5대였다.

이때 제1중대장 손병준 중위는 대대장에게 "적이 아직도 전투대형으로 전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대대의 방어진지를 파악하지 못한 증거이다. 그러니 전차를 통과시키고 그들의 전술종대 허리를 절단한다면 기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고 각대격파가 가능해 진다."라고 건의하였다.

대대장은 중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선 사격을 중지하고 전차가 오는 것을 계속 관측하였다. 중대에서 북한군 전차가 제1중대 선을 돌파하기 직전에 대대에 보고하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차에 대한 공격을 뜻하는 예광탄이 발사됨에 따라 모든 화력이 적에 집중되었다.

대대는 북한군 전차를 향하여 사격을 맹렬하게 하였고 또한 무척 많은 수류탄을 던져, 적은 갑작스런 아군의 포화로 인해 대혼란이 야기되어 결국 서편으로 도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제2대대도 후속하는 북한군 부대에게도 공격을 개시하여 당당히 승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다급해진 적은 제1중대 방면에 출현하여 그 부근 고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 소대장 박춘광 소위 진두지휘 하에 다시 반격을 개시하여 탈환하였다. 적전에는 한 기관총 사수가 부상해 있어 같이 돌격한 분대장 황운성 일등중사가 그를 치료하자, 그는 권총 1자루를 내어주고는 쇠사슬로 묶인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면서 "고맙소. 이것은 소대장이 자결용으로 준 것인데 당신을 쏠 수도 있었소."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연대 대전차 중대의 2개 소대는 제1, 3중대 방면으로 출현한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교전에 시작되자, 적 전차는 돌연 90도 회전하더니 제3중대 진지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단 포를 발사하여 명중한 후 특공대원 20명이 전차에 달려들어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안으로 던질 때쯤 하필이면 이때 연대장이 요청한 우군기 2대가 출현하여 전차에 대한 폭격을 날려 특공대원 과반수가 전사하고 전차 2대(그 중 하나는 SU-76 자주포)는 창촌동 뒷산으로 도망하다가 전차특공대에게 발각되면서 파괴되었다.

이때 박덕원 중위는 우군기의 폭격이 끝나고 전차에 들어가 전차포를 적진 방향으로 돌리고 쐈는데 화염이 분출되는 바람에 중화상을 입고 긴급 후송되었다. 한편 제1대대는 전과를 올리기 위하여 패주하는 잔적을 소탕하기 위해 낙동강에서 적을 격멸하였다. 이때가 8월 9일 09시 이후 적은 움직임이 대폭 감소하였으며 선산에 있던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강창으로 기동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해평 전투는 보병의 근접전과 포병의 적절한 화력의 통합운용으로 승리했다 1950년 8월 9일 새벽의 전투는 적이 우리 연대의 주저항선 돌파를 위해 전투력을 집중한 결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군의 배치상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조급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다 그날 이후 그들은 매일 치열한 포격과 야간공격을 반복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장병들은 심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선 상태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불면과 피로로 눈병 환자가 적지 않게 발생했으며 나도 그대 눈병이 걸려 그 후유증이 3~4개월 계속되었다 비록 화력과 병력은 적보다 열세했지만 상하가 뜻을 같이하여 사력을 다 했다 즉 정신력은 우리가 우세했고 그것이 전투력의 근원이 되어 승리한 것이다

김동식, 당시 제11연대장
연대장 김동식 증언대로 적은 더이상 주간공격은 하지 않고 야간공격을 주로 행하였다. 연대의 작전계획으로 적이 고지를 점령하면 단련된 후속부대가 이를 격퇴하였으므로 적은 쉽사리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85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으로 파괴되어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또한 9일 11시 30분에도 11연대쪽 남율동에 전차 4대가 침공하여 왔는데 이 급보를 들은 대대장은 특공대 1개중대를 편성하여 남율동 국민학교 약 50m 지점에서 행동을 개시한 후 1개분대를 육박공격하게 하여 폭격중인 전차를 파괴함으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파괴된  T-34-85 .

ㄹ.치열한 공방전

1. L.D명 하달되면 포병 및 박격포의 집중 사격.
2. L.D명 하달 시기는 전기에 의함.
3. 포병은 사격 계획에 의거 사격준비.
1950년 8월 10일 01시에 수색대는 적 약 1개 대대가 밤나무 밭에 집결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적은 이미 포병사격 준비를 끝냈기 때문에 수색대장은 아군이 적의 포격 사정거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재빨리 포병 지원사격을 요청하여 적에게도 포격을 가할 준비를 하였다. 이후 양측의 약 10여 분 간의 포격이 이루어지고 포격이 끝나니 평범했던 밤나무 밭과 그 주변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탈바꿈한 후였다.

이날 밤, 적 지역으로 침투한 수색대는 11일 새벽까지 용소동까지 진출하던 중 동이 텄다. 06시에 적은 약 2개연대 병력으로 침공하여 왔으므로 제1대대를 161고지에서 168고지에, 제2대대를 신기동 일대에, 제3대대는 161고지에 각각 이동하게 하여 병력을 배치했다.

8월 11일 12시에 적은 전차를 선두로 한 2개 중대가 금호동과 반포동을 연하는 선으로 나타나 아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되었다. 교전이 계속되던 중 13시 30분에는 적 기관총 중대까지 합세하여 제3대대를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후 적은 점차 연대 방면으로 화력을 집중하였다가, 15시에 연대 전 화력을 동원하여 잠시 격퇴하는가 하였다.

그러나 적이 후속부대로 손실병력을 대체하는 이른바 '일렬종대'를 이용한 파장공격을 계속했기에 제1대대는 막대한 손실을 강요받았다. 연대장은 위급한 상황을 보고받곤 제1대대를 다상동 우측으로 철수시키고 제2대대로 하여금 반격을 개시하게 하여 다행히도 위기를 넘겼다. 제3대대는 적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금산동에 배치되었다.

ㅁ.육탄공격

8월 12일, 04시에 적은 제11연대 3대대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연대 정면에 전차를 선두로 한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했다. 아군 제11연대를 이를 막고자 안간힘을 썼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육탄공격' 이루어졌다.
8월 12일
"연대는 작야(昨夜)[15] 철수배치 후 진지를 정비하고 있는 바 04:00 퇴각한 적은 다시 아 3대대 전후배로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송곡동(36.7~82.9)에 집결중이든 적은 상지동(37.5)-도남동(40.0~80.9)간을 통하는 도로로 전차를 선두로 하여 맹렬한 지원포 하에 압도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왔음으로 아 연대는 전역량과 전 지능을 다하여 적 격멸에 분전하든 바 용감무쌍한 아 용사들은 수류탄과 지뢰를 안고 적 전차에 몸서 부닥처 폭파시키는 등 적에게 준 손실 막대하였으나 14:00 제3대대 진지가 적에게 돌파당하여 후퇴함에 따라 전세는 점차불리하게 전개되였으며 다식동(355~75.5)도하장으로 도하한 적은 금곡(39.5~75.0)에 집결하고 있었음"

제1사단 11연대 해평 지구 전투상보
이런식으로 탄을 안고 몸소 부딪쳐 전차나 자주포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정일권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군이 10여대의 전차를 폭파했다며 미군이 칭찬했는데 정일권은 "그거 육탄공격으로 겨우 한거임" 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전차도 무기도 부족했던 국군의 상황이었던지라 정말 궁여지책으로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미군은 본래 한국군에 있던 2.36인치 대전차포를 높게 평가하였고 따라서 3.5인치 대전차포를 별도로 지급하지 않았는데, 7월 초 죽미령 전투에서 털리고 난 뒤에야 3.5인치 대전차포의 중요성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포탄의 수량이 부족한데다가 국군의 훈련도가 저열하여 포탄조차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사병이던 장교던 그나마 군 경험이 있는 자는 위에서 언급됨과 같이 일본, 혹은 만주군 출신들이었으니 결국 '자살특공'이라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16]

아무튼 적은 8월 12일 14시에 제3대대 우측을 우회하여 진지를 돌파하면서 제3대대는 부득이한 철수를 감행하였으며 금곡에 수미상의 병력이 집결하여 아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명에 의거 신주막-다부동 일대로 철수하였다.
(3)369고지 부근의 공방전

8월 초, 함창 지구에서 철수한 연대는 명에 따라 다시 한 번 철수하여 4일 08시에는 하장동에 도착했다. 이때 적 제15사단은 소규모 부대와 정찰 부대를 이용하여 아군의 배치 지점을 탐지하고 있었고 연대는 소복동에 전투 지휘소를 세워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연대가 다른 연대보다 배치가 늦은 이유는 배치 지역까지의 거리가 멀어 약 100 km를 행군하며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ㄱ.왜관교 폭파

한편, 15연대 인근 미군 지역에서는 적의 공세로 대구가 위기에 처하자, 적을 저지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서 워커장군은 8월 3일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8월 4일까지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다."라고 명령했다.그리하여 미 제1기병사단은 3일 오후 8시 경 왜관교를 폭파하였다. 그런데 이때 미군은 낙동강을 도하하던 피난민들를 향해 총질을 하였고 다수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 민간인 희생과 그 증언

"사건개요에도 있지만 1950년 8월 3일 아침 경찰서에서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음. 낙동강 다리 양쪽 6Km이내는 8월 3일 오후 6시까지 전부 떠나도록 명령되었음. 여기는 다른 곳과 달라 격전기임. 왜관 주민들은 읍사무소로부터 피난증을 교부받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등지로 피난 가는 상태였으며 국군과 미군에 의한 희생자는 없다고 봄. 그때는 주민들이 다 떠난 상태였음. 저의 얘기를 하자면 저는 열차를 타고 갔는데 대구역에서 열차가 밀려 왜관역에서 오전 11시경에 출발 지천역에서 밤 11시에 대구역으로 떠났음. 밤 8시쯤 왜관교를 폭파했는데 폭파 소리를 저도 들었음. 그 당시 피난민 수가 많았고 소개령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에서 학살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모르는 실정임. 주민들은 알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임."

▲박호만의 증언
당시 박호만은 피난을 갔기 때문에 왜관교가 폭파되는 현장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이전에 내려진 소개령 때문으로 당시 희생자들은 대부분 인근 주민이 아닌 북방에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증언을 들어보면 희생자가 다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약목에서 소개명령을 받아 낙동강변 사과밭에 있었는데 해뜰무렵에 젊은 사람이 와서 전쟁터이니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여 집으로 왔는데 마을 사람이 와서 또 다른 곳으로 가라 하여 성주 작촌리로 피난 갔음. 그 후 귀가하여 보니 폭탄은 집에 떨어져 조부는 돌아가시고 조모는 마침 밭에 나가 화를 면했다고 함"

▲김진욱의 증언
이렇듯 김진욱은 집에 폭탄이 떨어진 것을 언급하며 왜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보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철교폭파 이후 미군에 의한 사격이나 폭격으로 낙동강에 종종 시체가 내려왔다고 한다.
김진석: "8월 4일 아버지가 오후 4시에 저와 동생, 그리고 소를 몰고 낙동강을 건너가는데 흰들(노석리)에서 왜관쪽으로 온은 중 1/3쯤 남겨두고 기관총으로 갈겨 제가 건너가니 미군이 '카라카라'해서 팬티만 입고 저의 아버지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손짓 발짓하니 그렇게 하라 하여 총에 맞아 죽은 아버지를 흰들 맞은편 버드나무 사이에 두고 피난 갔음. 동생은 총맞아 그 자리에서 물에 떠내려갔음. 2개월정도 지나 피난갔다 돌아오면서 시신을 찾았음. 그때 총을 맞아 저 혼자만 살았음"
이상수 의원: "다른 분은 건너다 어떻게 되었는지"
김진석: "가끔씩 시체가 떠내려 왔음"

▲김진석의 증언

왜관교 폭파당시 30여 명이 건너고 있었으며 이때 아버지가 낙동강으로 떨어 죽었다는 증언이 있으므로 희생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이후 미군의 사격이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미군이 당시 피난민 속에 적이 잠복하여 있을 것으로 판단 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북한군들이 북쪽에서 피난민들을 사격해서 남쪽에 있던 우리 미군 부대도 피난민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대장이 말하길 우리도 부대장도 그리 믿고 있었지요 피난민들 안에 북한군 병사가 숨어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민간인들 이었습니다 그저 민간인... 북한군이 아니였습니다 전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려고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북한군을 사살하는 것 보다도 최악의 짓이었습니다

에트리지, 당시 미군

ㄴ.연대의 철수와 피난민들

단기 4283년 8월 3일 23.00
보1사 15연 작명 제22호 인동 신장리 전투지휘소에서
명령
一. 1. 생략
2. 연대 좌측은 미군 기병 25연대 우는 제11연대가 방어함
3. 사단 포병은 주로 아 연대 정면을 지원함
二. 연대는 982고지 성수동 간에서 서방에 대하여 방어하려함
.三. 1. 각 대대장은 별지 명령요도에 의하여 단기 4283년 8월 4일 12.00까지 배배 완료 각각 배속된 대전차포도 종합 지휘하라
2. 대전차포 중대장은 단기 4283년 8월 4일 12.00까지 제1, 2대대에 반중대식 배속시켜라
3. 각 대대장은 단기 4283년 8월 4일 13.00까지 각 관측소 위치를 보고하라
4. 전방(강 서안) 경계는 각 대대에서 담당하여 요도로서 단기 4283년 8월 4일 13.00까지 보고하라
四. 생략
五. 통신대장은 단기 4283년 8월 4일 16.00부터 각대 간의 유무선 통신을 개시하라
세부에 관하여서는 연대 작전주임으로 하여금 지시케함
여는 인동 신장리 전투지휘소에 재함
보병 제15연대장
육군대령 최영희

8월 4일 오후, 제15연대는 인접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하기로 하여 각각 1개 소대씩 교차 배치하고 서로 간의 통신망을 연결하기로 하였는데 언어 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 철수하고 3대대의 연락 장교로 하여금 미 제5기병연대 2대대와의 통신을 연결하게 하였다.

이때 낙동강 건너편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발만을 동동 구른 채, 건너오지 못하고 있었다. 전날(3일) 워커 장군이 '낙동강의 모든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으므로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이 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하여 왜관교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은 특히 아군 제3대대 정면인 관선리 부근으로 모여들었는데 이 모습을 본 국군은 발만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으니 상부로부터 '피난민의 도하를 방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때 청주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는 한 여성이 노모를 업고 홀소나루터를 이용해 도하하고 즉시 실신했는데 실신한 여교사는 제3대대 위생병의 치료를 받은 후 깨어나 경건한 자세로 기도드린 후 피난민들은 모두 청주지방의 기독교인들이므로 적에게 잡히면 꼼짝없는 죽음밖에는 없다고 말하고는 피난민들의 구원을 애원하였다.

대대장은 용감히 도하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이 여교사의 희생정신에 감동을 받아 곧바로 수색대를 대안으로 보내 강 부근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 약 900여 명을 구원하고 대구로 통하는 산간소로까지 호송하여 주었다.

ㄷ.나루터에서의 교전

이 시기, 적은 제15연대 인근 2개 나루터인 비산 나루터(제2대대 방면)와 홀소 나루터(제3대대 방면)를 이용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ㄱ)비산 나루터의 교전

제2대대는 167고지-동락 나루터 사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각 중대로 전투정찰대를 편성케 하여 대안을 수색했다. 당시 대대 중앙선에 배치되었던 제5중대 정면인 비산 나루터는 강 기슭에 70 m에 달하는 무명고지와 84고지가 있고, 무엇보다 도섭이 가능했는데, 중대장 정점봉 대위는 이러한 지형의 특성을 감안하여 적이 급속도하를 감행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8월 5일 저녁에 전초진지에 다수의 병력과 화기를 추진 배치하고 침공에 미리 대비하는 바, 이날 23시를 기하여 적이 요란사격이 시작되자, 중대장은 곧 도하가 임박하였음을 알고 안병길 일등중사 이사 10명의 전투정찰대를 대안으로 보내 적정을 탐지하였다.

정찰대가 출발하고 곧 부중대장인 채수익 중위가 강을 건넌 피난민 속에서 위장한 적 편의대 2명을 생포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중대 좌단 청음초에 침투한 적 1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대안으로 침투한 전투정찰대는 무명고지 북쪽에서 84고지를 탐색하다가 적 약 1개 중대가 전투 준비를 앞두고 집결하여 있는 것을 보고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깨닫고 공격신호와 함께 죽음를 각오하는 사격을 퍼부었다. 다행히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적은 당황하였다. 정찰대는 급히 적과 접촉을 끊고 복귀하였는데 겨우 경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었따.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곧바로 대대에 보고했고 대대는 중대의 화력을 통제하면서 공격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록 적이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중대장이 조명탄을 발사하게 하였더니 전진 20~30m 수면에 30~40의 대나무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후속부대 1개 중대 병력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명탄의 발사로 적이 이미 도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중대는 중대장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온 화력을 적 부대에 집중하여 약 10여 분의 교전이 전개되었고 적을 격퇴하고 60mm 박격포로써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날이 밝은 후 확인하여 본즉, 수면에는 적 시체 49구가 떠다니고 있었다.

중대장은 김재렬 일등상사에게 전과 확대를 지시하여 김재렬 상사는 제3소대의 증강된 1개 분대를 이끌고 대안으로 침투하고 쉬고 있는 부상병 10여 명을 발견하여 이들을 포로로 잡은 후 복귀하였다.

이 교전에서 아군은 겨우 부상자 대여섯 명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적의 손실은 매우 커서 대나무를 입에 문 채 죽은 적의 시체와 약 60 cm짜리 대나무 20여 개가 교전 지점에서 남으로 약 1km 거리에 있는 제7중대 인근에서도 발견되었다. 교전이 끝나고 대대는 이때의 교전을 교훈 삼아 적의 접근을 사전에 발견하고자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 임무를 주었다

(ㄴ) 홀소 나루터의 교전

제3대대는 대대 전투지휘소를 석적 국민학교에 두고 3개 중대를 하천선에 설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대대수색대를 제1대대와의 전투지경선에 투입하여 적으로 하여금 측방을 노리지 못하게 하였다.

제9중대는 제3대대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으며 중대 정면에 홀소 나루터가 있으며 대안에는 과수원이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적은 작일 8월 4일에는 피난민을 도하시킬 때까지는 조용하더니 8월 5일에 이르러 돌연 전차와 야포 및 120mm 박격포를 방렬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갑작스럽게 적의 활동이 증가되면서 대대장은 제9중대장에게 적정을, 특히 전차의 배치상황을 수색하라고 지시하여 제3소대장 대리 박선문 이등상사는 이 임무를 부여받고 22시에 소대원 6명과 함께 대안의 복숭아 밭으로 침투하여 위장되어 있는 전차 4~5대를 발견하고 제방 뒤에는 적 약 1개 중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8월 6일 01시에 적은 도하를 개시하였으나 30여 분간 교전하여 9중대는 격퇴시켰다. 잠시 후 수색대가 도착하면서 대대는 적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곧 적의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지 약 1시간 후 8월 6일 03시에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적의 공격이 개시되어 제9중대 정면으로 다수의 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제9중대의 맹렬한 사격과 우일선의 제11중대의 지원으로 탄막이 형성되면서 적은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의 적은 04시에 단숨에 154고지까지 진출하여 아방에 혼란을 주었는데, 다행히 적은 오리동 방면으로 도주하여 안정을 되찾았다.

날이 밝고 보니 모래밭 일대에 적의 시체가 즐비했으며 적의 부상병을 포로로 잡고 중기관총 몇 정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대안의 적이 계속해서 포격을 하였으므로 구체적인 전과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날 밤 23시에 적은 이번에는 제11중대 방면에 출현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중대의 측방을 노려 중대를 돌파하고 369고지까지 진출하면서 제9중대의 후방을 교란하고 큰 타격을 주어 제11중대는 점차 분산되어 갔다.

이때 제9중대 2소대장 박종순 소위는 침착하게 제3분대를 노출된 측방으로 투입에 적을 저지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동이 트고 대대는 제11중대의 잔여 병력을 수용하고 369고지를 탈환하고자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때 제12중대장은 석적 국민학교 뒷편에서 81mm 박격포 사격을 지휘하다가 적의 기관총탄으로 온 몸이 벌집이 되다시피하여 쓰러졌으니 그는 곧 다부동 전투에서의 첫 중대장 전사자였다. 다행히 대대수색대는 369고지를 재차 공격 시도하여 2회의 공격 끝에 간신히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적은 3회의 걸친 공격에서 다수의 병력을 희생한 대가로써 아군이 방어배치 상황과 더불어 양점을 파악하여 결과적으로 아군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 성공하였으므로 결국 아군은 적을 저지하였으나 저지하지 못한 셈이 되었다.

 

ㄹ.지휘부의 판단과 적 전차의 도하

제15연대장은 1950년 8월 6일 아침에 연대 대전차 중대의 1개 소대(57mm 대전차포 2문)씩을 제1, 2대대에 배속하고 연대 전투지휘소를 465고지 북쪽 무명고지에 설치하였다.

이때 사단사령부에서는 8월 4일~6일 간의 전투경과 상황과 첩보를 종합분석하여 적의 차후 공격이 왜관-다부동 선인 제15연대 지역 즉, 369고지-유학산을 점령하여 다부동까지 진출하고 인접 제12연대와 제11연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대구를 공격할 것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우선 사단 예비대인 제12연대를 방문하여 제12연대 2대대를 제15연대의 예비대로 배속하였으며 제12연대 3대대를 도개동에 이동시켰는데 이로써 제15연대의 방어력은 상승하였다.
2. 사단장 각하 내대 약 15분 간 작전 요지 하달 후 출발하심
3. 사단 명에 의거 제2대대를 제15R 전면인 옥계동에 출동 제15R의 예비 대대가 됨 23시 - 출발 7/8 4시 21분 도착함

제1사단 12연대 진중일지
한편, 제1대대는 8월 3일 21:30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진지를 편성하고 제3중대는 제11연대에 임시 배속 후 5일에는 08:00부터 17:00까지 박격포 화기 교육을 시킬 정도로 전선이 평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는데, 적은 제1대대와 제3대대의 전투지경선 사이의 공백을 활용해 그 사이에 위치한 마진 나루터에서 수중가도를 건설하고 있던 것이었다.

1950년 8월 7일 밤 22:00경에 마진 나루터 서편 무명고지 일대에서부터 적 전차 10여 대와 45mm 대전차포 6문이 나타나서 약 10여 분 간 공격 준비사격을 개시하더니 곧 이어 트럭 20여 대에 분승한 적이 나루터를 건너 제1중대 방어진지를 살도하였다.

대대는 즉시 조명탄을 띄우고 배속된 57mm 대전차포의 집중사격과 박격포의 탄막으로 저지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아군은 결국 차량이 강을 도하하는 것을 보고 거대한 충격을 받았으며 적과의 백병전을 전개하여 간신히 격퇴하는가 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은밀히 물기슭 모래밭에서 호를 파고 숨었다.
8월 7일 역시 소수부대 기습함을 격퇴한 바 22.00경에는 Tank 10여 대와 직사포 6문 지원 하에 추럭 20여대에 분승한 적 보병이 강행 도하코저 함을 아 15R 1BN은 반격하야 23.00경 격퇴함

제1사단 다부동 지구 전투상보
그로부터 약 2시간이 흐른 후인 8월 8일 0시 20분에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0시 25분에는 수중가도를 이용하여 적 전차 15대의 무한궤도가 2/3만큼 잠긴 채 진지를 향하여 다가왔는데, 한 병사가 이를 보곤 "전차가 온다." 하고 겁 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대대는 급히 비상사태에 들어가 57mm 대전차포로 몰려오는 소련제 T-34/85를 공격했으나 단단한 장갑은 결코 부셔지지 않았으며 사단 포병대는 하필 이곳 마진 나루터로부터 12km 북방인 인덕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서 사거리가 닿지 않아 지대한 곤란을 격었다.

아군은 전차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전차는 유유히 강을 건너 단숨에 제1중대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적 약 1개 사단 병력은 하의산-수암산까지 점령하여 제15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제1중대는 아예 중대본부가 기습을 당함으로써 예하 소대들에 통신을 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제1소대장 이신국 중위는 이에 대한 영문을 묻고자 호에서 나가는 순간 등 뒤에서 함경도 사투리로 지껄이는 소리가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숨어라." 하고 지시한 뒤 연락병에게 후퇴 명령을 전달코자 하였으나 연락병이 도중에 사로잡혔으므로 소대장만이 홀로 살아 급히 철수하였다. 03시에 적은 201고지까지 진출하고 제3대대 방면에 154고지까지 공격하면서 제1사단에 비상이 걸렸다.

연대장은 사단에 포병 지원사격을 요청하였으므로 사단장은 사단 포병으로 하여금 탄막 공격을하라고 지시하면서 연대장에게 201고지를 탈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연대장은 급히 이 명령이 제1대대에 전달하였으나, 적은 이미 369고지까지 진출하면서 연대를 압박하였다.

04시에 전차 9대가 또다시 수암산을 침략하여 진출하자, 연대의 행정요원들까지 일선이 보충된 까닭에 연대의 행정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적이 수암산으로 진출하자, 06시에 배속된 제12연대 2대대로 하여금 수암산을 탈환하란 임무를 주었는데 다행히 성공하였다. 제1대대는 날이 밝고 낙오병들을 다시 모아 부대를 재편성하였으나, 병력은 60%에 불과하였다. 1대대는 연대 작전명령에 따라 다음날 있을 역습 준비에 착수하고 지휘소를 성곡동 건너편 무명고지에 설치하였다.

당시 대대에는 하의산-130고지 일대에 적 약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다는 적정의 상황을 입수하였는데 사실 이는 과소평가된 것으로서, 실제로는 더 많은 병력이 집결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적은 밤 사이 2개 연대나 되는 병력으로 거대한 공세를 취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ㅁ.제3대대의 고전

8월 8일 새벽의 전투 당시 제3대대는 몰려오는 적 전차를 인근에 위치한 미 제1기병사단이라고 오해하여 방심한 채 경계에 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대 CP인 석적 국민학교로 적 전차 5대가 진입하면서 대대는 눈 깜짝할 새에 분산되고 말았다.

이때 제9중대와 제11중대도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369고지와 154고지를 빼앗기면서 철수하였므로 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적지 않은 곤란을 격었다.

심지어 대대장의 소재마저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연대장이 직접 328고지에서 대대를 지휘하는 촌극도 발생했다. 당시 대대장은 신기동에서 잔존 부대를 재편성하고 홀로 고전 중이었는데, 정보장교와 작전장교의 행방이 묘연하였으므로 연락은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수암산 고지에서 연락장교인 장영종 중위를 만나게 되었고 드디어 교신이 이루어졌다. 장영종 중위는 우선 미군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였고 약 20분 후 154고지를 우회, 제10중대 진지를 돌파하려는 적 전차 2대에게 우군기 4대가 네이팜 탄을 투하하였다.

1번 전차는 화염에 휩싸이고 2번 전차는 도주하던 중 포남교가 무너져 적병들만이 도망하는 성과를 내었으나, 전차 4대는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아군은 피해를 계속 입었다.

대대장의 소재가 파악되자, 대대는 제11중대를 154고지의 주 공격 부대로 편성하고 제9중대는 이를 엄호하면서 공격을 감행케 하였다. 다행히 적은 고지 측면으로 침투한 아군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제9중대 3소대는 단숨에 8부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제서야 아군을 발견한 적은 수류탄전을 전개하였는데 소대장은 선두에서 기관총 사격을 직접 벌였고 흥분한 소대원들도 함성을 지르며 정상 30m 앞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수류탄이 하나 터지고 보니 소대장대리인 박선문 이등중사가 우복부를 잡은 채 쓰러져 있어 소대원들은 일시 공격을 멈추고 박 중사를 바라보았다. 박 중사가 "수류탄을 던져라! 돌격, 돌격이다!"라고 외쳤고 병사들이 다시 공격하여 정상을 탈환하고 박 중사를 긴급 후송했다.

한편, 연대 수색대는 22시에 154고지 공격에 투입되어 대원 총 36명은 백병전을 치르며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펼치고 대원 15명만 남기고 제3대대에 넘겼는데, 이로부터 약 30분 후 적은 다시 역습을 전개하여 154고지는 다시 적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다음날인 10일에 제11연대는 2대대에게 명령을 내려 369고지를 미리 탈취하게 하였으며 3대대는 좌측에서 이를 엄호케 하였다.
적은 전날 154고지를 빼앗긴 뒤 도하교두보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369고지를 사수하기로 마음먹고 배치된 병력에 대한 증원을 시작하였다. 이윽고 적과 제2대대의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되어 목표 동쪽 정상 50m 앞까지 갔을 때는 이미 사상자가 속출하여 공격이 저지되었다.

그리고 제2대대 정면 북동쪽에 있는 과수원에 적이 쏜 곡사포로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때문에 제5중대는 중대원 15명으로 편성된 특공대를 조직하여 11일 11시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를 견디며 3시간 동안 과수원에 도착하니 적의 보초가 졸고 있었다.특공대는 은밀하게 접근하여 찔러 죽인 다음 상황을 보고하여 위장되어 있던 76.2mm 곡사포 4문을 끌어내렸는데 어둑해지는 시점이었으므로 4시간을 소비하였다.

한편,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68고지-해평천 방어선에서 인민군 13사단과 15사단을 저지하던 11연대를 비롯한 1사단은 20시에 철수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해평지구에 나타난 적의 전차는 과수원 속에 숨어있다가 아군을 공격코자 길도 아닌 개울로 나타났는데 대전차포중대장 최금석 대위가 57mm대전차포 2문으로 하여금 500m 거리에서 사격하여 4~5대를 파괴하였다. 때마침 미군 제트전폭기가 나타나서 또 다시 파괴하였다. 이에 사기가 충천한 통신병들도 수류탄을 들고가서 과수원에 남아있는 전차를 공격하여 모두 7~9대의 전차를 부쉰 것으로 알고있다."

당시 제11연대 작전주임 보좌관 증언

5.다부동부근에서의 공방전

12일 밤~ 13일 새벽을 기점으로 국군 제1사단은 최초 방어선인 X선에서 명령에 의하여 다부동부근 Y선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3연대가 고수하고 있는 왜관 북쪽 6.5km를 기점으로 하여 11, 12연대를 5내지 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1)백선엽과 Y선

해평리에서의 치열한 격전이 있던 6일 백선엽 준장은 오상중학교 교실벽에 걸린 지도를 살펴보다가 한 지점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그곳은 다부동으로 이후 백선엽은 다부동지역을 정찰하면서 328고지-숲되미산-유학산-741고지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방어선으로 취후의 방어선을 단행키로 결정하고 이를 제2군단에 건의하였다. 이 무렵 군단에서는 워커선에 의거하여 방어선을 축소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었고 이후 사단에게 주저항선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당시 백선엽의 회고를 보면
"낙동강의 하천 장애물을 최대로 이용하여 결정적인 방어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당시 사단은 작전용 지도 한장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오상중학교에 걸려있는 일반 지도로써 상황판단을 하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본즉 다부동이라는 지명이 인상적이기에 그 부락에 가본즉 이름하고는 달리 빈촌이었으나 다부동이라는 지명은 다복하고 풍요한 마을을 뜻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직감적으로 길조를 느끼게 되었읍니다."

육군대학, 군사평론, 118~119합본 '다부동전투 회고'
제1사단은 1950년 8월 12일 20:00에 철수를 개시하여 상림동-다부동을 경유 "y"선[19]을 점령하라

《제 2군단 작전명령 제12호》中

이 구간은 전투정면이 20 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13연대가 개칭됨),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90~100%, 병력은 70%나 추가되었고, 이뿐만 아니라 T-34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2.연대는 아(我) 주저항선에 침입한 적을 섬멸하고 Y선을 확보하려함
전투지경선 공격개시 시간 개시선, 방면은 별지 투명도 참조
3. (1) 각대대장은 별지 투명도와 여(如)히 공격 진격하야 Y선을 확보하라
" (2) 대전차포 중대장은 3.5인치 로켙포반을 총합지휘하야 침입한 적전차를 격파하라

《제 1사단 11연대 작전명령 제37호(8월 16일)》中
위 작전명령을 보면 Y선 탈취와 로켓포을 쓰라는 명령이 보인다.

또한 12일 사단은 도로접근로를 방어하게 된 11연대에 15연대의 2개 대대를 배속하였다. 이후 좌익에 배치된 15연대는 2개대대로 328고지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화살표가 철수표시이며 그 옆 글씨는 "24시경 명에 의하여 철수함"이다
북한의 대구공격

(2)328고지전투

제1연대는 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km 지점 동석동에 배치하고 15연대는 그 북쪽 3 km 부근에 배치하였다. 또 328고지를 중심으로 제1대대를 좌측에 놓고 제3대대로 하여금 점령케 하였으며 제2대대는 제11연대에 배속하여 11연대의 철수를 도왔다.

ㄱ.신의주 독립연대

제 15연대 정면의 적은 12일 밤 제3대대가 270고지로 이동한 틈을 타 154고지를 확보하고 아군에게 발각되지 않을만큼 은밀히 328고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아군 제1대대도 망정동으로 이동한 뒤 328고지에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곳에 진출하고 있었는데, 당시 제3중대 1소대장 이신국 중위는 선두로서 고개를 올라가다가 "야, 몇 연대냐? 라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평안남도 출신인 소대장은 평안도 사투리임을 알아차리고 "내레 신의주 독립연대다 왜 그러디?"라고 답하자 그들은 아군으로 오해하여 쏘지 않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날따라 날씨가 매우 흐려 10여 m 앞의 물체가 겨우 식별될 지경이었다.

소대장은 연락병으로 하여금 주력부대의 전진을 멈추고 병사들의 철모를 모두 벗게 한 후에 서서히 접근하여 7부능선에 이르자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던 적을 총으로 쏘아대며 쳐들어가 1개소대 병력을 전멸시켰다. 그리고 적의 무기들을 노획하고 정상으로 올라가 적의 역습에 대비케 하였다. 6부 능선에서 다박솔이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고 중대장이 마침 정상에 도착하여 "어디냐?"라고 말하자마자 위치가 노출되어 적의 총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중대장이 옆구리를 움켜진 채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다. 후임으로 제1소대장이 중대장이 되었다.

ㄴ.적의 침공

당시 전투상보를 보면 적은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였던 대구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14일 01시에 약목에서 집결했던 적 3사단의 증강된 1개연대 병력이 이날 낙동강을 도하하여 국군 제1사단 15연대쪽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03시에 제1, 3대대로 하여금 328고지[21]에 침공한 적에 대한 사격을 집중시켜 이를 저지케 하였다.

그러나 12시 40분에 적은 증강된 병력 4개대대를 앞세워 재침공했다. 때문에 결국 8부능선까지 물러나 부대를 정비하고 일단 464고지로 철수하였다. 16시에 재편성을 끝마치고 특공대를 편성한 1, 3대대는 16시 30분에 미 공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총반격을 감행하여 20시[22]에 328고지(300고지)를 완전탈환했다.

그런데 23시에 적 약 1개중대는 아군 제2대대의 8진지 DQ593917 지점에 은밀히 침공하였으므로 제2대대 7중대로 이를 격퇴하였다. 적은 DQ603930 지점을 이용하여 도주하였으며 특공대는 후방에 침입할 수 있는 적의 유격대를 대비하여 신주막 진지로 철수하였다.

328고지를 탈환했을 때 즈음 제3대대는 신주막 일대에 고립되어 통신이 끊겼다. 이때문에 연대장은 연대수색소대를 파견하여 제3대대의 지휘소를 찾아 제3대대의 파견 경위 설명했는데 제3대대장이 수색소대의 배속을 원하여 연대장의 승인을 받고 328고지의 좌측을 점령케 하여 새벽에 침공하던 적과 교전을 벌여 결국 적을 격퇴시키고 사상자를 확인하니 아군은 1개분대의 사상자를 내고 적의 유기시체는 20구가 넘었다.

(ㄱ) 적의 대대적인 대공세

8월 15일, 이날은 광복 5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날까지 대구를 점령하고자 한 적은 정면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01:00 경에 적은 154고지에 병력을 증강하여 01시 30분에 98.2고지를 침공케 하여 아군에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단체로 '만세'를 부르면서 공격해왔다.[23]그리하여 적은 다시 328고지를 공격하였고 제1대대는 진전(陣前)이를 포착 후 수 불상의 적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328고지를 빼앗겼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 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 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다.
"괴뢰군 제13사단 육군소령 이익선이 말하였다는 적의 지령 및 그의 작전지령의 일부를 보면 김일성으로부터 8월 15일까지 대구를 완전점령하라는 지령이 있었으니까 연일 예비대 19, 21연대도 일련으로 나가자 우리는 금일을 기하여 대구를 해방싴이자 우리 후방에는 인민군 제2사단과 중공군 2개사단의 병력이 도착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전진전진 맹전진하자" 상장동에서

《제 1사단 15연대 낙동강 전투상보》中

ㄷ.유엔군의 융단폭격

328고지를 결국 점령한 적은 진지를 보강 중이었고 미 제5기병연대가 맡고 있던 작오산과 전투지경선[24]부근까지 진출하여 아군의 보급을 차단코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837고지-674고지 부근에도 병력을 증강하여 어디가 돌파구가 될지 예측조차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제3대대는 미 제5기병연대의 화력을 지원받아 16일 08시 30분에는 328고지 좌측에 있던 원진지를 재탈환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또한 제1대대는 09시에 328고지를 재탈환하였으며 제11연대에 배속중이던 제2대대는 진지를 개편하고 진목동에 적에 대한 사격을 집중시키자 12시에 적은 금호동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유엔군은 적에게 융단폭격을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좌일선은 안정될 기미가 보였다.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폭탄 960톤을 26분에 걸쳐 목표(왜관 북쪽)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증언했다고 전한다). 이 때 폭격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 정찰을 수차례 실시했으나 연기에 가려 구체적인 전과를 확인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사실 북한군은 이미 도하한 후여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심리적인 타격은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미 제8군의 건의에 따라 다부동 지구의 전황을 타개할 대책의 일환으로 왜관, 인동 서편 낙동강 대안의 5.6×12km(67.2km) 지역에 8월 16일 B-29 중폭격기 98대를 출격시켜 융단폭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폭격지역에 전개되었던 북괴군 제3사단이 이미 낙동강을 도하한 후였기 때문에 이 폭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軍史 第13號 50p

이때 이모습을 본 한 병사는 유머를 만들어 재미를 보탰다.

어떤 병사가 문득"「맥아더」는 막아라고 야단이고 「워커」는 윅윅 소리만 지르며 화를 내다가 「」이 대전에서 띵하고 갔는데, 이제야 제대로 싸우는가 보다"라고 소리치자 유학산 정상에는 때 아닌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이때부터 시작된 아재개그의 물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多富洞戰鬪』

17일 적은 전날의 폭격의 후유증 때문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군의 사기는 높아져 1, 3중대로 하여금 낙동강까지 진격케 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또한 5중대는 DQ582908지점 신기를 목표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고 직사포로 적의 집결지인 금호동을 포격하였고 야포로도 신주막 일대를 강타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18일에는 신기와 금호동을 점령확보하였고 또 제2대대를 이용하여 356고지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19일 제1,3대대는 200고지와 300고지(328고지)를 제2대대는 356고지를 점령확보하면서 방어에 임했다. 04시에 수암쪽 부근에서 적 약 1개대대가 출현하여 제1대대의 측면을 위협해왔다. 그러나 제1대대는 역습을 감행하였고 적은 374고지로 도주하였다. 이때 점곡을 점령한 아군은 미 기갑부대와 연합하여 신주막의 적에게 압력을 가했고 적의 포격에도 맹렬했던 아군 때문에 적은 전차를 이끌고 오히려 북방으로 퇴각을 개시하였다. 또한 이날에도 적은 미 공군 전폭기의 활동 때문에 대체로 교착상태였으며 따라서 1,3대대는 강기슭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제3대대에 배속된 특공대를 수암산부근 적에 대하여 방어케 하였다.
ㄹ.적의 재정비와 아군의 방어

20일 3일 간의 재정비를 마치고 이날 미 공군의 출격이 없는것으로 파악한 적은 0시 20분에 적은 아군 제2대대 정면 297고지에 1개대대병력을 남하시켰으며 신주막 일대에는 병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제2대대의 진지에 포격을 가할 때 아군 제2대대는 박격포로 DQ590937지점에 포격을 가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정찰대로 하여금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이러던 와중 03시에 적 전차 2대가 남하하여 제2대대의 OP에 포격을 가하여 옴과 동시에 적 2개 소대가 제7중대의 진전(陣前)으로 침공을 시도했으나 제7중대와의 20분 간 교전에서 패배해 신주막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또한 DQ583948 지점에 배치된 제2대대의 경계부대는 04시에 침입하는 적 약 1개소대와 10분 간 교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ㄱ) 328고지 탈환

적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미 전폭기는 11시 무렵 328고지 및 그의 후방일대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여[25] 200고지를 확보하고 제3대대를 지원하였다. 16시 아군 제1대대는 적의 저항을 받아가며 328고지에 육박한 결과 16시 30분에 목표를 완전탈환하고 패주하는 적에게 명렬한 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아군과 적의 공방전 끝에 328고지를 다시 확보하고 방어하였다.

21일 연대는 작일의 공방전으로 인한 손실로 현진지를 인근에 있던 미 제5기병연대에 잠시 인계하고 328고지 후방에서 잠시 재정비를 마치는 동안 방어에 임했다가 09시에 정비를 마치고 진지를 다시 인계받았다. 이때 적 2개대대 규모의 적이 남하하여 공격을 시작해왔는데 백병전 여러 번으로 20시에 적을 물리쳤다.
"우리연대는 북괴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강변제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였으나 북괴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328고지로 후퇴했다가 8월 21일 재차 공격을 시도하여 격전끝에 빼앗긴 낙동강선을 되찾았다."

당시 제1사단 15연대 60mm 박격포 사수 성경환 증언

ㅁ.전선의 안정화

22일 01시에 적 1개대대가 제1, 3대대의 전면에 침공하여 옴으로 아군은 병력은 전초병력을 철수시키는 한편 03시에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부대는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북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미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강기슭까지 진출하였다.
18시에 미 전폭기가 또다시 비행하면서 적진을 강타하면서 포진지를 분쇄하였다.드디어 적은 369고지쪽으로 퇴각함으로써 전선은 평온을 되찾고 부대는 다시 방어에 임했다.

23일~29일동안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으며 가벼운 정찰전만 여러번 일어났다.제1, 3대대는 29일 명에 의거하여 12시에 현진지를 미군에 인계하였고 철수 후 집결지 동명원을 향하여 출발했다.

 

ㅅ.파리떼와 모기떼

328고지 일대에는 네이팜탄과 화염으로 몸이 갈기갈리 찢겨진 시체들이 난무했으며 볼 때마다 소름끼치는 광경이 펼쳐졌고 악취가 풍겨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이에 따라 피아의 시체는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질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 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당시 15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황대형 일등중사 증언

또 더 큰 문제는 노무자들이 주먹밥을 분배할 때였는데 주먹밥을 손에 드는 순간 시체에 있던 파리떼가 옮겨붙는것이었다. 따라서 장병들은 진물과 피와 먼지로 범벅된 주먹밥을 항상 먹어야만 했고 이는 병사들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낮에 파리떼로 온갖고생을 했다면 밤에는 모기떼들이 극성을 부렸는데 피부가 노출된 얼굴은 물론이며 구멍이 난 전투복에 노출된 피부까지 처참한 죽음을 파리떼와 모기떼들로서 미리 직감해야 했다.

(3)수암산-유학산고지전투

수암산 유학산고지전투의 개황(槪況)

당시 제1사단의 배치 중 중앙에 배치되었던 제12연대는 13일 아침 제2대대를 숲되미산에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하였다. 또한 Y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12일 20시에 369고지 후방으로 이동하여 13일 다부동부근에서 재편성을 마쳤다

(1)주요 고지가 선점 당하다

적은 이때(8월 13일) 수암산 일대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 1개사단의 병력을 낙동강에 도하시켜 수암산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당시 유학산은 아군이 점령하면 임시 수도였던 대구를 방어하기에 유리해지고, 반대로 적이 점령하면 즉시 대구 공격의 발판이 되기에 때문에 확보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는 제2군단장 유재흥의 철수선 통제와 사단장 백선엽의 제1대대 철수로 말미암아 탈취당하게 되는데, 먼저 유재흥의 오판은 다음과 같다.
제2군단 작명 12호. 83. 8. 11. 18.00
一. 가 적은 계속 낙동강을 도하하려함.
나 군은 연합군과 같이 전략적으로 우세한 지형을 확보하려함.
二. 당 군단은 인접부대와 밀접한 협조하에 강력한 엄호부대에 의하여 "Y"선에 진지를 점령하려함.
三. 가 제1사단장은 제1기갑사단과 긴밀한 협조하 X일 20.00 행군개시 상림동~다부동을 경유 "Y"선에 진주하라.
나 제6사단장은 제1사단 제8사단과 긴밀한 협조하 X일 20.00 행군개시 도원리~군위~미흥을 경유 "Y"선에 진출하라.
다 군단본부 및 직할부대는 X일 13.00 행군개시 군위~신영~영천 경유 하장(河場)에 진출하라.
라 각연대는 증강된 1개대대의 엄호부대를 현재선에 잔치(殘置)하며 후퇴는 사단에서 통합지휘하라.
마 X일은 차후 지시함.
四. 생략
제2군단장, 육군준장 유재흥

제2군단 작전명령 제12호
작전명령 제12호로 Y선 철수를 명령한 유재흥은 작전명령에 사단의 철수 경로를 통제하면서 고지 점령 시간을 놓치게 되었는데, 제1사단은 다부동으로 남하한 후 다시 고지를 점령하려고 북상을 했던 반면, 북한군은 지름길을 이용하여 바로 남하하여 점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전명령에 표시된 '강력한 엄호부대'는 군단이 내려주던 것이 아니라 사단 독자적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15연대 2대대를 잠시 운용했을 뿐 적을 저지할 별다른 묘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군단장의 실책만은 아니며 이를 받은 국군 제1사단장인 백선엽 준장의 오판도 크다. 이 작전명령을 받고 군단에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학산 고지를 점령하기로 한 부대인 제12연대 1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무려 사단 지휘소인 동명원까지 빼냈기 때문인데 그 실책은 다음과 같다.

8월 12일 20시에 철수 후 이른 아침 대대는 유학산을 바라보며 하장동 부근 25번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었다. 이때 대대장은 부대행군을 보러 나온 부연대장에게 유학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부연대장은 "연대도 이점에 착안하여 사단에 건의했으나 사단에서는 지시받은 대로 하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느냐"라면서 어딘가 못땅해하였다
저렇게 12연대 1대대를 사단지휘소까지 굳이 뺐다.
이와 관련한 증언을 들어보면
"Y방어선이 설정되어 새로운 부대배치를 할때 나는 수암산과 유학산이 감제고지(瞰制高地)로서 중요하니 이곳에다 병력을 배치하자고 사단에 건의를 하였는데 사단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적이 먼저 진출하여 이 고지를 점령하는 바람에 우리가 근 10일간의 작전에서 많은 희생을 입게 되었다. 사단에서의 반대이유로서는 병력이 없는데  그 고지를 점령시킬 병력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제12연대 부연대장 김점곤 중령 증언
문: 다부동 전투시 낙동강 연안에서 Y선으로 철수시 일선에 배치할 대대를 사단사령부까지 철수시켰다가 재배치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 우리 대대는 금곡리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유학산을 바라보며 하장동 부근의 25번 도로를 따라 행군했는데 이때 대대장께서 부연대장에게 곧장 유학산으로 올라가 방어 진지를 구축하겠다고 건의했음 그러나 사단에서는 대대를 사단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동석동까지 철수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상세히 모르겠음

육군본부,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1 』 126p, 당시 제1사단 12연대 1대대 1중대장 이종철 중위 증언
이로써 아군 병력을 배치하기도 전에 유학산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14시에 백선엽이 참모들을 대동하여 정비 중이던 제1대대가 있는 곳으로 와서 유학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라 명령했다. 당시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행군시에는 못 올라가게 하고 이제야 공격을 명령하신다." 하며 울분을 터트렸으나. 명령에 따라 수암산 부근에서는 제2대대를 이용하여 미군의 지원을 받아 19시에 점령하였다. 또한 제1대대도 15시에 673고지를 공격했으나 지형이 험준하여 결국 공격이 저지되었다.

이는 전술적으로 상당한 오판이었기 때문에 군 공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하에서 주저항선을 배치할 일선대대를 주진지 후방 8km까지 행군시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했는지 그 이유가 모호할 따름이다."

『다부동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1)
"결국 지휘관의 상황판단의 잘못으로 수암산과 유학산을 탈취하는데[31] 얼마만한 아군의 손실을 초래하였던가를 알아야 하겠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韓國戰爭史』

홀로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있던 제3대대는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가 제1대대의 철수로 텅 비게 되었으므로 갑작스런 적의 공격을 받고 517고지까지 철수하였다.

14일 수암산을 점령하였던 제2대대는 05시에 이어 369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적이 저항하여 결국 저지되었다. 그리고 03시에 적 유격대가 아군복장을 한 채 공격해왔으나 1개소대로써 방어하였다. 한편 제1대대는 2차례에 걸쳐 673고지를 공격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원정으로 다시 돌아와 재공격을 준비하였다.
13/8
"현재 적은 수암산일대를 점령함으로서 보급로를 확보한 후 대구를 공격할 목표로 약 1개사단의 병력이 낙동강을 도하 일부병력은 수암산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음"

《제1사단 12연대 외내촌 수암산 유학산전투상보》
13/8
"제1대대는 공격목표선 도달시까지 아군 중화기 지원을 받으며 제6중대는 517고지를 경유 316고지로 진출하고 제5중대는 316고지를 우측으로 진출 각각 공격목표선까지 도달시는 일모로 인하야 공격이 부적하아 316고지 전방일대에 배치하는 전장을 정리함"

《제1사단 12연대 외내촌 수암산 유학산전투상보》

ㄴ.837고지의 소모전

15일 이날 제1대대는 837고지로 적정을 정찰케 하였는데 약 1개대대의 적을 발견하였다. 유학산(839~837고지)은 우리나라의 산맥 특징인 북고남저의 현상이 뚜렸하며 거미줄 등의 험준한 지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대장은 이 유학산고지를 바라보며 일찍이 점령했더라면의 아쉬움을 품고있었다. 이날 제1대대는 837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제3대대는 소학산의 진지를 보강 중이었는데, 수암산을 사수할 목적 또한 있었다.
8/14
"적의 병력이 증가되여 대공세(大攻勢)를 취하였음에 아 부대는 견고한 진지를 구출할 수암산을 절대사수하려함"

《제1사단 11연대 수암산 유학산지구전투상보》中

16일 14시 제3중대를 정면으로 제1중대를 인접해있는 제11연대 3중대와 협조하여 우측에서 협공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대장이 지형을 살핀 뒤 전투력을 힘껏 발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단 목표직전까지 진출한 다음 1개분대로 돌격하게 하였으나 적의 수류탄으로 인해 공격이 저지되었으나 적이 제11연대 3대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우측으로 돌진하던 1중대가 17시 30분에 목표를 탈취하였으나 30분 뒤 적의 역습을 받고 원위치로 복귀하였다.
(ㄱ)517고지전투

517고지는 유학산 주봉 1 km 남쪽에 있는 고지로서 점령하면 유학산 탈환전이 보다 더 쉽게 될 수 있는 고지였기 때문에,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고지였다.

한편 연대에서는 대대를 더 가까운 곳에서 지휘하기 위해 전투지휘소를 송산동에서 다부동 남쪽 500m거리로 추진하였다. 17일 아침 517고지를 장악한 적은 제15연대와 제12연대 2대대의 주보급로였던 997번 도로를 차단하였다. 또한 837-674고지에서는 적의 병력이 더욱 증원되었다.

16일 B-29폭격기의 위력을 본 국군장병들은 점점 방어태세를 느슨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다음날 새벽에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느슨해진 방어경계를 뚫고 517고지로 들어와 손쉽게 점령하였다. 그리고 15연대와 12연대 2대대의 주보급로인 997번 도로를 차단하고 837-674고지에 대한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리하여 연대장은 제1대대가 837고지를 하루빨리 점령하여 517고지의 북한군을 견제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새벽 제1대대는 제1, 3중대로서 북한군을 공격케 하였으나 적의 수류탄과 고지의 지형 때문에 13시 30분에는 제1, 3중대의 병력이 1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고참병은 대략 스무 명밖에 안 남아 결국 다시 원위치로 복귀했다. 한편 제2대대는 16일(전날)과 금일에 걸쳐 369고지를 공격했으나 마찬가지로 고지의 덩굴 등의 지형때문에 공격이 저지되었다.

18일 제3대대는 517고지의 탈환에 성공했다. 제1대대는 작일에 이어 유학산을 탈취할 계획으로 08시를 기하여 3차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은 저지됐고 재편성에 들어간 뒤 13시 40분에 4차공격에 들어가 9부능선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우군기(友軍機)가 나타나더니 북한군에게 퍼부어야 할 네이탐탄을 대대가 있는 고지에 떨어뜨렸다. 그 결과 대대는 북한군의 수류탄 세례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고 이 모습을 본 북한군은 박수를 치고 낄낄대며 웃었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 분대장은 개죽음은 면하자고 하여 20시에 다시 복귀했고 이때 공격부대의 손실은 무려 70%였다. 이렇듯 우군기의 오폭으로 손실이 막대하자 이날부터 대대관측소에 미군 전방항공통제반(FACT)이 파견되었다.

ㄷ.비참한 현실

전투 때마다 손실이 크다보니 신병이 들어올 때마다 재편성이 실시되었고 신병들을 조금이나마 훈련하면 03시가 다 되었으며 조금이나마 자려고 하면 모기떼가 달라붙어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으며 고참병들은 밤새도록 경계를 서야 했다

(ㄱ) 적의 보급로 차단

또한 보급도 추진되지 못하여 노무자로부터 주먹밥을 거의 받지도 못해 굶어야 했는데 이는 제1사단 12연대 1대대의 유학산 붕괴와 동시에 3대대의 유학산 주봉이 16일날 무너지면서 북한군이 517고지를 점령, 후에 12연대와 15연대의 주 보급로인 907번 도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07:00 적은 아군의 치열한 포화와 완강한 저항을 물이치고 DQ501877(망정리) 및 DQ487858(점미)858지점 계곡까지 침투하여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심지어는 왜관으로 침공을 시도하여 왔으나 DQ471849지점에 위치하는 제5연대 일부병력의 측방지원와 미 지원포의 지원으로 07:30 적을 격퇴시키고 적의 압력을 배제하며 예비진지를 견제함"

《제1사단 15연대 제2차낙동강전투상보》中
"8월 16일에는 12연대 3대대는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받아 황학동으로 후퇴했으며 그 다음날(17일), 517고지(유학산 남쪽 1km)도 적에게 점령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때 제12연대 및 제15연대 주보급로인 997번 도로가 차단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多富洞戰鬪』
"1950년 8월 17일 아침 517고지를 점령한 적은 남측사면(斜面)에 14.5mm 대전차총과 중기관총을 배치하여 997번 도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후속병력이 증원되지 않았는지 도로변까지는 진출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제15연대와 제12연대 제2대대에 대한 보급이 중단된 까닭으로 이 고지의 탈환 여부가 사단 방어작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多富洞戰鬪』

이때 보급상황은 당시 12연대의 양곡 소모 현황을 보면 알수 있다. (8.18~20)

8월 18일~20일간 12연대의 양곡 소모 현황 (홉)
날짜
수령
분배
18일
21,216
34,777
19일
19,136
-
20일
19,136
16,398

원래 12연대는 보급로 차단 이전 양곡을 최대 5만홉이나 수령하여 다부동 전투를 치렀으나 보급로가 차단된 직후에는 수령량이 반토막이 나버려 분배량이 수령량보다 많거나 아니면 거의 수치가 비슷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식수 보급도 추진되지 못했기에 전선 병사들은 갈증을 바위에 고여있는 핏물을 마시거나 아니면 골짜기에 흐르는 핏물로써 해소했다.[34]

즉, 이러한 상황이 매일 반복되었으므로 당연히 병사들의 사기를 지속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었고, 연대나 사단에서는 목표를 탈취하라고 명령하기만 하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만 늘어갈 뿐이었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북한군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19일 이날도 어김없이 대대는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말이 대대공격이지 실제로는 3개 분대 그것도 일렬종대로 돌격하면서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과 박격포탄에 의해 전멸하면 또 다음 돌격제대를 투입해 이를 반복하는 짓을 계속하였다. 시간히 흐르자 3개 중대 병력 모두 합해도 병력이 100명도 채 되지도 않을 지경이 되어 공격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북한군의 피해는 전사 20명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의 오판으로 유학산의 최초점령을 하지 못한 탓이니 아쉬울 따름이다.

20일 06시에 드디어 아군의 지원포병들이 포문을 열고 837고지의 6~7부능선까지 가볍게 진출하여 목표를 향해 전진했으나 날아오는 것은 적의 맹렬한 수류탄이었다. 아군은 분대를 순차적으로 하나씩 보내어 전투를 진행하였기에 피해가 극심했다. 한편 수암산 정면에서 적 제15사단이 영천 쪽으로 가고 그곳에는 적 제13사단이 들어섰다.

한편, 이날 북한군은 수암산 방면에서 미 제1기병사단 소속의 미군 6명을 포로하였고 150구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8월 20일 수암산 방면에서 인민군 부대들은 미군 제1기계화 사단의 미군 6명을 포로하였으며 150명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조선에서 미군 손실에 대한 조선인민군 총사령부 보도』

ㄹ.결사대의 항전

(ㄱ) 제3중대장의 사망

제3중대장은 이때 상황이 풀리지 않자 연락병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물을 마시자마자 적의 사격으로 머리가 관통되어 사망하였다. 그러자 제1중대장은 제3중대장의 시체를 끌어내곤 적개심에 불타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병력이 2, 3개 분대로 줄어들었고 죽음을 각오하고 선두로 돌격하기 시작하자 적이 놀라 진지를 버리고 도망갔다. 중대장과 병사 10여 명이 정상으로 올라왔으나, 적은 아군의 후속부대가 없음을 확인하곤 역습하여 중대장이 수류탄을 맞았으나, 연락병이 중대장을 데리고 다른 병사들과 더불어 도망쳤다. 중대장은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고 한동수 중위로 하여금 제1중대장을 맡게 하였다. 아군 3개중대에서 생존한 병력은 겨우 80명이었다

(ㄴ) 결사대의 측방침투와 무너지는 적

이러한 막대한 손실을 여러 차례 입음에도 사단과 연대에서는 목표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날 밤 보충된 병력은 고작 50명뿐이었는데, 제2대대가 숲되미산에서 급습을 받아 대대가 분산되었으므로 이를 해결하고자 병력을 여럿 보충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1대대장은 이날 살아남은 3개 중대 병력과 신병 50명, 그리고 4중대의 기관총 소대 및 대대탄약 작업소대의 병력 일부를 차출하여 3개 소총중대의 건제를 위해 재편성을 실시했지만 그 병력은 고작 150명으로 많아야 중대급 인원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대가 가진 병력이라곤 이것이 전부였기에 대대장은 이 150명으로 결사대를 편성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공격이 개시되는 8월 21일, 대대장은 이른 새벽에 결사대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앞장선다.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
돌격간 엎드리면 그 장소가 우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돌격을 주저하면 나를 쏘고 앞장서라 전우들이 흘린 피를 헛되게 하지 말자.

한편 적은 유학산 일대에 배치된 제15사단을 제13사단과 교대토록 했지만 아군은 이를 전혀 몰랐다.

이후, 대대장은 이때까지의 전투를 교훈삼아 790고지로 우회하여 목표 남측사면으로 돌파를 기도하였다. 대대장은 먼저 790고지를 탈취한 다음 837-820고지를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에 번호를 부여하여 제1, 2, 3봉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결사대는 21일 새벽에 은밀히 제3봉으로 접근하여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10시 30분에 제3봉을 탈취한 다음 제2봉과 제1봉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적은 강력한 정면과는 달리 측방의 공격을 받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다.
(ㄷ) 유학산 탈환
그러나 1시간 뒤 적이 정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역습해오자 결사대는 일단 제3봉으로 철수하고 제4중대의 박격포로 1, 2봉 간의 지점을 차단하여 제3봉을 끝까지 사수하였다. 이날 저녁 수색조를 파견하여 적정을 살핀 결과 공격의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적진을 향하여 은밀히 접근하였다. 이때 제2중대 제1소대장 이후희 소위는 고향은 내가 지킨다라며 유학산 공격에 선두로 나섰다. 이윽고 무려 9회에 달한 백병전 끝에 제2봉(837고지)를 탈취하였다. 다음날 병사들은 애국가를 합창했다. 한편 좌측에 있던 제3대대도 23일 06시에 드디어 유학산 주봉을 탈환하였다. 이에 따라 제1대대 제2중대장은 제3대대장을 만나 기쁨의 악수를 나누었다.
유학산을 완전히 점령한 국군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8월 22일 제1대대는 목표인 유학산우측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야 대대장을 선두로 돌격전(수류탄투척)으로 목표지점 20미터 전방에서 맹렬히 격공하였음 적의 유리한 지형으로 인하야 일시 저지당함 계속하야 22시 대대장이하 전대원이 결사적으로 전후를 각오하는 수류탄을 엄호할 육박공격을 감행 익일(다음날) 2시 악전고투(惡戰苦鬪)하든 유학산을 완전점령확보함"

《제1사단 11연대 수암산 유학산지구전투상보》中
8월 23일 우리 10중대는 유학산주봉을 공격하고 있었다. 조식 후 엄병길 중대장은 나보고 척후병으로 앞장서서 가라고 하셨고 나는 경계를 하면서 7~8부능선까지 올라가서 점심은 주먹밥을 먹고 난 후 계속 올라갔더니 사방이 어두어지자 적병들은 전일과 같이 총을 쏘고 난 후 수류탄을 던질 때 우리들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더니 적병들은 상봉으로 도망쳤다.

우리들은 추격하여 험준한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새벽에 천우신조인지 안개가 자욱해졌고 나는 용기 백배하여 수류탄을 던지고 함성을 크게 지르면서 돌격해 올라가 적병들을 사살하여 완전히 점령하였다. 동기생 10여 명과 함께 20연대가를 힘차게 불렀다. 이때 부봉을 점령한 9중대도 우리와 함께 불렀다. 이날 밤 요지 요지에 위치하여 경계하고 있을 때 새벽에 인민군장교와 병사 1명이 야음을 타서 접근해왔고 암호를 세 번 물었으나 대답이 없어서 조준해서 쏴버렸다.

날이 새고 가보니 인민군 장교와 병사는 죽어있었고 나는 적군의 몸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없었고 소련제 권총이 있길래 뺏고서는 엄병길 중대장께 갖다드렸다. 조식 후 미군과 교대하여 하산을 하고 하록에서 신병을 보충받아 재편성을 하고서는 가산 옆으로 해서 대구외곽을 돌아 영천근교의 간이역이 보이는 야산에 배치하여 호를 파고 경계에 들어갔다.

▲당시 제1사단 12연대 10중대 소속 최재인 증언
유학산전투시 마지막 고지를 점령하였을 때 보니까 적의 기관총 사수가 나무에 홀로 묶여있었다. 이는 흔히 적진을 점령하였을 때 볼 수 있는 광경인데 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이며 악독스러운 잔인성을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제1사단 12연대 분대원 박판동 이등병 증언

ㅁ.제2대대의 상황

한편 제2대대에서는 21일 아침 사곡동으로 진출하였고 역습준비를 마쳤다. 22일 제5중대는 05시에 316고지를 점령하였으나 6, 7중대의 숲되미산 공격이 저지되자 제5중대도 적의 역습을 받고 중대장이 사망하면서 철수하게 되었다. 23일 이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병력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24일 전날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유학산을 탈취한 것에 힘입어 제2대대도 수암산을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여 9부능선까지 접근했으나 적의 수류탄으로 공격이 저지되고 돌격할수록 피해만 늘어나는 셈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점점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적은 반격을 개시하여 상황의 패색은 짙어졌고 급기야 철수하는 병사들과 제지하는 헌병들의 사격전이 펼쳐져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제5중대의 경우 15명만 생존하였고 전투상보에 따르면 295명이 실종일 만큼 참담한 결과였다.

(ㄱ) 수암산 탈취전

25일 2대대는 특공대는 10시에 수암산 일대에 잠복하여 8중대가 야간사격을 하면 그에 맞춰 협공하는 전략을 짰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우군(友軍) 포격이 시작되어 20분가량 이어지자, 특공대는 130명 중 9명만이 건재하여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대대장에게 보고 후 316고지에서 밤을 세운 후 그대로 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대장은 8중대만큼은 꼭 야간사격을 강행하기로 했다. 드디어 중대는 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육박전 끝에 고지를 점령하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수암산을 드디어 탈취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대대장 이하 본부 요원들은 이를 듣고 다함께 "만세"를 외치며 기뻐하였고 곧 연대-사단으로 보고하였다.

a.뜻밖의 허위보고

그러나 아침이 되고 점령고지가 수암산이 아니라는것이 밝혀졌다

8중대장은 수암산 옆 고지가 수암산고지인 줄 알고 열심히 점령한 뒤 보고했지만, 자기가 있는 곳이 수암산고지가 아님을 알고는 보고를 수정했다. 연대-사단에서는 분노하여 8중대장을 군법회의에 넘기려 했으나, 대대장이 직접 고지를 확인하니 수암산고지와 그 우측고지가 불과 40 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고 옹호하여 상황은 진정되었다.

b. 실패한 수암산 탈환

제2대대가 '기필코 점령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인하여 끈질긴 공격을 펼쳐 고지를 탈취하고자 했으나, 8월 29일 결국 수암산고지는 끝내 점령하지 못한 상태로 미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에게 넘겨졌다. 여담으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韓國戰爭史』에는 수암산을 점령확보했다고 나와있으나, 잘못된 것으로서 당시 전투상보에도 수암산 우측고지라고 나와있다.
25/8
대대는 제8중대와 일시대보충대를 수암산 우측 고지에 특공대를 우측 고지에 배치 각각 진출하며 제5, 6중대의 분산된 소수병력을 집결 예비대로서 후방에 위치케 하고 일제히 수암산일대를 공격. 518고지 60동(東) 전방지점에 육박돌입함

《제1사단 12연대 외내촌 수암산 유학산 일대전투상보》中

(4)다부동부근전투

제11연대는 해평지구로부터 철수한 후 13일 03시 다부동에 도착하고 06시엔 제1대대를 상곡(505~68.1)~하곡(510~68.1)에 제2대대를 265.8고지~51.1~69.4에 대전차포중대를 51.0~66.5지점에 각각 배치하여 남하하는 적을 대비케 하였다.

14일 08시에 해방면으로부터 적의 일부병력이 집결하고 30분 뒤에 남하했다. 이후 아군 1, 3대대와 3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격퇴하였으나 진지를 고수하던 제2대대와의 통신이 끊기면서 보급로가 끊긴 채 고립되었다.[35] 한편 15연대 3대대가 우측으로 기동하여 적을 격퇴하고 제15연대의 6중대는 적에게서 작전지도를 노획했는데 그 내용은 다부동 서쪽 516고지를 제1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ㄱ.적의 맹공격과 466고지전투

15일 적은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이동한 적은 제1대대 진지를 지나 전차 6대와 자주포 7대를 이용하여 맹공격을 개시하였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고 김일성이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8시간 동안 적은 후속부대를 이용하여 맹공격을 펼쳤고 국군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육탄공격을 감행해야했다.

(ㄱ) 아군의 육탄공격

8월 15일
"아 맹공격에 적은 증원부대와 전차각종 사격으로 맹공격을 개시 3대대정면의 적 3개중대는 신동가로로 남하하는 한편 여남동(50.3~69.8)과 △26.5에 각각 칩입하여 왔음으로 3대대는 감연 이 적을 저지하는 한편 로켙포반을 제2대대에 배속하여 적전차에 대하여 육탄으로 치명탄을 감행하여 전차를 파괴 악전고투(惡戰苦鬪) 8시간 신주막 일대를 피로 물드리고 있었으며 속속 후속부대로서 침공하는 적은 시체를 넘고 넘어 침공함으로 부대는 전략상 부득기 진목정-금좌선까지 철수 15연대 제3중대는 천평동(53.0~65.0)일대에 위치하여 부대 철수를 엄호하였음"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또 동부대의 다른 전투상보의 내용을 보면
"부대는 감연 이에 대하야 반격 3.5인치 로켔트반을 제2대대에 배속 적의 전차에 대하야 육탄으로서 치명탄을 가함으로서 전차를 저지 악전고투(惡戰苦鬪) 8시간 부대는 제3대대정면이 적에게 돌파됨 배속 제5연대 1대대를 천평동 고지에서 잔여부대 철수를 엄호케하고 부대는 진목정-금좌리선까지 후퇴의 부득한 사정이었음."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ㄴ) 기이한 적진의 방송

한편 제15연대는 466고지까지 진출하고 저녁 전투를 벌일 때즈음 적진지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내용인즉 이렇다. "나는 한성여고생이다. 국방군들아, 총부리를 돌려라 대구가 보인다."라고 했으나 아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적은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급히 돌격해와 백병전이 펼쳐졌으나 466고지일대의 제15연대는 이고지를 기필코 사수하자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싸웠고 특히 금번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이 빛을 발했다. 전투이후 15연대는 빠르게 재편성을 실시했다.

(ㄷ) 광복절의 대공세

육군본부가 편찬한 '육군전사'에서는 당시 8월 15일의 정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적은 해방기념일인 금일을 기하여 전선에서 총공세를 취할 기운을 보였다. 서부 제13연대정면의 적은 작야 패배(敗北)하여 154고지에 집결하여 증원부대를 득(得)한 다음 합세로서 금미명(今未明)을 기하여 재차 침공해 왔으나 아 각대대는 강력한 방어전을 전재하여 현진지를 고수중에 있으며 중앙대의 제12연대는 작일의 요소(要所)에서 의연(依然) 국부(局部) 접적(接敵)으로써 대전중이며 동부 제11연대는 07:00에 전차 7대 장갑차 5대를 선두로 상림동방면으로부터 남하 신주막 소이리까지 침투할 작일의 적 약 1개연대병력과 격전을 지속하던 바 우세한 적에 압도되어 08:00경 부득기 다부동북방 약 3킬로미터지점에서 356고지일대로 지연전을 계속하면서 후퇴하였다. 이때 좌측 제3대대도 674고지를 약간 철수하였다. 15:00 군단작명 제14호에 의거 예비대로 있는 제13연대 제2대대는 인접 제6사단에 배속케 되었으나 제11연대정면의 상황이 불리하였으므로 제2대대는 제11연대를 지원코저 다부동으로 이동하였다."

(ㄹ) 아군의 반격

8월 16일
아저항선을 돌파한 적은 전차를 선두로 유학산, 산맥 3면으로부터 약 1개 연대 금곡등 산맥으로부터 약 1개연대 신주막 3면으로부터 약 2개 연대 병력이 각각 침공해 옴으로 연대는 차(此)적을 공격 피아간 맹렬한 포격전이 버러져 장기간에 걸친 교전 끝에 많은 살상자를 내였었음.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16일 야간의 적의 파장공격을 견디고 이날 제3중대의 방어진지를 탈환하였다. 14시에 전차를 선두로 1개연대의 병력을 유학산 산맥방변으로, 금곡사방면으로부터 1개연대, 그리고 신주막방면으로부터 2개연대를 침투시켰으나 아군의 강렬한 포격으로 적은 1개중대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17일 제15연대는 제11연대와 협공하여 제6, 7중대를 주공으로 금호동에 일제공격을 개시하여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금호동에 육박하여 09:00에 완전점령하였으며 356고지로 도주하는 적에 대한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한편 15연대 2대대의 5중대는 신기를 완전점령하고 적의 측방을 위협하였다.
ㄴ.미군의 증원
백선엽은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여 미 제8군사령부에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다부동 일대의 국군 제1사단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백선엽의 요청으로 경산에 있던 미 제25사단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38],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부대는 20시에 다부동 부근으로 전진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8월 17일, 8월18일
"연대는 미군부대와 협동하여 0930시를 기하여 우 6사단 10연대와 좌 12연대와 연결하여 제2대대는 예비대로서 진목정(513~616)에 위치하여 부대와 부대와의 간격을 이용하여 침공하는 적을 대비하고 좌로 제3대대는 △673.8(49.6~62.0) 무명고지(49.0~62.4)-(49.4~62.4)을 점령하고 있었음"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그러나 이때의 이면을 보면[39]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다부동전투'따르면
"야간에 운반하다가 도중에서 희생되는 노무자가 속출한 까닭에 다음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실탄이 떨어지기 일쑤이고, 굶주림과 불벝더위에 시달린 장병들은 피와 시체가 썩은 물이 뒤섞인 개울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고, 솔잎을 씹으며 허기진 창자를 달래기도 하였다."
라고 나와있다.

한편, 17일 재편성을 실시한 제11연대는 학도병을 포함한 300여 명을 제1대대에 보충하였다. 18일 09시 30분에 제11연대 제1대대는 증원된 미 제27연대의 좌측을 엄호하고 제2대대는 우측을 엄호하여 전차와 포병사격을 지원받아 반격을 실시했다. 제2대대는 우측 355고지부근의 예비대로서 적의 침공을 대비하고 제3대대는 673고지를 공격했다.

19시를 기하여 356고지까지 진출하는 동안 적은 조금밖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는 미군이 갑작스레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전차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대대는 적이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장은 제10중대장에게 야간공격을 실시하라고 했으나, 10중대장은 아래처럼 건의하였다.
포지원을 받으면서 주간공격을 하여도 매번 실패를 하였는데 훈련이 미숙한 신병을 지휘하여 야간공격하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생각으로서는 다른 중대로 하여금 2일간 주야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기만공격을 가한다면 적도 피로하여질 터이니 이러한 효과를 노려서 낮에 특공대를 편성하여 공격을 한다면 성공할 희망도 있으니 그렇게 하여 주시면 그때의 공격은 저의 중대가 담당하겠읍니다.
대대장은 중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9, 11중대로 하여금 기만공격을 펼치게 했고 20시에 적이 전차 2대와 보병으로 미군진지를 습격하자 전차를 격파하고 보병 사상자 100여 명을 내고 적은 퇴각하였다. 한편 제15연대 2대대는 재편성을 마치고 병사들에게 휴식시간을 주면서 연대장이 355고지를 방문해 대대병사들을 격려하였다.

19일 적은 작일의 막대한 피해로 금일에는 공격행동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 군단에서는 육본작명 139호에 의거하여 8사단에 10연대가 제2군단에 배속되자 1사단 사단장 백선엽 준장에게 지휘토록 하였다.
제2군단사령부
一.(1)적의 주력은 여전히 아 제1사단 정면에 지향하고 군위-다부동-칠곡방면으로 남하를 기도하고 있음.
(2)군은 연합군 지원 하에 차후반격을 준비중임.
二.군단은 일부증원부대의 증원을 얻어 "Y"선을 확보하려 함.
三.(1)육본작명 139호에 의하여 제10연대는 1950년 08. 18. 18:00부로 제2군단에 배속함
(2)제1사단장은 전기 제10연대병력을 통합 지휘하라.
四.생략
五.생략
제2군단장 육군준장 유재흥

《제2군단 작전명령 제15호》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보병사단 10연대를 제2군단 1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과 8사단이 20일 영천과 신녕으로 향하면서 영천·신녕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15연대 2대대는 08시에 행군을 시작하여 제11사단과 미군의 지원 하에 356고지를 공격하였고 08시 35분에 적과의 치열한 백병전으로 08시 40에 356고지를 완전탈환하였고 적은 신주막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또 23시에 특공대 1개중대를 파견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DQ468893지점의 포진지를 기습하여 야포 3문, 직사포 1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ㄱ)사단지휘소 기습
20일 이날 아군 우군기가 뜨지 않았으므로 적은 02시 무렵 소수의 병력으로 사단지휘소를 기습하였으나 백선엽 등 주요인물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하고 마침 10연대 2대대가 이들을 집중사격하고 격퇴하였다. 그리고 이 10연대 2대대는 11연대 2대대와 협공하여 13시에 741고지 부근의 적에게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갑작스런 기습으로 혼란에 빠져 도주하였고 10연대 2대대는 이들을 일부 쫓아 섬멸하였다.
(ㄴ) 정봉욱 중좌 편입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봉욱 중좌는 그대로 국군 중령으로 편입되었으며, 후일 장성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7사단장과 제3사관학교장까지 역임한 뒤 소장으로 전역했다. 2018년 작고.

 ㄷ.볼링장 전투(천평계곡 전투)

The road was nearly straight on a north-south axis through the 27th infantry position and for some distance northsard. Then it veered slightly westward. this stretch of the pass later become known as the "Bowling Alley"

Pusan: Publication: "Battle of the Bowling Alley - Tabudong"
볼링장전투 상황도

미 제27연대가 복곡에 진출한 1950년 8월 18일, 적은 본격적인 보병협동으로 야간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전이래 처음으로 이 골짜기에서 미군과 북괴군 간에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그 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이 무렵 정면의 적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전차 21대를 보충보급 받았다고 한다. 이 수량은 적의 전선부대가 단번에 보급받은 최대의 전차 보급량이었다.

미군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8월 18일 저녁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M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 명을 사살한 데 이어, 21일에는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강력한 북한군 보전협동부대의 야간 침투 시도를 5시간 만에 격퇴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두었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 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이곳의 좌표를 미리 따둔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이날 제8포병대대는 포탄 약 1600발과 박격포탄 2500발을 쏘아대었다. 날이 밝은 후 확인된 전과만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다수의 기타 차량과 유기된 시체 1300구였다.

이날 밤 목숨 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저지전을 편 채 전차전을 관람(?)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85 및 SU-76M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Battle of the Bowling Alley)'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졌다.

6.'Y'선 탈취 성공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Y선으로 지정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위에 언급되었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지고, 이 Y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할 때 혼란스러운 낙동강 방어선의 진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곳이 중요함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 이러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의하면, 야간 참호전 당시 피아 구분이 불가능해서 북한군이 가까이 접근하면 그대로 잡아당겨 참호 안으로 집어 넣는 식으로 움직임을 봉쇄시킨 다음 국군은 밖으로 나가 자기들이 있던 참호에 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적을 제압했다고 한다. 날이 밝고 보니 아군 참호 안에는 북한군 시신이, 참호 밖에는 국군의 시신이 많았을 정도로 난전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피해상황을 집계하니 국군 전사자는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7. 의의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구를 함락하고 부산까지 진격하기 위해 다부동 전투에 주력군을 동원하여 한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총공세를 펼쳤지만, 백선엽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은 미8군과 육군본부의 추가적인 병력 지원을 받아가며 25일간 거의 밤낮없이 이어진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다부동을 포함한 대구 북방은 북한군 8월 공세에서 주공 중의 주공이 집중된 정면으로, 북한군 3개 사단이 당연히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 1개 사단 정면을 선택[43], 당시 한국 제2의 대도시이자 임시수도 부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대구를 점령하고자 시도했다. 요컨대 대구 주공축선이야말로 북한군이 결전을 기도한 작전적 중심(Center of Gravity, Schwerpunkt)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방어하던 1사단은 초기 한미연합군을 통틀어 가장 넓은 정면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히 지연전을 벌이면서 퇴각한 후, 수암산-유학산-다부동을 잇는 선으로 정면이 축소되자 북한군 3, 13, 15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방어선을 고수해내며 북한군 8월 공세를 실패로 몰아넣었다. 다부동에서의 엄청난 손실과 지속적인 유엔군 전력 증강으로 북한군의 총공세는 8월 공세 실패 시점에서 보급과 병력면에서 작전한계점에 도달했다. 이로써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한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은 무위로 돌아갔다.

다부동 전투를 전후하여 마산 위기 영천 전투처럼 유엔군이 허를 찔려 낙동강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위기에 빠진 경우는 있으나,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이 작정하고 병력을 집중한 주공을 격퇴한 전투는 다부동 전투가 유일하다. 이는 포천-동두천-의정부 전투 이래 성공만을 거듭하던 북한군의 작전적 주공이 좌절한 첫 사례로, 다부동에서 1사단이 밀려났다면 교통의 요지인 대구가 피탈, 한미 전선이 양분되고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1950년 8월은 낙동강 방어전을 통틀어 피아 전력비가 북한군에게 가장 유리한 시점이었다. 즉 북한군으로서는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고, 유엔군으로서는 가장 막기 어려운 공격이 8월 공세의 대구 북방 축선 주공이었다. 이 공격이 실패하자 북한군이 적화통일을 실현시킬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졌다.

최근 연구에서도 8월공세의 주공인 상주-다부동-대구축선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한국군 제1사단은 심한 전투력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20여일간에 걸쳐 혈투를 치른 끝에 다부동 일대의 방어선에서 이들을 격멸함으로써, 대구 점령을 목표로 한 북한군의 8월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으며, 이 8월공세 이후 북한군은 작전한계점을 초과했다고 본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는 북한군의 기도 좌절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하여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와 한미간의 상호신뢰도 형성될 수 있었다.

8.여담

전투상보를 참조해보면 험준한 산지형으로 백병전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때에 따라 '육탄공격'도 간간히 이루어진 듯하다.
"금번 전투는 상상키 어려운 치열한 전투이었음. 특히 673.8고지 서북 약 700미터에 위치하는 무명고지(소위 700고지)를 7일간 13회에 긍하야 공격, 반복으로서 탈환한것임(제3대대 제9중대) 이 고지탈환에 성공하였을 시 적개심 충천(沖天)한[46]한 장병든 공수로서 적을 추격 희생자의 원한을 묻고자 『박치기』와 권투로서 전쟁하였음."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다부동에서의 총기부족 때문에 주로 적에게서 총기를 노획하였다.

당시 제1사단은 전황이 너무도 급박하여 대대급 이하 부대의 행정요원까지 모두 전투원으로 일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정확한 보충 및 사상 통계를 작성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1950년 8월에 제1사단이 정확히 사망자를 몇 명 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후에 피해 및 보충병 수효 등에 관한 증언을 취합해 대략적으로 추산한 결과 약 1만여 명이 손실되었다. 사단 하나가 통째로 녹아 없어진 뒤 새로 만들어진 셈. 사단장 백선엽 준장도 후일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하고 회고했다.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의 손실은 더 처참해서, 북한군 3, 13, 15사단은 다부동 전투 기간 도합 약 3만여 명을 손실한 듯하다.

급박한 상황 때문에 지도도 제대로 못구하여 대한민국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때는 지도도 없었다. 사령부에서는 학교에서 구해 온 대한민국 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세웠고, 일선에 나가 있던 사람들은 조그만 수첩에 실린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면 소재지에 가서 현지 지형을 그린 향토지도를 구해 가지고 와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당시 15연대 작전참모 최대명 소령 증언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 입장에서도 공포감이 컸던 듯 하다. 당시 북한군 소대장이었다가 전후 한국에 남은 참전자의 증언에 따르면, 먼저 작전나갔다고 알려진 타 소대의 인원 중 단 2명만이 진중에 보이길래 나머지는 어딨냐고 물었더니 "작전 나갔다 다 죽었습니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는 타 북한군 부대들도 대동이소했다고.

국군 내에서 도는 말에 따르면 낙동강 오리알이 이 전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참전한 조지훈이 쓴 "다부원에서"가 다부동 전투를 소재로 한 것이다. 간간이 EBS 교재나 모의고사에서 볼 수 있다.

다부동 전투 직전 낙동강 전선 서남부에서는 작은 규모였고 덜 알려졌지만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인 마산 위기가 벌어졌다.

다부동 전투 이후의 영천 전투는 6.25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의미 있는 전투였다. 전투의 패배로 작전계획의 골간이 와해된 적은 전략의 근본방침을 바꿔 전면적인 철수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47]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으로 매년 봄에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의 주도하에 칠곡대대와 성주대대, 구미대대, 왜관읍에 위치한 미군부대인 캠프 캐롤에서 유해발굴을 하는데, 반 세기를 훌쩍 넘은 유해와 유품이 많이 나온다. 한 달간 35~60구 정도를 발굴하며 치열했던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칠곡군을 '호국의 고장'이라 부르고, 이를 활용한 실제 평화 축전, 마라톤 등이 벌어지며 6월에는 다부동 전투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48] 그리고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중앙고속도로 다부 나들목 옆에 위치하고 있다.[49] 근데 그 위치 때문에 고속도로가 드리프트를 한다. 다부 나들목은 중앙고속도로에서 운전자에게 악명이 높다. 이곳 말고도 왜관읍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왜관 전적 기념관이 있다.

90년대, 00년대 당시 다부동전투기념관으로 인근 초중고 학교에서 6월 즈음해서 하루 견학을 많이 갔는데 안에 전시장 내부에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마네킹으로 재현해놓았다. 문제는 피칠갑에 팔 다리가 다 잘려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충격을 먹었다.

전투 중 미군 수뇌부에 백선엽을 위시로 한 국군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간 적이 있었다. 백선엽 장군의 수기에 따르면 실제로 한국군 11연대 1대대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2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면서 후퇴 중이었다고 한다. 미 27연대전투단은 계곡 아래의 평탄한 회랑에서 북한군을 방어하고, 11연대 1대대는 회랑 측방의 고지를 사수하며 이를 엄호하고 있었는데 측면의 고지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 27연대전투단은 방어는 고사하고 퇴로마저도 사라져 정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흥분한 미군은 "한국놈들이 자기네 땅을 지키는 전투에서 싸우지 않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뭐냐"면서 분통을 터트렸고, 백선엽에게 이딴 식으로 싸우면 우린 철수해 버리겠다고 항의하러 갔는데, 정작 항의하러 간 사람들은 사단장 백선엽이 일선에서 돌격하는 광경[50]을 봤다. 결국 보고를 올린 담당자와 장교들이 사과했다.[51]

이 인연으로 백선엽은 2020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 매장이 무산될 경우 다부동 전적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위대는 매년 간부후보생들을 다부동으로 보내 현장 실습한다.#

한여름의 대구 근방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마무시하게 더웠다. 35도를 웃도는 폭염은 예사였다고. 3개월 뒤 장진호 전투와 기상조건이 정확히 반대다.

위 사진이 다부동 전투 당시 한국군이 90mm 대공포로 지원사격을 하는 모습이라는 일부 설명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M3 105mm 경곡사포 이외에 변변한 야포를 장비하지 못했다. [52] 이것은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돌입할 당시 한국군 제1사단 지원차 배속된 미군 제78 대공포병대대(78th AAA Gun Battalion)의 포격 모습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드라마 로드 넘버 원에서 등장한다. 아무래도 특공조의 활약과 극적인 역전이 대중들에게 유명한 전투이다보니 두 작품 모두 주연이 특공조를 조직하고 작전을 수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2019NHK에서 방영한 숨겨진 전쟁협력 - 한국전쟁과 일본인 다큐멘터리, 해당 다큐를 바탕으로 출간된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후지와라 가즈키 저, 박용준 번역)#에 따르면, 일본인 약 70여 명[54]이 미군 소속으로 한국으로 파병되었고 그 중 18명이 지상전에[55] 투입되었고 4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 중 1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이름은 '히라츠카 시게하루(平塚重治)'인데, 그의 동생 히라츠카 데루마사(平塚昭正)가 직접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인 경상북도 가산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 전투를 기념해서 중앙고속도로 초기 계획부터 고속도로가 무조건 다부리를 거치도록 계획을 잡았고, 그 결과 다부터널과 다부IC가 생겨났다. 다부리는 인구가 고작 350명에 불과한 작은 동네라서 원래라면 고속도로가 안 지나가는 것이 맞는데, 다부동 전투 때문에 일종의 군사 성지가 되었으므로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가 다부리를 직접 들어오게 되었다.

제12연대장 박기병 대령과 제2대대장 조성래 소령이 수암산에서 적정을 살피고 있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한국 현충원 안장…“미-한 동맹 창시자”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6.25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고 백선엽 장군의 안장식이 오늘(15일) 한국 국립묘지인 대전 현충원에서 엄수됐습니다. 백 장군은 6.25전쟁 당시 전투복과 같은 모양의 미군 전투복을 수의로 입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6.25 전쟁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쯤 서울아산병원에서 엄수됐습니다.

서욱 한국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열린 영결식엔 유가족과 정경두 한국 국방부 장관, 박한기 합동참모본부 의장, 로버트 에이브럼스 미-한 연합사령관,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역대 육군참모총장, 보훈단체 관계자 등 7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등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도 자리했습니다.
군악대의 비장한 연주와 함께 육군 의장대원과 미군이 위패와 영정, 고인이 생전에 받았던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 태극기로 감싼 백 장군 관을 들고 영결식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에이브럼스 미-한 연합사령관은 추도사에서 고인을 “철통같은 동맹의 창시자 중 한 분”으로 평가하며 “한국전쟁 지상 전투의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서 유엔군 전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군을 이끌었고 한국군의 기초를 다진 분”이라고 추모했습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이어 “전우여, 안녕히 가시라(Farewell, friend)”는 인사와 함께 유엔군사령부와 미-한 연합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를 대표해 조의를 표했습니다.

역대 연합사령관들도 추모 영상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사령관은 고인이 “미-한 동맹을 지원하고 장병들을 사랑하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며 “백선엽 대장의 전설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월터 샤프, 제임스 셔먼, 빈센트 브룩스 등 다른 전임 사령관들도 잇따라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장의위원장인 서 총장은 조사에서 “작년 5월 장군님을 예방했을 때 더 강한 육군을 만들어 달라시던 그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며 “장군님이 사랑하는 전우들과 함께 피와 땀과 눈물로 지킨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사단장을 지낸 송영근 예비역 중장은 추도사에서 6.25 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승리를 이끌었던 고인의 공로를 상기하며, “당시 패배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고 저나 여러분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사단은 고인이 6.25 전쟁 당시 이끈 부대입니다.

백 장군 장남인 백남혁 씨는 “아버지가 모든 전우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녹취: 백남혁] “이제 아버님의 그 꿈은 이뤄졌습니다. 저 하늘에서 모든 전우들과 만나기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인 노인숙 여사를 시작으로 주요 참석자들의 헌화와 분향이 끝난 뒤 영구차는 봉송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장식이 열리는 대전현충원으로 향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서 열린 안장식에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도 참석했습니다. 

안장식에서 경북 다부동 전투 참전용사와 장병 등이 백 장군 묘에 허토했습니다.

허토용 흙은 고인이 생전에 의미 있다고 생각한 다부동 등 6.25 격전지 8곳에서 퍼 온 겁니다. 

6.25전쟁 당시 전투복과 같은 모양의 미군 전투복을 수의로 착용한 고인은 유족의 눈물 속에 영면에 들었습니다.

지난 10일 100세 일기로 별세한 백 장군은 불과 33세 나이에 1953년 1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 한국군 역사상 최초의 4성 장군이자 ‘6.25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알려진 간도특설대에서 2년 남짓 복무한 이력 때문에 한국 내에선 백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여부를 놓고 찬반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날 안장식 현장에선 찬반 민간단체들이 대치해 한때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지만 큰 충돌은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 

국무부, 백선엽 장군 타계 애도 성명…“자유와 민주주의 위한 싸움의 상징”

1950년 대구에서의 백선엽 장군

미 국무부가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타계에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운 점을 강조하며, 애도와 감사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14일 성명에서 “미국은 백선엽 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오테이거스 대변인] “The United States extends its sincerest condolences to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on the death of General Paik Sun-yup. As Korea’s first four-star general, his service to his country in the Korean War was emblematic of the fight for the values of freedom and democracy, values that both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continue to uphold today.”

그러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오테이거스 대변인] “ In his work as a diplomat and a statesman, General Paik served his country with great distinction and helped to forge the U.S.-ROK Alliance. In

the spirit of our shared sacrifice, we offer our deepest sympathies and gratitude for his service.”

모건 오테이거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함께 치렀던 희생의 정신으로 우리는 그의 봉사에 가장 깊은 애도와 감사를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도 12일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 장군 타계에 대한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었습니다.

NSC는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은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라면서, “우리는 99세를 일기로 타계한 백선엽 장군을 애도하며 그가 남긴 유산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 등도 직접 백 장군의 빈소를 찾고, 성명을 발표하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백 장군은 지난 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6.25 한국 전쟁 당시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며 전공을 세웠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

백악관 “한국, 백선엽 장군 덕분에 번영하는 민주공화국”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백선엽 대장을 추모하며 함께 찍었던 사진을 올렸다. 해리스 대사는 백 장군이 지도자이자 애국자이며, 정치가였다며 현대 한미 동맹 구축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미 백악관이 12일 한국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타계에 애도를 표했습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이날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밝혔습니다.

[백악관 NSC 성명] “South Korea is a prosperous, democratic Republic today thanks to Paik Sun-yup and other heroes who put everything on the line to defeat Communist invaders in the 1950s. We mourn General Paik’s death at age 99 and salute his legacy.”

이어 “우리는 99세를 일기로 타계한 백선엽 장군을 애도하며 그가 남긴 유산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백악관은 이날 성명과 함께 백선엽 장군의 영문 회고록인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전시 회고록’ 표진 사진을 함께 올렸습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도 앞서 10일 밤 ‘트위터’에 “한국 최초 4성 장군에 올랐던 백선엽 육군 예비역 대장의 지난밤 별세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해리스 대사는 “지도자이자 애국자이며 정치가였던 백 장군은 현대 한미 동맹 구축을 주도했으며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말도 남겼다”며 “유족분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며, 백 장군이 그리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병력 8천 명으로 2만여 명의 공세를 막아내 전세를 뒤집는 등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한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지난 10일 만 99세의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VOA 뉴스

전 미 사령관들 “백선엽 장군은 나의 스승...한국 생존과 번영에 막대한 기여”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은 지난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주한미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했던 퇴역 4성 장군 4명이 VOA를 통해,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백선엽 장군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전 사령관들은 하나같이 백 장군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그가 한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전 사령관들의 메시지를 백성원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백선엽 장군과 오랫동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온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백 장군을 “누구보다도 부하를 사랑했던 지휘관”으로 기억했습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틸럴리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이 연합사령부 참모들을 이끌고 비무장지대(DMZ) 인근을 걸으면서 한국전쟁 당시 부하들이 배치됐던 위치를 가리키며 개별 병사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He loved his soldiers and I remember he took the CFC staff on a terrain walk near the DMZ; as we walked, I remember him pointing to positions his men manned during the Korean War and mentioning the names of the Korean soldiers who manned those positions.”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틸럴리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의 사망은 한국과 미-한 동맹,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큰 손실”이라고 애도했습니다. 이어 백 장군을 “영웅”으로 지칭하면서 “외교관이자 애국자였고 친구였다”고 말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General Paik passing is a great loss to the Republic Of Korea, the ROK/US alliance and to me personally. He was a hero, diplomat, patriot and friend.”

특히 자신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지낼 당시 백 장군과 깊은 교감을 나눴다고 소개하면서 “그는 나의 스승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친구이자 지도자로 남아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존 틸럴릴 전 주한미군사령관] “He was a mentor to me when I served as the Commander In Chief Combined Forces Command and remained a friend and leader thereafter.”

틸럴리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이 ‘미-한 안보세미나 프로그램’을 창설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그는 언제든 연합사령부를 지원할 준비가 돼 있던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He was instrumental in establishing the Combined United States Korea Security Seminar Program which continues to support the ROK/US alliance...He was a soldier’s soldier who was always available to support the CFC command.”

이어 “한국에서 복무했던 우리들 모두와 나에게 너무나 중요했던 분을 잃은 데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백선엽 장군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It is difficult to put into words the great loss of someone who has meant so much to all of us who served in The Republic of Korea and to me personally.”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던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을 “한국군의 아버지”로 평가하면서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군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것과 다를 게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General Paik, Sun-yup was in my view the military father of his present day country, the Republic of Korea.  Not unlike America's George Washington who led our Revolutionary War forces to battlefield victory and was the military father of the United States, General Paik led South Korean forces to many battlefield victories during often chaotic and extremely uncertain combat operations against north Korean invaders and their Chinese partners.”

“백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침략자인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에 대항해 혼란스럽고 극도로 불확실한 전투 작전 속에서 한국군을 거듭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조지 워싱턴의 독립전쟁 승리와 비교할 만하다”는 설명입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벨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은 전술과 작전에 매우 능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영감을 주는 전투 지도력과 영웅적인 근접전투를 통해 병사들을 이끌고 결집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He was tactically and operationally very smart, and he was a fearless warrior.  Most importantly, he led and rallied his forces through inspirational battlefield leadership and heroic close combat.”

벨 전 사령관은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지낼 때 백 장군과 자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전수했고 두 번이나 나를 데리고 전투지역을 차로 돌며 가르침을 줬다”고 회고했습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When I served as Combined Forces Commander between 2006 and 2008, General Paik met with me frequently to pass on lessons of the Korean War and twice took me on battlefield staff rides to teach and mentor me.  He was brilliant.”

벨 전 사령관은 “퇴역한 뒤에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백선엽 장군을 방문해 위대한 전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가 조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데 대해 감사를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잃었고, 나는 진실한 친구를 잃었다.” 고 애도했습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On each of my return trips to Korea since my retirement, I always made a point to stop by to pay my personal respects to this great warrior and thank him for his incredible contributions to his country's survival and peaceful development.  We have lost one of the world's great military leaders and a true friend of mine.”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에서 복무한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다”면서 “그는 지난 70년 동안 한미동맹을 강화했고 동맹이 깨지지 않도록 만든 진정한 영웅이자 애국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 “I am very sad to hear about the passing of General Paik Sun-yup.  He was a true hero and patriot that helped keep the ROK-US Alliance strong and unbreakable for the last 70 years.”

이어 “내가 유엔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을 때 백 장군은 나의 가까운 친구이자 스승이었다”면서 “나는 언제나 그의 통찰력과 현명한 조언자 역할을 존경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 “General Paik was a close friend and mentor for me during my time as the Commander United Nations Command, 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and US Forces Command.  I always respected his insights and close mentorship.”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

서먼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안보에 전념한 매우 헌신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유의 가치, 그리고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오래 지속될 유산을 남겼다”고 강조했습니다.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 “A very dedicated and trusted leader who was committed to enduring peace and security of the Korean Peninsula.  General Paik knew what the price of freedom and sacrifice was all about. He will be missed and has left a lasting legacy.”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하며 백선엽 장군의 말년을 함께했던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미-한 동맹의 진정한 영웅 백선엽 장군의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다”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I heard the tragic news about the death of the true hero of the Alliance. Gen. Paik Sun-yup. I've had many encounters with him from his earliest 1996, and was always honored whenever I had a chance to meet him. I've celebrated several birthdays within the recent years.”

이어 “나는 1996년 이래 백 장군을 여러 차례 만났고,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광으로 생각했다”면서 “지난 몇 년간은 백 장군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브룩스 전 사령관은 “나는 수십 년 동안 백 장군을 존경해왔다”며 “그의 사망은 미-한 동맹에 깊은 손실이며, 진정한 역사의 한 부분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I have admired him for now many decades. So this is a deep loss for the Alliance, and a true part of history that has just passed away, but we wish him to rest in peace with the many warriors that he led in war, and those that preceded him that admired him and served with him along the way.”

브룩스 전 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의 명복을 빌며 그가 전장에서 이끌었던 많은 전우들, 그리고 그를 존경하며 함께 복무하다 먼저 떠난 전우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원한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입니다.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백선엽 장군 분향소'가 마련됐다.

-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1996~1999년)

백선엽 장군의 사망은 한국과 미-한 동맹,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에게 큰 손실입니다. 백 장군은 영웅이었고, 외교관이었고, 애국자였고,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지낼 당시 그는 나의 스승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친구이자 지도자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한미동맹을 계속 지지해 온 ‘미-한 안보세미나 프로그램’을 창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가 연합사령부 참모들을 데리고 DMZ 인근에서 지형도보답사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걸으면서 한국전쟁 당시 부하들이 배치됐던 위치를 가리키며 병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했습니다. 그는 연합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 늘 준비가 돼 있던 군인들의 군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복무했던 우리들 모두와 개인적으로 나에게 너무나 중요했던 분을 잃은 데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한국과 민주주의, 자유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은 그의 저서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백선엽 장군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2006~2008년)

나는 백선엽 장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을 오늘날 그의 조국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군의 아버지였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침략자인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에 대항해 혼란스럽고 극도로 불확실한 전투 작전 속에서 한국군을 거듭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술과 작전에 매우 능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영감을 주는 전투 지도력과 영웅적인 근접 전투를 통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결집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지낼 때 백 장군은 자주 나와 만나 한국전쟁의 교훈을 전수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나를 데리고 전투지역을 차로 돌며 가르침을 줬습니다. 나는 퇴역한 뒤에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백선엽 장군을 방문해 위대한 전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가 조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데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실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에게 축복을 기원합니다. 

-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 (2011~2013년)

백선엽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픈 마음입니다. 그는 지난 70년 동안 한미동맹을 강화했고 동맹이 깨지지 않도록 만든 진정한 영웅이었고 애국자였습니다. 내가 유엔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을 때 백 장군은 나의 가까운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의 통찰력과 현명한 조언자 역할을 존경했습니다. 그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안보에 전념한 매우 헌신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백 장군은 자유의 가치, 그리고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는 오래 지속될 유산을 남겼습니다. 

-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2016~2018년) 

미-한 동맹의 진정한 영웅 백선엽 장군의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는 1996년 이래 백 장군을 여러 차례 만났고,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은 백 장군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백 장군을 존경해왔습니다. 그의 사망은 미-한 동맹에 깊은 손실이며, 이제 진정한 역사의 한 부분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백선엽 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가 전장에 이끌었던 많은 전우, 그리고 그를 존경하며 함께 복무하다 먼저 떠난 전우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남과 북이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 조선족자치정부(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를 잘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중국 조선족자치정부(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는 한민족(조선족)의 셋 개 정부 중 하나의 정부입니다 만주지역을 잘 알고 있는 백선엽장군 세대들이 돌아가시고 나니 자꾸만 통일이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과 북이 통일전쟁을 해도 평화통일을 해도 중국 조선족자치정부가 남과 북을 선택하여 지지해야 완전한 자주적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

동북 3성 요녕성(리오닝성), 길림성(지린성), 흑룡성(헤이룽장성)
길림성(지린성) 조선족 연변자치주
장백 자치현

두만강과 압록강 맞은 편에는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이 있다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등 한민족(조선족) 3개 정부가 존속하고 있다

 

1.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

연변조선족자치주 현급구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연변조선족자치주, 延邊朝鮮族自治州)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지역 지린 성(吉林省)의 자치주이다. 중심지는 연길(延吉)이다. 자치주의 면적은 43,474 km2, 2009년 인구는 2179천명이다.

 

이 곳은 80만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 가운데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이며,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둔화 시를 제외한 연변 지역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46.5%이다

민족분포: 조선족 32%, 한족64%, 만주족2.4% 

(1)지리

남쪽은 북한 함경북도와 량강도, 동쪽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북쪽은 헤이룽장 성 무단장, 서쪽은 지린 성 바이산에 접해 있다. 백두산은 이 지역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해란강(海蘭江)과 가야하(嘎呀河) 등 주요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두만강에 합류한다. 수계는 쑹화 강(송화강) 수계와 무단 강(목단강) 수계, 두만강 수계가 주이며 라즈돌나야 강(쑤이펀허) 수계도 존재한다.

(2)역사

이 곳은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둔화 시에 있던 동모산(東牟山)은 발해 건국의 출발지였다. 이 지역은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큼 현재도 발해 관련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묘(둔화 시 육정산(六頂山) 고분군 제1구역 2호분)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허룽 시(和龍市)의 룽터우 산 고분군(龍頭山古墳群) 등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81, 옌볜(延邊, 연변)지역의 조선인은 약 1만명이었다. 1907년에는 옌지(延吉, 연길)에만 조선인 가구수가 5만호()에 이르렀는데 한족(漢族)은 조선인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고, 3·1 운동 전인 1916년에 연변의 조선인은 이 지역 총인구 265천명 중 약 20만명이었다. 1930년에는 옌지 현, 허룽 현, 훈춘 현, 왕칭 현 등 4개 현의 조선인은 39만명으로 해당 지역 총인구의 76.4%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2년에 9 3일에 조선민족 자치구(自治區)가 설치되었는데, 자치구 성립 직후였던 1954년에 이 지역의 총인구 854천명 중 조선인은 53만명으로서 전체의 62%였다. 1955년에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둔화 현이 편입됨과 동시에 자치주(自治州)로 격하되었다.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9 3일을 기념하여 자치주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하였으며, 매년 9.3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2012 9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길 시 체육관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3)경제

연길은 목재 생산지로 광물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경과 가까운 훈춘은 변경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연길시에 연길 공항이 있다. 이 공항에서는 중국 국내선 및 인천국제공항과의 국제선 정기편이 운영되고 있다. 자치주라는 특성 때문에 정기편 이외에도 김해국제공항이나 제주국제공항과 같은 한국 노선의 부정기편이나 전세편 취항이 잦은 편이다.

(4)민족 구성

조선족 36.7% :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길 시(延吉) - 58%

용정 시(龍井) - 67%

화룡 시(和龍) - 60%

도문 시(圖門) - 58%

훈춘 시(琿春) - 45%

왕청 현(汪淸) - 30%

안투 현(安圖) - 25%

돈화 시(敦化) - 2%

한족(漢族) 60.4%

기타(몽골족 등) 0.1%

연변에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이다

 

2.길림성 장백 자치현

길림성  장백 자치현

장백은 백산시에 속한 현으로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자치현은 상류로 올라 오면서 큰 개울 수준이 된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惠山市)와 마주보고 있다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 장백 조선족 자치현)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바이산 시에 위치한 자치현으로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 현"으로 불리기도 한다. 면적은 2,497.6 km², 총인구 85천여 명 중 한민족은 14천여 명이다.

 

지린 성 남부 압록강 상류로, 백두산의 서남쪽에 인접해 있다. ()의 남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양강도 혜산시 · 삼지연시 · 보천군 · 삼수군 · 신파군 · 후창군과 접하며, 북쪽은 린장 시 · 푸쑹 현과 접해 있다. 국경선의 길이가 260.5Km로 지린 성에서 국경선의 길이가 제일 긴 현이다.

1677: 청나라가 이곳을 봉금지로 설정하고, 주민을 퇴거시켰다.

1875: 청나라 정부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개발정책을 시행했다.

1908: 창바이 부치가 설치됨.

1949: 창바이 현이 퉁화 전서에 편입됨.

1958 9 15: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현이 성립, 지린 성 퉁화행서에 속했다.

1964: 지린 성 퉁화 전구에 편입됨.

1985 4: 현이 독립함.

 

-길림성 조선족을 이용하여 역사적 알려진 전투는 일제 식민지 시대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 전투와 한국전쟁 때 북중연합군의 장진호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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