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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CIA bear 허관(許灌) 2016. 2. 9. 17:25

 

 

 

 

오래 된 컬러 사진으로 보는 한국 전쟁[유엔군 16개국 참전 모습]

 소련 고문서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군지 명확히 밝혀져 있다.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김일성 주석에 관한 얘기다. 당시 소련을 통치하던 스탈린이 이에 오랫동안 반대했다고 고문서에 기록돼 있다 — Sputnik)

서방 역사학자들은 양측 모두 전쟁을 준비했다며 사실상 전쟁은 1950년이 아니라, 1949년에 이미 미국과 소련 점령지역 경계선을 따라 포병 전투가 시작됐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남침은 북한 김일성 주도로 추진했다

 

한국전쟁 다음 날 6월 26일  남침 지휘부 7인 군사위원회(군사정부)를 구성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수상, 인민군 총사령관-조선공산청년회,중국 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6인 위원은 박헌영(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출신), 홍명희(부수상-근로인민당 당수 출신), 김책(부수상 겸 산업상, 전선총사령관-화요파,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 최용건(민족보위상=국방상,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과 중국 공산당, 조선민주당 당수, 인민군 총사령관 출신), 박일우(내무상,전선사령부 부사령관-조선의용군 부사령관 출신) ,정준택(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과 일제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 출신) 등이다

 

전쟁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시체제에 부합되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군사위원회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비상한 정세와 관련하여 그리고 전쟁에서 전체 인민의 역량을 급속히 동원할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6명은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부, 정준택으로, 이 군사위원회는 일체의 주권을 장악하고 모든 기관, 정당, 사회단체,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다음날인 6월 27일 상임위원회는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시상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지방정권기관을 대신하여 지방군정부(지방군정)라는 것을 조직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국가보위와 사회질서 및 국가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전시상태가 선포됨으로 인해 지방군정부(지방군정)도 도,시에 설치 되었는데, 지방군정부(지방군정)는 지방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 각각 1명씩으로 구성하여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지방군정부(지방군정)의 임무는 지방인민위원회의 권한을 대부분 대행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주요 시설 및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을 의무노동에 동원하고 군부대 및 군사기관을 위한 건물 제공의무를 지며, 군사상 필요에 의해 자동차와 우마차의 동원의무를 선포하며, 각 기업소와 단체 주민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수용하며, 전시지역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등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치로 말미암아 북한의 모든 권한은 김일성을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군사위원회에 집중 되었다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7월 1일 북한 전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은 위급한 정세에 대하여 원수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는데, 동원 대상은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남녀가 해당 되었다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김일성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정령을 채택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원을 점령하자 남한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발포했다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 가는 석차이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자기 토론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보고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김일성의 보고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것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한에는 현재 20만명의 남로당원이 지하에 있어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내응해서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습니다"고 끝을 맺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1949년 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홍명희 등 부수상등 북한 대표단 소련방문, 스탈린과 회담

-남로당 책임비서 이승엽[박헌영 최측근,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 역임]

이승엽은 남한에서 이승만정권과 미제국주의들을 분쇄 타도하기 위하여 일어난 빨치산들을 영웅적이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투사라고 강조했으며 이들을 전심전력 원호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한 거족적 파업이라고 주장했다(남조선 정치정세와 인민들의 구국투쟁)

-1950년 5월 김일성, 박헌영등 북경방문, 모택동과 회담 

-최용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 하였다.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유엔군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비밀리에 압록강 넘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과 한국군 6사단  최초 교전이 되었다

 

                               1950년 11월 1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은 미군 제1기갑사단 공격 할 수 있는 39 116 사단 열등 장비를 동원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많은 한국, 미국, 영국등 16개국 유엔군이 희생 되었다

 

                                   두번째 전투를 하기 위하여 청천강을 넘어가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제40군 일부 군인들 모습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에게 유엔군 미군 25사단이 최초로 포로가 돼 흑인부대 모습

 

                                            두번째 전투에서 영하 30도 섭씨 추위를 전투를 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0년 12월 31일는 제 3 전투가 시작되었다. 38도선 남하 철조망 "군사 분계선"의 파괴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38도선 남하 철조망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한 땅을 공격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박격포(공용) 부대

  January 3, 1951, CPV 50th Army 149 division annihilated the British 29th Brigade of the Royal Rifle Regiment and 1st Battalion The Royal heavy tank battalion in the south of Gaoyang area. This is captured British soldiers.[영국군 포로 모습]

 

                                       1951년 1월 4일 저녁,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가는 모습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서 제 3전투가 시작되었다  돌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네 번째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횡성을 공격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1년 4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후퇴와 많은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군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임진강을 방어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남침은 중국 동북3성 소련측 북중연합군(조선인) 주축으로 추진했고 소련은 기권,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중공(중국 인민해방군)은 북한 인민군을 사실상 장악해왔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