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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제비 출신 탈북민의 국회 입성, 북 주민들 큰 희망될 것” 본문

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탈북민 자료

“꽃제비 출신 탈북민의 국회 입성, 북 주민들 큰 희망될 것”

CIA bear 허관(許灌) 2020. 4. 25. 12:46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지성호 나우 대표이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목용재입니다. 지난 15일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 건데요. 2명의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상 최초로 탈북민 출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나왔습니다.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연구위원과 함께 제21대 한국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목용재: 위원님, 지난 주 잘 보내셨습니까?

고영환: 네. 잘 보냈습니다.

목용재: 지난 15일 21대 한국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습니다. 이번 선거에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 다수가 출마했는데요. 탈북민들의 당선 여부, 정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영환: 한국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지난 15일에 끝났습니다. 탈북민 다수가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요. 이 가운데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가 서울시 강남구에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탈북민 사상 처음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북한 꽃제비 출신인 지성호 전 나우 북한인권 단체 대표도 미래한국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탈북민들이 창당한 남북통일당도 이번 선거에 비례대표 후보자들을 출마시켰으나 유권자 총 투표 수의 3퍼센트를 획득하지 못해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기독자유통일당의 후보로 탈북민인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도 출마하였으나 기독자유통일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배출을 위한 유효 득표수를 얻지 못하면서 낙선했습다. 저는 이번에 한국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탈북민 2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역사에 남을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와 같은 탈북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낯선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낯선 곳에 와서 한국 정부의 장관들까지 혼을 내고 꾸짖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이제는 한국 국회에 북한 주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당당한 대표가 두명이나 생겼으니 가슴이 뿌듯하고 감격스럽습니다.

목용재: 이번 선거에서 주목받은 인물 중 하나가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였는데요. 이번 선거를 통해 사상 최초의 탈북민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고영환: 태영호 전 공사는 지난 16일 새벽 국회의원 당선이 확실해지자 선거사무소에 모인 선거원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격한 그는 “대한민국은 저의 조국이고 강남은 이제 저의 고향”이라며 “2016년 제가 조국 대한민국으로 올 때 남은 생을 이 나라를 위해 바치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오늘 강남 유권자 여러분들께서 저를 선택해줌으로써 그 다짐을 실천할 수 있게 됐다”고 발언했습니다. 계속해 태 전 공사는 “과연 강남 주민들이 절 뽑아줄까 걱정했는데 오늘 당선되니까 고마운 마음밖에 없다. 분단 70여 년 역사에서 이 과정이 곧 남과 북이 평화와 통일로 가는 그런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목숨을 걸고 찾아온 이 나라의 자유와 시장경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태 전 공사는 전직 북한 외교관으로 북한에서 간부를 지냈던 인사입니다. 그런 그가 한국의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이는 북한의 당, 정, 군대의 간부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작용할 것으로 봅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게 될 북한의 당과 정부 그리고 북한군의 간부들은 내심으로는 태영호 전 공사의 당선을 축하할 것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과 동경심도 품게 될 겁니다.

목용재: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는 북한인권 운동가인 지성호 전 나우 대표가 당선됐습니다. 위원님께서 같은 탈북민으로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고영환: 미래한국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지성호 전 대표는 함경북도 탄광촌의 꽃제비 출신입니다. 지성호 전 대표는 2006년 탈북했는데요. 열네 살 때인 1996년 북한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석탄을 구하러 역전에 갔다가 열차 바퀴에 깔려 팔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2006년 탈북해 목발을 짚고 5개 국가를 거치는 1만km의 대장정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2018년 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정 연설 현장에 목발을 들고 참석해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2010년 북한인권 단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북한 주민 수백 명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태 전 공사의 당선은 북한 간부들에게, 지성호 전 대표의 당선은 북한 주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태 전 공사의 국회의원 당선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 북한 꽃제비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성호 전 대표의 국회의원 당선이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먹을 것을 구걸하던 사람이 한국에 와서 정착을 하고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됐으니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성호 전 대표의 당선은 현재 북한에서 1인 지배 체제 하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고 있는 북한 인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게 될 것입니다.

 

목용재: 이번 국회의원 선거 결과도 짚고 넘어가보죠. 이번 총선 결과, 간단하게 정리 부탁드리고요. 총선 결과로 인해 향후 대북정책이나 북한인권 등에 대한 한국 정부의 행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전망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영환: 코로나19, 즉 신형 코로나바이러스(비루스) 감염병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치러진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전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5일 성명을 내고 “미국은 한국이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른 걸 축하한다”며 신형 코로나의 세계적인 대유행 상황에서 치른 총선에 대해 “진정으로 자유로우며 개방되고 투명한 사회의 특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요 외신들도 신형 코로나 감염병의 유행 속에서 투표를 하는 것 자체가 놀랍다는 반응을 쏟아냈습니다. 독일 일간 타게스차이퉁은 “한국은 1987년 첫 직선제가 이뤄진 이후 선거를 단 한 번도 미룬 적이 없다”며 “신형 코로나 사태 속에서 다른 50여 개 국가들은 선거 일정을 연기했다”고 전했습니다. 로라 비커 BBC 한국 특파원은 “일부 비평가들이 투표가 혼란 속에 치러질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앞서 진행된 사전 투표 역시 차분하게 치러진 것을 목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한국의 집권당 측인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이 국회의원 300석 중 180여 석을 가져가 승리를 거뒀고 제 1 야당 측인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100여 석을 조금 넘는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선거에서 크게 패배한 겁니다. 이번 선거는 신형 코로나가 대유행하는 상황에서 치뤄져 신형 코로나 선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난국을 돌파하려고 정부와 여당에 안정 의석을 준 것으로 평가 됩니다. 총선 이후 남북관계에 대해 한국 정부는 기존의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선거 직후 정부 당국자는 “문재인 한국 대통령께서 신년사를 통해 미북대화 성공을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기존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저도 문재인 정부가 향후 대북정책을 기존 기조로 유지해 나갈 것으로 보며 북한인권 문제의 경우 남북관계 개선에 밀려 후순위 정책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목용재: 이번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따른 북한의 대남 정책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향후 남북관계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고영환: 저는 이번 한국 국회의원 선거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오히려 지난해 2월 열린 북한 비핵화를 위한 하노이 회담 결렬이 남북관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 생각으로는 미국과의 문제, 비핵화 문제가 풀리기 전에는 제재가 풀리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한국 정부 때리기와 ‘패싱’ 즉 한국을 멀리하고 상대하지 않는 큰 틀의 대남 정책이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미국이 대선 국면에 더 집중하면서 북한에 대해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장거리미사일 발사하거나 한국 정부에 다시 한 번 미국과의 중재에 나서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 가능성은 높을 것으로 보지만 한국에 중재를 재차 부탁하는 일은 그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목용재: 오늘은 지난 15일에 있었던 한국의 21대 국회의원 선거 소식을 정리해봤는데요. 사상 처음으로 탈북민 출신의 국회의원이 2명이나 배출됐다는 소식에 청취자 분들도 많은 희망과 기대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태영호, 지성호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오늘도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연구위원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자유아시아방송]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의회 양원 합동 국정연설 막바지에 "섬뜩한 북한 정권에 대한 또 한 명의 목격자"라면서 이날 연설의 특별 게스트 중 한명으로 참석한 탈북자 지성호 씨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소개했다. 사진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를 받고 목발을 들어 보이는 지성호 씨.

 

지성호(198243~ )는 탈북민출신 인권운동가이자 미래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그는 198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태어났다. 1996년 고난의 행군때 생활고에 석탄을 훔치다 열차 바퀴에 깔려 팔과 다리가 절단돼 중증 장애인이 됐다. 2006년 탈북해 목발을 짚고 국경을 거쳐 1를 걸어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2010년 북한인권단체 NAUH를 설립해 북한주민 수백명을 탈북하게 했으며, 20181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국정 연설에 참석해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2020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트럼프 대통령 “中에 탈북여성 인신매매 근절 요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중국으로 탈북한 북한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의 근절을 중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겠다고 밝혔다고 자유아시아 방송(RFA)가 보도했다.

방송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으로 초청한 탈북자들의 사연을 듣고서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며 "특히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탈북 여성 대부분이 인신매매의 피해자라고 하던데 21세기에 말이 되느냐. 중국 정부에 인신매매를 뿌리채 뽑도록 강력히 요청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탈북자에게 북한 내 보편적인 인권 상황, 예를 들어 물은 제대로 나오는지, 전기와 배관 시설은 어떤지, 주민이 기본적인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등에 관심을 나타내고, 인권 개선을 위해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어봤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와 면담을 끝낸 탈북자는 RFA에 "트럼프 대통령이 탈북자들과 일일이 악수와 포옹을 하고 격식 없이 대해줘서 고마웠다"며 "임기 1년을 맞아 북한 인권에 관심을 나타냈지만,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에도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주기를 부탁했다"고 전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에 앞서 탈북자들을 만난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전보장 담당 보좌관, 매슈 포틴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등은 북한의 전반적인 인권 실태를 경청했다고 방송은 소개했다.

맥매스터 보좌관 등은 특히 북한의 주장대로 핵 개발이 계속되면 북한 주민을 잘 먹여 살릴 수 있는지, 대북 압박이 계속될 때 북한 당국이 어떤 선전 방식으로 주민을 설득할 것인 ’등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다.

미국 인권단체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에서 탈북자 지성호씨를 소개하고 지씨를 포함한 탈북자들을 백악관에서 만나 이들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북한의 핵개발과 함께 인권 차원에서도 대북 압박을 병행할 것을 시사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국정연설에서 탈북자 지성호 씨를 소개하자 지 씨가 목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백악관서 지성호 등 탈북자 8명 만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탈북자 8명을 만나 북한 인권 상황을 부각시키면서 경종을 울렸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Oval Office)로 한국에 사는 6명과 미국에 거주하는 2명의 탈북자를 초청해 환담을 나눴다.

트럼프 대통령의 탈북자 면담은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자리에 지성호씨를 초대해 그의 역정을 이례적으로 치하한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탈북자와 만남을 기자단에게 브리핑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옆에 지성호씨가 앉았지만 다른 탈북자 경우 신변 안전을 우려해 TV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다른 방에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북자들에 대해 "그들은 여기에서 아직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전에도 그랬듯이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좀 더 압력을 가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압박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인지, 북한 인권남용에 대한 대응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인지에 관해선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과 탈북자 간 만남은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주선했다고 했다. 외교정책 전문가들은 그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탈북자와 접촉하는 것은 리스크가 많다고 건의해왔다.

신문은 탈북자의 백악관 방문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김정은 체제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밤 연두교서에서는 "북한의 잔혹한 독재정권보다 더 전면적으로 잔인하게 자신의 국민을 억압하는 정권은 없었다"며 "북한의 무문별한 핵미사일 개발이 아주 이른 시기에 미국 본토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탈북자와 면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일 연두 국정연설시에 의회에 초대한 지성호씨를 포함한 8명의 탈북자 남녀를 백악관에서 면담했습니다.

면담에서 탈북자들은 정치범으로서 장시간 구속됐던 처참한 체험 등을 말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 탈북자 송환을 저지하도록 요구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탈북자들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북한은 매우 위험하며 살기 힘든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활하기를 싫어한다"고 말하고 "지난해에도 많은 사람들이 탈북했으나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해 북한 주민이 놓여진 상황에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이 문제에 확실하게 대처하지 않았던 과거 정부보다 힘을 기울일 것"이라며 북한에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인권상황의 개선에도 대응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국정연설에서 탈북자 지성호 씨를 소개하자 지 씨가 목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의 폭정과 북한 탈출

41세 북한 농민이 남한 비무장지대 국경 철조망으로 넘어 1996년 7월 24일 남한으로 망영한 박철호(朴哲浩), "북한에 너무 배고파." 남한으로 도망 왔다고.

 

북한 탈북자는 북한의 세습제 좌익군정 폭정 정치 체제와 가난한 생활 고압 환경에서 고통을 의미하며, 북한 주민들이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분을 의미한다

남한정부는 탈북자들을 인도적 입장에서 주민(국민)이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인사로 지칭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1990년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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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20일 오후 황장엽과 김덕홍, 서울 도착 모습

북한 탈출 주민들 중 북한에서 일부 고위 관리가 있다. 황장엽(1922년 12월 7일 -2010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이념과 대외 관계를 담당하는 중앙 비서의 중앙위원회의 前 멤버. 1997년 2월는 황 교수와 그의 대리인 김덕홍, 그의 아내와 북한에 머물 딸이 자살로 강제로 북한으로 달아났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황장엽을 "영웅(英雄)"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종종 비공개 강의를 개최 알려지지 않는 북한 정치적 내부를 세상에 공개했다 . 2010년 10월 10 일 아침, 87 세의 황장엽 심장마비로 북한 창립 65주년 그랜드 퍼레이드를 축하하기 위해 개최 돼 같은 날에 사망했다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朝鮮國內,有部分士兵在三八線的衛兵暗中幫助下,直接逃到韓國。因此,為防避士兵潛逃,朝鮮當局在休戰區埋下大量地雷以起到威懾作用。人民軍空軍飛行員利用裝備優勢甚至“駕機脫北”——1983年2月25日朝鮮軍飛行員李雄平駕駛米格19戰鬥機投奔到韓國,當時,李雄平少校是朝鮮人民軍第一飛行師主要飛行員。接著1996年5月23日,李哲洙大尉也駕駛米格19戰鬥機從西海上空歸順到了韓國.[북한, 가드의 군사 분계선에서 군인 중 일부는 비밀리에 직접 한국으로 도망 도움이 된다. 따라서, 북한 인민군 군인을 피하기 위해 남북한 당국이 억지 휴전 역할 지역을 이용하여 쉽게 남한으로 달아 날 수 있다. 인민군 공군 조종사가 쉽게 남한으로 귀순 장비의 장점은 "북한 상공을 날아" 남북한 휴전선을 넘는 것이다 중무장한 미그기를 격추하기는 어렵다

1983년 2월 미그 19 군사 전투기 조종사 이웅평씨가 한국으로 망명한 것이 북한 인민군 첫 번째 파일럿(공군 조종사)이다. 1996년 5월 23일 다음 이철수대위가 남한으로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넘어 왔다]

 

남한 서울에서 탈북자들의 북한 인권상황 보고(사진)

劳教、羁押、受虐、钢丝穿骨、间谍暗杀、公开枪决。这些耸人听闻的词汇并不单单出现在恐怖电影中,这些刑罚是朝鲜的特殊群体“脱北者”被遣送回国的真实下场。当地时间2014年10月7日,朝鲜在美国纽约联合国总部举行了首次人权说明会,承认存在“劳教”情况。而对脱北者的处罚,成为联合国朝鲜人权调查委员会认定朝鲜践踏人权的主要罪状之一……图为韩国汉城,朝鲜脱北者在进行行为表演,演出的内容是遣送回国后所受到的虐待[노동과 교양, 구금, 학대, 철사천골(감옥), 간첩암살, 공개처형. 이 말은 선정적인 공포 영화에 표시되지 않으며, 이러한 처벌은 "탈북자" 북한의 특수그룹은 진정한 운명을 송환하고 있다. 현지 시간으로 2014년 10월 7일에, 북한정부는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미국의 인권에 대한 첫 브리핑을 가졌다 "재교육 노동을 통해(努敎, 노동과 교육)"상황의 존재를 인정했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가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圖為美國華盛頓,脫北女性記者會上,方美善(音譯)掀起黑裙公開了自己大腿上的傷痕。方美善的大腿因在收容所遭到的拷問和暴行,有多處像刀割一樣的凹痕,走路也不自然[사진은 미국 워싱턴에서 북한 탈북 여성 기자회견, 방미선 탈북여성은 자신의 허벅지에 검은 드레스의 상처를 드러내 보였다. 방미선 탈북여성의 허벅지에는 고문과 잔학 행위 때문에 움푹 파인 칼 같은 자국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圖為目前身在韓國的脫北者紀成浩[사진은 목발을 지고 있는 탈북자 기성호씨]

圖為2013年5月29日,脫北者紀成浩在接受采訪時提起自己的遭遇:90年代飢荒時期,十幾歲的紀成浩依靠偷火車上的煤在市場上出售來維持生活。一次,紀成浩暈倒摔下火車,火車從他身上軋過,這場事故使他失去了左手。此後,紀成浩越過邊界前往中國尋找食物,卻在回家的路上被朝鮮衛兵抓住並遭受毒打虐待。 2006年,紀成浩再次逃亡並成功來到韓國,在韓國安裝了義肢。[사진은 2013년 5월 29일, 탈북자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을 언급 기성호(纪成浩) : 1990년대 기근(식량난과 기아등장)으로, 십대 기성호(纪成浩)씨는 시장등지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석탄운반 기차에서 석탄 운반 노동자로 생활했다. 일단 기성호씨는 실신 열차 하락, 기차는 사고가 그를 그의 왼쪽 손을 잃게하는 원인, 그에게서 이상 달렸다. 그 이후로, 기성호씨는 음식을 찾아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하지만 집에가는 길에 북한 경비병과 구타 학대에 의해 붙 잡혔다. 2006 년 기성호 씨는 다시 도망과 한국으로 왔고 손을 보철 설치를 성공적으로 했다]

 

 

1997년 2월 27일 서울에서 남쪽으로, 분당병원 장례식장에서 지역 기독교 단체인사들이 탈북자 이한영 목관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

而朝鮮對脫北高官的追殺也是不遺餘力。 1997年2月,朝鮮向韓國派間諜殺害了金正日前妻成惠琳的侄子李韓泳,李韓泳於1982年在瑞士通過韓國使館投奔韓國。韓國國家安全企劃部和警方當時認為,這很可能是一起朝鮮為報復朝鮮勞動黨書記黃長燁投奔韓國而實施的暗殺案,並大力展開了調查,但沒有抓到兇手,直到犯人回到朝鮮後才確認李韓泳被朝鮮間諜殺害。[북한 관리들은 또한 탈북자 살해나 암살 죽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1997년 2월 북한 간첩에 의해 피살 되었다 1982 년 이한영 스위스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 그의 전 부인을 살해 보냈다.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와 아마 한국으로 망명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의 암살에 대한 보복과의 구현, 그리고 적극적으로 조사에 착수하지만, 포로 후 귀국 할 때까지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 이한영은 북한 간첩에 의해 살해 확인했다.]
이한영(1960년 4월 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 1997년 2월 25일(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탈북한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였으며, 1982년 모스크바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에 의해 사살되었다. 본명은 리일남으로 귀순 이후 이한영으로 개명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 의 아들이다. 이모 성혜림 및 어머니 성혜랑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탈출,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가 홀로 1982년 10월, 비행기편으로 귀순의사를 밝히고 대한민국에 망명하였다. 이한영의 망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서는 이한영에게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가하였고 이한영은 거처를 옮겨다녔다.

그 뒤 대한민국 출신 여성인 김종은과 결혼하여 정착하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 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정착하였으나, 1997년 저서 김정일 로얄패밀리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보낸 간첩에 의해 자택에서 저격당하여 10일 뒤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이한영의 암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여러 번 암살협박을 가해왔으나 대한민국 경찰에서 관리소홀로 암살당했다는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이한영은 자신의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를 통해 숙부뻘이며 김정일의 이복 동생인 김현의 존재를 폭로했다. 이한영은 자신이 북한에서 직접 본 김현이 김일성의 숨겨진 아들임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한영에 의하면 김현은 1971년에 김일성과 담당 간호사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私生兒)다. 같은 해 5월 10일에는 성혜림도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을 출산했다. 결국 환갑 나이인 김일성과 갓 서른 살에 접어든 아들이 동시에 ‘불륜’으로 아들을 얻은 것이다 이한영의 수기에는 김현에 대해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장현’이란 가명으로 자신의 호적에 올려 놓았다고 밝혔다. 김현은 1979년 2월 모스크바에서 자신과 동갑내기이자 조카가 되는 김정남과 함께 지냈고, 그 해 9월부터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그의 생모는 장현의 이모로 둔갑시켜 함께 지냈다고 밝혔다 13년후 영화 의형제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한영,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 (시대정신, 2004)

 

圖為2007年5月11日,十幾名通過中國進入金三角地區的脫北者被泰國警察裝入警車,他們以接受泰國法庭審判的代價尋求避難韓國的機會。絕大多數部分未能直接去往韓國的脫北者,經常進入其他國家,然後通過申請避難到達韓國。常見的脫北路線有中國、俄羅斯、蒙古等,還有人去往東南亞國家,例如泰國,在那裡脫北者被官方認定為非法移民,並以此罪名在監獄中服刑之後被送往韓國,但實際上他們往往進入泰國邊境之後就立即向警方自首。[사진은 2007년 5월 11일 중국을 경유 태국 삼각지에 진입하여 불법 체류자로 태국 경찰차에 태운 진 탈북자 모습 , 한국 망명을 위한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태국 법원을 수용 비용이 든다. 종종 망명을 신청하여 한국에 다음 다른 나라를 입력 한 부분 실패, 북한의 대부분 오프 직항. 북쪽 라인에서 공통 중국, 러시아, 몽골, 그리고 다른 탈북자가 공식적으로 불법 이민자로 확인 되었다 같은 태국 등 동남아 국가로 이동하고, 따라서 요금이 한국에 전송 된 후 감옥에서 자신의 문장을 제공하지만, 사실 그들은 종종 즉시 태국 국경을 입력 한 후 경찰에 자수한다. 탈북자는 자유나라로 가야 국가 보호를 받는다]

 

脫北者群像之李賢西(音譯)]“小時候我認為我的祖國是世界上生活最幸福的國家。有一天,媽媽從路邊撿回來一個被丟棄的女孩兒。女孩兒的手裡攥著一張紙條,上面寫著'當你讀到這張紙條時,我們一家或許已經餓死'。”[이현서 탈북자 사진]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생각한 소녀 시절. 어느 날, 거리에서 내 어머니는 버려진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손을 쥐고 종이 조각 '이 쪽지를 읽을 때, 우리 가족도 굶어 죽을 수도라고' 하는. "]

 

2006년 8월 8일 서울의 거리와 지역 사회에 Tallae 밴드의 노래

脫北者群像之“Tallae樂隊”5名女成員]韓國漢城,以表演朝鮮傳統歌舞為生的Tallae樂隊,5名成員的年齡在19至28歲之間,她們都是曾冒著生命危險從朝鮮離開的“脫北者”[[ "Tallae 밴드"의 탈북자 그룹 다섯 여성 회원 사진] 남한 서울, 19세에서 28세까지 구성돼 탈북자 그룹 다섯 여성 회원 Tallae 한국 밴드의 전통 무용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삶을 걸었다 "]

 

2012年11月23日,震驚亞洲的“延坪島砲擊事件”兩週年紀念日上,來自朝鮮的脫北者在漢城集會紀念.[2012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의 충격은 2주년 기념일, 서울에서 북한의 집회에서 탈북자 기념하기 위해.]

雖然這些“脫北者”被扣上“叛國”的帽子,但他們仍會關注朝鮮的一舉一動,前不久剛剛結束的韓國仁川亞運會,他們也為參賽的朝鮮運動員加油助威。遇到兩國交惡,他們也會祈福。[비록 "반역"모자 "탈북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북한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관심, 인천 아시안 게임 참여하는 운동 선수는 응원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두 나라 사이의 만남, 그들은 기도 한다]

 

圖為2014年7月30日,韓國坡州,“脫北者”和韓國人攜帶巧克力派的氣球,準備釋放到朝鮮。成功脫北者的未來也未必光明——由於出生在世界上最封閉的國家,這些過去習慣於由政府對食物和生活必需品進行配給的朝鮮人,在短暫封閉培訓幾個月後,將被迫與韓國人展開競爭。所有的“脫北者”都是帶著憧憬開始新生活的,但不久大多數人又將跌入了殘酷的現實當中:他們沒有出色的工作技能,甚至連韓國話都要重新學習,而且經常被韓國人視為二等公民……[2014년 7월 30일, 파주, 한국 사진은, 준비 초콜릿 파이를 들고 "탈북자"한국인 풍선은 북한에 발매 예정. 북한의 미래 오프 성공 밝은하지 않을 수 있다 -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폐쇄 된 국가의 탄생, 음식과 다른 필수품의 정부에 의해 사용이 과거 한국인 배급하고, 간단한 교육의 몇 개월에 강제로 닫은 후 한국 경쟁."탈북자"모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기대하고,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한 현실에 빠지지 설정 : 그들은 훌륭한 직업 기술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 남한을 다시 배워야한다, 자주 한국의 이등 시민으로 간주될 수 있다]

2006년 4월 28일 이벤트 "북한 인권 주간"이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마지막 날 참석하여 김한미 가족을 만났다

[脫北者群像之金韓美]1999年,因為“爺爺'成分'不好”,在一個親戚的幫助下,5個月大的金韓美隨著父母踏上了脫北之旅。 1999年第一次脫北、2001年3月被帶回朝鮮、2001年8月再次脫北、2002年5月闖入瀋陽的日本總領事館,幾經周折,最終於2002年5月23日,金韓美一家經菲律賓抵達韓國。為了讓所有脫北朝鮮人受到保護,獲得自由的金韓美一家一直積極參與各項朝鮮人權活動。[탈북자 김한미 사진, 1999년 할아버지 '성분'나쁜(정치범) ' 때문에 5개월 동안 김한미와 그의 부모는 북한 탈출을 준비했다.1999년 첫 번째 북한 탈출, 2001년 3월 다시 북한으로 입북, 2001년 8월 둘번째 북한 탈출, 2002년 5월 23일 중국 심양 일본 영사관에 침입하여 주 경과 일본과 한국정부를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자유를 획득한 김한미 가족은 적극적으로 북한 인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http://bbs.miercn.com/201410/thread_377231_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