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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재일교포 북송: 60년 전 오늘, 975명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이주했다 본문

Guide Ear&Bird's Eye/북한[PRK]

재일교포 북송: 60년 전 오늘, 975명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이주했다

CIA Bear 허관(許灌) 2019. 12. 22. 20:22


                                              북송되는 재일교포.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 9만3천여 명의 한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가타 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실어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배에는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걸려있었다. 북한 측이 마련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귀국'은 아니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이 아닌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일교포 2세대와 그들의 일본인 아내들에게는 낯선땅이었다.

그래도 상당수는 희망에 차있었다. 일본에서 온갖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들에게 친북단체인 조총련과 북한은 집과 일자리를 보장하며 '지상 낙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후 1984년까지 180여 차례에 걸쳐 재일교포 약 9만3천여 명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1962년 북송선을 타고 건너간 사람 중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인 고용희(1952~2004)도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이 북한에 남아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자발적 귀국 혹은 기획된 북송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고 해서 갔어요. 하지만 거짓이었습니다. 함경북도 제일 꼭대기인 웅기의 기계공장에서 옥수수밥을 먹으며 힘겹게 살았어요"

김행일 북송재일교포협회 명예회장은 BBC 코리아에 이같이 말했다. 1961년 6월 북송된 김 씨는 당시 20살이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고 놀림 받으며 살았지만 북한에서의 (대우는) 말도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귀국선에 승선한 여성

김 씨는 결국 62년 11월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얼마 안 돼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꾸 재일교포들이 북송돼서 오니까 이 사실을 재일교포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일본에 가려고 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결국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차별과 인권 유린에 시달려

1년 만에 탈출한 김 씨보다 북한에 더 오래 있었던 북송 재일교포들은 가난보다 차별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주장한다.

3살 때인 1963년 부모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2002년에 탈북한 고정미 씨는 지난해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째포요 반쪽발이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사상이 나쁘다. 뭐 조금만 이상한 소리 하면 어디로 갔는지 정치범 수용소에 갔는지 죽었는지 행방불명 됐다"고 말했다.


                                                                              환송 인파. 인공기를 든 것이 눈에 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이들은 출신배경 때문에 "적대적"으로 분류되었고 차별받았다며 "상당수는 낮은 사회적 신분으로 고난의 행군 시 첫 희생자가 됐을 것"이라고 썼다.

 보고서는 일본인 아내들에게 3년 후 귀국할 수 있다고 했던 당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960년 중반 이후부터 북송된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갔지만 의사에 반해 북한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이들은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

유엔 자료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는 약 240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 강제로 징용·징병됐다가 남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힘겹게 살았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에 따르면 1952년 재일조선인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무직자 비율이 62%였다.

당시 북한은 조총련을 설립했고, 조총련이 주로 재일교포에게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마련해줬다. 상당수 한인이 조총련에 충성하고 북한을 조국으로 택하게 된 배경이다. 

 

                                                                                도쿄 우에노 역에서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재일교포

당시 일본과 북한 모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패전 후 힘든 재정 상황 가운데 재일교포들을 부양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고 북한은 재일교포를 데려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체제 선전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 양국 적십자사는 '재일 한인 북송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조총련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대대적인 북송사업 진행을 도왔다.

 

하지만 2004년 기밀해제 된 ICRC 자료를 검토한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일본역사학 교수는 북송 사업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일본역사학 교수의 북송 재일교포 관련 책, '북한행 엑소더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WSJ 기고문에 당시 정치인 출신 일본 적십자사 간부였던 이노우에 마수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정부는 당시 재일교포가 일본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고, ICRC에 수년째 압력을 가해 북송사업을 돕게 했다고 말했다.

 

1956년 일본 국회 통계에 따르면 당시 실제로 북한행을 원했던 재일교포는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 관료들은 1955년부터 ICRC에 최소 60만 명의 북한 출신 재일교포가 고향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폭동과 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의 정부 허가 문서를 ICRC에 보냈다.


북한에는 몇명이 남았나?

스즈키 교수에 따르면 북송된 자 중 약 100여 명이 일본으로 탈출했고 상당수는 한국으로 탈북했다. 한국 통일부는 BBC 코리아에 한국으로 탈북한 북송 재일교포 수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10살 때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건너갔다 탈북해 2009년부터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태경 재일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은 12일 일본에서 열린 북송 60주년 기자회견에서 "추정으로는 1만5천여 명 정도의 북송 교포들이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디어 평양' 스틸컷. 아들 셋을 북한으로 보낸 아버지에 초점을 둔 영화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북송 교포 인권을 위한 한일모임'은 북송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북송 교포 중 사망자, 생존자, 수감자, 피해 사례 등에 대해 정확한 실태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회장은 데일리NK에 그동안 많은 북송 재일교포 단체들이나 인권단체들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다"고 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공소시효 만료였지만, 이 회장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와 다르게 북송 재일교포 문제는 "오히려 누르고 있다"며 이를 인정하면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인도적 범죄를 시인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과 한국으로 탈출했다. 북한에 생존한 이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BBC 코리아 뉴스-



월북한 미군 탈영병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


                                                      젠킨스 하사의 젊은 시절 모습과 소가 히토미가 납치되기 2년 전인 17세 때 모습.

 

매일밤 잠들기 전에 찰스 젠킨스는 소가 히토미에게 몸을 돌려 세 번 키스를 했다. 젠킨스는 군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월북했고 소가 히토미는 북한 당국이 강제로 젠킨스와 혼인시킨 납북 일본인이었다.

그는 히토미의 모국어인 일본어로 "오야스미"라고 말했다. 히토미는 젠킨스가 어린 세월을 보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쓰는 언어인 영어로 "굿나잇"이라고 답했다.

"우린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결코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했다." 젠킨스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들의 이야기는 음울하고 기이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한 이야기이다.

기근과 강제노역소로 널리 알려진 은둔의 왕국 북한에 갇힌 이 한 쌍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끼리 짝을 짓게 하는 북한 당국의 조치 때문이었다.


77세를 일기로 지난 11일 세상을 떠난 젠킨스는 1965년 1월 어느 혹한의 밤에 비틀거리며 북한으로 넘어갔다.

당시 24세였던 그는 취한 데다가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한국 쪽에 배치돼 있던 한 미군 병장은 그가 휴전선을 순찰하다가 유탄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다. 최악의 경우 베트남에서 죽지 않을까도 싶었다.

젠킨스도 탈영이 위험하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러시아 대사관에서 망명을 신청하고 포로 교환을 통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잠시 도피해 있으려고 했던 나라가 실은 거대하고 미친 감옥과 다름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 들어가면 거의 나올 수 없었다."

네 명의 탈영병

북한은 바로 그를 포로로 사로잡았고 그때부터 40년에 걸친 고난이 시작됐다.

젠킨스는 다른 세 명의 미군 탈영병들과 함께 간소한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이르게는 1962년부터 탈영한 이들로, 키가 195cm나 되는 일병 제임스 드레스녹, 최초로 월북한 미군으로 알려진 이병 래리 앱셔, 그리고 월북 당시 19세였던 제리 패리쉬가 그들이었다.

이들 넷은 하루에 10시간씩 당시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가르침을 강제로 학습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절망에 빠진, 그리고 절망과도 같은 지루함에 지친 그들은 "정부 재산을 훔치거나 무모한 하이킹을 하면서" 지루함을 이겨보고자 했다고 젠킨스는 자신의 책 '마지못한 공산주의자'에 썼다.


                                               사진에서 60대인 제임스 드레스녹은 1962년 DMZ의 지뢰지대를 건너 월북했다


1972년 마침내 이들은 각자 따로 살 수 있게 됐다. 북한 국적도 주어졌다. 그러나 계속 감시를 받고 구타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군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젠킨스는 남부 출신 특유의 느릿한 말투 때문에 결국 해고됐다) 20부작 짜리 선전영화에서 사악한 미국인 역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 인해 곧 북한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그 다음에 내려진 명령은 더욱 놀라웠다. 네 탈영병들은 북한 정권이 수용하고 있던 네 명의 외국인 여성들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왜 북한이 수용자들의 결혼까지 신경써줬을까? 젠킨스가 보기에 그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북한이 스파이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고 여겼다. 서구인처럼 생긴 아이들을 훈련시켜 외국에 첩자로 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오른쪽)은 아버지 김일성을 감동시키기 위해 선전영화들을 제작했다


네 명의 미군들은 공산주의 왕국 북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그들과 결혼한 여성들의 경우는 달랐다.

북한은 단지 일본 국민들을 납치했다는 사실만 인정했지만 젠킨스는 자신들과 결혼한 네 명의 각기 다른 국적의 여성들이 북한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놓지 않았죠'

후에 젠킨스 여사가 되는 소가 히토미는 일본의 서쪽 해안에 있는 사도 섬에서 1978년 납치됐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북한은 북한의 간첩들에게 일본어와 일본식 행동방식을 가르치기 위해 그를 납치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국적은 그의 남편에게 결코 꿈꾸지 못했던 미래를 안겨줄 수 있었다.

둘이 1980년 결혼했을 때 젠킨스는 평양에서 15년을 홀로 지내온 상태였다. 젠킨스는 나중에 CBS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뭐 이렇게 말해보죠. 딱 한 번 봤습니다. 그리고 놓지 않았죠."

이 신혼부부는 북한에 대한 강렬한 증오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둘은 사랑에 빠졌다.

22년에 걸쳐 젠킨스와 히토미는 어느 정도 행복을 찾았다.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두 딸도 생겼다. 이제 30대 중반의 미카와 두 살 어린 브린다였다.

그들의 삶을 바꿔놓을 놀라운 사건은 2002년에 일어났다.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정일이 북한이 70년대와 80년대에 13명의 일본 국민들을 납치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이중 8명은 사망했다고 말했으나 (일본은 이에 의혹을 갖고 있다) 5명의 생존자들을 열흘 간 일본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두 쌍의 부부와 소가 히토미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갈 수 없었다.


                                                                             2004년에 촬영된 젠킨스 가족의 모습


일본은 귀환한 자국 국민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젠킨스와 그의 딸들은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미 육군에서 탈영은 최대 무기징역에까지 처해질 수 있다. 노병 젠킨스는 그가 일본에서 부인과 재회하려할 경우 미군이 자신을 체포할 것임을 알았다.

히토미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2년이 지나자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젠킨스와 딸들은 히토미를 만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잠깐만의 방문만 허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수상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격려로 탈영병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서라면 군법회의와 옥사까지 각오하겠다고 말했다.


                                                         2004년 7월 재회한 젠킨스 가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두 딸과 함께 일본땅을 밟았을 때 젠킨스는 본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2004년 9월 11일, 늙은 탈영병 젠킨스는 미니밴을 타고 병원을 나와 도쿄 교외에 있는 캠프 자마 미군기지로 향했다. 64세였던 그는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고 지팡이 없이 선 젠킨스는 미군 헌병에게 길고 사무적인 경례를 했다.

"병장 젠킨스, 보고드립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젠킨스는 탈영과 이적행위(적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에 대한)로 3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25일을 복역한 후 모범수로 조기출소했다.

그는 관대한 처분을 받는 대가로 북한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미국에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출소하자 젠킨스는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렸습니다. 하지만 제 딸들을 거기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옳은 일이었어요."


                                     찰스 젠킨스가 탈영한 지 39년 만에 캠프 자마 미군기지에서 폴 나이가라 중령에게 경례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북한은 자신의 아이들을 무기로 활용하려 했으며 딸들이 다녔던 엘리트 어학교는 그들을 첩보원으로 육성하고 있었다고 굳게 믿었다.

소가 히토미는 2004년 고향인 사도 섬으로 두 딸과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젠킨스는 관광공원에서 센베 과자와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했다. 히토미는 지역의 요양원에서 일했다. 젠킨스는 성인이 된 딸들에게 절대 일본 교통경찰이 오더라도 차를 세우지 마라고 말했다. 북한 첩보원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병장 찰스 젠킨스는 북한의 포로로 지내면서 맹장과 고환 하나, 그리고 39년을 잃었다. 자신의 팔뚝에 있던 미 육군 문신은 마취도 없이 지워졌다.

그는 소가 히토미가 자신의 삶을 구했다고 말했다. 히토미가 젠킨스로 하여금 자유인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준 이유였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본으로 귀환한 지 2년이 지난 2004년 7월 자카르타 공항에서 남편과 재회한 소가 히토미가 감격하여 입을 맞추고 있다

다른 탈영병들은 누구와 결혼했나?

  • 아노차 판조이라는 젊은 태국 여성은 1978년 북한 당국에 의해 래리 앱셔과 결혼했다. 그는 사라졌을 당시 마카오에 있는 목욕탕에서 일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앱셔가 심장마비로 40세에 사망하고 나서 혼자가 됐다. 당시 이웃이었던 젠킨스에 따르면 당국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외국에서 북한 첩자로 일한 독일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 레바논 출신의 시함 시라이테는 제리 패리쉬 사이에 세 명의 아들을 가졌다. 젠킨스에 따르면 베이루트의 비서 학교에서 다른 세 여성과 함께 납치당했다 한다. 1979년 그들의 부모가 딸들을 구하기 위해 협상 끝에 다시 데려왔을 때 시함이 임신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를 낳기 위해 북한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제임스 드레스녹에게 북한에서의 강제 결혼은 재혼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결혼했던 부인은 그가 탈영한 지 1년이 지난 1963년 이혼했다. 북한 정권은 그에게 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를 짝지워 줬고 둘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젠킨스는 그가 이탈리아의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다가 납치됐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려지기로 1997년 폐암으로 사망했는데 드레스녹은 이후 토고 외교관과 북한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결혼했으며 세 번째 아들을 얻었다.

드레스녹의 세 아들과 셋째 부인은 2006년 영국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 등장했다. 시함 쉬라이테도 등장했는데 그는 결코 자신이 납치당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원해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북한에 남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위협을 받은 상태에서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외국인에게 김씨 정권에 대한 비판은 분명 위험했을 것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마지막 미군 군인인 드레스녹은 2016년 말 74세를 일기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온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무엇과도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을 거에요."

찰스 드레스녹은 1960년대에 월북한 미군 중 북한 바깥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65세의 젠킨스가 91세의 어머니 패티 캐스퍼와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재회했다

-BBC 자료-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월북한 미군 탈영병 6명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된 것은 6.25 한국전쟁(1950년)부터입니다.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53년으로, 32만 여명에 달했는데요. 현재는 약 28,000여명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그런데 주한미군 중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지난 67년간 딱 6번인데요. 공산주의를 동경해서 건너간 경우도 있고, 서양문화에 실망해 도망간 군인도 있습니다. 단순히 실수로 월북한 미군도 있었는데요.

민간인도 아닌 월북한 미군들은 북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을까요? 다음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월북을 선택한 미군 탈영병 6인의 사연입니다

1.래리 알렌 앱셔 일병(1943~1983)

래리 알렌 앱셔 (Larry Allen Abshier)는 최초로 월북한 미군입니다. 1962년 5월, 군사분계선 지대 초소를 이탈해 분대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곧바로 DMZ를 넘어갔죠. 당시 그는 근무 도중 무기를 분실한 이유로 군사법정에 서게 될 처지였습니다. 월북한 앱셔는 북한의 온갖 선전용 홍보물과 미국정부를 비판하는 연극 등에 출연하며 북한정권을 찬양했습니다. 1978년, 북한정부는 납치한 태국 여성을 앱셔와 결혼시켰죠. 그리고 1983년 7월, 앱셔는 4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졌습니다.


2.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 (1941~ )

미군 탈영병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James Joseph Dresnok)은 현재 평양에 살고 있습니다. 월북하기 전 위조한 외출증으로 휴전선 근처에서 무단 외출을 했다가 징계를 받을 위기에 놓였는데요. 1962년 8월 15일, 동료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지뢰밭을 가로질러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드레스녹은 북한에서 3번 결혼했습니다. 루마니에서 납치해 온 여성 사이에서 아들 두 명(아래 사진)을 얻었는데요. 한 아들은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북한 외무성에서 일하고 있죠.


3. 제리 웨인 파리쉬 병장(1944~1996)

미국 켄터키주 출신인 제리 웨인 파리쉬 (Jerry Wayne Parish) 병장의 월북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앞서 월북한 앱셔와 드레스톡과 함께 합숙하면서 북한정부의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정부가 납치해 온 레바논 여성과 결혼했고 3명의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1996년 20년 동안 앓아온 신부전증으로 사망했습니니다. 그의 처와 자식들은 아직도 평양에서 살고 있다고 하죠. 참고로 파리쉬 병장은 북한으로부터 얻은 '김유일'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 하네요.


4. 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 (1940~ )

젠킨스 하사는 1965년 1월 5일 새벽 월북했습니다. 당시 24살의 분대장이었는데요. 야간 순찰 중 맥주 10캔 정도를 마시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자신의 소속 부대가 월남전으로 보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가면 북한 정부가 자신을 러시아로 보내 포로 교환으로 미국에 다시 갈 줄 알았다고 하는데요. 그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1965년 부터 2004년까지 40년간을 북한에 머물면서 김일성과 북한 스파이 요원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키는 강사로 일하게 됐습니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던 젠킨스는 2004년 일본에 갔습니다.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김정일의 계획으로 일본으로 이사갔는데요. 아내의 고향인 사도섬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시민권을 신청한 상태죠.



5. 로이 정 일병 (1957~????)

재미교포 월북 군인도 있습니다. 로이 정(한국명 '정류섭')은 1973년 미국으로 이민간 재미교포 2세인데요.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미군에 입대했습니다. 1979년 6월 5일, 독일에서 파병근무 중 근무지를 이탈했고 행방불명 30일째 공식 탈영병이 됐습니다. 당시 22세였죠. 그리고 두달 후, 그는 북한의 '평양 라디오'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미군의 만행을 이기지 못하고 이 천국같은 북한에 오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로이 정 일병에 대한 신상은 알려진바가 거의 없습니다. 월북한 것인지 납치된 것인지에 대한 팩트 체크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생사 여부도 아직 확인된 바가 없죠


6. 조셉 화이트 일병 (1961~1985)

조셉 화이트 (Joseph White) 일병은 1982년 8월 28일 월북했습니다. 비무장지대 통문의 열쇠를 총으로 쏴서 부수고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북한방송에 출연했습니다. 불안한 표정으로 미군의 타락과 부패 등에 대해 맹비난했는데요. 1983년, 화이트 일병의 어머니는 북한정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월북 후 영어 강사로 활동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청천강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국영화 "조총련[朝總聯]"

1974년 일본 요코하마항에 북한 선박 만경봉호가 나타난다. 이 소식에 접한 조총련 본부는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인다.
한편 조총련 내부의 의장 한덕수와 부의장 김병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세력다툼은 만경 봉호의 선장 강명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덕수의 경호원 김창욱과 그의 애인이자 한덕수의 비서인 이정숙은 희생의 제물이 된다. 또한 강명수 역시 김병식의 계략으로 입장이 난처해지기에 이른다.
결국 조총련은 이러한 갈등을 모면하고자 1975년 8월 15일 문세광을 파견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을 저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조총련[朝總聯]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한덕수(韓德銖)

한덕수(1907218~ 2001221)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초대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10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5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문세광(文世光)

문세광(19511226~ 19741220)은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였다.

 19511226일 일본 오사카 시에서 석면 제품 제조업자로 일하던 문병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진양)이다. 세이키 상업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강성숙과 결혼했다. 문세광은 원래 오사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쿠노키타(生野北) 지부에 가입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김일성 선집(통일혁명당 그룹), 마오쩌둥 어록(적군파 그룹) 등을 탐독하면서 좌익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739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이쿠노니시(生野西) 지부 정치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룡(金浩龍)을 처음 만난 문세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던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197310월경에는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공범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에게 대한민국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197311월에는 공작금 50만 엔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2월에 도쿄도 다이토 구 히가시우에노(東上野)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인 가와카미 유지(川上勇治)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19745월에는 오사카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에서 사상 교육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717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오사카 시 주오 구 고즈(高津) 파출소의 창문을 깨고 침입했다. 문세광은 경찰관 4명이 잠을 자고 있던 사이에 실탄 5개가 들어간 권총 2자루를 빼냈다.

문세광은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이었던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호적 등본을 이용해서 여권을 신청했다. 81일에는 오사카 경찰이 문세광이 작성한 "전투 선언"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86일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권총을 감췄고 88일에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위조된 여권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였다. 1심 최후진술을 통해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이라고 말한 문세광은 항소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전체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과오를 깊이 늬우치고 있으니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감사하겠다"고 했으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수기를 통해 "나는 조국의 하늘 아래 살고싶다 암살목적으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지만 197412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2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74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이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의 해외동포단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문세광이 공산주의를 믿었던 단순한 공산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출생

19511226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 시

사망

19741220(22)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사인: 교수형

성별: 남성

부모

아버지 문병태, 어머니 육말란

배우자: 강성숙

 

-일본지역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
북한정부는 4.19혁명 후 노동당 <3호청사>내 대남공작부서 중 통일전선부 조국통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1964년 무렵 남한지역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68년 경 간첩 김종태등을 검거 된 후 와해되었고 그후에도 북한정부는 세계 각국 북한정부 비공식조직으로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조직 설치하여 반미투쟁과 대남공작활동을 해왔다
일본지역 통일혁명당 대표부가 1960년 후반기 창당하였고 1986년 8월 8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칭하였다
문세광이가 활동한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북한정부 <3호청사> 통일전선부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인지가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통일혁명당(한민전)이 남한지역 출신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의 모임이고 투쟁 단체이다
박정희정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사건 이전에 남북협상으로 김성주와 이후락 남북회담이 추진되었고 남북냉전분위기보다는 화해분위기었다 남북화해분위기에서 유신헌법 공표와 유신선거로 남북냉전분위기로 전환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만경봉호(萬景峰號)

만경봉호는 북한에서 건조한 페리선이다. 처음의 만경봉호는 1971년 건조되어 재일 조선인의 북송선으로 이용되었으며, 처음의 만경봉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2년에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서 만경봉-92가 건조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원산시에 있는 해운회사가 소유한 여객선으로, 주로 일본의 니가타와 북한의 원산시를 운항하였다. 여객선명은 평양직할시 교외에 위치한 만경봉에서 따왔다.

만경봉-921992년에 건조되었으며, 만경봉호의 건조비용은 모두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자금에 의해서 조달되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가 부산 다대포항에 입항한 바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585번지 일원에 통일아시아드 공원이 2008127일 준공되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당시 응원단과 인력을 태운 만경봉호가 임시로 묵호항에 입항하였다.

 

2011년에는 나진~고성(장전) 금강산지구간 항로에 투입되는 여객선으로 활용되었다. 2014년 보도에 따르면, 나진항 2번 부두에 정박된 채 녹슬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외연락부[對外連絡部]

조선로동당 내에는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통전부), 작전부,35호실(대외조사부) 4개의 대남 관련 부서가 존재해 왔다. 그 중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전담해온 대표적인 대남부서이다.

 

통일전선부는 대남외교를 주관하는 부서로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접촉과 교류·협력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관계자들이 전부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35호실은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매수해 남한에 투입시키는 등 제3국에서의 대남사업을 주관하며, 작전부는 남한 내 고정간첩을 통한 정보획득이나 임무부여, 대남침투요원 안내 및 호송 요인 저격·납치 등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북조선로동당 ‘5로 창설되었다. 6·25전쟁기 남한지역내 게릴라부대의 지하당공작 과정에서 대남공작기구를 확대하면서 당 조직부내의 연락부를 분리했다. 19614차 당대회에서 남한에서의 지하당 조직확대와 통일전선 강화 등의 결정과 함께 내무성 등의 대남공작기구를 통합해 중앙당 연락국을 신설했다. 1964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8차 전원회의에서 ‘3대 혁명력량 강화노선을 채택하면서 종래의 연락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개칭했다.

 

19661012일 당중앙위원회 414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이 신설되면서 대남사업담당비서 산하에 연락부’, ‘문화부’, ‘조사부’, ‘인민무력부정착국’, ‘조총련부서를 두었으며, 19781월 통일전선부가, 1990년대 후반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과 작전부가 신설됨으로써 대남담당부서의 체계가 구축되었다. 남한 내 정당, 사회단체, 군부에 대한 공작거점 및 공작전술 연구개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간첩교육과 파견을 직접 담당하고 있으며, 조총련에 대한 활동지도도 담당하고 있다

   

1.대외연락부 주요 책임자

(1)정경희( 1987년까지 대외연락부 부장 출신)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 위원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거물 여간첩 정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부서도 대외연락부였다

.이름--정경희(사망)

.출생일과 출생지---1928년생이며 남한출신

.직책--전 당 중앙위 연락부장

.학력--금강정치학원과 당 중앙당 학교, 송도정치경제대학 수료

--이선실과 정경희등은 대남공작원 교육원 금강정치학원 출신--

.경력

1960년 함남도당 선전부 지도원. 도당 교육부 부부장

1967년 당 중앙위 연락부 과장

197011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73년 당 중앙위 문화부 부부장

19755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8010월 당 중앙위 위원과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19822월 최고인민회의 제7-8기 대의원

19966월 사망


(2)강관주(강주일, 현직 대외연락부 부장)

()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대외연락부장으로 발탁되면서 통일전선부가 관할하던 재일 조총련 관리 업무도 대외연락부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강주일은 사회문화부를 개편 확대하여 대외연락부로 개편했으며 대남공작부서 대외 연락 업무등을 취급하고 있다.

.이름--강주일(본명 강관주)

.출생일와 출생지--193075일생이며 남한 출신

.학력--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

.주요 경력

()755월 대외문화연락 위원회 국장

()904월 최고인민회의 제9--10기 대의원

()90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947월 당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971월 당 대외연락부 부장

()987월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991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20013월 당 비서국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주요동정

강주일(본명 강관주) 대외연락부장은 대일교섭이나 활동 그리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활동등이 뚜렷하다 일본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775월 최고인민회의 대표 단원 자격으로 일본 방문

()833월 평양 학생 소년 예술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방문

()909월 평양예술단 일본 공연시 동행

()919월 보천보 경음악단 단장으로 일본 방문

()925월 만성간염 치료차 방일, 도리노몽 병원 입원

()977월 조총련 업무지도차 일본 요코하마 방문

 

 

2. 대외연락부 주요 대남공작 활동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으로는 199210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 두고 터져나온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인 여간첩 이선실, 신세대 공작원으로 불리는 무장간첩 김동식(9510, 충남 부여서 체포),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부부 간첩 최정남, 강연정등이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과 대외연락부 관계

한국민족민주전선은 통일전선부 지하조직이며 북한정부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정찰 요원이다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 조직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각 단위별로 연락으로 장악하고 있다

통일전선부가 남한정부의 통일부라면 대외연락부는 반미통일구국전선을 배후에서 총지휘하는 단체이다

ㄱ.이선실과 중부노동당(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중부지역당)

ㄴ.김동식과 삼민투위 관련자 조직사업(한민전 서울대표부내 반제그룹조직화)

ㄷ.최정남과 영남위(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영남지역 주체사상파 조직화)

ㄹ.민혁당 사건---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남한재야세력 중 친북세력(주체사상파나 반미인민전쟁론자) 구심체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표현하며 그 세력들을 북한노동당과 연락선이 바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뜻이다

통일전선부는 대외적으로 통일전선 구축으로 오픈화(합법화)하고 있다 친북 통일관련 단체들이 바로 통일전선부 산하 남북 외곽단체들이다

 (2)대외연락부 활동 요원들의 주요 경력 특징

ㄱ.정경희나 이선실 모두 남한 출신이라는데 특징적이다

ㄴ.금강학원 출신 대부분이다(이선실이나 정경희 모두 금강학원 출신이다)

ㄷ.대외연락부 공작원들은 남한 친북세력과 연계 도중에 체포나 검거 되었다

ㄹ.통일혁명당이나 민혁당 모두 대외연락부 공작원 활동 주 무대로 알려져왔다(대외연락부 공작원을 남로당 정치고문단으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다)

 

-일본 적군파([赤軍派, Red Army)

본래 이름은 연합적군(聯合赤軍).

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일본의 테러리스트 단체..

1948년 형성된 일본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연합이 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 뒤 분열되자, 이 중 마오쩌둥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69년 발족한 단체이다. 4백여 명의 호전분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1970년초에 적군파는 일본 항공의 항공기를 여러 대 납치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1972), 여러 나라에서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주요 테러 작전을 잇따라 감행했다

72년 적군파 내의 호전적인 다원들이 동료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었고, 이 파벌 싸움은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정부는 단원 대부분을 체포했다. 폭력 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 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74년까지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74년 이후 시게노부후사코를 두목으로하여 싱가포르·네덜란드·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거의 와해 되어오다가 소련붕괴 이후 조직이 거의 해체되고 있다

일본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적군파는 미군을 몰아내고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로동계급(공산당, 좌익연합)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공화국)를 건국 목표로 구성된 조직이다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통일혁명당은 김일성주의자들이다

적군파나 통일혁명당의 주요이론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총사령관 모택동의 사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6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1.제1공화국 헌법[인민회의정부론-인민민주주의 노선]

(1)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48825일에 열린 북한의 최초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2명을 선출하였다.

1948629일부터 7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ㄱ.선거

(ㄱ)이북 선거

북쪽에서는 825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오전 6시에 시작한 투표는 여섯시간만인 오후 12시에 마감되었다. 투표율은 99.97%였다. 선거구 212개에 후보는 모두 1217명이었다. 그중 227명이 북한 노동당을 비롯한 주요정당들의 연합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후보였다. 단일 후보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15개 지역에서 복수 후보가 출마했다. 투표는 흑백함에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지는 찬반 투표였다. 유권자들은 212명의 공동 후보에게 98.49%의 찬성표를 던졌다. 이렇게 이북지역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당선되었다

 (ㄴ)이남 선거

 이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해 7월 중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할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예비선거'에 돌입했다. 선거관리는 남쪽의 남한 노동당과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선거방식은 선거운동원들이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장이나 손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선거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대표성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남조선 대표자' 108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823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 모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 본회의를 개최했다. 대회 마지막날 북측의 8.25 총선에 맞춰 대표자들은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 남과 북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된 것이다[

ㄴ.선거결과

선출의석: 572

과반의석: 287


북한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비서)  157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35

북한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35

인민공화당 20

근로인민당 20석 

인민공화당 20석 

기타 정당 171

무소속 114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조선공산당 출신이 과반수 이상 의석을 획득했다


(2)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57827일에 열린 북한의 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215명을 선출하였다.

19568월 종파사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치뤄졌다.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 이남에 대한 선거가 완전히 불가능해짐에 따라 휴전선 이남 지역구에 대한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선거 결과

선출의석: 215

과반의석: 108


북한 노동당 (김일성 노동당 비서)  178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1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11

근로인민당 3

인민공화당 3

불교연합 2

건민인민연합 1

민주독립당 1

기타 5



한국전쟁 이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3)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210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383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383

과반의석: 192


북한 노동당 (김일성 중앙위원장) 371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중앙위원장)  4석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석 

근로인민당 1석 

불교연합 1석 

건민인민연합 1석  

민주독립당 1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4)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71125일에 열린 북한의 4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457명을 선출하였다. 최초로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이 인정되어 조총련이 진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457

과반의석:229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288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

북한 민주당 1

불교연합 1

기타 156


김일성 수상의 장기집권에 대한 거부감과 중공의 대미, 대일수교 정책으로 반미전선이 위축되어 북한 군부세력 기반이 위축 되었다.


2.제2공화국 헌법[사회주의 공화국-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1)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21212일에 열린 북한의 5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41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541

과반의석: 271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127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

북한 민주당 1

불교연합 1

기타 401석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12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친미 친서방 친남한 평화공존세력보다는 반박정희, 반미세력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성향 인사들이 대거 당선 되었다



 

(2)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71111일에 열린 북한의 6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9명을 선출하였다.


(3)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222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7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15명을 선출하였다


(4))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6112일에 열린 북한의 8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55명을 선출하였다


(5)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0422일에 열린 북한의 9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1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1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

조총련 13


3.제3공화국 헌법[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1) 김정일정부- 세습제 좌익군정-주체연호와 선군정치

ㄱ.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8726일에 열린 북한의 10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유훈통치가 끝나면서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연기되었던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594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3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3

조총련 7

기타 10

 

ㄴ.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383일에 열린 북한의 11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ㄷ.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938일에 열린 북한의 1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6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중앙위원장)  50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

조총련 6

기타 3


(2) 김정은정부-김일성 ,김정일 헌법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1439일에 열린 북한의 1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게된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은) 607의석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50의석

천도교 청우당(류미영) 22의석

조총련 5의석

기타 3의석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는 일본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재일 조선인의 단체이다.

 

약칭은 조선총련(朝鮮総聯), 총련(総聯)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조총련(朝総聯)이라고 부른다. 재일본조선인련맹을 모태로 1955525~ 526일 도쿄도 다이토구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한덕수 의장의 발기에 의해 결성되었다.

 

일본 내의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이다. 련합회는 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모든 재일 조선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중앙 본부는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2-14-15에 있다

 

1.역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는 1955525일에 결성되었고, 초대의장은 한덕수(韓德銖)이다. '재일본조선인상공인동맹''재일본조선인노동자동맹', '재일본조선인민주여성동맹' 등의 각 소수의 계층을 대표하는 단체들과 '재일본조선인인권위원회''재일본조선인평화통일위원회' 같은 시민단체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수가 수십여 개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학회는 고고학계의 전문학자들이 결성한 '고고학자동맹''사회과학연구소' 등이 있는데, 이 단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체들과 교류를 맺고 있다.

 

총련에서는 각 단체들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기관지인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194510월에 창간되었는데, 처음에 이름은 우리신문이라고 불렸다. 그 후 1960년도에 민중신문과 해방신문으로 이름을 바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조선신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신보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되며, 영문판으로 The People's Korea(인민조선)을 발행하고 있다. 자매지는월간 조국(月刊 祖國)이다.

 

한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는 '조선학교'로 불리는 교육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교육기관인 '초급학교', 중고등교육기관인 '중급학교''고급학교', 대학교육기관인 '대학교'를 갖추고 있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지방에 펼쳐져 있다. 대학교는 조선대학교가 있다.

 

2003년에 한덕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사망하자, 서만술(徐萬述)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되었다.

 

2012년에 현재 의장은 허종만이다.

 

2.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일본공민단체라고 자칭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조선로동당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13년 이후 조선로동당 소속 정보 기관인 통일전선부 산하 제225(구 대외연락부)의 지도를 받고 있다. 설립 당시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적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의 운영과 조선적조선인 경영자를 대상으로 융자를 시행하는 등 일종의 상조회 조직으로 기능했으나 본국의 정치상황에 연동하여 그 실태는 변모해 갔다. 도쿄도에 중앙본부를 두고 일본 전역에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지에 지부 조직이 있다. 중앙본부의 소재지는 도쿄도 지요다 구 후지미 2-14-15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률상으로 조선총련 구성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지만, 그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실제 수는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국가로서 승인되지 않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조선총련의 구성원은 일본 법률상 조선적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고, 또 대한민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많으나, 대부분은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 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지연, 혈연이 없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사실상 재일 자국민에 대해서는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18년 현재, 허종만 의장을 비롯해 5명의 간부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으로 되어 있다. 조선총련 출신자 중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단장이 된 예도 있으며, 재일한국 조선인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발족 당시부터 공산주의를 지지했고, 그 후 냉전기 공산주의 진영을 지지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이것이 일본 정부와 경찰 등 치안기관과의 긴장감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다.

 

(1)공안조사청의 조사

불법활동의 혐의가 있어서 공안조사청의 감시를 받고 있다.

 

(2)과세감면조치 철폐의 흐름

조선총련은 비자와 여권 발행 대리업무를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구로서,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는 명목 하에 과세감면조치를 받고 있었으나, 2002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방북 시 납치문제에 관여하였음을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조직과 시설에 대한 우대조치가 재검토되게 되었다. 도쿄 도의 고정자산세 감면조치 철폐 발표 후, 조선총련 시설이 사적 시설이며, 대일·대남 공작기관이다라는 현상에 관심이 향해지게 되었다.

 

2009년 현재, 전국 130개 지자체 가운데 전액감면하고 있는 지자체는 홋카이도 쿠시로 시 뿐이다. 또한 70% 이상의 지자체가 무감면조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쿄 도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의 부동산에 대한 고정자산세 등의 과세처분을 둘러싸고 등기상의 부동산 소유자인 합자회사 조선중앙회관관리회가 도쿄 도에 과세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여 제소하였다. 1심과 2심은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9812일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여 총련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3)일본 정당과의 관계

조선총련 창립 이전에 재일조선인이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였던 적도 있어서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가 깊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사회당에도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쌓았다. 일본사회당 좌파를 계승한 사회민주당과는 계속 우호관계에 있다. 사회당 출신의 민주당 의원에게 정치헌금을 했던 것도 판명되었다[2].

 

(4)지방 참정권

영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 문제에 관하여는,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가 재일동포의 민족의식을 희박하게 하여 일본사회로의 동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반대주장을 펴면서, 참정권 획득 운동의 중심인 민단과 정면대립하고 있다. 참정권이 야기할 당파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와는 결론이 일치하고 있지만, 일관되게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고 있다.

 

(5)조선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대한 공작활동

2010612, 조선총련이 조선학교 학부모들에게 문부과학성에 조선학교의 고등학교수업료 무상화를 요청하는 전화공세를 걸도록 할당량을 부과하였던 것, 또한 동시에 여러 명의 일본인 행세를 하여 전화횟수를 늘리도록 지시하였던 것이 내부문서에서 밝혀졌다. 산케이 신문은 총련의 무상화운동이 도덕성을 크게 일탈하였으며, 북한처럼 통제된 조직동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실태가 명백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조은신용조합의 불법송금에 조선총련 관계자의 관여가 의심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문제 추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납치사건을 비롯한 일본 국내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법활동(간첩, 불법송금, 마약, 권총판매 등)에도 많은 수의 조선총련 관계자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에 대해 조선총련은 악성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총련 관계 시설에 대한 강제수사에 대해서도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항의를 반복하여 왔다. 또한, 비판기사를 쓴 보도기관 직원에게 많은 항의를 하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판적인 단체의 집회를 조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방해하였던 적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주권을 인정하면 역차별 등으로 이어진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972년 당시 미노베 료키치 도쿄 도지사가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고 인정한 이래, 많은 지자체가 조선총련 시설을 사실상 외교 공관이나 공공시설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고정자산세와 부동산취득세의 감면조치를 하여왔다. 이는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4].

 

2003년 도쿄도는 조선총련 관련시설에 대해 소유자 대부분이 관련 기업(조선총련이 법인이 아닌 이유로)이거나, 외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일부에 대해 고정자산세를 부과하기로 하였다. 다른 지자체도 이에 따라 고정자산세 감면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편, 종래대로 계속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조선총련과 일부 법학자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행정소송에서 다투고 있다. 고정자산세 등의 감면조치를 둘러싸고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구마모토 모임加納良寛 회장이 구마모토 시장을 상대로 조선총련 시설 과세감면조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22일 후쿠오카 고등법원이 공익성이 없는 조선총련의 활동에 대해 조세를 감면하는 것은 위법하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구마모토 시장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기 때문에 최종적 결정은 대법원에 맡겨졌다.

 

또한 방위청(현 방위성)의 미사일 정보 유출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총련 측은 이를 사실을 왜곡한 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1)납치사건 관여

1973년 행방 불명된 사이타마현 가미후쿠오카 시 (현 후지미노 시) 여자의 조선족 아동 2명이 납치(2아동납치사건)되었는데, 그 여성의 남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이었고, 게다가 그 남편이 근무하였던 도쿄 무역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전직 여직원이 경찰당국의 조사에서 북한 본국의 판단을 요청했다등으로 진술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개입을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786월 발생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19806월 발생한 신광수(辛光洙) 사건(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2007425일 경찰청 공안부는 가미후쿠오카 시 사건에 관하여 국외이송목적 유괴 혐의로 사건에 관여하였던 혐의가 강한 공작원들이 한때 활동에 참가하였던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중앙본부’(류학동) 등 조선총련 산하단체와 관련단체 등 4개소를 가택수색하였다[7]. 수색시 재일 조선인 남성이 공무집행방해로 체로되어 도미사카(富坂)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당시 혐의사실 고지는 하지 않았음), 5월 말 불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8]. 이에 관하여 가택수색 당시 수사관이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나 TV에는 보도되지 않았었다.

 

또한 공안부는 도쿄도내 무역회사에 다수의 공작원이 입사한 경위 등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선총련 서만술 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남승우 부의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기 위해 같은 날 서면으로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같은 해 426일 고덕우 부의장이 보도용 기자회견에서 거부하는 취지를 발표하였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장

1973년 재일조선인자제 실종사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아베 신조 정권이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에 결부시킨 정치적 민족 탄압이라고 주장하였다[10].

 

(2) 대대한민국 공작 협력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8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인 광복절 축하행사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개최되던 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의 처 육영수가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사살당했다(문세광 사건). 문세광은 박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한국 경찰의 수사에 의하면 조선총련의 관여가 명백하였다. 이것은 적화통일을 목표하였던 문세광이 조선총련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高津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쳤고 한국 위조비자와 위조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측의 주장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관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반일감정이 높아져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일본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조선총련을 자극하지 않으려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 이 시기의 중조관계는 문화대혁명의 영향과 김일성이 중소분쟁에서 소련측에 붙었던 까닭으로 냉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김정일 총서기가 북한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하였기 때문에 조선총련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공작에 관여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에 등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종 기념우표에 등장하고 있다. 1965427총련결성 10주년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총련 건물을 배경으로 한일기본조약체결반대운동을 하는 군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 우정 당국은 1970, 1975, 1985, 2005년에도 총련 건물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하였다.

 

(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 운동

195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상낙원등으로 선전하여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을 영주귀국, 이주시켰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공작원의 방해 폭파테러와 조선총련 간부에 대한 테러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일본 적십자사 폭파미수 사건). 이것이 원인이 되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를 중심으로 잇따라 조선총련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운동에는 산하단체인 중외려행사(中外旅行社)가 일부 개입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086월에는 일본 거주 탈북여성이 조선총련에 대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을 제기한 여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상낙원이다.’라는 조선총련의 거짓선전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노동, 고문, 차별을 강요당하였고, 죄수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하였으며 ‘(조선총련은) 사람을 속여 조직적으로 유괴하였다.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빼앗은 악마와 같은 단체이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강제수용소 안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선총련은 이러한 소송에 대해 동포사회와 일북 관계를 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12].

 

(5)영화 동해의 노래

귀환사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총련이 공동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2부작)2009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한덕수 의장을 비롯한 제1세대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김일성 노선전환방침(1952)과 총련 결성,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인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 실현까지 1940~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된 사건을 그렸다.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왔던 한덕수 의장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 업적과 생애 및 재일조선인의 활동에 관한 홍보작품이기도하다.

 

(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과의 관계

20088월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의 기소장에 의하면, 이 여간첩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성적관계를 맺고 기밀정보를 얻는 허니트랩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는데, 20076월부터 20085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최장 2개월 이상 체류하였다. 기소장에는 일본 협력자로 조선총련 산하단체 간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과 사장직함을 가진 오사카 거주 인물 등 2명의 실명이 기소장에 기재되었다.

 

기소장에 올려진 산하단체 간부는 조선총련 관계 단체 간부로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피고와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보위부에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 멋대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라며 관련을 부정하였다

 

(7)연평도 포격

조선총련은 2010년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에 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조선총련은 조직원 내부교양자료에서 연평도에서 숨진 민간인 2명은 연평도 주민이 아니라 해병대 시설 공사에 동원된 본토 사람이고, 숨진 장소도 군사시설 내부이므로 민간 희생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일본 정부는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미루었다. 일본 사회의 연평도 포격 비난 여론으로 20101226일 일본 16개 도·현의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었다.

 

 

4.중앙본부 건물 매각 문제

중앙본부(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토지와 건물은 미쓰이 다다오 전 부동산회사 사장의 중개로, 2007531일 오가타 시게타케 전 공안조사청장관가 대표로 근무하는 하베스트 투자고문 주식회사에 매각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중개자인 미쓰이 다다오는 조선총련으로부터 수수료 명목으로 49천만 엔이 전달되었다.

 

중앙본부 건물(지상 10, 지하 2층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 연면적 11700평방미터)과 토지(2390평방미터)는 약 40억 엔을 초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매각대금은 35억 엔) 도쿄지검 특수부는 당초 조선총련이 정리회수기구로부터 제기된 소송에서 패할 경우 압류를 벗어나기 위해 탈법, 불법행위를 할 의도가 있다고 보고 전자적공정증서원본 부실기재 등 혐의로 수사하고 있었다.

 

수사 결과, 조선총련이 소유권 매각양도 후에도 임대물권으로 인정받아 사용할 수 있는 매각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조선총련측이 피해자였다면서 오가타 시게타케와 미쓰이 다다오는 자금조달 목표가 서지 않았음에도 토지, 건물 및 수수료를 편취하려 하였다라는 이유로 2007628일 사기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수수료 명목으로 사취한 금전 중 절반밖에 반환되지 않았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신보(朝鮮新報)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의 기관지로, 주로 조선어로 발간되고 있다. 본사는 일본 도쿄에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지국을 두고 있다.

19451010민중일보(民衆日報)로 창간했으며, 19469월에 해방신문(解放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8월에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인해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본 정부에 의해 정간 조치를 받았다가 19525월에 조선민보(朝鮮民報)로 복간했다. 19611월에는 조선신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5월에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처음에는 격주간, 주간으로 발간되었다가 19619월부터는 일간, 8면으로 발간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발행하지 않는다. 잡지 조국과 일본어문 잡지 이어는 모두 조선신보사에서 발간한다. 1980년대 초에는 컴퓨터 식자를 들어와 디지털 방식으로 출판되고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편집하는 지면도 있으며, 영문판인 인민조선 (The People's Korea)을 발간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로 발간하고 재일 조선인들에게 보다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1999년부터 생활정보지의 역할도 튼튼히 하고 있으며, 가끔씩 문예면을 통해 재일 조선인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 작품들을 연재한다.

본사 및 지국

본사

일본의 기 일본 도쿄도 아라카와구 히가시닛포리 2-26-1

평양지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중구역 오탄동 평양호텔 5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영어: Korea University)는 재일 조선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이다. 줄여서 조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총련 조선대학교가 1956년 6월 8일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조총련계 인사들에 의하여 2년제 대학교로 설립하여 지금까지 13,000명졸업생을 배출하여 운영 되어오고 있다
전(全) 학생이 기숙사제로 조선연극부등 총 8학부로 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현재 수학하고 있었으며 졸업생들은 주로 조선학교의 교원 및 총련신보나 잡지의 기자로 취직하며 총련 동포가 경영하는 금융기관에도 취직하고 있다

1.개요

조선학교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대학으로의 승인을받지 못하여, 법적으로 각종학교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 사립학교법에 근거한 학교법인 도꾜조선학원이 운영하고 있으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있다.

 

전후의 개방대학에서 50여년의 역사가 있고 제반 조직 개편을 거쳐 현재는 4년제 8학부 (일부 3년제)로 구성이 되어있다. 강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진행되며, 일본인 강사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재학생의 대다수가 조선고급학교 출신이지만, 일부 일본의 고등학교 졸업생도 다니고 있다. 일본학교 출신자는 편입반으로 불리는 반에 들어가(유학생 별과에 상당), 한국어 습득 등 교육을 받는다. 조선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 일본 국적의 학생도 재학하고 있다.

 

졸업생의 진로는 조선총련직원, 조선학교교원, 재일동포 기업등에의 취직이 많다. 한편 타대학의 학부, 대학원 진학자도 있어 국내의 대부분의 사립 대학과 일부를 제외한 국공립 대학은 졸업생에게 대학원(법과대학원을 포함한다) 수험 자격의 문을 열고 있다.

 

재학생은 일부 기숙사생활이 곤란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기숙사에서 학외로의 출입은 폐문시간 전까지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방과후는 아르바이트에 힘쓰는 학생도 많다. 평상시 외부인의 캠퍼스 입장은 제한되고 있어 방문자는 소정의 수속을 거쳐야 한다. 다만 학원제 기간중에는 캠퍼스가 개방되어 인근 주민등에서 활기를 보이고 있다.

 

2.연혁

1956- 도꾜조선중고급학교(도쿄도 기타구) 부지에서 2년제로 설립

1958- 4년제로 전환

1959- 도쿄도 코다이라시에 이전(교사는 1962년도의 일본 건축 연감상을 수상)

1964- 도서관 및 강당을 준공

1964- 문학부·역사 지리학부·정치 경제학부(정치 경제학과이학부(물리 수학과사범 교육학부(사범과, 체육과, 음악과, 미술과)5 학부 체제가 된다

1967- 공학부(기계공학과, 전자 공학과)를 설치

1968- 당시 도쿄도 지사에 의해 각종학교 취급이 된다

1968- 공학부에 금속 공학과를 신설

1970- 조선어 연구소를 신설

1970- 외국어 학부(영어과, 불어과)를 설치

1974- 연구원(일본의 대학의 대학원에 해당한다), 민족 교육 연구소를 신설

1975- 역사 지리학부에 역사학과와 지리 학과를 신설

1977- 정치 경제학부에 경영학과를 신설

1978- 정치 경제학부에 철학과와 사범 교육학부에 보육과를 신설

1982- 창립 25주년 기념관 준공

1982- 정치 경제학부 경영학과가 경영학부에 승격 설치, 사회과학 연구소를 신설

1985- 사범 교육학부에 3년제의 사범과를 신설

1990- 3 연구동과 체육관을 준공

1999- 이학부와 공학부를 통합해이공학부로 개칭, 이공학부에 정보처리 학과를 신설, 정치경제학부에법률학과를 신설, 사범교육학부를교육학부로 개칭해 교육학과를 4년제와 3년제로 개편, 연구원을 전기 2·후기 3년으로 개편

2003- 단기학부를 신설, 문학부와 역사지리학부를 통합해문학 역사학부로 개칭

2004- 단위제를 도입

2006-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2007- 축구부가 도쿄도 대학 축구·리그 우승, 칸토 대학 축구 리그(2)에 승격

 

3.개설학과

정치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법률학과

 

문학역사학부

어문학과

역사지리학과

 

경영학부

 

외국어학부

영어학부

일본어학부

 

이공학부

이학과

전자정보공학과

 

교육학부

 

체육학부

 

단기학부

생활과학과

정보경리과

 

   

일본 도쿄 소재 재일 조선대학교(조대)에서 지난 11일 제60회 졸업식이 진행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19일 보도했다.

 

허종만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과 배익주 부의장, 강추련 부의장 겸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 송근학 교육국장,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과 학부장들, 각 지역 조선고급학교 교장들, 조선대학교 졸업생들과 학부모, 교직원·학생 등이 졸업식에 참가했으며, 북한 교육위원회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대학에서 축전을 보내왔다고 통신은 소개했다.

 

허종만 의장은 축하발언을 통해 '공화국의 유일한 해외대학'인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재일 조선인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면서, "총련의 모든 조직과 재일동포들은 공화국창건 70돌을 맞이하고 총련 제24차 전체대회가 진행되는 뜻깊은 해에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이 애족애국운동에서 청춘의 열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휘할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졸업식에서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의 보고에 이어 졸업생들에게 북 교육위원회와 총련 상임중앙위원회, 조선대학교의 표창장이 수여되었으며, 졸업생들의 결의토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낭독되었다.

 

재일 조대는 지난 1956410일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의 최고학부로 창립되어 19584년제 대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지난 2016년 창립 60돌을 맞이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7.4남북 공동성명은 남북 일본 라인(남북 일본축 대외조직)으로 추진 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7·4 南北 共同 聲明)19727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1.배경

공산주의 진영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등으로 인해 공산권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자유주의 진영은 닉슨 독트린으로 핵문제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 책임을 진다는 등 자유 진영에도 위기감이 들었다. 한반도에서는 미군의 부분 철수, 미ᆞ중의 화해 무드로 양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남북은 변화하는 국제정치환경에 적응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3]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박정희가 이끌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1971년 국제 연합의 성격 변화(중화민국의 제명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에 아우른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무드를 등에 업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에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과 중공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평화통일 8개항 방안과 언커크 해체 요구입장의 지지를 주 내용으로 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세계적 데탕트 분위기를 이용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화에 임했다. 국가예산 지출액의 30%선을 상회하는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통해 군사문제를 우선 해결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그에 따라 군사비를 동결하여 남는 재원을 경제부문에 투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북회담 제스처에 대한민국 정부가 부응함으로써 19719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 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회담이 진행되어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CIA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대화에 응한 이유가 북한이 남북대화를 통해 남한 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군 철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일시적으로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며, 그가 후에 정상회담을 할 의향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을 추가로 북한에 보내지 않을 것이고, 공동성명을 통해 설치되는 남북조절위원회는 고위급이 없는 실무진 위주로 구성되며, 남북적십자회담 지원 및 비무장지대 충돌 방지 목적으로만 할 것이라고 했다.

 

2. 경과

성명 발표 이후, 남북은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그러던 1973828일 북한은 평양 방송을 통해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김영주 공동위원장 명의로 남북대화를 중단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한의 ‘6·23선언‘2개 조선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며 맹비난을 했으며, 이를 빌미로 진행되어 오던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3. 주요 내용과 남북 해석 차이

(1)주요 내용

7개 항이 있으며, 쌍방은 1항에서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을 합의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남북 해석 차이

공동 성명에 대해 남북간 해석 차이가 있다 이는 후에 있을 남북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주: 대한민국은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는 열린 자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세 배격을 통한 배타적 자주로 해석한다.

 

평화: 대한민국은 북한의 무력도발 포기와 상호 불가침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자주국방력 강화에 제동,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했다.

 

민족대단결: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바탕에서 민족적 이질화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했다.

 

4. 의의와 계승

남북의 양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로서 의의를 가진다. 최초의 남북회담이다. 또한 기존의 외세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이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계승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이해는 정권별, 시기별 이해보다 거시적인 역사적 제도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70년대까지 남북 사이에는 1·21 사태 등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는 무장도발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른 전쟁 재발의 두려움과 특수공작대 유지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 2항에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타협하였다.

 

5. 한계와 비판

양측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성명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은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헌법을 이용한 독재를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속에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공동 성명을 통해 남북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선, 해결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정부 당국 간의 회담이 아닌 준공식적 회담이기 때문에 무게감 있는 구속력은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이후락이나 최규하등은 대일외교팀이다

-북한 대남비서만 '3'한 김중린

 

북한의 대남비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때는 당 작전부(대남 공작원 훈련 및 요인 암살), 35호실(엘리트 간첩 양성), 당 대외연락부(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 통일전선부(대남공작 및 남북대화 등) 4개 기구를 총괄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해졌다. 현재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만 관장하고, 나머지 조직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과 함께 총참모부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김중린(1923~2010)은 대남비서를 3차례 역임했다. 첫 번째는 694~769, 두 번째는 781~8312, 세 번째는 8811~901월이다. 대략 13년 정도를 맡았다. 북한의 대남비서 가운데 최장수다. 그는 대남 강경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지휘를 했다

김중린은 자강도 우시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46년 평안북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시군은 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벽동군 우시면으로 있다가 54년 자강도에 편입됐다. 김중린은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52년 노동당 지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54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윈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제네바의 국제적십자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 김중린이 김일성의 눈도장에 찍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환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592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석해 성과를 올린 것이다. 김중린은 그 해 12월 재일동포 975명을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태워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중린은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694월 대남공작 실패 등의 이유로 숙청된 허봉학을 대신해 항일 빨치산 장군 출신이 아닌데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됐다. 냉전 시절에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남비서를 맡기 어려웠다. 앞선 이효순-허봉학은 모두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김중린은 급기야 7011월 제5차 노동당 대회에서 권력 서열 10위로 급부상했다. 10년 전 제4차 노동당 대회의 87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김중린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25월 평양을 방문해 그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비밀협상을 가졌으며 이후락은 김일성과 그의 동생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두 달 뒤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중린이 김일성과 김영주를 도와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린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김정일이 74년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김정일은 766월 대남 공작부문을 대상으로 집중 사찰을 시작했다. 사찰은 5개월간 지속됐고 김정일은 진행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김중린도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50년대 이래의 대남공작은 한 마디로 0이라고 질책했다. 아울러 김정일은 과거의 공작 활동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 전술적 방침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사찰은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됐고 그 결과 김중린 769월 노동당 산하단체인 남조선연구소의 소장으로 좌천됐다. 김정일이 대남서기를 겸하며 대남공작기관을 지휘했다. 남조선연구소에서 찌그려져 있던 김중린은 781월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다. 북한은 사람을 한 번 버렸다가 능력에 따라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대남비서 시절에는 악역을 맡았다. 그 악역은 83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각료 4명을 포함해 17명이 사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참극이었다. 아웅산 테러는 감독 김정일, 각본 김중린, 기술감독 김격식 등이 진행됐다. 김격식은 2010년 연평도 포격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김중린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또 다시 을 먹었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체포된 공작원이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탄로가 났다. 버마 정부가 테러는 북한 부대에 의한 범행이라고 발표했고 69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아웅산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김중린은 또 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8312월 대남비서를 허담(1929~1991)에게 물려주었으며 843월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851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마저 탈락됐다. 김정일의 미움이 그 만큼 컸다. 김정일은 아웅산 테러범들이 붙잡혀 범행을 털어놓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한 책임을 김중린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은 86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조금 엉뚱했던 임명이었다. 김중린이 대남비서를 ‘3를 하게 된 것은 8811월이다. 이번에는 고작 12개월 정도였다. 그 이후 그는 901월부터 당 근로단체비서를 맡았다. 근로단체비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조선직업총동맹(직총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을 지도한다. 노동당 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부서다. 김중린이 근로단체비서로 언제까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당에서 중요직책을 맡았던 그는 201042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허담, 연형묵 등과 함께 김중린을 언급했다.



-박정희정부때 남북대화 실무자 대남통 경북 경주출신 박성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 부위원장.

박성철은 경북 경주출신으로 1913년 9월 2일 태어났으며 그는 일본 상지대를 졸업했다
그는 1936년 동만주에서 소련군 극동저격여단[소련군 붉은여단 삘치산부대, 김일성 항일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광복 후 입북했으며 조선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1954년 주(駐) 불가리아대사로 부임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으로 1958년 8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1959년 10월 외무성 부상으로 실질적인 외교활동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6년 10월 내각 부수상, 1967년 12월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권력핵심부인 정치위원회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외무상으로 중동. 아프리카등과 외교관계 수립에 힘써고 1970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당정부 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1972년 5월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하였으며 뒤이어 열린 남북조절위원회에서는 평양측 공동위원장 김영주를 대리를 맡아 평양측 공동위원장인 김영주 대신 남북대화에 임했다
1976년 4월에 정무원 총리에 선임, 1977년 12월 국가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도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일본상지대 출신이며 항일유격대 출신으로는 드물게 외교방면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84년 2월 당.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 장례식에 참석했고 1985년 1월 니카라과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등 대외활동을 활발히 했다
1991년 8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맡았다

1.성명----박성철(朴成哲, PARK Sung-Cheol)
2.생년월일--1913년 9월 2일
3.출생지---경북 경주
4.학력---일본 상지대 졸업
5.주요 경력
ㄱ.김일성항일유격대 출신으로 한국전쟁때 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참전 그리고 남한점령 주도
(ㄱ)항일유격대 출신
(ㄴ)한국전쟁 당시 제15사단장으로 참전
ㄴ.일본상지대 출신으로 일본통으로 외교분야 활동을 했으며 대남통으로 1960년대 통일혁명당 사업과 박정희정부때 남북대화 주도
(ㄱ)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과 외무성 부상, 외무상 역임
(ㄴ)1972년 서울방문과 박정희 전대통령 비밀회담
(ㄷ)1960년대말 통일혁명당 사건 협상력 과시
(ㄹ)1991년 8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은 대남 북한 정치조직단체로 조국전선이라고도 한다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동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조직체로서 종래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통합된 것이다
8.15 뒤 남북한에 각각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는데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40여 정당.사회단체들로 <남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조직되었으며 북한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한 13개 단체로 조직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불법단체로 규정되자 1949년 평양에서 남북한의 두 단체가 통합 현재의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산하에 각종 직능단체. 종교단체. 정치단체등 19개가 있다 주로 한국의 정치정세가 변동할때 마다 대남위장평화공세를 일관해 오다가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창설 이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전위대로 활동해오고 있다
경북 경주출신 박성철이나 서울 출신 유미령등이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의장을 맡았다
ㄷ.남한출신으로 공화국 영웅 칭호
그리고 김일성 국가장의위원, 오진우 국가장의위원 역임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북한 아동 훈련용 목총(木銃) 모습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어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이다
-머리소리함(知積能力團) 논의내용-


*안보능력: 내전위기 여부, 동맹국 여부 , 군사력 여부

*경제능력: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

*정치능력: 의회 민주주의와 주민 자치능력 그리고 지도자의 개인 능력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의견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권력은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유지에 주력해왔습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소리함으로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북한정부의 군사력

북한은 재래식 핵무기(핵 폭탄, 수송기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와 신형무기 핵탄두 탄도미사일(로켓이나 미사일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러시아 극동지역 조차도 위협이 되고 있다

30분으로 서울을 평평하게 서울 불바다 이론이 바로 북한정부의 전술 핵무기와 전략 핵무기 이론이다

남한의 위협은 재래식 핵무기 원자폭탄과 핵 대포나 핵 배낭,핵 어뢰 등 전술 핵무기, 단거리 탄도미사일 전략 핵무기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위협은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략 핵무기이며 미국등 태평양 연안국의 위협은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 수준이 고저(高低) 각도 발사로 비행거리를 조정하는 "로프티드 궤도(lofted trajectory)[高低角度 발사] 모델" 수준이고 북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도 남한(한국)이나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지역의 위협되고 있다





 

 

The news came hours after state media showe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inspecting what it said was a hydrogen bomb[미사일 핵탄두]

미사일 요격 방어시스텀 미국 사드나 러시아 S-400는 수송기(폭격기)나 로켓,탄도 미사일도 요격이 가능하다

미사일 방어 전투는 미사일 탄두를 식별하고 그 미사일 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한 순간의 전쟁이다. 한국이나 아시아 태평양지역도 나토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DD) 배치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이고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탄도로켓]까지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북한 로켓부대(미사일과 포부대) 이외 지상군(地上軍, ground army)은 남한보다 열세이다


(2)내전위기 여부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 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척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남녀 징병제 국가로 120만명의 인민군을 보유하고 있다[남자는 10년, 여자는 7년 군복무]

북한 인민군의 60%이상이 북한내부 법과 질서(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를 지키는 치안군이다

북한정부의 군사력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치안군이다

북한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김정은 부대가 남침이나 일본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할때 내전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반김정은 세력이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할때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 붕괴될 것으로 본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3)동맹국 여부

과거 북한정부의 동맹국 러시아나 중국은 유엔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으로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 유엔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와 탄도 미사일[핵 대포, 핵 배낭, 핵 어뢰, 핵 기뢰등 전술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공중발사 순항 미사일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 탄도 로켓(대륙간 탄도 미사일 ,사거리 5,500km 이상)  등 전략 핵무기]의 완전한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의 자금이나 경제, 외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북한정부 내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온 세력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다

주체연호(세습제 좌익군정) 청산이 수평적 권력교체이며 핵무기 포기정책이다


*조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朝蘇友好協力─相互援助條約]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1)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11월부터 1964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2)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8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9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4,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3)의의와 평가

냉전 시기 북중우호조약과 더불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 주요 군사동맹조약. 19617월 북중우호조약과 북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1961년 7월 11일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은 조약.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1961711일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당시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 총리가 양국 전권 대표로 서명했다. 양국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어느 한쪽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에 들어갈 경우 양방은 의무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군사적 지원 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981년과 2001년에 2차례에 걸쳐 자동 연장됐고 앞으로 유효기한은 2021년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와 탄두 미사일 개발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내용

1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아시아와 세계 평화 그리고 양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2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체결국에 대한 특정 국가의 침략을 방지한다. 체결국 가운데 한 쪽이 몇몇 동맹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 상태로 바뀌는 즉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3조 어느 체결국도 다른 체결국과 맺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집단, 행동,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4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양국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중대한 국제 문제에 대해 서로 협의하기로 한다.

5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과 평등 호혜의 원칙, 우호-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가능한 한 경제-기술 원조를 진행하며 양국간의 지속적인 경제, 문화, 과학, 기술 협력을 통해 발전시킨다.

6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조선의 통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을 원하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 인민의 이익 및 동아시아의 평화 옹호 목적과 일치하는 것을 인정한다.

7조 이 조약은 양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으며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비준서는 평양에서 교환하며 양국이 조약의 개정 또는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

 

핵 보유를 위한 북한의 시도는 자국과 지역의 안전에 충격을 줬고 중국의 국가안보 이익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는 조약 위반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약은 침략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명시했는데 북한이 고집대로 핵을 개발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는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와 2001년 조약이 마지막으로 갱신됐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북한은 반드시 핵실험을 중단해야 하고 한미 양국도 북한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을 멈춰야 하며 양측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북중관계가 외부로 비치는 것보다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중 수교 다음 해인 1993년 북한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중국이 아닌 호주를 지지했고,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대사관에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가 북중 혈맹관계 와해를 주장하며 조선(북한)은 잠재적 적국이고 한국은 가능한 친구라고 말한 강연록도 회자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했습니다[한반도 통일국가는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닌 남북 주민이 선출한 남북의회에 의한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평화통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정책 노선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정부는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은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란 말은 이상주의나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원칙보다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남침을 할 수 없을 만큼 약한 국가이다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때는 유도적 전술 오판이나 북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유엔안보리는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 수 있는 세력에게 대북제재를 가하고 있다


2.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

유엔이 또다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로 분류했습니다. 스위스의 비정부기구는 북한을 인도적 위기국으로 꼽았습니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71분기 곡물 작황 식량 상황 보고서에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세계 41개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2018년 곡물 생산량이 예년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전년도 보다 더 감소할 것으로 공식 추산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지난 해 7월과 8월 사이의 높은 온도와 적은 강수량 때문이라며, 그 결과 대부분의 가구의 식량 소비율이 계속 경계선상에 있거나 열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식량 불안정에 관한 우려가 계속 남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보고서는 지난 해 말을 기준으로 북한의 식량 수입 필요량이 641t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한주재 유엔 상주조정관실은 6일 발표한 ‘2019년 북한 필요와 우선순위 보고서에서,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495t으로 전년도 545t에 비해 50t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북한에 만성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실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며, 전체 인구의 43%인 약 1100만 명이 영양결핍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타판 미슈라 상주조정관은 특히,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9% 감소하면서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로 인해 상당한 식량 부족이 초래됐다며, 적절한 자금 지원이 없을 경우 북한의 인도적 상황이 악화되고 영양실조와 질병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인 ACAPS7일 북한을 인도주의 위기국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복합적인 인도적 위기는 정치 경제적 요인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해 촉발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야욕이 국제 제재로 이어졌고, 이는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북한은 폭우와 홍수, 가뭄 등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2018년에도 심각한 홍수를 경험했고, 8월에는 태풍 솔릭이 북한을 강타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과  영양부족(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Famine grips North Korea]

A malnourished boy stands in an equally emaciated cornfield,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29, 2011. [북한 함경남도 옥수수 밭에 서 있는 영양부족(영양실조) 북한 아동모습(2011년 9월 29일)]

 

 

   A homeless woman prepares a few shriveled ears of corn for lunch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점심 밥)

 

  Students and volunteers dig a canal on October 1, 2011 in Haeju ,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학생과 주민 자원자들 동원 근로사업)

 

        A woman cooks at home on September 29. 2011,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옥수수 밥을 준비하는 북한 어머니 모습)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A boy prepares the soil for crops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농작물을 위해 흙을 준비하는 소년모습)

 

 

    Women work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들 모습)

 

 

            Pak Su Dong, the boss of the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집단농장 책임자 박수동씨 모습)

 

 

           Jo Tae Kun, a health-care assistant in a small village in Hwanghaenam-do, North Korea(마을 영양사 조태곤씨 모습)

 

 

   Two North Korean orphans dress to impress a foreign delegation(두 명의 북한 고아들이 외국 파견단 방문용으로 좋은 옷을 입은 모습)


자료:중국정부

http://www.china.org.cn/photos/2011-10/11/content_23591611_6.htm



(2)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 파시즘 북한 인민군 경제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군수산업 중공업,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비용이 대부분 인민군 경제활동에서 충당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국영자본체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이나 외부 경협이 인민군  영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대북 투자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을 지지해야 한다 민간경제 대북투자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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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북한 인민군 제549부대 양돈장(養豚場) 시찰하여 돼지 사육과 도축 그리고 돼지고기 제품 판매 현황등을 시찰했습니다


 

 

 

2013년 5월 2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을 방문했습니다.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은 면적이 349만 평방미터로 인민군 가축 식량기지로 양등을 사육해오고 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마쓰마에초 부근 해역에 위치한 무인도 마쓰마에고지마에서는 지난달 28일, 북한을 출항한 목조선이 정박해 10명의 선원 가운데 일부가 상륙했는데 경찰 등의 조사에 따르면 섬 건물에서 TV와 소형이륜차 등이 없어진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이들 10명의 선원 가운데 약 절반이 해상보안본부 등의 조사에서 이전에 조선인민군 소속이었다고 밝힌 사실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취재에서 밝혀졌습니다.

목조선에는 북한 인민군 제854군부대라고 쓰인 표식이 달려 있는데 무기 등은 없었고 북한에서는 군이 외화획득을 위해 수산업에 관여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군부대 소속 어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과 해상보안본부는 선원이 과거 어떤 부대에 소속했는지도 포함해 계속해서 군부대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3)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제4공화국 헌법은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식 국영자본체제

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시민소유는 그 시민개인의 재산이며 물질적·정신적 만족을 위하여 사용된다. 시민소유에는 노동에 의하여 또는 법률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범위내에서 취득된 소비용 또는 산업용의 모든 재산이 포함된다. 다만, 시민의 소유로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취득물은 이에서 제외된다. 농업과 개인의 부업경영 기타 법률에 규정된 목적을 위하여 시민은 영대사용(永代使用) 상속의 대상으로서 토지를 전유하거나 사용할 권리가 있다. 시민재산의 상속권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되고 보장된다.[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전 일본국가와 일본인의 소유토지 및 조선인 지주의 소유토지는 몰수한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한다.

토지는 자기의 로력으로 경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5정보 또는 20정보로 한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지역 및 조건에 따라서 따로 법령으로 규정한다.
토지의 개인소유와 아울러 국가 및 협동단체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
국가 및 협동단체의 토지소유면적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로력농민의 리익을 특히 보호하며 경제적 정책이 허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방조한다.[1948년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북한은 인민경제 제1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1972년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북한  경제는 민간경제(인민경제)에서 인민군이나 집단농장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로 전환돼 왔다

북한 경제는 스탈린헌법보다도 반민간경제(반민생경제) 국가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북한 빈곤층 생활 모습은 TV 방영 되지 않고 있다








                                                                   




                                                                 텃밭이나 개인 부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 모습

 


3. 북한정부의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1공화국 헌법 인민회의정부론 인민 민주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제2공화국 헌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을 공식적으로 국가제도로 인정한 이후 의회 민주주의 정치와 주민자치가 사라지고 지역 군사위원회나 중앙 국방위원회에 의한 통치를 해오고 있다

이때부터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노선 인민 전쟁론[의회에 의한 전쟁방식]에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전쟁론[군대에 의한 전쟁방식]으로 변경 되었다 


(1)당군이론과 선군정치 노선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대의원은 대부분이 현역군인이나 퇴역군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 모습



                      411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5차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2)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자가 돼야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주체연호)과 김정일주의 선군정치를 지지해야 정치범이 아니다

북한정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이외는 모든 세력이 적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버려야 종파분자가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 선군정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라

-국제적 반미투쟁가와 연대를 하라 그래야 반미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중국정부 내 친미인사를 제거하라 일본정부나 한국정부 내부 반미인사를 포섭하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자격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 참여할 정당과 개인은 선거연합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며 해당 선거연합은 모든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한다"

후보를 내는 곳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뿐이기에 모든 지역구에서 단독 후보가 출마하게 되고 홍보나 선전 활동 등 선거 유세도 없다.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에 기표소에 들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였으니 기표소에 들리는 것 자체가 해당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표시가 되는 '공개투표'가 된다. 선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개표가 끝난 뒤가 아니고 투표가 끝난 뒤에 한다는 점도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로동당 (여당) ·

조선사회민주당 ·

천도교청우당

해외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단체[조총련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6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 김정은정부 친위대이며 자금줄(돈줄)이다

특히 해외 단체 북한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정부 인적자원단체이며 자금줄(돈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김일성정부가 박헌영과 남로당을 체제전복 범죄행위와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이후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와해 되었고 박정희정부 때 남한 최초의 김일성노선 통일혁명당을 조직했고 1972년도 주체사상 선포와 함께 남한, 조총련 해외단체에 대의원을 선출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구축해왔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12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3)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 탈북민

-김정은 독재 정권 종식할 때 진정한 평화통일-

                                                                         ▲북한 민주화위원회 허광일 위원장

제16회 북한자유주간 3일째인 4월 30일 오후 2시(현지시간) 워싱턴 D.C. 헤리티지재단에서 '북한 인권과 안보 위협 사이의 정책 격차 좁히기'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허광일 위원장(북한민주화위원회), 김흥광 대표(NK지식인연대),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의 발표 내용을 아래 요약했다


허광일 위원장

북한민주화위원회는 황장엽 선생이 북한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 운영해 온 탈북자 조직이다. 해마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는 북한자유주간은 17년 전 황장엽 선생을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했던 수잔 솔티 여사가 그 때를 기점으로 매년 해오고 있는 국제적인 행사다. 북한 2,300만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해 온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인권이라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로 인권탄압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2,300만 북한 주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채 노예와 같이 살아왔다. 고난의 행군 때에는 35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당시 350만 아사의 대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 탈북자들은 이를 살인 독재자 김정일에 의한 인위적인 대학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 문제 해결에서 중심은 부득불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에 설 수 밖에 없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통일도 기약할 수 있다.

북핵은 3대 세습 마지막 독재자 김정은의 생존 수단으로 북한 정권의 운명과 직결돼 있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권유린과 독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의 인권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고 착취 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 주민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그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들려는 북한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된 북한 장마당은 북한식 변화의 민감한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장마당을 통해 외부정보가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었고 이는 북한사회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그 결과 장마당을 시시때때로 단속하는데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는 북한의 보편적인 생활로 자리 잡았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한류를 비롯한 외부 정보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지만 정보 확산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북한은 탈북자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과 협박을 가하고 있다.

저와 같은 경우만 해도 북한은 십 여년 전부터 저의 북한 행적을 면밀히 알아보고 저에게 북한 보위부 소속의 고위급이 직접 저희 딸을 내세워서 전화를 해서 북한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은 모략을 다 꾸며왔다.

심지어 이들은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의 동영상을 저에게 보내주면서 다시 북한으로 온다면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도 해왔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통일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종식할 때 이뤄진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종식은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적으로 거론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 대한 세력이 힘을 얻게 될 때 든든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김흥광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흥광 대표

북한은 고도로 폐쇄된 사회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고발도 세계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액션도 그것을 취했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알아야 접근할 수 있는데 피드백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수정하거나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그 악마를 보통 사람과 친구로 만났다. 김정은의 거만성이 지금 매우 높은데 매우 나쁜 신호다.

탈북자들은 10여 년 동안 북한 붕괴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생각이 있다.

1.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핵무기를 어떤 협상이나 보상으로 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을 붕괴시키면 핵도 없어진다. 북한이 민주화 되면 핵무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 북한 정권에서 핵무기를 떼어내기 위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권에 관한 것이다.

북한과 협상을 할 때, 정치범 수용소를 해체하라거나 이동의 자유, 해외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게 하라고 하면 북한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비핵화와 장거리 미사일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2. 북한 내부로 외부 정보를 강물처럼 흘려 보내야 한다. 미 국무부와 많은 북한 단체를 통해서 북한에 들여보낸 많은 정보들이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동력으로 작용했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사회에 크게 3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는 속삭이는 사회다. 그리고 거기서 더 깨어나서 통하는 사회처럼 대 놓고 소통하는 사회가 두번째 단계다. 그리고 마지막은 행동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된다.

 

북한자유주간 대표단 가운데 다양한 시대별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의식이 다르다. 북한에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현 주소는 웅성거리는 사회로 진입했고 공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제는 행동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 방안이나 21세기 히틀러가 될 수 있는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탈북자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친다는 말이 있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많은 보고서는 탈북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현재 인권 상황 가운데 행동하는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북한에 인터넷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시도와 기술적 대안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있는 각급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탈북자들이 60명이 넘어서지만 북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정보를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북한에 다양한 풀뿌리 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 조직, 사회 조직, 군사 조직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런 활동을 위한 후원도 필요하다.

 


                                                                               ▲김성민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성민 대표

한국 현지시간 새벽 315분이면 만조를 통해서 물풍선을 보내고 있다. 페트병에 쌀을 담아서 보내는 것도 있는데 새벽 만조 때 이뤄지는 것은 김정일 김정은의 왜곡된 영상과 함께 쌀과 약재, 성경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현장에서 보신 분들이 많겠지만 물 흐름을 따라서 김정은 머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정말 장관이다. 이것이 탈북자들의 힘일 수 있다. 북한이 남쪽에서부터 이상한 물건이 떠내려오면 간첩물자라고 생각하고 총으로 쏜다. 그런데 김정은 사진이 있는 풍선 때문에 이 물자를 쏘지 못한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보여드린 것처럼 페트병, 아이스박스, 김일성 머리 풍선, 대북전단, 제가 하는 대북 라디오, 최정훈 사령관이 하는 USB. 이런 모든 대북 정보 유입사업들을 누가 할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할 뿐 대부분 탈북자들이 하고 있다. 그 많은 정보유입을 탈북자들이 해 왔고 할 것이다.

첨단기기들이 북한에 들어오면 북한 당국은 그 물건에 대해 '남조선 괴리놈들 꾀임에 빠진다'면서 SD카드 구멍을 폐쇄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정보 유입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 탈북자들은 그 때마다 새롭게 테크놀로지를 개발해서 그 장벽을 뚫고 있다. 마치 북한이 모든 철의 장벽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뚫는다' 하고 들어가고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북핵 문제와 결부돼 있다.

김정은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데 이는 기만전선에 전 세계를 빠뜨리는 것이다. 이 북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미국을 겨냥한 전술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핵을 이용한 북한의 대미 전략은 첫째는 체제 안전보장이며 둘째는 대북제재 해제이다. 미군이 철수하고 적화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북핵을 포기 않을 것인데 그동안 김정은은 북핵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언어전술로 미국을 기만해 왔다.

핵포기를 전제로 한 빅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가 북한과 직접 전화통화를 해서 카카오톡이나 USB로 받은 자료이다. 여기 오신 단체장들이 다 수고해서 얻은 정보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보 부서나 국방부는 가질 생각을 안 한다. 작년부터 차곡차곡 모은 자료인데 이것을 해리티지재단에 기증하려 한다. 이 같은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인신매매, 가짜 달러, 가짜 화폐, 마약, 납치, 국군포로, 정치범수용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제일 손쉬운 것은 인권 문제 아니겠는가. 아킬레스건이다. 꾸준히 제기하면 되는데 유감스럽게 미국이나 한국 정상이 김정은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인권 문제 제기는 탈북자 입장에서는 매우 긴박한 문제이다. 김정은이 북핵만 포기하면 체제도 인정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한다. 인권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최근에 온 탈북자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 100명 중 90명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재미있으니까 봤다고 했다. 북한은 오직 당에 충성하는 관계로만 사람들을 만나니 재미가 없다. 사랑도 통제돼 있다. 그런데 한국의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자랑하려고 세트장에서 찍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탈북자들이 하는 대북 정보 유입 사업은 기존 북한 주민들의 학습 효과를 깨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자유를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북한자유주간의 주제는 '탈북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자금이 필요하다. 탈북자들이 이런 일에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

 nydaily@gmail.com

 

-북한 이탈 주민(탈북민)의 규모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누계 607명이었다. 또한 1993년까지 누계 641명이었으나 1994년부터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누계 1,405명이었고, 2017년에는 누계가 31,340명이나 되면서 마침내 북한이탈주민들이 30,000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탈북민 여성의 입국비율은 1989년 이전에는 7%에 불과하였으나, 199735%, 200042% 등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비율을 넘어섰음.

[남녀 징병제 때문에 젊은 여성들의 탈북민 많음] 

-남과 북은 단일 민족이면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주체사상, 선군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속해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본래 인민회의정부 제1공화국 정부가 될 때 남북은 의회연합으로 통일국가가 가능합니다

남한으로  탈북민이 많을수록 남북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 이후 북한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 철문 안 쪽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원들에 의해 영사관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어린-당시 생후 2년 4개월이었다- 김한미 양의 모습은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 방영됐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

                                                               1997년 4월 20일 오후 황장엽과 김덕홍, 서울 도착 모습

41세 북한 농민이 남한 비무장지대 국경  철조망으로 넘어 1996년 7월 24일 남한으로 망영한 박철호(朴哲浩),  "북한에 너무 배고파." 남한으로 도망 왔다고.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남북한 기술적으로 전쟁 중인  비무장지대 귀순자의 전화기(사진)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북한 특권층이나 상류층 입장보다는 북한 평민층 입장을 존중해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을 청산하고 평민층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수평적 권력교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달픈 북한 서민(평민)들은 지금 무엇을 원할까 무기도 아닌 (개인의 생존권 衣食住)입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중 가장 악명 높다는 북한 "전거리 교화소"에 직접 복역한 북한 동포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  
















































북한 전거리 교화소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여성 수감자가 중국에서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우로 강제낙태를 시키기 위해 무거운 몸을 들고 운동장을 돌게 하고 있다[미국 국무부가 27일 발표한 ‘2017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는  2만 명에서 3만 명의 아동이 중국에 살고 있는 북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들 중 일부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 무국적자가 되고, 착취 가능성에 취약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탈북으로 중국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은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귀순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다]


한 정치범 수용소[탈북자 그림]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포로 모습이다. 그들의 사형 집행이  정치범수용소 경비원 접근이 가능하게 했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를 처벌 할 수있는 몇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이 굶주림으로 쥐, 뱀과 개미등을 잡아 먹고 생활하고 있다

 

                                                        시체보관실에 시체를 쥐들이 먹고 살아간다

















국제인권단체, 북한 정부 당국자에 의한 성폭력 실태 공개

Female trader giving a bribe to a market supervisor in an alley near the market.  Female traders have described offering bribes in order to avoid potential harassment.

                    


Woman being questioned by a secret police investigator. Former detainees say that secret police investigators can easily harass female detainees during questioning.

Illustrations, drawn by former North Korean propaganda artist Choi Seong Guk, are inspired by the artist’s experience in North Korea and the testimonies of survivors included in this report. Any resemblance to actual persons living or dead is coincidental; these are not intended as portraits of actual people or events but of typical scenarios.


Male government officials and female traders sitting in a railway carriage, while a railroad officer checks a female trader’s ticket. In railway carriages, women often face harassment by male government officials and railroad officers.



Police officer checking to see if a trader has hidden “anti-socialist” material in her belongings. Police officers conduct searches in female traders’ belongings, which can be a prelude to a body search



Women the sitting position in a pre-trial detention facility run by the police. Detainees are commonly forced to assume this position in pre-trial detention and temporary holding facilities.



북한 핵무기 보유 이후 동북아 정세

동북아 정세는 다자간의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이다

자유민주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주체연호(주체사상-김일성 김정일 헌법)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이다

정치적, 안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이 협조체제이며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 협조체제이다

군사적으로는 중국 주도 러시아,중국, 북한이 공존하고 있다

정치적, 안보적으로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는 한국(남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모택동파(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세력)는 북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등소평파(실용주의, 수정주의)는 남한 주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러시아나 중국정부 내부 실용주의자는 남한내부 친북세력(마스-레닌주의 김일성노선 교조주의 세력)을 싫어하는 입장이다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을 주도한 6자회담 주최국은 중국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6개 나라가 참가하는 다자회담이다.

-중국정부 내 실용주의자는 수정주의자로 마스-레닌주의 보다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입장이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헌법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으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러시아 공산당도 아니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내부 NLPDR  2단계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택동 추종세력이다

-중국 공산당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었고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실용주의(수정주의) 노선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중국 모택동 공산당의 국제적 원조 정당[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 연맹,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 아프가니스탄 해방전선 , 아르헨티나 혁명공산당, 볼리비아 인민혁명전선, 부탄 공산당, 캐나다 혁명공산당, 중국 공산당(1969 ~ 1976.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음 ), 콜롬비아 혁명공산당, 에콰도르 공산당, 인도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이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쩌둥주의자당(붉은 여단),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노르웨이 노동자당, 필리핀 공산당, 포르투갈 노동자공산당, 터키 공산당, 미국 혁명공산당, 흑표당, 홍위병, 일본 적군파 등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나 무장단체이다

실용주의 노선(수정주의 노선)은 자본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국제 공산당 원조(지원)[무장단체 활동]를 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적군파(赤軍)은 사회주의 세계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의 총사령관 모택동으로 추앙하면서 미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 수립 목표로 무장 투쟁한 모택동주의자들이다[모택동 노선 NLPDR]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도취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헌법[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베트남 헌법.hwp

북한헌법.hwp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의회나 국민이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이다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는 주체연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은 신으로 우상화 신격화 하고 있다 신(주체연호)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세력(세습제 반대 운동)이나 제작물은 금지되고 있다 대북 삐라나 유인물을 가장 두려워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국가 북한 제3공화국 헌법]

유엔은 친북성향이나 남북 정치협상 세력을  좌파세력이나 진보세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북한헌법.hwp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 연방공화국) 헌법[민영자본체제(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hwp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hwp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hwp

일본국 헌법.hwp

대한민국 헌법.hwp

中華民國 憲法.hwp

러시아연방 헌법.hwp

몽골헌법.hwp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동상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붉은 별도 제거해야 합니다

날짜:

198964- 199112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북한헌법.hwp
0.33MB
베트남 헌법.hwp
0.15MB
몽골헌법.hwp
0.07MB
대한민국 헌법.hwp
0.48MB
中華民國 憲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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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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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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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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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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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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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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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연방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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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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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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