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북한 핵 실험을 지지하는 사람들 본문
지난 9월 북한 핵실험 이후 평양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과 비난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북한의 대외 강경 기조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게 국제적 중론이지만, 다양한 의견이 서슴없이 나오는 온라인에선 북한의 태도에 동의하는 목소리도 있다.
BBC 코리아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의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북한 정권 지지 의견을 모아 분석했다
베트남
페이스북에서 상당수 베트남 이용자들은 북한의 핵 개발 기조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이용자들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미국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고 있어 국가 방위 차원에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분석했다
베트남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댓글 일부
쿽 헝 레(Quoc Hung Le)는 페이스북에서 "조국과 영토를 지키기위해 김정은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썼다.
응웬 남(Nguyen Nam)은 "북한이 근대 무기 개발과 실험에 성공하고 무기를 대량 생산한다면 자국을 지켜내 이라크나 리비아, 시리아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네티즌인 부 리우(Vu Lieu)도 "북한은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북한의 핵 개발 기조에 동조했다.
"핵무기 개발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며 "포기하면 미국이 너의 목을 매달 것이니 바보짓을 하지 말라"는 강한 어조의 응원 글도 있었다. 응웬 탄 키에트(Nguyen Thanh Khiet)라는 이름의 이 페이스북 사용자는 더 나아가 "미국이 국제법을 어기지 않고 유엔 회원국 침략을 그만둔다면 북한도 핵 개발을 멈출 것"이라며 최근의 국제적 긴장 상태를 미국 탓으로 돌렸다.
한반도의 혼란을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이어져 온 남중국해 사태에 비교하는 페이스북 사용자도 있었다.
트리 틴 두엉(Tri Dinh Duong)은 "베트남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중국이 오늘날같이 우리를 희롱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김 위원장이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중국에선 많은 시민이 여러 우회 경로를 통해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의견을 게시하고 있다. 아래는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라온 친북 의견들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중국정부와 미국을 동시에 비꼬는 용도로 언급한 글들이 눈에 띈다.
중국 웨이보 이용자의 댓글
세이빙 미스터 우(Saving Mr Woo)라는 웨이보 이용자는 "이번 핵실험이 진도 6.3 지진을 일으켰다. 다음 핵실험이 창바이샨(백두산)이 깨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북동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중국 웨이보 이용자의 댓글
티안풀루오자지(Tianfuluozhaji)는 "한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했을 때 우리가 방사능 피해를 볼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더니 막상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아무 말도 없다"며 "(중국이) 왜 이중 잣대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비난했다.
중국 웨이보 이용자의 댓글
두두두생(dududusheng)은 "핵 문제를 푸는 방법은 미국과 북한 간 적대적 상태를 완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국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웨이보 이용자의 댓글
지우후아이핑(Jiuhuayiping)은 "불쌍한 북한 사람들은 미국에 맞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그들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잘못"이라고 했다.
중국 웨이보 이용자의 댓글
차이나왕xs(Chinawangxs)라는 이용자가 "왜 우리가 저 불량 국가에 핵 미사일을 발사해 파괴하지 않고 있느냐"며 북한을 겨냥한 질문을 올리자, 리밍항64183(Li Minghang)은 이에 "핵 공격이 이뤄지면 북한과 한국,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북동지역도 파괴되기 때문"이라며 "모든 나라가 북한처럼 무책임하진 않다"고 답했다.
인도네시아
BBC 인도네시아는 지난 9월4일 북한의 핵 실험을 보도했다. 해당 기사가 BBC 인도네시아 페이스북 계정에 공유되자, 댓글 창에선 사용자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BBC 인도네시아 페이스북 계정
이슨안 스푸트라니르와나(IsnAn Siputranirwana)는 북한을 향해 "잘 했다. 너무 오래 걸리진 말라"며 "미사일을 미국 방향으로 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와휴디(Wahyudi)는 "미국의 속마음은 질투심"이라면서 "김 동지여, 미국은 네 나라를 우려하고 있다"며 김 위원장을 친근하게 부르기도 했다.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는 "미국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며 "그들은 허세만 부리고 있으며, 바보 같은 나라들만 미국의 지시를 따르고 싶어한다"고 북한에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태국
BBC태국 페이스북 계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북한의 핵실험에 우려를 표했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의견도 여럿 포착됐다.
태국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댓글 일부
프라이 나콩(Pray Nakkong)은 "미국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북한은 무기를 개발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 어떤 나라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하면서 계속 남을 폭격한다"고 미국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그는 또 "미국은 실수로 공격을 가하고서 언론을 통해 피해자를 자유롭지 않은 '나쁜놈'으로 묘사한다"고 꼬집었다.
북한의 핵실험에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키코(Akiko)는 "북한은 실험을 하는 것일 뿐 아무도 위협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은 왜 그렇게 두려워 하느냐"고 썼다.
폰차이 지눈투야(Pornchai Jinuntuya)도 "북한은 전 세계에서 도둑질과 약탈질을 일삼는 나라와 달리 자기 땅에 머물며 아무도 침략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라우트 파시카(Sarawutt Phasika)는 "미국과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데 왜 북한은 그러면 안되느냐"고 반문했다.
결론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단순히 주변국뿐 아니라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많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북한 문제를 자국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대개 자신의 문화적·정치적 관점에 기반해 북한 문제를 보고 있었고, 미국에 대한 분노를 투영하며 북한을 언급했다.
그런 와중에 일부 이용자들은 강대국들이 이끌어가는 세계에서 약소국으로 사는 것의 교훈을 이끌어내려 애쓰기도 했다.
냉전 시대 미국과 마찰을 겪으며 분할된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던 베트남에선 한국과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페이스북 이용자 토안 능옌은 "한국과 북한은 이미 통일됐어야 하지만 미국이 보호라는 명목을 내걸고 갑작스럽게 한국에 들어왔고, 이어서 북한엔 러시아의 손이 뻗쳤다"면서 "한국이 발전하는 동안 독재 체재 아래의 북한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썼다.
이어 "베트남인들은 한국과 북한의 사례를 보고 배워야 한다"며 "독재가 끝나면, 두 나라는 통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BBC]
-북한 핵 실험을 지지하는 세력은 민주국가 성향 보다도 사회주의 국가나 독재국가 성향 인물들이다
그리고 스탈린 추종세력인 자국 사회주의 노선 일본 공산당처럼 소련 핵실험이나 중국 핵실험을 지지하는 세력들(자국 사회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방어용 핵보유를 지지해오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도 핵무기를 보유하는데 북한이나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이란 등은 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없습니까 하는 반문(反問)하는 입장이다
핵무기는 평화용으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여건을 갖춘 나라에도 유엔이 승인해야 보유국가가 될 수 있다 핵무기 보유국가로 유엔이 승인하지 않는 나라의 핵무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미국인 64%, 북한의 일본 공격 시 미군 동원 찬성"
미 해병대원들이 지난해 4월 일본 사세보 아이노우라 기지에서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미국인 과반수는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군 동원을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과반수가 일본과 중국이 충돌할 경우 미군 동원을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미국인 10명 중 6명 (64%)은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미군 동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시카고카운슬)가 비영리기구인 크라운 패밀리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미-일 관계와 주일미군에 관한 미국인 여론조사 결과입니다.
지난 2015년 조사에서 응답자 48%가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군 동원을 지지한다고 했던 것에 비해 16%포인트 늘어난 수치입니다.
또 과반수인 55%가 일본과 중국이 영토분쟁으로 충돌할 경우 미군의 관여를 반대한다고 답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지난 4일 공개된 시카고카운슬의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57%가 주일미군의 유지 또는 확대를 지지했습니다.
또, 미-일 관계가 미국의 국가안보를 강화했다고 답한 비율은 78%로, 미국의 동맹국 중 가장 높았습니다.
독일, 한국과의 관계가 미 국가안보를 강화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75%와 70% 였습니다.
시카고카운슬은 “일본은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자 미군 주둔국으로서, 역내 미국의 안보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전 세계 10개국 가운데 미국인이 인식하는 세계적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는 미국으로 나타났습니다.
최저 0점에서 최고 10점 사이, 올해 미국은 8.5점으로 1위를 기록했고, 중국이 2위, 러시아와 유럽연합(EU)이 공동 3위에 올랐습니다.
일본은 5.9점으로 5위에 올랐고, 이어 독일,한국,이란,인도 순입니다.
올해5점으로 7위에 오른 한국은 2014년에서 2016년 사이 점점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2017년부터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시카고카운슬은 매년 외교정책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하며, 일본에 대한 올해 조사는 미국인 성인 2천59명을 대상으로 지난 6~7월 실시됐습니다.
VOA 뉴스 이조은입니다.
*북한정부의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 안보선 구축[탄도 미사일 사거리로 안보선 구축]
-탄도 미사일의 중,장거리(고정식 기지), 탄도미사일의 준(準), 단거리(이동식 기지)
군사력 안보선도 경제적, 정치적 능력이 돼야 가능하다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국가 차이점이 자국 안보선 구축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북한 핵무기 보유 이후 동북아 정세
동북아 정세는 다자간의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이다
자유민주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주체연호(주체사상-김일성 김정일 헌법)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이다
정치적, 안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이 협조체제이며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 협조체제이다
군사적으로는 중국 주도 러시아,중국, 북한이 공존하고 있다
정치적, 안보적으로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는 한국(남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모택동파(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세력)는 북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등소평파(실용주의, 수정주의)는 남한 주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러시아나 중국정부 내부 실용주의자는 남한내부 친북세력(마스-레닌주의 김일성노선 교조주의 세력)을 싫어하는 입장이다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을 주도한 6자회담 주최국은 중국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6개 나라가 참가하는 다자회담이다.
-중국정부 내 실용주의자는 수정주의자로 마스-레닌주의 보다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입장이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헌법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으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러시아 공산당도 아니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내부 NLPDR 2단계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택동 추종세력이다
-중국 공산당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었고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실용주의(수정주의) 노선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중국 모택동 공산당의 국제적 원조 정당[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 연맹,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 아프가니스탄 해방전선 , 아르헨티나 혁명공산당, 볼리비아 인민혁명전선, 부탄 공산당, 캐나다 혁명공산당, 중국 공산당(1969 ~ 1976.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음 ), 콜롬비아 혁명공산당, 에콰도르 공산당, 인도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이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쩌둥주의자당(붉은 여단),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노르웨이 노동자당, 필리핀 공산당, 포르투갈 노동자공산당, 터키 공산당, 미국 혁명공산당, 흑표당, 홍위병, 일본 적군파 등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나 무장단체이다
실용주의 노선(수정주의 노선)은 자본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국제 공산당 원조(지원)[무장단체 활동]를 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적군파(赤軍)은 사회주의 세계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의 총사령관 모택동으로 추앙하면서 미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 수립 목표로 무장 투쟁한 모택동주의자들이다[모택동 노선 NLPDR]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도취되고 있다
-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소련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스탈린) 계열]
1949년 3월 5일,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 고려공산당(레닌계열) 출신]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년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일본 공산당
일본 공산당 깃발은 박애, 우애, 동무의 상징 빨강색(공산주의 상징 붉은 색) 바탕에 하나로 합쳐진 민주주의 혁명, 민주 통일전선 , 국제 통일 전선, 일본 공산당 건설을 각각 나타내는 4 개의 적기(赤旗)에 농민과 노동자를 나타내는 벼 이삭, 기어(톱니바퀴)...
일본 공산당은 미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일본 사회주의 국가] 수립 목표로 투쟁하는 정당이다[모택동 노선 NLPDR]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 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2019년 9월 현재 약 28만명의 당원을 가지고 선진국가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 되고 있다. 국회의원 수는 중의원 의원 12명, 참의원 의원 14명으로 각각 야당 3당이다. 또한 약 2800명의 지방 의원을 거느리고 일본 공산당이 여당의 지방자치단체는 2018년 12월 현재 62개이다
일본 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사카이 도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콘도에이조오(近藤栄蔵) 등 8명이 비밀리에 시부야의 다카세 나선 방에 모여 일본 공산당을 설립했다(9월 창립 설도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는 “제1차 일본 공산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설립 당시 간부는 노사카 산조, 도쿠다 규이치, 마나부 사노, 나베야마 사다치카, 아카마쓰 카쓰마로 등이다. 코민테른에서 활동하고 있던 가타야마 센(片山潜)의 원조도 결성을 재촉했다.
11월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코민테른 일본지부 “일본 공산당”이 되었다. 이때 코민테른에서 "22년 테제(일본 공산당 강령 초안)"가 나타 났지만 일본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초안이 무산되었다.
"강령 초안"은 정치면에서 군주제 폐지나 귀족원 폐지,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의 보통 선거권 도입, 노동 단결권, 언론 출판. 집회 파업의 자유와 당시의 군대 · 경찰 · 헌병 · 비밀경찰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
경제면에서는 8시간 노동제 실시,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의 충실, 최저 임금제의 실시, 대(大) 토지소유의 몰수와 작은(小)농장의 경작 농민에게 분배, 누진 소득세 등에 의한 세제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또한 외국인들에 대한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조선 · 중국 · 타이완 · 사할린에서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 공산당은 "군주제의 폐지“나 ”토지 농민에게 토지분배" 등을 요구했기 때문에 창설 당시부터 치안 경찰법 등의 치안 입법에 의해 부정 활동의 형태를 가지고 행동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기존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의 분리라는 형태로 공산당이 결성되어 불법 정당이 된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반대로 불법 정당인 공산당에서 이탈한 노농파(労農派)등이 합법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社会民主主義政党)을 만들어 나갔다
-2004년에 개정 된 현재의 일본공산당 강령은 현재의 일본을 "우리나라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국토와 군사등 중요한 부분을 미국에 탈취 된 사실상의 종속국이 되고 있다 "고 현황 인식하고 현재 일본에서 필요한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이며, 그 다음 단계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소위 두 단계 혁명론의 일종으로 1961년 강령에서 계속되고 있다
2차 전쟁 이전의 코민테른 일본지부로 자리 매김한 시대에 코민테른 일본의 군주제 폐지를 결정한 1927년 테제와 절대주의적 천황제 폐지를 위한 부르주아 혁명, 이어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2단계 혁명론)라고 제기한 1932년 논문 연구에 의해 1932년 테제와 같은 인식에 이르렀다. 일본 자본주의 논쟁의 사회주의 지식층 분쟁의 흐름을 참작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일본 공산당의 사회주의 국가 수립 방법 2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는 민주주의 혁명(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는 사회주의적 변혁(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민주주의 혁명(인민민주주의 혁명)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이고 사회주의적 변혁은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이다
NLPDR노선에서는 1차적으로 좌우익 반미구축(반미전선)으로 2차적으로 일본 천황, 매판자본가와 미국 앞잡이를 제외한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천황제 폐지 운동) 으로 소자본가나 민족자본가, 진보지식인이나 학생, 노동자 농민등으로 연합정부 수립 투쟁 방법이다
1단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천황제를 폐지하고 인민민주주의체제로 변혁한 후 2단계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2단계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다
-일본 사회당은 평화공존 사회주의 친미 친서방 세력이라며 일본 공산당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세력으로 스탈린주의 소련 공산당나 모택동 중국 공산당 계열이다. 일본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 보다 자주독립 노선 모택동 NLPDR노선 중국 공산당과 비슷하다
일본 공산당은 소련 핵실험이나 중국 핵실험을 지지했으며 일본 사회당은 반대했다[소련이나 중국 핵실험은 사회주의 핵(방어적 핵)으로 지지한다는 것이 일본 공산당 입장이다]
*부분적 핵실험정지조약 비준(部分的核実験停止条約批准)
-1963년에 조인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중국과, 이 조약을 ‘커다란 진보’라며 한껏 치켜세우는 소련-
“(중국의) 자오안보(趙安博)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기만이라 말한다. 흑백 줄무늬 윗도리에 포도주 색깔의 모자를 쓴 카메룬의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로 이 금지조약을 부정하면서 ‘우후르(Uhuru), 우후르, 우후르’라며 자기 나라 말로 평화를 외친다. (그러자) 소비에트 여성 대표가 마이크 앞으로 나와 핵실험 부분 금지조약은 커다란 진보이며 흐루쇼프도 이를 위대한 한 발이라고 말했다며 연설을 펼친다. 그러자 박수갈채가 터져나왔지만, 어떤 나라(중국) 사람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조금씩 밀려오는 석양빛 속에서 모리타키 이치로(森瀧一郞) 대표이사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중-소 대립은 이 대회에 참가한 세계 각국 대표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대회에는 총 7개의 국제평화단체와 19개국을 대표하는 총 67명의 해외 인사가 참여했는데, 이들도 각각 소련 지지파와 중국 지지파로 나뉘었다. 미국·유고·인도·헝가리·프랑스 대표단 등은 소련을 지지했고, 조선·인도네시아·수단·뉴질랜드·케냐 등은 중국을 지지했다. 실론(스리랑카) 대표단은 중-소 지지로 내부 분열했다.
일본에서도 중-소 대립이라는 ‘외부’의 힘이 ‘내부’의 혼란과 분열로 이어지는 데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한몫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즉, 부분적 핵실험조약을 지지하는 사회당계와 이를 반대하는 공산당계의 대립과 갈등이다
바로 1년 전인 1962년 제8회 세계대회에서는 소련의 핵무기를 ‘방어적 핵’이라며 옹호했던 공산당계와 ‘모든 핵무기’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회당계 사이에 벌어졌던 격렬한 대립이 결국 난투 소동으로 발전해 중상자까지 나왔지만, 이때는 적어도 중-소 대립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련·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핵을 ‘방어적 핵’으로 규정하고 이를 옹호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른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 간에 균열이 발생했고, 사회당계는 소련 쪽 입장을 지지하고 공산당계는 중국 쪽 입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발단은 1963년 7월25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간에 체결된 ‘부분적 핵실험 금지에 관한 조약’(PTBT·8월5일 정식 조인, 10월 발효)이다. 이 조약은 대기권·우주공간·수중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5년 인류 최초의 핵무기를 미국이 개발한 이후, 세계 각국은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인류 멸망의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회자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20년 뒤에는 핵무장 국가가 30개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했을 정도다. 이런 위기감을 한층 더 증폭시킨 것이 바로 1962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1971년에 출간된 <흐루쇼프 회고록>이나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기록에 따르면, 냉전기에 핵전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래서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던 핵무기 개발 경쟁에 제한을 두기 위해 미-소 강대국이 영국과 같이 맺은 조약이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발효된 같은 해 10월까지 세계 111개국이 조인했으니 핵무기의 확산에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물질의 방출도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조약의 한계도 명확했다. 일단 이 조약은 당시 핵전력의 축소나 철폐에 관한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상 핵실험은 금지되었지만, 지하 핵실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배치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사실 이 조약의 노림수는 핵무장 국가의 신규 진입을 막아 미-소의 핵독점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미 핵무기 개발에 착수해 실험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나 중국 입장에서는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사회당은 기관지인 <사회신보>(1963년 8월4일)를 통해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의 성립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쿠바 위기를 전환점으로 높아지던 평화 공존의 움직임을 한층 더 전진”시켰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 조약을 핵무기 철폐를 포함한 전면적인 군축으로 가는 출발점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 조약의 발효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 횟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배로 늘었다. 사실상 사회당의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으로 끝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일본 공산당은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미 제국주의가 핵무기 개발과 핵무장 강화를 은폐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라 비판하면서 전면적인 핵실험 금지와 핵무기 철폐를 주장했다. 이 자체로 보면 반핵운동의 원칙론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 원칙론의 배후에는 중-소 대립 속에 중국 공산당과 밀월관계에 있던 일본 공산당의 친중국 노선이 잠복해 있었다.
일본 공산당의 입장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공산당의 간부 우에다 고이치로가 ‘핵전쟁 방지와 수정주의이론’(1963)에서 “사회주의의 핵 보유는 절대로 타국을 공격·침략·핵협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아니다. 오직 사회주의를 방위하고 제국주의의 핵전쟁 방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선 인민적 정치 수단”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 핵=방어적 핵’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핵실험 재개에 대해서도, ‘모든 핵에 반대한다’는 사회당계를 비판하면서 소련 핵을 옹호했었다.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일본 공산당은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한 1964년 10월16일에서 하루가 지난 17일에 발표한 ‘중국 핵실험에 관한 성명’에서 중국의 핵무장은 “중국 인민이 자국의 방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위적 조치”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사회주의 핵은 ‘방어적 핵’이라는 기존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물론 공산당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 내에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지지했던 최고 간부이자 친소파인 시가 요시오(志賀義雄), 스즈키 이치조(鈴木市藏), 소설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는 당에서 제명되었고, 이들은 ‘일본의 소리’라는 조직을 만들었지만 공산당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둘러싼 혼란과 대립 속에서 진행되던 제9회 세계대회는 결국 사회당계가 대회를 보이콧하고 관계자를 철수시킴으로써 ‘반쪽’ 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1955년에 결성된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겐스이쿄)는 일본 공산당의 평화단체로 ‘전락’해버렸고, 사회당계는 1965년에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겐스이킨)로 ‘분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단체는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두 기관이 공동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한 1977~85년을 제외하면 통합과 연대의 흐름은 매우 제한적이다.
일본의 평화운동 진영을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사회주의 핵=방어적 핵’이라는 일본 공산당의 핵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73년이다.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 공산당 위원장은 미국이 대소·대중 봉쇄정책을 펼쳤던 시기에 이루어진 소련과 중국의 핵무장은 ‘방어적’ 성격을 지녔지만,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는 등 사회주의와 국제 정세가 변화했으니 사회주의 핵을 ‘방어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1960년대 평화운동 진영을 혼란과 분열로 이끈 공산당의 오류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일본 사회당은 평화공존 사회주의 친미 친서방 세력이라며 일본 공산당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세력으로 스탈린주의 소련 공산당나 모택동 중국 공산당 계열이다. 일본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 보다 자주독립 노선 모택동 NLPDR노선 중국 공산당과 비슷하다]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레닌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노농동맹의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을 구체화 하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지침서 구실을 하는 ‘국가와 혁명’을 완성했다(1917년 8월 15일).
이 레닌의 지침에 따라 이해 2월 혁명을 통해 짜르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한 소비에트세력, 즉 직업적 혁명가들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 계급 세력이 자유주의와 의회주의 그리고 이에 바탕한 국가체제의 유지를 고수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10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르주아 국가 체제를 혁명적 방법, 즉 무력적 방법으로 타도하고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레닌의 이 논지는 공산 혁명에 앞서 브루주아 혁명을 통해 수립한부르주아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성숙화를 진전시켜 한다는 서유럽의 사회주의 세력 주류와도 차이를 갖는 것이어서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세력과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갈라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레닌의 논지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고 20세기 중반에서 말기까지는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가 전세계의 절반 을 차지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국권의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 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햇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1 주년이 되는 2018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반면 서유럽의 사회 민주주의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 자본주의에 극복하는 세력으로 뿌리를 굳히며 성장하고 있다.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개념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1) 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유형-의회의 우월성 측면에서 운영하는 정부
a.본래의미 의회정부제-프랑스 국민공해
b.집정정부제-의회가 행정부 지위와 역할 수행(스위스)
c.인민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국가
(2)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3)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2.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헌법상 권력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막을 내렸다.
(1)국가원수-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대통령)
1919-1946 칼리닌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 위원회 의장)
1946-1953 시베르니크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53-1960 보로실로프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60-1964 브레즈네프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64-1965 미코얀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65-1977 포드고르니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77-1982 브레즈네프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82-1984 안드로포르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84-1985 체르넨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85-1988 그로미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88-1990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 의장
1990-1991 고르바초프(대통령)
소비에트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 회의(연방원)과 민족 회의(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2) 총리(수상)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1946년까지는 인민위원회의 의장이었고 그 이후 각료회의 의장이었다 1991년 대통령제 신헌법에서는 총리의 명칭이 국가간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바꾸었다
레닌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인민위원회 의장, 1917년-1924년)
리코프(1924년-1930년)
몰로토프(1930년-1941년)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5월 6일 ~ 1945년)
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1945년 ~ 1953년 3월 5일)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 1955년)
니콜라이 불가닌 (1955년 ~ 1958년)
니키타 흐루쇼프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코시긴(1964년-1980년)
티호노프(1980년-1985년)
니콜라이 리즈코프(1985년-1991년)
발렌틴 파블로프 (1991년 1월 14일 ~ 1991년 8월 22일)
이반 실라예프 국가간경제위원회 의장 (1991년 9월 6일 ~ 1991년 12월 25일)
(3)소련 공산당 서기장(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1922년 ~ 19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및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수상(총리)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 담당 위원(군사위원장, 최고사령관) 겸직
니키타 흐루쇼프 (1953년 ~ 1964년):1952년부터 1964년까지 제1서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년 ~ 1982년)
유리 안드로포프 (1982년 ~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년 ~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1년)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3.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과 다른 점
(1)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인민민주주의 독재 사회주의 국가론(자국식 사회주의 국가이론)[인민의회정부론]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순수내각책임제 형태 정부이론으로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1)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2)집행부(내각, 행정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권력이 의회에 집중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는 행정부 수반이다. 등소평 헌법은 국가주석은 공산당 대표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대표자(국가대표자)로서 국가주석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총리는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군사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등소평 헌법은 형식상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 밑에 국가권력이 유지하는 형태로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했다
습근평 헌법은 공산당이 일당독재정부로 수평적으로 국가주석이나 군사위원장, 수상의 임기제한을 하지 않았다
인민민주주의 독재형태를 공산당 독재로 이해하고 있다
중국은 공산당 국가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정부이다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당군으로 공산당 총서기가 군사위원장이 돼야 한다는 이론이 습근평 이론이며 인민해방군은 중국 전체 인민의 군대로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다른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등소평 이론이다 그리고 1982년 등소평 헌법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했다 그래야 민주주의 원칙과 인민 전체 경제환경이 나아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등소평 헌법은 실용주의 노선 수정주의자라면 습근평 헌법은 공산주의 교조주의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제1조 중화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제도이다. 중국공산당의 령도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어떤 조직 또는 개인이든지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지 못한다.
(2)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다른 점
ㄱ.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 국가주석 임기제한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만 45세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으로 피선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의 매회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회 임기와 같고, 연임은 2회를 초과 할 수 없다 [1982년 등소평 헌법-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3선 금지]
ㄴ.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국가주석 임기제한 철폐(연임 가능)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만 45세 이상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으로 선거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의 매기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기 임기와 같다[국가주석과 부주석 임기 제한 철폐]
4.북한은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공산주의 국가보다는 김일성, 김정일주의 노선 국영자본주의(국영기업) 체제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헌법, 공화제 사회주의 형태 세습제 좌익군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김정일헌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주체연호 김일성 김정일 헌법, 공화제 사회주의 형태 세습제 좌익군정]
5.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1조
중화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제도이다. 중국공산당의 령도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어떤 조직 또는 개인이든지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 령도 인민 민주주의 형태 사회주의 국가-
배트남사회주의공화국 헌법 제1조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은 육지, 부속도서, 영해, 영공을 포함한 독립, 주권, 통일, 국토가 있는 국가이다.
제2조
1.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2.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속하며 그 기반은 직공계급과 농민계급 및 지식계층의 연맹이 그 초석이다.
3. 국가의 권력은 동일하며 입법권, 행법권, 사법권을 이행하는 데에 국가기관 간에 배치, 협조, 통제 등이 있다.
제3조
국가는 인민의 주권 행사를 보장하고 발휘하며, 인권 및 공민권 공인, 존중, 보호, 보장 등을 하고, 부흥한 국민, 부강, 민주, 공평, 문명의 국가 목표를 추진하여 모든 사람이 넉넉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포괄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다.
제4조
1.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 직공계급의 선봉대이면서 노동인민과 베트남 전민족의 선봉대이고 직공계급, 노동인민 및 전민족의 권리에 충성하는 대표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호찌민 사상을 사상적인 기반으로 만들며 국가 및 사회의 영도세력이다.
2. 베트남 공산당은 국민과 긴밀히 연결하며 국민을 위해 활동하고 국민의 감독을 받고 당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짊어진다.
3. 당의 조직들과 당원들은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내에서 활동한다.-베트남 공산당 령도 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며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혁명적인 국가이다.
제3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제4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을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 근로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제5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모든 국가기관들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에 의하여 조직되고 운영된다.
제6조 군인민회의로부터 최고인민회의에 이르기까지의 각급 주권기관은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거한다.
제7조 각급 주권기관의 대의원은 선거자들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며 자기 사업에 대하여 선거자들앞에 책임진다. 선거자들은 자기가 선거한 대의원이 신임을 잃은 경우에 언제든지 소환할수 있다.
제8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있으며 사회의 모든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중심의 사회제도이다.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여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로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
제9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힘있게 벌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제10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는 로농동맹에 기초한 전체 인민의 정치사상적통일에 의거한다. 국가는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며 온 사회를 동지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든다.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제12조 국가는 계급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강화하여 내외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으로부터 인민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 -김일성 김정일주의 지도이념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쿠바 헌법 제1조
쿠바는 자주 사회주의에 의한 독립을 누리는 노동자의 국가로, 정치적 자유의 향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복지, 인류의 일치단결을 위하여, 통일된 민주 공화국의 형태로 공익과 공공으로써 조직되었다 -쿠바 공산당 령도 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주석(Presidente de Cuba), 또는 쿠바의 국가평의회 의장(Presidente del Consejo de Estado de Cuba)은 아래와 같으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이며 한 번의 중임은 가능하며 최대 임기는 10년이며 쿠바의 국가평의회에서 선출을 한다"[쿠바 국가원수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주석) 5년 중임제 도입]
6.교조주의(敎條主義)[마스-레닌주의 노선, 친소정책 사회주의 공화국 이론]와 수정주의(修正主義) 또는 실용주의(實用主義)[자본주의 노선, 친미 친서방정책 민주공화국 이론(미국의 링컨 민주정치 이론과 수정헌법, 중국 孫文노선)]
선진국은 대부분 수정헌법이다
그리고 러시아(소련)나 중국(북경정부)도 교조주의보다는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왔다
북한은 교조주의라면 남한은 수정주의이다
(예)"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신분제 철폐와 민주공화국(민주국-입헌군주국) 이론]
(1)교조주의(敎條主義)[마스-레닌주의 노선, 친소정책 사회주의 공화국 이론]
구체적인 조건을 상관하지 않고 불변의 진리라고 판단되는 개념과 명제만을 고집하는 태도
교조주의(敎條主義,Dogmatism)란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경전을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교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나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행태를 비판하는 말로 쓴다. 실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왜 마르크스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비평한 이유를 다양한 배경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면 무조건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것을 유사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평한다. 때문에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과 같은 혁명가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무분별하게 고수하던 교조주의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이들은 각 노동 계급이 처한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종교적으로는 경전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종교인을 교조주의자나 원리주의자라고 한다. 교조주의는 사상과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므로, 학문적 곧 논리적 비평에 대해 대화와 토론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무조건 거부하거나 탄압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교조주의자는 좌익 파시즘이나 우익 파시즘 세력을 지칭하고 있다
(예) 마스-레닌주의자 또는 레닌-스탈린주의자 [공산주의 노선만 고집하는 세력 모택동이나 김일성 등]
(2)수정주의(修正主義) 또는 실용주의(實用主義)[자본주의 노선, 친미 친서방정책 민주공화국 이론(미국의 링컨 민주정치 이론과 수정헌법, ,중국 孫文노선)]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과 경제결정론 및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물리치면서 독일 사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언 중 몇 가지가 틀렸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고, 자본주의는 붕괴에 직면해 있지 않으며, 자본이 갈수록 소수인에게 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중산 계급은 사라지고 있지 않으며, 노동 계급이 '갈수록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實用主義)는 19세기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행동을 중시하며, 실생활에 효과가 있는 지식을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제임스, 듀이 등이 대표적이다.
실용주의 철학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실행적 시험을 거쳐야" 아이디어의 특정되는 적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실용주의는 이상주의, 사실주의, 토미즘 등이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
실용주의란 말은 원칙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혼용되었다
수정주의자나 실용주의자는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구호로 표현할 수 있다
(예)"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신분제 철폐와 민주공화국(민주국-입헌군주국) 이론]
19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던 덩샤오핑이 펼친 경제 정책.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정책이다.[등소평의 실용주의(수정주의) 노선 흑묘백묘론 (黑猫白描論)]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1.2월 혁명 전의 소비에트
최초의 노농평의회는 러시아 왕정이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짓밟은 피의 일요일 이후 1905년 5월에 왕정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 인민들이 이바노보를 기점으로 모스크바 북부에 민주적으로 결성한 지역평의회이다. 원래 이러한 지역평의회 결성은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 인민주의자들(민주공화국파)과 사회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형태였다.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가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파업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수많은 공산주의자들도 노농평의회를 결성하여 이바노보와 유사한 정치 결성체를 만들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진행될 당시에도 러시아 제국 내엔 이미 수많은 노농평의회가 결성된 상태였다. 이들은 명목상 자유주의 혁명인 2월 혁명에 관여하여, 혁명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2. 러시아 임시정부 시기
2월 혁명으로 멘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 주도의 임시 정부가 들어섰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자본가들의 탄압은 다를 바 없었다. 이 당시 노농평의회에 속한 노동자, 농민은 갖가지 노동, 농민 쟁의를 일으켰으며, 케렌스키 정부에 대항했다. 케렌스키 임시 정부의 무능한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르 체제로의 회복'을 주장한 러시아 군대 내 왕당파(반동주의자)들이 주가 되어 쿠데타가 일어나자 케렌스키 정부는 볼셰비키에게 이들을 진압해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 응답에 승락하여 노농평의회는 자치적인 무장 능력을 통해 '붉은 군대'가 되었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3.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내전을 통해 승리를 한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가 정권을 확실히 잡게 되자, 정치적 권리는 일부 제한이 되었고, 기존의 자치, 생산 업무에서 조금 더 분화된 임무를 맡았다. 볼셰비키는 거대하게 불어난 생산수단과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체계,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인민들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또는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를 대변하는 임무를 노농평의회의 본 임무로 상정했다.
이후 노농평의회는 '지역평의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주로 한 도시 내의 자치 행정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지방 분권 사회에서의 '지방 자치제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권한은 미세하게 다르다. 노농평의회는 정식적인 입법권이 없지만, 한 지역의 생산 방향 결정, 행정 단위 내 인민의 요구 견지, 공산당 견제 등의 추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공산당이 또다른 엘리트 세력으로서 비당원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할 것을 염려해서 만든 민주적 시스템이었다. 공산당 지역당 위원들은 이들과 의견 대립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9년 지역평의회를 해체할 때 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몇몇 시기에는 지역평의회가 사실상 공산당 관료 조직의 하부 조직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 보통 현실공산주의 국가에선 이들은 공산당과 노동조합과 더불어 3대 권력기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노농평의회(지역평의회)]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2.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이다
1.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년 ~ 1918년)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한 혁명당이었다. 1898년 3월 14일 민스크에서 개최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러시아 대회에서 기초가 마련되고, 1903년의 브뤼셀, 런던의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확립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사회혁명당이 나로드니키[인민주의-인민의 속으로 (브 나로드)]의 후계자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했다. 제2회 대회에서 레닌에 의해 기초된 강령이 채택되고, 당의 규약, 중앙위원회, 중앙기관지 《이스크라》 및 평의회가 성립되었는데 동시에 당은 레닌이 인솔하는 볼셰비키와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로 분열하였고, 런던에서의 제3회 당대회에는 멘셰비키가 참가하지 않았다. 1906년의 스톡홀름 대회에서 양파의 결합이 시도되었으나, 멘셰비키는 카데트와의 제휴를 주창하고 대립, 1907년 제5회 대회에서 결정적으로 분열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멘셰비키 세력들은 대거 탈당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를 창당하면서, 남은 볼셰비키 세력들은 1918년 부터 당명을 소련 공산당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남은 멘셰비키 세력들이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 조직이 되어 지하정당으로서 소련에 저항하였다.
상징색: 빨강
이념: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내부 정파:볼셰비키. 멘셰비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스펙트럼: 중도좌익 ~ 극좌
2.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이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2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인 볼셰비키와 소수파인 멘셰비키가 분열함으로써 탄생하였다. 폭력에 의한 혁명, 철저한 중앙집권에 의한 조직 통제를 주장하였다. 이 특징은, 그대로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소련 공산당) 으로 인계되었다. 러시아 내전 종전 후에도 소련을 포함한 유럽 내에서 실질적·형식적으로 꾸준히 공산당 지지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으며, 스탈린 사후부터 이 명칭은 소련 내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1)역사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多數派)이다. 분열의 원인은 당원 자격문제인데, 레닌 등은 당원은 당의 일정한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 계급의 전위(前衛)인 자에 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연합대회가 열리고, 1907년에 런던 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국회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멘셰비키와 분열된 후 1912년 독립적인 당(黨)임을 선언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멘셰비키가 조국 방위를 주창했음에 대해 볼셰비키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자본가와의 타협과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적으로 수정공산주의(修正共産主義)와도 대립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에는 소비에트내에서 극소수(極少數)에 속했으나, 4월 레닌의 귀국과 더불어 세력이 증대하였다. 7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무력시위에 애초에는 반대했으나 시위가 시작되자 참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볼셰비키가 유혈사태를 막아 때이른 봉기로 수도가 고립되고 혁명이 실패할 것을 막았다고 평가한다. 이후 대대적인 반(反)볼셰비키 캠페인으로 일시 열세(劣勢)로 떨어졌으나, 8월말 코르닐로프 반란을 전기(轉機)로 하여 10월에는 20만 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8년 3월 급진공산주의파(急進共産主義派)를 눌러 독일과 단독강화(單獨講和)를 맺고 당명(黨名)을 러시아 공산당이라 했다. 그 후 국내전(國內戰)시대에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데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1921년에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실시했다. 1926년에 전연방공산당(全聯邦共産黨), 1952년 소비에트연방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a.상징색: 빨강
b.이념: 공산주의, 레닌주의, 혁명주의, 중앙집권
c.스펙트럼: 극좌
d.준군사조직: 노동자적위대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러시아어: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약칭 붉은 군대(러시아어: Красная Армия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또는 노농 적군(勞農赤軍) 그리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 또는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는 1946년 2월 25일 이전 소련의 정식 군대이다. 1946년 2월25일 소비에트군(蘇聯軍)으로 개칭되었다.
e.분파[교조주의-마스 레닌주의 노선]
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주체사상, 호자주의, 게바라주의, 카스트로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
-흐루시초프나 등소평, 고르바초프, 옐친 등은 수정주의 노선이다
3.소련 공산당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蘇聯邦 共産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이 당은 1917년 10월 혁명을 이끌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데 이어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수립했으며, 이후 74년 가까이 반대당(야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 집권당의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은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이후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 함께 소련의 공화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의 공산당의 전신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통치체는 1~5년마다 열리는 전당(全黨)대회였으나, 1939년부터 1952년 사이 13년이나 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최후의 전당대회는 1990년 7월 2일부터 11일간 열렸던 제28차 전당대회였다. 전당대회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또 그들 중에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을 선출했다. 또한 그 산하에 기관지 《프라우다》, 청년 조직으로 콤소몰, 아동 조직으로 피오네르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당원의 수는 1986년 당시 1900만 명이 넘었다.
(1)역사
1889년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РСДРП이 민스크에서 창당)
1912년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뉨. 볼셰비키는 1918년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РКП(б)로 바꿈.
1925년 :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로 당명을 바꿈. (러시아어: Всесою́з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ВКП(б)
1952년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꿈.
1991년 8월 24일 : 8월 쿠데타 실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직 사임 및 소련 공산당 해체를 발표.
a.창당
1912년 1월 1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1918년 3월 (러시아 공산당 다수파)
1925년 12월 (전연방 공산당)
1952년 10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b.해산
1991년 8월 29
(2)소련 공산당의 후신
러시아 연방 공산당
우크라이나 공산당
카자흐스탄 공산당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몰도바 공화국 공산주의자당
그루지야 통일 공산당
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아르메니아 공산당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4.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은 러시아 연방의 정당이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3년 2월 14일 러시아의 2차 의회에서 설립되었다. 소상공인계층과 지방노농계급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새로운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이다.
(1)역사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예고르 리가체프와 아나톨리 루카노프에 의해 공동 설립되었고, 이후 겐나디 쥬가노프에 의해 주도된다. 주가노프는 소련의 붕괴 이후 좌파민족주의 계열인 '러시아 애국운동'의 국가 구원 전선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공산주의 외에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푸틴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2011년 두마 선거에서 단 9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역대 최다 의석수이기도 하다. 2011년 12월 18일 2011년 두마 선거 결과를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전국적 집회를 열었고 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였다.
2008년, 겐나디 주가노프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패배하였고, 2012년에 또한 겐나디 쥬가노프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2018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의 후보 파벨 그루디닌의 지지율이 73%로 나와 1위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몇몇 러시아 매체에서는 이번에 러시아 공산당이 세대교체를 할수 있을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11%를 득표하며 낙선하였다
(2)이념
겐다니 쥬가노프는 과거 "오늘날의 주요한 투쟁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서방에 의존적인 자유주의자들과, 자주권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시대정세 하에서 계급문제는 뒤로 물러나고 민족문제가 부상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러시아공산당은 스스로를 서구의 매판 자본주의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세력으로 규정하며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되, 노사협력을 통해 서방세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반제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표어: 러시아! 노동! 인민의 힘! 사회주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상징색: 빨간색
이념: 공산주의, 소비에트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수정주의, 2018년 대통령 선거때 도입)
스펙트럼: 중도좌익-극좌
5.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MLM, 중국 공산당 내부 교조주의 노선(모택동 계열)]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Marxism–Leninism–Maoism, MLM)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결합한 정치 사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2세대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이념으로 주목받고 있다.
(1)개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는 1993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욱 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노선으로서 창시되었으며 현재에는 국제혁명운동이라는 대표적 마오쩌둥 사상 단체가 이를 추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이 이념을 추종하고 있다. 여기에 프라찬다 노선과는 구별된다.
a.군중노선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 중앙위원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간부회'의 역할을 했던 모든 종류의 중앙 집행 기관'의 활동을 중점으로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투쟁을 서술하였지만, MLM 노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당과 인민 사이의 강력한 연대, 대규모 군중 직접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선은 혁명당 ― 흔히 '공산당'이라 불리는 ― 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전위력을 갖춘 전위당의 역할을 급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어진다. 이러한 군중 노선으로 당은 인민의 의지를 투쟁 과정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으며, 인민은 당의 영도권에서 이반하지 않을 수 있다.
b.신민주주의
MLM 노선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여 반제 투쟁의 한 예외적 계급인 '민족부르주아'(national-bourgeois)의 역할과 통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민족부르주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에 저항할 수 있으며, 통일전선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계급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생산 관계의 모순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통일전선을 꾀할 때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며, 이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 진영이 쇠퇴한 시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이들(넓게는 자유주의자들)과 언제든지 협력하고, 협력한 상태에서 다변화된 전략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MLM 노선이 시사하는 바이다.
역사적으론 중국 국민당과 연합을 했던 중국 공산당의 예를 들 수 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시 도입했던 신경제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 시기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성립된 인민전선도 통일전선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천두슈 주도의 중국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세력인 중국 국민당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한 무지는 상하이 쿠데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과 관련이 크다. 마오쩌둥은 제2차 국공합작에서 이 민족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혁명 전략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민족부르주아와의 부분적인 타협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MLM 노선은 현대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한 시점에서 수많은 개발도상국(왜냐하면 선진자본주의 정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민족부르주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의 혁명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새로운 통일노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c.문화대혁명
1990년대 중반에 구체화된 MLM 노선은 과거 존재하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현상에 대해 분석해야 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의 수정주의화, 관료주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의 원인을 대규모 대중 운동을 배제하고 중앙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의 현실사회주의의 특유의 제도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수정주의화를 막기 위해 일정한 기간마다 전체적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군중 노선에 근거해야 한다.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로의 투쟁 과정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반동 공작 문제보단 외부적 문제에 모든 것을 쏟았다면, MLM 노선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통제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하부 구조의 변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상부 구조 변형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계속혁명론'(繼續革命論)이라고 부른다.
d.적대적 모순/비적대적 모순
마오쩌둥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립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일부 이론에서 스탈린의 이론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모순론(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대한 이론)은 1920년대 데보린 학파에 의해 전개된 유물변증법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밝힌 모순론과 비교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순의 본질은 제반경제투쟁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일치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계급 투쟁(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의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사회주의 정체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순을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즉,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또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단죄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MLM 노선은 기존의 교조적 계급론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힘들며, 대중에게도 와닿지 않으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새로운 혁명론적 모순관으로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 운동은 반식민주의 투쟁·반인종주의 투쟁·여성해방투쟁에 보다 유연하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e.반수정주의
기본적으로 MLM 노선은 반수정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 쇠퇴의 원인을 수정주의로 보고 있다. 비록, 스탈린의 DIAMAT 원리에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첨가하여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혁명 노선에 있어서 볼셰비키당의 유산을 간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MLM 노선을 지지하는 당 또는 단체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강력한 반수정주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2)마오쩌둥주의와의 차이
MLM 노선은 마오쩌둥주의에 크게 영향받았으나, 기본적으로 공업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형성된 혁명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MLM 노선 자체도 마오쩌둥주의의 특수성보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마오쩌둥주의는 혁명 전의 중국 상황과 유사한 국가들에서 '특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MLM 노선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노선이 공업 사회, 농업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스 레닌주의 노선[교조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주체사상, 호자주의, 게바라주의, 카스트로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
1.영향
국가자본주의, 극단주의, 급진주의, 레닌주의, 반수정주의, 사회제국주의, 전체주의, 좌익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
2.단체
공산당 계열, 코민테른,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극좌
-흐루시초프나 등소평, 고르바초프, 옐친 등은 수정주의 노선이다
*모택동주의[교조주의]
민중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사회제국주의, 반수정주의, 신민주주의, 탈서구중심주의, 농촌혁명론, 모순론, 실천론, 지구전론, 제3세계론, 군중노선, 문화대혁명, 인민민주독재
1.영향
공산주의, 스탈린주의, 낙살라이트, 전체주의, 법가, 주관주의, 황금방패
-금순공정(金盾工程) 혹은 황금방패(黃金防牌)는1998년부터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디지털 공안 체제로 중국 공안부에서 운영한다. 또다른 별칭들로는 만리장성에 빗대어 방화장성(防火長城) 또는 만리방벽(萬里防壁, Great Firewall)이라고도 불린다
2.단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 연맹,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 아프가니스탄 해방전선, 아르헨티나 혁명공산당, 볼리비아 인민혁명전선, 부탄 공산당, 캐나다 혁명공산당, 중국 공산당(1969 ~ 1976), 콜롬비아 혁명공산당, 에콰도르 공산당, 인도 공산당(마오쩌둥주의), 이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쩌둥주의자당(붉은 여단),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노르웨이 노동자당, 필리핀 공산당, 포르투갈 노동자공산당, 터키 공산당, 미국 혁명공산당, 흑표당, 중국 공산당 홍위병, 일본 적군파(일본 공산당 내부 2단계 혁명론 NLPDR계열), 극좌[콜롬비아의 마오(모택동)주의 무장 혁명군[인민군], 마오(모택동)주의자 이탈리아 붉은 여단[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 네팔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과 무장단체, 아프가니스탄 마오(모택동)주의 청년공산주의 단체, 인도 마오(모택동)주의[마오주의공산주의센터(MCG)와 인민전쟁파(PWG)],필리핀 마오(모택동)주의[공산반군], 칼리만탄섬 공산당 마오(모택동)주의자, 태국 마오(모택동)주의자[태국 공산당], 미얀마 마오(모택동)주의자[북부 미얀마 공산반군], 페루 마오(모택동)주의자 "빛나는 길", 일본 마오(모택동)주의자 적군(赤軍, 붉은군) 등 세계 11개국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신봉단체]
3.인물
마오쩌둥(毛澤東), 아크람 아이노, 천보다(陳伯達), 애비마엘 구즈만, 이브라힘 카이파카야, 린뱌오(林彪), 짜루 마줌다르, 시라지 시크데르, 피에르 물렐레, 휴이 뉴턴, 프라찬다, 장칭(江靑), 호세 마리아 시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張春橋), 사미르 아민, 리민치(李民騏), 쯔엉찐, 폴포트, 샤를 베틀랭, 알랭 바디우, 시진핑( (習近平)
오늘날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수정주의 노선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농조합(지역 지방 의회) 도입 그리고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와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의 임기제한 등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이 노농조합(지역 의회)에 의한 운영과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 이윤추구, 시장경쟁원리의 자본주의 3원칙을 인정하고 상업적 공농(工農)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세금과 경영 비용,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농조합(지역의회)애 의한 책임자 선출과 임기제한 그리고 사업 의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당이나 노농조합(지역의회) 독재나 우위는 인정하지만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농장 책임자나 국영기업 책임자 개인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노농조합이나 지역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중앙의회)에서 선출된 국영기업(농장) 책임자나 국가주석(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이 돼야 세습화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다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좋은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The Death of Stalin!)"
“권력을 향한 싸움이 시작된다”
1953년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쓰러진다.
권력을 향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고
스탈린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운명의 날은 밝아온다.
독재자와 그의 사후 권력을 잡기 위한 쟁탈전에 폭소가 터진다.
오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1953년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그의 장례식날까지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는 측근들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았다
영화 첫 장면, 교향악 연주를 생중계하는 방송국으로 스탈린의 전화가 걸려온다. 17분 뒤 전화하라는 스탈린은 방금 생중계된 교향악 연주의 녹음본을 자신에게 보내라는 명을 남긴다. 그러나 연주는 녹음되지 않은 상태. 방송국 직원은 벌벌 떨며 퇴장하려는 교향악단과 관객들을 다시 붙잡아 다시 연주를 시킨다.
같은 시각, 스탈린의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무작위로 사람들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지휘자를 대신해 불려온 또 다른 지휘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이처럼 초반부터 영화는 절대권력의 근거 없는 폭력성을 코믹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던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죽고, 권력은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베리야(사이먼 러셀 빌)에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례식을 기점으로 권력 중심은 흐루쇼프(스티브 부세미)에게 이동한다. 이는 영원한 절대권력이란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흐루쇼프 역시 이후 브레즈네프한테 실각한다.
무작위로 사람들을 데려가 총살한 스탈린이지만, 인민들은 스탈린 장례식에 줄지어 와 참배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극 중 사건들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지지만, 이는 대부분 실화라고 한다. 초반 녹음이 되지 않아 다시 연주되는 교향악 연주도, 경비병들이 스탈린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제때 발견되지 않아 소변을 질질 흘린 상태로 발견된 것 등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다.
195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들을 다루지만, 배우들은 모두 영어로 연기한다. 유럽 대륙의 시대극에 영어권 배우들이 출연해 영어로 연기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이것도 블랙코미디 요소로 십분 활용한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기한 흐루쇼프는 미국식 억양의 영어를 쓴다.
파비안 누리와 티에리 로빈의 그래픽 노블 '스탈린의 죽음'과 그 후속작 '2부-장례식'이 원작으로, '인 더 루프', '빕' 등을 연출한 아르만도 이아누치 감독이 연출했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1919년 스탈린, 레닌, 칼리닌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이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개석, 루즈벨트, 처칠(1943년)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 모인 수뇌들 (좌로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년 7월 25일. 포츠담 회담.
포츠담 회담 앉은 사람 왼쪽 부터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소련 스탈린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에서 왼쪽부터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의 모습
1949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70회 생일 기념식에 참가했을 때 촬영된 사진.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 마오쩌둥, 소련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 스탈린, 동독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이다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그루지야)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자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소소(조지아어: სოსო)는 그의 초명인 동시에 애칭이었다.
1.초기생애
(1)출생과 가정 배경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그루지야)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ბესარიონ ჯუღაშვილი)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조지아어: 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გელაძ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 놓고 있으나, 그가 그루지야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출생일은 1978년 12월 18일이라고 한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베사리온을 두었던 그는 어린 시절 무자비한 구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 베사리온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베사리온은 구두 장사가 잘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계속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 에카테리네는 아버지 베사리온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 겁을 먹었던 스탈린은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
(2)유년기
7살(1886)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살(1889)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3)학창 시절
스탈린은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년(9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2살(1891)에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하였다. 1894년(15살) 초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1894년의 어린 스탈린
1894년 15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소재한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4] 트빌리시 신학교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 1학년 재학 중 스탈린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는데,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았다. 그가 시에서 다룬 주제는 대지와 자연, 민족정신 등이었다.
신학교 2학년 이후 그는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러시아인을 만드는 교육을 강요하는 스승들과 마찰이 잦았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가정 환경이 어려웠음에도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재학 중 그는 국제 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쓴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비밀리에 탐독하다가 신학교에서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비밀 결사조직인 '메사메 다시(조지아어: მესამე დასი)'에 가담하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 전 해인 1899년 말 스탈린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신학교의 문서에는 그가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퇴학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하여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으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렸다. 신학교를 떠난 직후 스탈린은 레닌의 저작과 관련 서적들을 폭넓게 읽었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4)노동활동과 혁명에 투신
1899년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천문대에 채용되어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다. 트빌리시 천문대의 공무원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이라 한다. 그가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조지아의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가 소유한 정유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00년(21세)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스탈린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이러한 비난은 조직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20대 초반의 스탈린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년 4월(23세)부터 1903년 3월(24세)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2년에서 1903년 무렵 연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조지아어: 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სვანიძე)를 만났는데, 스바니제는 러시아 육군 군복제조사 미싱공으로 일하였다. 시짓기와 작문 재주가 탁월했던 스탈린은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부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1903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첫 부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
2. 혁명활동
(1)볼셰비키 지도자
1903년말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전업혁명가로서 여러 비합법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는 파업 선동, 정부 비판, 사회 부조리 지적, 민병 조직, 민중 선동뿐 아니라 자금확보를 위한 은행강도, 반대파 요인 암살, 테러, 몸값 납치 같은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했지만 회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스탈린은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05년 그는 동료에게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에서 첫사랑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애칭은 카토)를 다시 만났다. 1906년 스톡홀름 회의에 참석했다.
스바니제와의 꾸준한 교제 결과 스바니제의 마음을 움직여 1906년 7월 스탈린은 스바니제와 결혼하였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여행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스탈린의 한 혁명 동료는 신혼 초기의 스탈린에 대해 “혁명에만 몰두하던 그가 아내에게만은 부드럽고 세심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생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했다. 아내 카토가 고생하며 늘 그가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만 기도한 것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는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1907년 스탈린은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2)조직 확장 노력
그는 볼셰비키 조직 확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쇄물과 홍보 팜플렛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도심에 뿌리고, 각지를 다니며 홍보와 연설, 강연 등을 통해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전했다. 이는 비가 오거나, 대량 폭설로 교통이 막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각지를 순행하는 것으로 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선전, 홍보 등으로 인력과 조직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7년 6월 25일(음력으로는 6월 12일)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1903년부터 그가 시베리아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강도 행각도 서슴치 않았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는데,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해 전제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도 했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도주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현상금을 내걸은 포스터가 걸리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체포되지 않고 각처를 은신해 다녔다.
체포 후 교도소에서 촬영한 사진(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다)
(3)첫 아내와 사별, 성격의 변화
첫 아내 스바니제와의 비극적인 사별은 스탈린의 냉혹하고 난폭한 성격을 한층 더 강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은행 강도를 금지하자, 스탈린은 이에 항의하여 잠시 사임하였다. 이후 현금수송차에 대한 대규모 강탈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4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스탈린은 다시 바쿠로 도피했는데, 여기서 1908년 12월 부인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냉혹한 혁명가가 되기 전 그는 매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에게 잘 보이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시도 읊었다. 바보 연기로 주변을 웃기기도 했다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내 스바니제가 트빌리시에서 발진티푸스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급히 아내에게 달려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스탈린은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는 직접 관을 준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 겔라제의 일기에는 스탈린은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 자리에서 오열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첫 아내인 스바니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스탈린은 술에 취하면 곧잘 병중인 스바니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동료들에게 곧잘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죽자 스탈린은 심히 오열했는데 어머니 겔라제 역시 그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두기도 했다.
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는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스바니제를 잃고, 바쿠에서 체류하며 스탈린은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인 무슬림, 수백명의 흑인들까지 포섭,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여 파르티잔 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 파업과 각종 집회, 선전 선동을 기획하였으며 많은 수의 러시아 차르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등 파르티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몸값 납치, 강도, '보호료' 뜯기, 위조 화폐 제작 등의 범죄적인 활동으로 자금을 확보하였다.
(4)체포와 피신, 언론 활동
스탈린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7번이나 추방되지만 마지막 세 번을 제외하면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량 선고가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은신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동료 공산주의혁명가들로부터 '제국경찰의 보수를 받는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제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볼셰비키당 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1912년 4월 스탈린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스탈린은 당의 공식 신문인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인 "스탈린" {스탈(стал)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반격 암호로 쓰이기도 했다.}이라는 가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으로 당의 출판물에 기고하고, 언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기민한 피신과 체포 뒤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한 당내 첩자 의혹, 제국 비밀경찰 의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속에서도 레닌은 1912년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도록 승격시켰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에 스탈린에 대한 각종 의혹은 해소되거나 서서히 묻혀져갔다. 그러나 뒤에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 후원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간행하면서 각종 학술 용어 보다는 지역과 하층민들이 두루 읽을수 있도록 비전문 용어와 지역지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는 지역 방언의 활용 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마케팅 효과는 성공을 거두어 프라우다의 구독, 배달은 타타르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징병대상자가 되지만, 12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왼쪽 팔의 장애 때문에 병역 면제되었다.
3.정치 활동
(1)망명과 귀국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이오시프 스탈린 (1915년 무렵)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서 퇴위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벌어져 제정이 무너지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은 물론 황족들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차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는 일부 공감하였으나, 귀족과 황족까지 처형하는 것을 놓고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며 주저하였다.
3월 초 스탈린은 처음에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프라우다의 편집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곧 4월의 당 회의에서 레닌의 견해를 듣고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입장을 바꾸어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당원 중 앞장서서 혁명으로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서서히 장악하자며 만류하였다.
(2)10월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수립
1917년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년 3월 25일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월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년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
(3)내전 기간 중 (1917-1919)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직후,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인민위원회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였다. 곧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하얀 군대)이 일어나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레닌은 5명으로 구성된 볼셰비키당 정치국을 신설하였으며, 여기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볼가 강변의 차리친 시의 수비를 위해 보냈고, 1918년 5월 차리친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유력 지휘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와 친구가 되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당시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붉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책에 자주 반대했다. 내전 중 스탈린을 포함한 붉은 군대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농을 협박하여 식량을 강탈하는가 하면 식량징발에 반발하는 마을을 불태우도록 했고, 서부 전선에서의 대량 탈영을 막기 위해 탈영자들을 공개처형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과 함께 한 스탈린 (1919년)
1919년 스탈린은 국가정보통제담당 인민위원(보안담당 장관)에 임명되어, 인종 문제 담당 인민위원과 국가 정보 통제 담당 인민위원을 겸임하였다. 그해 스탈린은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러시아어: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Nadezhda Alliluyeva)와 재혼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던 그는 평소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연애하면서 갑자기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로 변신하여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스탈린은 크렘린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4)소련-폴란드 전쟁(1920-1921)
소련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볼세비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더 북쪽에 있는 바르샤바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지휘관 부아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군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리보프에 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후퇴하여 리보프와 바르샤바는 모두 점령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스탈린은 1920년 8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고 군사지휘를 사임하였다. 9월 22일 제9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23년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직과 국가통제인민위원직을 사퇴했다.
후에 스탈린은 1920년의 실패를 가져온 이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그리하여 후에 자신을 비판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1939년 나치와의 협정을 통한 폴란드 침공으로 르보프를 소련영토로 만들고 그때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 장교들을 대규모로 처형하였다. (카틴 숲의 학살). 후에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 회담에서도 리보프는 전후에도 반드시 소련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위대를 잘 조직했던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사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헛점을 공격하며 당내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을 썼는데, 이는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자신의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4. 집권 기간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1)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레닌 장례식 때 스탈린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2)집권과 군부 장악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그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특히 1937년 6월까지 비밀재판을 통해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체제에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숙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의 군사전략가들이었는데,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다. 이들 소련군 초기 군사연구가들의 작전술은 스탈린이 죽고난 뒤에야 재개된다. 장군들을 숙청, 처형시킨 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장교들을 장군으로 승진 발탁한다.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와 그의 동료들 등 소련군 초기 핵심 군사이론가들에 대한 처형과 숙청, 장군들에 대한 숙청 등은 그들이 만들고 연구했던 보고서와 군사이론서들까지도 반민중적 불온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론들은 토론과 적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침공작전의 실패와 2차 대전 초기의 독일의 기습공격과 모스크바까지 패퇴하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패퇴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나면서 기갑, 기계화 부대를 통한 작전술 이론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스탈린의 연구 금지와 의심으로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못했다.
그는 중견 장교들과도 꾸준히 면담했는데, 이는 그들을 통해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까지 대략 2백만 명 정도를 숙청했고, 이 중 20만 명 정도는 해외 유학파, 당 중앙위원과 현역, 예비역 군 장군, 기술관리들을 포함한 고급인력들이었다. 이후 그는 내부에서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하고 측근과 군부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3)경제 개발 정책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 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으로 대체해 산업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 없는 경제 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강제 산업화와 노동 생산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와 함께한 스탈린
한편 1932년 혁명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로 공개 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했다. 두 번째 아내의 자살 이후 스탈린은 신혼 살림을 차렸던 아파트를 떠나, 크렘린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데즈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정치국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만류로 번복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격무에 시달리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성들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편애를 하게 된다.
1967년 미국 뉴욕에서 기자회견 중인 스베틀라나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산업 육성과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도 수반되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각종 시위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고자 강경 진압을 하는 한편, 회사 간부·산업 관리인들을 비판, 규탄하고 그들의 경영 잘못으로 몰아 여론재판에 계속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하고 희생됨으로써 그의 경제실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늘어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즉,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은 농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며, 그는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스탈린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유명 작가들과 예술인,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경제정책과 동시에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90% 이상이나 되던 소련의 문맹률이 교육 정책을 통하여 1%까지 감소하였고, 또 다른 지식층을 양성하였다.
한편 스탈린은 예술 공연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1934년 1월 <레이디 맥베스>가 소련에 상륙, 초연과 함께 흥행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1936년 <레이디 맥베스>를 직접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레이디 맥베스 관람 중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치정 살인 부분이 나오자 이를 불쾌히 여겨 1막이 끝나자 역정을 내면서 자리를 떴다. 며칠 뒤 소련의 최대 일간언론이자 당의 충실한 기관지인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고 <레이디 맥베스>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영금지조치되었다.
스탈린 초상화 (1937년작)
(4)반혁명 재판과 권력 강화 (1936 ~ 1939)
그러나 성급한 산업화는 농업과 환경을 파괴하여 홀로도모르와 같은 재앙을 불렀고, 집단농장화로 성과 없는 농업생산에 회의적이던 농민들의 생산물 수는 감소했고, 우크라이나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이 때문에 당과 군대 내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많아졌다. 이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를 뿌리뽑는다는 명목하에 스탈린에게 도전했거나 도전할만한 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스탈린과 세르게이 키로프 (1934년)
스탈린이 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 숙청 작업을 담당한 곳은 내무인민위원회(NKVD) 였으며, 당내는 물론 군부나 심지어는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숙청작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군부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장군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34년 12월 1일 스탈린에 맞먹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는데, 키로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과 인기가 높아짐을 두려워한 스탈린의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자 이에 연루된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옛 혁명 주역이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뽑힌 중앙 위원과 후보 위원 139명 중 98명을 처형했고 17명을 강제 수용소로 쫓아냈으며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1명 중 무려 1108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마녀재판을 감행했는데, 트로츠키를 따르던 31명의 사람을 처형하고 심지어 1936년과 1938년에는 이전에 숙청을 지휘했던 전직 내무인민위원장인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가 도리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면 회고록을 폭로하겠다고 꾸준히 협박하여 스탈린의 정적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1937년 6월 한 달에만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해 8명의 장군을 간첩 혐의로 처형한 것을 비롯해 육군 원수, 군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등 15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수가 붉은 군대 간부 최고 군사회의 멤버의 75%에 달했으며 원수 5명 중 4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 여단장급 406명 중 220명, 연대장급 고급 장교 중 70% 이상이 숙청당했다. 대숙청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38년 바실리 블류헤르과 니콜라이 부하린, 야코프 페테르스, 1939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카를 라데크, 1940년 알리 쇼겐추코프와 니콜라이 예조프, 1950년 그리고리 쿨리크 등까지 강타했다.
특히 스탈린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j Bukharin)의 경우 130개 항목의 죄명으로 법정에 기소당했는데, 이는 고문에 의한 자백들이었다. 부하린은 '고난받는 인민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본주의적, 퇴폐적인 생활을 향유한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이외에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초기 작품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으로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란 비판을 받고 활동을 거의 중단당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던 레프 란다우는 UPTI 사건으로 조사받은 뒤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1938년 5월 27일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에 유형당했다. 이후 1939년 5월 29일 동료 표트르 카피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위의 사진은 1938년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의원, 그리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임원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1949년 조작되어진 사진이다. 뒷줄의 몇몇 인물들이 사라졌다. 역시나 정치적으로 숙청되었거나 사상적으로 스탈린과 대치되던 정적들이다
1939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 참석,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反) 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을 전전하다가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독재성과 레닌의 유언을 들어 그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국제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계획했다. 트로츠키 암살 계획은 성공하여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시티 남부 코요아칸의 자택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72년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숙청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KGB 본부 앞 기념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고 있다. 이 기념비는 굴라크 정치범 수용소가 세워졌던 솔로베츠키섬에서 나온 큰 호박돌로 만들어졌다.
구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숙청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연례행사가 29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 밖에서 열렸다. 사람들이 촛불 켜진 기념물 주변으로 모여 있다. 이 기념물은 구소련 강제수용소 '굴라크'가 처음 세워진 솔로베츠키 제도에서 운반된 바위다
(5)소련 총리 (1941~1945)
1939년, 스탈린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
1939년 8월 스탈린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용기를 얻은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 내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갔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발트3국,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승리하면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스탈린은 연방의 총리를 겸했다. 이 해에 동방으로 팽창하려던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게 되었다.
1940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북유럽 3국이 소비에트연방 편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투표 하루 전에 만장일치라는 투표 결과였다. 이는 분명한 조작이었지만,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이를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트 3국의 소련 합병은 얄타 회담 이후 더욱 분명하게 정해졌으며, 이후 1991년 무너질 때까지 소련의 영토로써 인정된다. 현재 발트 3국은 소련의 합병이 분명한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속해있던 시기를 '강제 점령기'로 규정하고 있다.
일소 중립 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제국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지켜보는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뒷줄 가운데)
1941년 4월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6)독소 전쟁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대략 1200대 이상이나 되는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수십만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에 입각하여 영국을 굴복하기 전에는 소련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습공격에 충격을 받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음을 증언했으나, 스탈린은 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깊숙히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그는 피신권고를 물리치고 수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1941년 7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1942년)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고,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크렘린을 끝까지 사수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대량생산해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승리 이후 소련군은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독일군은 반격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44년 여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스탈린이 총 지휘하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하여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격퇴시켰다.
(7)2차대전 후반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 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8)2차대전 종전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 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 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년 6월 27일에는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여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 파병에 동참을 제안받자 그는 수락하였다. 뒤에 미국 내부에서는 그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미국은 소련군이 2차 대전 종결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7월과 8월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예로 들며 소련군 역시 2차 대전 해결에 기여했음을 강변했다. 1946년 2월 25일 소련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년 3월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외국의 국가 원수와 및 내빈에게 수여했다.
5.생애 후반
(1)종전 직후
1946년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다.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 무렵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숨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1950년까지 히틀러를 잡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없었지만, 스탈린의 이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NKVD는 히틀러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45년과 1948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확정된 일도 있었다.
1947년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민망했던 선거당국은 선거 다음 날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계속 간섭거부를 추진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 일국공산주의 정책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내 다른 14개의 피지배 국가들이 티토주의의 선례에 따라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 내 각국(각공화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종하고,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의 위성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시켰다.
경공업의 생산력 증대 외에 그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과학원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립 계획하고 적극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으나, 우주선의 발사는 그의 생전에는 볼 수 없었다. 비록 스탈린의 생전에는 우주 탐사를 볼 수 없었으나,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러시아어: Спутник) 1호를 발사했다. 반공주의자이며 그를 심히 경멸하였던 비오 12세는 친서를 써서 특사편에 보내 핵 전쟁만은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2)전후재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고, 그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전후재건을 돕지 않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소련은 전후 재건에 나섰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배급제 폐지에 있어서 소련은 영국보다 7년이나 더 앞섰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3)한국전쟁 개입
1950년 2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1949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23]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1945년 8월경부터 1991년 12월까지 마스-레닌-스탈린주의(일국사회주의 ,자국 사회주의) 노선 통치국가
(4)말년과 독살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 3월 4일에는 별장의 비밀 방에서 식사를 시켰으나, 그 날의 식사는 먹지 않고 첫 번째 비밀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간은 알 수 없다.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죽기 직전, 스탈린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폭로하거나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주치의들을 숙청하였다. 이 때문에 주치의들이 체포, 고문 등으로 끌려가면서 스탈린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식 발표된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일설에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속에 별장을 지은데다가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 3월 8일에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5)사후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 되어 레닌 묘 옆에서 보존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시에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은 사후 1956년 초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은 뒤 격하당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동상, 흉상, 초상화, 비석 등 각종 기념물들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스탈린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가 됐던 차리친 시는 1962년 이후 볼고그라드(Volgogra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과 소련-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스탈린 격하논쟁은 주춤해지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영웅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 14개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2008년 8월 러-조지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계 각국 봉건제 신분제를 폐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농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스크바 사수 및 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또한 독소 전쟁에서 초반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소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농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25]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국가적,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26]
일부 러시아 국민들 중에는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힘, 무사무욕, 국가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 또한 러시아의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재평가를 놓고 그의 인권 탄압과 정적 숙청에 관련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 2019년 러시아에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스탈린은 성실하고 애국심이 투철했고 청렴한 사회주의자이면서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스탈린 치하에서 높은 공업 생산이 달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 소련의 보통 시민이 소비재나 생활의 편의품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국가 자원의 상당한 비율(어떤 평시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에서도 전연 전례가 없을 만큼 높은 비율)이 국가에 의해 군사비와 경찰기구 유지비 및 공업화의 계속적인 추진을 위한 재원으로 충당되었다.
스탈린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민영자본체제)보다도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공산주의 국가) 옹호하여 국 가사회주의, 군국주의나 국영자본체제 그리고 러시아 국민 중에 붉은 귀족계급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후에 스탈린주의는 아랍 사회당( 바트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당 마오쩌둥, 리비아의 국가평의회(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카다피, 김일성 주체사상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스탈린 모델-후세인이나 모택동, 카다피, 김일성등은 자국사회주의 노선(자주노선)을 견지하면서 군사력(당군이론과 전쟁이론, 군대정치)으로 주변국가를 정복하려는 통치 모델로 국가자본주의 우파이론보다는 국가사회주의(인민 민주주의 좌파사상) 이론]
스탈린이나 모택동, 후세인, 카다피,김일성등은 사회주의 세계의 혁명단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이는 민주국가나 서방세계로부터는 좌익 무장단체 (테러단체 )원조로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진보적 지식인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 국가 헌법[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의회나 국민이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이다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는 주체연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은 신으로 우상화 신격화 하고 있다 신(주체연호)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세력(세습제 반대 운동)이나 제작물은 금지되고 있다 대북 삐라나 유인물을 가장 두려워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국가 북한 제3공화국 헌법]
유엔은 친북성향이나 남북 정치협상 세력을 좌파세력이나 진보세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 연방공화국) 헌법[민영자본체제(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1989년까지의 동유럽내 공산권 국가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동상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붉은 별도 제거해야 합니다
날짜:
1989년 6월 4일 - 1991년 12월 26일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와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북한 정치범 수용소 중 가장 악명 높다는 북한 "전거리 교화소"에 직접 복역한 북한 동포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
북한 전거리 교화소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여성 수감자가 중국에서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우로 강제낙태를 시키기 위해 무거운 몸을 들고 운동장을 돌게 하고 있다[미국 국무부가 27일 발표한 ‘2017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는 2만 명에서 3만 명의 아동이 중국에 살고 있는 북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들 중 일부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 무국적자가 되고, 착취 가능성에 취약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탈북으로 중국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은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귀순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탈북자 그림]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포로 모습이다. 그들의 사형 집행이 정치범수용소 경비원 접근이 가능하게 했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를 처벌 할 수있는 몇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사진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이 굶주림으로 쥐, 뱀과 개미등을 잡아 먹고 생활하고 있다
시체보관실에 시체를 쥐들이 먹고 살아간다
국제인권단체, 북한 정부 당국자에 의한 성폭력 실태 공개
Women the sitting position in a pre-trial detention facility run by the police. Detainees are commonly forced to assume this position in pre-trial detention and temporary holding facilities.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북한 아동 훈련용 목총(木銃) 모습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어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이다
-머리소리함(知積能力團) 논의내용-
*안보능력: 내전위기 여부, 동맹국 여부 , 군사력 여부
*경제능력: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
*정치능력: 의회 민주주의와 주민 자치능력 그리고 지도자의 개인 능력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의견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권력은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유지에 주력해왔습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소리함으로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북한정부의 군사력
북한은 재래식 핵무기(핵 폭탄, 수송기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와 신형무기 핵탄두 탄도미사일(로켓이나 미사일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러시아 극동지역 조차도 위협이 되고 있다
30분으로 서울을 평평하게 서울 불바다 이론이 바로 북한정부의 전술 핵무기와 전략 핵무기 이론이다
남한의 위협은 재래식 핵무기 원자폭탄과 핵 대포나 핵 배낭,핵 어뢰 등 전술 핵무기, 단거리 탄도미사일 전략 핵무기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위협은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략 핵무기이며 미국등 태평양 연안국의 위협은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 수준이 고저(高低) 각도 발사로 비행거리를 조정하는 "로프티드 궤도(lofted trajectory)[高低角度 발사] 모델" 수준이고 북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도 남한(한국)이나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지역의 위협되고 있다
The news came hours after state media showe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inspecting what it said was a hydrogen bomb[미사일 핵탄두]
미사일 요격 방어시스텀 미국 사드나 러시아 S-400는 수송기(폭격기)나 로켓,탄도 미사일도 요격이 가능하다
미사일 방어 전투는 미사일 탄두를 식별하고 그 미사일 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한 순간의 전쟁이다. 한국이나 아시아 태평양지역도 나토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DD) 배치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이고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탄도로켓]까지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북한 로켓부대(미사일과 포부대) 이외 지상군(地上軍, ground army)은 남한보다 열세이다
(2)내전위기 여부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 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척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남녀 징병제 국가로 120만명의 인민군을 보유하고 있다[남자는 10년, 여자는 7년 군복무]
북한 인민군의 60%이상이 북한내부 법과 질서(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를 지키는 치안군이다
북한정부의 군사력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치안군이다
북한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김정은 부대가 남침이나 일본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할때 내전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반김정은 세력이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할때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 붕괴될 것으로 본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3)동맹국 여부
과거 북한정부의 동맹국 러시아나 중국은 유엔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으로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 유엔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와 탄도 미사일[핵 대포, 핵 배낭, 핵 어뢰, 핵 기뢰등 전술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공중발사 순항 미사일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 탄도 로켓(대륙간 탄도 미사일 ,사거리 5,500km 이상) 등 전략 핵무기]의 완전한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의 자금이나 경제, 외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북한정부 내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온 세력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다
주체연호(세습제 좌익군정) 청산이 수평적 권력교체이며 핵무기 포기정책이다
*조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朝蘇友好協力─相互援助條約]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1)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년 11월부터 1964년 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2)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년 8월 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년 9월 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년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년 4월,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3)의의와 평가
냉전 시기 북중우호조약과 더불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 주요 군사동맹조약. 1961년 7월 북중우호조약과 북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1961년 7월 11일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은 조약.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1961년 7월 11일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당시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 총리가 양국 전권 대표로 서명했다. 양국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어느 한쪽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에 들어갈 경우 양방은 의무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군사적 지원 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981년과 2001년에 2차례에 걸쳐 자동 연장됐고 앞으로 유효기한은 2021년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와 탄두 미사일 개발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내용
제1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아시아와 세계 평화 그리고 양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제2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체결국에 대한 특정 국가의 침략을 방지한다. 체결국 가운데 한 쪽이 몇몇 동맹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 상태로 바뀌는 즉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제3조 어느 체결국도 다른 체결국과 맺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집단, 행동,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제4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양국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중대한 국제 문제에 대해 서로 협의하기로 한다.
제5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과 평등 호혜의 원칙, 우호-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가능한 한 경제-기술 원조를 진행하며 양국간의 지속적인 경제, 문화, 과학, 기술 협력을 통해 발전시킨다.
제6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조선의 통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을 원하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 인민의 이익 및 동아시아의 평화 옹호 목적과 일치하는 것을 인정한다.
제7조 이 조약은 양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으며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비준서는 평양에서 교환하며 양국이 조약의 개정 또는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
핵 보유를 위한 북한의 시도는 자국과 지역의 안전에 충격을 줬고 중국의 국가안보 이익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는 조약 위반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약은 침략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명시했는데 북한이 고집대로 핵을 개발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는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와 2001년 조약이 마지막으로 갱신됐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북한은 반드시 핵실험을 중단해야 하고 한미 양국도 북한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을 멈춰야 하며 양측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북중관계가 외부로 비치는 것보다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중 수교 다음 해인 1993년 북한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중국이 아닌 호주를 지지했고,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대사관에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가 북중 혈맹관계 와해를 주장하며 “조선(북한)은 잠재적 적국이고 한국은 가능한 친구”라고 말한 강연록도 회자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했습니다[한반도 통일국가는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닌 남북 주민이 선출한 남북의회에 의한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평화통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정책 노선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정부는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은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란 말은 이상주의나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원칙보다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남침을 할 수 없을 만큼 약한 국가이다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때는 유도적 전술 오판이나 북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유엔안보리는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 수 있는 세력에게 대북제재를 가하고 있다
2.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
유엔이 또다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로 분류했습니다. 스위스의 비정부기구는 북한을 인도적 위기국으로 꼽았습니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는 7일 1분기 ‘곡물 작황 식량 상황 보고서’에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세계 41개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2018년 곡물 생산량이 예년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전년도 보다 더 감소할 것으로 공식 추산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지난 해 7월과 8월 사이의 높은 온도와 적은 강수량 때문이라며, 그 결과 대부분의 가구의 식량 소비율이 계속 경계선상에 있거나 열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식량 불안정에 관한 우려가 계속 남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보고서는 지난 해 말을 기준으로 북한의 식량 수입 필요량이 64만 1천t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한주재 유엔 상주조정관실은 6일 발표한 ‘2019년 북한 필요와 우선순위 보고서’에서,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495만t으로 전년도 545만t에 비해 50만t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북한에 만성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실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며, 전체 인구의 43%인 약 1천 100만 명이 영양결핍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타판 미슈라 상주조정관은 특히,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9% 감소하면서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로 인해 상당한 식량 부족이 초래됐다며, 적절한 자금 지원이 없을 경우 북한의 인도적 상황이 악화되고 영양실조와 질병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인 ACAPS가 7일 북한을 ‘인도주의 위기국’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복합적인 인도적 위기는 정치 경제적 요인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해 촉발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야욕이 국제 제재로 이어졌고, 이는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북한은 폭우와 홍수, 가뭄 등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2018년에도 심각한 홍수를 경험했고, 8월에는 태풍 솔릭이 북한을 강타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과 영양부족(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Famine grips North Korea]
A malnourished boy stands in an equally emaciated cornfield,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29, 2011. [북한 함경남도 옥수수 밭에 서 있는 영양부족(영양실조) 북한 아동모습(2011년 9월 29일)]
A homeless woman prepares a few shriveled ears of corn for lunch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점심 밥)
Students and volunteers dig a canal on October 1, 2011 in Haeju ,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학생과 주민 자원자들 동원 근로사업)
A woman cooks at home on September 29. 2011,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옥수수 밥을 준비하는 북한 어머니 모습)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A boy prepares the soil for crops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농작물을 위해 흙을 준비하는 소년모습)
Women work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들 모습)
Pak Su Dong, the boss of the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집단농장 책임자 박수동씨 모습)
Jo Tae Kun, a health-care assistant in a small village in Hwanghaenam-do, North Korea(마을 영양사 조태곤씨 모습)
Two North Korean orphans dress to impress a foreign delegation(두 명의 북한 고아들이 외국 파견단 방문용으로 좋은 옷을 입은 모습)
자료:중국정부
http://www.china.org.cn/photos/2011-10/11/content_23591611_6.htm
(2)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 파시즘 북한 인민군 경제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군수산업 중공업,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비용이 대부분 인민군 경제활동에서 충당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국영자본체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이나 외부 경협이 인민군 영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대북 투자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을 지지해야 한다 민간경제 대북투자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북한 인민군 제549부대 양돈장(養豚場) 시찰하여 돼지 사육과 도축 그리고 돼지고기 제품 판매 현황등을 시찰했습니다
2013년 5월 2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을 방문했습니다.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은 면적이 349만 평방미터로 인민군 가축 식량기지로 양등을 사육해오고 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마쓰마에초 부근 해역에 위치한 무인도 마쓰마에고지마에서는 지난달 28일, 북한을 출항한 목조선이 정박해 10명의 선원 가운데 일부가 상륙했는데 경찰 등의 조사에 따르면 섬 건물에서 TV와 소형이륜차 등이 없어진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이들 10명의 선원 가운데 약 절반이 해상보안본부 등의 조사에서 이전에 조선인민군 소속이었다고 밝힌 사실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취재에서 밝혀졌습니다.
목조선에는 북한 인민군 제854군부대라고 쓰인 표식이 달려 있는데 무기 등은 없었고 북한에서는 군이 외화획득을 위해 수산업에 관여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군부대 소속 어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과 해상보안본부는 선원이 과거 어떤 부대에 소속했는지도 포함해 계속해서 군부대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3)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제4공화국 헌법은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식 국영자본체제
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시민소유는 그 시민개인의 재산이며 물질적·정신적 만족을 위하여 사용된다. 시민소유에는 노동에 의하여 또는 법률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범위내에서 취득된 소비용 또는 산업용의 모든 재산이 포함된다. 다만, 시민의 소유로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취득물은 이에서 제외된다. 농업과 개인의 부업경영 기타 법률에 규정된 목적을 위하여 시민은 영대사용(永代使用) 상속의 대상으로서 토지를 전유하거나 사용할 권리가 있다. 시민재산의 상속권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되고 보장된다.[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전 일본국가와 일본인의 소유토지 및 조선인 지주의 소유토지는 몰수한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한다.
토지는 자기의 로력으로 경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5정보 또는 20정보로 한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지역 및 조건에 따라서 따로 법령으로 규정한다.
토지의 개인소유와 아울러 국가 및 협동단체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
국가 및 협동단체의 토지소유면적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로력농민의 리익을 특히 보호하며 경제적 정책이 허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방조한다.[1948년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북한은 인민경제 제1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1972년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북한 경제는 민간경제(인민경제)에서 인민군이나 집단농장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로 전환돼 왔다
북한 경제는 스탈린헌법보다도 반민간경제(반민생경제) 국가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표,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북한 빈곤층 생활 모습은 TV 방영 되지 않고 있다
텃밭이나 개인 부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 모습
3. 북한정부의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1공화국 헌법 인민회의정부론 인민 민주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제2공화국 헌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을 공식적으로 국가제도로 인정한 이후 의회 민주주의 정치와 주민자치가 사라지고 지역 군사위원회나 중앙 국방위원회에 의한 통치를 해오고 있다
이때부터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노선 인민 전쟁론[의회에 의한 전쟁방식]에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전쟁론[군대에 의한 전쟁방식]으로 변경 되었다
(1)당군이론과 선군정치 노선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현역군인이나 군(軍)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년,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년.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단,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대의원은 대부분이 현역군인이나 퇴역군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 모습
4월 11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5차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2)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자가 돼야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주체연호)과 김정일주의 선군정치를 지지해야 정치범이 아니다
북한정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이외는 모든 세력이 적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버려야 종파분자가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 선군정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라
-국제적 반미투쟁가와 연대를 하라 그래야 반미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중국정부 내 친미인사를 제거하라 일본정부나 한국정부 내부 반미인사를 포섭하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자격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 참여할 정당과 개인은 선거연합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며 해당 선거연합은 모든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한다"
후보를 내는 곳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뿐이기에 모든 지역구에서 단독 후보가 출마하게 되고 홍보나 선전 활동 등 선거 유세도 없다.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에 기표소에 들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였으니 기표소에 들리는 것 자체가 해당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표시가 되는 '공개투표'가 된다. 선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개표가 끝난 뒤가 아니고 투표가 끝난 뒤에 한다는 점도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로동당 (여당) ·
조선사회민주당 ·
천도교청우당
해외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단체[조총련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년 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년 6월 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년 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 김정은정부 친위대이며 자금줄(돈줄)이다
특히 해외 단체 북한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정부 인적자원단체이며 자금줄(돈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김일성정부가 박헌영과 남로당을 체제전복 범죄행위와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이후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와해 되었고 박정희정부 때 남한 최초의 김일성노선 통일혁명당을 조직했고 1972년도 주체사상 선포와 함께 남한, 조총련 해외단체에 대의원을 선출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구축해왔다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3)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 탈북민
-김정은 독재 정권 종식할 때 진정한 평화통일-
▲북한 민주화위원회 허광일 위원장
제16회 북한자유주간 3일째인 4월 30일 오후 2시(현지시간) 워싱턴 D.C. 헤리티지재단에서 '북한 인권과 안보 위협 사이의 정책 격차 좁히기'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허광일 위원장(북한민주화위원회), 김흥광 대표(NK지식인연대),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의 발표 내용을 아래 요약했다
허광일 위원장
북한민주화위원회는 황장엽 선생이 북한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 운영해 온 탈북자 조직이다. 해마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는 북한자유주간은 17년 전 황장엽 선생을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했던 수잔 솔티 여사가 그 때를 기점으로 매년 해오고 있는 국제적인 행사다. 북한 2,300만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해 온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인권이라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로 인권탄압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2,300만 북한 주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채 노예와 같이 살아왔다. 고난의 행군 때에는 35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당시 350만 아사의 대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 탈북자들은 이를 살인 독재자 김정일에 의한 인위적인 대학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 문제 해결에서 중심은 부득불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에 설 수 밖에 없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통일도 기약할 수 있다.
북핵은 3대 세습 마지막 독재자 김정은의 생존 수단으로 북한 정권의 운명과 직결돼 있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권유린과 독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의 인권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고 착취 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 주민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그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들려는 북한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된 북한 장마당은 북한식 변화의 민감한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장마당을 통해 외부정보가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었고 이는 북한사회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그 결과 장마당을 시시때때로 단속하는데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는 북한의 보편적인 생활로 자리 잡았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한류를 비롯한 외부 정보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지만 정보 확산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북한은 탈북자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과 협박을 가하고 있다.
저와 같은 경우만 해도 북한은 십 여년 전부터 저의 북한 행적을 면밀히 알아보고 저에게 북한 보위부 소속의 고위급이 직접 저희 딸을 내세워서 전화를 해서 북한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은 모략을 다 꾸며왔다.
심지어 이들은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의 동영상을 저에게 보내주면서 다시 북한으로 온다면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도 해왔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통일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종식할 때 이뤄진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종식은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적으로 거론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 대한 세력이 힘을 얻게 될 때 든든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김흥광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흥광 대표
북한은 고도로 폐쇄된 사회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고발도 세계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액션도 그것을 취했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알아야 접근할 수 있는데 피드백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수정하거나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그 악마를 보통 사람과 친구로 만났다. 김정은의 거만성이 지금 매우 높은데 매우 나쁜 신호다.
탈북자들은 10여 년 동안 북한 붕괴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생각이 있다.
1.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핵무기를 어떤 협상이나 보상으로 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을 붕괴시키면 핵도 없어진다. 북한이 민주화 되면 핵무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 북한 정권에서 핵무기를 떼어내기 위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권에 관한 것이다.
북한과 협상을 할 때, 정치범 수용소를 해체하라거나 이동의 자유, 해외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게 하라고 하면 북한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비핵화와 장거리 미사일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2. 북한 내부로 외부 정보를 강물처럼 흘려 보내야 한다. 미 국무부와 많은 북한 단체를 통해서 북한에 들여보낸 많은 정보들이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동력으로 작용했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사회에 크게 3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는 속삭이는 사회다. 그리고 거기서 더 깨어나서 통하는 사회처럼 대 놓고 소통하는 사회가 두번째 단계다. 그리고 마지막은 행동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된다.
북한자유주간 대표단 가운데 다양한 시대별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의식이 다르다. 북한에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현 주소는 웅성거리는 사회로 진입했고 공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제는 행동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 방안이나 21세기 히틀러가 될 수 있는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탈북자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친다는 말이 있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많은 보고서는 탈북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현재 인권 상황 가운데 행동하는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북한에 인터넷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시도와 기술적 대안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있는 각급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탈북자들이 60명이 넘어서지만 북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정보를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북한에 다양한 풀뿌리 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 조직, 사회 조직, 군사 조직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런 활동을 위한 후원도 필요하다.
▲김성민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성민 대표
한국 현지시간 새벽 3시 15분이면 만조를 통해서 물풍선을 보내고 있다. 페트병에 쌀을 담아서 보내는 것도 있는데 새벽 만조 때 이뤄지는 것은 김정일 김정은의 왜곡된 영상과 함께 쌀과 약재, 성경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현장에서 보신 분들이 많겠지만 물 흐름을 따라서 김정은 머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정말 장관이다. 이것이 탈북자들의 힘일 수 있다. 북한이 남쪽에서부터 이상한 물건이 떠내려오면 간첩물자라고 생각하고 총으로 쏜다. 그런데 김정은 사진이 있는 풍선 때문에 이 물자를 쏘지 못한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보여드린 것처럼 페트병, 아이스박스, 김일성 머리 풍선, 대북전단, 제가 하는 대북 라디오, 최정훈 사령관이 하는 USB. 이런 모든 대북 정보 유입사업들을 누가 할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할 뿐 대부분 탈북자들이 하고 있다. 그 많은 정보유입을 탈북자들이 해 왔고 할 것이다.
첨단기기들이 북한에 들어오면 북한 당국은 그 물건에 대해 '남조선 괴리놈들 꾀임에 빠진다'면서 SD카드 구멍을 폐쇄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정보 유입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 탈북자들은 그 때마다 새롭게 테크놀로지를 개발해서 그 장벽을 뚫고 있다. 마치 북한이 모든 철의 장벽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뚫는다' 하고 들어가고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북핵 문제와 결부돼 있다.
김정은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데 이는 기만전선에 전 세계를 빠뜨리는 것이다. 이 북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미국을 겨냥한 전술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핵을 이용한 북한의 대미 전략은 첫째는 체제 안전보장이며 둘째는 대북제재 해제이다. 미군이 철수하고 적화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북핵을 포기 않을 것인데 그동안 김정은은 북핵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언어전술로 미국을 기만해 왔다.
핵포기를 전제로 한 빅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가 북한과 직접 전화통화를 해서 카카오톡이나 USB로 받은 자료이다. 여기 오신 단체장들이 다 수고해서 얻은 정보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보 부서나 국방부는 가질 생각을 안 한다. 작년부터 차곡차곡 모은 자료인데 이것을 해리티지재단에 기증하려 한다. 이 같은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인신매매, 가짜 달러, 가짜 화폐, 마약, 납치, 국군포로, 정치범수용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제일 손쉬운 것은 인권 문제 아니겠는가. 아킬레스건이다. 꾸준히 제기하면 되는데 유감스럽게 미국이나 한국 정상이 김정은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인권 문제 제기는 탈북자 입장에서는 매우 긴박한 문제이다. 김정은이 북핵만 포기하면 체제도 인정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한다. 인권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최근에 온 탈북자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 100명 중 90명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재미있으니까 봤다고 했다. 북한은 오직 당에 충성하는 관계로만 사람들을 만나니 재미가 없다. 사랑도 통제돼 있다. 그런데 한국의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자랑하려고 세트장에서 찍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탈북자들이 하는 대북 정보 유입 사업은 기존 북한 주민들의 학습 효과를 깨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자유를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북한자유주간의 주제는 '탈북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다.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자금이 필요하다. 탈북자들이 이런 일에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
-북한 이탈 주민(탈북민)의 규모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누계 607명이었다. 또한 1993년까지 누계 641명이었으나 1994년부터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누계 1,405명이었고, 2017년에는 누계가 31,340명이나 되면서 마침내 북한이탈주민들이 30,000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탈북민 여성의 입국비율은 1989년 이전에는 7%에 불과하였으나, 1997년 35%, 2000년 42% 등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비율을 넘어섰음.
[남녀 징병제 때문에 젊은 여성들의 탈북민 많음]
-남과 북은 단일 민족이면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주체사상, 선군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속해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본래 인민회의정부 제1공화국 정부가 될 때 남북은 의회연합으로 통일국가가 가능합니다
남한으로 탈북민이 많을수록 남북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 이후 북한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 철문 안 쪽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원들에 의해 영사관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어린-당시 생후 2년 4개월이었다- 김한미 양의 모습은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 방영됐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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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20일 오후 황장엽과 김덕홍, 서울 도착 모습
41세 북한 농민이 남한 비무장지대 국경 철조망으로 넘어 1996년 7월 24일 남한으로 망영한 박철호(朴哲浩), "북한에 너무 배고파." 남한으로 도망 왔다고.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남북한 기술적으로 전쟁 중인 비무장지대 귀순자의 전화기(사진)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북한 특권층이나 상류층 입장보다는 북한 평민층 입장을 존중해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을 청산하고 평민층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수평적 권력교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달픈 북한 서민(평민)들은 지금 무엇을 원할까 핵무기도 아닌 빵(개인의 생존권 衣食住)입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自由社會(民主化 社會)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세계 조류에 역행하는 부정부패 친족주의[국가사회주의, 침략 군국주의 노선] 1인 장기집권 독재자의 좌익 파시즘이나 우익 파시즘 정권일때는 民官軍(민관군) 주도의 연합정부론 군사혁명[유엔 안보리(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전쟁]도 인정하는 것이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행정부 제1절 1항
행정권은 미합중국(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에 속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며 동일한 임기의 부통령과 함께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선출된다 [수정조항 이전 미국헌법 조항, 대통령의 임기 제한 없음]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 정책)도 국가발전[국가 경제성장과 개인 부(富)의 축적(부유층)]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 구축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존중돼야 하지만 극단적 자유주의 노선 무정부주의나 극단적 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는 국가의 빈곤과 개인의 생존 결핍(가난)만 가져올 수 있다
자유권(인민)과 사회권(생존권, 국민)
a.인민(人民)-국민 개개인 의미(기본권 향유자)-개개인의 국민-기본권 향유자로서의 국민
권리장전 사람을 지칭할때는 인민으로 사용해야 정확하다(루소 사상:회의제 정부론)
기본권 중 자유권 등의 표현(세계 각국 인민의 권리, 자유권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똑 같이 적용됨)
-신체의 자유권:실체적 보장(법률주의)과 절차적 보장(신체자유의 절차법적 보장)- 강제노역의 금지, 연좌법의 금지(친족의 행위로 인한 불이익 처우금지), 고문을 받지 아니할 권리등
-사회,경제적 자유권: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등
-정신적 자유권: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국교부정과 정교분리 원칙),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의 자유(대학 자율성 보장)등
-행복추구권과 생명권, 기본권의 초국가성과 포괄성 규정 보장(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일조권, 애정자유권, 스포츠권, 건강권등 보장):축첩(일부다처)제도나 특수신분제도 귀족이나 노예제도등 부정
-인간의 존엄성 보장:집단추방, 대량학살, 고문, 노예제도, 인신매매, 인간생체실험(뇌파로 뇌 세뇌로 각종 정치공작행위이나 테러행위, 무기확보를 위한 인간생체실험 등), 마약, 강제노동등 금지.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 화학적 물리적 생체실험사용 금지, 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행위 금지, 태아의 생명권과 낙태행위금지(사회적 합의에 의한 낙태동의)
b.국민(國民)-인민의 전체(나라 인민 전체 의미,선거권 향유자나 국가기관 대표자)-주권자로서의 국민--이념적 통일체로서 국민.
대한민국이나 중화민국, 미합중국 사람을 지칭할때는 국민로서 사용해야 한다(로크 사상: 국민 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출)
기본권 중 사회권(생존권)이나 선거권 등의 표현(자국민, 사회권은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에 따라 차등 사회보장 정책 추진)
-인간다움 생활을 할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의무교육과 평생교육)
-근로의 권리(실업자 해소)
-근로자의 근로 삼권
-쾌적한 주거생활의 보호
-최저 임금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환경권 및 주거생활에 관한 권리
-혼인과 가족생활에서의 양성평등과 보건, 모성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결혼, 여성보호, 아동보호)
-상이군경 및 전몰군경 및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에 대한 우선 취업권 부여
-노인복지와 국가보호
-장애인 보호
-생활무능력자의 권리를 보장(생활보호법이나 의료보호법)
-군 복무 예비역 군인에 대한 복지(경력이나 국가보호)
c.권리(權利)--인민 법률상 투쟁의 힘[국가나 힘(세력)이 있는 제3자에 대한 투쟁의 힘--자유권이나 생존권 등]
d.의무(義務)--인민 법률상 구속의 힘[국가에 구속--노동.국방과 납세의 의무 등]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의 대통령 임기 제한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종신 대통령직에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가 3번씩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2번의 임기만을 수행하였고,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아 있다. 이 고별사에서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민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에 대해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했다.
임기를 마친 그는 미련없이 자신의 사저가 있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친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깨고, 수정헌법 22조에 3선 출마금지, 타인의 임기로 2년 이상 대통령직에 봉직한 사람은 2번 이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할 때까지 철칙처럼 지켜온 절제의 미덕이었다.(임기는 4년으로, 최대 8년까지만 가능) 당연히 수정헌법 22조에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은 워싱턴의 전통을 계승, 강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자, 떠날 때에는 떠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이고, 귀족정치를 지지하고 비록 황제처럼 행동하여 정치를 결코 대중화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문
펜실베니아주, 게티스버그
1863년 11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A. Lincoln)이 남북전쟁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최대의 전화(戰禍)를 입은 펜실베니아주의 게티스버그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행한 연설. 그 연설 가운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또한 민주정치의 실천 이념이 되고 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 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일부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 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 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 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공화국은 링컨의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 民治, 民享之民主共和國"이다
-1958년 제헌된 프랑스 5 공화국의 프랑스 헌법에서는 프랑스 공화국을 "gouvernement du peuple, par le peuple et pour le peuple" [인민의(백성의), 인민에 의한(백성에 의한), 인민을 위한(백성을 위한) 정부]로 규정하며, 이는 정확히 링컨의 말에 대한 번역이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공화국이란 공화제(共和制)를 실시하는 국가이며,민주공화국은 국가의 주권이 다수의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가를 통치한다. 민주공화국의 효시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그 후 1789년의 프랑스혁명, 1793년과 1848년의 프랑스헌법 등으로 이어진다. 권력구조의 집권(集權) 또는 분권(分權)에 의해서 단일공화국과 연방공화국으로 구분되며, 권력분립의 형태에 의해서 대통령제ㆍ의원내각제 국가 등으로 구분된다. 민주공화국은 권력의 기초로서 국민주권의 원리,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 권력 구조면에서 권력분립주의,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한 정치 과정의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대한민국은 헌법 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세계 각국 민주공화국은 링컨의 노예제도 폐지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민주정부)에서 비롯돼 오고 있다
민주정부는 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어느 나라에서도 다 실시하고 있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 民治, 民享之民主共和國'
민주공화국 헌법(자본주의민주주의 헌법)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사회주의 헌법)을 구분해야 한다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democratic republic)은 엄격한 의미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제를 모두 다 실시하고 있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권위와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정부는 국민에게 선출된 공무원이 운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를 민주 공화국이라고 표방한 국가는 거의 자유 선거나 공정 선거를 치루지 않았다. 동독으로 알려진 독일민주공화국과 북베트남으로 알려진 베트남 민주 공화국 두 공산주의 국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또 다른 국가인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11년 프리덤 하우스의 조사에서 6.0(1.0은 완전히 자유로운 국가, 7.0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자유롭지 못한" 국가에 속한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재자가 통치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민주공화국 중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는 민주정부이며 사회주의 국가는 일당독재국가나 일인 독재국가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 노예해방선언문
1862년 9월 22일을 기하여 미합중국 대통령 링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Abraham Lincoln delivers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to his Cabinet현재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주의 일부의 예속 상태인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군 및 해군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지하고 지켜줄 것이고, 그들을 다시 억압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앞서 말한 1월 1일에 여전히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들과 주의 일부 지역을 선포에 의해 (반란주로) 지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주 또는 주민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이 투표하여 선출한 대의원들을 성의를 가지고 미국 의회에 파견하고 있다면 이를 뒤엎을 만한 다른 증언이 없는 한, 그 주와 주민은 미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통령인 나,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정부의 권위에 대한 실제 무장 반란시에 미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그리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합하고 필요한 조치로서, 1863년 1월 1일부터 그 이후 100일 동안, 미국에 대항해 반란 상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주와 주의 일부 지역을 반란주로 지명하는 바이다.
아칸사스, 텍사스, 루이지애나(세인트 버나드, Palquemines, 제퍼슨, 세인트 존, 세인트 찰스, 세인트 제임스, Ascension, Assumption, 테레본, Lafourche, 세인트 매리, 세인트 마틴, 그리고 올리언즈 지역은 제외하고 뉴올리언즈는 포함함), 미시시피, 알라바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우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버지니아(웨스트 버지니아로 지정된 45개 카운티와 버클리, 마코맥, 엘리자베스 시티, 요크, Princess Anne, 그리고 노퍽을 제외하고 노퍽 및 포츠머스의 도시들은 포함함), 그리고 제외된 지역은 현재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있는 상태이다.
상기 권한과 언급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상의 반란주로 지정된 주와 주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육군과 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앞서 언급한 자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다. 나는 자유가 선언된 상기의 노예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폭력 행위를 삼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경우에 적합한 임금을 벌기 위하여 충실히 노동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그리고 본인은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국 군대에 입대하여 요새, 진지 및 기타부서에 배치되고, 모든 종류의 선박에도 배치될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그리고 진실로 정의를 위한 행위이며 군사상의 필요에 의하여 헌법에 의해 보증된 이 선언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인류의 신중한 판단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Whereas on the 22nd day of September, A.D. 1862, a proclamation was issued by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containing, among other things, the following, to wit:
"That on the 1st day of January, A.D. 1863, all persons held as slaves within any State or designated part of a State the people whereof shall then be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shall be then, thenceforward, and forever free; and the executiv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including the military and naval authority thereof, will recognize and maintain the freedom of such persons and will do no act or acts to repress such persons, or any of them, in any efforts they may make for their actual freedom.
"That the executive will on the 1st day of January aforesaid, by proclamation, designate the States and parts of States, if any, in which the people thereof, respectively, shall then be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and the fact that any State or the people thereof shall on that day be in good faith represented in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by members chosen thereto at elections wherein a majority of the qualified voters of such States shall have participated shall, in the absence of strong countervailing testimony, be deemed conclusive evidence that such State and the people thereof are not then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Now, therefore, I, Abraham Lincol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by virtue of the power in me vested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of the United States in time of actual armed rebellion against the authority and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as a fit and necessary war measure for supressing said rebellion, do, on this 1st day of January, A.D. 1863, and in accordance with my purpose so to do, publicly proclaimed for the full period of one hundred days from the first day above mentioned, order and designate as the States and parts of States wherein the people thereof, respectively, are this day in rebellion against the United States the following, to wit:
Arkansas, Texas, Louisiana (except the parishes of St. Bernard, Palquemines, Jefferson, St. John, St. Charles, St. James, Ascension, Assumption, Terrebone, Lafourche, St. Mary, St. Martin, and Orleans, including the city of New Orleans), Mississippi, Alabama, Florida, Georgia, South Carolina, North Carolina, and Virginia (except the forty-eight counties designated as West Virginia, and also the counties of Berkeley, Accomac, Morthhampton, Elizabeth City, York, Princess Anne, and Norfolk, including the cities of Norfolk and Portsmouth), and which excepted parts are for the present left precisely as if this proclamation were not issued.
And by virtue of the power and for the purpose aforesaid, I do order and declare that all persons held as slaves within said designated States and parts of States are, and henceforward shall be, free; and that the Executiv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including the military and naval authorities thereof, will recognize and maintain the freedom of said persons.
And I hereby enjoin upon the people so declared to be free to abstain from all violence, unless in necessary self-defence; and I recommend to them that, in all case when allowed, they labor faithfully for reasonable wages.
And I further declare and make known that such persons of suitable condition will be received into the armed service of the United States to garrison forts, positions, stations, and other places, and to man vessels of all sorts in said service.
And upon this act, sincerely believed to be an act of justice, warranted by the Constitution upon military necessity, I invoke the considerate judgment of mankind and the gracious favor of Almighty God.]
미합중국 수정 제13조(노예제도 폐지)
*이 수정조항은 1865년 1월 31일에 발의되어 1865년 12월 6일에 비준됨
제1절 노예 또는 강제노역은 당사자가 정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면 미합중국 또는 그 관할 속하는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제2절 연방의회는 적당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미합중국 수정 제14조(공민권)
*이 수정조항은 1866년 6월 13일에 발의되어 1868년 7월 9일에 비준됨
제1절 미합중국에서 출생하고 또는 귀환하고 미합중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미합중국 및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
어떠한 주도 미합중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다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사람으로부터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그 관할권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제2절 하원의원은 각주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주에 할당한다
각 주의 인구수는 과세되지 아니하는 인디언을 제외한 각주의 총인구수이다
다만, 미합중국 대통령 및 부통령의 선거인, 연방의회의 하원의원, 각주의 행정관, 사법관 또는 각 주의회의원을 선출하는 어떠한 선거에서도 반한이나 그 밖의 범죄에 가담한 경우를 제외하고 21세에 달하고 미합중국 시민인 당해 주의 남성 주민 중의 어느 누구에게 투표권이 거부되거나 어떠한 방법으로 제한되어 있을 때에는 그 주의 하원의원 할당 수의 기준은 그러한 남성주민의 수가 그 주의 21세에 달한 남성주인의 총수에 대하여 가지는 비율에 따라 감소된다
제3절 과거에 연방의회, 의원, 미합중국 관리, 각 의회의원 또는 각주의 행정관이나 사법관으로서 미합중국 헌법을 수호할 것을 선서하고 후에 이에 대한 폭동이나
반란에 가담하거나 또는 그 적에게 원조를 제공한 자는 누구라도 연방의회의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 대통령 및 부통령의 선거인, 미합중국이나 각 주 밑에서의 문무의 관직에 취임할 수 없다 다만, 연방의회는 각원(각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 투표로써 그 실격(失格)을 해제할 수 있다
제4절 폭동이나 반란을 진압할때의 공헌에 대한 은급 및 하사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기책(起債)한 부채를 포함하여 법률로 인정한 국채의 법적효력은 이를 문제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미합중국 또는 주는 미합중국에 대한 폭동이나 반란을 원조하기 위하여 기채한 부채에 대하여 또는 노예의 상실이나 해방으로 인한 청구에 대하여서는 채무를 부담하거나 지불하지 아니한다
모든 이러한 부채, 채무 및 청구는 위법이고 무효이다
제5절 연방의회는 적절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미합중국 수정 제15조(흑인의 투표권)
* 이 수정조항은 1869년 2월 26일에 발의되어 1870년 2월 3일에 비준됨
제1절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 피부색 또는 과거의 예속 상태로 해서 미합중국이나 주에 의하여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제2절 연방의회는 적절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의 규정을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노예 해방 선언문 내용은, ①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②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③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전쟁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가지는데, 남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부 여러 주의 연방 조기복귀(早期復歸)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노예해방은 전쟁 뒤 미합중국 수정(修正)헌법 제13∼15조의 성립으로 노예제도 폐지가 확정되었다.
미합중국 헌법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선진국 대통령제나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대부분 대통령과 수상의 임기 3선 금지를 표방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 민주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권력자 부패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나 권력 남용은 대통령이나 수상 임기의 3선 허용에서 비롯돼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나만(대통령이나 수상만)의 애국자가 아닌 많은 애국 정치 지도자가 있습니다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9년도 새해부터 EAIC Staff들은 "From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to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원칙으로 생활화해야 하며 20년이상 경력자는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로 생활해도 됩니다.
EAIC Headquarters는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입니다.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는 이상주의자나 거짓말이 될 수 있으며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은 현실주의자나 정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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