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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협화회와 만주지역 독립운동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만주국 협화회와 만주지역 독립운동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18. 23:22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377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97.8%

일본인 590,760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0.3%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는 만주국에서 결성되었던 주민 조직이다. 만주제국협화회, 만주협화회, 또는 줄여서 협화회로도 불린다

1. 결성 및 성격

만주사변 후 결성된 자치지도부가 연원이다. 1932725일에 만주국 국무원 회의실에서 결성식을 갖고 출범하였다. 만주국 전역의 전 주민을 통솔하는 전인종적 기구였다. 만주국협화회라는 명칭은 일본의 협화회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만주의 유일한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 실천단체로서,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 단체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건국정신의 현양

2.민족협화의 실현

3.국민생활 향상

4.선덕달정(宣德達情)의 철저

5.국민동원 완성

만주국협화회는 만주국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정치 조직체였으나, 정당은 아니었다.

 

2.조직

본부기구는 만주국 황제인 푸이가 명예회장을 맡았고, 관동군 사령관이 명예고문을, 만주국 총리가 회장을 맡는 등 관제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했다. 본부이사 가운데 조선인으로는 관동군 장교인 윤상필이 포함되었다. 이밖에 최남선, 이범익, 이선근 등이 이 단체에 깊이 관여했으며, 박팔양도 중앙본부에서 재직하였다.

만주국협화회는 정부 조직에 대응하도록 중앙기구와 지방조직을 갖추었다. 의결기관인 지역 별로 연합협의회가 설치되었고, 최고 의결기관은 중앙연합협의회로서 국회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3.활동

만주국협화회는 밀정 조직인 간도협조회를 흡수하여 항일 세력에 대한 귀순 공작 및 밀정 활동을 관장했다. 또한, 보갑제를 실시하여 전체 주민을 조직으로 묶어서, 치안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웠다. 이로 인해 가족이나 이웃 사이에 고발이 횡행하게 되었다.

 

집단부락 건설도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오지의 작은 마을이나 단독 가옥을 철거시키고 주민들은 평야 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감시가 용이한 집단부락으로 재편성하는 사업이었다.

 

만주국협화회의 성립과 활동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항일 활동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33)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323, 법률상 1941413), 이탈리아(19371129), 스페인(1937122), 독일(1938512), 헝가리 (193919)에 승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61), 프랑스(1940712), 루마니아(1940121), 불가리아(1941510), 핀란드(1941718), 덴마크(19418),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82)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1130), 태국(194185),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블록[동아시아 지역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를 타파하고 아시아 제민족의 해방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주장함]"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다이토아쿄에이켄,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은 쇼와 시대 일본 제국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고안, 점령지의 아시아인들에게 동아시아보다 더 큰 영역에서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경제적 통합이라고 선전된 개념이다. 이는 또한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블록"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의 1940629일의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에서 선언되었다.


1.개념

                                                            만주국이 일본인과 한족, 만주족의 우호 관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

"대동아공영권"의 용어 자체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던 분석 철학자 기요시 미키(三木 清)가 제창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가 19381222일 동북아시아에 한정해 제창한 동아신질서(일본어: 東亜新秩序 도아신치츠죠)라는 지리적으로 더 좁은 범위에 대한 개념이 영향을 주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40년에 일본, 만주국,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대동아를 건설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기획했으며, 선전에 따르면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 번영과 평화, 자유를 누릴 아시아 국가들의 "공영"을 찾기 위해 새 국제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팽창을 위한 군사적 목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고립과 인도양에서의 군사 작전을 포함했다.[5] 대동아공영권은 팔굉일우의 원칙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난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슬로건과 개념 중 하나였고, 오늘날 "대동아공영권"은 대체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괴뢰 정부를 내세워 지역의 주민들과 경제를 조종한 뒤 이를 제국에 이용하면서 내세웠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2.역사

일본에 의해 통합된 아시아의 개념은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의 외무대신직을 지낸 군 사상가인 아리타 하치로 장군에게서 비롯된 일본 육군의 개념을 기반에 두었다. 육군은 그들의 새로운 일본 제국은 먼로주의, 특히 루스벨트 계론을 아시아에 대응시킨 것이라 주장했다. 아시아의 지역들은 일본에게 미국에게 있어서의 라틴 아메리카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194081일의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의 개념을 밝혔으나, 개념 자체는 오랜 기간 동안 다른 형태로도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도계층은 오랫동안 이 개념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압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없어진 유럽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것을 "아시아인들의 아시아"라는 명목으로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에게 주었다. 전쟁 이전 서구의 식민통치를 당하며 많은 주민들이 일본에 동감하던 대동아공영권 내부의 다른 국가들(인도네시아 등)은 전쟁 초기에 점령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의 나머지는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만주국 등) 중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일본을 제외한 회원국들끼리의 협력이나 권한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대동아공영권의 설립을 전쟁 초반에 큰 어려움 없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의 선전은 "아시아인들의 아시아" 선전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지의 내용을 담았다. 1937년부터 지속된 중일 전쟁에서의 실패의 이유는 1941년부터,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영국과 미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이용한 것 때문으로 돌려졌다. 몇몇 경우에는 일본군이 침략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 정부들과 군대를 몰아냈을 때 지역 주민들이 일본군을 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은 특히 중국에서 많이 드러난 일본군의 잠재적 지역 이용 행태와 잔인함이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아시아의 제국주의자들이 서구 자본주의자들보다 더욱 심하다고 여기게 했다. 일본 정부는 지역 경제가 일본의 전쟁 물자의 원료 생산을 위해 강력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한 내각 인사는 "규제는 없다. 그것들은 적의 소유물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빼앗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정부 고위층의 열람을 목적으로 1943년에 완성된 기밀문서인 야마토 민족을 중핵으로 하는 세계정책의 검토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의 창시자이자 지역 내의 최대 군사 강국인 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국가들을 보호하에 두고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우위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동아공영권과 연합국과의 전쟁 이면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 시장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인가를 받던 중국 시장에 대해 일본만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다. 이 시장들의 잠재적 부의 풍부함을 인식한 미국은 일본이 중국으로의 수출에 있어서 우위를 갖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본 제국은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처음에는 중국을 침략하고 나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 따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성공한다면 지도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통합할 것이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과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3.대동아회의

1943115일 대동아회의에 참가한 각국 수뇌부들.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 촬영) 왼쪽으로부터 바 마우, 장징후이,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쿤, 호세 라우렐, 수바스 찬드라 보스.


대동아회의(大東亜会議)1943115-6,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구성국들의 국가원수들을 초대했다. 이 회의는 '도쿄 회의'라고도 불린다. 대표자들이 회의 동안 사용한 언어는 영어였다.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졌지만, 일본의 범아시아주의 이상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자"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내포했다.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다: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

장징후이 만주국 총리

왕징웨이 난징 국민정부 국가 주석

바 마우(Ba Maw) 버마국 총리

수바스 찬드라 보스 자유 인도 임시 정부 국가 주석

호세 라우렐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완 와이타야쿤(Wan Waithayakon) 태국 왕자

 

도조 히데키는 서구의 "물질 문명"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정신적 본질"을 찬양하는 연설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의 회의는 주로 독자 노선의 추구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고, 경제적 개발과 협력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논의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연합국들에 대항한 정치, 경제적 협력 관계를 선전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4.구성국

구성국들은 일본의 점령지 면적이 최대에 이르렀을 당시 공식적으로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다.

일본 제국과 조선등 총독부들

만주국 19458

몽강연합자치정부 (내몽골) 19458

왕징웨이 정권 1945810

버마국 1943811945327

필리핀 제2공화국: 194310141945817

베트남 제국 194310141945823

캄푸치아 왕국 1945391945415

라오스 왕국 194419458

자유 인도 임시 정부 194310211945818

타이 왕국 19411221

(1)일본 직할 지역

타이완 총독부

홍콩, 필리핀, (포르투갈으로부터 구매할) 마카오, 파라셀 제도, (중국 괴뢰정부로부터 구매할) 하이난 성. 이름과는 달리, 타이완 섬을 포함할 계획은 아니었다.

남양청

, 나우루, 바나바 섬, 길버트 제도, 웨이크 섬.

멜라네시아 총독부 또는 남태평양 총독부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산타크루즈 제도, 투발루, 피지, 바누아투, 누벨칼레도니.

동태평양 총독부

하와이, 하울랜드 섬, 베이커 섬, 피닉스 제도, 레인 제도, 마르키즈 제도, 투아모투 제도, 소시에테 제도, 쿡 제도, 오스트랄 제도, 사모아 제도, 통가. 만주국을 모델로 해서 옛 하와이 왕국을 재건하는 것도 검토되었다. 가라후토 청을 모델로 한 하와이의 순조로운 편입은 1920년 기준 하와이 인구의 약 43%(16만 명)를 차지하는 지역 일본인 공동체의 영향력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와이는 식량 공급을 자급자족할 것이었고, 설탕과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하와이의 5대 사탕수수 기업은 해체될 예정이었다. 하와이가 일본에 합병될지, 꼭두각시 왕정이 설립될지,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가 될지에 대한 논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독부

테즈메이니아를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전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일본 이주민을 2백만 명까지 수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분리되어, 미얀마, 필리핀과 같이 식민지가 아닌 위성국으로써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상호 평화를 추구했다는 증거도 있다.

실론 총독부

고아 주와 벵골 만을 잇는 선 이남의 인도 해안 전체.알래스카 총독부

알래스카주, 유콘 준주, 노스웨스트 준주 서부, 앨버타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워싱턴주.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준 자치적인 위성국으로 만들 계획들도 있었다. 이 계획은 심각하게 고려되지는 않았다; 추축국의 전 세계적 승리에 달려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총독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서부) 지역, 에콰도르,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바하마. 또한 만약 멕시코, 페루, 칠레가 일본과의 전쟁에 합류한다면, 이 국가들의 상당 부분이 일본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멕시코의 1942522, 페루의 1944212, 칠레의 (나치 독일이 거의 전쟁에서 패배할 무렵인) 1945511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서반구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세 환태평양 국가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일본과 적대 관계에 들도록 했다. 일본의 손에 들어갈 트리니다드 섬, 가이아나, 수리남, 리워드 제도의 영국과 프랑스 소유지들의 미래는 승리한 추축국 나치 독일과의 협상에 놓일 것이었다.

 

(2)아시아의 괴뢰국들

만주국

만주 지역.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 서쪽의 외몽골.중화민국

일본에게 점령된 중국의 다른 지역들.동인도 왕국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크리스마스 섬,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포르투갈로부터 구매할) 동티모르.버마국

미얀마, 인도 아삼 주, 벵갈의 대부분.타이 왕국

말레이 반도, 미얀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까지 확장될 전전의 태국. 처음에는 계획에 들어가지 않았다.말라야 왕국

말레이 반도의 나머지.캄보디아 왕국

캄보디아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일부.안남 왕국

안남, 라오스, 통킹.

 

5.실패

대동아공영권은 19458월 일본의 항복으로 붕괴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반서구 감정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대동아공영권은 절대 아시아의 통합을 실현하지 못했다. 버마국 국가 주석 바 마우는 일본군을 비판했다:

"그 군국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일본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고, 심지어 그들은 그들이 다루는 다른 이들 모두가 그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을 할 때 일본식의 방법밖에 없었다; 오직 하나의 목표와 관점, 일본의 관점 말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단 하나의 운명은 많은 수의 만주국과 한국을 영원히 일본에 종속되도록 한다. 이런 인종적 부담은...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우리 지역의 사람들 사이에 실제적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 대동아공영권은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자체적 관점을 위해 작동했고, 따라서 일본인들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지원을 끌어모으는 데 실패했다. 그 기간 동안 이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났고, 이 민족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일본에 협력했다. 하지만 오하이오 대학교의 명예 정치학 교수 윌러드 엘즈브리(Willard Elsbree)는 일본 정부와 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양측의 관점 통합을 절대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슬픔의 압도는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다른 참가국들의 목표와 관점 이해에 실패한 것은 정신적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일본에 얽매인 국가들의 약한 협력의 상황을 만들었다. 바 마우는 일본인들이 "아시아인들의 아시아"의 목표에 맞게 행동했다면 일본은 매우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일본이 전쟁 시작 때 그 격언을 선언하고 그대로 그에 맞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어떤 군사적 패배도 일본에 대한 아시아 거의 대부분의 신뢰와 고마움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은 아시아가 그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전후 세계에서의 새롭고, 위대하며, 변치 않을 위치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1)계획된 영토 범위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를 나타내는 지도가 그려진 일본의 10센 우표. 1942년부터 1947년까지 사용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확대되기 이전, 일본의 기획자들은 일본의 러시아(남사할린과 관동주), 독일(남양 군도), 중국(만주국)과의 이전 전쟁에서 얻은 정복지와 한국, 타이완, 최근에 얻은 중국의 일부, 점령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보유하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2)토지 분할 계획

대동아공영권의 지리적 차원에서의 상당히 자세한 기획은 194112월 일본 육군성의 연구 기관에서 준비한 전시 문서에 상술되었다. "대동아공영권에서의 토지처분안"(大東亜共栄圏における土地処分案)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일본의 육군대신(이후 총리) 도조 히데키의 명령과 인가를 얻어 정리되었다. 문서는 일본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이미 설립된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왕징웨이 정권이 계속 기능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당시 일본의 영향권 밖의 동아시아의 거의 전체, 태평양, 심지어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제도 동부만큼 일본에서 먼 서반구의 상당 지역에 해당하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구상했다.

 

대동아공영권의 계획된 범위에 대한 야망은 지극히 높았으나, "대동아전쟁" 동안의 일본의 목표는 계획대로의 영역을 단번에 전부 얻는 것이 아니라, 20년 후쯤 다가올 필리핀을 잃은 미국 등의 패배한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식민지를 정복하는 것을 통한 결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20] 도조가 귀족원에서 계획을 밝혔을 때, 그는 장기적인 전망은 모호하지만, 홍콩 같은 중요 지역에의 일본의 통치를 유지할 것이면서도 필리핀과 미얀마는 독립을 허락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독일 제국으로부터 얻어 Class C 위임통치를 맡은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등의 적도 이북의 제도들 등은 이 계획에 맞지 않았다. 그것들은 독일과의 이전 협상에서의 의제였고, 경제적, 금전적 보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에 할양될 예정이었다.

 

계획은 일본의 미래 제국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첫 번째 지역들은 일본의 일부가 되거나 직접적 통치하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는 대동아의 동맹의 "공식적" 회원국으로 지명될, 만주국을 모델로 한 친일 괴뢰국들에 의해 강력히 통제될 지역들이었다.

 

계획의 일부는 나치 독일과의 성공적 협상과 추축국의 전 세계적인 승리에 달려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한 이후인 19411211, 일본은 군사적 협상에서 독일인들에게 동경 70도선으로 아시아 대륙의 한계를 정하는 안을 제출했다. 수직의 이 선은 북쪽으로는 오비 강의 북극 강어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호스트 주 동부와 인도의 라지코트 서부의 인도양에 이르며, 독일의 레벤스라움과 이탈리아의 스파치오 비탈레(필수권) 지역을 서쪽에 두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등의 지역을 동쪽에 둘 것이었다. 하지만 추축국은 지구 반대편에서 동반구와 서반구를 나눌 제2의 경계선에 대해 협상하지 못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러시아어: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만츠주르스카야 스트라테기체스카야 나스투파텔나야 오페라치야[*]) 또는 줄여서 만주 전역(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Маньчжурию), 다른 명칭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은 194589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인 몽강국(내몽골 지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8(모스크바 표준시로 59043)에서 3개월이 지난 89일에 이루어졌다. 8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이 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1983년 미국의 군사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국이 86일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8일 오후 5(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이 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의 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가까운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군인 1천만 명을 포함해 약 3천만 명 이상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2) 소련군의 공격 준비

대일전 시작 전 극동 지역에는 종래에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satern Front)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단(Primorsky Group of Forces)이 있었다.

 

스탈린은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만주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연해주군단을 개편한 제1극동전선군, 만주북부 전선을 담당할 종래의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제2극동전선군과 만주서부 전선을 담당할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설치한다. 극동군 총사령관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각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2극동전선군에는 종래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5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전개

소련군은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의 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란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은 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은 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9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8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도 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4]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23일 진주, 9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3.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89~15)의 짧은 기간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8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Soviet marines or infantry are loading on a ship[쿠릴 열도 상륙 작전]


    

제2전선 구축을 위해서 미영정부의 원조로 창설한1944년 소련령의 붉은군대(소련군) 동북항일연군(88독립 저격여단)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943년의 金日成(김일성) 첫 공개된 金日成(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사진. 이 사진은 지난 1943년 초여름, 하바로프스크부근 브야츠크촌에 있는 88여단본부앞에서 여단장 周保中(주보중)중좌와 조선인 대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 88여단은 42년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 중국, 조선인등으로 구성, 對日戰(대일전)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당국은 지금까지  金日成(김일성)이 88여단에 소속됐던 사실을 부인해 왔다. 앞줄  한가운데가 周保中(주보중), 그 오른쪽이 金日成(김일성), 세번째줄 왼쪽부터 徐哲(서철)(前(전)북한검열위원장), 姜健(강건)(前(전)인민군총참모장), 金光俠(김광협)(前(전)북한민족보위상), 네번째줄 왼쪽부터 金一(김일)(前(전)북한제1부수상), 崔勇進(최용진)(前(전)북한제1부수상), 한사람건너 金京錫(김경석)(前(전)북한노동당조직부장)]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프 중장(中將)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228~ 19641025)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생애

(1)생애 초기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2)공산당 입당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가까운 사이가 되고, 고속승진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 시티코프가 즈다노프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41년 겨울부터 약 900일 동안 진행되었던 레닌그라드(페체르부르크) 포위전 때 '식인단속 기동타격대' 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굶주린 시민들이 인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티코프는 식량배급, 방첩 부대, 즉결처형부대 운영, 외부 연결통로 운영 등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

 

(3)소련군정 지도자

소련은 19453월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에서 분리하여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연해주 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을 설치하였다. 1945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보로실로프의 연해주 군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하바로프스크의 종래의 극동전선군은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편하고, 만주서부를 침공할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 등을 설치하며, 3개 전선군을 총지휘할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두었다. 일본전이 끝난 후인 930일에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시티코프는 19454월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와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줄곧 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

 

시티코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19459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시티코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이다.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표면적으로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대장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라, 실제로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위원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군정을 총지휘하였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4)북한 주재 대사

a.북한의 전쟁 준비 동향 보고

한편 남한의 미군정을 빨리 철수시킬 생각으로 38선 이북 북한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라고 하고 정권을 이양했지만 미군은 1949년까지도 남한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있던, 시티코프는 19491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수차에 걸쳐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127)했다.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2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24)에도, 그는 남한군의 초소 공격과 관련해 북한 내무성이 상세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를 25일 발간할 예정임을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이러한 무력도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도착에 즈음해 발생하고 있음과 미군의 한국철수를 늦추기 위한 책략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827, 그는 8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시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15일자 보고서에서,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시티코프에 하달하였다.(924)

 

b.소련의 한국전쟁 승인 중개

시티코프는 19501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 1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6)의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국 승인(19501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320, 김일성은 시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5)소련으로 소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시티코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보인다. 그는 196410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한 증세가 아니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 의사도 없고,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사인이다. 김일성은 그가 사망했을 때 조전(弔電)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2.스티코프 일기

그가 기록한 "시티코프 일기"가 구소련 붕괴 후에 발굴되었는데,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공작에 대한 주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게 재 일 : 1995050910(40)

45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 북한주재 초대 소련 특명전권대사(48~51)를 지냈다.

북한에서의 경력에서 보듯 북한정치문제를 담당하면서 북한정권수립(48)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권수립이후에는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사실상 북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남로당 등 남쪽 좌익까지 떡 주무르듯 했고 북한의 모든 것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1,2美蘇공동위원회(463~5,475~8)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오기전 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39년 소련. 핀란드전쟁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44년 카렐스키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노련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 경력도 화려하다. 64년 휴가차 레닌그라드에 갔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게 재 일 : 1995050910(40)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 비망록은 북한정권 수립 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중요 사료(史料).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소군정이 북 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런 점에서 북한정치사는 물론 남한정치사의 또 다른 이면적 진실을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비망록은 기존 가설을 문서로 입증해주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해방정국에서 매몰되고 유실된 우리역사를 복원,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스티코프 비망록까지 발굴함으로써 북한정권수립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스티코프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 6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1946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군정이 2백만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월 폭동때는 3백만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 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0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9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의 지시 차원을 넘어 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 이고, 10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9월 총파업은 467월 조선공산당이 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의 구체적인 행동표현이었다.

신 전술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지령에 입각해 46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김남식(金南植.평화연구원)연구위원은조선공산당이 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총파업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4699일 박헌영(朴憲永)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이에 대해 스티코프는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11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10일 소집돼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9일이나 아니면910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대로 총파업은 469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천여명이 일급제 반대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철도종업원 4만명이, 925일에는 출판노조가,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26일과 28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특히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정이파업투쟁 자금으로 2백만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1일 대구에서는 1천 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 됐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위는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10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0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백만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은 폭동이진행중인 1021군정에 대해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이런 사실들은 10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전개에 따라 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게 재 일 : 1995050910(40)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99)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911)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반입할 출판물을 증대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할 것.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46916)

레베데프에게 전화 걸었다.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921)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하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로마넨코. 4만 명의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46926)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 5백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 이 요구가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46928)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 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101)

3백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102)

4610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 했는데, 그를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46107)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빨치산부대들이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461021)

발라사노프와 샵쉰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그들의 정보보고를 청취했다(461022)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할 것.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것(46114)

(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126)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22만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127)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게 재 일 : 1995051109(40)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 팀이 7개월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찾아낸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의 장남 빅토르(61)의 집 차고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성규 모스크바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등 본사자료 발굴 팀은 빅토르를 끈질기게 설득, 비망록을 본사에 기증하게 됐다.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이었다.

자료팀은 아버지의 화려한 삶과는 달리 평범한 노동자로 쓸쓸히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빅토르를 만나 아버지 스티코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버지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위원으로 북한문제에 깊이 개입하셨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셨다는 사실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아버지가 자료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앨범. 문서. 노트. 사진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인 66년 북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자료유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모든 자료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사를 40번이상이나 다녀야 했고 제가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버지는 평소 심장병을 앓았지요. 아버지는 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날도 시내 러-일전쟁 기념비를 촬영하러 가다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같이 있던 당시 운전사 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양을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47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함께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모두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국이 어째서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기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일 뿐입니다. 지면에 공개되면 꼭 보내주십시오.

빅토르 스티코프는 중령까지 군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외무부고문으로 있을 때 퇴역, 열차운전사로 일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부인 잉가 니칼라예브나(61)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페레스트로이카가 몰고온 생활고 때문에 연금으로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 기 위해 열차관리소에서 야간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109(40)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두 달 앞둔 19467월 남북 좌익세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 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해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고, 남에서는 흩어져 있던 좌익세력들을 통합해 구심점을 형성한 후 군정과 본격투쟁에 나서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북로당의 결성은 군정의 후원을 받아 8월 말 순조롭게 완성됐지만, 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로당결성은 예정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좌익 3당 합당을 통해 남로당이 결성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3당 합당이 지연되자 군정 최고지도부와 북로당은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직접 남쪽 정치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발굴한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러한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3당 합당 과정에 군정이 직접 개입했음이 문서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남쪽에서 3당 합당은 박헌영(朴憲永)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46712일 서울로 돌아온 직후 갑작스럽게 여운형(呂運亨)에게 좌익 3당 통합문제를 통보하면서 시작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도 7월말 북쪽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8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이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즉시 합당교섭을 개시하자는 회답을 보내면서 3당 합당이 구체화됐다. 그러나 군사령부.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순조롭게 출발한 합당작업은 잠재돼 있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反轉)됐다.

85일 이정윤(李廷允). 강진(姜進)박헌영간부 6인이 합당을 하기 전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반대파를 제명. 무기 정권시켰다. 이후 당대회 소집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공산당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합당을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영은 9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3당 합당을 추진해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등이 반발하자 3당 합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황한 군정의 움직임도 바빠졌다.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가 910일 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해 남쪽의 3당 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준다. 밀사를 파견해 남쪽의 정세를 파악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티코프는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하여 잠잠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박헌영 반대파들은 9월 총파업 진행 중인 28일 당 대회 준비모임을 갖고 총파업반대와 당대회 소집을 주장했다. 다른 당의 대표들도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박헌영의 독선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비망록은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 고찬보와 여운형의

평양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는 9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진 남로당의 당수로 내정돼 있었다. 스티코프가 여운형에게 북조선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허용하고 북조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을 지시한 것은 여운형이 정치력을 발휘해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을 수습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망록은 신민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합당에 비판적인 백남운을 물러나게 하고 합당에 적극적인 정노식(鄭魯湜)을 신민당 위원장으로, 무소속이며 박헌영 지지자였던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군정과의 교감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107일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합당사업이 수준까지진척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016일 백남운. 강진등 박헌영의 독주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 합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는 혼선을 빚게 된다. 좌익세력의 단결을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이 분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게 재 일 : 1995051109(40)

김두봉(金枓奉.북로당 위원장)을 호출하다.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 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46910)

보로실로프에서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남조선정세에 대해 전화 논의. 아널드(군정장관)가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을 호출해 미군사령부는 남조선 좌익3당의 통합을 현재로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916)

로만넨코 보고. 남조선에서 912일 밀사가 도착했다. 여운형은 아마도 곧 합당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해 잠잠해 졌다. 이강국(李康國.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거처와 관련해 북조선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좌익3당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지도자, 여운형과 백남운이 반대한다면 합당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19)

로마넨코. 오늘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북로당 부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머리. 수염 등을 깎았다. 찬보(高贊輔)는 신민당 중앙위원이자 인민당 중앙위원이다. 그는 3일간의 일정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 그는나는 북조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북조선은 나를 신임하지 않는다. 나는 좌익이다. 미군정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분간 통합을 추진하지 말 것을 제기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헌영이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면 10일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에게 3명의 지도자를 추천했는데 이중 2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내가 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서신들을 접수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서한으로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21)

로마넨코 보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소련군사령부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25)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했다.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익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 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로마넨코 보고. (신원불명)와 중앙위원회 위원 2, 김일성, 김두봉, 영하(朱寧河.북로당부위원장), 장주익, 허가이(許哥而. 북로당 조직부장)등 회의.

인민당과 신민당 두 정당의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지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는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다.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대회를 소집했고, 2백명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심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민당은 대회를 개최해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926)

 

로마넨코 보고.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 조직부장 심운(沈雲)의 연락원이 도착했다.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다수는 백남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 하에 당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는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김두봉은 대회를 무효로 인정할 것과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위원장으로,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102)

이그나치예프 대령(민정부 정치부 차장). 합당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107)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610(40)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 합당은 1016일 박헌영 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 백남운 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 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 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 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1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 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 강진. 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 외에도 사로당을 공식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

 

결국 남로당은 11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고, 사로당은 472월 당 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2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 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 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 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티코프는 12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 관련, 4612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488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 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월북 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4612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 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 합당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 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군정의 의도도 합당 전에 10월 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게 재 일 : 1995051610(40)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대화했다. 강진(姜進.조선공산당 중앙위원)1029일까지 북조선에 머물도록 약속 했다. 로마넨코와 강진의 회담 후에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부위원장)이 강진과 대담할 것이다.(461019)

김일성 보고.

종파주의자들과 강진은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그들은 17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소집,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통합이라는 구실 하에 대회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여운형(呂運亨. 조선인민당 당수)도 대중을 기만 했다. 그는 사회노동당(사로당)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두 조직의 중앙위원회 성원은 모두 종파주의자들과 친미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운형을 비판할 것. 그러나 너무 과격하지 않게.(1021)

김일성의 보고.

김두봉(金枓奉.북로당위원장)이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과 만났다. 과 함께 3명이 북조선에 도착했다. 은 사로당을 정당화하기위해 북조선으로 왔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하지(미군사령 관)가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고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두봉은 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 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은 자신이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로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그에게 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합당을 방해할 목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으로부터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은 박헌영 동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구실로 삼고 있지만, 당에 손실을 입힐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이 지금까지 행동해왔던 것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전에 이미 호출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노동 당과 사회노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1022)

김두봉과 대담하다. 그는 남조선 정세에 대해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고 남조선 반동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1025)

로마넨코,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 수준에서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許憲.남로당 당수)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반대파들은 사로당을 결성했다. 사로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로당이 우익과 합동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익정당의 분개를 사고 있다.

사로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사로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로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성명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1112)

로마넨코, 남조선 노동당대회 총괄보고. 지시를 내리다.

1.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

2.다른 정당들이 파악할 수 없도록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할 것.

3.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헌에게 하달해야한다.

4.박헌영이 수행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선전사업에 대한 방침을 숙고할 것.

5.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

6.급사를 통해 일체의 당대회 자료를 보내도록 지시를 내릴 것.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낼 남조선 3당 합당 사업총결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크라프초프에게 지시를 내리다.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그도 역시 동의했다.(1212)

크라프초프가 전화했다. 사로당 문제로 서울에서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우리의 지시가 대개는 전적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사로당의 붕괴가 계속되고 있다. 당 축소의 지지자는 강진이다.(1217)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게 재 일 : 1995051810(40)

19465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남한에 소련 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 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525일 좌우익 지도자들 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같은 해107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9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북한 정권 수립의 막후 인물인 스티코프 中將(왼쪽)과 니콜라이 레베데프 少將(오른쪽).


                                                               1946년 미소공위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시티코프가 덕수궁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가운데가 스티코프중장


                                                19465, 1차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는 여운형(가운데가 스티코프 중장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51014'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가 개회를 선언하고, 이어 레베데프 소장이 등단하여 소련군이 온 의의와 진의를 설명하고 조선인민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1901~ 1992510)[1]는 소련군 장성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김일성 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N. G. 레베데프는 1901년 러시아 칼루가 주(Калужская область) 지즈드린스키 군(Жиздринский район)의 부다(Буда)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6년까지 부드스크 젬스트보 학교(Будская земская школа)에서 공부했다. 1920년부터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에 복무했다. 1941615일에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42126일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58월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의 대일본전 지도자의 한명으로 북한에 진주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으나 그는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군정을 실제로 총지휘한 사람은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25군의 군사위원으로 평양 현지에서 스티코프 등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는 국내에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여러 정치 공작을 지휘했다. 당시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교습한 박일(朴一)은 레베데프 소장이 최초로 김일성 우상화 공작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1948910일 공식적인 북한 정부 수립 후 소련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김일성은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매년 그를 북한으로 초청하였다 한다.

 

그는 비교적 장수하여 199010월 한-소 국교수립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에게 소련군정 당시의 여러 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 주었고,[7] 이듬해인 1992510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은 소련군정의 북한통치 및 대남공작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 자료이며 구 소련 붕괴 후에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남긴 증언도 많이 있는데, 평양의 소련군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레베데프는 한반도 분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 점령군 사령부 핵심인물이다. 그는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그 내용을 소상하게 일기로 쓴 것이 바로 이 비망록이다.
편자는 이 비망록을 통해 북한 정권창출에 소련이 어느 정도 개입했으며, 그리고 남북협상의 추진 내막과 진행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468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김일성, 박정애이다.


               1947년 김두봉,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이 담소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 끝이 김일성, 가운데서 왼쪽을 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북한 정권 수립후 1948년 말 소련으로 귀환하는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일성이 메달을 달아주는 장면



.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大將)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러시아어: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탸코프, 1900914- 197937)는 소련의 군인으로, 1945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은 소련의 대일전 개시와 함께 194589일 북한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1945815일 일왕이 라디오로 무조건적인 태평양 전쟁 항복선언을 하였다. 8월말까지 소련 제25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고,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은 북한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가 된다. 826일 비행기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평양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다. 그 장소에는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같은 날 밤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역시 철도호텔로 불러 행정권을 이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전군인이라 정치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소련군정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평양에 온 그가 발한 이른 바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맥아더 포고령[5]과 대비되어 오늘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과는 달리 소련은 주민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대중의 지지가 높은 조만식을 제거하고, 각종 정치공작을 통해 자신들이 88 국제여단(88독립 저격여단)에서 교육시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시킨다는 확고한 정책을 강제로 밀고 나갔다.

 

이외에 소련군정 사령관으로서 치스차코프가 한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수도를 함흥과 평양 중 어디로 할지를 결정하라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의 지시를 받고 평양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이 벌인 민간인 약탈, 강간 등의 만행,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한 것, 반탁 데모와 반공 의거를 강제 진압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것 등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는 19473월 소련으로 귀국했고 후임 사령관으로 겐나디 페트로비치 코로트코프(Gennadii Petrovich Korotkov, 1898 1982) 중장이 부임했다.

 

저서로 25군의 전투행로가 있다.

I.M.치스챠코프, 25군의 전투행로,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 조선해방에 있어 소련장성 11인의 회고록(서울: 함성, 1989.05.01)에 수록됨.

소련으로 망명한 전 북한 외무 부상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북한 역사책들의 주장은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88독립 저격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458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정권 이관의 광경: 1945826일 밤 철도 호텔에서 왼편의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오른 편의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받는 모습


19458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가 환영나온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함흥과 평양 중 어디를 수도로 할 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흥에 먼저 들린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북한 수도로 결정한 사람은 치스차코프로 알려져 있다


2극동전선군


                                                                              아무르강을 건너는 제2극동전선군 예하 제2적기군


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8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1일 해산되었다.

1.역사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11, 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101,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2.19458월 구성부대

T2극동전선군은 194589일에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적기군

-제5소총군단

-제15

-제16

-제10항공군

-캄차카 방어군단 제101소총사단

-아무르 군사전단

-북태평양 전단

 

3.참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의 주요 공격군[역할]

-만주 전략공세작전 남사할린 침공

-쿠릴 열도 상륙작전

-슘슈 섬 전투



막심 푸르카예프


                                                                                                                           1940년대의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

막심 알렉세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08.14~1953.01.01)는 소련의 군인이다. 1940년대 전반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의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 당시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을 지휘하였다.



 

푸르카예프는 1915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징집되었고, 1918년 적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부터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Frunze Military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1943425일부터 19458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을 지냈다. 소련이 만주 침공을 단행할 때인 194585일부터 101일까지는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2nd 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을 지휘하였다.[1][2] 전후에는 19471월까지 제2 극동전선군이 개편된 극동군관구(Far Eastern Military District)의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말 또는 9월초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 심사할 때 이오시프 쉬킨 상장과 함께 면접위원이었다. 이후 평양의 소련군정은 제25군이 소속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제1 극동전선군(1st Far Eastern Front)이 개편된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 사령부가 관할하였다.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67~ 19681230)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군 지휘관이었으며,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1.성장과정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간 군사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지만, 메레츠코프는 별 탈 없이 넘겼다.

 

2.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세묜 티모셴코가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19402,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도 소련 국가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더 나아가 총참모장이 되었고, 방위위원회 멤버가 되었다.

 

3.독소전쟁

1941622,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STAVKA)의 구성원이 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그러나 19419NKVD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 12월에 북쪽의 볼크호프(Volkhov)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볼크호브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크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2, 두 전선군은 시니아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2, 메레츠코프는 볼크호브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안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1944년 핀란드 전선. 붉은 색 화살표는 소련군의 진격이고, 검은색은 독일군의 후퇴다


왼쪽 지도에서 붉은 화살표는 소련군의 공격 방향이며, 검정색은 독일군의 후퇴 방향이다. 스웨덴이 나름대로 야무진 군대를 가진 중립국인데다가 독일의 주요한 철광석 공급원인 관계로 독일군은 스웨덴을 거칠수 없었고 핀란드를 관통하여 노르웨이로 철수해야 했다. 붉은 화살표중 위쪽의 것이 메레츠코프이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4.만주 전략공세작전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만주였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메레츠코프는 1 극동전선군을 이끌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만주를 공격했다. 메레츠코프의 부대는 손쉽게 관동군을 격파했다. 이미 1938년 노몬한 사건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일본 관동군을 무참하게 격파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데다가 걸작 T-34/85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일본을 충분히 압도했다.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평양에 입성한 25군 및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를 지휘했다.

 

5.전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12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현재 크렘린 궁에 묻혀 있다.

 

메레츠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소련 국가 영웅 호칭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군 전차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고, 모스크바, 노보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3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1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6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