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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조총련[朝總聯]" 본문
1974년 일본 요코하마항에 북한 선박 만경봉호가 나타난다. 이 소식에 접한 조총련 본부는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인다.
한편 조총련 내부의 의장 한덕수와 부의장 김병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세력다툼은 만경 봉호의 선장 강명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덕수의 경호원 김창욱과 그의 애인이자 한덕수의 비서인 이정숙은 희생의 제물이 된다. 또한 강명수 역시 김병식의 계략으로 입장이 난처해지기에 이른다.
결국 조총련은 이러한 갈등을 모면하고자 1975년 8월 15일 문세광을 파견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을 저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조총련[朝總聯]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한덕수(韓德銖)
한덕수(1907년 2월 18일 ~ 2001년 2월 21일)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초대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년 10월 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년 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문세광(文世光)
문세광(1951년 12월 26일 ~ 1974년 12월 20일)은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였다.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 시에서 석면 제품 제조업자로 일하던 문병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진양)이다. 세이키 상업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강성숙과 결혼했다. 문세광은 원래 오사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쿠노키타(生野北) 지부에 가입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김일성 선집(통일혁명당 그룹), 마오쩌둥 어록(적군파 그룹) 등을 탐독하면서 좌익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73년 9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이쿠노니시(生野西) 지부 정치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룡(金浩龍)을 처음 만난 문세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던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1973년 10월경에는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공범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에게 대한민국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1973년 11월에는 공작금 50만 엔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년 2월에 도쿄도 다이토 구 히가시우에노(東上野)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인 가와카미 유지(川上勇治)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1974년 5월에는 오사카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에서 사상 교육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년 7월 17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오사카 시 주오 구 고즈(高津) 파출소의 창문을 깨고 침입했다. 문세광은 경찰관 4명이 잠을 자고 있던 사이에 실탄 5개가 들어간 권총 2자루를 빼냈다.
문세광은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이었던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호적 등본을 이용해서 여권을 신청했다. 8월 1일에는 오사카 경찰이 문세광이 작성한 "전투 선언"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8월 6일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권총을 감췄고 8월 8일에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위조된 여권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였다. 1심 최후진술을 통해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이라고 말한 문세광은 항소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전체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과오를 깊이 늬우치고 있으니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감사하겠다"고 했으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수기를 통해 "나는 조국의 하늘 아래 살고싶다 암살목적으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지만 1974년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74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이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의 해외동포단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문세광이 공산주의를 믿었던 단순한 공산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출생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 시
사망
1974년 12월 20일 (2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사인: 교수형
성별: 남성
부모
아버지 문병태, 어머니 육말란
배우자: 강성숙
-일본지역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
북한정부는 4.19혁명 후 노동당 <3호청사>내 대남공작부서 중 통일전선부 조국통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1964년 무렵 남한지역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68년 경 간첩 김종태등을 검거 된 후 와해되었고 그후에도 북한정부는 세계 각국 북한정부 비공식조직으로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조직 설치하여 반미투쟁과 대남공작활동을 해왔다
일본지역 통일혁명당 대표부가 1960년 후반기 창당하였고 1986년 8월 8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칭하였다
문세광이가 활동한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북한정부 <3호청사> 통일전선부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인지가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통일혁명당(한민전)이 남한지역 출신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의 모임이고 투쟁 단체이다
박정희정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사건 이전에 남북협상으로 김성주와 이후락 남북회담이 추진되었고 남북냉전분위기보다는 화해분위기었다 남북화해분위기에서 유신헌법 공표와 유신선거로 남북냉전분위기로 전환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만경봉호(萬景峰號)
만경봉호는 북한에서 건조한 페리선이다. 처음의 만경봉호는 1971년 건조되어 재일 조선인의 북송선으로 이용되었으며, 처음의 만경봉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2년에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서 만경봉-92가 건조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원산시에 있는 해운회사가 소유한 여객선으로, 주로 일본의 니가타와 북한의 원산시를 운항하였다. 여객선명은 평양직할시 교외에 위치한 만경봉에서 따왔다.
만경봉-92는 1992년에 건조되었으며, 만경봉호의 건조비용은 모두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자금에 의해서 조달되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가 부산 다대포항에 입항한 바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585번지 일원에 통일아시아드 공원이 2008년 12월 7일 준공되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당시 응원단과 인력을 태운 만경봉호가 임시로 묵호항에 입항하였다.
2011년에는 나진~고성(장전) 금강산지구간 항로에 투입되는 여객선으로 활용되었다. 2014년 보도에 따르면, 나진항 2번 부두에 정박된 채 녹슬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외연락부[對外連絡部]
조선로동당 내에는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통전부), 작전부,35호실(대외조사부) 등 4개의 대남 관련 부서가 존재해 왔다. 그 중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전담해온 대표적인 대남부서이다.
통일전선부는 대남외교를 주관하는 부서로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접촉과 교류·협력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관계자들이 전부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35호실은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매수해 남한에 투입시키는 등 제3국에서의 대남사업을 주관하며, 작전부는 남한 내 고정간첩을 통한 정보획득이나 임무부여, 대남침투요원 안내 및 호송 요인 저격·납치 등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북조선로동당 ‘5과’로 창설되었다. 6·25전쟁기 남한지역내 게릴라부대의 지하당공작 과정에서 대남공작기구를 확대하면서 당 조직부내의 연락부를 분리했다. 1961년 4차 당대회에서 남한에서의 지하당 조직확대와 통일전선 강화 등의 결정과 함께 내무성 등의 대남공작기구를 통합해 중앙당 ‘연락국’을 신설했다. 196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8차 전원회의에서 ‘3대 혁명력량 강화’노선을 채택하면서 종래의 연락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개칭했다.
1966년 10월 12일 당중앙위원회 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이 신설되면서 대남사업담당비서 산하에 ‘연락부’, ‘문화부’, ‘조사부’, ‘인민무력부정착국’, ‘조총련’부서를 두었으며, 1978년 1월 통일전선부가, 1990년대 후반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과 작전부가 신설됨으로써 대남담당부서의 체계가 구축되었다. 남한 내 정당, 사회단체, 군부에 대한 공작거점 및 공작전술 연구개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간첩교육과 파견을 직접 담당하고 있으며, 조총련에 대한 활동지도도 담당하고 있다
1.대외연락부 주요 책임자
(1)정경희( 1987년까지 대외연락부 부장 출신)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 위원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거물 여간첩 정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부서도 대외연락부였다
ㄱ.이름--정경희(사망)
ㄴ.출생일과 출생지---1928년생이며 남한출신
ㄷ.직책--전 당 중앙위 연락부장
ㄹ.학력--금강정치학원과 당 중앙당 학교, 송도정치경제대학 수료
--이선실과 정경희등은 대남공작원 교육원 금강정치학원 출신--
ㅁ.경력
1960년 함남도당 선전부 지도원. 도당 교육부 부부장
1967년 당 중앙위 연락부 과장
1970년 11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73년 당 중앙위 문화부 부부장
1975년 5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80년 10월 당 중앙위 위원과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8기 대의원
1996년 6월 사망
(2)강관주(강주일, 현직 대외연락부 부장)
전(前)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대외연락부장으로 발탁되면서 통일전선부가 관할하던 재일 조총련 관리 업무도 대외연락부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강주일은 사회문화부를 개편 확대하여 대외연락부로 개편했으며 대남공작부서 대외 연락 업무등을 취급하고 있다.
ㄱ.이름--강주일(본명 강관주)
ㄴ.출생일와 출생지--1930년 7월 5일생이며 남한 출신
ㄷ.학력--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
ㄹ.주요 경력
(ㄱ)75년 5월 대외문화연락 위원회 국장
(ㄴ)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10기 대의원
(ㄷ)90년 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ㄹ)94년 7월 당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ㅁ)97년 1월 당 대외연락부 부장
(ㅂ)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ㅅ)99년 1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ㅇ)2001년 3월 당 비서국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ㅁ.주요동정
강주일(본명 강관주) 대외연락부장은 대일교섭이나 활동 그리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활동등이 뚜렷하다 일본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ㄱ)77년 5월 최고인민회의 대표 단원 자격으로 일본 방문
(ㄴ)83년 3월 평양 학생 소년 예술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방문
(ㄷ)90년 9월 평양예술단 일본 공연시 동행
(ㄹ)91년 9월 보천보 경음악단 단장으로 일본 방문
(ㅁ)92년 5월 만성간염 치료차 방일, 도리노몽 병원 입원
(ㅂ)97년 7월 조총련 업무지도차 일본 요코하마 방문
2. 대외연락부 주요 대남공작 활동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으로는 1992년 10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 두고 터져나온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인 여간첩 이선실, 신세대 공작원으로 불리는 무장간첩 김동식(95년 10월, 충남 부여서 체포),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부부 간첩 최정남, 강연정등이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과 대외연락부 관계
한국민족민주전선은 통일전선부 지하조직이며 북한정부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정찰 요원이다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 조직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각 단위별로 연락으로 장악하고 있다
통일전선부가 남한정부의 통일부라면 대외연락부는 반미통일구국전선을 배후에서 총지휘하는 단체이다
ㄱ.이선실과 중부노동당(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중부지역당)
ㄴ.김동식과 삼민투위 관련자 조직사업(한민전 서울대표부내 반제그룹조직화)
ㄷ.최정남과 영남위(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영남지역 주체사상파 조직화)
ㄹ.민혁당 사건---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남한재야세력 중 친북세력(주체사상파나 반미인민전쟁론자) 구심체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표현하며 그 세력들을 북한노동당과 연락선이 바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뜻이다
통일전선부는 대외적으로 통일전선 구축으로 오픈화(합법화)하고 있다 친북 통일관련 단체들이 바로 통일전선부 산하 남북 외곽단체들이다
(2)대외연락부 활동 요원들의 주요 경력 특징
ㄱ.정경희나 이선실 모두 남한 출신이라는데 특징적이다
ㄴ.금강학원 출신 대부분이다(이선실이나 정경희 모두 금강학원 출신이다)
ㄷ.대외연락부 공작원들은 남한 친북세력과 연계 도중에 체포나 검거 되었다
ㄹ.통일혁명당이나 민혁당 모두 대외연락부 공작원 활동 주 무대로 알려져왔다(대외연락부 공작원을 남로당 정치고문단으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다)
-일본 적군파([赤軍派, Red Army)
본래 이름은 연합적군(聯合赤軍).
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일본의 테러리스트 단체..
1948년 형성된 일본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연합이 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 뒤 분열되자, 이 중 마오쩌둥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69년 발족한 단체이다. 4백여 명의 호전분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1970년초에 적군파는 일본 항공의 항공기를 여러 대 납치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1972), 여러 나라에서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주요 테러 작전을 잇따라 감행했다
72년 적군파 내의 호전적인 다원들이 동료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었고, 이 파벌 싸움은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정부는 단원 대부분을 체포했다. 폭력 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 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74년까지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74년 이후 시게노부후사코를 두목으로하여 싱가포르·네덜란드·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거의 와해 되어오다가 소련붕괴 이후 조직이 거의 해체되고 있다
일본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적군파는 미군을 몰아내고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로동계급(공산당, 좌익연합)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공화국)를 건국 목표로 구성된 조직이다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통일혁명당은 김일성주의자들이다
적군파나 통일혁명당의 주요이론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총사령관 모택동의 사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년 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년 6월 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년 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1.제1공화국 헌법[인민회의정부론-인민민주주의 노선]
(1)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48년 8월 25일에 열린 북한의 최초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2명을 선출하였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ㄱ.선거
(ㄱ)이북 선거
북쪽에서는 8월 25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오전 6시에 시작한 투표는 여섯시간만인 오후 12시에 마감되었다. 투표율은 99.97%였다. 선거구 212개에 후보는 모두 1217명이었다. 그중 227명이 북한 노동당을 비롯한 주요정당들의 연합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후보였다. 단일 후보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15개 지역에서 복수 후보가 출마했다. 투표는 흑백함에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지는 찬반 투표였다. 유권자들은 212명의 공동 후보에게 98.49%의 찬성표를 던졌다. 이렇게 이북지역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당선되었다
(ㄴ)이남 선거
이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해 7월 중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할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예비선거'에 돌입했다. 선거관리는 남쪽의 남한 노동당과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선거방식은 선거운동원들이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장이나 손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선거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대표성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남조선 대표자' 108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 모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 본회의를 개최했다. 대회 마지막날 북측의 8.25 총선에 맞춰 대표자들은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 남과 북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된 것이다[
ㄴ.선거결과
선출의석: 572
과반의석: 287
북한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비서) 157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35석
북한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35석
인민공화당 20석
근로인민당 20석
인민공화당 20석
기타 정당 171석
무소속 114석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조선공산당 출신이 과반수 이상 의석을 획득했다
(2)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57년 8월 27일에 열린 북한의 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215명을 선출하였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치뤄졌다.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 이남에 대한 선거가 완전히 불가능해짐에 따라 휴전선 이남 지역구에 대한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선거 결과
선출의석: 215
과반의석: 108
북한 노동당 (김일성 노동당 비서) 178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1석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11석
근로인민당 3석
인민공화당 3석
불교연합 2석
건민인민연합 1석
민주독립당 1석
기타 5석
한국전쟁 이후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3)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2년 10월 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383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383
과반의석: 192
북한 노동당 (김일성 중앙위원장) 371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중앙위원장) 4석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석
근로인민당 1석
불교연합 1석
건민인민연합 1석
민주독립당 1석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4)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7년 11월 25일에 열린 북한의 4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457명을 선출하였다. 최초로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이 인정되어 조총련이 진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457
과반의석:229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288석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석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석
북한 민주당 1석
불교연합 1석
기타 156석
김일성 수상의 장기집권에 대한 거부감과 중공의 대미, 대일수교 정책으로 반미전선이 위축되어 북한 군부세력 기반이 위축 되었다.
2.제2공화국 헌법[사회주의 공화국-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1)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2년 12월 12일에 열린 북한의 5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41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541
과반의석: 271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127석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석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석
북한 민주당 1석
불교연합 1석
기타 401석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친미 친서방 친남한 평화공존세력보다는 반박정희, 반미세력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성향 인사들이 대거 당선 되었다
(2)제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제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7년 11월 11일에 열린 북한의 6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9명을 선출하였다.
(3)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2년 2월 2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7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15명을 선출하였다
(4))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6년 11월 2일에 열린 북한의 8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55명을 선출하였다
(5)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0년 4월 22일에 열린 북한의 9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1석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1석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석
조총련 13석
3.제3공화국 헌법[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1) 김정일정부- 세습제 좌익군정-주체연호와 선군정치
ㄱ.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8년 7월 26일에 열린 북한의 10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유훈통치가 끝나면서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연기되었던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594석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3석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3석
조총련 7석
기타 10석
ㄴ.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3년 8월 3일에 열린 북한의 11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ㄷ.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9년 3월 8일에 열린 북한의 1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6석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중앙위원장) 50석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석
조총련 6석
기타 3석
(2) 김정은정부-김일성 ,김정일 헌법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14년 3월 9일에 열린 북한의 1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게된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은) 607의석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50의석
천도교 청우당(류미영) 22의석
조총련 5의석
기타 3의석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는 일본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재일 조선인의 단체이다.
약칭은 조선총련(朝鮮総聯), 총련(総聯)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조총련(朝総聯)이라고 부른다. 재일본조선인련맹을 모태로 1955년 5월 25일 ~ 5월 26일 도쿄도 다이토구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한덕수 의장의 발기에 의해 결성되었다.
일본 내의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이다. 련합회는 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모든 재일 조선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중앙 본부는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2-14-15에 있다
1.역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는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되었고, 초대의장은 한덕수(韓德銖)이다. '재일본조선인상공인동맹'과 '재일본조선인노동자동맹', '재일본조선인민주여성동맹' 등의 각 소수의 계층을 대표하는 단체들과 '재일본조선인인권위원회'와 '재일본조선인평화통일위원회' 같은 시민단체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수가 수십여 개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학회는 고고학계의 전문학자들이 결성한 '고고학자동맹'과 '사회과학연구소' 등이 있는데, 이 단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체들과 교류를 맺고 있다.
총련에서는 각 단체들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기관지인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1945년 10월에 창간되었는데, 처음에 이름은 《우리신문》이라고 불렸다. 그 후 1960년도에 민중신문과 해방신문으로 이름을 바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조선신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신보》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되며, 영문판으로 《The People's Korea》(인민조선)을 발행하고 있다. 자매지는《월간 조국》(月刊 祖國)이다.
한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는 '조선학교'로 불리는 교육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교육기관인 '초급학교', 중고등교육기관인 '중급학교'와 '고급학교', 대학교육기관인 '대학교'를 갖추고 있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지방에 펼쳐져 있다. 대학교는 조선대학교가 있다.
2003년에 한덕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사망하자, 서만술(徐萬述)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되었다.
2012년에 현재 의장은 허종만이다.
2.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일본공민단체’라고 자칭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조선로동당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13년 이후 조선로동당 소속 정보 기관인 통일전선부 산하 제225부(구 대외연락부)의 지도를 받고 있다. 설립 당시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적’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의 운영과 ‘조선적’ 조선인 경영자를 대상으로 융자를 시행하는 등 일종의 상조회 조직으로 기능했으나 본국의 정치상황에 연동하여 그 실태는 변모해 갔다. 도쿄도에 중앙본부를 두고 일본 전역에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지에 지부 조직이 있다. 중앙본부의 소재지는 도쿄도 지요다 구 후지미 2-14-15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률상으로 조선총련 구성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지만, 그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실제 수는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국가로서 승인되지 않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조선총련의 구성원은 일본 법률상 ‘조선적’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고, 또 대한민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많으나, 대부분은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 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지연, 혈연이 없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사실상 재일 자국민에 대해서는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18년 현재, 허종만 의장을 비롯해 5명의 간부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으로 되어 있다. 조선총련 출신자 중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단장이 된 예도 있으며, 재일한국 ・ 조선인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발족 당시부터 공산주의를 지지했고, 그 후 냉전기 공산주의 진영을 지지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이것이 일본 정부와 경찰 등 치안기관과의 긴장감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다.
(1)공안조사청의 조사
불법활동의 혐의가 있어서 공안조사청의 감시를 받고 있다.
(2)과세감면조치 철폐의 흐름
조선총련은 비자와 여권 발행 대리업무를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구로서,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는 명목 하에 과세감면조치를 받고 있었으나,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방북 시 납치문제에 관여하였음을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조직과 시설에 대한 우대조치가 재검토되게 되었다. 도쿄 도의 고정자산세 감면조치 철폐 발표 후, 조선총련 시설이 ‘사적 시설이며, 대일·대남 공작기관이다’라는 현상에 관심이 향해지게 되었다.
2009년 현재, 전국 130개 지자체 가운데 전액감면하고 있는 지자체는 홋카이도 쿠시로 시 뿐이다. 또한 70% 이상의 지자체가 ‘무감면조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쿄 도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의 부동산에 대한 고정자산세 등의 과세처분을 둘러싸고 등기상의 부동산 소유자인 합자회사 ‘조선중앙회관관리회’가 도쿄 도에 과세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여 제소하였다. 1심과 2심은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9년 8월 12일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여 총련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3)일본 정당과의 관계
조선총련 창립 이전에 재일조선인이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였던 적도 있어서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가 깊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사회당에도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쌓았다. 일본사회당 좌파를 계승한 사회민주당과는 계속 우호관계에 있다. 사회당 출신의 민주당 의원에게 정치헌금을 했던 것도 판명되었다[2].
(4)지방 참정권
영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 문제에 관하여는,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가 재일동포의 민족의식을 희박하게 하여 일본사회로의 동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반대주장을 펴면서, 참정권 획득 운동의 중심인 민단과 정면대립하고 있다. 참정권이 야기할 당파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와는 결론이 일치하고 있지만, 일관되게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고 있다.
(5)조선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대한 공작활동
2010년 6월 12일, 조선총련이 조선학교 학부모들에게 문부과학성에 조선학교의 고등학교수업료 무상화를 요청하는 전화공세를 걸도록 할당량을 부과하였던 것, 또한 동시에 여러 명의 일본인 행세를 하여 전화횟수를 늘리도록 지시하였던 것이 내부문서에서 밝혀졌다. 산케이 신문은 “총련의 무상화운동이 도덕성을 크게 일탈하였으며, 북한처럼 통제된 조직동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실태가 명백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조은신용조합의 불법송금에 조선총련 관계자의 관여가 의심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문제 추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납치사건을 비롯한 일본 국내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법활동(간첩, 불법송금, 마약, 권총판매 등)에도 많은 수의 조선총련 관계자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에 대해 조선총련은 “악성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총련 관계 시설에 대한 강제수사에 대해서도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항의를 반복하여 왔다. 또한, 비판기사를 쓴 보도기관 직원에게 많은 항의를 하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판적인 단체의 집회를 조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방해하였던 적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주권을 인정하면 역차별 등으로 이어진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972년 당시 미노베 료키치 도쿄 도지사가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고 인정한 이래, 많은 지자체가 조선총련 시설을 사실상 외교 공관이나 공공시설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고정자산세와 부동산취득세의 감면조치를 하여왔다. 이는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4].
2003년 도쿄도는 조선총련 관련시설에 대해 ‘소유자 대부분이 관련 기업(조선총련이 법인이 아닌 이유로)이거나, 외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일부에 대해 고정자산세를 부과하기로 하였다. 다른 지자체도 이에 따라 고정자산세 감면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편, 종래대로 계속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조선총련과 일부 법학자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행정소송에서 다투고 있다. 고정자산세 등의 감면조치를 둘러싸고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구마모토 모임’의 加納良寛 회장이 구마모토 시장을 상대로 조선총련 시설 과세감면조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년 2월 2일 후쿠오카 고등법원이 ‘공익성이 없는 조선총련의 활동에 대해 조세를 감면하는 것은 위법하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구마모토 시장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기 때문에 최종적 결정은 대법원에 맡겨졌다.
또한 방위청(현 방위성)의 미사일 정보 유출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총련 측은 이를 사실을 왜곡한 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1)납치사건 관여
1973년 행방 불명된 사이타마현 가미후쿠오카 시 (현 후지미노 시) 여자의 조선족 아동 2명이 납치(2아동납치사건)되었는데, 그 여성의 남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이었고, 게다가 그 남편이 근무하였던 도쿄 무역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전직 여직원이 경찰당국의 조사에서 ‘북한 본국의 판단을 요청했다’ 등으로 진술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개입을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78년 6월 발생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1980년 6월 발생한 신광수(辛光洙) 사건(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2007년 4월 25일 경찰청 공안부는 가미후쿠오카 시 사건에 관하여 국외이송목적 유괴 혐의로 사건에 관여하였던 혐의가 강한 공작원들이 한때 활동에 참가하였던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중앙본부’(류학동) 등 조선총련 산하단체와 관련단체 등 4개소를 가택수색하였다[7]. 수색시 재일 조선인 남성이 공무집행방해로 체로되어 도미사카(富坂)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당시 혐의사실 고지는 하지 않았음), 5월 말 불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8]. 이에 관하여 가택수색 당시 수사관이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나 TV에는 보도되지 않았었다.
또한 공안부는 도쿄도내 무역회사에 다수의 공작원이 입사한 경위 등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선총련 서만술 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남승우 부의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기 위해 같은 날 서면으로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6일 고덕우 부의장이 보도용 기자회견에서 거부하는 취지를 발표하였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장
1973년 재일조선인자제 실종사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아베 신조 정권이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에 결부시킨 정치적 민족 탄압’이라고 주장하였다[10].
(2) 대대한민국 공작 협력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인 광복절 축하행사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개최되던 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의 처 육영수가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사살당했다(문세광 사건). 문세광은 박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한국 경찰의 수사에 의하면 조선총련의 관여가 명백하였다. 이것은 적화통일을 목표하였던 문세광이 조선총련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高津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쳤고 한국 위조비자와 위조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측의 주장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관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반일감정이 높아져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일본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조선총련을 자극하지 않으려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 이 시기의 중조관계는 문화대혁명의 영향과 김일성이 중소분쟁에서 소련측에 붙었던 까닭으로 냉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김정일 총서기가 북한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하였기 때문에 조선총련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공작에 관여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에 등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종 기념우표에 등장하고 있다. 1965년 4월 27일 ‘총련결성 1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총련 건물을 배경으로 한일기본조약체결반대운동을 하는 군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 우정 당국은 1970년, 1975년, 1985년, 2005년에도 총련 건물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하였다.
(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 운동
195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상낙원’ 등으로 선전하여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을 영주귀국, 이주시켰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공작원의 방해 폭파테러와 조선총련 간부에 대한 테러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일본 적십자사 폭파미수 사건). 이것이 원인이 되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를 중심으로 잇따라 조선총련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운동에는 산하단체인 중외려행사(中外旅行社)가 일부 개입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08년 6월에는 일본 거주 탈북여성이 조선총련에 대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을 제기한 여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상낙원이다.’라는 조선총련의 거짓선전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노동, 고문, 차별을 강요당하였고, 죄수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하였으며 ‘(조선총련은) 사람을 속여 조직적으로 유괴하였다.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빼앗은 악마와 같은 단체이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강제수용소 안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선총련은 이러한 소송에 대해 ‘동포사회와 일북 관계를 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12].
(5)영화 ‘동해의 노래’
귀환사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총련이 공동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2부작)가 2009년 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한덕수 前의장을 비롯한 제1세대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김일성 노선전환방침(1952년)과 총련 결성,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인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 실현까지 1940~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된 사건을 그렸다.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왔던 한덕수 前의장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 업적과 생애 및 재일조선인의 활동에 관한 홍보작품이기도하다.
(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과의 관계
2008년 8월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의 기소장에 의하면, 이 여간첩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성적관계를 맺고 기밀정보를 얻는 ‘허니트랩’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는데, 2007년 6월부터 2008년 5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최장 2개월 이상 체류하였다. 기소장에는 일본 협력자로 조선총련 산하단체 간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과 ‘사장’ 직함을 가진 오사카 거주 인물 등 2명의 실명이 기소장에 기재되었다.
기소장에 올려진 산하단체 간부는 ‘조선총련 관계 단체 간부로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피고와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보위부에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 멋대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라며 관련을 부정하였다
(7)연평도 포격
조선총련은 2010년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에 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조선총련은 조직원 내부교양자료에서 연평도에서 숨진 민간인 2명은 연평도 주민이 아니라 해병대 시설 공사에 동원된 본토 사람이고, 숨진 장소도 군사시설 내부이므로 민간 희생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일본 정부는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미루었다. 일본 사회의 연평도 포격 비난 여론으로 2010년 12월 26일 일본 16개 도·현의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었다.
4.중앙본부 건물 매각 문제
중앙본부(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토지와 건물은 미쓰이 다다오 전 부동산회사 사장의 중개로, 2007년 5월 31일 오가타 시게타케 전 공안조사청장관가 대표로 근무하는 하베스트 투자고문 주식회사에 매각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중개자인 미쓰이 다다오는 조선총련으로부터 수수료 명목으로 4억 9천만 엔이 전달되었다.
중앙본부 건물(지상 10층, 지하 2층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 연면적 1만 1700평방미터)과 토지(약 2390평방미터)는 약 40억 엔을 초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매각대금은 35억 엔) 도쿄지검 특수부는 당초 조선총련이 정리회수기구로부터 제기된 소송에서 패할 경우 압류를 벗어나기 위해 탈법, 불법행위를 할 의도가 있다고 보고 전자적공정증서원본 부실기재 등 혐의로 수사하고 있었다.
수사 결과, 조선총련이 소유권 매각양도 후에도 임대물권으로 인정받아 사용할 수 있는 매각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조선총련측이 피해자였다면서 오가타 시게타케와 미쓰이 다다오는 ‘자금조달 목표가 서지 않았음에도 토지, 건물 및 수수료를 편취하려 하였다’라는 이유로 2007년 6월 28일 사기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수수료 명목으로 사취한 금전 중 절반밖에 반환되지 않았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신보》(朝鮮新報)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의 기관지로, 주로 조선어로 발간되고 있다. 본사는 일본 도쿄에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지국을 두고 있다.
1945년 10월 10일 《민중일보》(民衆日報)로 창간했으며, 1946년 9월에 《해방신문》(解放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 8월에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인해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본 정부에 의해 정간 조치를 받았다가 1952년 5월에 《조선민보》(朝鮮民報)로 복간했다. 1961년 1월에는 《조선신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년 5월에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처음에는 격주간, 주간으로 발간되었다가 1961년 9월부터는 일간, 8면으로 발간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발행하지 않는다. 잡지 《조국》과 일본어문 잡지 《이어》는 모두 조선신보사에서 발간한다. 1980년대 초에는 컴퓨터 식자를 들어와 디지털 방식으로 출판되고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편집하는 지면도 있으며, 영문판인 《인민조선 (The People's Korea)》을 발간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로 발간하고 재일 조선인들에게 보다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1999년부터 생활정보지의 역할도 튼튼히 하고 있으며, 가끔씩 문예면을 통해 재일 조선인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 작품들을 연재한다.
본사 및 지국
본사
일본의 기 일본 도쿄도 아라카와구 히가시닛포리 2-26-1
평양지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중구역 오탄동 평양호텔 5층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영어: Korea University)는 재일 조선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이다. 줄여서 조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총련 조선대학교가 1956년 6월 8일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조총련계 인사들에 의하여 2년제 대학교로 설립하여 지금까지 13,000명졸업생을 배출하여 운영 되어오고 있다
전(全) 학생이 기숙사제로 조선연극부등 총 8학부로 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현재 수학하고 있었으며 졸업생들은 주로 조선학교의 교원 및 총련신보나 잡지의 기자로 취직하며 총련 동포가 경영하는 금융기관에도 취직하고 있다
1.개요
조선학교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대학으로의 승인을받지 못하여, 법적으로 각종학교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 사립학교법에 근거한 학교법인 도꾜조선학원이 운영하고 있으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있다.
전후의 개방대학에서 50여년의 역사가 있고 제반 조직 개편을 거쳐 현재는 4년제 8학부 (일부 3년제)로 구성이 되어있다. 강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진행되며, 일본인 강사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재학생의 대다수가 조선고급학교 출신이지만, 일부 일본의 고등학교 졸업생도 다니고 있다. 일본학교 출신자는 편입반으로 불리는 반에 들어가(유학생 별과에 상당), 한국어 습득 등 교육을 받는다. 조선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 일본 국적의 학생도 재학하고 있다.
졸업생의 진로는 조선총련직원, 조선학교교원, 재일동포 기업등에의 취직이 많다. 한편 타대학의 학부, 대학원 진학자도 있어 국내의 대부분의 사립 대학과 일부를 제외한 국공립 대학은 졸업생에게 대학원(법과대학원을 포함한다) 수험 자격의 문을 열고 있다.
재학생은 일부 기숙사생활이 곤란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기숙사에서 학외로의 출입은 폐문시간 전까지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방과후는 아르바이트에 힘쓰는 학생도 많다. 평상시 외부인의 캠퍼스 입장은 제한되고 있어 방문자는 소정의 수속을 거쳐야 한다. 다만 학원제 기간중에는 캠퍼스가 개방되어 인근 주민등에서 활기를 보이고 있다.
2.연혁
1956년 - 도꾜조선중고급학교(도쿄도 기타구) 부지에서 2년제로 설립
1958년 - 4년제로 전환
1959년 - 도쿄도 코다이라시에 이전(교사는 1962년도의 일본 건축 연감상을 수상)
1964년 - 도서관 및 강당을 준공
1964년 - 문학부·역사 지리학부·정치 경제학부(정치 경제학과)·이학부(물리 수학과)·사범 교육학부(사범과, 체육과, 음악과, 미술과)의 5 학부 체제가 된다
1967년 - 공학부(기계공학과, 전자 공학과)를 설치
1968년 - 당시 도쿄도 지사에 의해 각종학교 취급이 된다
1968년 - 공학부에 금속 공학과를 신설
1970년 - 조선어 연구소를 신설
1970년 - 외국어 학부(영어과, 불어과)를 설치
1974년 - 연구원(일본의 대학의 대학원에 해당한다), 민족 교육 연구소를 신설
1975년 - 역사 지리학부에 역사학과와 지리 학과를 신설
1977년 - 정치 경제학부에 경영학과를 신설
1978년 - 정치 경제학부에 철학과와 사범 교육학부에 보육과를 신설
1982년 - 창립 25주년 기념관 준공
1982년 - 정치 경제학부 경영학과가 경영학부에 승격 설치, 사회과학 연구소를 신설
1985년 - 사범 교육학부에 3년제의 사범과를 신설
1990년 - 제3 연구동과 체육관을 준공
1999년 - 이학부와 공학부를 통합해「이공학부」로 개칭, 이공학부에 정보처리 학과를 신설, 정치경제학부에「법률학과」를 신설, 사범교육학부를「교육학부」로 개칭해 교육학과를 4년제와 3년제로 개편, 연구원을 전기 2년·후기 3년으로 개편
2003년 - 단기학부를 신설, 문학부와 역사지리학부를 통합해「문학 역사학부」로 개칭
2004년 - 단위제를 도입
2006년 -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2007년 - 축구부가 도쿄도 대학 축구·리그 우승, 칸토 대학 축구 리그(2부)에 승격
3.개설학과
정치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법률학과
문학역사학부
어문학과
역사지리학과
경영학부
외국어학부
영어학부
일본어학부
이공학부
이학과
전자정보공학과
교육학부
체육학부
단기학부
생활과학과
정보경리과
일본 도쿄 소재 재일 조선대학교(조대)에서 지난 11일 제60회 졸업식이 진행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9일 보도했다.
허종만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과 배익주 부의장, 강추련 부의장 겸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 송근학 교육국장,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과 학부장들, 각 지역 조선고급학교 교장들, 조선대학교 졸업생들과 학부모, 교직원·학생 등이 졸업식에 참가했으며, 북한 교육위원회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대학에서 축전을 보내왔다고 통신은 소개했다.
허종만 의장은 축하발언을 통해 '공화국의 유일한 해외대학'인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재일 조선인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면서, "총련의 모든 조직과 재일동포들은 공화국창건 70돌을 맞이하고 총련 제24차 전체대회가 진행되는 뜻깊은 해에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이 애족애국운동에서 청춘의 열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휘할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졸업식에서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의 보고에 이어 졸업생들에게 북 교육위원회와 총련 상임중앙위원회, 조선대학교의 표창장이 수여되었으며, 졸업생들의 결의토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낭독되었다.
재일 조대는 지난 1956년 4월 10일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의 최고학부로 창립되어 1958년 4년제 대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지난 2016년 창립 60돌을 맞이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7.4남북 공동성명은 남북 일본 라인(남북 일본축 대외조직)으로 추진 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7·4 南北 共同 聲明)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1.배경
공산주의 진영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등으로 인해 공산권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자유주의 진영은 닉슨 독트린으로 핵문제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 책임을 진다는 등 자유 진영에도 위기감이 들었다. 한반도에서는 미군의 부분 철수, 미ᆞ중의 화해 무드로 양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남북은 변화하는 국제정치환경에 적응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3]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박정희가 이끌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1971년 국제 연합의 성격 변화(중화민국의 제명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에 아우른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무드를 등에 업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에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과 중공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평화통일 8개항 방안과 언커크 해체 요구입장의 지지를 주 내용으로 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세계적 데탕트 분위기를 이용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화에 임했다. 국가예산 지출액의 30%선을 상회하는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통해 ‘군사문제를 우선 해결’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그에 따라 군사비를 동결하여 남는 재원을 경제부문에 투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북회담 제스처에 대한민국 정부가 부응함으로써 1971년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 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회담이 진행되어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CIA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대화에 응한 이유가 북한이 남북대화를 통해 남한 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군 철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일시적으로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며, 그가 후에 정상회담을 할 의향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을 추가로 북한에 보내지 않을 것이고, 공동성명을 통해 설치되는 남북조절위원회는 고위급이 없는 실무진 위주로 구성되며, 남북적십자회담 지원 및 비무장지대 충돌 방지 목적으로만 할 것이라고 했다.
2. 경과
성명 발표 이후, 남북은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그러던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평양 방송을 통해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김영주 공동위원장 명의로 남북대화를 중단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한의 ‘6·23선언’이 ‘2개 조선’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며 맹비난을 했으며, 이를 빌미로 진행되어 오던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3. 주요 내용과 남북 해석 차이
(1)주요 내용
총 7개 항이 있으며, 쌍방은 1항에서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을 합의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남북 해석 차이
공동 성명에 대해 남북간 해석 차이가 있다 이는 후에 있을 남북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주: 대한민국은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는 열린 자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세 배격을 통한 배타적 자주로 해석한다.
평화: 대한민국은 북한의 무력도발 포기와 상호 불가침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자주국방력 강화에 제동,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했다.
민족대단결: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바탕에서 민족적 이질화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했다.
4. 의의와 계승
남북의 양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로서 의의를 가진다. 최초의 남북회담이다. 또한 기존의 외세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이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계승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이해는 정권별, 시기별 이해보다 거시적인 역사적 제도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70년대까지 남북 사이에는 1·21 사태 등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는 무장도발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른 전쟁 재발의 두려움과 특수공작대 유지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 2항에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타협하였다.
5. 한계와 비판
양측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성명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은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헌법을 이용한 독재를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속에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공동 성명을 통해 남북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선, 해결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정부 당국 간의 회담이 아닌 준공식적 회담이기 때문에 무게감 있는 구속력은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이후락이나 최규하등은 대일외교팀이다
-북한 대남비서만 '3수'한 김중린
북한의 대남비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때는 당 작전부(대남 공작원 훈련 및 요인 암살), 35호실(엘리트 간첩 양성), 당 대외연락부(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 통일전선부(대남공작 및 남북대화 등) 등 4개 기구를 총괄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해졌다. 현재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만 관장하고, 나머지 조직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과 함께 총참모부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김중린(1923~2010)은 대남비서를 3차례 역임했다. 첫 번째는 69년 4월~76년 9월, 두 번째는 78년 1월~83년 12월, 세 번째는 88년 11월~90년 1월이다. 대략 13년 정도를 맡았다. 북한의 대남비서 가운데 최장수다. 그는 대남 강경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지휘를 했다
김중린은 자강도 우시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46년 평안북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시군은 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벽동군 우시면으로 있다가 54년 자강도에 편입됐다. 김중린은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52년 노동당 지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54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윈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제네바의 국제적십자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 김중린이 김일성의 ‘눈도장’에 찍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환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59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석해 성과를 올린 것이다. 김중린은 그 해 12월 재일동포 975명을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태워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중린은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69년 4월 대남공작 실패 등의 이유로 숙청된 허봉학을 대신해 항일 빨치산 장군 출신이 아닌데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됐다. 냉전 시절에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남비서를 맡기 어려웠다. 앞선 이효순-허봉학은 모두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김중린은 급기야 70년 11월 제5차 노동당 대회에서 권력 서열 10위로 급부상했다. 10년 전 제4차 노동당 대회의 87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김중린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그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비밀협상을 가졌으며 이후락은 김일성과 그의 동생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두 달 뒤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중린이 김일성과 김영주를 도와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린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김정일이 74년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김정일은 76년 6월 대남 공작부문을 대상으로 집중 사찰을 시작했다. 사찰은 5개월간 지속됐고 김정일은 진행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김중린도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50년대 이래의 대남공작은 한 마디로 0점”이라고 질책했다. 아울러 김정일은 “과거의 공작 활동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 전술적 방침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사찰은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됐고 그 결과 김중린 76년 9월 노동당 산하단체인 ‘남조선연구소’의 소장으로 좌천됐다. 김정일이 대남서기를 겸하며 대남공작기관을 지휘했다. 남조선연구소에서 찌그려져 있던 김중린은 78년 1월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다. 북한은 사람을 한 번 버렸다가 능력에 따라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대남비서 시절에는 ‘악역’을 맡았다. 그 악역은 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각료 4명을 포함해 17명이 사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참극이었다. 아웅산 테러는 감독 김정일, 각본 김중린, 기술감독 김격식 등이 진행됐다. 김격식은 2010년 연평도 포격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김중린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또 다시 ‘물’을 먹었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체포된 공작원이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탄로가 났다. 버마 정부가 테러는 ‘북한 부대에 의한 범행’이라고 발표했고 69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아웅산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김중린은 또 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83년 12월 대남비서를 허담(1929~1991)에게 물려주었으며 84년 3월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85년 1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마저 탈락됐다. 김정일의 미움이 그 만큼 컸다. 김정일은 아웅산 테러범들이 붙잡혀 범행을 털어놓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한 책임을 김중린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은 86년 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조금 엉뚱했던 임명이었다. 김중린이 대남비서를 ‘3수’를 하게 된 것은 88년 11월이다. 이번에는 고작 1년 2개월 정도였다. 그 이후 그는 90년 1월부터 당 근로단체비서를 맡았다. 근로단체비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조선직업총동맹(직총)·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을 지도한다. 노동당 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부서다. 김중린이 근로단체비서로 언제까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당에서 중요직책을 맡았던 그는 2010년 4월 2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허담, 연형묵 등과 함께 김중린을 언급했다.
-박정희정부때 남북대화 실무자 대남통 경북 경주출신 박성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 부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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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은 경북 경주출신으로 1913년 9월 2일 태어났으며 그는 일본 상지대를 졸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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