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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펑더화이의 정치적 패배 본문
1950년 10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한국전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지만 이 전쟁의 두 주역 장군을 꼽으라면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와 공산 중국의 펑더화이다.
둘 다 상대방의 허점을 기습적으로 타격하여 위급하던 전세를 단번에 반전시켰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펑더화이는 장진호 전투를 통해 상대방을 확실하게 패주시켰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 집중됐던 북한군을 산사태 무너지듯 후퇴하게 만들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펑더화이도 장진호에서 한반도 가장 북쪽까지 전진했던 미 해병을 포위하여 궁지로 몰아넣고 결국에는 퇴로를 뚫고 참담하게 후퇴하게 만들었다.
'뒤로 돌격'한 이들 미 해병 패잔병들을 포함 흥남으로 쫓겨난 미군과 국군 등은 모든 군사 장비를 깡그리 파괴하고 10여만명의 피난민과 함께 선박 편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미군의 함경도 철수 및 중공군의 북한 점령]
중국에서는 장수들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눈다. 용장, 지장 그리고 덕장이다. 이 세 부류를 두고 '용장은 지장을 따르지 못하고 지장은 덕장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개별적인 전투와는 별개로 전쟁의 최종 승리를 거두는 장수로는 덕장을 꼽는다.
'삼국연의'의 유비, 관우와 장비를 이 기준으로 나누면 전투에서 볼만한 승리한 기록이 찾아 볼 수 없는 유비가 덕장이고 관우가 지장에 해당된다. 장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용장이다.
이들 세 분류 외에 '복장(福將)'을 추가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흔히 조자룡으로 부르는 조운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유관장 세 사람이 모두 패전 또는 암살과 패전에 따른 홧병으로 제 명수를 채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으나 조자룡은 자손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으뜸 장수'는 덕장이지만 '가장 행복한 장수'는 복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펑더화이는 장비를 떠오르게 하는 용장이었다. 인민해방군 내에서 전승 기록이나 전과로 따져 볼 때 펑더화이는 린뱌오에 못 미친다. 린뱌오가 지장이라면 펑더화이는 용장인 것이다.
하지만 장비가 단기로 장판교 앞에 서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듯 펑더화이는 단순한 용맹스러운 인물이 아니라 지지 않는 방법을 아는 장수였다.
펑더화이는 중일전쟁 시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결국 패퇴했지만 대병력을 묶어두는 전술적 효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또 그는 1951년 5월 말 한국전 현리전투에서 군단급 국군 병력을 괴멸시켜 한국전이 장기전으로 빠져들게 했다.
펑더화이를 장비에 비유할 수 있다면 맥아더는 시저(카이사르)에 비견할 수 있다.
시저가 로마 공화정의 문민통제 원칙을 무시하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넌 것처럼 맥아더는 워싱턴의 주저와 우려를 일축하고 인천 상륙작전을 강력하게 주장, 결행하여 성공시켰다.
그리고 1.4 후퇴 직후부터 다시 전세를 만회하여 38도선까지 치고 올라간 뒤 워싱턴의 전략과는 정반대로 만주 폭격론을 거세게 주장했다. 맥아더에게 압록강은 '또 다른 루비콘 강'이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해임 발표로 맥아더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노병'이 되었다.
시저가 원로원에서 민첩하지 못한 노병처럼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젊은 부르터서의 최후 1격에 쓰러져 절명한 것처럼 말이다.
갈리아 원정을 성공시켰으며 이집트를 정복했고 로마군 내 최대 라이벌 폼페이우스를 전쟁터에서 자웅을 겨뤄 패사시킨 백전백승의 불세출의 뛰어난 장수 시저는 정치모략에 말려들어 무방비 상태로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카스카부터 부르터스에 이르는 스물 네 차례의 단도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정치에 진 것이다.
펑더화이는 백전백승의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밀릴 때에도 우직하게 버텨 이기지는 못했으나 패배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전에서도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붙어 가공할 인적 소모전을 펼쳐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 세계에서 펑더화이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뤼산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펑의 충성심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마오는 정치적 계산법에 따라 펑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숙청했다.
펑은 자신의 충성심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에 자신을 비정하게 내친 마오에게 여러 차례 복권을 청원했으나 마오의 정치적 계산법은 그가 비참하게 죽을 때까지도 그리고 마오 자신이 생을 마칠 때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불세출의 장수를 꺾기 위해 불세출의 정치가가 될 필요는 없다. 단지 정치적으로 유능한 정치가이면 충분하다.
트루먼은 불세출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군인 맥아더를 한 방에 무너뜨렸다.
왜 '정치 경제,사회'로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정치를 맨 앞에 내세우는지 알 것 같다.
정치가 앞서기 때문이다.
50.09.05~30
겹겹이 둘러쌓인 북괴군 전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북괴허리를 자르기 시작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Battle of Incheon)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고, 대한민국의 서울 탈환으로 이어져 한국 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 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대 1이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 참모 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사실 인천 상륙 작전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고, 또한 인천항을 지배하는 감제 고지인 월미도를 사전에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에서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태평양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큰 효과를 보았던 맥아더는 이번 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상륙 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 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장사 상륙 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 작전이 9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고 적혀있다
50.11.26-51.01.15
장진호 전투, 엄청난 수의 중공군
흥남철수 여정과 남으로 후퇴하는 전선
세계 3대 동계전투로 평가받는 장진호 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해 2주간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중공군에 의해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고립당해 사실상 사단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방한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영하 40도에 이르는 혹한으로 인해 동상자가 속출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치른 장진호 전투에서 우리 측이 거둔 성공은 미 해병대 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장군의 신중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미스 장군은 한반도 북부의 험악한 지형을 인식하고 북으로 전진하던 과정에서 미리 진지를 구축하고 병참기지를 확보했다.
또한 자신의 군인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해 새로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독려함으로써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도모하기도 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 측이 입은 손실은 전투사상자 3,637명, 비전투사상자 3,659명에 달한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를 통해 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중공군의 집결을 2주간 지연시킴으로써 국군과 유엔군 10만여 명, 민간인 10만여 명을 구한 흥남 철수작전을 가능케 했다.
장진호 전투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호
결과: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 미군의 전술적 승리.
미군의 함경도 철수 및 중공군의 북한 점령
중공군의 장진호 포위전 실패
1951년 3월까지 중공군 40%가 회복되지 못함
*쑹스룬 (宋時輪, 송시륜, 1907년 9월 10일 ~ 1991년 9월 17일)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원로 장군 중 하나이다.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하여 항일 운동을 하였다.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이후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북한군의 화력 보급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쑹스룬은 천재적인 지휘관이면서 동시에 성격이 매우 불같았다
후난 성에서 출생했다.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하여 국민당의 군대와 싸웠으나 일본의 대륙 침략때문에 항일 활동을 하였다.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하고 정식 군대인 인민해방군을 창설하자 중장 계급을 부여 받고 창군의 주역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비밀리에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로 비밀리에 투입한다. 여기서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쑹스룬은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올리버 스미스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면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중국에서 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인 평등을 내세워서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계급 없이 직책으로 지휘하는 체계였으나 이후 계급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중공군은 계급을 창설했다. 중공군의 계급을 창설할 당시에는 직책에 해당되는 계급을 부여했는데 이 때 쑹스룬은 그의 직책에 걸맞은 계급인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1956년까지 북한군의 화기를 보충하는데 협력한다. 1991년 상하이에서 자연사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소련 붉은 군대 그리고 북한 인민군은 게릴라부대(저격여단)로 산악 등지로 침투하여 인민전쟁을 추진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도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게릴라 군대(저격여단, 9시단)가 함경북도나 평안북도 지역 산악을 장악해왔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부대(남부군) 지휘부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남로당(조선공산당)이 주도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인민군(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나 무기보다 민심(民心)이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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