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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9일 개혁개방 총설계사 덩샤오핑 타계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1997년 2월 19일 개혁개방 총설계사 덩샤오핑 타계

CIA bear 허관(許灌) 2018. 3. 1. 21:06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실권을 장악한 후인 198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석제가 부활했다. 다만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3선을 금지했다."


1997년 2월19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했다. 1904년 8월22일생으로 향년 93세였다. 출생지는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이다. 덩샤오핑 사후 그에게 중국공산당이 붙인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 혁명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영도자의 한 사람,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이론의 창립자.”

1989년 천안문 유혈진압의 최종 결정권자였음에도 그가 타계하였을 당시 중국의 인민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이 슬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했을 당시 중국 인민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의식을 갖고 그를 보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그런 불안감은 없어 보였다. 모두들 한 마음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며 덩샤오핑을 보냈다.

그러나 불과 강산이 한 번 변했을 때 그는 이미 잊혀진 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10년 단위로 성대한 행사를 치루는 것이 보통인데 10 주기이던 2007년 2월19일 중국 당국은 베이징(北京)이 아닌 그의 고향에서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앞서 기념문집을 발간했을 뿐이다.

그의 지명을 받아 장쩌민(江澤民)의 후계자가 된 당시 국가주석 겸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를 비롯한 지도부 인사가 10주기를 앞두고 그에 관한 언급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溫家寶) 등 제4세대 지도부는‘허셰(和諧)’, 즉 조화를 내세우며 균형발전을 추구하였다.

덩샤오핑의 노선은 깊이 들어가면 그렇게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일단‘선부론(先富論)’으로 압축된다.이는 허셰 노선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의 마오를 대우했듯이 덩샤오핑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경이원지(敬而遠之)’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곁의 마오는 덩샤오핑의 행동에 대해 대단히 분노를 느꼈겠지만 마오 옆의 덩샤오핑은 후계자들의 이런 태도에 섭섭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덩은 선부가 긍국적으로 균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이미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20주기가 되는 2017년에는 덩은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잊혀져야 할 존재가 되었다.

총서기 겸 국가주석 시진핑은 이해 10월 열리는 19대를 앞두고 덩을 넘어서 마오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시점이었기 때뭄이다.

그것은 바로 덩의 지침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덩은 '불가촉' 존재였다.

덩샤오핑의 유해는 화장되어 1997년 3월2일 부인 줘린 등 가족들에 의해 연꽃에 싸여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가 생전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주권이 반환된 홍콩 땅을 밟고 싶다"는 소원은 실현되지 못햇다.

홍콩은 덩의 유해가 뿌려진지 꼭 4 개월을 하루 앞둔 이해 7월 1일 중국 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