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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소련 방문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마오 소련 방문

CIA bear 허관(許灌) 2017. 12. 25. 21:13


1949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70회 생일 기념식에 참가했을 때 촬영된 사진.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 마오쩌둥, 소련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 스탈린, 동독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이다

19491216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소련을 방문했다.

국공내전(1946 ~ 1949)에서 공산당이승리함으로써 공산중국이 성립된 이후 마오는 미국과 소련 틈바구니서 냉전으로 치닫고있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을 향한 일변도(一邊倒)외교를 기본 외교전략 지침으로 내세웠고 자신이 몸소 소련을 방문함으로써 이를 체현한 것이다. 마오에게 이는 첫 외국 방문이었다.

 

마오는 다음해(1950) 217일까지 2개월 하루 동안 소련에 머무르면서 이오시프 스탈린 등 소련 지도자들과 양당과 양국간의 정치, 경제, 문화 문제 등의 협력방안을 협의했으며 관련 조약과 협정을 체결했다(그런데 중국 기록에는 마오가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2차례 소련을 방문햇다고 한 것에 미루어 첫 소련 방문 후 다음해 217일 귀국할 때까지 모스크바에서 줄곧 체재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잠시 중국을 다녀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탈린은 '먼 곳에서 찾아온 ' 마오를 '친구'로 간주하지 않았다. 직접 면담하는 일을 차일 피일 미루기만 하엿다. 그러나 19501월 중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친슨의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애치슨 라인 발표 뒤 저우언라이가 합류한 가운데 이루어진 중소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결국 중국과 소련은 195021430년 만기의 중소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으며 창춘(長春)철도, 뤼순(旅順항 및 다롄(大連)항에 관한 중소 협정’, ‘중화인민공화국 차관제공에 관한 중소협정등의 협정을 체결했다.

 

마오가 소련을 첫 방문한 날로부터 꼭 만 29년 뒤인 19781216일 미국과 중국은 197911일부터 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고 미국은 대만과 단교한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이 발표 38 주년 2주일을 2주 앞둔 201612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10분 간의 전화 회담을 가졌다. 이는 미국과 대만 단교 후 양국 정상 간의 첫접촉으로 미국과 중국이 수교 후 견지해왔던 '하나의 중국' 원칙을 허무는 단초가 될 수도 있어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트럼프는 전임자들이 북핵 카드로 중국을 압박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북핵 문제에 대해 중국을 압박 하기위해 대만을 카드로 활용했을 뿐이었다. .

 

미국과 중국의 수교 발표로부터 19일 뒤인 19791225일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발생했는데 미소간 신냉전을 불러일으킨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과 중국이 연대하여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는 전략구도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냉전 초기 소련과 중국이 연대하여 미국과 대립한 것과 전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實用主義 路線)"

*애치슨 라인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이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 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앗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1950214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10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8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 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조약은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그리고 소련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 4. ~ 1945. 2. 11. )에서 합의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 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 같은 법적 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마오는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1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와 협상에 참여했다)

 

중국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마오가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1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112일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 미국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 대아시아 군사전략이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85'중국백서(白鼠)'를 통해 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런 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조약은 전문(前文)6개조의 본 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 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 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런 특권은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 대가로 미국의 적극적 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에서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 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중국의 유고화'를 노리는 미국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조약 체결 후 중국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2차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으로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관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낀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의 발발로 미국의 마오 티토화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 전진 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1950411일 발효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8일 전인 19794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이 조약의 폐기를 선언했다.




-중국정부는 반한족성향 만주국 등장을 우려해왔고 러시아는 중국정부 내부 극동지역을 침략할 수 있는 반러시아 세력 등장을 우려해왔다 

미국이나 영국정부는 일관성 있는 입장에서 만주지역을 중국정부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

러시아나 일본등은 만주지역을 만주국(만국)이나 소수민족 영토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러시아나 일본정부는 극동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지역 연결된 철도망만 인정했고 중국과 유럽지역 직접 연결 철도망을 우려해왔다

자국 패권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자유무역과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정책이 필요하다


일본과 유럽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중국정부의 일대일로 협력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그간 거리를 두었던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주도의 현대판 실크로드 경제권 구상 '일대일로(一帶一路)'에 협력할 방침이라고 교도 통신과 도쿄신문이 18일 보도했다.

매체는 복수의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아베 총리가 자신의 대외정책 '자유로이 열린 인도 태평양 전략'을 '일대일로'와 연대 제휴하는 형태로 협력을 추진할 의향이라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대중 견제 외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 태평양 전략의 목적을 전환해 새로운 중일 협력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라고 소식통들은 지적했다.

장기적인 시야로 일본 안전보장과 경제적 이익을 고려할 경우 갈수록 대국화의 길을 걷는 중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아베 총리는 판단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은 근래 들어 서로 고위급 접촉을 확대하는 등 관계 회복에 적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인도 태평양 전략에 관해 중국을 염두에 둔 대항조치가 아니라고 강조했는데 앞으로는 '일대일로' 구상과 '공존공영'을 지향한다는 자세를 명확히 내보이게 됐다.

이런 아베 총리의 대중정책 변화는 중일 관계의 회복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