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문재인 한국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마음이 급한것 같다" 본문
"3월 18일 러시아 대통령 선거 이후 미러관계 개선이나 신냉전구도에 따라 북미대화나 남북대화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김영남 명예직 국가수반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이나 북한군 총정치국장 인민군 차수 김정각(77세), 총참모장 인민군 차수 리명수(84세), 인민무력상 육군대장 박영식(68 ?) 등 주요 지휘부는 대부분 노년층 군인들입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오늘(17일) 남북정상회담 계획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우리 속담으로 하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메인 프레스센터(MPC)를 찾아 이렇게 언급하면서, “미국과 북한 간에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남북 대화가 미국과 북한과의 비핵화 대화로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통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과 관련, 남북정상회담과 미북 대화로 이어가는 여건을 만드는 데 실질적인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지난 10일 방북 초청을 받은 직후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답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오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우선 북한의 올림픽 참가로 우리 한반도의 고조됐던 긴장을 완화하고 평창올림픽을 안전한 올림픽으로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남북 단일팀과 공동입장, 공동응원 등이 전 세계인에 깊은 감동을 줬다”며 “남북 대화가 상당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개선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미 국무부는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하다고 확인되는 시점이 오면 대북 관련 다음 단계를 동맹국들과 협의하겠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2월 10일자 북한 노동신문. 2월 9일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의 동정을 보도했다
북한정부 핵무기 포기 방법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로 가능하다는 입장
핵무기를 소련으로부터 사실상 물려받은 우크라이나식 핵무기 포기방법보다는 주변국 정세를 이용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핵무기 포기 방법이 적합하다는 입장입니다
북한정부는 미일한 삼국동맹국이 북한을 침공할 수 있다는 여론 전략과 전술로 중국이나 러시아 민족사회주의 세력(자국 사회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세력)과 결탁으로 북한 핵무기를 개발해왔습니다 그리고 남한이나 일본조차도 핵무장론을 환기시키면서 핵 보유국 지위 여론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정부는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동결하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 방법 6자회담으로 우크라이나식 핵무기 포기방법보다는 수평적 권력교체와 극렬 민족주의 자주국방 노선 폐기를 선언할 수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핵무기 포기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북한 사회구성체는 국영 자본체제로 북한 주민은 승용차와 고급주택을 소유하고 반미이론과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북한식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김일성 가계 세습제 1인 종신직 특권층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유상교육 대학 출신 교육특혜 세대 상류층(북한 의무교육 중등학교 출신 중 30%이내 대학진학), 무상 의무교육 중등교육(중학교) 출신 평민층(근로계층), 무상 의무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영양실조나 식량난 취약계층 빈곤층으로 구분돼 있습니다 북한 주민 다수는 평민층과 빈곤층입니다 북한 빈곤층은 국제기구 식량원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영(國營) 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합니다.
1.평화적인 핵포기의 모범사례: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3개국 협상으로 구소련 핵무기 포기 그리고 안전보장[핵무기 폐기 및 이에 따른 보상원칙을 합의]"
우크라이나는 핵무기가 배치된 소련의 네 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네 공화국은 핵무기보유국의 지위를 러시아에 이양하는 협정을 합의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1,90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군부가 핵무장을 강력히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러시아와 미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안전보장을 희망했고, 그 결과로서 1994년 1월에 3자 선언이 채택되었습니다. 당시 세 나라의 대통령이 서명한 이 선언에서 미국과 러시아 양국은 비핵국인 우크라이나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안전보장을 약속했습니다.
첫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가 사용되는 침략에 희생되거나 그런 침략위협을 받는 경우 즉각 유엔안보리 차원의 지원을 강구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보유국과 동맹 하에 미국과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술적, 재정적인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능력을 해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던 일부 핵능력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영역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핵과학자와 기술 그리고 물질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995년에 우크라이나 과학기술센터가 설립되었는데, 2000년 중반 현재 이 연구센터에는 6,700여명의 과학자들이 290여개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보유국에서 비핵국가로 전환하는 데는 몇 가지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습니다. 첫째, 정권핵심부가 핵무기를 포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막강한 핵전력을 감안할 때, 소규모의 핵무기를 갖는 것이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의 안보우려를 자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우크라이나의 핵능력은 소련 핵전력의 일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한 투명성이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우크라이나가 신생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처음 등장했기 때문에 협정위반이나 기만과 같은 불미스런 전력이 없었고 따라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가 쉬웠습니다.
-1994년 1월 14일에는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3국 정상이 만나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폐기 및 이에 따른 보상원칙을 합의했다
-1991년 2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전술, 전략 핵무기를 이관하기로 합의했고, 1992년 5월에는 전술 핵무기 전량을 러시아에 이관했다. 1994년 1월 핵무기 폐기에 관한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3국 간의 협정을 체결하고 우크라이나 보유 핵무기인 SS-19형 130기, SS-24형 46기, 핵탄두 1840개 전량을 3년 내 해체하기로 했다. 해체된 핵물질은 러시아로 이관하고, 러시아는 이에 대한 대가로 원자력 발전소용 핵 원료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미국은 해체에 따르는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96년 6월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를 폐기 완료했다고 발표했고 2010년 4월에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은 농축우라늄을 전량 폐기했음을 선언했다. 1994년 핵무기 폐기 문제가 타결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국회는 핵확산금지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수탁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이 조약에 가입하는 것을 비준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다.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정상회의에서 핵확산금지조약 수탁국가인 미국과 영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안전보장 각서 교환과 함께 비준서 기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식 핵해법은 핵을 완전 폐기하는 대신 경제지원과 안전보장을 제공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문제 해결 방식.
구 소련(소비에트 연방)에 독립공화국으로 속해있다가 1991년 구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연방에서 탈퇴,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으로부터 176기의 핵미사일과 1800기의 핵탄두를 물려받아 세계에서 3번째로 핵을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우크라이나는 처음에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핵무장 해제를 꺼렸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는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이었고, 우크라이나는 미국, 러시아와의 수년간에 걸친 협상끝에 미국, 영국, 러시아 3개국이 공동으로 우크라이나에 안전보장(security assurance)을 제공하는 다자 안전보장 및 경제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핵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었다.
즉, 우크라이나 모델은 러시아의 안보위협을 이유로 핵무기 폐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영국이 러시아까지 참여한 다자간 합의각서를 통해 집단안전보장을 해줌으로써 핵무기 폐기를 성사시킨 방식이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우크라이나어: Міністерство оборони України)는 소련에게서 독립한 지 1개월 후인 1991년 9월 24일 설립한 군사 기관이다. 이후 우크라이나 내의 모든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 거대한 군은 재편성하는 데만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이후로, 우크라이나는 자발적으로 모든 핵무기를 포기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핵무기 사일로, 이를 기반에 둔 군사 기지 및 참모, 장비를 줄이는 데 대대적인 비용을 사용했으며, 유럽의 보편 군사 조약에 따라서 재편성했다.
우크라이나 핵포기 서명 직후의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통령 Bill Clinton (from left)[클린턴], Boris Yeltsin[옐친], Leonid Kravchuk[크라브추크]
2.남아프리카 공화국 핵무기 개발과 포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핵무기 포기정책은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남아프리카 주변국에 주둔했던 소련군 철수, 수평적 권력교체와 흑인 만델라 정부 수립으로 가능했다"
1960년대 이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이웃의 앙골라, 모잠비크와 적대관계가 되자(앙골라는 나미비아 독립운동을,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 1980년대 말까지 총 6기의 핵무기를 개발했다[이는 앙골라 등지의 내전에 소련이 개입함에 따라,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미국이 반공주의를 견지한 남아프리카의 백인 정권의 핵개발을 묵인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추가 핵무기 생산계획이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1989년 당선된 클레르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과 핵무기 폐기를 추진, 1991년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폐기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국내외 여론의 압박에 못이긴 국민당정권은 인종차별정책폐기를 선언하고 1990년 상징적으로 흑인 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여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계의 정치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의 정권이양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4년 남아공사상 첫 보통선거가 치뤄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하여 첫 흑인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가 선출됐다.
-1967년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남아공에는 우라늄이 많다. OECD 산하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우라늄 총매장량을 474만 3천 톤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호주가 총매장량 114만3천 톤으로 가장 많고, 카자흐스탄(81만6천 톤), 캐나다(44만4천 톤), 미국(34만2천 톤), 남아공(34만1천 톤) 등이 뒤를 이었다. 처음에 플루토늄 핵폭탄을 개발하던 남아공은, 우라늄 핵폭탄 개발로 정책을 변경했다.
1977년 미국과 소련의 정보위성이 남아공 칼라하리 사막에서 핵실험으로 보이는 섬광을 포착했다. 이후 남아공은 비공식 핵보유국 으로 간주되었다.
1979년 9월 22일 00:53 GMT, 남아공의 무인도 프린스에드워드 제도 근처 해상에서, 두 번의 섬광이 미국 벨라 (인공위성)에 탐지되었다. 남아공과 이스라엘의 3차 합동 핵실험인 오퍼레이션 피닉스였다.
1980년대 포신형 핵분열탄 6개를 조립했다. 1982년에 남아공 방위사업청 en:Armscor는 핵폭탄 생산을 시작하고서 오직 1개의 실전용 핵무기를 생산했다. 암호명은 호보(Hobo)였으며, 나중에 캐봇(Cabot)으로 불렸다. 핵출력은 TNT 6 kt이었다. 핵탄두는 나중에 분해되어 다른 핵폭탄 모델 개발에 재사용되었다. 방위사업청은 캐봇 다음에 TV 유도 활강 핵폭탄인 HAMERKOP 시리즈를 개발했다.
1989년 9월 14일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르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비핵화 정책을 추진했다.
IAEA는 1991년 11월부터 2년 반 동안 남아공의 모든 핵관련 시설에 대해 100여 차례의 사찰을 실시했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1993년 3월 의회 연설을 통해 "남아공은 핵무기 6개를 생산해 보유했으나 모두 폐기했고 개발 정보도 모두 파기했다"고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넬슨 만델라와 함께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남아공의 자발적인 핵포기 선언은 주변국에 주둔했던 소련군 등 철수로 체제 위협 요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994년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압승한 뒤 넬슨 만델라와 함께 지지자들 앞에 선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왼쪽). 자료사진
핵폐기, 남아공의 교훈
1993년 3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드 클레르크는 자국이 보유한 7개의 원자폭탄을 모두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남아공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폐기한 국가가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남아공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엔 제재 결의의 단골 대상이었고, 이웃 나라 앙골라와 분쟁 중이었으며, 국민들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강력한 억압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핵무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인들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비밀리에 개발되었다. 1989년 가을 드 클레르크가 취임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냉전이 끝남에 따라 앙골라와의 분쟁은 해소되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흑인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강력한 경제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때 드 클레르크가 선택한 길은 넬슨 만델라를 풀어주고, 아프리카민족회의나 공산당 같은 금지된 단체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안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시작함과 동시에 밖을 향해서는 평화국가로 나아간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1980년대 말의 남아공 상황은 지금의 북한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북한도 당시의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강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 분쟁 중이고, 민중은 강력한 억압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아공은 핵을 폐기했다. 북한의 경우와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남아공과 북한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권력을 잡은 집단이 권력을 내준 후에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의 차이일 것이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만델라를 풀어주기 전에 협상과정에서 흑인들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이 그 전과 마찬가지로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94년 흑인들이 참여한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드 클레르크는 부통령으로 수년간 권력을 누렸다. 만일 만델라를 비롯한 아프리카민족회의 간부들이 피의 보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국제적 제재가 심하고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고 그 대가가 막대하다고 해도 백인 권력층은 최후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유지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북한 권력층의 가장 큰 관심은 권력의 유지와 자손들의 안전일 것이다. 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미국과 남한에서 강하게 압박을 가하고, 굶주리는 민중의 동요와 탈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다른 선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남아공의 사례는 북한의 핵폐기와 변화를 끌어내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아공에서는 냉전 종식 후의 평화협정과 만델라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었고, 드 클레르크가 이에 화답하여 핵무기와 아파르트헤이트 폐기를 결정했다. 북한의 경우에는 평화협정과 남북연합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권력층이 외부의 공격으로 망하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남북연합은 그들의 자손들도 언젠가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남아공 핵폐기 사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고립화가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제네바 합의 파기 후 진행된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살펴봐도 그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북한의 핵무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남아공 사례는 이를 끌어낼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진정으로 북한의 핵폐기와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북한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 조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Map with S-300 operators in blue and former operators in red[파란색과 빨강색 국가들이 구소련(러시아) 미사일 방어시스텀 S-300 지대공 미사일을 운영하고 있는 국가들]
러시아가 첨단 지대공 미사일 S-400을 중국에 인도하기 시작했다고 `타스 통신'이 오늘(2018년 1월 18일) 보도했습니다.
러시아의 S-400 인도는 지난 2014년 중국과 체결한 판매계약에 따른 것입니다.
중국에 인도된 S-400 미사일 체계에는 통제실과 레이더 탐지기, 연료와 지원 부품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러시아가 S-400을 다른 나라에 판매하기로 계약한 건 중국이 처음이었으며, 터키가 지난해 두 번째로 러시아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S-400은 2007년 실전배치된 최첨단 장거리 방공미사일로, 전투기와 크루즈 미사일 등을 요격하는 것이 목적이며, 최대 사거리는 400km, 최대 고도는 30km입니다
'수소핵폭탄(핵탄두) 실험과 KN-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북중 등 9개국 27개사‧선박 28척 등에 “최대 제재” (0) | 2018.02.24 |
---|---|
일본 해상자위대, 북한 국적 유조선 해상 밀수 현장 포착 (0) | 2018.02.22 |
라트비아, 북한과 불법거래 ABLV 조사 후 조치 (0) | 2018.02.19 |
맥매스터, 북핵 압박에 무역 전면 차단해야 (0) | 2018.02.19 |
EU “평창올림픽 후 대북 제재와 관여 함께 추구” (0) | 2018.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