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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90주년 맞은 평양교구의 어제와 오늘 본문

-미국 언론-/평화신문등 종교계

설정 90주년 맞은 평양교구의 어제와 오늘

CIA bear 허관(許灌) 2017. 3. 27. 22:06

 

▲ 1940년 평양대목구 순천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던 시절 홍용호(오른쪽) 신부가 할머니 신자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이를 지켜보던 한 아이(가운데)가 인사 장면을 그대로 흉내내자 신자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평양교구 제공

 

                                                                       ▲ 1937년 봄 소풍을 가는 평양지목구 서포본당 주일학교 학생들.

 

▲ 1948년 4월 11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평양 기림리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어린이들. 당시 기림리본당 주임이던 조문국 신부가 뒷쪽 가운데에 서 있고 왼쪽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장정온(악니다) 수녀가, 오른쪽엔 강오숙(루갈다) 수녀가 서 있다.

 

독립된 교구로 현존한 90년 중 72년을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속에서 살아온 ‘순교의 교회’. 참혹하고도 오랜 박해 속에서도 순교 선조들의 희생과 순교 신앙을 기억하며 기도로 지켜낸 ‘희망의 교회’.

북녘땅 평양교구다. 17일 교구 설정 90주년을 맞는 ‘평양교구’의 어제와 오늘, 그 발자취를 돌아보며 내일의 북녘땅 복음화를 기약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관서교회, 곧 평양지목구가 설정된 것은 1927년 3월 17일이다. 서울ㆍ대구ㆍ원산대목구에 이어 한국 천주교회의 네 번째 가지로 서울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됐다. 1939년 7월 11일 대목구로,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교구로 승격했다.



북녘땅의 복음화 역사

그러나 평양에 복음의 비옥한 씨앗이 뿌려진 건 병인박해에 앞선 1862년이다. 그해 서울에서 세례를 받은 황해도 출신 이덕보(마태오)가 평안도를 순회 전교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당시 관서교회의 중심은 평양 외곽 논재(현 평양시 역포구역 대현동)로, 103위 성인 중 성 우세영(알렉시오)이나 성 유정률(베드로)도 논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순교했다.

관서교회가 재건된 건 1896년으로, 그해 평양(훗날 관후리 주교좌)본당이 설정되면서다. 섭가지(숙천본당)ㆍ진남포ㆍ의주ㆍ비현ㆍ신의주 본당이 잇따라 설립됐고 선교는 활기를 띠게 됐다.

평안도 복음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건 1923년 메리놀 외방 선교회가 진출하면서다. 메리놀회는 그해 패트릭 번 신부(훗날 주한 교황사절 주교) 등 전교 신부 3명을 파견, 지목구 설정을 위한 기초를 닦았고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해 지목구로서 면모를 갖췄다.

특히 1930년 2대 지목구장에 임명된 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은 6년간에 걸쳐 지목구를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지목구 설정 당시 5개에 불과했던 본당은 1936년에 19개로, 공소는 134개로 늘었고, 교세 또한 신자 1만 8000여 명에 예비신자는 3200명이나 됐다. 지목구의 첫 한국인 사제 양기섭 신부를 비롯해 강영걸ㆍ홍용호 신부 등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 배출했고, 1932년 국내 첫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어 3대 지목구장 서리에 부드 신부, 4대 지목구장 오셰아 주교 등이 대목구장직을 수행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다.

평양교구의 전성기는 1930년대다. 평양지목구는 ‘평신도 교회’로서의 색깔이 뚜렷했다. 1933년 9월 평양지목구 전교회장 강습회를 처음으로 열었고, 이듬해 8월에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평양지목구 평신도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모리스 몬시뇰은 ‘평양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 평신도들의 조직적 활동을 활성화했다. 평신도 유급 전교사 양성과 파견 또한 평안도 복음화의 기폭제였다. ‘조선 소년군’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가톨릭 스카우트 운동도 청소년 복음화에 이바지했다. 「가톨릭 연구 강좌」로 시작돼 「가톨릭연구」, 「가톨릭조선」으로 개칭 간행된 문서 보급도 선교에 크게 기여했다. 영유 여자기예학교(1927)나 평양 성모보통학교(1929), 신의주 성심학교(1937) 등 본당마다 개설된 교육기관은 문맹 퇴치와 함께 선교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전쟁과 공산화로 수난과 시련의 시대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평양의 선교활동은 먹구름이 낀다. 1941년 말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전원 추방됐고, 한국인 사제들이 교구 선교를 도맡아야 했다. 그럼에도 1943년 3월 홍용호 신부가 6대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돼 주교로 승품했고 한국인 사제들이 잇따라 사제품을 받으면서 평양대목구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인다. 1943년 교세 통계를 보면, 평양대목구는 본당 19곳에 공소 106곳, 교육기관 22곳, 복지시설 17곳을 운영했으며, 신자 수는 2만 840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해방 뒤 북한 전역이 공산화되면서 평양대목구는 수난과 시련, 박해 시대로 접어들었다. 1945년 10월 일제에 징발됐던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고자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협상하던 강창희(야고보) 평양교구 사무원이 총탄 3발을 맞은 채 유해로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가 피랍됐고, 15명에 이르는 교구 사제가 피랍 행방불명되면서 평양대목구 공동체는 ‘침묵의 교회’가 돼야 했다. 10ㆍ19 평양 수복으로 일시 교구 재건이 이뤄지는가 했지만, 두 달이 채 못돼 UN군이 철군하면서 평양교구는 지금까지 ‘박해받는 교회’로 남았다.



평양교구 미래를 위해 기도

혼란의 시기에 평양교구 신학생과 수녀, 평신도들은 대거 월남했다. 신학생 중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전 원주교구장 고(故) 지학순 주교,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평양교구장 서리 대리 황인국 몬시뇰,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정의채ㆍ최창화 몬시뇰 등이 남에 내려와 사제품을 받았고, 이 밖에도 20여 명의 신학생이 월남해 서울ㆍ부산교구에 입적했다. 이들 중 현재 14명의 사제가 서울대교구에 생존해 있다. 북한에는 사제와 수도자가 1명도 남아 있지 않다. 월남한 평신도들은 1949년 11월 평양교구 신우회를 발족, 현재까지도 매달 서울과 부산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평양교구를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한 1975년 김수환 추기경, 1998년 정진석 추기경, 2012년 염수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아 통일에 대비해 선교 역량을 키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