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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월남자 가족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문재인 본문
한국전쟁 월남자 가족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문재인
CIA Bear 허관(許灌) 2017. 1. 21. 19:25
"머리소리함 문재인 선배는 1953년 경남 거제에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머리소리함은 대한민국 지위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知積能力團입니다]
경남 중고등학교와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고 특전사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사법시험 합격 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민운동에 매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에서 함께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첫 인연을 맺은 뒤, 줄곧 민주주의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동지로 함께 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전 변호인을 맡았고 서거 이후 장례 등 관련한 모든 절차를 도맡았다 그 뒤로도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아름다운 봉하재단 감사등을 맡았고 관련 기념사업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힘썼다
정권교체를 위해 범야권 통합운동을 이끌며 정치 일선에 뛰어들고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밤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했다 민생과 서민의 행복을 위한 정책을 설계하며 , 투명하고 공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한길을 걸어온 문재인의 정치관은 '사람이 먼저이다'라는 구호로 요약된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더불어 민주당 당대표로서 야권을 이끌었다
함께 걸어야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새롭게 기회가 열린 시대의 문 앞에 그는 서 있다" [대한민국 묻는다 문재인:民主는 民有,民治,民享政府입니다]
"자유화 개방화정책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Fro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국영 기업 [國營企業]
국가가 직접 세워 운영하는 기업
*공기업 [公企業]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자본으로 설립하여 운영되는 기업
*사기업 [私企業]
개인 또는 사인(私人)과 같은 민간인이 출자하여 경영하는 기업
공산주의 국가에는 원칙적으로 사기업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기업 [私企業]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적인 기업체제이자 현대 고도산업사회의 핵심적인 구성체로 산업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극동지역과 동북아 지역 각국 GDP
"미국 1인당 GDP 56,421$(5위).일본 1인당 GDP 38,215$(22위).한국 1인당 GDP 36,601$ (29위).러시아 1인당 GDP 24,067$(53위).중국 1인당 GDP 13,801$ (75위), 몽골 1인당 GDP 5,403$(121위), 북한 1인당 GDP 2,400 $(2014년도,채무불이행 국가-국영자본체제)"
-중국정부도 1인당 GDP 2만 달러 진입 수준으로 고도 소비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도소비사회는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고소득층이 국가 경제 주도층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다]
-고도 소비사회(고소득층)에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유무역으로 국가간의 경제통합이 필요하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대한민국)"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자본주의 민주주의와 대한민국,新韓國 건설과 통일]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After the capitalist democracy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t(social rights, Right to life) coexist (respect) is a free society" -Free Society[Democratization government]-
*Three principles of Capitalism[Economy]:Private property, pursuit of profit, Principle of free market competition Etc
*Three principles of Democracy[Politics]:government of the people(民有), by the people(民治), for the people(民享) Etc
-Fro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제6공화국 헌법은 대한민국 역대 공화국 중 가장 진보적이면서 국제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헌법입니다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와 총리의 국회 동의(재적의원 과반수 찬성)로 책임 총리제를 도입할 수 있는 국회중심(국회우위) 권력구조입니다
단임제 대통령이 사임하더라도 국회 중심 권력구조로 총리가 내각을 운영할 수 있으며 사임 즉시 새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6공화국 헌법을 올바르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장기집권 정당이 등장하는 것이 올바릅니다[총선결과 책임총리가 국회동의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차기 대통령은 총리로 추대하는 것이 올바른 권력구도 대통령 단임제 장점입니다.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여당 총리가 차기 대통령,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야당 총리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이 단임제 권력구도입니다]
지도자는 사라지더라도 정당은 영구히 지속돼야 합니다
그래야 1인 독재정치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그래야 정당(국회) 권력이 아닌 청와대(비서실 본관과 부속실) 권력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국회는 내각을 제어할 수 있지만 청와대(비서실 본관과 부속실)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책임총리 도입으로 청와대 본관(집무실, 양지)이 내각으로 돼야 하며 청와대 부속실(음지, 비선조직)이 대통령 비서실이 돼야 함니다]
정당 당명이 국가적 국민적 통합과 호응이 필요하며 국제적 입장도 고려돼야 합니다
-문재인 후보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피란을 와서 거제 포로수용소 인근인 경남 거제면 명진리 남정마을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문 후보가 태어났고, 7살 때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부친 문용형씨는 고향에서 ‘수재’라는 소리를 듣던 인물이었다. 함경남도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흥남시청 농업계장·과장을 지냈다. 전쟁은 부친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한국전쟁 월남자는 대부분 국군(유엔군)에 가담한 자위대(치안대) 출신들이다[부친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
흥남 철수 작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사진)
흥남 철수 작전 미군 메러디스 빅토리호[한국전쟁 월남자 가족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문재인]
문재인 더불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친 문용형선생이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한국전쟁 월남자는 대부분 국군(유엔군)에 가담한 자위대(치안대) 출신들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어-맥코맥사(Moore-McCormack Lines)의 화물선이다. 길이 455피트(약 138.7m). 7천600t.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1.흥남 철수 작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2.해체와 포상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있었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선 이 배의 철수 작전의 전말을 담은 <Ship of Miracles>(저자 Bill Gilbert, 출판사 Triumph Books)라는 책이 출판됐다. 이 책은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됐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1년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우연히 참석했던 재미동포 기업가 안재철씨는 라루 선장의 삶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이후 흥남철수 관련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냈다. 안씨는 철수 작전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씨와 함께 기네스 기록 등재를 신청했고,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3.레너드 P. 라루 선장
라루 선장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작전 참가 업무가 끝났고,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항해를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너스 수사가 몸담았던 성 바오로 수도원은 마리너스 수사가 숨지기 이틀전 한국의 왜관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후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돼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4.일등항해사 로버트 러니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는 1927년 12월 15일 뉴욕 브롱스에서 출생하여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1950년 6월 뉴욕 알프레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 진학을 목적으로 학비를 모으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취업하여 레너드 라루 선장을 도와 22살의 나이로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연하게 수도자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의 장례미사에서 만난 미국계 한인사업가 안재철씨를 만나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민간 배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하여 등제하였다. 이후 1954년 뉴욕 코넬대 로스쿨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계속해서 예비역으로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제독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미군 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러니는 2004년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사진)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1.전개
앞서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38선을 넘기 시작하자 북한이 미리 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부가 중공군 국가 안으로 들어가 중공군 도움을 요청하고 중공군 역시 한국전쟁에 개입을 할 때부터 시작했는데 중공군이 드디어 11월 27일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일으켜 국제 연합 사령부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이어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평양은 이미 12월 4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에 북한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1)장진호 전투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2)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철수 작전
김백일 1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2.결과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3.참고
(1)관련 서적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마틴 러스(Martin Russ) 저, 임상균 역, 나남출판, ISBN 978-89-300-8026-2 =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 묘사.
《Ship of Miracles》, 빌 길버트(Bill Gilbert) 저, 트라이엄프 북스(Triumph Books) =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활약을 다룸.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
《생명의 항해》, 안재철 저, 1천117쪽 =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을 다룸.
《온양이》, 선안나 저, 44쪽 = 흥남철수 작전 마지막 피란선 이야기
(2)관련 방송
《스펀지 2.0》스페셜 크리스마스 기적 (2009년 12월 25일)
《정전60년 특집 다큐 기적의 김치 파이브》 (2013년 6월 25일)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많은 한국, 미국, 영국등 16개국 유엔군이 희생 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에 가담한 많은 북한 주민들이 월남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이 한강 이남을 진격하다가 유엔군 반격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1958년 10월 26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군(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완전 철군했다
-미국과 중국 국교 40년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분야에서 군사분야까지 협력하고 있으며 양국 자유 무역협정을 준비해 나아가고 있다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한국도 선진국 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으로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며,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3대 원칙으로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정부이고 오늘날 독재주의(전체주의)는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나 국영기업등) 세력이다[국가사회주의는 군정통합주의 군사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공화국보다는 군정분리주의(당군이론) 군사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최고지도자 제도를 두고 있는 국가이다]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법대 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1975년 8월에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군복무 중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했다[유신정부 때 운동권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자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이다 전두환정부는 국가사회주의 성향(자립경제와 자주국방노선) 박정희 유신정부와 다른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노선을 추구한 개혁개방화 세력들이다]
그리고 자유사회 문재인 선배는 경남 중과 경남고 출신 선배 민주화 선구자 김영삼 전대통령의 신민당 총무와 총재시절에 민주주의에 대한 흠모로 자유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그 이후 노무현전대통령과 함께 변호사로 각종 시국범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선진국 법치주의 확립과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생존권(사회권) 보호 확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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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총리, 육군 대장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일본 군국주의(大本營,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범 최고 지도자의 도조 히데키(사진)
-대본영(大本營):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천황의 직속으로 최고의 통수권을 행사하던 지휘부(최고 권력기구, 북한 국방위원회 성격)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로부터 독일국민의 해방을 위하여 제정된 법규는 이 기본법의 규정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는다. [독일연방헌법 제139조-해방법률]"
"
제2장 전쟁의 포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 내지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하게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 해, 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일본 헌법 제9조)[전쟁의 포기 등을 규정한 헌법 제9조를 계속 유지하는 일본국민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
"제5조①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대한민국 헌법 제5조 2항 군의 정치적 중립성 선언]"
독일이나 일본, 한국헌법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헌법으로 침략주의 전쟁세력이며 독재주의(전체주의) 세력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세력[히틀러 국가사회주의나 스탈린 일국사회주의 이론(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사회주의 공화국 이론) 등]과 투쟁으로 경제건설, 통일 국가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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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자본체제 북한(자료)
북한 2014년 새해의 선전 포스터 배경 자료 "남북 전쟁추진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주체연호 사용과 극렬민족주의 반미노선 김일성 김정일주의 표방]"
1인당 GDP $2,400(2014년도,채무불이행 국가) 국영자본체제 북한
1.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중국인이나 외국인 투자가들도 상가나 고급 아파트등을 소유하고 있는 분도 많다 북한이 개혁 개방화 될 수록 임대 아파트보다는 개인 소유 아파트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표,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2.북한 남녀징병제 국가로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중국은 직업군인 지원 모병제이지만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북한 인민군 병사의 수는 120만 명으로 이 중 여성 군인은 15% 약 17만명에 달했다. 북한의 인구는 약 2400만명으로 1000명에 7명이 여성 군인, 인민군 군인 100명에 15명이 여성 군인 셈이다
북한정부는 북한 아동들의 영양부족으로 인민군 입대 신체 조건을 "키 138cm이상, 몸무게 43Kg 이상"으로 실행하고 있다
14세때 징병명부 등록, 15세때 신체검사, 16세부터 인민군 입대를 하고 있다
병역 근무 자리 비리가 북한 군부내 가장 큰 비리로 알려지고 있다
매관행위는 인민군을 감시하는 총정치국 정치 지도원이라는 유리한 자리에는 5 천 ~ 2 만 달러 (약 50 만 ~ 200 만 원), 지방 관리는 약 5 천 중국 위엔화 (약 8 만원)에 직위를 사고 파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식통은 "공직에 붙으면 뇌물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1주일에 의거을 회수 할 수 있다고 된다"고 말했다
현역군인이나 군(軍)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년,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년.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단,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3.제3공화국 헌법과 자영업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에 자영업이 늘고 있다. 1990년대 장마당 상인으로 출발한 자영업자들이 숙박업, 개인 버스, 사금융업, 아파트 매매 등으로 활동을 넓히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북한에 ‘돈주’로 불리는 신흥자본가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고 영국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지난 10월29일 평양발 기사에서, “돈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돈주가 외화를 써가며 비공식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전했다.
‘돈주’는 1990년대 후반 발생한 ‘고난의 행군’의 산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이 문을 닫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장마당으로 나와 장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바로 돈주라는 것이다.
"써비차는 개인이 하는 운송, 버스, 택시 이런 건데,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경제난 이후 개인들이 먹고 살려고 만든 건데, 이것 없이는 이동을 못해요.”
이밖에 숙박업자, 노래방 업자, 비디오 촬영업자, 매대 분양업자도 생겨난다
4.북한 부채 140억달러
미 재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30여개국에 140억달러의 빚을 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별 부채 규모는 1위 중국( 69억8000만달러), 2위 러시아(10억1000만달러), 3위 일본(3억달러), 4위 스웨덴 (3억3000만달러), 5위 이란(3억달러)과 독일(3억달러), 6위 프랑스(2억8000만달러), 7위 태국 (2억6000만달러), 8위 오스트리아(2억1000만달러), 9위 시리아(1억4000만달러), 10위 스위스 (1억달러), 11위 대만(8600만달러) , 12위 이라크 (5000만달러) 등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회의정부 인민민주주의를 포기하고 1970년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으로 인민경제 파탄 일인 장기집권과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를 수립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남한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으로 북한 전체 부채 절반 수준 69억8000만달러이다
5.북한 영화는 우리식 사회주의 김일성노선으로 군대 방식으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이나 서양사람은 적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정치 선전물로 입장료는 무료이다
북한 영화는 예술성이 없고 권력의 시녀이다
북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영화도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며 정치 선전에 적합하여야 한다.
북한 영화의 촬영은 군의 관리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연자가 하는 말과 시간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북한 헌법
1.제1공화국--인민 민주주의 헌법(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 순수 내각책임제)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 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1)제1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 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 되었다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1972년 12월 14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총사령관-김일성 내각수상(노동당 총비서=노동당 당수)
2. 제2공화국-사회주의 헌법(사회주의 공화국, 주석제 또는 신대통령제)
(1) 제2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1994년 7월 8일
ㄴ.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통수권자(총사령관)
ㄱ.김일성 국가주석 겸 내각수반,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및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 1972년 12월 15일-1991년 12월경
ㄴ.김정일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노동당 중앙 군사부위원장) 1991년 12월--1998년 9월 5일
3.제3공화국-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제3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2)인민군 총사령관과 군정(내각) 책임자(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총참모부
ㄱ.김정일 국방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총비서)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
ㄴ.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제1비서) 2012년 4월 12일--현직
*Separation of the military administration and command[軍政分離主義,兵政分離主義]
North Korea, Imperialism etc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과 군령을 분리된 국가제도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의 역할을 내각과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로 분리함으로써 군정은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에 두지만 군령은 정부나 의회보다 우월한 군령권을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군 통수권에 정치적 판단(의회통제)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최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군 인사권이 주어지고 있다
군정분리주의는 군(軍)통수권 독립이 허용되는 모델로 국가수반(국가주석이나 총통)이 군 통수권자가 아닌 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다
1,중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중앙군사위원회 조직이다(당군이론)
제4절 중앙군사위원회(中央軍事委員會)
제93조 ①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는 전국 무장역량을 영도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아래 자로 구성한다.
주석·부주석약간인·위원약간인
②중앙군사위원회는 주석책임제를 실행한다.
③중앙군사위원회의 매회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회 임기와 같다.
제94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책임을 진다.[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절]
2.북한:북한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이다(당군이론)
제2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제 100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령도자이다.
제 101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임기는 최고인민회의임기와 같다.
제 102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반적무력의 최고사령관으로 되며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한다.
제 103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국가의 전반사업을 지도한다.
2. 국방위원회사업을 직접 지도한다.
3. 국방부문의 중요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4. 다른 나라와 맺은 중요조약을 비준 또는 페기한다.
5. 특사권을 행사한다.
6. 나라의 비상사태와 전시상태, 동원령을 선포한다.
제 104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명령을 낸다.
제 105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
제3절 국방위원회
제 106 조: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국방지도기관이다.
제 107 조: 국방위원회는 위원장,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제 108 조: 국방위원회임기는 최고인민회의임기와 같다.
제 109 조: 국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선군혁명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국가의 중요정책을 세운다.
2. 국가의 전반적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한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집행정형을 감독하고 대책을 세운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페지한다.
5. 국방부문의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
6. 군사칭호를 제정하며 장령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제 110 조: 국방위원회는 결정, 지시를 낸다.
제 111 조: 국방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북한 헌법 제2.3절]
3.이란
이란정부도 병정분리주의(兵政分離主義) 군사정책으로 외교·국방·언론·사법·전쟁선포권등 최고지도자 권한이며 선출직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한다
이란정부는 자유선거 제도 도입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 형태로 대통령이 외교 국방등 실질적 권한을 행사해 나가고 있다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북한 군부 실권자]
1.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소련군정의 치스차코프 대장] 1945년 8월 15일-1947년 2월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최용건 민족보위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47년 2월 -1950년 7월 4일
3..김일성 군사위원회(내각 수상) 위원장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50년 7월 4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4.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5.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6.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7.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독일정부 통일정책: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으로"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공화국(자유사회 선진국)이다"1단계-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반공산주의)자본주의 3대원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시장경쟁원리등2단계-민주화 정책(민주주의=반국가사회주의)민주연합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공동정부 수립(통일정부)
"남한 김일성주의 반군무장단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민혁당의 새세대)을 제거할 것도 Guide Ear(귀, 뇌 감청기 조언과 망각.명령.능력부족-뇌 조종)팀이 아닌 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 요원 Bird's Eye(눈,해독-요원의 지적능력)이다
남한 김일성주의 반군무장단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민혁당의 새세대)란
반제동맹(김영환팀의 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1990년 1월 새세대, 민혁당 등)"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은 국제기구 요원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태어 날 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기억을 검증하는 국제기구 시스템..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 감청기 머리소리함[Bird's Eye&Guide Ear]은 Guide Ear(귀, 뇌 감청기 조언과 망각.명령.능력부족-뇌 조종)팀이 항시 요원의 Bird's Eye(눈,해독-요원의 지적능력)을 존중해야 한다사고나 신변상 위해가 있을 때 전적으로 Guide Ear(귀)팀 책임이다. 한국 대북외교는 미국축에서 추진해야 한다 許灌
*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북한정부 통치자(실권자-군 통수권자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ㄱ.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1948년 9월 9일
(ㄱ)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북한 김일성 前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
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중국 공산당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ㄴ)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ㄷ)후세인과 김일성등 국가사회주의 세력은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 주도 소련 군부쿠데타를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군부 쿠데타를 반대했다
중국과 소련등 반미세력이 퇴진하면서 일어난 사건 임표사건, 소련군부 쿠데타등이다 북한정부는 항시 반미세력편에 가담했다(김일성세력은 임표 반란나 소련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극동소련군 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다)
a.중국정부와 미국정부, 일본정부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1971년 임표등 중국 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은래 등소평등 수교 교섭세력 승리
b.1992년 한국과 소련국교 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소련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 옐친등장
ㄴ.김일성 총리 겸 인민군 총사령관(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ㄷ.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ㄹ.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ㅁ.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ㅂ.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의회는 친미,친서방 성향이고 군부는 반미, 반서방 성향이다(구소련 권력기구 성향과 비슷하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그룹]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
한국전쟁 이후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주의 주체사상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이론 도입으로 구소련이나 중국처럼 붕괴 되어가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후 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를 낸 밖에 일본 당국에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 해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리안 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연해주의 보로시로후 · 우수 리스크 교외 북쪽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А), 투르크 메니스탄의 케루키 교외 남쪽 (B) 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Б)를 설영했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이 야영지에 따라 제 88 독립 저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 · 나 · 나아 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충족은 동북 항일련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 해, 제 88 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리안 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의 장교가 임명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 소총 대대
무선 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 · 파괴 공작 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여단 그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 인 수행과이 때 발휘 된 용기 및 용기 "에 김일성에 적기 훈장이 수여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미국정부)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유엔군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많은 한국, 미국, 영국등 16개국 유엔군이 희생 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에 가담한 많은 북한 주민들이 월남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이 한강 이남을 진격하다가 유엔군 반격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1958년 10월 26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군(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완전 철군했다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의 직접적 위협은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이다
동아시아 국가 중국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로 동남아시아(광동성, 운남성 등), 남부아시아(티베트 등), 중앙아시아(신장 등), 동북아시아(동북3성과 내몽골등), 소중국(한족 거주지)으로 구성된 동아시아 국가이다
러시아 극동연방관구과 북극해, 미국 알래스카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Thank you very much.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
"친미주의자 개혁개방세력(자유화 민주화 세력) 문재인 후보가 차기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진보성향(좌파성향) 더불어 민주당 이미지를 극복하고 온건보수주의(온건진보주의) 국민통합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지 관건입니다. 자유주의 운동을 진보세력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좌파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자유주의 운동을 무정부주의자(동성애나 동성결혼, 마약복용등)를 지칭하고 있으며 극단적 사회주의 운동을 국가사회주의자(극단적 민족주의 운동, 국영기업이나 군국주의 등)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64) 전 대표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공식 확정됐다. 문 후보는 어제(3일)까지 모두 네 차례 실시한 권역별 순회경선에서, 누적 득표율 57.0%로 과반의 지지를 얻어 결선투표 없이 본선으로 직행했다.
안희정 지사는 누적 득표율 21.5%로 최종 2위에 올랐고, 이재명 시장은 0.3% 적은 21.2%로 3위에 올랐다.
문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국민통합'과 '적폐청산'을 핵심 기치로 내세웠다. 국민을 좌절시킨 모든 적폐를 완전히 청산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정신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문 후보의 수락연설 전문.
위대한 국민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먼저 우리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참여해주신 많은 국민들, 당원동지들, 그리고 아름다운 경쟁 끝에 제게 힘을 모아주신 안희정, 이재명, 최성 후보와 지지자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69년 전 오늘, 제주에서 이념의 의미도 모르던 양민들이 이념의 무기에 희생당했습니다. 이념 때문에 갈라진 우리 조국은 그에 더해 지역이 갈리고, 세대가 갈리고, 정파로 갈리는 분열과 갈등과 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69년 후 오늘, 이제 우리 대한민국에서 분열과 갈등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저는 선언합니다.
국익보다 앞서는 이념은 없습니다.
국민보다 중요한 이념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좌우를 나누고 보수-진보를 나누는 분열의 이분법은 이제 쓰레기통으로 보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머리에 남은 대립과 갈등, 분열의 찌꺼기까지 가차없이 버려야 합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분열의 시대와 단호히 결별하고 정의로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습니다.
승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촛불을 밝혔던 우리 국민들입니다.
국민주권시대를 요구하는 온 국민의 승리입니다.
역사는 명령합니다.
국민도 명령합니다.
국민이 집권해야 정권교체다!
국민의 삶이 달라져야 새로운 대한민국이다!
시대를 바꿔라!
정치를 바꿔라!
경제를 바꿔라!
문재인, 그 명령을 받들어 국민대통령시대를 열겠습니다.
이번 대선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아닙니다. 정의냐 불의냐의 선택입니다.
상식이냐 몰상식이냐의 선택입니다.
공정이냐 불공정이냐 선택입니다.
과거 적폐세력이냐 미래개혁세력이냐 선택입니다.
적폐연대의 정권연장을 막고 위대한 국민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제가 정치를 결심한,
목표도 바로 그것입니다.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이제,
정치의 주류는 국민이어야 합니다.
권력의 주류는 시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의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저와 경쟁한 세 동지의 가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희정의 통합 정신!
이재명의 정의로운 가치!
최성의 분권의지!
이제 저의 공약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대의원 동지 여러분!
이번에 우리 당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선을 했습니다.
저는 자부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세분 동지들 덕분에 우리당이 더 커졌습니다.
덕분에 저도 배웠습니다.
안희정 동지에게서 당당하게 소신을 주장하고 평가 받는 참된 정치인의 자세를 보았습니다.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바꿔보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담대했습니다.
이재명 후보에게서 뜨거운 열정을 배웠습니다.
그의 패기와 치열함은 남달랐습니다.
최성 후보의 도전정신도 아름다웠습니다.
끝까지 멋진 완주,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경쟁과 승복을 보여주신
세 동지의 모습을 뜨거운 박수와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세 동지와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세 동지가 저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세 동지가 미래의 지도자로 더 커갈 수 있게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민주당 정부가 다음, 또 다음을 책임지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제가 반드시 정권교체의 문을 열겠습니다.
저는 정권교체의 희망이 되고 있는 우리 더불어민주당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특히 무려 214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경선 참여로 정권교체 희망이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5월 9일, 반드시 승리해서 보답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더불어민주당 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입니다.
국민의 열망과 당의 열망을 모두 끌어안고 제가 해야 할 모든 노력과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우리당의 모든 국회의원들, 모든 당원동지들에게 요청 드립니다.
모두, 함께 해 주십시오.
그 동안 어느 캠프에 있었든 누구를 지지했든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입니다.
다 같이, 함께 해 주십시오.
함께 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국민들께 세 가지를 약속 드립니다.
첫째, 경제와 안보 무너진 두 기둥을 기필코 바로 세우겠습니다.
피폐해진 민생을 보듬고, 추락하는 경제를 살리고,
구멍난 안보를 세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짜 경제다!
이것이 진짜 안보다!
피부로 느끼고 눈에 보이게
성과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미! 그럴 준비가 돼 있습니다!
둘째, 불공정 부정부패 불평등 확실히 청산하겠습니다.
국민을 좌절시킨 모든 적폐, 완전히 청산하겠습니다.
누구를 배제하고 배척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가자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시스템을 공정한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모든 적폐는 적법 절차에 따라 청산될 것입니다.
이미! 그럴 준비가 돼 있습니다!
셋째, 연대와 협력으로 통합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습니다.
국민은 상식과 정의로 통합되길 갈망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마음이 모아지길 희망합니다.
국민의 요구는 간명합니다.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문을 활짝 열어 많은 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이미! 그럴 준비가 돼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당원, 대의원 동지 여러분!
새로운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 상식과 정의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 이런 국민들이 주역이고 주류가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반문연대’ ‘비문연대’ 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겁내고,
저 문재인을 두려워하는 적폐연대에 불과합니다.
저는 어떤 연대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와 우리당의 뒤에는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국민이 있습니다.
국민과 같이 하는 정치, 미래로 가는 정치여야 합니다.
저와 민주당은 국민과 연대하겠습니다.
오직 미래를 향해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쓴 위대한 국민들입니다.
국민들은 준비되어 있고, 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남, 호남, 충청 전국에서 고르게 지지 받는 지역통합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청년과 중년, 노년층에서 고르게 지지 받는 세대통합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보수 진보를 뛰어넘는 국민통합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일자리를 반드시 해결해서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깨끗해서 자랑스런 대통령,
공정해서 믿음직한 대통령,
따뜻해서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위대한 국민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대한민국 영광의 시대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여정을 오늘 시작합니다.
함께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 전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 국호 대한(大韓)과 3.1운동 주도세력 신민회(新民會)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 이념 국체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포용하여 건국한 정부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호는 대한이며 국체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대한)은 고종 국왕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삼한정통설[三韓(三國)正統說] 입장으로 건국한 국호입니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대한민국)[삼한정통설, 대한은 삼한(삼국)이다. 삼한은 마한(고구려=고려),변한(백제), 진한(신라)이다. 대한민국]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민주(民主, 백성의 주인) 3대 원칙은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이고 공화국(共和國)은 다수인이 국가권력을 보유하고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뜻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6공화국 헌법 제1조]"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영 기업 [國營企業]
국가가 직접 세워 운영하는 기업
*공기업 [公企業]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자본으로 설립하여 운영되는 기업
*사기업 [私企業]
개인 또는 사인(私人)과 같은 민간인이 출자하여 경영하는 기업
공산주의 국가에는 원칙적으로 사기업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기업 [私企業]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적인 기업체제이자 현대 고도산업사회의 핵심적인 구성체로 산업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고도소비사회는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고소득층이 국가 경제 주도층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다
-고도 소비사회(고소득층)에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유무역으로 국가간의 경제통합이 필요하다
*극단적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국영기업, 군국주의)
*극단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마약복용,동성애)
*북한은 국영자본체제 반미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세습제 독재정부이다 북한정부의 반체제인사는 자유화, 민주화세력이다
남한정부 내부 친북세력은 자주노선 반미세력(국가사회주의 세력)이다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미국과 중국 국교 30년 기념 주요 사진
호금도 주석과 부시 대통령은 중미 수교 30년래 양국관계 발전이 이룩한 성과를 서로 축하한 한편 중미 수교 30주년 기념행사가 성공하기를 미리 축원했습니다. 호금도 주석은 중미관계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적극적인 평가에 찬성한 한편 부시 대통령이 중미 건설적 협력관계를 위해 노력한데 대해 높이 평가한다고 표시했습니다.
호금도 주석은 새로운 역사시기 중미 쌍방이 공동으로 노력한다면 꼭 양국 건설적 협력관계의 대세를 틀어쥐고 중미관계의 건전하고 안정하며 전면적이고 심도있는 발전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30년간 미중 양국은 양호한 협력을 진행해 왔다면서 이는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대통령 담임기간에 자신이 호금도 주석과 양호한 협력을 진행한데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
The China-visit of President Richard Nixon symbolizes the beginning of the normalization of Sino-US relations. Chairman Mao Zedong met with President Richard Nixon in Beijing.
(모택동과 닉슨)
*On October 1, 1970, Chairman Mao Zedong met with American friend Mr. Snow on Tian'anmen rostrum in Beijing. Chairman Mao Zedong expressed his goodwill to receive Mr. Nixon to visit China, no matter as a tourist or the President.
*Vice Premier Deng Xiaoping hosted a banquet to welcome visiting US President Gerald Ford and his wife(등소평 전주석과 포드 전대통령 내외)
On December 1, 1975, Vice Premier Deng Xiaoping hosted a banquet in name of Premier Zhou Enlai in the Great Hall of the People in Beijing, in honor of President Gerald Ford and his wife. The picture shows the host and guests walking into the banquet hall.
* In July of 1971, Premier Zhou Enlai met with Dr. Kissinger, the National Security Advisor to US President, who was on a secret mission to China. Both sides made a public announcement that the US President Richard Nixon would be invited to visit China soon.(주은래와 키신저)
*
In January of 1979, Deng Xiaoping visited the United States. This was the first visit of Chinese leader to U.S.A. since the foundin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President Jimmy Carter held a welcoming ceremony at White House in his honor.
*Deng Xiaoping met President Ronald Reagan at the Great Hall of the People in April, 1984(등소평 전주석과 레이건 전대통령)
*
In July of 1985, Chinese President Li Xiannian met President Ronald Reagan and Vice President George Bush during his visit to U.S.A.
*
On March 15, 1989, US President George Bush visited China. He happily accepted the present–a bicycle from Premier Li Peng.
(부시 전대통령과 이붕 전총리)
*
On September 8, 2000, President Jiang Zemin met with US President Bill Clinton at New York Waldorf Hotel during his visit to US.
(강택민 전주석과 클린턴 전대통령)
2002年10月25日、ブッシュ大統領は江沢民主席夫妻をテキサス州クロフォードの個人牧場に招いた。
*On October 21, 2001, Chinese President Jiang Zemin welcomed US President George W. Bush, who came for the 9th Informal APEC Leadership Meeting, at the Science and Technology Museum, Shanghai.
(부시 대통령과 강택민 전주석)
*부시대통령과 호금도 주석
*오바마대통령과 습근평 국가주석
*트럼프 대통령과 습근평 국가주석
미국과 중국 국교 40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분야에서 군사분야까지 협력하고 있으며 양국 자유 무역협정을 준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
기간 | 학교명 | 소재지 |
---|---|---|
~ 1965 | 남항초등학교 | 부산 |
~ 1968 | 경남중학교 | 부산 |
~ 1971 | 경남고등학교 | 부산 |
~ 1980 | 경희대학교(전공 : 법률학과) |
기 간 | 근무 및 활동내용 | 직 위 |
---|---|---|
1980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 |
1984 | 한국해양대 해사법학과 | 강사 |
1985 | 부산민주시민협의회 | 상임위원 |
1988 | 한겨레신문 | 창간위원 |
1989 ~ 2002 |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 이사, 부이사장 |
1995 ~ 2003 | 법무법인 부산 | 대표변호사 |
1995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 부산지부, 경남지부 대표 |
1995 | 부산지방변호사회 | 인권위원장 |
1996 | 부산YMCA | 이사 |
2001 ~ 2002 | 노동자를 위한 연대 | 공동대표 |
2003 ~ 2004. 02 | 대통령비서실 | 민정수석비서관 |
2004. 05 ~ 2005. 01 | 대통령비서실 | 시민사회수석비서관 |
2005. 01 ~ 2006. 05 | 대통령비서실 | 민정수석비서관 |
2007. 03 ~ 2008.02 | 대통령비서실 | 비서실장 |
2007. 08 |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 위원장 |
2009. 09 |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 상임이사 |
2010. 08 |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 이사장 |
2011 | 혁신과통합 | 상임대표 |
2012. 05 ~ 2016. 05 | 제19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 |
2012. 05 ~ 2013.05 | 민주통합당 | 상임고문 |
2015. 02 ~ 2015. 12 | 새정치민주연합 | 당대표 |
2015. 12 ~ 2016. 01 | 더불어민주당 | 당대표 |
2015. 12 ~ 2016. 01 | 더불어민주당 | 인재영입위원장 |
2016. 01 ~ | 더불어민주당 | 상임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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