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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S. Korea returns remains of 68 soldiers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S. Korea returns remains of 68 soldiers

CIA bear 허관(許灌) 2015. 3. 28. 21:26

 

 

Soldiers of the 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 carry coffins containing remains of soldiers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CPV) dead in the 1950-53 Korean War, during a handover ceremony at the Inchon International Airport of South Korea, March 20, 2015

 

Chinese Ambassador to South Korea Qiu Guohong covers with a Chinese national flag a coffin containing remains of a soldi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CPV) dead in the 1950-53 Korean War, during a handover ceremony at the Inchon International Airport in Inchon, South Korea, March 20, 2015.

 

Soldiers of the 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 (R) receive coffins containing remains of soldiers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CPV) dead in the 1950-53 Korean War, during a handover ceremony at the Inchon International Airport of South Korea, March 20, 2015

 

 

한국전쟁 남침 지휘부 "군사위원회"

 

                                                                 북한 수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북한 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 (사진)

한국전쟁 다음 날 6월 26일  남침 지휘부 7인 군사위원회(군사정부)를 구성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수상, 인민군 총사령관-조선공산청년회,중국 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6인 위원은 박헌영(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출신), 홍명희(부수상-근로인민당 당수 출신), 김책(부수상 겸 산업상, 전선총사령관-화요파,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 최용건(민족보위상=국방상,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과 중국 공산당, 조선민주당 당수, 인민군 총사령관 출신), 박일우(내무상,전선사령부 부사령관-조선의용군 부사령관 출신) ,정준택(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과 일제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 출신) 등이다

 

전쟁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시체제에 부합되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군사위원회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비상한 정세와 관련하여 그리고 전쟁에서 전체 인민의 역량을 급속히 동원할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6명은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부, 정준택으로, 이 군사위원회는 일체의 주권을 장악하고 모든 기관, 정당, 사회단체,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다음날인 6월 27일 상임위원회는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시상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지방정권기관을 대신하여 지방군정부(지방군정)라는 것을 조직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국가보위와 사회질서 및 국가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전시상태가 선포됨으로 인해 지방군정부(지방군정)도 도,시에 설치 되었는데, 지방군정부(지방군정)는 지방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 각각 1명씩으로 구성하여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지방군정부(지방군정)의 임무는 지방인민위원회의 권한을 대부분 대행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주요 시설 및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을 의무노동에 동원하고 군부대 및 군사기관을 위한 건물 제공의무를 지며, 군사상 필요에 의해 자동차와 우마차의 동원의무를 선포하며, 각 기업소와 단체 주민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수용하며, 전시지역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등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치로 말미암아 북한의 모든 권한은 김일성을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군사위원회에 집중 되었다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7월 1일 북한 전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은 위급한 정세에 대하여 원수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는데, 동원 대상은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남녀가 해당 되었다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김일성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정령을 채택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원을 점령하자 남한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발포했다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 가는 석차이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자기 토론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보고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김일성의 보고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것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한에는 현재 20만명의 남로당원이 지하에 있어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내응해서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습니다"고 끝을 맺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1949년 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홍명희 등 부수상등 북한 대표단 소련방문, 스탈린과 회담

-남로당 책임비서 이승엽[박헌영 최측근,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 역임]

이승엽은 남한에서 이승만정권과 미제국주의들을 분쇄 타도하기 위하여 일어난 빨치산들을 영웅적이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투사라고 강조했으며 이들을 전심전력 원호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한 거족적 파업이라고 주장했다(남조선 정치정세와 인민들의 구국투쟁)

-1950년 5월 김일성, 박헌영등 북경방문, 모택동과 회담 

-최용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 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년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년 7월 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를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소련군 극동지역 군인들이다. 냉전시대 군사개념상 북한과 만주일부 지역이 소련군 극동사령부 통제를 받았다 

실제로 개전당시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군 장교는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고문에서 '작전지휘'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바 있다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 노동당 157석(김일성-북한 초대수상), 북한 민주당 35석(최용건-북한 2대 국가수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북한 천도교 청우당 35석(김달현), 민주독립당 20석, 근로인민당 20석, 인민공화당 20석(김원봉), 기타 정당 171석, 무소속 114석등으로 합계 572석입니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48년 8월 25일에 열린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2명을 선출하였다.

1.배경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북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2.선거

(1)이북지역 선거

북쪽에서는 8월 25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오전 6시에 시작한 투표는 여섯시간만인 오후 12시에 마감되었다. 투표율은 99.97%였다. 선거구 212개에 후보는 모두 1217명이었다. 그중 227명이 북한 노동당을 비롯한 주요정당들의 연합체인 북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후보였다. 단일 후보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15개 지역에서 복수 후보가 출마했다. 투표는 흑백함에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지는 찬반 투표였다. 유권자들은 212명의 공동 후보에게 98.49%의 찬성표를 던졌다. 이렇게 이북지역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당선되었다

(2)이남지역 선거

이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해 7월 중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할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예비선거'에 돌입했다. 선거관리는 남쪽의 남로당과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하여 만든 '북한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선거방식은 선거운동원들이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장이나 손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선거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대표성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남조선 대표자' 108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 모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 본회의를 개최했다. 대회 마지막날 북측의 8.25 총선에 맞춰 대표자들은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 남과 북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된 것이다

 

3.선거결과

 

 

 

정당 의석 수
북한 노동당 157석
북한 민주당 35석
북한 천도교청우당 35석
민주독립당 20석
근로인민당 20석
인민공화당 20석
기타 정당 171석
무소속 114석
합계 572석

 

 

 

 

 

1945년 10월 8일, 개성에서 조선공산당 남북요인 회의에 김일성과 박헌영 회담[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합의]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중앙위원: 박헌영, 김일성, 이주하등)--->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설치와 함께 소련군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공산당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1국1당 원칙이라는 명분 때문에 북한에 별도의 공산당을 조직할 수 없어 분국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박헌영 1945년 10월 6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하한 주영하(초대 북한정부 소련대사), 장순명과 회견-->1945년 10월 8일, 개성에서 조선공산당 남북요인 회의에 김일성과 박헌영 회담[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합의]-->1945년 10월 2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결성과  북한 지역별 공산당창당, 1945년 12월 17일 북조선 조선공산당 분국 김일성 책임비서 추대-->1946년 2월 9일 김일성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소련군 도움으로 김일성 북한 권력장악)

 

개성 근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장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남북요인회의에서 박헌영, 김일성 그외 두 사람의 직계 7명, 소련군사령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공산다우 북조선분국 설치에 합의했다

"이북의 공산당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조직을 설치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을 고집했습니다 ...논쟁이 끝없이 계속됐어요. 박헌영은 동석한  소련군사령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소련군사령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가 '김일성 동지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자. 그제서야 박헌영은 '그러면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고 물러 섰어요. 분국 설치의 합의에 이른 것입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애초에는 반대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뒷날 김일성이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진술한 바에 따르면, "박헌영은 39도선이 현존하는 조건 속에서 서울에서 북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반대했다"고 한다

 

 3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고, 40여 만 명의 한국군과 50만 명의 인민군, 유엔군 16만 명과 중국 군 90만 명이 희생

동서냉전은 근 40년 가까이 6.25전쟁의 비화를 역사에 묻어두었습니다. 한국전쟁의 내막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은 90년대 구 소련이 무너지면서부터입니다.

1994년 6월 러시아 정부는 216점의 한국전쟁관련 자료를 한국정부에 제공하고, 2000년 러시아의 토르쿠노프(Anatory Vasilieveich Torkunov)교수는 '수수께끼의 전쟁:한국전쟁 1950-53'에서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힌 책을 썼습니다.

토르쿠노프 교수는 한국전쟁이 소련, 북한, 중국의 합의하에 계획된 전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책에는 김일성 주석과 박헌영이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3차례의 회담을 통해 최종적으로 침공에 대한 결정과 작전지침을 받았다고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무기와 식량을 비롯한 전쟁물자들을 지원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후에 중국도 전쟁에 동의했는데, 모택동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족 정예 2개 사단을 북한에 파견했고, 북한군이 압록강까지 밀리자 100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3년간 전쟁은 우리민족에게 참혹한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습니다. 3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고, 40여 만 명의 한국군과 50만 명의 인민군, 유엔군 16만 명과 중국 군 90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북한 군부 실권자]

 

1.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소련군정의 치스차코프 대장] 1945년 8월 15일-1947년 2월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최용건 민족보위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47년 2월 -1950년 7월 4일 

3..김일성 군사위원회(내각 수상) 위원장 겸 인민군 총사령관 1950년 7월 4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4.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5.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6.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7.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헌법

 

1.제1공화국--인민민주주의 헌법(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순수 내각책임제)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1)제1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총사령관-김일성 내각수상(노동당 총비서=노동당 당수)

 

2. 제2공화국-사회주의 헌법(사회주의 공화국, 주석제 또는 신대통령제)

(1) 제2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ㄴ.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통수권자(총사령관)

ㄱ.김일성 국가주석 겸 내각수반,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및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 1972년 12월 15일-1991년 12월경

ㄴ.김정일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노동당 중앙 군사부위원장) 1991년 12월--1998년 9월 5일

 

3.제3공화국-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제3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2)인민군 총사령관과 군정(내각) 책임자(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총참모부

김정일 국방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총비서)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제1비서)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군사위원회 7인 자료

1.김일성(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수상, 인민군총사령관)

 

                                                        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지도자다. 본관전주.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까지 북괴 국가주석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됨) 등을 조직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직접 창건한 뒤 그해 4월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김구, 김규식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기망했고, 그해 6월 제2차 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하였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소련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UN군에게 패배하여 현재와 같이 남과 북으로 한반도를 나누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그가 사망하고,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영국 인명사전에서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 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 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나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지속 제기되고 있어 김일성 실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생애 초기

ㄱ.출생과 가계

김일성(초명: 김성주)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古順和面) 남동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증조부 김응우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지휘관이었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주장한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리평택(李平澤) 집안의 묘지기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가였다고 하나 일설에는 만주에서 장사꾼으로 있었다는 설도 있고 일설에 의하면 아편을 피우다가 감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외가쪽으로는 기독교계열의 목사집안이었는데 김형직은 기독교인인 처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도 한다. 아버지 김형직에게는 동생 김형록과 동생 김형권이 있는데 김형권은 만주의 항일 빨치산 게릴라였다 한다.

어머니 강반석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이름 반석은 베드로의 고사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종조부 강량욱이 모두 기독교 목사였다.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성주(成柱, 또는 聖柱)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ㄴ.어린 시절과 소학교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으로 이사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 1919년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온 그는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 생활하였다.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창덕학교교감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부터 1923년 3월 중국 바다오거우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통학하며 외가집이 있는 칠골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칠골 창덕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재종조부 강량욱 등도 교사로 있었다. 이 중 외종조부 강량욱은 그의 담임 선생이었다고도 한다.

또한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중국인소학교에서 중국어공부를 하여 중국어의 자유로운 구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그의 나이 14세 때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2)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

ㄱ.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유원 중학교(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1926년 10월 17일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고 그 뒤 그 책임자로 선거되었다.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다. 그러나 1927년 단체 조직 의심을 받다가 유원중학교에 재학하던 중인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ㄴ.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

유원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1927년 8월 28일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9년 가을 반일(反日)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중 그는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29년 지린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지린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부인한다.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 가입, 국민부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 이어 조선공산청년회에도 가담하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이 작성한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 뒤 화성의숙에 편입학한다. 화성의숙은 반일민족주의단체가 중국 화뎬에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라 한다. 1930년 화성의숙을 졸업하고 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ㄷ.항일 무장 투쟁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룬 회의를 개최하였다. 김일성은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된 카룬 회의에 참석하였고, 7월 3일 창춘현 카룬에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조직하였고 7월 6일에는 이퉁현 구위수로 가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정치 및 반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자 그도 1932년 4월 25일 상비적인 혁명무력인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를 창건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지도하였다.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ㄹ.동북항일연군 지휘관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7월 다시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가 개편되자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36년 이래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무장독립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전해져,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조선의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으로 오르게 되었다.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대편제의 개편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단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1939년말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항일빨치산에 대한 대토벌전으로 항일연군은 계속 패퇴하면서 그의 조직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군 토벌대가 항일연군 중 김일성부대를 주요 목표로 정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오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북만주를 거쳐 국경을 넘어 1940년 초 소비에트 연방으로 피신했다.

 

ㅁ.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의 토벌이 계속되는 중에도 김일성은 1940년 3월 25일 훙치허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소련군 대위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 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3)광복 이후

ㄱ.광복과 귀국 (1945 ~ 1946)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보천보 전투가 신화화되고 김일성의 활동을 신화나 전설로 전해들은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디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군중들은 하늘이 떠나갈 듯 환호하였다

1945년 10월 8일과 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박헌영은 그의 주장을 끝내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초대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이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련의 홍보 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1월 5일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자 축사를 보냈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ㄴ.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시절 (1946 ~ 1948)

김일성은 해방 후의 군정기 조선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공산당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출범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처음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의 가입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수를 늘려 결국 그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고 이후 38선 이북 조선 다른 지역의 인민정치위원회들 역시 장악하였다.

초기에는 3·1 만세 운동부르주아들만의 투쟁으로 보았으나 3·1 만세 운동을 인민봉기로 재평가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관하에 《3. 1 인민봉기 27돐 경축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를 파탄시키려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주석단 가까이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재빨리 단상에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정숙은 행사가 끝난 후 경위대자동총소대원들에게 경호의 허술함을 지적하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3월부터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1946년 3월 김일성은 북조선로동당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서울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이때부터 남조선로동당과 당대 당의 관계로 대하게 되었다.

46년 6월 14일 김일성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 지부 산하 정당, 사회단체 열성자대회를 소집하고 조선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입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ㄷ.38선 이북에 대한 소련의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

1945년 일본의 항복 뒤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비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에 대한 유린,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자행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환으로,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 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38선 이북에서 수만명의 실향민이 월남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ㄹ.남북협상 주도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과 남북협상을 제의하였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 1948년 2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과 동시에 그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다.

1948년 2월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5월 김구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1949년에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여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 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내각 총리 시절

 

ㄱ.공화국 정부 수립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에 선출되었고,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3월 5일, 스탈린과 회담하여,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ㄴ.공화국 정부 수립시 친일파 등용 논란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당수의 친일파를 요직에 등용했다. 즉, 해방 직후 대한민국에서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친일파 청산이 훨씬 더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그의 동생 김영주관동군에서 통역으로 복무하였고, 장헌근 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 참의, 강량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국은 문화선전성 부부상은 일제의 밀정, 김정제 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의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경력 등을 친일인사로 지적하였다.

 

ㄷ.6.25사변 직전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1949년 9월 24일)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국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조선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조선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6.25사변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ㄹ.6.25사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공격하면서 한국전쟁(6.25)이 발발했다. 한국 전쟁 3일만에 조선인민군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6월말에 김일성은 서울에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맞이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최측근이자 남로당원인 리승엽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가 곧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서울시장직을 겸하게 했다.

조선인민군은 전쟁 1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경기도, 강원도충청북도를 점령한 뒤, 대구근처 낙동강 인근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인민군은 패주를 지속하게 된다

1950년 9월, 조선 인민군이 패주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각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인민군총정치국장의 명의로 인민군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으나, 인민군의 패주는 계속되었다.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은 계속되었다. 1950년 11월 강건전쟁 중 전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1950년 9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장례식장에서 (왼쪽 뒷편이 김일성, 오른쪽 앞은 최용건)

6.25사변 중에도 전쟁에서 후퇴할 때 전쟁의 운용을 놓고 박헌영과 갈등하였다. 10월 8일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며 다투는 모습이 중국 대사가 모란봉의 지하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에도 목격되었다고 한다

 

ㅁ.6.25사변시 김일성의 결단과 소련의 지원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스탈린은 48회에 이르는 김일성의 요구를 꺾을 수 없어 허락한 것으로 보임)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마오쩌둥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직접적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거라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공격했지만,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12월 6일에 평양을 탈환했다.

 

ㅂ.전전 정적 숙청 작업

한국 전쟁의 실패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 이후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전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북한 체제 협력을 거부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 1952년 연안파인 무정,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를 제거하였다. 1951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이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그의 사망도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ㅅ.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 그때부터 박헌영남로당파, 김두봉연안파, 허가이소련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1958년 3월에 열린 전국청년공산주의건설자대회에 참관, 청년들은 자기 손으로 밝은 새 시대, 새로운 공산주의시대를 개척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청년들이 자기의 열정과 지혜와 능력을 공산주의건설에 바칠것을 주장하였다.

1958년 11월 약산 김원봉을 차례로 숙청, 살해하였다. 1953년부터는 박헌영의 구 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 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누명을 씌워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 심문, 고문하였으며 1955년 3월 박헌영을 체포, 반당종파행위 등의 누명을 씌워 외무상과 부총리 등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수감,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처형하였다.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로동당제5차 전원회의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모든 정치세력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종석은 '결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비상상황 속에서 1인권력집중이 가속화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을 견제, 감시했다.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는 친중파와 그외 친소파 그룹, 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비판적이었던 소련의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면서 김일성과 다른 정파 사이에 긴장감과 견제가 지속되었다.

한편 전후 김일성을 향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은 더욱 일반화되어 조선인민군이나 조선로동당을 넘어서 다른 정당, 종교단체에 이르기까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 전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의 혁명활동에 대한 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그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도 계속되었다

 

ㅇ.주체사상 확립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연안파는 전쟁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김일성은 남로당계열을 숙청한 뒤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 1955년 이후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년 주영하, 내무성 부상 이필규, 문화선전부 부상 정률 등이 처형되었다. 한편 중국계였던 최창익은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8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화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후 김일성은 1957년 최창익을 반당종파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의 권력집중화와 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은 1964년 숙청당했다.

1958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송경령 등과 면담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 시설과 교통 시설, 그리고 복지 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 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통제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실제 지정은 1972년이다. →평양직할시 연혁)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ㅈ.천리마 운동

1960년 이후 연안파 일부와 국내파 일부를 제외한 정적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김일성은 휴전 이후의 황폐화된 기간산업과 경제 성장을 고심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모순을 지적, 비판하며 자본주의체제는 비인간성과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을 자신의 신념을 확립, 공산주의 체재를 구축하였다. 또한 전후복구 뒤 경제살리기의 목적으로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본래 1956년의 김일성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김일성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소련파, 연안파 등의 반발과 비판으로 1957년부터 시작될 예정인 경제5개년계획을 앞두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한 뒤 자본·물자·기술 등이 부족한 정국에서 내부 역량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다고 판단, 이를 위한 집단적 증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0년 12월 전원회의 직후 김일성은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의지를 호소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선포하여 주민들의 생산 증대의욕을 촉구하면서 확산되었다

 

ㅋ.4·19 전후대응과 통일론

1960년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하였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장면내각은 외무부를 통해 반박하였다. 5.16 군사 쿠테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고, 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번째 밀사에 대한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었으며, 박정희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조선의 최용건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1965년 3월)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했다. 1·21 사태 당시 조선인민군 일부는 휴전선 근방에서 검거되었지만 일부는 서울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긴장한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복무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켰고, 향토 예비군을 강화하였다. 1968년 여름의 수해 당시 김일성은 수해구호물자를 대한민국으로 내려보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8년 11월 과학원 개발팀과의 담화 통일 실패 요인을 미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한, 1968년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착수를 하였다

 

(5)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 ~ 1972)

ㄱ.주석 취임 초기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주,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구호물자와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수해 당시에는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의 대규모 수해 구호물자를 대한민국에 지원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다.

ㄴ.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

닉슨독트린이후 찾아온 미·소 간의 데탕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2년 5월 이후락은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비밀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織)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6·25 얘기가 나오자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다시 선언하고,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파견하였다. 그의 평화통일 제안을 전면 거부하던 이승만, 장면, 윤보선 등과는 달리 박정희가 협상 제안을 일부 수용함에 따라 매년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 일부 지식인들은 환영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로 쌀 3만석과 약간의 옷감을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대한민국 내부의 민주화 요구,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와 미군철수론, 영국과 프랑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한 외교적 마찰 등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남북교섭은 별 진전을 못보고 흐지부지 되었다

 

                                               197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루마니아 국가주석 차우셰스쿠를 영접하는 김일성

(6)권력기반 강화 (1972 ~ 1980)

1960년대 말부터 추진하던 박정희의 핵개발 추진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군비를 증강, 본격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72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그와 동시에 매년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하고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권 역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던 카터 정부가 등장하자 군비를 증강하고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자 김일성은 조문단 파견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의 권력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12.12 사태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어났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이를 남침책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재선되었다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왼쪽)가 1982년 10월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4박5일간의 방북에서 양국 간 친선 및 협조에 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82년 10월 30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에 실린 사진이다. [노동신문 촬영]

 

(7)1980년 ~ 1988년

1980년 5월 동유럽 순방을 떠났으며, 유고 대통령 티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5월10일 차우셰스쿠와 회담을 가졌다..

1980년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내각과 인민위원회에 지시했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다. 대한민국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을 지원했다.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 역시 같은해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발생하자 그는 '온 민족이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도록 지시하였다.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다.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8)남측 인사들과의 교섭 (1988 ~ 1990)

1988년 8월 대한민국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2박 3일간 국가주석 김일성 및 부총리 허담 등과 회담하고 남하하였다.홀로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한 서경원은 대한민국 안기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박철언을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파견하였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8년 11월 방북 당시 김일성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책에서 '사전에 남북 핫라인을 통해 비밀스러운 방북 사실을 북측에 알렸는데,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우려해 ‘대북 밀사’란 직접적인 말을 쓰지 못해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지방출장을 갔었고,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며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백기완, 목사 문익환평양으로 초청했다.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월 21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그와 면담하였다. 그러나 문익환과 임수경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것이었기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방북하였거나 협상에 참가한 문익환, 임수경 등을 체포,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9)말기

ㄱ.국가주석 5선 (1990 ~ 1994)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의회의장격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및 소련, 중국의 정치인들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가 들어왔다. 김일성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그 후 마음을 바꿔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김일성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죽기 전에 대한민국과의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협상 추진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공산권 국가 붕괴의 파급효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ㄴ.개혁 개방 정책

1990년대 초부터 김일성은 무역시장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김일성은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확대시켜켰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역을 시도하였다. 1992년무렵부터는 미국일본의 영화와 음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2년 개방 의사를 공식 표명하고 미국, 유럽 등과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추진한다. 나진,선봉에 무역지구를 열어 일본,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였고, 신의주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몽골,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을 공식 허용하였다. 1993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국가주석의 국방위원장 겸임조항 삭제를 지시하고,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1993년 4월에 평화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대한민국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그는 노벨 평화상의 예비 후보로도 언급되기도 했다

 

ㄷ.말년

1994년 초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김영삼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하였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를 면담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 및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 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감기와 당뇨와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설치(반미청년회 등 반미단체 통합)

구국의 소리(김일성주의)에서 새세대(김정일주의=주체사상)로 지하신문 변경

-1991년 12월 김정일 노동당 군사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김정일 북한 권력 장악)

-김정일  우상화 벽보 사진이 북한 곳곳에 등장

-1992년 11월 미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정부 등장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핵무기 보유설, 북폭등장 그리고 남한 한민전 서울대표부 1995년 해방 50년 남북통일 결정적 시기 공식화 (자주정부와 전쟁론)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분열[김대중-찬성파, 임수경-반대파]

 

김일성은 인민회의정부 인민민주주의를 포기하고 1970년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으로 인민경제 파 일인 장기집권과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를 수립했다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 수립으로 반통일정책과 권력 유지를 위해서 많은 애국적 민주인사, 통일인사를 처형했고 국제적 반미투쟁으로 국제테러를  자행했다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이다 또한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화 하면서 독재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여기에 더해, 정적 탄압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 및 집권을 위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하였다.

ㄱ.정적 탄압 및 일당독재화

김일성은 최초에는 명망높은 공산주의자인 최용건을 앞세워서 독재를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했다. 또한 정치지도원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아 공산주의와는 동떨어진 세습체제를 구축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ㄴ.경제 파탄

김일성은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시켜 그로 인해 식량생산의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국가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북한이 각국에 진 부채이다

 

 

 

국가 액수(단위:달러)
중국 69억 8천만
러시아 11억
일본 4억
스웨덴 3억 3천만
이란 3억
독일 3억
프랑스 2억 8천만
태국 2억 6천만
오스트리아 2억 1천만
시리아 1억 4천만
스위스 1억
대만 8천 6백만

 

 

 

ㄷ.친일파 중용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하면서 친일파들을 일부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던 일제의 헌병 보조원 출신이였으며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은 친일 사상교양단체였던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지원 유세를 주도했으며 군사분야를 담당한 김정제 보위성 부상은 양주군수를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했다. 군부도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과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인민군 기술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나고야 항공학교는 가미가제 폭격요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2.박헌영(군사위원 겸 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

 

                                       한국전쟁 당시의 대북삐라. 그리고 이것은 현실이 되었다

박헌영(朴憲永, 1900년 5월 2 8일?충청남도 예산 ~ 1955년 12월 5일?)은 한국독립운동가, 언론인·노동운동가·혁명가·정치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는 반대하였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반 기독교 운동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몰락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朴鉉柱)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였으며 수감 중 한번도 동료와 조직책을 누설하지 않았다. 1927년의 재판에서는 의 조직과 당원을 진술하라는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광인이 되어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등 행동으로 정신이상자로 풀려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인사였고, 1930년대에도 계속 조선공산당의 창당, 조직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광주의 벽돌·기와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활동을 통해 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을 지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는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간 미국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숙청, 희생되었다. 기독교를 침략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체포와 수배, 도피, 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고, 북조선분국을 중심으로 북조선로동당을 창건한 뒤, 당대 당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이 되면서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무성의하고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아호이정(而丁, 而靜), 이춘(而春)이며, 자는 덕영(德永)이다. 별칭은 조선의 레닌, 암흑 속의 별, 비운의 혁명가 등이었다. 또한 그는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朴健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1)생애 초반

ㄱ.출생과 가계

1900년 5월 28일 출생한 박헌영은 신라의 문신 박제상(朴堤上)의 56대손으로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에서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지주이자 상업에 종사하던 박현주(朴鉉柱)와 소실 이씨(李氏, 이학규)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본처에게서 10여 세 연상의 이복형 박지영(朴芝永), 박신기 등을 비롯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그의 출생일은 다소 정확하지 않은데 5월 1일이라는 설과 음력 5월 5일이라는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그의 선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영해 박씨 태사공파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박홍원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 박현주였다. 그의 가계는 오래전에 몰락하여 향반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대에 아버지 박현주와 아버지의 친형인 박현정이 함께 벼장사로 돈을 벌어 중류 이상의 생활을 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박현주는 땅을 가진 지주이자 정미소를 경영하는 상인이었다. 박헌영이 대흥보통학교 입학 당시 아버지 박현주의 직업은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박헌영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무렵의 박현주의 신분은 양반이며 직업은 상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 전주 이씨 이학규(李學圭)는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으로 과부였다. 본남편과 사별하였고,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나를 데리고 신양면 신양리 근처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박집을 하고 있다가 박현주의 첩이 되어 재가하였다. 박헌영이 태어날 때는 이부(異父) 누이와 나이차이는 10여세 였다.어머니 이씨는 서산 출신이라 서산댁으로 불렸는데, 춘궁기에 마을 주민에게 식량과 자선을 대가 없이 베풀어 덕망있는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후일 박헌영이 투옥당했을 때, 어머니 이학규가 사망하지만 예산군의 주민들이 대신 이학규의 장례식을 치러주기도 했다.

ㄴ.유년기

그가 태어날때 어머니 이학규는 하늘에서 둥근 달을 품에 안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재가 후 아버지 박현주가 있는 본가에서 수 년간 살다가 박헌영이 태어나고 2살 때, 예산 신양면 우시장으로 나와 독립하면서 다시 국밥집과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그의 가정은 부유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으나 그에겐 서자라는 점이 작용하였다. 아버지 박현주는 어머니가 첩이기는 해도 자신의 아내인 이씨 부인을 배려하여 시장에 여관을 차려주었으므로, 그의 유년시절에는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이학규가 자리잡은 국밥집은 근처에 광산이 있었으므로 장사가 잘 되었다. 서자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예산읍내의 서당에 보내 한학(漢學)을 배우게 했다.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3, 4세의 나이에도 글을 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자라는 신분은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왔고, 주변의 무시와 천대와 구박에 시달림을 당했다. 후일 그의 비서를 지낸 박갑동이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할 때 고향 주민들은 '박헌영이 자라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된 동기도 따지고보면 천대받던 서자라는 저항의식에서 싹텄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가 사회주의자였고 월북후 처형당했던 탓에 주민들은 오랫동안 박헌영에 대해 증언하기를 꺼려하기도 했다. 소년기의 박헌영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신식학교인 대흥보통학교에 2학년생으로 편입학하였다.

(2)학창 시절

ㄱ.소년기

대흥보통학교에 편입학할 당시는 조선교육령(1915년)에 따라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등 조선인민족정신을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던 시기이다. 박헌영은 보통학교 재학당시 성적이 24명중 7등인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이는 박헌영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친구를 사귀고 활발하게 뛰놀기 보다는 말수가 적고 얌전한 학생이며 책읽기를 좋아하였다. 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던 그는 수시로 놀림감이 되었다.

같은 마을 출신인 이건복의 증언에 의하면 '박헌영은 어렸을 때부터 비교적 말이 없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를 닮아 보통보다도 작은 키에 두툼한 얼굴, 땅딸한 모습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작으면서 비대하여 동네 아이들로부터 '땅딸보'란 별명으로 곧잘 놀림을 받았다.' 한다. 그 때문에 그는 동네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았으며 주로 주막 안채의 안방에서 혼자 놀거나 마을앞 냇가의 둑가에 나가 를 데리고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기 무렵의 그는 부락 앞 북상천(北上川) 변에서 개울을 향해 혼자 돌팔매질을 하거나 반나절이 넘도록 들에서 홀로 뒹굴며 놀거나 하는 일은 늘 볼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이씨는 첩의 자식이 받아야 하는 설움을 자신이 보상해주려고나 한 듯 아들에게만은 알뜰한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학교부터 고등학교 동창생인 윤돈구(尹暾求)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말수가 적으나 고집이 셌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박헌영은 '얌전하니 말수가 적은 소년으로 반에서 항상 막내로 다루어져 왔다. 자라면서 더욱 땅딸해져 학교에서 뜀뛰기 등 장난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어쩌다가 내기 경기라도 하는 때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한번은 동네 아이들끼리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뛰뚱거리며 중간 쯤 달리던 그가 그만 돌부리에 넘어져 꼴찌를 하고 말았다. 화가 난 그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씩씩거린 채 한 구석에 주저앉아 있더니 해질녘이 되자 자기 발에 채였던 돌멩이를 주워들고 산산조각을 내어 버렸다'고 한다. 보통학교 3학년 무렵 그는 동급생 친구들 몇이서 신양에 있는 그의 집에 놀러갔었다. 당시 박헌영네 집은 신양에서도 몇 대 밖에 없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어서 친구들끼리 자전거를 바꿔타며 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일본순사의 보조원 노릇을 하던 한국인이 가다가 이들을 봤다. 순사보조원은 그에게 자전거를 빌려 타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고, 이렇게 저렇게 옥신각신하다가 화가 난 순사보조원이 어린 박헌영의 뺨을 한 대 갈겼다. 그러자 박헌영은 갑자기 달려들어 순사보조원의 사타구니를 붙잡고 늘어져고 그의 어머니가 달려나와 가까스로 말렸다고 한다.

1915년도 당시 학적부에 따르면 보통학교 당시 박헌영의 성적은 상위권에 들었다. 입학년도인 2학년 때의 성적은 10점 만점 기준으로 수신(修身) 7점, 국어 9점, 한문 및 조선어 10점, 산술 9점, 도화, 체조가 8점으로 같은 학급 학생 24명 중 7등을 했다. 그리고 결석일수는 2학년 때 5월에 2번, 3학년 때 3월에 1번 등으로 모두 3일을 결석했으나 4학년 때는 개근을 하였다.

ㄴ.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과 신문물 접촉

1915년 3월 23일 대흥보통학교를 1기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 덕택에 1915년경성으로 상경,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함께 진학한 동창은 그를 포함해 장해진(張海鎭), 윤돈구, 강예식(姜藝植) 등 4인이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그는 새로 심훈, 한설야 등을 만나게 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그는 다른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2학년 때부터 3년간 같은 반이었던 최기용(崔基龍)은 후일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못되었으나 침착하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키도 체격도 평범했고 차림도 늘 수수한 흰 두루마기의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유난히 남의 눈에 띄는 것은 까무잡잡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기왓장'이었다.

경성부로 올라와서 신문물을 접한 그는 외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픈 충동을 느꼈고, 신식교육을 받은 인텔리답게 그는 서양문물에 일찍 눈을 떠 미국유학을 꿈꾸기도 했다. 이범석 역시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 동문이었다. 그러나 강경 반공주의자인 이범석은 그의 정적의 한사람이 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당시 상과(商科)와 농과(農科)로 반을 나누자 박헌영은 상과반으로 들어갔다. 상과와 농과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은 기본 과목은 같았으나, 상과만은 일주일에 2시간 씩 영어 수업을 추가로 더 가르치는 점이 달랐다. 박헌영은 영어를 매우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성적은 중상정도였으나 유독 영어 성적은 우수했다. 성적표를 보면 10점 만점에 7~8점으로 3학년 때는 155명 중 58등이었고, 졸업 때는 32등이었다. 수학, 실업 등 다른 과목은 6~8점 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영어는 늘 9~10점 이었다. 또한 한글국사, 세계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미국 유학을 위해 아르바이트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였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장로교 선교사언더우드YMCA청년부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YMCA에 참여하여 언더우드 등과 교류한 것을 근거로 훗날에 북조선에서 그를 '미국간첩'이라고 주장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학창 시절 동학 농민 운동 관련 서적과 허균홍길동전, 작자 미상의 전우치전 등을 즐겨 읽었다. 밤새워 가며 책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그 밖에 춘향전, 마키아밸리군주론, 프리드리히 니체신은 죽었다, 찰스 다윈종의 기원 등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ㄷ.영어 공부와 유학 희망

경성고등보통학교 생활 내내 박헌영은 경성부내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경성부 내에서 영어 과외를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과외 비용은 비쌌고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그때마다 좌절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 한봉섭(韓奉燮)의 증언에 의하면 '상과반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그래도 시간 수가 적어서 영어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한 학생들에게는 매우 부족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YMCA에서 신문물 전파와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던 영어학당이 있었다. 그래서 박헌영은 한봉섭, 최항형, 이태규 등의 학교 급우들과 함께 종로 YMCA 청년회 영어학당에 가서 과외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어 과외 강사는 성서공회 사무원인 장두철(張斗澈)이었고 학생은 50명 쯤 되었다. 그러나 강의가 막상 시작되자 학생들이 제대로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하나 둘씩 포기하는 학생이 늘더니 두달 쯤 지나자 모두 그만두고 박헌영과 한봉섭, 단 둘만 남게 되었으니 강의를 계속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둘은 저녁을 먹은 뒤 낙원동에 있는 장선생의 집을 찾아 공부하기를 며칠, 그 뒤 한봉섭도 그만 영어공부를 포기해버렸다. 박헌영은 그 뒤에도 계속 장두철을 찾아 사전을 뒤적이며 소설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새로 영어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 모여서 다시 영어 강의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고, 그때에는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박헌영은 본처 소생이 아닌 서자의 신분으로 집안에 학비 부탁을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학교에서 성적 우등생이 아니라 장학금을 받지도 못하였다. 그는 경성 유학 당시 막노동과 시장상가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으며, 경제적 여건상 미국 유학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3)청년기

ㄱ.독립 운동과 망명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을 사회적 부조리로 인식했다. 일찍부터 정치, 시사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민족자결주의에 감격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조선의 독립을 예상하였으나, 조선 문제는 청원되지도 않았고 나중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인 대표자 김규식 일행이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1919년 3월 1일 박헌영은 전국에서 열린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는 만세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 3·1운동 참여한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헌병대로 끌려갔으며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겨우 퇴학은 모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계기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9년 2월 경성고등보통학교 제15회로 졸업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역시 당초 졸업식 때 졸업식을 거행하지도 못했고 졸업앨범도 촬영하지 못했다. 학교측에서는 그해 5월 졸업생들을 개별적으로 교장실로 불러 시위를 한 일을 꾸짖고 졸업장을 나눠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뒤 관례에 따라 자와 호를 지었다. 자는 덕영(德永)이라 했고, 호는 이정(而丁)이라 하였는에 이는 썩고 부패한 사회의 가려운 곳을 긁어내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이후 박헌영은 다시한번 미국유학을 꿈꿨다.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 막노동판과 공장을 다니거나 잡지사의 직원으로 입사하여 근무하며, YMCA 영어반에서 계속 영어공부를 하였고,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의 영어성경공부를 했다. 그러나 서자라는 한계로 아버지가 지주였으나 그를 유학 보낼 평편이 되지 못하여 그의 미국행은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1919년 한 해를 허비한 뒤 1920년 9월,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에 몸을 실어 일본에서 고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치하 조선에서 경찰에 쫓겨 밀항한 처지라 대입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 결국 일본 도쿄로 건너간 지 두 달 만인 1920년 11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 도착한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 김단야임원근을 만나 서로 교우를 쌓아갔다. 1920년 일본 동경에 건너갔던 박헌영은 11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ㄴ.공산주의 운동

1921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회의 비서가 되었다. 1921년 5월에는 김만겸 등이 이끄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의 열성적 조직원으로 활동하여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한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후원을 받아야 조선을 해방할 수 있고 조선에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여 소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 는 주장을 했다가 임시정부를 지키던 임정 내무총장 김구의 분노를 사, 눈밖에 나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도 활동하던 중 상하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1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고려공청회 중앙총국이 결성되는데 참석했고, 곧 고려공청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회의에서, 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원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을 때, 몽양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김단야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운형, 김규식, 김단야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열차소비에트 연방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히고 상하이로 돌아온 뒤,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1922년 4월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내로 귀국하기 직전 중국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주 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일제에 의해 곧바로 체포됐고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여 1924년 1월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1924년 1월 출소한 뒤 곧바로 경성부에 도착, 화요회계열에서 활동하여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1924년 3월 고려공청회 중앙총국 책임비서로 재선임됐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동아일보 사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해 부인인 공산주의 운동가인 주세죽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1925년 4월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에 성공하자, 그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재선출 되었다.

(4)독립운동과 일제 강점기 활동

언론 및 사회개혁 운동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

ㄱ.동아일보 입사

박헌영은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사장 허헌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사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지방부의 기자 직을 자원하였으며,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24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리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언론인들의 활동을 위험하게 생각한 총독부측의 압력으로 1924년 8월 소환되었다가 기자직에서 해직되고 말았다.

김성수송진우는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강제 해직당하는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과 동정심을 품었으나, 그 뒤 해방 이후 이들과의 관계는 극도로 냉각된다.

ㄴ.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

1924년 8월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을 맡았고, 9월 조선일보에 취직하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에 들어온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는 논설반의 김준연(金俊淵) 신일용(辛日鎔), 사회부의 박헌영, 임원근(林元根), 김단야(金丹冶), 지방부의 홍남표(洪南杓) 등이었다.  이들의 참여로 조선일보의 지면에도 좌경화된 기사들이 다수 반영됐다 사회부 기자였던 화요회의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은 비슷한 전력(前歷)에다, 안팎에서 늘 함께 어울려 다녀 ‘화요3인조’로 불렸다. 박헌영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이면서, 학예부 기자도 겸하였다.

조선일보에서는 사회부 기자로 임원근, 김단야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나, 박헌영은 사회부 기자로서 별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특별한 정치 사상이 없고, 박헌영의 사회주의 운동 경력을 몰랐던 유광렬 사회부장은 박헌영 기자에게 지방에서 올라오는 짧은 기사들을 정리하는 일이나 맡겼다고 한다. 함께 일하게 된 임원근이나 조봉암도 기자로서 재능이 특별나지는 않았는데 인천 강화도 출신인 조봉암은 스스로 인천주재기자로 자원해 내려가 활동했다.

유광렬 사회부장은 박헌영이 선정적인 기사를 못 쓸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미숙했다고 평가했다. 평소에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었으며 말재주가 부족했던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 조선일보 기자 재직 당시 박헌영은 타고난 검은 피부, 검은 얼굴에 수염도 잘 깎지않아 동료기자들 사이에서 한때 '털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옷도 늘 허름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동료 기자들과도 거의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 점은 같은 공산주의 활동 동료인 임원근김단야도 마찬가지였다. 김단야는 조선일보 기자 재직하면서 글 솜씨는 뛰어난데다 밝은 성격에 재치가 넘쳐 동료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나,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박헌영은 김단야,임원근 세 사람과 같이 똘똘 뭉치면서 다녔다고 한다

ㄷ.외압과 해고

한편, 이무렵 조선총독부사회주의자들의 은신처이자 선전도구처럼 활용되고 있는 동아일보조선일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마침 1925년 9월 초, 서울청년회 계열의 논설위원 신일용(辛日鎔)의 필화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당국이 조선일보사에 압력을 넣게 되면서 조선일보는 9월 8일자로 정간되었고 윤전기까지 압수되었다. 윤전기를 쥔 총독부는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을 해고시키지 않으면 신문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에 대한 해고압력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것은 조선일보내 보수적인 기자들이었다. 보수적인 기자들은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 소속 기자들과 연대해 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의 홍증식기자를 중심으로 한 화요회계열 기자들은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1925년 9월 8일자 신일용의 칼럼은 문제가 되었다. 서울 정동 옛 제정(帝政)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사관이 부활하자 신일용은 '조선과 노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논설을 통해 영사관 부활을 계기로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즉각 신일용을 구속하고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무기정간 조치를 내렸다. 조선일보의 3차 정간이었다.

정간의 장기화로 다시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 대해 총독부는 정간 해제 조건으로 사회주의 계열 기자들이 대거 포함된 17명의 기자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15일 조선일보는 17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는데, 이 가운데 박헌영을 포함해서 김단야, 임원근 등도 함께 해직당했다. 17명의 기자들이 해직된 후 조선일보는 정간조치에서 해제되었다.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박헌영은 막노동으로 일시적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ㄹ.반 기독교 운동에 참여

1919년 YMCA 청년학당에 다닐 당시의 박헌영은 기독교 교회에 다녔으나 공산주의로 전향 이후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기독교제국주의의 침략의 첨병이라는 확신이 서면서 그의 무신론은 신념화된다. 이후 그는 '종교는 인민의 정신을 좀먹는 아편'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곤 했다. 1919년 이후 한반도에 공산주의·사회주의 및 유물론이 소개되면서 기독교와 갈등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에서는 반 기독교 운동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간의 대립이 치열하였으며, 박헌영은 반 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였다. 박헌영은 기독교를 서양 제국주의의 정신적 착취와 세뇌 수단으로 규정하였다.

반 기독교 운동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이 있었다.

1925년 10월 25일에는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는 '기독교의 기원', 홍순준(洪淳俊)은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는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은 '현하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였는데, 박헌영은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로 연단에 섰다. 박헌영은 강연회의 첫 번째 연사로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과학 탄압을 설명하며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인사의 밀고로 일본 경찰이 닥치면서 강연회는 해산되었고 박헌영은 피신해야만 했다. 박헌영은 잡지 '개벽' 1925년 12월호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이라는 칼럼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기독교의 문제점을 사회주의자의 지성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종교과학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박헌영은 기독교는 미국이나 유럽이 조선을 사상적 노예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서 전파했다고 봤다. 1925년 11월에는 반기독교적인 설문 내용을 한위건, 배성룡과 함께 '개벽'지에 올리기도 했다. 그의 거듭된 기독교 비판 덕에 기독교인들은 그를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지역 경찰서에 고발하거나 스스로 제보하기도 했다.

 

 

 

... (이상 생략)... 세상은 미국 건국의 역사를 보고 청교도적 순도(殉道,순교자)의 정신과 영웅적 행위가 충만하다고 찬미하나, 그것은 표면만 본 피상적 관찰이 아니면 거짓말로서 정확한 사실을 숨기는 데 불과하다. 미국의 역사는 '토인 학살로 그 첫 페이지가 열린다.' 미국에 처음 이주한 구주인(백인들은)은 신영토의 삼림과 황야에 사는 토인을 방축(放逐,1830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불리는 게토로의 강제이주)하고 토민을 학살하고 토인의 주가(住家)룰 약탈하는 일이 피등(彼等,미국의 백인)에게 상제(上帝,하나님 또는 하느님)가 준 '신성한 사업'이었다. 피등이 노예에 대한 법률이 혹독한 것은 (교회가 사회를 지배한 신정사회였던)구주(유럽)중세기 시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교형(교수형화형은 물론이오 '버지니아' 교회에서는 17인, 신영란(新英蘭, New England)의 교회에서는 12인의 노예가 일시에 사형에 처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하 생략)...

- 박헌영,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개벽》, 1925년 11월

 

 

 

그러나 25년 11월 국외로 발송한 고려공청회의 비밀문건이 조선총독부 경찰에 압수되면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수배를 당했고, 종로 경찰서 소속 일본인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신랄한 기독교 비판은 한국 내 개신교선교사들, 기독교신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나, 기독교 비평가인 박헌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소문을 타고, 그가 편협하고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편견으로 굳어져갔다.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평을 기독교의 문제들을 개혁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주의=기독교에 반대하는 사상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이며 자기 욕심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봤다. 종교는 이런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덜어주는 것이 아닌, 욕심과 욕망을 부추기고, 반성조차 없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보게 된다.

ㅁ.조선공산당 창당

박헌영은 1924년 화요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 조달 활동을 하였다. 동시에 비밀리에 연락을 통해 국내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와 연락, 공산당 창당 계획을 알리기도 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 김찬(김낙준), 조봉암, 조동호, 강달영, 허정숙, 정칠성 경성 소공동의 중식 식당 아서원(雅敍園)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의 창당하고 조직에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4월 17일4월 18일 화요회 야체이카의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고, 바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金在鳳)이 임명되었으나 뒤에 박헌영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잇단 체포와 탄압으로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옥사하거나 병사한 것 역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로 오르는 요인이 되었다. 4월 18일 박헌영은 자신의 집에서 김단야·조봉암 등과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공산당 창당 직후인 4월말부터 그는 직접 공산당의 창당을 알리는 격문과 서신, 홍보를 지하단체를 통해 각지의 학교 및 청년단체 앞으로 배부하였다. 언론을 통해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언론을 발표하고 격문으로 뿌렸다.

(5)수감과 재판, 국외 탈출

ㄱ.수감과 재판

1925년 11월 25일에 터졌던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후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나 박헌영은 조직책과 동료들의 은신처를 끝까지 비밀에 부쳤다.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경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1월 말경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당시 상하이에 체류 중이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다.

그에게는 일왕에 대한 반역 혐의, 공산당 정당 조직, 폭력·선동 혐의, 노동자 파업 독려 혐의 등이 부과되었다. 수감 직후 박헌영은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의 회고

1926년 6월 10일 황제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6·10 만세운동이 개최되었다. 옥중에서 그는 6·10 만세운동의 배후 주모자로 몰려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으나. 총독부 경찰은 끝내 그가 6·10 만세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1927년 9월 13일 박헌영은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첫 공판에 나온 101명의 피고인 중 그에게 발언 기회가 오자 그는 '공산주의의 목적은 해방의 정의와 실현'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재판장과 법관들이 조용하라고 하였으나 박헌영은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였으며, 박순병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살려내라'며 안경을 던지고 재판정에 달려들었다. 그의 다른 동료들도 같이 달려들었고, 총독부 경찰은 그들을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무지막지하게 구타하였다. 박헌영이 광인처럼 난동을 부리자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달려들어 그를 끌고 나갔다. 일본 경찰과 간수들에 의해 끌려나온 박헌영은 형무소로 돌아간 뒤, 심한 폭행과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동지들의 죽음과 계속된 고문으로 박헌영의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져 갔다. 감옥 안에서 동지인 박순병, 박광흠, 박길양, 권오상 등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한편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당수 차금봉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가 체포, 구속되어 옥사, 희생됨으로써 그는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ㄴ.수감생활과 석방

재판도중 자살 시도와 단식을 거듭하며 조선총독부법정의 판결에 항거했다. 27년 9월 20일 재판정에서는 제4차 선고 공판을 실시했다. 공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재판정에서 그는 계속 재판장을 향해 박순병을 데리고 오라고 소리치다가 자신이 쓴 안경을 재판장에게 던졌다. 박헌영이 소리치고 소란을 피우자 간수들은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고 공판은 10분만에 중단되었다. 비공개인 공판을 관람할 수 없었던 아내 주세죽은 그가 강제로 끌려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통곡하였다.

9월 20일 11시 10분 박헌영을 다시 입장시키고 공판을 진행했으나 이때도 소리지르자 재판장은 간수들에게 명령해 그를 긴의자에 눕힌뒤 신경안정제를 먹인 뒤 공판을 진행했다. 제4회 공판이 끝난 뒤 9월 22일 제5회 공판에는 박헌영이 배제되었다. 이 뒤로 박헌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서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었고, 주세죽은 변호사를 데리고 박헌영을 면담했다. 이무렵 그의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재판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박헌영은 10월 들어서 공황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감방에서는 거의 밥을 먹지 않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감방 안을 맴돌거나 벽을 보고 이야기하다가 사람을 보면 무서워 질린 표정을 했다가는 이내 히죽히죽 웃는등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자기가 싸놓은 똥을 벽에 칠하거나 먹기도 했다고 한다. 한 재판정에서 그는 자신이 본 인분을 직접 먹기도 했다. 재판관들과 배심원, 방청객들은 경악했고 그를 완전히 정신이상자가 된 것으로 결론내렸다. 박헌영의 이러한 행동들은 연극이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공판에도 박헌영이 출석하지 않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주세죽은 계속 면회를 신청했지만 교도소 측이 면회를 거절하자, 주세죽은 자기 혼자서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없다며 동반 단식에 들어갔다. 그 뒤 교도소에서는 박헌영의 단식은 사실이 아니며, 박헌영은 식사를 한다고 발표했다. 10월 7일에 박헌영을 만난 변호사들은 그가 음식을 섭취하고는 있으나 의식불명이라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병보석을 신청하기로 했다. 감옥 군의관으로부터 체력검사를 받고, 조선총독부 군의관은 그가 심신상실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 소견은 재판부에 의해 기각당했다. 병보석이 기각되자 박헌영은 두 번이나 목을 매고 자살시도를 하려다가 간수들에 의해 발각되기도 했고, 이때 그를 말리는 간수들과 심한 몸싸움으로 온몸에 멍이 들기도 했다. 1927년 11월 15일 박헌영의 변호인단은 그에 대한 병보석을 신청했고 재판관은 병보석을 허가했다.

ㄷ.국외 탈출과 한국 공산주의 지도자

몇차례 병보석 신청 결과 1927년 11월 22일 박헌영은「정신병자」로 병보석을 얻어 석방되었으며, 석방 직후 아내 주세죽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섭다고 도망치기도 했다. 박헌영의 동창이자 친구였던 시인 심훈은 오열하며 조선일보1927년 12월 2일자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를 기고하며 일제에 의해 망가진 친구의 모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훗날 북한 법정에서 '그가 일본경찰에 투항한 후 서로 짜고 미친 행세를 하여 석방되었다.'고 그러니까'박헌영이 일제와 비밀리에 타협했다.'라는 비방을 한다.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들은 여러명이나 될 만큼 많았고, 일부는 병보석되었다. 만약 북한의 주장대로 일본 경찰이 고의로 박헌영을 석방시키려 했다면 굳이 미친 사람 행세를 시킬 필요도 없이, 폐병 같은 내과적인 난치질병에 걸렸다고 발표하기만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박헌영 평전>,안재성 지음. 참조. 감옥에서 출감한 박헌영은 곧 아내에 의해 김탁원 정신과 병원에 입원했다. 그를 진찰한 의사 김탁원은 그가 정신이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치료를 한다 해도 예전처럼 회복하기 어렵다고 진단을 내렸다. 병원에 있다고 해도 별반 차도가 없을 것으로 본 주세죽은 남편을 데리고 건강에 좋다는 온천과 절을 돌아다니며 요양을 하였다

출감한 박헌영은 곧장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의 고향집에 내려갔다. 그러나 아버지 박현주나 이복 형인 박지영도 알아보지 못하고 일본 헌병, 개신교 목사, 밀정 이라며 쌍욕을 퍼부었다. 그는 방안에 갇혀 지냈으며 아내 주세죽과 어머니가 떠다 주는 죽으로 연명하였으며, 의사의 왕진을 받았다. 총독부는 경찰을 보내 박헌영의 집에 상주시키며, 박헌영의 집 주변을 감시하게 했다.

병으로 석방된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군의 고향집에서 있다가 함경남도 석왕사에서 요양하던 중 주세죽의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내려왔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비밀리에 탈출하였다. 박헌영은 이듬해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아내는 을 낳았다 이들의 탈출 사실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고 함흥경찰서장 이하 경찰관들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는 죄목으로 징계를 받았다. 박헌영의 탈출에 영감을 얻은 가수 김용환두만강변에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했다

1927년 12월 10일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해산되고 재건조직 준비와 함께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 각지의 공산주의자들은 체류국가의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다섯 차례에 걸친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조선공산당 체포, 검거 탄압으로 지도자가 사리지면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6)소련 활동과 체포

ㄱ.소련 유학과 수학

1928년 11월초 연해주에 체류하였다. 1928년 11월 5일 갓난 아기주세죽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김단야고명자의 환영을 받고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김단야는 6.10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1926년 8월 모스크바로 망명, 레닌대학교에 다니며 코민테른 극동아시아부 조선담당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고명자는 아직 동방근로자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박헌영 가족은 모스크바에서 '정치망명객들을 위한 집'이라는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안정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청원했다. 당시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김단야가 박헌영의 입학을 지원했다. 박헌영은 자신의 이론을 보다 확대하고 배움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말하였고, 김단야 등의 추천으로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주세죽고명자가 다니는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아내에게 '꼬레예바'라는 가명을 지어 주었고, 이들 부부는 학업에 전념하면서 딸 비비안나를 키웠다

김단야는 1926~28년 시기에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 즈음에는 코민테른 동양부 한국 담당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공청 집행위원회 비서부가 박헌영의 입학을 추천했다. 결국 1929년 1월에 박헌영의 국제레닌학교 입학이 허용됐다. 당시 작성된 박헌영의 입학 관계 서류철에 따르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항목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네 가지가 적혀 있다. 그때만 해도 박헌영은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의사 교환 수단은 영어였다. 이력서는 물론이고 신원조사표도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영어로 강의가 이뤄지는 영어반에 소속돼 있었다.

ㄴ.소련공산당 입당과 중국 상하이에서 잡지발간 활동

1929년 1월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했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됐다. 국제레닌대학교에 재학 중에는 호치민 등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호치민목민심서정약용에 관심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1929년 초 국제레닌대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공산대학이라 불렸던 동방근로자대학을 다녔다. 동방근로자대학 2년과정을 졸업하였다. 소련에서 유학생활 지냈을때, 그는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쳐 '이정(而丁)'이라는 가명을 지었고, 러시아 발음인 '이춘'으로 등록했다. 이는 '하층 농민계급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는데, 31년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2년 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에도 한국 혁명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1929년 중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1928년 말에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최상급 기관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에서 이름높은 '국제선'이란 바로 이 기구였다. 1929년 11월 3일 조선에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벌어지자 그는 배후 선동 혐의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1931년까지 러시아에 체류하게 되었다.

1931년 3월 김단야상하이에서 잡지 코뮤니스트를 발행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코뮤니스트 편집위원이 되었고, 이후 소련과 상하이를 수시로 오가기도 했다.

3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상하이로 가 국내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는 빨리 중국 상해로 돌아갔다. 4살이 된 딸 박 비비안나모스크바 근처 이바노바시에 있는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부모의 얼굴을 몰랐던 박 비비안나는 한동안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상하이에 거점을 확보하고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김단야로부터 잡지 관련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다. 1931년 10월 그는 출옥한 고명자와 연락하였고, 김형선을 통해 국내와도 접촉을 시도했다. 19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지령을 받고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박헌영이 상해에 체류하고 있을 1932년 4월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발생하였다. 박헌영은 윤봉길 의거 등을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행위 라며 부정적으로 평가 하기도 하였다

상하이에서 잡지「콤무니스트」지 를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시켰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이 잡지는 1933년 7월호까지 발간됐다.

박헌영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지하에 공산주의조직을 만들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국내 공산주의운동에서는 그가 지하에 설치한 단체를 '국제선'이라 불렀다.

ㄷ.체포와 송환

1932년 윤봉길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이두수' 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하였으나, 1933년 6월 김단야를 추적하던 일본경찰에 의해 미행당하다가 7월 5일 상하이 부두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는 민중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그를 체포한 일본 영사관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이 7월 5일 아침 7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공동조계의 북경로와 강서로 교차로 부근에서 누군가와 접선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동조계 경찰의 협력을 얻어 문제의 장소 부근에 잠복했다. 아침 7시 45분 교차로 북쪽 귀퉁이에서 서성거리는 의심스런 사내가 잠복 경찰의 눈에 띄었다.고 했다. 경찰은 단박에 그를 덮쳤고, 영사관 경찰부로 연행하여 취조해보니, 그 사람은 김단야가 아니라 박헌영이었다.

김단야로 오해하고 체포당하기는 했지만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뒤 밀폐된 공간에 끌려가 구타를 당했으나 김단야가 있던 곳은 발설하지 않았고, 소지하고 있던 소지품 중 고명자에게 보내려던 암호로 된 편지만 일본 경찰 손에 입수당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박헌영은 1928년 8월 조선을 탈출한 이후 1933년 7월에 체포되기까지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취조를 받았다. 그는 탈출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미운 털이 박힌 데다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거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ㅁ.투옥과 형문

7월 말 박헌영은 국내로 압송되었고 조선총독부 경찰의 고문과 심문에 맞서 증언거부로 투쟁하였다 사상담당 고등 경찰로 이름 높은 미와(三輪) 주임이 그를 직접 취조했다. 공산당 조직을 살려야 했던 박헌영은 일본경찰의 진술강요에 '1928년 이후 정신병 치료를 위해 탈출한 것이며,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동료들이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여 활동하고 싶어도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거짓 진술하였다. 그 뒤 1933년 1월 상하이의 길가에서 우연히 김단야를 만나 그를 대신하여 연락하는 활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박헌영은 필사적으로 위장 진술에 나섰다. 진술의 초점은 탈출 이후 그의 생활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관됐음을 전후 모순없이 주장하는 데 있었다. 박헌영은 국외로 탈출한 뒤 북간도연해주를 전전하며 정신병 치료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 후 1930년 가을부터는 병에 차도가 있어 연해주 수찬 구역의 한인 소학교에 교사로 취직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2년간 생활한 뒤, 하얼빈·봉천·천진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게 1932년 11월 말이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에는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한 탓에 운동의 대열에 넣어주려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상해에 도착한 뒤에는 단지 직업을 얻으려고 배회했을 뿐이며, 1933년 1월상해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김단야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생활비가 궁했기 때문에 김단야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다소 협력했다고 주장했다. 형문은 계속되었고, 유도 심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반복하였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상태라서 조선 총독부 경찰은 20일 만에 심문을 끝내고 검사국에 송치한 뒤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냈다. 이어 국내 연락중 체포된 김형선 등 6명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33년 7월 심문과정에서 그는 28년 8월 탈출 이후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필사의 위증을 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사 결과 박헌영의 해외활동에 대한 아무런 인적,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34년 12월 10일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의 제1차 공판에 출두했으나 그의 재판을 관람하기 위해 수백명의 인파가 동시에 나타났다.  재판부는 비상사태를 우려하여 박헌영만을 따로 분리해 신속하게 공판을 열어 17일만에 선고공판을 열었다. 선고공판에서, 그는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다. 수감 중 박헌영의 아버지 박현주가 병사했다 그러나 옥중에서 부친의 부음 소식을 접한 박헌영은 무덤덤하였다. 후일 박헌영은 이 때를 회상하며 일제 강점기 당시 공산·사회주의자들이 형무소에서 보낸 시간을 합치면 모두 6만 년은 족히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박헌영의 수감과 출옥으로 조선총독부는 갖은 압력을 행사했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와 패물은 거덜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되돌아온 박헌영은 이 때의 일로 동리 사람들로부터 패륜아, 불효자 라는 지탄과 조롱이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7)일제강점기 후반

ㄱ.가석방

6년형을 언도받았으나 5년 만인 1939년에 가석방되었다. 그가 취조를 받던 무렵에 1933년 상하이에서 그의 처 주세죽김단야와 재혼하였다.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았고, 김단야 역시 아내 고명자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그 뒤 1929년경부터 주세죽김단야가 눈이 맞았다는 설이 운동가들 사이에 확산되기도 하였고, 이를 안 박헌영이 1929년 주세죽과 결별하였다는 소문도 확산되었다. 박헌영과 헤어진 후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로 알았으나 김단야가 그의 생존 사실을 알면서도 주세죽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었다.

출소 직후 국내에서 주세죽의 재혼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는 주세죽의 재혼으로 그는 괴로워하였고, 박헌영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국외의 공산주의 운동가들까지도 주세죽김단야를 비난하였지만 박헌영은 묻어두고 함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심적으로 부담과 실망, 고통을 겪고 있었고 술에 찌들어 방황하게 된다. 이후 그는 같은 동료 공산주의자인 이관술의 누이동생이자 김삼룡의 처인 이순금(李順今)과 동거하였는데, 그의 동료들은 공공연히 이순금을 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1937년초부터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있던 한국인 공산주의자 이성태(김춘성)로부터 모함을 받았다. 이성태는 화요회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상신서'를 작성,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로 보냈다. 상신서에서 이성태는 그가 친일파 가정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와 큰형은 일진회 소속이며, 형은 아편에 중독된 일본 밀정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련내에 박헌영을 옹호하던 한국공산주의자들의 변호로 위기를 모면한다.

주세죽이 고향에 나타나지 않자 친척들은 박헌영에게 주세죽의 행방을 물었다. 1939년 고향인 예산에 내려와 잠시 체류했을 때 주세죽의 행방을 묻는 친척들에게 "주세죽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한다

ㄴ.경성콤그룹 조직과 해체

1939년 4월 이관술,김삼룡 등이 지하조직 경성콤그룹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수감중이던 그는 콤그룹 출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옥중에서 경성콤그룹의 결성 소식을 접한 박헌영은 처음에 경성콤그룹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순금의 설득으로 콤그룹에 가입하게 됐다. 이순금은 오빠 이관술과 함께 경성콤그룹의 창설자로 활동했는데 박헌영을 영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순금이 맡아 박헌영을 설득 영입했다.

1939년 9월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 출옥했다. 출소 직후 박헌영은 요양을 다녀왔고, 39년 12월 이관술과 만나 경성콤그룹의 지도자가 됐다. 출소후 박헌영은 투지를 굽히지않고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해 나아간다. 그가 출감하기 전인 1938년 말부터 김삼룡이관술은 지하조직을 만들어 경성콤그룹의 출범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 지도자 겸 기관지 '코뮤니스트'의 편집책임을 맡았으며 직접 편집을 지도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청에 명하여 박헌영을 A급 불령선인으로 지정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1940년 가을 창씨개명 하라는 총독부의 명령을 거절했다.

그리고 박헌영은 추격을 피해 경성인천, 청주 등을 오가면서 일제 경찰과 밀정들의 감시를 피해왔으며, 발행된 '코뮤니스트' 기관지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마산까지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후 1941년 2월까지 청주서울, 대전 등의 비밀 아지트로 잠행하면서 지하운동을 벌였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아지트에서 함께 숨어있던 정순년(鄭順年)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순년은 그의 동지 정태식의 5촌 조카로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는 1941년 3월 아들 박병삼(朴秉三)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피신하면서 아들과도 헤어졌고, 정순년은 이순금, 정태식 등의 보호를 받던 중 친정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정순년의 친정 아버지는 미혼의 딸이 불령선인과의 사이에서 임신한 것에 분노했고, 자신의 사촌동생인 정태식과는 인연을 끊다 시피 했다. 친정부모에 의해 끌려간 정순년은 다시 목수에게 개가하였고, 박병삼은 박헌영의 이복 형 박지영에게 보내졌다가 다시 동지인 김삼룡의 처 이순금에게 보내져, 이순금에 의해 양육되었다.

ㄷ.노동자 생활과 지하 은신

1941년 경성콤그룹이 일제 총독부에 발각되어 검거령이 내려졌을때, 41년 1월 경성콤그룹의 회원인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박헌영은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검거를 피해 계속 도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하여 전남 광주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는 종연방직공장 변소 청소부로 활동하다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인부로 위장 취직한 채 활동하였으며, 김삼룡의 처 이순금전남 지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하활동에도 가담하여 「해방자」와 같은 책자 발간활동을 비밀리에 간행하기도 했다.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그들을 통해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과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 박헌영을 만나 그를 본격적으로 도운 것은 박헌영이 노동활동을 전전할 때 이순금은 박헌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순금은 박헌영의 아들을 맡아 키웠다. 1940년 이후 일본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창씨개명은 매국행위이며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바꾸는 잘못이라는 내용의 삐라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뿌렸고, 1941년 일본군이 하와이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미일전쟁으로 일본의 멸망이 눈앞에 닥쳤다는 속설을 확산시켰다.

박헌영이 지하 활동을 하는 동안 이순금은 활동이 어려웠던 박헌영을 대신하여 활동하며 지시를 조직에 전달하는 충실한 역할을 했다. 이순금과의 동거 관계는 박헌영이 윤레나와 재혼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55년 북조선에서 박헌영이 미국 간첩으로 몰렸을때 이순금이 박헌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박헌영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였다. 그는 지하총책을 통해 1942년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밀청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지하조직원을 통해 일본이 항복을 준비, 미국측과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박헌영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떠난다'는 짤막한 사직서를 공장장에게 제출하고 경성으로 상경했다.

(8)광복 직후

ㄱ.조선공산당 재건 활동과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과, 해방의 소식을 듣자 박헌영은 일행과 함께 곧바로 목탄차를 얻어타고 전주에 들려서 막 출감한 김삼룡을 태운뒤 함께 경성부에 도착했다. 광복 직후 그는 소감에서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라고 밝혔다.

8월 17일에 건준 전남지부의 트럭을 타고 상경했다는 설도 있다. 8월 17일 오전 11시 광주극장에서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건준 전남지부 사무실은 고광표(전남건준 재무부장)가 운영하던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였다. 이곳에서 모인 건준간부들은 임시 대표단을 구성, 신임장을 받기 위해 이날 밤 8시쯤 트럭을 타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 이 트럭이 서울로 갈 것이란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성삼(본명 박헌영)이 찾아와 동승했다 한다. 박헌영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공산조직인 '경성콤그룹' 조직책의 도움으로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신분을 완전히 숨긴 채 3년 동안 은신해왔었다.

1945년 8월 15일 밤, 이승엽을 비롯한 서울의 명망있는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청년회관(YMCA) 왼편에 있는 장안빌딩에 모여들었다. 다음날 아침 장안빌딩 건물에 조선공산당 현판이 내걸렸다. 8월 18일에는 우미관에서 외곽조직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재건립하며 조직확대를 꾀했으나 박헌영 일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자 8월 24일 자진 해체한다.

ㄴ.8월 태제 발표

8월 20일 저녁 박헌영은 경성부 종로구 명륜동에서 '8월 테제'를 발표했는데, 일단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수용, 유산계급과의 통일전선을 통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훈련함으로써 장차 사회주의혁명 내지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준비한다는 마르크스의 정통이론에 따른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어서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무렵 건준이 세워지고 활동이 활발해지자, 박헌영은 자신의 공산주의자 동지들을 건준에 침투시켜 1946년 8월 하순까지 건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장안파에서는 홍남표,노동우,홍원택을 여운형파에서는 이강국최용달을 자기 진영으로 포섭하였으며 건준에서 다수인 장안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장안파는 박헌영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결국 8월 24일에 해체되고 말았다.

8월 16일 여운형 등이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자 그 역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건준의 간부직을 맡으라는 요청을 사양하고 평회원으로 있었다. 건준에는 여운형 계열 외에도 안재홍, 김준연 등이 있었는데 김준연은 뒤에 전향선언을 하고 한국민주당으로 건너갔고, 안재홍은 박헌영과 친박헌영 세력을 건준내에서 축출할 것을 수시로 여운형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ㄷ.건준 접수 기도와 실패

박헌영과 여운형은 해방 정국 좌파의 거두로 서로 협력과 경쟁의 애증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공산당을 이끈 박헌영은 중도 좌파의 지도자인 여운형을 발판으로 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그 전위세력이 공산당 내 소위 ‘재건파’였다. 그런데 재건파, 나아가 공산당이 해방 직후 국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자신의 세력으로 접수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재건파에 의해 철저하게 견제당했고 의문의 테러를 당하기도

1945년 8월 20일 전후하여 건준 조직에 들어오기 시작한 재건파는 건준을 자파 조직으로 접수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에 대한 1차 테러가 발생하는데 그 계기는 일제의 요구로 건준이 치안위원회의 명칭으로 변환된 것을 이유로 재건파가 노골적으로 여운형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면서부터다 박헌영은 이들을 통해 건준의 접수를 계획했지만 안재홍 계열의 맹렬한 반발로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안재홍김병로, 이인, 송진우 계열을 일부 끌어들여 그를 견제하려 하였다.

9월 3일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만났는데 '건준의 간부들 속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경화할 위험이 있으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여운형은 '이 문제는 혼자 결심할 일이 못되니 토론해야 한다'고 대응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장악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사람을 들여보내 건준 조직의 장악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 세력의 건준 장악에 반발한 안재홍, 김병로 등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들은 박헌영 계열인거나 박헌영과 친분이 있는 건준 간부의 해임 또는 교체를 여운형에게 강하게 요구해왔고, 그들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하였다. 박헌영은 역으로 안재홍김병로가 자파들의 사람들을 건준에 심으려 한다고 항변하였다.

ㄹ.인공 내각 수립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조봉암을 배제하였는데, 이때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론가였다가 전향한 고경흠도 함께 배제하였다. 고경흠일제말기부터 여운형을 추종하였고, 여운형이 죽는 순간까지 그의 비서로 있었다. 또한 박헌영은 1932년 이전부터 조봉암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일련의 갈등에 대해 조선공산당의 원로인 김철수는 박헌영이 개인적 추종자 중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김철수1932년 옥중의 그에게 전향이라도 해서 살아남으라고 권했다가 그에 의해 심한 비판과 미움을 받게 되었다.

1946년 5월,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5년 9월 6일 박헌영은 일부 인사들과 함께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 선언을 하고 내각명단을 기초했는데 초대 주석은 이승만을 지목했다. 이무렵 이때부터 박헌영은 여운형을 경시했는데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반목불화하게 된다

1945년 9월 7일 여운형에게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여운형은 20여 일 간 치료를 받았으며 그가 정치활동에 나서지 못한 동안 인민공화국의 기반은 박헌영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여운형에게 여러 수차례의 테러가 있었는데, 극우단체 외에 여운형의 암살 배후로 박헌영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조선공산당 위원장 겸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ㅁ.신 정부 수립 운동

미군소련군의 주둔을 예감한 박헌영은 8월 20일 무렵부터 조속히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위해 움직인다. 좌익세력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미군의 진주를 고려하여 조급히 인공을 수립하였으며, 친 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을 시도하는 한편 각 부문에서의 대중을 조직하고 각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재건이나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서 박헌영과 여운형이 소련군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수립과 북한측의 인공 부인에서 드러난다.

한편 박헌영은 광복 이후에도 그는 반(反) 기독교적 강연을 다녔고, 반 기독교적 견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는 기독교계 인사들과 원수가 되었고, 불교유교 등 다른 종교들 역시 인간의 정신을 해치는 유해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특히 유교조선왕조 500년을 망친 비인간적인 억압사상이라는 등의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종교계를 완벽히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활동 자체를 인간의 자립심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유해한 것으로 인식했던 그는 종교계의 공세와 험담을 신경쓰지 않는다.

9월 16일 한민당(韓民黨)의 창당대회에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하였다. 송진우 등이 조직한 국민대회준비위원회 결성식에도 찾아가 축사를 낭독하였다. 처음에는 한민당 등 우익 단체와도 형식적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이후 우익과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로 변신한다.

9월 19일 김일성소련에서 귀국하였다. 미군이 직접 군정을 실시한 남쪽과 달리 북쪽의 소련은 가급적 김일성을 부각시켜 그를 대리인으로 삼는 데 초점을 맞췄다.김일성이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는 등 분란을 일으키자 참다못한 박헌영 등은 분파행동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소련도 아직 김일성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초기에는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10월 14일)를 평양에서 여는 등 김일성 얼굴 알리기에 급급했다

(9)군정 주둔 이후

1945년 10월 8일 박헌영은 개성시에서 김일성과 만났다. 김일성은 소련군 38선 경비사령부에서 이루어진 박헌영과의 비밀회담을 통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건설에 합의한 이후 공산당 조직사업에 주력하였다. 이날 회동에서 '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북조선 분국을 설치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김일성소련의 지원을 들어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으나, 박헌영은 일국일당 원칙을 강조하며 북조선 분국 설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가 합의됐다. 그의 북조선분국 설치 허락은 정치적 실책의 하나로 지적받기도 한다.

10월 10일 오후 2시 서울 안국동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10월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과 회담을 가졌다. 이날 박헌영은 하지에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신탁통치 반대 사태 이후 악화된다.

박헌영은 스스로 1920년대부터 이미 자신이 급진적이고 과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와 편견이 사회적으로 굳어졌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급진적이라거나 과격한 인사로 몰고 가는 것, 또는 무난한 것, 적당한 것을 좋아하는 풍조를 도리어 본심을 숨기는 기만행위로 보고 경멸하였다

ㄱ.이승만과의 관계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이승만에게 조선공산당의 영수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회에 가담했으나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독촉을 탈퇴했다. 45년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공식 석상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46년 이후 좌우대립이 가속화되면서 이승만을 방문할 때 그는 돈암장이화장에서 음식을 주면 의심하여 다른 이에게 먼저 먹어보게 하거나, 음식을 기피하였다. 한번은 김원봉과 함께 돈암장을 방문했을 때, 윤치영이 직접 요리를 하여 간을 본 뒤 식사를 대접했으나 박헌영은 이를 먹지 않았다. 이후 1947년 이전까지 종종 마포장돈암장을 방문했지만 형식적인 대화만 오고 갔다.

ㄴ.한민당 과의 관계

국내의 우익인사들과는 접촉이 없었고 서로 꺼렸다. 여운형을 일부 승인하던 안재홍이나 김성수 조차도 박헌영을 기피하였다. 광복 직후 박헌영은 우익진영에 친일파 청산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5년 9월 박헌영은 한민당 창당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박헌영은 한국민주당친일파 청산에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한민당은 답변을 거부하였다.

공산당원 일부는 그가 한민당이나 우익과 타협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한민당친일파 청산에 공식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고, 그가 사유재산을 탈취하려는 의도와 정략적 목적으로 친일파 청산을 들먹인다는 한민당원들의 반발까지 겹쳐지며 이후 박헌영과 한민당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악화되어 갔다. 1945년 12월 이후 한민당의 기관지와 논평, 친한민당계 언론인 동아일보에서 그가 신탁통치에 찬성한다,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희망한다, 소련의 연방이 되기를 희망한다 는 발언을 했다는 오보를 내보내면서 한민당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한민당계 우익과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안재홍건국준비위원회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원들의 가입이 증가하자, 박헌영과 손잡지 말라고 여운형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박헌영 계열 역시 포용해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ㄷ.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와의 관계

광복 이후 박헌영은 임정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를 천거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은 인공 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귀국했을때 박헌영은 12월 12일자로 발표된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임시정부를 '망국정부'라 지칭하고 임시정부요인들을 '망국인사'라 비판하며 그들의 권력욕과 패권주의를 비난한다는 주요내용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당초 허헌이나 여운형과는 달리 임정 법통도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지만 임정 요인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임정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11월 말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허헌 역시 상해 임정이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고, 여운형 역시 임정을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박헌영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외에 체류하던 집단이고 많고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 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임시정부가 법통이나 정부를 참칭하는 것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일방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임정과 우익세력과의 신경전을 펼치게 되었다.

또한 박헌영 등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론을 주장했으나 친일파 즉각 숙청론에 반해 김구 역시 배제후 건국과 건국 후 배제하는 것은 전후가 결과가 동일하다고 발표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ㄹ.김규식과의 관계

상하이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김규식은 박헌영을 대단히 미워하여 귀국 이후 그를 피하였다. 또한 김규식공산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상이라는 점과 한국인들은 편협하고 잔인한 인종이라 공산주의는 안 된다고 누누히 반복하였다. 그러자 박헌영은 공산주의가 나쁜 줄 알면서 소련에 있을 때는 왜 소비에트 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었느냐며 김규식을 이해관계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며 조롱했다.

1946년의 박헌영은 조선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의 이사로 참여하였다. 이때 김규식은 박헌영을 미워하여 조선적십자사 이사로 박헌영이 참여하자 김규식은 박헌영이 이사로 있는 곳에서는 일못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박헌영은 크게 불쾌해했다. 박헌영 역시 기독교 신자인 김규식을 대단히 혐오하였고, 이유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미워하는 김규식을 종교 문제를 넘어 인간적으로도 경멸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김규식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한 것의 진심을 의심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김규식에게도 프락치를 보냈다.

강원룡에 의하면 "김 박사는 이승만 박사보다도 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김 박사는 내게 ‘한국이 공산국가가 되면 피바다가 된다’며 ‘자네는 공산당이 뭔지 몰라’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미 군정청에서 적십자사 총재를 맡겼는데도 김 박사는 이사 가운데 박헌영(朴憲永)이 들어 있자 ‘그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며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한다.

뒤에 김규식삼청장에 파견된 기자 이본영송남헌에 의하면 '일종의 박헌영 프락치'라 증언했다. 민족자주연맹의 비서처장으로 있던 송남헌은 그에게 권태양을 추천했다. 송남헌은 뒤에 '권태양은 내밑에 있던 사람으로 내가 추천해서 썼다', '(권태양은) 성시백의 바로 직계이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지, 성시백이 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다. 박헌영은 김규식에게 권태양 등을 프락치로 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으나 권태양은 나중에 김일성이 내려보낸 김일성의 대리인 성시백의 직계로 변절한다

ㅁ.조봉암과의 관계

1945년 광복 직후 조봉암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여운형조봉암을 찾아가 두부를 주고 출소 직후 편의를 봐주었고, 그는 사람을 보내 석방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인천지구당 간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부지부장 등의 책임자 직책을 맡겼다. 그러나 1946년 5월, 조봉암은 그에게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선언하였다. 조봉암은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하게 됐다. 1945년 5월 15일 민전 인천부지부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 첫째, 인민위원회가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문제가 많다. 현금의 인민위원회는 비공산적 요소가 거의 없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구락부에 지나지 않는다.
  • 둘째, 민전에 공산당원이 과대히 침투하여 비당 군중의 능동적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
  • 셋째,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투쟁의 방침은 진실로 옳았지만, 기술적으로 졸렬했기 때문에 군중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 넷째, 무원칙하다.
  • 다섯째, 종파적이다.

한편 조봉암과의 관계는 1932년 이전부터 악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46년 5월에 있었던 조봉암의 박헌영 공개비판과 탈당 이후 탈당파들이 생겨남으로서 박헌영의 지도력에 타격을 주게 된다

박헌영은 1940년 이후 활동을 중단한 조봉암을 불신하였고, 공산당 일각에서는 조봉암을 유휴분자라며 비판했다. 조봉암은 공식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한 대신 조선총독부 경찰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1938년부터 1941년 박헌영은 인천에서 하던 지하활동을 지도했는데,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조봉암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봉암은 일본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고 당시 경찰의 보호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봉암은 공산당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활동을 자제해 왔다.

소련에서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으로 복귀한 조봉암에게 '조선 독립 이후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사칭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인천의 조선공산당 인천지구당 조직을 기만하고 조직의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비난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당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나왔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인천 조직에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혁명활동을 포기하고 일제 당국의 비호 하에 있었던 조봉암을 직위해제' 하였다.

조봉암이 박헌영과 결별하게 된 원인으로 박헌영이 코민테른의 노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데 대해서 차츰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광복 이후부터 계속 불협화음이 계속되던 박헌영과 조봉암의 관계는 1946년 5월 조봉암이 그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공개되면서 결별하게 되었다.

ㅂ.여운형과의 관계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을 당시, 초기에 박헌영은 이에 동조하였다.(1946년 4월에 루스벨트 대통령 1주기 추모식 때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여운형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박헌영이 평양을 다녀온 이후 여름무렵부터 좌우합작을 반대하였고, 이 때 여운형과 크게 다투었다고 한다.

박헌영과 여운형은 직간접적으로 조선공산당 내지는 남조선노동당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 몰락 양반가의 서자 출신이었던 박헌영은 여운형이 경기 양반가의 적장자라는 점을 들어서 비판했던 것이다. 3당 합당 문제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박헌영과 여운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말년의 여운형과 이런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면서 남로당계의 급진적 세력 일부는 여운형을 수차례 테러하였고, 대학교수 이정식여운홍 등의 증언을 토대로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박헌영을 지목하기도 했다.반면 여운형은 자신이 '박헌영에게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며 박헌영을 비판하기도 했고, 남로당의 정보 내용을 북조선김일성김두봉에게 수시로 보내기도 했다. 1946년 8월 여운형미군정청에 부탁하여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도 하였다.” 여운형미 군정에 자신을 제거해달라 고 한 정보를 입수한 박헌영은 분노한다. 한편 박헌영은 여운형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 그를 감시하기도 했다. 박헌영 시각으로는 여운형은 이미 사회주의를 포기한 중도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인식을 했다.

1946년 여름, 여운형은 평양에 갔다 오더니 자기의 인민당과 백남운신민당과 같이 3당을 합당하자고 공산당의 박헌영에게 제의하였다. 이것은 스탈린북조선 김일성의 지령이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제의에 수용하였지만 여운형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두고 감시하였다.

한편 여운형은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고 발표했다고 했고, 남로당의 한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 고 그에게 보고했다.

1947년 3월 16일에 발생한 여운형 가택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배후로 박헌영을 지목하였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증언에 의하면 폭탄테러가 박헌영계 좌파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증언하여 박헌영 일파의 개입을 시사했으며, 이정구, 이상백 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고 증언하였다. 여운형을 납치해 구타한 청년과 학생들 중에는 남로당원이나 박헌영계 조직원들도 있었고, 이런 이유로 박헌영을 배후로 보기도 했다

ㅅ.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과정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이 조공 북조선분국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박헌영은 당초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 사상과 이념, 정치적 이해관계와 노선을 달리 하는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한 박헌영의 재건공산당(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의 간판아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9월 소련군정의 강력한 후견을 받는 김일성이 입북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한 축을 형성함으로써 기존 정치판도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김일성은 입북과 함께 각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38선 이북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였다

소련군정의 의지를 반영한 김일성의 요구는 때 이른 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게 된다. 박헌영을 따르는 토착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엄연히 당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북에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은 분파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당사자인 박헌영과 김일성의 직접 담판을 통해 해결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절충안으로서 『서울의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데 합의했다. 지루한 격론 끝에 나온 이 합의는 타협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1945년 10월 10일부터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비공개로 열리고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13일 당초의 합의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분국)이 설립된다. 이로서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는 당원 대 당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로 서열이 조정되버리고 말았다.

북조선분국 창립 대회에서는 분국 지도기관을 선출,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국내파의 오기섭과 연안파의 김무정을 각각 선임했다. 또 집행위원회와 각 집행부서장도 선임했는데 김일성은 측근인 안길과 함께 17인 집행위원회의 일원에 포함되는데 그쳤다

김일성이 어렵사리 분국 설치를 성사시켜 놓고도 정착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일성이 분국 책임비서에 오른 것은 두 달 뒤 열린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이다. 김용범이 책임비서로 추대된 것은 광복 전후 평양에서 기반을 닦아 국내파로 분류될 수 있지만 특정 정파에 기울지 않은 데다 소련군정의 의중을 잘 읽고 처신해줄 인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나중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된 뒤 연안파가 주축이 된 조선신민당과 통합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변신하며, 북로당은 다시 남한내 좌파 3당의 통합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과 합당, 조선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북한이 내놓고 있는 공식 문헌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두고 '김일성이 과거 「미제 고용간첩」 박헌영의 수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시각도 있다. 북조선분국의 허용은 그의 정치적 실책의 하나였다는 견해와 소련김일성을 선택한 사실상의 김일성의 승리로 보는 시각이 양립한다.

ㅇ.전평 조직에 참여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全評)이 출범하였자 명예의장의 한 사람에 추대되었다. 당시 전평에는 금속ㆍ화학ㆍ출판ㆍ섬유ㆍ토건ㆍ피복 등 각계 산업 대표 51명이 참가했다. 결성대회 당시 참여 조합은 1194개, 조합원은 50여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집행위원장 허성택(許成澤), 명예의장 박헌영(朴憲永), 김일성(金日成), 레온 쥬오(세계노련 서기장), 모택동(毛澤東) 등이 추대되었다. 특히 전평은 결성대회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지의 노선을 절대 지지한다”는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11월 5일11월 6일 이틀 동안 서울 중앙극장에서 열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대회에 조선공산당 당수 자격으로 축사를 보냈다. 박헌영의 축사는 김삼룡이 대독했다. 박헌영은 전평 결성대회 명예의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됐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 결과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박헌영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2월 28일 경교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관련 대책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2월 30일 회의장에 참석하여 미군정과의 충돌은 안 된다고 하던 송진우가 자택에서 암살당하자 그는 암살공포증에 사로잡힌다. 이후 박헌영은 서울 외에도 대전대구에 비밀 거처를 마련하고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녔다.

한국노총에 따르면 1945년 11월 5일 설립된 전평은 간부 대부분이 조선공산당 간부를 겸임하고 있을 정도였으며 좌익의 방침에 따라 신탁통치 찬성, 박헌영(朴憲永) 석방, ‘남조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등의 정치투쟁을 벌였다 한다

ㅈ.신탁통치 발언 왜곡 사건

박헌영은 1945년 12월부터 한민당 계열에 의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오명을 썼다. 한민당이나 동아일보의 주장과는 달리 1946년 1월 16일 경까지만 해도 그는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말 신탁통치 결정 직후 박헌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 등 내외신 기자단과 인터뷰하였다. 인터뷰에서 박헌영은 현재 한국은 소비에트화할 단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미군정반탁운동에 라디오 사용을 허락하는 등 반탁운동을 옹호, 고무하고 있다, 인민위원회 등 민주주의 세력을 대량으로 검거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어 박헌영은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 조선은 언제나 독립국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이를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박헌영은 조선이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이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허위기사를 작성했다.

그렇게 되어서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박헌영이 존스턴에게 1국 신탁제를 지지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방송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로 담았고 한국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박헌영은 신탁통치 찬성을 부인성명을 발표하였고, 조선일보는 방송의 보도와 박헌영의 부인 담화를 함께 실었다

박헌영은 동아일보에 자신이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처럼 기사를 오보한 것에 대한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그가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오보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한국민주당은 박헌영이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는 오보에 이어 그가 '조선이 소련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 '조선이 소련 연방의 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1946년 1월 16일자에서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이라는 기사와, '박헌영의 매국언동, 한민당에서 배격을 결의'라는 기사를 싣고, 17일 크게 지면을 할애하여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 각 정당과 50개 단체 분연 궐기'라고 보도하였다. 1월 18일 동아일보는 이것을 가지고 다시 사설을 썼다. 반탁단체들은 동아일보 보도대로 박헌영 타도를 결의하였고, '매국적징치 긴급단체협의회'를 조직, 결성하였다. 박헌영은 곧 부인담화를 발표하였고, 1월 5일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존스턴은 다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뉴욕타임즈에 오보는 없다. 존스턴씨와 박헌영씨의 회담진상 경위'라는 제하로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후 박헌영은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처럼 알려져 왔고, 반탁단체들의 성토 대상이 되었다.

결국 찬탁론자에다가 친소파로 몰리게 된 박헌영은 1946년 2월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고, 소련이 찬탁 지령을 조선공산당에 내리면서 찬탁론자가 되었다. 서울에서 그는 우익단체들의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우익 청년단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 여운형을 암살의 표적으로 삼았다. 김원봉, 허헌도 표적이 되었고, 그밖에 진영을 넘어 김규식, 안재홍, 배은희, 명제세, 장덕수 등도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찬탁을 주장하자, 한민당은 그가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며 비난, 공세를 가하였다. 송진우 암살 직후 테러와 암살의 위협을 느낀 그는 여러 곳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청년단체의 위협을 피해 그는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ㅋ.찬탁으로 선회

한편 신탁통치 오보 사건 이후 우파친일파들에 의해 매국노로 규정된 박헌영은 수시로 납치, 구타,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박헌영은 하루에도 여러 번 침실과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에 있어서 열강 등 외세 강대국의 개입은 부득이한 현실임을 인정했고, 열강들과 외국의 동의를 구하고 정부 수립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하던 중, 김일성의 북조선 권력 장악에 박헌영의 심기는 영 못마땅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소련 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공산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고 보았다. 박헌영의 이런 비판은 스탈린에게까지 보고되었는데,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극비리에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그게 46년 7월 20일이었다. 두 사람을 만난 뒤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최종 재가하였다.

2월 한반도에 총선거 시행을 위한 미국, 소련 등의 협력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다고 결정되자, 그는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미소공위 활동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 찬성이 알려지면서 그는 또한번 우익과 친일파들로부터 매국노로 몰려 심한 비판과 질타를 당한다.

46년 2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에서 박헌영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민주당은 본부에서 38단체와 공동으로 매국적 징치(懲治) 긴급협의회를 조직하고, 박헌영을 매국적으로 규정, '매국적 박헌영 일당을 격멸하자'는 국민대회 성토강연회(聲討講演會)를 개최하기로 하고 박헌영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박헌영은 자신은 신탁통치에 찬성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변명이라며 매도당했다. 1946년 3월 박헌영은 김재봉의 2주기 추도식을 주관하였다.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부수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되자 박헌영은 3월 22일 『해방일보』, 『자유신문』, 『조선인민보』, 『서울신문』 등에 '미소공위에 의해 수립될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4월 2일 밤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 김일성, 소련 군정 인사 등과 회담하고, 4월 6일까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담한 후 4월 6일 평양을 떠났다.

 

 (10)정치 활동

ㄱ.정치 탄압과 테러, 은신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에서 반공노선으로 전향한 김두한에게 납치될 뻔 되기도 했다. 소련에 유폐되어 있던 주세죽은 재혼한 남편 김단야가 죽은 뒤 혼자 살다가, 해방 직후 남편 박헌영이 해방 정국의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귀국을 희망하였다. 주세죽은 소련 당국에 여러 번 귀국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1946년 5월 주세죽은 “고국으로 돌아가 남편을 돕겠다”고 스탈린에게 석방을 청원했으나 소련 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당시 소련은 박헌영에게 주세죽이 정치범으로 유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했고, 박헌영 역시 주세죽이 소련에서 잘 지내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6월 3일 이승만전라북도 정읍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를 수립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그는 이승만이 민족을 분열시키려 한다며 성토하였다. 이어 박헌영은 ‘반동 두목의 고립화만이 공위(共委) 속개, 독립을 촉진’(1946년 6월 13일)을 발표하였다.

1946년 7월초에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남한 정세에 대한 보고를 한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 한다”는 격려를 받았다. 7월말 박헌영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다섯 번째 회동을 가졌다. 8월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조선공산당조선신민당 앞으로 3당합당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3당합당 요청을 수락하였다. 1946년 9월초, 박헌영은 소련스티코프에게 "사회단체"에 대한 지도요령에 관한 문의를 하고, 그로부터 "테러와 압제에 항의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는 지시를 받고 박헌영에게 2차에 걸쳐 일화 500만 엔을 지원받았다.

7월 22일 모스크바 및 북한 방문에서 돌아왔다. 돌아온 박헌영은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박헌영은 여운형에게 미군정에 놀아나지 말 것과 남북한 좌익세력의 단결에 의해 남한 우익반동을 구축할 것을 역설하였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여운형김원봉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그러나 7월 27일 박헌영은 일방적으로 좌우합작의 좌측 5원칙을 발표해 버렸다

ㄴ.월북과 이동, 대구 사태

9월 4일 미군정은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10월 박헌영은 10.1사태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조선민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진정한 영도자이며 끝까지 철저한 반제국주의 투사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 극우익 반동분자들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좌우합작운동과 입법기관 참가를 운운하고 인민대중을 속이는 사이비 민주주의 지도자들의 본질을 폭로할줄 알며 그들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며, 인민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며, 또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철저히 실시하며, 산업국유화를 주장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지도자임을 보이어 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이후 박헌영은 미 군정에 쫓겨 삼팔선 이북 지역으로 도피하기도 하였으며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첨병이자 착취 수단, 세뇌 수단으로 규정하고 공격한 것 역시 기독교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많은 적을 만든 그는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하루에도 여러번 거처를 옮겨다녔다. 이후 그는 남한 각지에 은신해 있었으며, 당원들의 은신처 제공으로 미군정의 추격을 피해 수시로 거처를 이동, 숨어다녔다. 박갑동은 박헌영의 월북을 김일성의 인질로 표현했다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박헌영은 경성부로 내려와 경성의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 축사를 낭독했고 타지역의 메이데이 행사에서도 그의 축전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메이데이 행사는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미군정에 대한 항거와 폭력사태로 변질되어 갔다.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 앞에서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대구 감영 근처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헌영은 무력 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불필요하게 미군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며 중단을 촉구했지만 사태는 걷잡을수 없이 확산되었고, 경찰관과 행사 참가자 간의 물리적인 폭력사태로 진행되었다. 박헌영은 즉시 경성부를 떠나 은신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김구·한민당은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익 정치인들이 테러집단을 후원하는 것을 방치한다며 미군정에 알렸다. 그러나 그의 제보는 묵살당하였다.

남조선로동당 창당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은 남조선로동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46년 7월, 남북 양쪽에서 좌익세력의 새 판 짜기가 시작됐다. 구 소련 군정의 지시하에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합쳐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을 한데 모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다. 북로당 결성은 순조롭게 진행돼 8월 28일 창당됐지만 남로당은 미 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에서의 합당은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이 인민당 당수 여운형에게 합당문제를 꺼내고, 여운형이 이에 호응하면서 급물살을 탔다.그 러나 3당 합당을 계기로 내연해온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해 반(反)박헌영파와 친(親)박헌영파로 갈라지고 인민당과 신민당도 이에 영향받아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합당은 물건너가는 듯했다 그러나 어차피 합당은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결국 소련의 개입으로 1946년 11월 23일부터 이틀간 결성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남로당 출범이 확정됐다. 소련 군정을 등에 업은 박헌영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남조선로동당 결성 과정에서 색깔이 선명치 못한 인사들을 끌어들인다는 일부 조선공산당원들의 반발이 있었고 그들은 박헌영과 수시로 갈등하게 된다.

박헌영은 3당 통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1946년 8월 20일 남조선 좌익 3당의 합당 문제와 관련해 박헌영은 북조선 공산당 명의로 좌익 3당 합당에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만다. 한편 국정원 차장을 지낸 정치학자 서동만은 '북로당 창건을 계기로 박헌영과 김일성의 위상이 변화했다'고 보기도 했다.

ㄹ.제1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

1947년 1월 박헌영은 조선적십자사 이사(理事)에 선출되었다. 박헌영은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조선적십자사의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나, 그의 조선적십자사 가입을 불쾌해 하던 조선적십자사 총재 우사 김규식과 수시로 마찰, 충돌을 빚었다. 강원용에 의하면 김규식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1947년 2월 27일 미 군정청 경무국장 명의로 '박헌영 체포 유공자에게 황금 120돈쭝을 수여하겠다'는 현상금이 내걸렸다. 박헌영은 미군정우익단체, 친일파의 공격을 피해 각처로 숨어다녔고, 3월 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에는 만일 총선거가 바로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새 정부의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 뒤 박헌영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강하게 반발했고, 1947년 10월경 3.8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건너갔다. 이후 황해남도 해주 등지에 이동, 체류하며 남한의 남로당을 서신과 통신으로 지휘하기도 하였다. 1948년 2월 평양으로 가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1948년 4월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남북협상이 개최되자 평양에 체류하며 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행길을 방문한 인사 중 김규식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남북협상 당시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단독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협상에 참가했던 여운홍은 박헌영의 발언에 격분하여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박헌영은 '왈거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자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하였다.

5월 남북협상이 종결된 후, 박헌영은 다시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남북협상 후 북조선에 잔류한 것은 그의 정치행보 중 최악의 실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뒤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소환되어 스탈린을 만났으나, 스탈린은 일찌감치 위성국가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점지했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렸던 것이다. 해방정국 초기까지만 해도 당수였던 박헌영과 북조선분국의 비서였던 김일성의 관계는 스탈린의 선택으로 역전되었다. 이를 두고 명지대학교 이지수 교수는 스탈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 대신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택한 것은 KGB 라인의 승리이기도 하다고 봤다.

그 뒤 남조선노동당북조선노동당이 통합될 무렵 당대 당 통합에 의해 그의 지위는 김일성의 아래로 격하당하였다. 박헌영은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으로 북한 정권수립에 참여하였다.

한편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한 이후 그는 해주 또는 평양에서 사자를 보내 남조선로동당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1930년대부터 스탈린을 비판했고, 박헌영을 스탈린의 앞잡이로 봤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들을 활용해 남로당을 탄압했다. 한편 그는 이현상지리산으로 투입한다.

(11)2차 연석회의와 북조선 단정 참여

ㄱ.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

1차 연석회의에 참석한 후 박헌영은 귀환하지 않고, 서신을 통해 남반부에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1948년 여름 그는 황해도 해주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때 음악가 김순남은 박헌영을 따라 1948년 여름 해주에 정착한 후, 평양음악학교 교수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헌법위원, 역사연구보존위원이 되었다.

48년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열린 제2차 남북 지도자회의(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본회의에 참석했다. 이어서 예비회담에서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 리영 등 4명에 의해 의제에 관해 보고했다. 먼저 보고에 나선 박헌영은 남한 단선과 국회에 대한 부정과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남한 민중들의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특히 1차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우익과 중간파들에 대해, 이들이 단선단정 반대 투쟁에서 '커다란 사업'을 진행시켰다고 추켜세웠다. 그 실례로 4월 남북 전조선 지도자 연석회의 직후에 결성된 '남조선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가 여러 개의 성명서를 발표한 사실을 들었다박헌영은 정세 보고에 이어 향후 대책으로 전조선 최고인민회의 창립을 제의했다. 그는 특히 1차 지도자협의회에서 합의된 전조선 정치회의를 개최할 수 없게 된 것은 미군이 철군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남북 상황을 고려한 각기 다른 선거 방법도 제시했다

ㄴ.북한 단독 정부 수립

1948년 8월초 박헌영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서신을 통해 서울로 보내왔다. 8월 21일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박헌영은 남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서울 영등포구 선거구)으로 선출되었다. 8월 25일 남·북조선로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연합중위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됐고,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참석했다.

북한 정권 출범은 시종 소련군정이 주도했다. 공산당과 신민당을 통합해 노동당을 만들도록 했고, 북한 헌법 제정도 감독했다. 결국 소련의 북한 단정 수립 의지가 확고해지자 박헌영은 소련의 지시에 따른다. 그해 9월 2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제출한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명단을 보고는 소련측에서 "남조선 대표를 늘리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인선이 갑자기 바뀌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장군이 제안한 것이었다

1948년 9월 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설치되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9일 북조선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박헌영은 공화국 내각 부수상외무상(外務相)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의 월북으로 대한민국에 있던 남조선로동당이승만의 단정 수립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전멸, 산악화되었다가 궤멸당했다. 박헌영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분열행위로 간주하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0년 남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이 통합되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ㄷ.단독정부 수립 이후

박헌영과 김일성을 대표로 한 북한 초대 각료들은 1949년 2월 소련을 방문, 경제와 문화 분야 전반의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부수상 홍명희 박헌영, 문화선전상 허정숙 등이 포함됐다. 일행은 차이콥스키음악당에서 소련국립무용단의 공연을 보고 그날 밤에는 박헌영의 장녀가 추는 몽고식 무용을 즐기기도 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최고 밀월기라고 할 만했다.

1949년 3월 김일성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9년 9월경 박헌영은 평양시에서 윤레나와 재혼했다. 이때 본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박 비비안나가 일시적으로 북조선에 체류중인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윤레나에게서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박헌영은 1949년 재혼 이후 주세죽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 9월 30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그해 10월 4일 박헌영 외무상 명의의 전문을 중국측에 보내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를 교환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였다. 1950년 5월 박헌영은 김일성 등과 함께 중국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50년 한국 전쟁 직전 그는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남한 내에 있는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0년 6월 26일 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도 인민군 중장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전쟁의 운용을 놓고 김일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남로당계와의 연결이 차단되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몰락을 의미했다

ㄹ.중국과의 외교 체결

1949년 10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체결을 시작하였다. 10월 4일 박헌영 외무상 명의로 ‘양국 간 우호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에게 보냈다. 중국은 10월 6일 저우 언라이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명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즉각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환영한다’는 답신을 박 외무상에게 보냄으로써 이날로 양국 간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그는 중국과 북조선의 정식 외교 관계를 체결하였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이주연(李周淵)을 초대 주중국 대사로 천거하였다. 1950년 1월 북조선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이주연을 초대 중국대사로 임명했으며 이 대사는 1월 28일 베이징에 부재 중이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대신 류사오치(劉少奇) 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ㅁ.무장 봉기 기도

한편 대한민국에 정치적 배경을 두었던 박헌영은 1950년 한국 전쟁 직전 국지도발전을 기도하였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일명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고 소련은 이를 한반도에서 어떤 무력도발이 있더라도 미국은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박헌영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전망하였다.

박헌영이 6·25 전쟁 직전, 남로당 정치공작원을 남한에 내려보내 봉기를 일으키려 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로당원 출신으로 전향한 뒤 '남로당 연구'를 낸 고 김남식은 "박헌영·이승엽이 월북한 뒤 북한에 심복들을 불러들였고, 1950년 6월 초순 이들을 남한의 각 도에 파견했다"고 썼다. 서울·충남·전남·전북 등에 5~10명씩, 주로 해상을 이용해 침투한 이들의 목적은 '당 조직을 수습하여 인민군 남침 때 군중을 호응·궐기시키며 인민군 강점 지역에서 당 복구를 위한 것'이었다. 서울에는 6월 10일 이승엽의 지령에 의해 이중업과 안영달이 파견됐고, 충남에는 남로당 중앙간부 출신인 이주상과 충남도당 위원장을 지낸 여운철 등 5~6명이 서해안으로 상륙, 대전에 잠복했다..이들 가운데 전남 영광 지역에 침투한 정치공작원의 최후는 영광 지역의 6·25전쟁 체험을 현장조사한 윤정란 전 국가보훈처 연구관에 의해 알려졌다. 윤 박사에 따르면, 6·25전쟁 발발 사흘 전인 22일 밤 무장 정치공작원 32명이 발동선을 타고 전남 영광 해안에 상륙했다. 주민들은 이들을 보자마자 경찰지서에 신고했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전원이 몰살당했다. 남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강규형은 '6·25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이 장담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농지개혁 덕이 컸다'고 보기도 한다.

ㅂ.소련의 남침 승인 획득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 비밀 회담에서 북한의 선제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이때 “전격전을 수행하고 공격세부계획 수립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하고, 마오쩌둥과 만나 남침 계획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5월 29일에는 강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과 바실리에프 소련 군사고문단장 사이에 ‘선제타격작전계획’이 완성되고 6월 16일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가 떨어졌다.

1950년 4월 소련의 전쟁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박헌영은 이때 ’북조선에서 첫 신호’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이를 두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그에 반해 이승만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리고 남조선 인민들이 얼마나 그의 침공을 손꼽아 기다리는지를 터무니없이 부풀리며 남침을 부채질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셈”이라고 비판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침 계획을 세워놓고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간다. 스탈린이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결국 승인을 하게 된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논리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두 사람은 “미국은 한국전쟁에 절대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는 논리를 폈다.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며 무기를 지원하게 된다. 1950년 5월 14일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만나 전쟁은 '이제 전쟁은 공동 과제'라고 발언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의 전면 남침안에는 반대했다. 박헌영은 김일성의 전면남침안에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옹진반도 점령 이후 남조선과의 협상을 시도하자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황해도의 남쪽 끝인 옹진반도를 점령해 대한민국의 민심을 흔들어 놓으면 대한민국 정부는 궁지에 빠져 북한이 제의하는 협상에 응하게 될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유리한 입장에 서서 평화통일을 성취하게 된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의는 묵살당했다. 후일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뒤집어 씌웠다. "박헌영 도당은 1949년 여름에 '조국이 불원간 통일된다'는 거짓풍설을 퍼뜨리면서 당원들과 유격대들을 원쑤들의 총부리 앞에 내몰았다. (당 력사연구소,"조선로동당 력사교재", 조선로동당 출판사, 1964, 240쪽)."는 것이다.

(12)한국 전쟁

ㄱ.개전 직후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온 6월 28일 박헌영은 방송연설을 했다.

 

 

 

이와 같은 엄숙한 시기에 왜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떨치고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모든 인민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전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50년 6월 28일자 인터뷰

 

 

 

6월 28일 일행을 따라 서울에 내려와 집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7월 2일 박헌영은 인민공화국 외무상 명의로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조선인민군의 패주가 계속되자 박헌영은 인민군내 당과 정치 사상 사업을 총 책임지는 부서 신설을 추진했고, 1950년 9월, 인민군 총정치국이 신설되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 9월, 조선 인민군이 패주하자 박헌영은 김일성과 각각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최고사령관의 명의로 인민군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으나, 인민군의 패주는 계속되었다.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은 계속되었다. 이에 북한은 당-정치-사상사업을 총책임지는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하였는데, 박헌영이 총정치국장을 맡았다. 10월 15일에는 늦어지는 중국의 참전 문제로 직접 북경으로가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고강을 만나 참전문제를 해결하였다.

1950년 11월 강건전쟁 중 전사하자 박헌영은 김일성 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11월 26일 박헌영은 공화국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앞으로 성명서를 보내 미군의 학살 만행을 UN이 중지시킬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다. 1951년 5월 8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이 조선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며 규탄했다.

 ㄴ.한국 전쟁 기간 중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의 세부계획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늘 행동을 함께 했다.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을 승인받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 방문 때도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했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을 면담하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시달받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에 남아 있던 그의 친척들은 수난을 당했다. 그들은 박헌영의 월북으로 월북자의 친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거나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다가 사살되었다. 그의 이복 형 박지영은 1950년 의문의 실종을 당하였고, 조카뻘 되는 일족 중 박병일은 공산당의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하였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는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다가 뒤에 화장되었다. 아들 박병삼(승려로 출가 후 원경으로 개명)은 그의 월북 후 박지영에 의해 양육되다가 산사의 승려에게 맡겨져 죽음을 피하였다.

그해 10월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은 중국군의 참전소식을 전하였다. 중공의 참전 소식을 박헌영이 전하자 김일성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한다. 얼마 뒤 김일성 앞에 나타난 팽덕회가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이것은 나와 맥아더의 전쟁이오. 귀하가 끼어들 여지는… 없소!"라고 했다.

1952년 1월, 중국펑더화이를 찾아 면담하였다. 펑더화이와의 면담에서 박헌영은 '더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만일, 소련중국이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그 어떤 곤란도 극복하고 현재 입장을 사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곧이어 박헌영은 펑더화이로부터 당시 군사적 상황이 중공군에게 유리하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 자신의 방문은 개인적인 차원의 방문이며 노동당 중앙위원회나 북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밝혔다. 김원봉, 조소앙, 안재홍 등의 반전 중립화 운동 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전쟁으로 물자와 인명 살상의 피해가 계속 발생하는 점을 들어 그는 김일성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월초 박헌영은 다시한번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지만 거절당했다.

2월 22일 박헌영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감행하는 잔인 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세계만방의 인민들에게 알린다" 고 말하면서 유엔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미국은 1952년 1월 28일부터 세균을 가진 대량의 곤충을 북한상공에 비행기로 살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틀 뒤 중국의 주은래 수상은 북한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미국을 비난했고, 3월 8일 그는 미국의 비행기가 2월29일 이래 중국의 화북과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5월 미군과 UN의 개입으로 전세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후퇴를 주장하는 김일성과 유격전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박헌영 간의 의사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 전쟁에서의 패전을 예상했던 박헌영은 후처 윤레나를 소련으로 보냈는데, 1952년 윤레나는 모스크바에 머물며 둘째 세르게이를 낳았다.

ㄷ.김일성과의 갈등

1950년 9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강건 총참모장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그는 직접 관을 메고 장지로 향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을 방문한 중국대사 예지량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가 발송되었다. 편지는 공동 명의였으며 김일성과 박헌영이 나란히 서명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출신 배경이 너무 달랐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8·15 광복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던 박헌영이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면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은 정체에 대한 시비가 분분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김일성이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10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공산주의 활동 경력에서 대선배였던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풋내기로 비쳤을 것이다. 신복룡 교수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도 노선 차이보다는 주도권 다툼의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한다.

(13)말년

ㄱ.투옥과 수감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조선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 1952년 9월 4일 옛 소련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주재로 펑더화이(彭德懷) 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김일성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불가닌 등 옛 소련 공산당 수뇌부가 모두 배석했고 중공에서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외교부장이, 북한에서는 박헌영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배석하였다. 그해 10월 귀국 직후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포된 직후 박헌영은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는 자기비판을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만 답변하였다고 한다. 1953년 3월 그는 체포당하면서 당에서 제명당하고 부총리 겸 외무상의 직위에서도 해임당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의 정치수용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55년 12월 15일, 북조선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명은 '피소자 박헌영의 북한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붙힌다. 박헌영은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집어던지면서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 라며 강하게 격노한다

ㄴ.재판과 고문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박헌영의 동거녀였던 이순금의 진술 역시 박헌영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순금은 그가 남한에 있을 때 실제로 미국을 도왔다는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55년 12월 15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형문 과정에서 그는 '그렇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렇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재판장에서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지막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소련 조사단이 돌아간 직후 '박헌영 사건 조사를 속히 끝내 공개 재판에 회부하라'는 김일성 수상의 지시가 떨어져 내무성 예심처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없는 어려움이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엇다. 1년여 동안 수사를 계속하면서 온갖 고문과 협박,회유를 동원해 자백을 얻어냈지만 번복되기 일쑤여서 재판을 열 경우 자칫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


설사 자백이 번복되지 않는다 치더라도 자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사정으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수상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1년 반이 계속됐다. 그러니까 만 2년 반 이상을 조사해 재판에 부친 셈이다.


1955년 12월 어느 날, 평양 시내 내무성 구락부.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 주관으로 역사적인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빨치산 출신으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배심원은 소련 정보 기관 출신 내무상 방학세와 김일성 유격대 출신인 최고 검찰 소장 이송운이 각각 맡았다. 노동당 중앙 위원, 중앙당 부장 이상 간부, 내각 부상 이상, 시,도당위원장, 각 사회 단체 핵심 간부들은 모두 재판을 방청토록 하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1천여명이 참관했다. 군사 재판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사건의 조사,예심 주관부처 내무성 부상인 나(강상호)는 맨 앞줄 왼쪽에 앉아 예심처 간부들의 재판 진행 업무를 진두 지휘했다. 재판장과 배심원들의 책상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조사서 등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심처는 이 재판에 대비해 간밤에 박 부수상을 내무성내 간부용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목욕으로 면도를 시키고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검은 양복을 챙겨두었다.

호송원들이 박 부수상의 팔장을 끼고 재판장에 입정했다. 재판장에 들어선 박 부수상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지정석에 앉아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검찰측이 범죄 사실을 낭독하고 사형을 구형하는 논고장을 모두 읽어 내릴 때까지도 안경 속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절 표정을 노출하지 않았다. 이어 재판장의 질문이 시작되자 두 눈을 뜬 후 시선을 재판장에게 고정시켰다.



최용건: 검사의 논고를 들었는가.

박헌영: 잘 들었다.

최용건: 이 논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헌영: 논고장이 길어 재판장이 어떤 부분을 묻는지 잘 모르겠다. (재판장 최용건이 곧바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자, 배심원 방학세가 재판장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면서 몇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최용건: 검사는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다고 선언했지 않은가.

박헌영: 재판장이 보는 미제 간첩이라는 개념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다.

최용건: 스파이면 스파이지 개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박헌영은 내무성 예심처 조사과정에서 미국놈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는가.

박헌영: 그렇다. 멀리는 상해에서, 가깝게는 남조선에서 혁명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

최용건: 그것이 스파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인민들은 미제 스파이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엄숙한 재판을 모면하려는 수작을 부리지 마라. 왜 스파이를 했는지 말하라.

박헌영: 남조선에서 미군정 인사들에게 이승만 세력과 감싸고 돌지 말고 민전(1946년 남한內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 좌익단체들이 결성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 한다.) 인사들의 활동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속히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가고 조선의 통일은 조선인 손으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최용건이 학식과 법률 지식이 모자라 박헌영의 이론과 논리에 밀리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배심원 방학세가 말을 가로챘다.)

방학세: 민전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미제와 손잡고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박헌영: 미군정이 민전활동을 감시하고 공산당 당원들만 잡아가는 것을 항의한 것이지 그들과 손잡고 혁명 사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세: 무슨소린가. 예심처에서 미제들과 주고받은 담화 내용과 그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래도 부인할 작정인가. (목청을 높이며) 우리 공화국 원수 미제의 간첩이 인민 앞에 솔직히 죄과를 털어놔도 용서받을지 모르는 판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까발리고 있는가.


(순간 박헌영 부수상은 '그래! 너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며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 던졌다. 안경알이 박살났다.)


(느닷없이 박헌영이 안경을 던지는 바람에 재판정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호송병들이 시멘트바닥에서 박살난 안경알을 줍는 사이 방청석의 일부 고위간부들이 '저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저런 새끼는 재판할 필요가 없어'라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모두 김일성 수상 직계의 빨치산파 또는 갑산파 간부들이었다. 그러나 당과 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은 굳은 포정으로 묵묵히 재판과정만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배심원 방학세(내무상)가 일부 간부들의 웅성거림에 고무된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방학세: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 따위 행패를 부리는가. 동무(박헌영이 부수상 시절에 경칭인 동지로 호칭)는 아직도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를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가?

박헌영: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잘 알고 있다.

방학세:(손가락으로 박헌영을 가리키며) 동무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두목으로 공화국의 특급비밀을 미제들에게 까발린 스파이 왕초였다. 동무를 믿고 공화국에 따라 올라 온 이강국(전 외무성부상), 권오직(전주중대사), 구재수(전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등이 그 증인으로 이자리에 와 있지 않은가? 지금 저자들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무에게 실망과 조소를 보내고 있다. 종파분자 두목답지 않은 행동을 벗어 던지고 솔직히 동무의 죄과를 시인하고 용서받는 것이 이 도리 아닌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재판장 최용건(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최용건: 동무는 미제 간첩임을 시인하는가?

(박헌영은 증인석에 나와있는 이강국,권오직 등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신들의 보수였던 박헌영의 첫 시선을 받는 이강국등의 표정은 조금전 방학세 내무상의 힐난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그들이 면면에서는 원망하는 표정은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오히려 '억지로 끌려온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시선을 마주칠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시멘트바닥으로 처박은채 한참동안 일으킬 줄 몰랐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시선이 상대방을 잃자 초점없이 고개를 재판정 천장으로 올려놓았다. 재판정의 분위기도 잠시 숙연해졌다. 지금도 나(강상호)는 불운의 한 혁명가와 그 부하들이 '운명'의 재판정에서 최후 시선을 맞부닥치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박헌영이 2~3분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헌영: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진술 기회인가?

최용건: 그렇다.

박헌영: 알겠다. 얘기가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 줄 수 있는가?

방학세: 이미 예심처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지 않은가. 그 얘기를 시인하는지 여부만 간단히 하면 되지 않은가.

박헌영: 그렇다면 예심처에서 조사한 사실만 가지고 당신들끼리 모여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고 왜 나를 재판정에까지 데리고 나왔는가. 이렇게 많은 간부들에게 이 박헌영의 몰골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함인가. 자, 박헌영을 똑바로 봐라!


(그는 전후 좌우로 돌리면서 매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최용건: 그래, 동무의 말이 옳소. 이 자리는 동무가 예심처에서 못했던말을 다할 수 있는 곳이오. 지루하지만 들어주겠오.


(박헌영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최용건이 갑자기 경어를 써가며 충분한 최후의 진술을 허락했다.)


박헌영: 나는 이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말 그대로 요식일뿐, 어떠한 최후 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때, 아니 그 훨씬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엇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제문제를 협의하고 있는것과 가은 맥락의 뜻이다.


(최후 진술이 본론부분에 접어들면서 더욱 카랑카랑해진 박헌영의 목소리는 재판정을 압도했다. 최후진술을 듣고 있던 재판장 최용건이 박헌영과 일문일답을 시작했다.)


최용건: 동무는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대체로 시인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누구와 연락을 했고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가.

박헌영: 재판장은 말귀를 그렇게 못알아 듣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무성 예심처에서 진술한 기록이 재판장 책상위에 있을테니 그것으로 대신하시오.

최용건:(말귀도 못알아 듣는다는 비아냥거린 답변에 최용건은 약간 열을 받은듯 목소리를 높이면서) 동무는 예심처의 진술과 재판정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양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굳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예심처의 진술을 참고하겠다.

박헌영: 아직도 재판장은 말귀가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예심처의 진술과이곳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차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형사법에 관한한 나도 '반풍수'는 됐다고 자부한다.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심처의 진술로 대체하라는 말은 그 이상 새로운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최용건: 이론가(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붙인 별명), 이곳은 법이론을 토론하는 토론장이 아니다. 다 떨어진 일본놈들의 법이론을 들고나와 어쩌겠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재판장의 질문에만 충실히 답변하라. 공화국의 비밀자료를 누구에게 넘겨주었는가.

박헌영: 미군정 지도자들을 만나 약속한 것은 내가 장차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 국제협력관계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직 내가 최고책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약속은 하나도 이루어진게 없다.

최용건: 그런 헛소리를 듣기 위해 이 재판을 연 것이 아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소리인가.

박헌영: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그대들 말대로 나는 미국의 스파이었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


(박헌영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관들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당의 지시와 미리 준비한 판결문 원고를 선고에 앞서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20여분 후 최용건을 선두로 재판관들이 준엄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재판장 최용건은 준비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최용건: (중략, 예심처 기소장과 중복)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재판장 최용건.



최용건은 긴 판결문을 낭독한 후 배심원들과 함께 퇴정했다.

정확히 밤 10시였다. 5시간동안 진행된 마라톤 재판이 막을 내렸다. 일부 수상직계 간부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이엇으나 대부분의 참관간부들은 굳게 입을 다문채 사형선고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각자 귀가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3월 검거 후 2년여동안 끌고 온 박헌영 재판은 막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9시 정각, 내무성 간부회의실. 제1부상겸 정치국장인 필자(강상호)와 예심처장 주광무등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학세 내무상 주재로 박헌영재판에 따른 대책회의가 있었다. 예심처장 주광무가 재판때까지 박헌영이 미제간첩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수사과정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장황하게 보고했다. 시종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광무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방학세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변명만 갖고 수상실에 올라가 보고 할 수 없으니 그 대책을 제시하라!'며 화를 냈다. 주광무가 '내무상동지, 현 상태에서 박헌영의 사형언도를 집행할 경우 소련을 비롯한 형제국들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사형집행을 보류하고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방학세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알았소, 수상동지께서 우리의 변명을 받아주실지 모르지만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나와 동무의 목은 이론가의 스파이 증거에 달려 있소'라고 강조한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수상실로 직행했다. 전 간부들은 방학세 내무상이 김일성수상에게 보고를 끝내고 돌아 올 때까지 그대로 회의실에서 기다렸다. 한시간여 후 방학세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에 나타났다.

김일성 수상에게 박헌영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방학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


방학세: 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소. 그러나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무성 책임으로 남아있소. 국제동향을 보아가며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무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공은 다시 내무성으로 넘어온 점을 명심해야하오. 예심처장은 전 요원들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미제간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하오. 그리고 강상호 부상도 수상동지와 당의 명령이 하루속히 관철되도록 예심처를 철저히 감독해 주어야겠소.


이날회의에서 방학세의 지시(곧 김일성의 지시)를 종합하면 박헌영에 대한 사후처리문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즉, 미제간첩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는대로 국제여론에 관계없이 곧바로 사형을 집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심처에선 어느때보다도 강도있게 '미제간첩' 증거확보에 나섰다. 전 예심처 조사요원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8개월여 동안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을 불러 원점에서부터 재심문하는 등 증거확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내무성 특수요원들까지 동원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미제간첩' 흔적을 찾는데 안간힘을 썻다.

그러나 결과는 당초 예측했던대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주광무를 비롯한 예심처 요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증거수집을 진행하고 있던 1956년 2월 중순께였다.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시로 소련 외무성에서는 평양주재 이와노프 소련대사를 통해 공화국에 '박헌영 문제'에 대한 압력을 내려보냈다.


이와노프 대사는 김일성을 여러차례 방문, '우리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소식을 듣고 있다.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소련 외무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와노프 대사는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모스크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례적인 것이었고 이와노프 대사가 돌아가고나면 간부들 앞에서 '모스크바에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은 수상의 이같은 태도로 미루어 박헌영의 사형집행은 증거확보여부에 관계없이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역사상 김일성 정권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1956년 8월 하순이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형제국 순방을 나선틈을 이용, 연안파 핵심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부 소련파 간부들까지 합세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김일성이 급거 귀국했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이 스탈린 사망후 거세게 불고 있는 개인숭배와 1인 독재배격운동과 박헌영, 정치노선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방학세 내무상에게 느닷없이 '방동무, 그 리론가(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됬어?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의 질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방학세는 '예심처에서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수상동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김일성은 답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증거고 뭐고 다 필요없다. 오늘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엄명했다. 시기가 시기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김일성의 엄명에 감히 이론을 제기한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방학세는 그 길로 내무성에 돌아가 예심처장 주광무를 불러 '오늘밤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영철 내무성 중앙부장이 이날밤 박헌영을 지프에 싣고 평양시내 변방 야산기슭으로 가 방학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총살)을 집행했다.


사형집행 직전 박헌영은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박헌영 1955년 12월 재판]


이 마지막 공식적 발언은 박헌영이 책임감이 강한 공산주의자였음을 짐작케 할 수 있었던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를두고 친북적인 증언자들은 이 발언을 '박헌영이 비굴하게 살려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평가한다. 재판이 끝난 직후, 증인으로 있던 권오직이강국남로당계열 출신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당시 최고재판소 재판장에 이었던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다. 재판은 5시간 동안 진행되어 밤 10시에 끝났다고 한다. 재판이 끝난 뒤 김일성계열의 갑산파계열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만족한 모습을 지었으나, 소련파연안파계열 간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재판정에서 퇴장했다고 한다

박헌영 판결문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써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을 재판장으로 하고 김익선, 림해, 방학세, 조성모를 성원으로 하여 구성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특별재판은 서기 박경호의 입회로써 심리를 공개하고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의 관여밑에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한 범죄로 기소된 피소자 박헌영에 대한 사건을 심리하였다.


피 소 자 박 헌 영

생년월일 1900년 5월 28일생 남자

본 적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주 소 평안남도 대동군 화성리

직 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전 부 수상 겸 외무상


당 재판소는 예심 및 공판 심리에서 나타난 자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장구한 기간에 걸쳐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하고 나아가서는 중국과 쏘련을 반대하는 극동침략의 군사기지로 할 계획에 근거하여 악랄한 음모를 집요하게 계속하여 왔다.


위대한 쏘련군대에 의하여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된 후 미제국주의자들은 1945년 9월 자국군대의 남반부상륙을 계기로 조선에 관한 국제공약들을 난포하게 유린하면서 이 침략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골적으로 발광하였다.


즉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을 반대하여 리승만 매국역도들로 괴뢰정권을 조작한 후 공화국남반부에 팟쇼적 군사 경찰제도를 확립하고 민주주의적인 일체의 요소에 대하여 갖은 테로 살육을 자행하다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이미 계획 준비하여 온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함으로써 공화국북반부에 창건된 인민민주주의제도를 말살하고 전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화하기 위한 동족상쟁의 전쟁을 도발하였으나 조선인민의 영웅적 항거에 봉착하여 수치스러운 참패를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에 조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기간에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직접적 발광과 병행하여 간첩 리승엽, 리강국, 조일명, 림화 도당을 고용하여 남반부에서의 조선인민의 정의로운 반항 투쟁을 진압하고 당과 민주역량을 와해 궤멸하였으며 다시 그들을 공화국북반부에 파송하여 당과 정부 내에 깊이 잠입시켜 군사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중요 기밀을 탐색 첩보하는 간첩범행을 수행하게 하였고 조선인민의 애국적 단결을 약화 소멸시킬 목적으로 이간, 대립, 불신을 조성시키는 갖은 모략을 계통적으로 감행케 하였으며 내종에는 적군의 진격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폭동을 결행하기로 음모하는 데 이르기까지 내부로부터의 파괴를 기도한 일련의 범죄를 조직하고 조종하였다.


1953년 8월 6일 평양시에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하여 선고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이상과 같은 간첩행위, 반혁명적 모략행위, 무장폭동음모행위들은 이미 1939년부터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복무할 것을 원쑤 앞에 맹약한 간첩 박헌영을 두목으로 하여 조직 수행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1.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 시론』(女子詩論)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미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학교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하여 숭미사상(崇米思想)(올린 이:원문이 쌀 미입니다)을 품게 되었고 1925년 2월 초순 일제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평안북도 경찰부에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의 서울, 신의주, 평양, 강화, 대구, 마산, 광양, 안동을 비롯한 각지의 지하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댓가로 [정신적 착란]이라는 구실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 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 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5일경 서울 종로 3정목 요리점 百合園에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고 기독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정보기관의 탐정인 언더우드를 상면하고 그의 요청을 응락하고 동인에게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간첩으로서 충실히 복무할 것을 서약한 후 동년 12월 언더우드로부터 지하에 깊이 침투하여 조선혁명운동 내부에서 자기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지도적 지위를 탈취함으로써 장차 미제의 조선 침략에 이바지하도록 할 것과 비밀정보를 수집하여 연락할 데 대한 지령을 접수하고 그것의 실천으로서 곧 서울 [콤크릅]에 접근하여 지도권을 탈취한 후 조선혁명운동에서의 종파적 조직인 이 [콤크릅]을 언더우드의 지령에 근거한 자기활동의 기반으로 만들 것을 기도하다가 1941년 12월 일미 간의 침략전쟁이 개시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까지 전라남도 광주에 가서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위대한 쏘련군대의 무력에 의하여 일제식민지기반으로부터 해방되자 미국 정탐기관의 지령을 계속 실천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를 최후까지 반대하여 빨찌산 투쟁을 하여 온 것 같이 꾸미기 위하여 산중에 식량을 매몰하는 등 교활한 간계로써 자신을 [애국자]로 가장한 후 최후까지 고수한 것이 자기가 지도하던 [콤크릅]인 것 같이 날조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미제국주의자들의 남반부상륙을 대기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9월 미군이 남반부지역에 상륙하자 동월 말경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남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와 밀회하여 앞으로 조선공산당을 미군정정책에 순응케 하며 미 군정의 포고 및 제반법규를 준수할 것 등을 밀약함으로써 미제에 대한 자기의 충성을 맹약하였고 1945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 및 언더우드와의 밀회에서 피호자 박헌영은 전부터 간첩연계를 맺고 있는 언더우드로부터 하지에게 정식으로 인계되었으며 동 석상에서 하지로부터 앞으로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공산당 내에서의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노력할 것, 중요한 공산당활동에 대하여는 사전에 통보할 것, 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사상을 조성할 것, 공산당을 합법적 타협적 방법으로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 미군정 앞에서 폭동 파업 등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 간첩 비밀을 엄수할 것 등 새로운 지령을 받고 그의 실천에 충실할 것을 하지에게 맹약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상술한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조선공산당 내에서 차지한 지위를 이용하여 당의 전투적 역량을 약화 마비시키고 남조선전역에 걸친 조선인민의 애국적 민주역량을 교살하기 위한 미제의 정책에 합치되게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간첩범행과 민주역량 파괴를 위한 각종 모략과 해독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에게 조선공산당의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는 전반적 조직체제와 그의 활동정형, 당의 지도 하에 있는 대중단체의 조직체제를 비롯하여 간부명단과 민전정책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1946년 3월과 동년 5월 하지에게 조선공산당의 장성정형과 쏘 미 공동위원회에 대한 당의 태도와 협의대상문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1946년 3월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리승엽과 조일명을 당의 중요위치에 배치하고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 지도할 데 대한 지령을 받은 후 리승엽을 경기도당위원장으로부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우익 정당 프락치야] 사업을 맡겼고 조일명을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등용함으로써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미국 간첩 리승엽과 조일명으로 하여금 1946년 3월부터 1947년 6월까지의 기간에 전후 6차에 걸쳐 당의 활동에 관한 중요 기밀을 미군 정탐기관에 제공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입북하여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정권을 틀어쥐기 위한 활동을 하라는 지령과 함께 간첩 리강국에게 중대한 임무를 주어 북조선에 파견할 터이니 그를 중요 직위에 등용시키고 그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지령을 받고 실천을 맹세한 후 하지와 밀약한 대로 리강국과 공모하여 미군정을 반대하는 민전 명의의 성명을 발표시키고 그에 근거하여 꾸며진 [체포령]을 구실로 하여 1946년 10월 초순 북반부에 잠입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우선 1947년 2월 초순 자기의 심복자인 입북 당시 안내자였던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하지에게 알리게 하고 점차 당의 대남연락선을 장악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리승엽과의 간첩 범행 연락에 이용하였는 바 1947년 2월 남조선로동당 대남연락책임자 김소목을 통하여 리승엽에게 간첩 범행의 연계를 취할 데 대한 밀서와 함께 북조선 인민경제 기획에 관한 통계자료를 보내여 줌으로써 리승엽 하지에 이르는 연락선을 완성하고 1947년 4월에는 앞으로 재개될 제2차 쏘 미 공동위원회에서의 쏘련측 방침에 관한 자료를 보내였으며 1948년 6월에는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북조선로동당의 중요결정과 당 내부기밀자료 및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사업준비 정형을 하지에게 전달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이러한 간첩활동을 감행하는 한편 하지의 지령대로 자기와 때를 같이 하여 [체포령]을 구실로 잠입한 남조선 주둔 미군 제24사단 헌병 사령관 미군대좌 뻬트의 고용간첩인 리강국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 등용케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를 자기의 신변인 혹은 해주 제1인쇄소 지도책임자로 임명하여 그의 간첩활동을 적극 보장한 결과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된 바와 같이 리강국으로 하여금 1946년 5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기간에 외무국장의 직위를 이용하면서 평양학원에 관한 자료, 강계·개천 등지의 인민군 및 경비대의 병력관계와 배치정형, 평양 주둔 쏘련군사령부의 동태, 북조선 주둔 쏘련군대에 관한 기밀 및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와 외교정책, 화폐개혁 실시 정형, 1947년도 북조선인민경제계획에 관한 통계자료, 1948년도 국가예산에 관한 종합자료 등 중요 기밀을 전후 5회에 걸쳐 미군에게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7년 2월과 동년 12월 직접 리강국에게 당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을 알려줌으로써 그것을 미군에게 첩보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하지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계획을 알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간첩활동을 강화할 필요성에서부터 간첩 리승엽을 파송하여 줄 것을 밀서로써 요청하여 리승엽을 입북케 한 후 1948년 9월 중순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리승엽과 앞으로 간첩활동에 대한 토의를 한 결과 『……공화국 창건과 관련하여 박헌영의 존재가 미국인에게는 더욱 귀중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간첩활동을 직접 하지 말고 리승엽에게 맡기라……』는 하지의 지시에 근거하여 피소자 박헌영은 종래의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당과 정부의 중요지시를 이용하여 리승엽, 리강국을 위시한 미제의 고용간첩들의 범죄활동 조건과 신변을 보장하여 줄 것을 합의하였고 얼마후 그들은 하지의 귀국과 관련하여 『……금후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 정치고문 노블의 지시 밑에서 활동하라』는 하지의 명령을 접수하고 노블 ×××× ××××× ×××× ×××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 ××××××××× 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공화국 정부 부수상 겸 외무상의 탈을 쓴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인 피소자 박헌영의 보장과 지도에 의하여 당과 정부를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깊이 기여 들어 가지고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은 간첩활동과 갖은 반혁명적 모략범행을 계속하였으며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러는 한편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서득은의 편을 통하여 『현애리스를 비롯한 미국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하지의 지령을 접수하고 있다가 1949년 봄 정치적 망명자로 가장하고 미국으로부터 구라파를 걸쳐 잠입한 간첩 현애리스와 리사민에게 입국사증을 발급케 한 후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간첩활동을 1950년에 이르면서 소위 「북벌」계획의 진척에 따라 일층 활발하여 갔다. 즉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노블과 그 밑에서 활동하던 미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 미군대좌 니콜스는 일제고등경찰이었고 리승만 괴뢰정부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이던 극악한 민족반역자 백형복과 미군간첩 안영달과 조용복을 일행으로 하여 1950년 4월 의거 입북을 가장하는 방법으로 북조선에 잠입시켰고 간첩 리승엽은 노블의 지령에 의하여 백형복을 공화국 내무성 내에, 안영달을 새로 조직할 당 서울 지도부에 각각 침투시키려고 시도하였고 조용복을 내각 인민 검열위원회에 잠입시키고 그들에게 인민군 항공부대에 관한 군사기밀을 제공하는 등 간첩 범행을 감행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5월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안영달과 백형복을 만나 보고 리승엽에게 백형복의 신변상의 보호를 지시하여 그자들의 범죄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12월에 아군이 재진공하게 되자 공화국의 군사 정치 경제적 위력을 약화시켜 종국적인 패전에로 유도할 목적에서 미제국주의 고용간첩들인 리승엽, 리강국 도당들을 더욱 높은 직위에 잠입시키려고 백방으로 암약하였는 바 이러한 범죄활동은 1953년 2월 간첩 리승엽 도당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피소자 박헌영은 1954년 9월 이후 하지와의 연계로써 상술한 간첩활동을 숙청함과 동시에 남조선로동당과 애국적 민주역량에 대한 파괴와 범행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간첩 리승엽, 조일명, 리강국 도당을 일찍이 당의 중요 징위에 배치하고 그들을 통하여 미군정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은 당의 정치적 활동에 불리하다는 구실을 붙이여 동맹파업과 일체행동을 제지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남반부 근로계급의 애국투쟁을 약화시킴에 전력하였고 한편으로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 공모자들로 하여금 충직한 당 일꾼들을 「변절자」「간첩 혐의자」「당 비밀 누설자」라는 무근한 누명을 씌워 살해케 하였는 바 1948년 5월부터 동년 8월까지의 기간 13차에 걸쳐 황해도 장풍군에서 42명의 남조선로동당원과 민주인사들이 살해당하였고, 1949년 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현인초외 2명이 동일한 누명으로 살해당하였으며, 1948년 8월 개성시 당 위원장이였던 김재관을, 동년 10월에는 장풍군 부위원장이었던 서구돈을 같은 누명으로 살해하려고 체포하였다가 공화국경비대에 발각됨으로써 목적을 달성치 못한 사실들이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되였다.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은 적들과의 모험적 충돌을 야기시키는 방법으로 수다한 애국투사들을 원쑤의 학살에로 유도하였고 당과 민주역량을 적의 파괴 앞에 내여 맡기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이래 미제가 남조선로동당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기 위하여 소위 「보도연맹」을 조직하고 유혈적 탄압을 야수적으로 감행하는 사실에 대하여 당으로부터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기받고도 고의로 그것을 거부하여 원쑤들의 파괴공작을 완전히 허용 보장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의 비호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보장받은 안영달 등은 1949년 6월 18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국통일전선호소문이 발표되자 이것을 계기로 무원칙하게 폭동준비와 총궐기 태세를 갖출 데 대한 지시를 전 남조선로동당 조직에 통고함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구실을 설정하여 주었고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 앞에 당조직을 노출시켜 주어 남조선 전역에서 대중적 투옥학살을 손쉽게 감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0년 3월 27일에는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비호 보장받은 안영달, 조용복 등과 백형복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책임자 김삼룡이 체포 학살됨으로써 남반부 민주역량의 핵심인 지하당조직이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의 공모와 리승엽의 직접적 지도와 조직에 의하여 안영달, 리중업, 맹종호 등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시 해방을 계기로 하여 「토지조사 위원회」 또는 「조선의용군 본부 특수부」라는 비밀살인단체를 조직하고 자기들의 반혁명적 범행을 감촉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무고한 인민 70여명에 대하여 비법 감금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거듭하고 그중 7명의 남조선로동당원을 총살하였으며, 1950년 7월 안영달 등의 김삼룡 체포범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피소자 박헌영은 자기들 죄악의 발로를 방지하기 위하여 리승엽에게 명령하여 안영달을 남하하는 유격대에 배속한 후 비밀리에 살해하여 버리게 하였다.


3.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언더우드와의 결탁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역의 길에 들어섰는 바 그것은 원쑤의 앞잡이로서 조선의 혁명적 근로계급을 완전히 무장해제함으로써 미제의 조선침략야망을 보장 실현케하는 죄악의 길이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위대한 쏘련군대의 무력에 의한 8·15해방 직후 조선의 혁명역량이 완전히 통일 단결되지 못하고 혁명적 당의 기본적 정치 및 조직노선이 아직 제시되지 못한 틈을 타서 미제국주의 간첩, 친미분자, 변절자 등을 자기의 주위에 집합하고 그들을 조선공산당 내의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미제에 복무할 자기의 반동적 기반을 구축하였고 해방된 조선에 자본주의제도를 확립할 목적에서 매국역적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친미 친일 반역분자들을 대표적 세력으로 하는 친미정권 「조선 인민공화국」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케 하는 범죄활동을 함으로써 모든 권력을 조선인민들 자신이 장악할 인민정권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하지로부터 공화국북반부에 잠입하여 당과 인민정권 내에 확고한 기반을 축조하고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범죄활동을 감행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북한 후 해주 제1인쇄소와 강동정치학원 내에 리강국, 조일명, 리원조, 박승원, 림화, 한병옥 등을 위시한 반혁명분자들을 잠입시켜 그들을 조종하면서 그곳을 범죄수행에 이용함으로써 하지로부터 받은 과업의 실천에 착수하였고 1948년 9월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직접적인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한 후는 오로지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한 범죄활동에 전력을 경주하고 점차 범죄활동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10월 이후는 당과 정권 기관과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간첩암해분자들을 잠입시키고 그들의 범죄활동을 비호하고 지도함으로써 자기 범행의 종국적 목적달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 리승엽을 사법상 당중앙위원회 비서 정치위원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조일명을 문화선전성 부상에, 김점권을 경공업성 부상에, 김광수를 상업성 부상에, 한병옥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후방총국장에, 리강국을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에, 장시우를 무역상에, 배철을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에, 박승원 윤순달을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에, 리원조를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김응빈을 금강학원 원장에, 서득은을 당중앙위원회 조직부 부부장에, 안영달을 남조선로동당 지도부 연락책임에, 림화를 조쏘 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남천을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리재우를 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 조직부장에 잠입시켜 이간 알륵 대립 불신을 조성시키는 갖은 정치적 모략과 암해활동을 감행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6월 25일 조국해방전쟁이 발발되자 남반부당과 민주역량을 파괴한 죄악을 숨기고 남반부 전지역의 당 및 정권기관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그를 토대로 하여 공화국 정권전복의 종국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기도에서 자기의 영향하에 있던 자 200여명을 안주에 집결시켜 조선인민군의 반격에 의하여 해방된 남반부지역의 도, 시, 군당 및 정권기관 책임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고 공모자 리승엽은 해방된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동일한 범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로동당 경기도당위원장에 김점권을, 경기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안영달, 그후에 박승원을 배치하고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안기성, 김요한 등 반혁명범죄자를 포치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4월 림화에게 문화 에술 분야에서 반혁명 분자들이 지도권을 장악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주어 그들에 의하여 문학예술총동맹 내부에서 사상적 대립과 분신과 알륵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연락부가 신설됨을 계기로 대남공작강화를 구실로 리승엽에게 지시하여 동 부서를 자기의 심복자들로 조직케 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반당적 반정부 음모를 격화 확대케 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과 공모하여 1951년 2월부터 개성지구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를 조직하고 그 곳을 반혁명 범죄활동의 근거지로 할 데 대한 범죄적 음모를 획책하였고 ──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지도되는 리승엽, 배철, 박승원, 림화, 조일명 등은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로써 확정된 바와 같이 조선인민이 원쑤 격멸에 총궐기한 간고한 전쟁기간인 1951년 9월 초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리승엽 사무실에서 예상되는 적군의 군사공세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할 무장폭동을 단행할 것을 토의하고 리승엽을 무장폭동총사령으로 하고 박승원을 참모장으로, 배철을 군사조직책임으로, 김응빈을 폭동지휘책임으로 하는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정하였으며 그후 거듭된 밀의에서 무장폭동의 주력으로 예견한 유격 제10지대를 근 4천명에 달하게까지 증강하고 평양 부근에 이동 주둔시킬 것을 기도하는 한편 그들과 금강학원 학생들에게 공화국에 적대하는 반혁명적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모의를 강화하여 왔으며 1952년 9월 이 악당들은 다시 피소자 박헌영의 주택에서 밀회하여 무장폭동으로써 당과 정부를 전복한 이후에는 조선 근로 계급을 기만하여 미제의 조선침략을 완강케 하기 위한 합법적 「좌익 정당」으로서의 「새당」을 결성하고 미국에 예속되여 자본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장차 리승만 괴뢰정부에 연합될 운명을 예견한 「신정부」를 조직할 데 대한 음모를 감행하였는 바 이들은 박헌영을 수상으로 하고 장시우, 주녕하를 부수상으로, 박승원을 내무상으로, 리강국을 외무상으로, 김응빈을 무역상으로, 조일명을 선전상으로, 림화를 교육상으로, 윤순달을 상업상으로, 배철을 로동상으로 하고 리승엽을 「새 당」의 총비서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본건 범행착수와 동시에 부단한 정치적 모략을 감행하여 왔는 바 그것은 특히 1946년 10월 북반부에 잠입한 이후의 기간에 우심한 바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남반부로부터 입북한 당원들을 기만 회유하여 당과 공화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성시키고 불순분자에 대하여는 그들의 과거죄상을 은폐하여 주는 등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들을 자기의 주위에 집결시키는 데 전심 전력하였고 당과 국가의 직무에 충직한 열성자에 대하여는 「변절자」「배신자」라고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도를 비관하고 직무에서 이탈하게끔 꾀하였으며 이전부터 심복자 장시우를 교묘히 사주 선동하여 반국가적 범행을 적극적으로 하게 하였으며 서득은, 리강국 등을 시켜 당자금조달을 구실로 동방상사 영민공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일꾼들을 원조를 가장하여 매수 접근시켰으며, 자기의 영향하에 있는 심복자들에게 거액의 경제적 지출을 하여 부화방탕한 생활과 동시에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 자신도 탐욕적인 부화한 생활을 영위하여 왔는 바 체포 당시 87만원의 공화국 화폐와 1,600그람의 순금을 횡취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9월 외무상으로 취임한 이후 「국제주의자」로 가장하고 외무성 내에 자기의 심복자들을 다수 끌어 들여 요직에 배치하고 쏘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형제적 국가들과의 우호적 친선관계를 파탄시키려는 음흉한 범죄활동을 계속하였는 바 그것은 전 주쏘 특명전권대사 주녕하, 전 주중 특명전권대사 권오직과 동 대사관 참사 송성철을 자기의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거나 또는 접근시키고 그들에게 쏘련과 중국을 비방하고 멸시하는 선전선동을 거듭 감행하여 왔다.


이상 사실은 피소자 박헌영의 예심 및 공판심리에서의 진술과 증인 한철, 김소목, 권오직 등의 증언 및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한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 동 형사 사건기록(13권 총 4,000페지)에 의하여 확증된다.


피소자 박헌영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고 공화국의 인민주권을 전복할 목적으로 조국에 반역하고 미제국주의에 복무한 간첩행위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감행한 반혁명적 모략, 선전선동행위 및 리승엽 등 박혁명 도당들의 무장폭동음모의 실현을 비호 보장하여 준 행위는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당 재판소는 형사소송법 제223조, 동 제228조 1호, 동 제237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 문


피소자 박헌영에 대하여 형법 제78조, 제68조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65조 1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양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동인을 형법 제78조, 제68조의 사형에 처하고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본건에 첨부된 증거물은 권리자에게 반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재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 수 최 용 건

김 익 선

림 해

방 학 세

조 성 모

평양시에서[박헌영 1955년 판결문]


한편 그를 따르던 이들 중 박영발 등은 '자신이 미제 간첩 박헌영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것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자기비판을 한 뒤 제 지구당 부위원장직을 사임했다.

ㄷ.수감과 처형

함북 화성 16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다 숙청된 김창봉이나 남로당 박헌영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화성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다.

박헌영 재판이 끝난 후 남로당계열 인사들은 즉결처형당했으나 박헌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북한이 그를 '미제 간첩'으로 확정판결을 하고 국제적으로 발표까지 했음에도, 그가 정확히 어떤 간첩행위를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소련중국에서 박헌영을 살리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었는데, 소련은 소련 대사 이바노프를 수차례 김일성을 방문해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박헌영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시킬 방도를 찾아볼려고 강구했었다.

스탈린 사후, 사회주의권의 최고지도자로 급부상한 마오쩌둥이 박헌영을 구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은 곧 북한의 연안파 세력들을 고무시켰다. 남로당계열 대숙청 이후 나날이 강화되는 김일성 독재체제에 밀려 언제 숙청될까 불안해하던 연안파 세력들은 김일성을 축출하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1956년 2월 흐루쇼프스탈린 비판으로 촉발된 연안파 등의 반(反) 김일성 축출기도를 시도했으나 김일성계의 반격으로 무산되고 모의가 실패하자마자 연안파 등은 중국으로 달아나거나 숙청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연안파세력과 손을 잡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귀국하자마자 김일성은 방학세를 찾아가 '그 리론가 어떻게 됐어? 증거는 찾았어?'라고 물었고 나중에는 "증거고 뭐고 필요없다! 오늘 밤 이내로 즉시 목을 따버려!"라면서 그의 수하 방학세김영철을 시켜 그를 '처형하라.'고 지시하였다 고 한다.

1956년 12월 15일, 평양 변뱡 야산 기슭에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처형 시점은 12월 15일12월 19일로 불확실하다. 그리고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박헌영 처형 당시 방학세 일행과 같이 타고 간 박길룡의 증언이다. 또한 처형연도도 1956년설, 1955년설, 1958년설 등이 있어 구체적인 처형시점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처형지점도 확인된 바 없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의 제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저우 언라이가 그를 구원하려고 보낸 사람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처형을 앞당기게 했다. 남조선로동당원의 미국과의 접촉 증거는 없으며 일설에는 한국 전쟁의 책임을 김일성이 떠넘긴 것이라고 한다

ㄹ.8월 재판 직후

1956년 9월 18일 베이징에서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마오쩌둥이 만난다. 연안파와 소련파가 '반 김일성 연합'을 만들어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궁정쿠데타인 ’8월 종파사건’으로 주모자들이 철저하게 숙청당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에게 어떤 이유로든 박헌영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헌영이 남로당의 영수임을 고려해야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베리야(러시아의 정치가 겸 비밀경찰국장)가 아니며 일개 문인일뿐이다.
 
— 마오쩌둥
박헌영은 지식인이며 사람을 위협한 적이 없고 조선로동당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처형을 반대하는 소련공산당의 의견을 평양 주재 KGB 고문을 통해 건의 형식으로 전달했는데 잘못됐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명의로 정식 통보를 했어야 했다.
 
— 미코얀

 

 

 

마오쩌둥은 미코얀을 만난 뒤 1시간 20분 뒤에는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 축하사절로 와 있던 북한 부총리 최용건 등 조선로동당 대표단도 만났다

 

 

 

최근 당신들은 최창익, 박창옥 부수상과 여러 명의 중앙위원을 제명처분했다.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이 중국으로 도피해왔고 소련대사 리상조와 교통부장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인민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남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박헌영도 죽였다. 당신들은 그가 미국의 간첩이라고 하는데 미국은 그가 간첩인지도 모르고 있다. 마구잡이로 살인을 하면 이로울 게 없다.
 
—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대표단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북한 전문가인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해방후 65년에 걸친 북한권력을 집중 분석한 책 ’북한 권력의 역사’에서 공개한 ’8월 종파사건’후 미코얀과 마오쩌둥의 대화, 마오쩌둥과 북한 부총리 최용건의 대화에 의하면 마오쩌둥도 그가 미국간첩은 아니라고 인식했다 한다

(14)사후

북한에서는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만났다는 점을 근거를 들어 '미국의 앞잡이'로 몰렸으며, 남한에서는 '골수 빨갱이'로 몰려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문중의 족보에서조차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러나, 그가 북측의 주장대로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의 이복형 박지영은 1950년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고, 북한에 남겨진 그의 세 번째 부인 윤레나와 딸 나타샤, 세르게이 등은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막내아들은 남한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대한민국에 있던 그의 친척들 중 사촌형 건영의 아들 박병일 등이 한국 전쟁 중 끌려가 처형당하였고 일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선조들의 묘소는 수난을 당했고, 충청남도 예산군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선조로 그의 5대조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그의 딸 박 비비안나소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처형 직후 정치범의 딸이라는 이유로 당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아왔고, 생전에 본 유일한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에게는 박 비비안나와의 이혼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빅토르 마르코프는 비비안나와 이혼하지 않았다.

한편,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창시하면서 한국 전쟁의 패배 원인을 전부 박헌영에게 떠넘겼다 한국 전쟁의 패배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 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박헌영 재평가와 복권노력이 추진되었으나 정권에 의해 무산되었다. 1983년 전직 남로당박갑동에 의해 그의 전기가 편찬되었으나 전두환 정부의 검열로 절판되었다. 후에 역사학자 박명림은 그의 죽음에 대해 '북한 현대사 최대의 의혹'이라 평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강철서신 등에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5년 8월 박헌영의 동료인 김단야, 김철수 등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2007년 8월에는 본처 주세죽과 라이벌인 여운형이 건국훈장을 각각 수훈함으로써 박헌영에게도 건국훈장 수훈 노력도 추진되었으나 사회주의자 라는 것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발적 월북자이고, 남북 협상 이후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은 점, 북조선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하여 박헌영의 건국훈장 서훈은 무산되었다. 200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오면서 박헌영 전기와 일대기, 평전등 다시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항일활동에 대해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도 있다. 이는 그가 건설하려던 것이 순수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공산주의사회 건설이 목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만 사회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근거가 되느냐, 그리고 사회주의자면 독립운동자체도 낮게 평가받아야만 하는 필연적 논리가 성립되느냐는 문제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2006년 8월 14일 주간조선은 정치학자 14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공통적으로 던졌다 이때 박헌영도 한표를 받았다 한다. 이때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각 6회씩, 김성수 4회, 조만식 조병옥 신익희 송진우가 각각 3회씩 추천되었다. 이 밖에 조소앙 조봉암 이시영 이범석 장택상 임영신 장덕수(2회씩), 안재홍 김창숙 이철승 유진오 박헌영 조병옥 조규식(1회씩)이 각각 추천을 받았다

*주세죽(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 김단야와 재혼
딸 : 박 비비안나(1928년 ~ 2013년 11월 7일 ), 소련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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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주세숙, 딸 박 비비안나

*정순년(鄭順年, 1920년 ~ 2004년 12월

아들 : 원경(본명은 박병삼), 남한에서 승려로 출가. 현재 평택 만기사 주지 승려로 지내고 있다. 동시에 역사문제연구소 학회단체 주요간부로 활동. 조계종 원로의원

 

 

*윤레나(본명, 윤옥)(생사불명)

 딸 : 박 나타샤(朴-, 생사불명)

아들 : 박 세르게이(朴-, 생사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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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서 윤레나(본명 윤옥)와 딸 박나타샤. 박헌영은 49년 8월에 윤레나와 재혼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출신 박헌영은 마스-레닌주의(국제 공산당) 레닌계열이고 1935년 중국 공산당출신 김일성은 스탈린주의(일국사회주의론, 자국 공산당) 스탈린(모택동)계열이다

레닌은 1차대전때 중립을 표방했고 스탈린은 2차대전 이전 히틀러와 연합으로 동구권을 공산화했으며 2차대전때 영국, 미국등과 연합으로 반독일, 반이탈리아, 반일본전선 일원으로 중국이나 동아시아지역 일국사회주의 국가 건국을 도와주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 이론은 자국 사회주의 국가건국 이론으로 식민지국가들의 자치공화국이나 독립국가 수준이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트로츠키 세계혁명론(노동자여 단결하라)과 구분할 수 있다

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미제국주의와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

소련 조사단이 돌아간 직후 '박헌영 사건 조사를 속히 끝내 공개 재판에 회부하라'는 김일성 수상의 지시가 떨어져 내무성 예심처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없는 어려움이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엇다. 1년여 동안 수사를 계속하면서 온갖 고문과 협박,회유를 동원해 자백을 얻어냈지만 번복되기 일쑤여서 재판을 열 경우 자칫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

설사 자백이 번복되지 않는다 치더라도 자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사정으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수상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1년 반이 계속됐다. 그러니까 만 2년 반 이상을 조사해 재판에 부친 셈이다.

 

1955년 12월 15일 오전 10시 검사의 논고, 박헌영의 최후진술 그리고 오후 8시 판결진행이 되었다

판결에서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는 명목으로 박헌영에 대해 사형 밎 전재산 몰수가 언도 되었다


1955년 12월 15일날, 평양 시내 내무성 구락부.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 주관으로 역사적인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빨치산 출신으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배심원은 소련 정보 기관 출신 내무상 방학세와 김일성 유격대 출신인 최고 검찰 소장 이송운이 각각 맡았다.
노동당 중앙 위원, 중앙당 부장 이상 간부, 내각 부상 이상, 시,도당위원장, 각 사회 단체 핵심 간부들은 모두 재판을 방청토록 하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1천여명이 참관했다.
군사 재판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사건의 조사,예심 주관부처 내무성 부상인 나(강상호)는 맨 앞줄 왼쪽에 앉아 예심처 간부들의 재판 진행 업무를 진두 지휘했다. 재판장과 배심원들의 책상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조사서 등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심처는 이 재판에 대비해 간밤에 박 부수상을 내무성내 간부용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목욕으로 면도를 시키고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검은 양복을 챙겨두었다.

호송원들이 박 부수상의 팔장을 끼고 재판장에 입정했다.
재판장에 들어선 박 부수상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지정석에 앉아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검찰측이 범죄 사실을 낭독하고 사형을 구형하는 논고장을 모두 읽어 내릴 때까지도 안경 속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절 표정을 노출하지 않았다. 이어 재판장의 질문이 시작되자 두 눈을 뜬 후 시선을 재판장에게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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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검사의 논고를 들었는가.

박헌영: 잘 들었다.

최용건: 이 논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헌영: 논고장이 길어 재판장이 어떤 부분을 묻는지 잘 모르겠다. (재판장 최용건이 곧바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자, 배심원 방학세가 재판장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면서 몇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최용건: 검사는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다고 선언했지 않은가.

박헌영: 재판장이 보는 미제 간첩이라는 개념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다.

최용건: 스파이면 스파이지 개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박헌영은 내무성 예심처 조사과정에서 미국놈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는가.

박헌영: 그렇다. 멀리는 상해에서, 가깝게는 남조선에서 혁명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

최용건: 그것이 스파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인민들은 미제 스파이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엄숙한 재판을 모면하려는 수작을 부리지 마라. 왜 스파이를 했는지 말하라.

박헌영: 남조선에서 미군정 인사들에게 이승만 세력과 감싸고 돌지 말고 민전(1946년 남한內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 좌익단체들이 결성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 한다.) 인사들의 활동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속히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가고 조선의 통일은 조선인 손으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최용건이 학식과 법률 지식이 모자라 박헌영의 이론과 논리에 밀리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배심원 방학세가 말을 가로챘다.)

방학세: 민전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미제와 손잡고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박헌영: 미군정이 민전활동을 감시하고 공산당 당원들만 잡아가는 것을 항의한 것이지 그들과 손잡고 혁명 사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세: 무슨소린가. 예심처에서 미제들과 주고받은 담화 내용과 그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래도 부인할 작정인가. (목청을 높이며) 우리 공화국 원수 미제의 간첩이 인민 앞에 솔직히 죄과를 털어놔도 용서받을지 모르는 판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까발리고 있는가.


(순간 박헌영 부수상은 '그래! 너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며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 던졌다. 안경알이 박살났다.)


(느닷없이 박헌영이 안경을 던지는 바람에 재판정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호송병들이 시멘트바닥에서 박살난 안경알을 줍는 사이 방청석의 일부 고위간부들이 '저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저런 새끼는 재판할 필요가 없어'라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모두 김일성 수상 직계의 빨치산파 또는 갑산파 간부들이었다. 그러나 당과 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은 굳은 포정으로 묵묵히 재판과정만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배심원 방학세(내무상)가 일부 간부들의 웅성거림에 고무된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방학세: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 따위 행패를 부리는가. 동무(박헌영이 부수상 시절에 경칭인 동지로 호칭)는 아직도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를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가?

박헌영: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잘 알고 있다.

방학세:(손가락으로 박헌영을 가리키며) 동무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두목으로 공화국의 특급비밀을 미제들에게 까발린 스파이 왕초였다. 동무를 믿고 공화국에 따라 올라 온 이강국(전 외무성부상), 권오직(전주중대사), 구재수(전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등이 그 증인으로 이자리에 와 있지 않은가? 지금 저자들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무에게 실망과 조소를 보내고 있다. 종파분자 두목답지 않은 행동을 벗어 던지고 솔직히 동무의 죄과를 시인하고 용서받는 것이 이 도리 아닌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재판장 최용건(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최용건: 동무는 미제 간첩임을 시인하는가?

(박헌영은 증인석에 나와있는 이강국,권오직 등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신들의 보수였던 박헌영의 첫 시선을 받는 이강국등의 표정은 조금전 방학세 내무상의 힐난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그들이 면면에서는 원망하는 표정은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오히려 '억지로 끌려온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시선을 마주칠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시멘트바닥으로 처박은채 한참동안 일으킬 줄 몰랐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시선이 상대방을 잃자 초점없이 고개를 재판정 천장으로 올려놓았다. 재판정의 분위기도 잠시 숙연해졌다. 지금도 나(강상호)는 불운의 한 혁명가와 그 부하들이 '운명'의 재판정에서 최후 시선을 맞부닥치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박헌영이 2~3분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헌영: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진술 기회인가?

최용건: 그렇다.

박헌영: 알겠다. 얘기가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 줄 수 있는가?

방학세: 이미 예심처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지 않은가. 그 얘기를 시인하는지 여부만 간단히 하면 되지 않은가.

박헌영: 그렇다면 예심처에서 조사한 사실만 가지고 당신들끼리 모여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고 왜 나를 재판정에까지 데리고 나왔는가. 이렇게 많은 간부들에게 이 박헌영의 몰골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함인가. 자, 박헌영을 똑바로 봐라!


(그는 전후 좌우로 돌리면서 매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최용건: 그래, 동무의 말이 옳소. 이 자리는 동무가 예심처에서 못했던말을 다할 수 있는 곳이오. 지루하지만 들어주겠오.

(박헌영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최용건이 갑자기 경어를 써가며 충분한 최후의 진술을 허락했다.)


박헌영: 나는 이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말 그대로 요식일뿐, 어떠한 최후 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때, 아니 그 훨씬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엇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제문제를 협의하고 있는것과 가은 맥락의 뜻이다.

(최후 진술이 본론부분에 접어들면서 더욱 카랑카랑해진 박헌영의 목소리는 재판정을 압도했다. 최후진술을 듣고 있던 재판장 최용건이 박헌영과 일문일답을 시작했다.)


최용건: 동무는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대체로 시인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누구와 연락을 했고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가.

박헌영: 재판장은 말귀를 그렇게 못알아 듣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무성 예심처에서 진술한 기록이 재판장 책상위에 있을테니 그것으로 대신하시오.

최용건:(말귀도 못알아 듣는다는 비아냥거린 답변에 최용건은 약간 열을 받은듯 목소리를 높이면서) 동무는 예심처의 진술과 재판정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양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굳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예심처의 진술을 참고하겠다.

박헌영: 아직도 재판장은 말귀가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예심처의 진술과이곳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차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형사법에 관한한 나도 '반풍수'는 됐다고 자부한다.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심처의 진술로 대체하라는 말은 그 이상 새로운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최용건: 이론가(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붙인 별명), 이곳은 법이론을 토론하는 토론장이 아니다. 다 떨어진 일본놈들의 법이론을 들고나와 어쩌겠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재판장의 질문에만 충실히 답변하라. 공화국의 비밀자료를 누구에게 넘겨주었는가.

박헌영: 미군정 지도자들을 만나 약속한 것은 내가 장차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 국제협력관계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직 내가 최고책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약속은 하나도 이루어진게 없다.

최용건: 그런 헛소리를 듣기 위해 이 재판을 연 것이 아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소리인가.

박헌영: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그대들 말대로 나는 미국의 스파이었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

(박헌영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관들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당의 지시와 미리 준비한 판결문 원고를 선고에 앞서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20여분 후 최용건을 선두로 재판관들이 준엄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재판장 최용건은 준비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최용건: (중략, 예심처 기소장과 중복)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재판장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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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은 긴 판결문을 낭독한 후 배심원들과 함께 퇴정했다.

정확히 밤 10시였다. 5시간동안 진행된 마라톤 재판이 막을 내렸다. 일부 수상직계 간부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이엇으나 대부분의 참관간부들은 굳게 입을 다문채 사형선고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각자 귀가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3월 검거 후 2년여동안 끌고 온 박헌영 재판은 막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9시 정각, 내무성 간부회의실.
제1부상겸 정치국장인 필자(강상호)와 예심처장 주광무등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학세 내무상 주재로 박헌영재판에 따른 대책회의가 있었다. 예심처장 주광무가 재판때까지 박헌영이 미제간첩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수사과정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장황하게 보고했다. 시종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광무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방학세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변명만 갖고 수상실에 올라가 보고 할 수 없으니 그 대책을 제시하라!'며 화를 냈다. 주광무가 '내무상동지, 현 상태에서 박헌영의 사형언도를 집행할 경우 소련을 비롯한 형제국들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사형집행을 보류하고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방학세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알았소, 수상동지께서 우리의 변명을 받아주실지 모르지만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나와 동무의 목은 이론가의 스파이 증거에 달려 있소'라고 강조한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수상실로 직행했다. 전 간부들은 방학세 내무상이 김일성수상에게 보고를 끝내고 돌아 올 때까지 그대로 회의실에서 기다렸다. 한시간여 후 방학세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에 나타났다.

김일성 수상에게 박헌영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방학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

 

방학세: 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소. 그러나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무성 책임으로 남아있소. 국제동향을 보아가며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무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공은 다시 내무성으로 넘어온 점을 명심해야하오. 예심처장은 전 요원들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미제간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하오. 그리고 강상호 부상도 수상동지와 당의 명령이 하루속히 관철되도록 예심처를 철저히 감독해 주어야겠소.

 

이날회의에서 방학세의 지시(곧 김일성의 지시)를 종합하면 박헌영에 대한 사후처리문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즉, 미제간첩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는대로 국제여론에 관계없이 곧바로 사형을 집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심처에선 어느때보다도 강도있게 '미제간첩' 증거확보에 나섰다. 전 예심처 조사요원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8개월여 동안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을 불러 원점에서부터 재심문하는 등 증거확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내무성 특수요원들까지 동원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미제간첩' 흔적을 찾는데 안간힘을 썻다.

그러나 결과는 당초 예측했던대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주광무를 비롯한 예심처 요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증거수집을 진행하고 있던 1956년 2월 중순께였다.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시로 소련 외무성에서는 평양주재 이와노프 소련대사를 통해 공화국에 '박헌영 문제'에 대한 압력을 내려보냈다.


이와노프 대사는 김일성을 여러차례 방문, '우리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소식을 듣고 있다.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소련 외무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와노프 대사는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모스크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례적인 것이었고 이와노프 대사가 돌아가고나면 간부들 앞에서 '모스크바에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은 수상의 이같은 태도로 미루어 박헌영의 사형집행은 증거확보여부에 관계없이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역사상 김일성 정권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1956년 8월 하순이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형제국 순방을 나선틈을 이용, 연안파 핵심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부 소련파 간부들까지 합세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김일성이 급거 귀국했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이 스탈린 사망후 거세게 불고 있는 개인숭배와 1인 독재배격운동과 박헌영, 정치노선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방학세 내무상에게 느닷없이 '방동무, 그 리론가(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됬어?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의 질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방학세는 '예심처에서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수상동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김일성은 답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증거고 뭐고 다 필요없다. 오늘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엄명했다. 시기가 시기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김일성의 엄명에 감히 이론을 제기한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방학세는 그 길로 내무성에 돌아가 예심처장 주광무를 불러 '오늘밤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영철 내무성 중앙부장이 이날밤 박헌영을 지프에 싣고 평양시내 변방 야산기슭으로 가 방학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총살)을 집행했다.


사형집행 직전 박헌영은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1993년 중앙일보. 기고자는 소련파 출신 북한 내무성을 지낸 강상호

 

                                                           1946년 서울의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중)과 허헌(왼쪽)

 

박헌영 판결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써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을 재판장으로 하고 김익선, 림해, 방학세, 조성모를 성원으로 하여 구성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특별재판은 서기 박경호의 입회로써 심리를 공개하고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의 관여밑에 형법 제78조, 동 제 68조, 동 제 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한 범죄로 기소된 피소자 박헌영에 대한 사건을 심리하였다.

피소자 박헌영
생년월일 1900년 5월 28일생 남자
본적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주소 평안남도 대동군 화성리
직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전 부수상 겸 외무상

당 재판소는 예심 및 공판 심리에서 나타난 자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장구한 기간에 걸쳐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하고 나아가서는 중국과 쏘련을 반대하는 극동침략의 군사기지로 할 계획에 근거하여 악랄한 음모를 집요하게 계속하여 왔다. 위대한 쏘련군대에 의하여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된 후 미제국주의자들은 1945년 9월 자국군대의 남반부상륙을 계기로 조선에 관한 국제공약들을 난폭하게 유린하면서 이 침략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골적으로 발광하였다.
 
즉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을 반대하여 리승만 매국역도들로 괴뢰정권을 조작한 후 공화국남반부에 팟쇼적 군사 경찰제도를 확립하고 민주주의적인 일체의 요소에 대하여 갖은 테로 살육을 자행하다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이미 계획 준비하여 온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함으로써 공화국북반부에 창건된 인민민주주의제도를 말살하고 전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화하기 위한 동족상쟁의 전쟁을 도발하였으나 조선인민의 영웅적 항거에 봉착하여 수치스러운 참패를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에 조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기간에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직접적 발광과 병행하여 간첩 리승엽, 리강국, 조일명. 림화 도당을 고용하여 남반부에서의 조선인민의 정의로운 반항 투쟁을 진압하고 당과 민주역량을 와해 궤멸하였으며 다시 그들을 공화국북반부에 파송하여 당과 정부 내에 깊이 잠입시켜 군사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중요 기밀을 탐색 첩보하는 간첩범행을 수행하게 하였고 조선인민의 애국적 단결을 약화 소멸시킬 목적으로 이간, 대립, 불신을 조성시키는 갖은 모략을 계통적으로 감행케 하였으며 내종에는 적군의 진격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폭동을 결행하기로 음모하는 데 이르기까지 내부로부터의 파괴를 기도한 일련의 범죄를 조직하였다.

1953년 8월 6일 평양시에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하여 선고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이상과 같은 간첩행위, 반혁명적 모략행위, 무장폭등음모행위들은 이미 1939년부터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복무할 것을 원쑤 앞에 맹약한 간첩 박헌영을 두목으로 하여 조직 수행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였다.


1.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 시론?(女子詩論)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미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학교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하여 숭미사상(崇米思想)을 품게 되였고 1925년 2월 초순 일제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평안북도 경찰부에 조선공산당과 조건공산청년동맹의 서울, 신의주, 평양, 강화, 대구, 마산, 광양, 안동을 비롯한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댓가로 「정신적 착란」이라는 구실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였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5일경 서울 종로 3정목 요리점 백합원에서 연희전문학교교장이고 기독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정보기관의 탐정인 언더우드를 상면하고 그의 요청을 응락하고 동인에게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간첩으로서 충실히 복무할 것을 서약한 후 동년 12월 언더우드로부터 지하에 깊이 침투하여 조선혁명운동 내부에서 자기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지도적 지위를 탈취함으로써 장차 미제의 조선침략에 이바지하도록 할 것과 비밀 정보를 수집하여 연락할 데 대한 지령을 접수하고 그것의 실천으로서 곧 서울 「콤크릅」에 접근하여 지도권을 탈취한 후 조선혁명운동에서의 종파적 조직인 이 「콤크릅」을 언더우드의 지령에 근거한 자기 활동의 기반으로 만들 것을 기도하다가 1941년 12월 일미 간의 침략 전쟁이 개시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1945년 8월 I5일 해방 당시까지 전라남도 광주에 가서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8월 I5일 조선이 위대한 쏘련 군대의 무력에 의하여 일제식민지기반으로부터 해방되자 미국 정탐기관의 지령을 계속 실천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를 최후까지 반대하여 빨찌산투쟁을 하여 온 것같이 꾸미기 위하여 산중에 식량을 매몰하는 등 교활한 간계로써 자신을 「애국자」로 가장한 후 최후까지 고수한 것이 자기가 지도하던 「콤크릅」인 것같이 날조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미제국주의자들의 남반부상륙을 대기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9월 미군이 남반부지역에 상륙하자 동원 말경 서울 전반도호텔 건물내에서 남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와 밀회하여 앞으로 조선공산당을 미군정책에 순응케 하며 미군정의 포고 및 제반법규를 준수할 것 등을 밀약함으로써 미제에 대한 자기의 충성을 맹약하였고 1945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 및 언더우드와의 밀회에서 피소자 박헌영은 전부터 간첩연계를 맺고 있는 언더우드로부터 하지에게 정식으로 인계되었으며 동 석상에서 하지로부터 앞으로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공산당내에서의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노력할 것, 중요한 공산당활동에 대하여는 사전에 통보할 것, 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사상을 조성할 것, 공산당을 합법적 타협적 방법으로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 미군정 앞에서 폭동 파업 등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 간첩 비밀을 엄수할 것 등 새로운 지령을 받고 그의 실천에 충실할 것을 하지에게 맹약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상술한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조선공산당내에서 차지한 지위를 이용하여 당의 전투적 역량을 약화 마비시키고 남조선전역에 걸친 조선인민의 애국적 민주역량을 교살하기 위한 미제의 정책에 합치되게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간첩범행과 민주역량 파괴를 위한 각종 모략과 해독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에게 조선공산당의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는 전반적 조직 체제와 그의 활동정형, 당의 지도하에 있는 대중단체의 조직체제를 비롯하여 간부명단과 민전정책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1946년 3월과 동년 5월 하지에게 조선공산당의 장성정형과 쏘 미 공동위원회에 대한 당의 태도와 협의대상문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1946년 3월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리승엽과 조일명을 당의 중요위치에 배치하고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 지도할 데 대한 지령을 받은 후 리승엽을 경기도당위원장으로부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우익 정당 프락치야」 사업을 맡겼고 조일명을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등용함으로써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미국 간첩 리승엽과 조일명으로 하여금 1946년 3월부터 1947년 6월까지의 기간에 전후 6차에 걸쳐 당의 활동에 관한 중요 기밀을 미군 정탐기관에 제공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입북하여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정원을 틀어쥐기 위한 활동을 하라는 지령과 함께 간첩 리강국에게 중대한 임무를 주어 북조선에 파견할 터이니 그를 중요 직위에 등용시키고 그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지령을 받고 실천을 맹세한 후 하지와 밀약한 대로 리강국과 공모하여 미군정을 반대하는 민전 명의의 성명을 발표시키고 그에 근거하여 꾸며진 「체포령」을 구실로 하여 1946년 10월 초순 북반부에 잠입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우선 1947년 2월 초순 자기의 심복자인 입북 당시 안내자였던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하지에게 알리게 하고 점자 당의 대남연락선을 장악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리승엽과의 간첩 범행 연락에 이용하였는바 1947년 2월 남조선로동당 대남연락책임자 김소목을 통하여 리승엽에게 간첩 범행의 연계를 취할 데 대한 밀서와 함께 북조선 인민경제 기획에 관한 통계자료를 보내여 줌으로써 리승엽 하지에 이르는 연락선을 완성하고 1947년 4월에는 앞으로 재개될 제2차 쏘 미 공동위원회에서의 쏘련측 방침에 관한 자료롤 보내였으며 1948년 6월에는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북조선로동당의 중요결정과 당 내부기밀자료 및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사업준비 정형을 하지에게 전달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이러한 간첩활동을 감행하는 한편 하지의 지령대로 자기와 때를 같이 하여 「체포령」을 구실로 잠입한 남조선 주둔 미국 제24사단 헌병 사령관 미군대좌 뻬트의 고용간첩인 리강국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 등용케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를 자기의 신변인 혹은 해주 제1인쇄소 지도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의 간첩활동을 적극 보장한 결과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된 바와 같이 리강국으로 하여금 1946년 5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기간에 외무국장의 직위를 이용하면서 평양학원에 관한 자료, 강계·개천 등지의 인민군 및 경비대의 병력관계와 배치정형, 평양 주둔 쏘련군사령부의 동태, 북조선 주둔 쏘련군대에 관한 기밀 및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와 외교정책, 화폐 개혁 실시 정형, 1947년도 북조선인민경제계획에 관한 통계자료, 1948년도 국가예산에 관한 종합자료 등 중요 기밀을 전후 5회에 걸쳐 미군에게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7년 2월과 동년 12월 직접 리강국에게 당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을 알려줌으로써 그것을 미군에게 첩보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하지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계획을 알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간첩활동을 강화할 필요성에서부터 간첩 리승엽을 파송하여 줄 것을 밀서로써 요청하여 리승엽을 입북케 한 후 1948년 9월 중순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리승엽과 앞으로 간첩활동에 대한 토의를 한 결과 ?...... 공화국 창건과 관련하여 박헌영의 존재가 미국인에게는 더욱 귀중하게 되였으니 앞으로 간첩활동을 직접 하지 말고 리승엽에게 맡기라......?는 하지의 지시에 근거하여 피소자 박헌영은 종래의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당과 정부의 중요지시를 이응하여 리승엽, 리강국을 위시한 미제의 고용간첩들의 범죄활동 조건과 신변을 보장하여 줄 것을 합의하였고 얼마 후 그들은 하지의 귀국과 관하여 ?...... 금후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 정치고문 노블의 지시 밑에서 활동하라?는 하지의 명령을 접수하고 노블 XXXX XXXXX XXXX XXX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XXXXXXX XXXXXXXX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공화국 정부 부수상 겸 외무상의 탈을 쓴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인 피소자 박헌영의 보장과 지도에 의하여 당과 정부를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깊이 기여 들어 가지고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은 간첩활동과 갖은 반혁명적 모략범행을 계속하였으며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러는 한편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서득은의 편을 통하여 ?현애리스를 비롯한 미국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하지의 지령을 접수하고 있다가 1949년 봄 정치적 망명자로 가장하고 미국으로부터 구라파를 걸쳐 잠입한 간첩 현애리스와 리사민에게 입국사증을 발급케 한 후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간첩활동은 1950년에 이르면서 소위 「북벌」 계획의 진척에 따라 일층 활발하여 갔다. 즉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노블과 그 밑에서 활동하던 미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 미군대좌 니콜스는 일제고등경찰이었고 리승만 괴뢰정부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 분실장이던 극악한 민족 반역자 백형복과 미군간첩 안영달과 조용복을 일행으로 하여 1950년 4월 의거 입북을 가장하는 방법으로 북조선에 잠입시켰고 간첩 리승엽은 노블의 지령에 의하여 백형복을 공화국 내무성내에 안영달을 새로 조직할 당 서울 지도부에 각각 침투시키려고 시도하였고 조용복을 내각 인민 검열위원회에 잠입시키고 그들에게 인민군 항공부대에 관한 군사기밀을 비롯하여 당 내부의 중요기밀을 제공하는 등 간첩 범행을 감행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5월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안영달과 백형복을 만나 보고 리승엽에게 백형복의 신변상의 보호를 지시하여 그 자들의 범죄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12월에 아군이 재진공하게 되자 공화국의 군사 정치 경제적 위력을 약화시켜 종국적인 패전에로 유도할 목적에서 미제국주의 고용간첩들인 리승엽, 리강국 도당들을 더욱 높은 직위에 잠입시키려고 백방으로 암약하였는바 이러한 범죄활동은 1953년 2월 간첩 리승엽 도당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9월 이후 하지와의 연계로써 상술한 간첩활동을 수행함과 동시에 남조선로동당과 애국적 민주역량에 대한 파괴와 범행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간첩 리승엽, 조일명, 리강국 도당을 일찌기 당의 중요 직위에 배치하고 그들을 통하여 미군정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은 당의 정치적 활동에 불리하다는 구실을 붙이여 동맹파업과 일체행동을 제지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남반부 근로계급의 애국투쟁을 약화시킴에 전력하였고 한편으로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 공모자들로 하여금 충직한 당 일꾼들을 「변절자」「간첩 혐의자」「당 비밀 누설자」라는 무근한 누명을 씌워 살해케 하였는 바 1948년 5월부터 동년 8월까지의 기간 13차에 걸져 황해도 장풍군에서 42명의 남조선로동당원과 민주인사들이 살해당하였고 1949년 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현인초 외 2명이 동일한 누명으로 살해당하였으며, 1948년 8월 개성시 당 위원장이였던 김재관을, 동년 10월에는 장풍군 부위원장이었던 서구돈을 같은 누명으로 살해하려고 체포하였다가 공화국경비대에 발각됨으로써 목적을 달성치 못한 사실들이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되였다.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은 적들과의 모험적 충돌을 야기시키는 방법으로 수다한 애국투사들을 원쑤의 학살에로 유도하였고 당과 민주역량을 적의 파괴 앞에 내여 맡기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이래 미제가 남조선로동당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기 위하여 소위 「보도연맹」 을 조직하고 유혈적 탄압을 야수적으로 감행하는 사실에 대하여 당으로부터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기받고도 고의로 그것을 거부하여 원쑤들의 파괴공작을 완전히 허용 보장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의 비호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보장받은 안영달 등은 1949년 6월 18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국 통일전선호소문이 발표되자 이것을 계기로 무원칙하게 폭동준비와 총궐기 태세를 갖출 데 대한 지시를 전 남조선로동당 조직에 통고함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구실을 설정하여 주었고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 앞에 당조직을 노출시켜 주어 남조선 전역에서 대중적 투옥학살을 손쉽게 감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0년 3월 27일에는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비호 보장받은 안영달, 조용복 등과 백형복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김삼룡이 체포 학살됨으로써 남반부 민주역량의 핵심인 지하당조직이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의 공모와 리승엽의 직접적 지도와 조직에 의하여 안영달, 리중업, 맹종호 등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시 해방을 계기로 하여 「토지조사 위원회」 또는 「조선의용군 본부 특수부」라는 비밀살인단체를 조직하고 자기들의 반혁명적 범행을 감촉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무고한 인민 70여 명에 대하여 비법 감금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거듭하고 그 중 7명의 남조선 로동당원을 총살하였으며, 1950년 7월 안영달 등의 김삼룡 체포범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피소자 박헌영은 자기들 죄악의 발로를 방지하기 위하여 리승엽에게 명령하여 안영달을 남하하는 유격대에 배속한 후 비밀리에 살해하여 버리게 하였다.

3.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언더우드와의 결탁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역의 길에 들어섰는바 그것은 원쑤의 앞잡이로서 조선의 혁명적 근로계급을 완전히 무장해제함으로써 미제의 조선침략야망을 보장 실현케 하는 죄악의 길이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위대한 쏘련군대의 무력에 의한 8.15 해방 직후 조선의 혁명역량이 완전히 통일 단결되지 못하고 혁명적 당의 기본적 정치 및 조직 노선이 아직 제시되지 못한 틈을 타서 미제국주의 간첩 친미분자, 변절자 등을 자기의 주위에 집합하고 그들을 조선공산당내의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미제에 복무할 자기의 반동적 기반을 구축하였고 해방된 조선에 자본주의제도를 확립할 목적에서 매국역적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친미친일 반역분자들을 대표적 세력으로 하는 친미정권 「조선 인민공학국」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케 하는 범죄활동을 함으로써 모든 권력을 조선인민들 자신이 장악할 인민정권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하지로부터 공화국북반부에 잠입하여 당과 인민정권내에 확고한 기반을 축조하고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범죄할동을 감행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북한 후 해주 제1인쇄소와 강동 정치학원내에 리강국, 조일명, 리원조, 박승원, 림화, 한병옥 등을 위시한 반혁명분자들을 잠입시켜 그들을 조종하면서 그곳을 범죄수행에 이용함으로써 하지로부터 받은 과업의 실천에 착수하였고 1948년 9월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직접적인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한 후는 오로지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XXX파괴하기 위한 범죄 활동에 전력을 경주하고 점차 범죄활동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10월 이후는 당과 정권기관과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간첩암해분자들을 잠입시키고 그들의 범죄활동을 비호하고 지도함으로써 자기 범행의 종국적 목적달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 리승엽을 사법상 당중앙위원회 비서 정치위원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조일명을 문화선전성 부상에, 김점권을 경공업성 부상에, 김광수를 상업성 부강에, 한병옥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후방총국장에, 리강국을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에, 장시우를 무역상에, 배철을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에, 박승원 윤순달을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에, 리원조롤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김응빈을 금강학원 원장에, 서득은을 당중앙위원회 조직부 부부장에, 안영달을 남조선로동당 지도부 연락책임에, 림화를 조쏘 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남천을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리재우를 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 조직부장에 잠입시켜 이간 알륵 대립 불신 조성시키는 갖은 정치적 모략과 암해활동을 감행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6월 25일 조국 해방전쟁이 발발되자 남반부당과 민주역량을 파괴한 죄악을 숨기고 남반부 전지역의 당 및 정권기관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그를 토대로 하여 공화국 정권전복의 종국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기도에서 자기의 영향하에 있던 자 200여명을 안주에 집결시켜 조선인민군의 반격에 의하여 해방된 남반부지역의 도, 시, 군당 및 정권기관 책임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고 공모자 리승엽은 해방된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동일한 범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로동당 경기도당위원장에 김점권을, 경기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안영달, 그 후에 박승원을 배치하고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안기성 김요한 등 반혁명범죄자를 포치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4월 림화에게 문화 예술 분야에서 반혁명 분자들이 지도권을 장악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주어 그들에 의하여 문학예술총동맹 내부에서 사상적 대립과 불신과 알륵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연락부가 신설됨을 계기로 대남공작강화를 구실로 리승엽에게 지시하여 동 부서를 자기의 심복자들로 조직케 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반당적 반정부 음모를 격화 확대케 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과 공모하석 1951년 2월부터 개성 지구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를 조직하고 그곳을 반혁명 범죄활동의 근거지로 할 데 대한 범죄적 음모를 획책하였고---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지도되는 리승엽, 배철, 박승원, 림화, 조일명 등은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로써 확정된 바와 같이 조선인민이 원쑤 격멸에 총궐기한 간고한 전쟁기간인 1951년 9월 초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리승엽 사무실에서 예상되는 적군의 군사공세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할 무장폭동을 단행할 것을 토의하고 리승엽을 무장폭동총사령으로 하고 박승원을 참모장으로, 배철을 군사조직책임으로, 김응빈을 폭동지휘책임으로, 림화와 조일명을 선전선동의 책임으로 하는 무장 폭동 지휘부를 결정하였으며 그 후 거듭된 밀의에서 무장폭동의 주력으로 예견한 유격 제10지대를 근 4천명에 달하게까지 증강하고 평양 부근에 이동 주둔시킬 것을 기도하는 한편 그들과 금강학원학생들에게 공화국에 적대하는 반혁명적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모의를 강화하여 왔으며 1952년 9월 이 악당들은 다시 피소자 박헌영의 주택에서 밀회하여 무장 폭동으로써 당과 정부를 전복한 이후에는 조선 근로 계급을 기만하여 미제의 조선침략을 완강케 하기 위한 합법적 「좌익 정당」으로서의 「새당」을 결성하고 미국에 예속되여 자본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장차 리승만 괴뢰정부에 연합될 운명을 예견한 「신정부」를 조직할 데 대한 음모를 감행하였는바 이들은 박헌영을 수상으로 하고, 장시우, 주녕하를 부수상으로, 박승윈을 내무상으로 리강국을 외무상으로, 김응빈을 무역상으로, 조일명을 선전상으로, 림화를 교육상으로, 윤순달을 상사업상으로, 배철을 로동상으로 하고 리승엽을 「새당」 의 총비서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본건 범행착수와 동시에 부단한 정치적 모략을 감행하여 왔는 바 그것은 특히 1946년 10월 북반부에 잠입한 이후의 기간에 우심한 바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남반부로부터 입북한 당원들을 기만 회유하며 당과 공화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성시키고 불순분자에 대하여는 그들의 과거죄상을 은폐하여 주는 등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들을 자기의 주위에 집결시키는 데 전심 전력하였고 당과 국가의 직무에 충직한 열성자에 대하여는 「변절자」 「배신자」 라고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도를 비관하고 직무에서 이탈하게끔 꾀하였으며 이전부더 심복자 장시우를 교묘히 사주 선동하여 반국가적 범행을 적극적으로 하게 하였으며 서득은, 리강국 등을 시켜 당자금조달을 구실로 동방상사 영민공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일꾼들을 원조를 가장하여 매수 접근시켰으며, 자기의 영향하에 있는 심복자들에게 거액의 경제적 지출을 하여 부화방탕한 생활과 동시에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 자신도 탐욕적인 부화한 생활을 영위하여 왔는바 체포 당시 87만원의 공화국 화폐와 1,600그람의 순금을 횡취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9월 외무상으로 취임한 이후 「국제주의자」로 가장하고 외무성내에 자기의 심복자들을 다수끌어 들여 요직에 배치하고 쏘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형제적 국가들과의 우호적 친선관계를 파탄시키려는 음흉한 범죄활동을 계속하였는바 그것은 전 주쏘 특명전권대사 주녕하, 전 주중 특명전권대사 권오직과 동 대사관 참사 송성철을 자기의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거나 또는 접근시키고 그들에게 쏘련과 중국을 비방하고 멸시하는 선전선동을 거듭 감행하여 왔다.

이상 사실을 피소자 박헌영의 예심 및 공판심리에서의 진술과 증인 한철, 김소목, 권오직 등의 증언 및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한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 동 형사 사건기록(13권 총 4,000페지)에 의하여 확증된다. 피소자 박헌영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고 공화국의 인민주권을 전복할 목적으로 조국에 반역하고 미제국주의에 복무한 간첩행위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감행한 반혁명적 모략, 선전선동 행위 및 리승엽 등 반혁명 도당들의 무장 폭동음모의 실현을 비호 보장하여 준 행위는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당 재판소는 형사소송법 제 223조, 동 제228조 1호, 동 제237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소자 박헌영에 대하여 형법 제78조, 제68조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65조 1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양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동인을 형법 제78조, 제68조의 사형에 처하고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본건에 첨부된 증거물은 권리자에게 반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재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 김익선, 림해,
방학세, 조성모.
평양시에서 

 

                                                                                               광복 직후 서재에서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대표단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북한 전문가인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해방후 65년에 걸친 북한권력을 집중 분석한 책 ’북한 권력의 역사’에서 공개한 ’8월 종파사건’후 미코얀과 마오쩌둥의 대화, 마오쩌둥과 북한 부총리 최용건의 대화에 의하면 모택동도 그가 미국간첩은 아니라고 인식했다 한다

  1956년 9월 18일 베이징에서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마오쩌둥이 만난다. 연안파와 소련파가 '반 김일성 연합'을 만들어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궁정쿠데타인 ’8월 종파사건’으로 주모자들이 철저하게 숙청당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에게 어떤 이유로든 박헌영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헌영이 남로당의 영수임을 고려해야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베리야(러시아의 정치가 겸 비밀경찰국장)가 아니며 일개 문인일뿐이다.

 
— 마오쩌둥

박헌영은 지식인이며 사람을 위협한 적이 없고 조선로동당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처형을 반대하는 소련공산당의 의견을 평양 주재 KGB 고문을 통해 건의 형식으로 전달했는데 잘못됐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명의로 정식 통보를 했어야 했다.

 
— 미코얀

 

마오쩌둥은 미코얀을 만난 뒤 1시간 20분 뒤에는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 축하사절로 와 있던 북한 부총리 최용건 등 조선로동당 대표단도 만났다.

 

*박헌영 아호 이정(而丁, 而靜)

                                      1927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박헌영. '정신이상자'로 병보석 석방당시 박헌영이다. 왼쪽에는 부인 주세죽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오른쪽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주세죽이다

박헌영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기초적인 수준의 일본어러시아어를 구사하여 별도의 통역 없이도 직접 외신 기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이야기하고 있는 박헌영

1945년 10월 8일 박헌영은 개성시에서 김일성과 만났다. 김일성은 소련군 38선 경비사령부에서 이루어진 박헌영과의 비밀회담을 통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건설에 합의한 이후 공산당 조직사업에 주력하였다 이날 회동에서 '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북조선 분국을 설치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김일성소련의 지원을 들어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으나, 박헌영은 일국일당 원칙을 강조하며 북조선 분국 설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가 합의됐다. 그의 북조선분국 설치 허락은 정치적 실책의 하나로 지적받기도 한다

 

 10월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과 회담을 가졌다. 이날 박헌영은 하지에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신탁통치 반대 사태 이후 악화된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이승만에게 조선공산당의 영수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회에 가담했으나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독촉을 탈퇴했다. 45년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공식 석상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박헌영과 김일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전날인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일성, 세번째가 박헌영이다

 

1946년 3월 27일 UP통신 호이트 기자의 질의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하다

(문)미군정하의 공산당원 수 여하? 또 북조선에는?

(답)약 3만명이며 북조선의 것은 북조선공산당에 문의할 것

 

(문)조선공산당은 일본 공산당과 직접 연락이 있는가? 또 소련 공산당과 무슨 연락이 있는가?

(답)조선당이나 일본당이나 모두 해방 후 합법정당으로써 나오게 되었으니, 상호연락관계를 맺을 만한 처지와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소련공산당은 반세기간이나 자나란 위대한 당이다 우리 당은 아직 발전이 적고 경험도 적어 연락할 정도에 달하지 못한 형평이다 

 

(문)중국 공산당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답)관계를 가질 만한 정도로 자라지 못하였다

 

1948년 여름 묘향산에서.. 1948년 여름 북한의 당정 고위간부들이 묘향산으로 놀러가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許哥而).. 

 

1948년 9월 9일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면면이다 김일성(앞줄 오른쪽 네번째 수상), 양옆으로 박헌영, 홍명희, 김책등..

1948년 9월 9일 북한 건국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수상(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노동당 당수

부수상 박헌영(외상), 홍명희, 김책(산업상)등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통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허성택

보건상 리병남

도시경영상 리용

무임소장 리극노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반당종파분자들의 중심 인물은 김두봉, 최창익을 비롯한 신민당 출신이라고 지적하고, 이들의 의도는 공산당 출신의 핵심을 없애고 당 내에서 신민당 출신, 즉 소부르주아 성분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당을 소부르주아적 정당으로 바꾸고 소련과 미국에 대해 중립정책을 실시하려고 하였으며, 조국을 허무하고 위험한 길로 끌고 가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 건국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김두봉은 배재학당 이승만 후배로 친미 친이승만 세력이다"

 

                                                                                       숙청되기 얼마전에 찍은 사진

1956년(57세) 7월 19일, 총살당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은 1990년 러시아 여행 중에 전직 북한 고위관리 박길룡에게 박헌영의 사망 경위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 중이던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여 그날 저녁 방학세에게 박헌영의 처형을 지시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이 제휴할까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처형자들은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 중이던 박헌영을 끌어내 어느 산중으로 데려갔다 밤중에 허리까지 오는 잡풀 속을 헤치고 가면서 박헌영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 차렸다 그는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처형 직전에 박헌영은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방학세는 박헌영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두 번 방아쇠를 당겼다

시체는 그 자리에 묻혓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박헌영의 사망 일시는 1956년 7월 19일 밤이다 왜냐하면 동유럽, 소련 순방 중이던 김일성 일행이 평양에 되돌아온 날짜가 바로 그 날이기 때문이다

 

                                                              1949년 윤레나와 재혼 (좌로부터 스티코프, 김일성, 윤레나, 박헌영, 허정숙)

 

3.홍명희(군사위원 겸 부수상)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 왼쪽부터 백남운,허헌,박헌영,홍명희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부총리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0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생애 초반

ㄱ.출생과 가계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태생이며,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그의 방계 선조들 중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와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이 그의 방계 선조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가까운 방계 혈족들이었다. 배다른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

홍명희의 증조부는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ㄴ.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친척 족숙 홍영식 등의 영향으로 개화 사상에 눈뜬 그는 일찍부터 일본으로 유학, 일본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그의 아버지 홍범식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3]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1927년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2)광복 이후

ㄱ.사회운동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는데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나 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ㄴ.단정수립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친일파를 앞세운 이승만이 못 마땅해 한 것으로 월북전 문중에 인사를 하면서 '이승만이가 김일성 반절만 되어도 안 가겠습니다'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ㄷ.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정치활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명희는 한국전쟁 후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문화선전성 제1주상을 맡았던 고려인 정상진은 홍명희와 최승희 등을 옹호했다가 소련으로 추방당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에 선출 되었다.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ㄹ.사후

1968년 3월 5일 별세하였다.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3)기념문학비 건립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충청남도 괴산군에 있던 그의 가족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형수와 계모는 한국 전쟁 중 총살형을 당하였다.

일찍 결혼한 그에게는 열 세살 차이의 친아들이 있었다. 장남 홍기문 역사학자 한글학자로 활동했으며, 그와는 나이 차이가 15세였다.

(4)작품 세계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임꺽정》을 연재하였는데, 집안에 있던 열 두명의 머슴들 이야기를 듣고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라는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임꺽정은 도적에 불과한데, 사회주의자인 홍명희가 의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등 모두 존재할 정도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손자 홍석중의 말에 따르면, 홍명희는 '왜놈들이 조선말과 조선 정조를 탄압하니까 그것을 살려서 널리 알리려고 임꺽정을 쓴 거였지 소설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 뒤, 미완으로 끝난 임꺽정을 마저 완성시키시라는 주문에 대해서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으로 놔두는 게 좋다'며 끝내 완성시키기를 거부하였다

 

                                                                      1949년 3월 평양에서, 김일성의 옆이 홍명희

 

4.김책(군사위원 겸 부수상, 산업상, 전선총사령관)

 

김책(金策,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산업상(1948년 9월-1951년 1월)과 부수상을 지냈다.

본명은 김홍계(金洪啓), 가명은 문정(文貞)이며 함경북도 학성군 출생으로, 일찍이 가족을 따라 중국 옌지(延吉)에 이주하여 거기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옌지에서 성장하다가 반일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만주 지린성(吉林省)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동흥중에서는 퇴교당하였다. 이후 만주 펑톈, 지린 등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풀려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엠엘파와 대립되는 화요파 계열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어 요직을 맡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40년대 동북항일연군 때 김일성을 만나 같이 행동하였으며 당시 인연으로 공화국 수립후 김일성 주석의 측근이 됐다.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에 들어와 재편된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있었다. 당시 직급은 김일성, 강건, 안길과 동급이었다.

광복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시작으로, 1946년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평양학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6월 남북 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로동당 정치위원에 선거되었다. 9월 공화국 내각수립후 부수상 겸 산업상을 역임하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 전쟁을 맞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선사령관을 겸하여, 군사위원회 위원 및 전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0일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또는 평양에서 심근경색 또는 가스 중독으로 급사했다고도 하며 권력 투쟁 중 암살당했다고도 한다.

사후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훈장 제1급을 추서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그의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성진을 개명한 김책시, 청진제철소를 개명한 김책제철소평양김책공업종합대학 등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다.

함북 학성군은 김책군으로 유자녀 군사학원은 유자녀 김책군사학원으로, 인민군 제2정치군관학교는 김책군관학교로, 서울근위 제4사단은 김책 서울근위 제4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경력

소비에트 임시정부 주석,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서기, 내각 부수상, 산업상,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전선사령관

 

5.최용건(군사위원 겸 민족보위상)

 

최용건(崔庸健, 1900년 ~ 1976년 9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조선인민군총사령을, 1955년 7월부터 1958년 3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부총리를, 1958년 3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수반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일성, 김책과 더불어 만주 게릴라파의 핵심 트로이카를 이루었고,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훈련 교관을 지내는 등 군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 뒤 동북항일연군교도여단(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38선 이북 조선으로 귀국하여 1948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창설과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8년 민족보위성상, 북한조선 인민군의 총사령관,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등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장군이다. 1958년 3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에 올랐다. 호는 석천(石泉)이며, 다른 이름으로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 등이 있다. 평안북도 태천군 출신이다.

(1)생애

최용건은 1900년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정주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21년 3월 정주 오산중학교를 중퇴하였다

ㄱ.군관학교 활동

중국으로 건너가 쿤밍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좌익계 한국인 사회주의자 중 연장자에 속하였다

1925년 4월 중국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훈련 교관을 지내는 등 군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주은래 등이 있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경부터 항일 빨치산 활동에 참여한다.

1927년 발생한 광저우 코뮌광저우 폭동에도 가담했다. 폭동 당시 그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지도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비롯한 중국인 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가담하였으나 실패하고 사태는 진압되었다.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최용건 등은 살아남은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만주로 파견된다.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흑룡강성 등을 다니며 모범소학교를 비롯, 각종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과 농촌 계몽 활동을 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

이민 여사는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 최석천이라는 가명 외에 그는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

ㄴ.항일무장투쟁

중국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 북만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발족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군단장, 제2로군참모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고,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하여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가했다. 당시 직급은 김책, 김일성보다 한 단계 높았다.

1942년 7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야츠크에서 88국제려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부참모장에 선출되었다 8·15해방 직전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김일성·김책(金策)·안길 등과 함께 조선의 해방사업을 추진할 조선공작단 결성에 가담하였다

ㄷ.귀국과 광복 직후

1945년 8월 광복 후 평안남도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귀국하여 그는 11월 3일 조선민주당의 조직에 참여하여 오산중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조만식과 함께 조선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민주당 중앙당 부당수에 선출되었다 그의 부당수 선출 배경에는 김일성이 정치적인 복선을 가지고 잠입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조선민주당를 와해·장악할 목적으로 김일성의 천거를 받아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겸임시켰다는 것이다.

1946년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55년까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고, 1월 당수 조만식평양의 고려호텔에 감금당하자 그는 조선민주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에 선출되었다. 서울특별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을 파견해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1946년 3월 그의 집을 습격했다.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최용건을 저격하는데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1947년 2월 최용건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ㄹ.북한 정부 수립 활동

1948년 2월 그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창립에 참석하였다.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38선 이북 조선의 평양에 모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자 그는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북조선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별다른 내용 없이 결렬되었다.

1948년 그는 다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겸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민족보위성상에 임명(9월 9일)되었다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6월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ㅂ.한국 전쟁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ㅅ.휴전 직후의 정치 활동

한국전쟁 내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53년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이 되어 재판하였다. 1954년 내각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5년 7월 내각 부총리 겸 민족보위성 상이 되었다 55년 12월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으로 박헌영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중국마오쩌둥, 저우 언라이로부터 박헌영을 살려둘 수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동시에 로동당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조선로동당 조직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ㅇ.국가 수반 취임

1958년 3월 초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이 반당종파행위로 실각하자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내각은 김일성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고 그는 형식적인 국가원수직으로 만족해야 했다.

법적 국가원수로 행정부와 의회(최고인민회의)를 장악한 그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조선로동당 정치위원·조선로동당비서 등을 겸하면서 외교적 노력에 치중하여 옛 소련·동유럽·중국·중동·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대외활동을 하였다. 그는 명목상 국가수반직과 의회 의장직을 차지하였으나 실권은 국무총리였던 김일성에게 있었다.

1958년 12월 중앙위생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다. 1961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1966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최용건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요청을 받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1965년 3월) 이에 대해서, 북조선의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상무위원·조직위원이 되어 그는 당(黨)과 정(政)·(軍)의 요인으로 부상했다.

ㅈ.국가부주석 취임

1972년 12월 국가수반이 주석직으로 변경되면서 그는 부수반인 국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에 선출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겸임했다. 박헌영의 몰락 이후 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사실상 김일성 정권의 2인자로 계속 자리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예외적인 인물이었고, 존칭을 쓸 경우에도 '일성 동지' 또는 '김 장군'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항일 투쟁 시기에 동료인 중국인 왕옥환과 결혼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최운주가 최용건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본인은 사실 확인을 꺼렸다. 왕옥환은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던 최용건을 자기의 침소 밑에 숨겨 구원해주면서 부부가 됐다. 중국인 부잣집 딸이었던 왕옥환은 아버지뻘 되는 최용건을 사랑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1976년 9월 19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상훈으로는 1955년 9월 자유독립훈장을 수상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을 2회 수상하였으며, 1960년 6월 로력영웅 칭호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ㅋ.사후

최용건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한마디 때문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잊혀진 설도 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자신이 지목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하자 최용건은 죽기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성김정일은 대노하여 최용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묻어버리고 일체 공적을 평가하지 않았다 76년 9월 최용건이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장례는 소홀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최용건에 대해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김일성의 빨치산 선배인 최현이 사망한 후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최현의 공적을 선전해준 것과는 대비된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용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외교적 노력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 자격으로 외교활동과 외국 순방을 하였다. 그는 직접 중국·일본·인도 등의 아시아 국가와 그 밖에 말리·기니·캄보디아·이라크·시리아·이집트·알제리·탄자니아·소련·쿠바 등지를 직접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주덕, 주은래, 하룡 등과는 절친한 사이여서 최용건은 조-중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해결사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3)평가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이나 88여단 시절에도 직접적인 군사활동 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 애국자로도 평가된다.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북한 원수복을 입은 김일성과 차수복을 입고 있는 최용건이 맨 앞쪽에 나란히 앉아 있다.

[다음은 최용건을 차수칭호를 수여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상 최용건 동지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칭호를 수여함에 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영광스러운 조선인민군 창군 五(5)주년에 재하여 조선인민의 무장력인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조선에 대한 미-영 무력 침공자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능숙한 지휘로써 인민군의 전과를 달성함에 공훈을 세운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민족보위상 최용건 동지에게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차수칭호를 수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김량욱
一九五三(1953)년 二(2)월 七(7)일 평양시

 

 

6.박일우(군사위원 겸 내무상,전선사령부 부사령관)

 

함경북도 회령 출생. 간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고 항일운동에 참가하였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연안군정대학(延安軍政大學) 교관을 역임하고,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45년 11월 입북한 뒤 북한정부의 수립을 도왔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장,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 9월부터 1953년 3월까지 내무상,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50년 6월 군사위원회위원, 11월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1951년 7월 정치보위상, 1953년 3월부터 1955년 11월까지 체신상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처럼 그는 초기 북한에서 대표적 지성파 인물로 주목되는 존재로서 국내파 영수 오기섭(吳琪燮)을 자아비판에 회부하였을 때도 충분한 검토를 거쳐 엄정히 처리하자는 신중론을 내세워 김일성(金日成)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으나, 워낙 직업혁명가로서 논리정연하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좀처럼 손을 대지 못하였다.

6·25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회원이었으며, 중국 군대의 북한파병 준비를 돕기 위해서 중국인민지원군에 파견되기도 했다.

1950년 11월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전쟁과정에서 지나치게 중국식 전쟁수행 방식을 주장해 김일성으로부터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6·25에 대한 책임전가문제를 가지고 김일성이 무정(武亭)·방호산(方虎山) 등 연안파(延安派)의 최고 군사지도자들을 음해, 숙청하는 것을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불충고발(不忠告發)에 의하여 박헌영(朴憲永)의 남로당(南勞黨)에 가담하였다는 반당종파혐의로 1955년 숙청되었다.

 

7.정준택(군사위원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함경남도 출생.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북조선행정10국이 창설되었을 때 산업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43년 4월부터 광산을 경영한 경력 때문에 일부 간부에 의해 친일파로 몰려 지방공장으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김일성(金日成)은 그 사실을 전해듣자 곧바로 그를 복귀시켰다. 과거 경력에는 문제가 있으나 능력에 의해 임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6년 노동당에 입당했고, 1946년 12월 18일부터 1947년 2월 21일까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획국 부국장을 맡았으며,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국장이 되었다. 1947년 북조선인민회의 함경남도 대의원을 거쳐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8년 9월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53년 9월 소련,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하였다. 1954년 3월 화학건재공업상(化學建材工業相), 1955년 1월 화학공업상의 직책에 올랐으며, 1956년 2월 공동원자핵연구소 설립에 관한 국제회의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회 대회)으로 선출되었으며, 1956년 5월 화학공업상에서 물러나 부수상(副首相)에 올랐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7년 9월 제2차 김일성 내각 부수상을 역임하였다.

1958년 9월 건국 10주년을 맞아 국기훈장(國旗勳章) 제1급을 수여받았고 인민상수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 4월 경공업위원회가 설치되자 위원장에 올랐으며 부수상직을 겸임하였다. 1961년 9월 노동당 제4회 대회 중앙위원, 1962년 10월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2년 10월 제3차 김일성 내각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북한 정권 수립과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완성의 공로자이다.

197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북한 당국은 그를 추도하여 원산경제대학을 정준택경제대학으로 개명하였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인민군은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 장악했다 전쟁과정과 그 이후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남부군)이 숙청되거나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에서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출신 김일성, 김책, 강건등 다수가 우상화나 신격화 각종 동상이나 학교, 지방명칭 등으로 건립, 지정 돼 있다

북한에서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집안이 북한 특권층(상류층)으로 알려지고 있다

1.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해방 전 소련에서의 김일성그룹

1930년대 만주에서 조ㆍ중 유격대(동북항일연군)에 의한 반일 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군의 드높은 공세에 조ㆍ중 유격대의 역량은 감소를 거듭하였는데, 1938년 3만여 명에 이르던 항일연군 병력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1,4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은 일찍부터 물적 원조를 받아온 이웃 형제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으로의 이동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소련령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제2방면군을 이끌고 있던 김일성 부대는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거쳐 1940년 10월 23일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소련에 들어온 전체 조선인 유격대원 수는 200명 내외였다.

 

  동북항군연군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0년 겨울부터 하바롭스크 근방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Вятское-на-Амур) 마을에 A야영(일명 북야영)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일명 남야영)을 설치하였다. A야영에는 중국인 주보중이 지휘하는 제2로군과, 제3로군이 들어갔으며, B야영은 제1로군 제2, 3방면군과 제2로군 일부 병력들로 채워졌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는 부대를 정돈하고 장비가 보충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을 예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은 상호간에 영토적 순수성과 불가침성을 강조한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 당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항일연군이 동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하였다.


  항일연군 대원들은 두 야영에서 일련의 교육과정과 전투준비 훈련을 거쳤고, 일부 대원들은 소련군 정찰기관의 지시에 따라 이미 국경지역에서의 정찰활동을 하였다. 소련군 지휘부는 항일연군 출신들의 간부 훈련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빨치산 대원 가운데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들이 선발되어 하바롭스크 보병학교에서 단기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과 그 외 간부급 대원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모두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88독립보병여단의 결성


1941년 6월 중순 소련 정부는 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여단 창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고, 이듬해 7월 21일 A야영이 소재한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 마을에서 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었다. 88여단 창설의 주된 배경은 조ㆍ중빨치산들이 만주 주둔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해내는데 적합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단은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모르드바인 등을 15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국제여단은 붉은 군대(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력) 소련축으로 대독, 대일참전 연합부대] . 오늘날 북한에서는 88여단을 국제연합군으로 부르고 있고, 반면 중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연장선의 의미를 부여하여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칭하고 있다.

 

 88여단은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에 의해 직접 지도를 받았고 참모부 정찰부가 관할하였지만, 주보중이 이끄는 88여단 지휘부는 중국 공산당적을 유지하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보장 받았다. 88여단의 편제는 참모부, 정치부, 후방부, 군 검찰부, 4개의 보병대대, 통신중대, 포병중대로 이루어졌다.

 

 88여단 전체 규모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군인들이 증강되거나 감소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최저 900명에서 최고 15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100명 정도였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다른 소련군 부대로 차출되거나 집단농장(콜호즈) 등에 배치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1로군 출신 조선인들을 기본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은 대위 계급을 달고 대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최현, 김광협, 강건 등 그의 부하들도 포함되었다. 88여단 부대대장 급으로는 소련군 장교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조ㆍ중 대원들에 대해 주로 군사교육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88여단의 조선과 중국인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소련군제에 편입되어 소련군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역시 반일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과 조ㆍ중 유격대 간의 이해관계는 일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88여단의 활동과 김일성의 입지


88여단 대원들은 대열연습, 총검술, 폭탄 투척, 수영, 실탄사격, 스키훈련, 야외훈련(추위를 견디는 능력 배양) 등 체계적인 전투ㆍ기술훈련을 받았다. 또한 소련측이 제공한 프로그램에 따라 정치사상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는 반일 교육과 소련공산당사를 비롯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건설성과 등에 관한 정치학습이 포함되었다


 김일성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훈련 및 교육임무를 집행하였고 이밖에도 조선해방에 관한 토론과 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훈련 이외에 운동과 고기잡이 등으로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다.

 소ㆍ만 국경에서의 정찰 임무는 88여단 활동의 주된 목적이었다. 소련군 당국은 1942년 8월에 이미 군사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88여단의 활용 계획을 확정하였다. 88여단의 최종 과업으로는 조ㆍ중 지역 주민들로 소규모 빨치산 부대들을 창설하고 그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ㆍ중 유격대 출신들의 만주 파견 활동은 1941년 초부터 300명 내외의 대원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인 가운데는 강건, 안길, 박덕산, 최현 등이 자신의 소부대를 이끌고 각종 공작을 지휘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여단 창설 이전인 1941년 4월 동남만 일대에 남아 있던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고자 밀영을 떠났다가 활동을 마치고 8월에 기지로 돌아왔으며, 9월 중순경에는 재차 소부대를 이끌고 만주와 국내로 나갔다. 그는 1943년 7월 중순에도 지하공작을 위해 만주로 진출하였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위한 나진, 웅기, 청진 등 북조선 항구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은 오백룡 부대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여단 조선인 대원들은 정찰활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으며, 그들 가운데는 김혁철, 손태춘, 김학송, 김홍수, 지봉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한 조선인 빨치산 지도자들이 88여단으로 합류하면서 이들 사이의 지위와 역할이 자연스럽게 해결을 보게 되었다. 김일성은 선배 빨치산인 최용건이나 김책 등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김일성이 조선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선인 주력 부대를 이끌었다는 점, 조선 국내에 보다 널리 알려진 점, 소련과 중국 지도부의 신망이 다른 이들보다 두터웠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일제 시기 김일성 부대의 활동을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1940년 대 전반 소련 체류에 대한 평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부대가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기치하에 대일 항전을 지속했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 목표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김일성등 좌파계열 항일부대 경로

중국 공산당 입당(만주지역 조선인 공산당)-->조선혁명군(북한:조선인민혁명군, 조선혁명당-김두봉과 김규식)[국민당과 공산당 하부 동북항일연합군]--> 의용군(중국 인민해방군 원조부대 김두봉 등), 국제여단(연합군. 대독, 대일참전부대 김일성 등)-->중국 화북지역과 만주지역 점령(조선 의용군), 극동과 만주, 이북 점령(국제여단)--->만주지역(동북3성, 중국인민해방군 임표부대 주둔), 극동(赤軍=붉은 군대), 이북(赤軍=붉은 군대와 조선인 국제여단)
 -국제여단 주축으로 북한 인민군 창설과 권력장악 그리고 소련군 원조로 각종 군사학교 설치(김일성, 김책, 강건대학교 등) 

 

-1차 세계대전(레닌, 전쟁 중립선언과 공산주의 세력 전쟁 불개입선언)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과 동서유럽(동서폴란드) 군사적 점령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 이론: 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의 나찌즘, 소련 공산당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 소련침공

-1941년 7월 소련과 영국, 반독일전선 구축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반독일전쟁 참여(중국인등 아시아 출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독전쟁 참여)

 

-일본의 소련과 외몽골 침공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가 대통령직은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2.조선의용군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崔昌益) 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1)연원 및 변천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처음에는 제1구대(朴孝三)와 제2구대(李益星)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0년 5월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구이린(桂林)·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옮겨 1940년 11월 4일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에 남고 모두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으로 집결해 1941년 3월황하의 맹진(孟津)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0일린현(林縣)에서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박효삼(朴孝三)·김창만(金昌滿)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에 박효삼,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金世光), 제3대장에 왕자인(王子仁)이 임명되었다.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산(太行山)일대에서 후자좡(胡家庄)전투(1941.12.12.)·싱타이(邢台)전투(1941.12.26.)·T청(偏城)전투(1942.5.28.)를 치렀다. T청전투 무렵인 1942년 5월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자 화북지대는 본부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10일 타이항산 중인 허베이성(河北省) 셰현(涉縣)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있던 무정(武亭)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그 해 8월 15일 때마침 충칭에 있던 김두봉(金枓奉)이 옌안(延安)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왔으므로 그를 맞아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이 되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제8로군과 함께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타이항산 속 곳곳에서 항전하며 용명을 떨쳤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의용군의 옌안 이동을 결정하였다. 많지도 않은 인력을 타이항산전투에서 소모하기 보다는 전쟁 후에 조선 통치의 요인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 이동을 완료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뤄자핑(羅家坪) 마을에 주둔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제8로군의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뤄자핑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군정학교는 김두봉이 교장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뤄자핑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山東省)에 이익성, 산시성(山西省)에 김세광, 동북(만주)지방에 이상조(李相朝)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제8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그리고 김태준(金台俊)·김사량(金史良)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초모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합쳐 약 500명을 헤아린다.

(2)기능과 역할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지공작이었다. 전지공작은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 등을 말한다. 옌안에 있을 때는 전방에 파견된 선견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는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은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으로 나뉜다. 뤄자핑에 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는 생산활동이었다. 제8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自力動手 豊衣足食(자력동수 풍의족식)’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구호 아래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 자족하였다. 조선의용군도 그에 발맞추어 밭을 갈아 일을 하였다.

옌안지방의 주민은 야오둥(窯洞)이라는 토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뤄자핑에 가면 지금도 조선의용군이 살던 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의 옛터와 의용군이 일군 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제8로군의 동북(東北)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그 해 9월 15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 뒤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 가다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韓斌)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이 북한정계의 연안파라는 정치그룹이다. 그들은 김창만·허정숙 등 몇명 외는 모두 숙청당하였다.

만주에 남아 있던 병력은 그 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고 1950년 6·25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3.남부군[남부군단 , 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

이현상은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후평리에서 남반부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년 7월 중순부터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설립목적

이현상은 1950년 11월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 혁명지대(60명), 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 명의 병력이었다.

(2)연원 및 변천

남반부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이 남부군단은 1951년 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1951년 7월 중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북부지방 빨치산 7백 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기능과 역할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4)현황

한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5)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초대 내각

1948년 9월 9일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면면이다 김일성(앞줄 오른쪽 네번째 수상), 양옆으로 박헌영, 홍명희, 김책등..

1948년 9월 9일 북한 건국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수상(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노동당 당수

부수상 박헌영(외상), 홍명희, 김책(산업상)등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통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허성택

보건상 리병남

도시경영상 리용

무임소장 리극노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