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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압둘라,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자 이란의 최대 라이벌..국내적으론 사우디 변혁 주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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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압둘라,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자 이란의 최대 라이벌..국내적으론 사우디 변혁 주도

CIA Bear 허관(許灌) 2015. 1. 23. 18:05

 

1월 23일 타계한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미국의 알카에다와의 전쟁에 가담할 정도로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여성들의 기회 확대 등 보수적 무슬림 국가인 사우디를 현대화하려 노력했었다.

그는 또 중동의 정치 지형을 확립하기 위해 석유 생산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열정적으로 쏟아부은 인물이기도 하다. 압둘라 국왕은 항상 중동의 라이벌인 시아파 이란을 견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으며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에 대해서는 사우디 왕정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었다.

중동의 두 맹주로 불리며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를 대표하는 사우디와 이란의 대립은 중동 지역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 뿌리깊은 갈등을 심화시켰다. 시리아에서의 내전이 이러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압둘라 국왕은 대체적으로 미국의 긴밀한 동맹이었다 할 수 있지만 미국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을 중재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그는 미 행정부에 이란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도록 압박했으며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수니파 반군을 더 강력히 지원할 것을 요구해 왔다.

1024년 리야드에서 태어난 압둘라 국왕은 대부분의 삶을 네즈드의 사막에서 승마와 매사냥을 하며 보냈으며 1982년 전임 파드 국왕이 즉위할 때 왕세제로 지명됐다. 그의 왕세제 지명을 둘러싸고 술탄 왕자의 반발이 있었지만 곧 무마됐었다. 그는 1995년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맡았다.

압둘라는 미국으로부터 사우디 내에서 가장 강력한 친미 세력으로 꼽혔지만 1990년 사우디에 배치된 미군 철수를 끈질기게 요구해 2003년 이를 실현시켰다.

2000년 조지 W 부시가 미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압둘라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너무 편향적이라고 압력을 넣어 미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에 대한 동의를 처음으로 얻어내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 공격 당시 비행기를 납치했던 19명의 범인 중 사우디 출신이 15명이었던 것과 관련, 강력한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알카에다에 대한 강력한 분쇄 작전에 나서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했다.

알카에다에 대한 사우디 국내에서의 강력한 탄압은 사우디 내 와하비 이슬람 해석을 위주로 하는 세력들을 예멘으로 도주하게 해 현재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를 결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국내적으로는 사우디가 미래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썼다. 사우디는 석유 생산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소득 불균형이 극심한데다 급속히 늘어나는 청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 시급했다. 그는 숙련된 노동력 양성과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 등 서구식 대학을 세워 남녀 학생이 함께 공부하도록 한편 사우디 학생들의 외국 유학을 지원하는 등 교육에 힘썼다.

그는 처음으로 국왕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는 슈라 위원회에 여성을 임명했으며 2015년부터 여성들의 투표 등 정치 참여를 허용했다. 2009년에는 최초의 여성 장관을 임명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여성 선수 2명의 참가를 최초로 승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사우디 여성들의 의상이 검은색 일상에서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고 TV에서 음악이 방송되는 등 사우디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운전이 금지되는 등 사우디 내 뿌리깊은 와하비식 이슬람 해석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dbtpwls@newsis.com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1924년 4월 1일 ~ 2015년 1월 23일, 아랍어: عبد الله بن عبد العزيز آل سعود)는 제6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재위 : 2005년 8월 1일 ~ 2015년 1월 23일)이다. 초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의 37명의 아들 중에 한명으로 태어났고, 파드 국왕의 이복 동생이다. 파드 국왕이 1995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래, 왕세자였던 압둘라는 사실상의 섭정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국가 경비대 사령관이기도 하였지만, 2010년 11월 17일 아들의 무타이프 빈 압둘라 왕자에게 물러주었다. 덧붙여 와하브파 이맘으로서는 압둘라 3세로 불린다. 그리고 가혹한 체벌제도와 여성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고수하며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전제군주이다.

 

 

1.초기생애

압둘라는 이븐 사우드의 여덟번째 부인 파하다 빈드 아지알 쉬라임의 아들로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전 라시드가의 제 20대 당주로서 1920년에 이븐 사우드와 결혼을 하였다. 압둘라는 사우드 왕가를 위해서 설립된 학교에서 종교 권위자와 지식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963년에는 사우디 국가 경비대의 장관으로 취임하여, 1982년 6월에 제1 부총리로 취임했다. 5명의 아내가 있고, 7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이 있다

2.신앙

압둘라는 경건한 이슬람교도로 사라디 주의(이슬람교의 최초의 삼대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앙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이슬람의 교의)에 따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 지도자와 매주 만나서, 조언과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한다.

 

                                            The king had hinted at relaxing some of the traditional restrictions on women

3.행정과 외교

압둘라가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이미지는 근대화에 크게 뒤떨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학교에서는 반유대주의를 가르치고 있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탈레반 정권을 많이 지원하기도 하였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일어났던 9·11 테러 사건 이후, 탈리반 정권의 승인을 철회하였다.

2002년에는 압둘라는 이른바 아랍 평화 구상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우디가 이스라엘에 대한 평화의 최초의 시도이라고 받아들여졌다. 이 계획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점령지 전체를 반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승인하도록 호소한 것이었다. 그와 관련해 압둘라는 전례가 없는 양보를 신청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충돌을 끝내서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나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절차 및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간의 국교 정상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은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쌍방에서 비판을 받아 철회되었다.

최근에는 압둘라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방문했다. 중단했던 중동의 평화를 부활시켜 아랍 국가의 연대와 협력을 높이는 시도였다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말하였다

 

                                   King Abdullah tried to promote the cause of Arab unity, fostering ties with King Mohammed VI of Morocco

4.대미관계
압둘라는 미국을 몇번이나 방문하였다.

1976년 10월 압둘라가 높은 지위에 오를 당시에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만났다.

1987년 10월 미국으로 가서 당시의 부통령인 조지 H. W. 부시를 만났다.

1998년 9월에는 미국에 공식 방문하여, 워싱턴 DC에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회담했다.

2000년 9월에는 유엔의 밀레니엄 축하 행사에 참석하였다. 또 당시의 대통령 조지 W. 부시를 포함한 부시 일가가 압둘라를 친구로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