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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양 전 총서기의 10주기, 중국 국영언론이 보도하지 않아 본문
1989년에 중국 북경에서 발생한 천안문사건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실각한 조자양 전 총서기가 타계한 지 10주기를 맞은 17일, 북경의 자택에서 거행된 추도행사를 18일자 신문 등 중국의 국영언론이 보도하지 않아 조자양 씨의 재평가가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조자양 전 총서기는 1989년의 천안문사건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지도부 내에서 비판을 받고 실각해 북경의 자택에 연금된 후 10년 전에 타계했습니다.
10주기를 맞은 17일, 조자양 씨를 추도하는 행사가 자택에서 거행돼 친족과 시민 등 수백 명이 모였습니다.
이 추도행사는 홍콩과 외국언론에 의해 보도했지만 18일자 신문 등 중국의 주요 국영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또 조자양 씨의 유족에 따르면 조자양 씨의 유골은 정부의 허가가 나오지 않아 묘에 매장할 수 없어 지금도 자택에 안치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중국에서는 천안문사건과 관련해 실각한 조자양 씨의 재평가가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89년 인민복 차림으로 천안문 광장의 시위 군중들을 찾아왔던 조자양 前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1919년 10월 18일 중국 허난성(河南省) 화현(滑縣)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관심이 컸던 자오쯔양(趙紫陽)은 중학교를 중퇴하고13세였던 1932년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9세인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모체 팔로군(八路軍)의 근거지가 된 고향에서 항일 게릴라에 참여했고 화현당위원회(滑縣黨委員會)의 서기를 지냈다
젊은 시절 고향 인근 지역당에서 활동하던 자오쯔양(趙紫陽)은 일본군의 팔로군 토벌작전 당시 탈출하였고 국공내전 중인 1947년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 군대가 다볘산(大別山)에 진출했을 때 1948년 퉁바이산(桐栢山) 위어환 지구 구당위원회(區黨委員會) 부서기로서 토지개혁을 위해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51년 광둥성(廣東省)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 1953년 당화남국(黨華南局) 농촌공작부장, 1955년 광둥성당위원회(廣東省黨委員會) 부서기로서 농촌합작화를 추진하였고 1956년 중국 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1958년 인민공사를 만들 때 마오쩌둥(毛澤東)을 절대 지지하였고 1965년 타오주(陶鑄) 중남국 (中南局) 서기를 지낼때 광둥성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趙紫陽)의 출세가도는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시련을 겪게 됐다 1967년 당시 중국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타오주(陶鑄) 공격하면서 실각하자 자오쯔양도 실각했다가 문화혁명이 수습되면서 1971년 내몽골자치구당위원회 서기에 복직했다
1972년 광둥성혁명위원회 부주임, 1973년 당중앙위원,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1976년 쓰촨성(四川省)혁명위원회 겸 청두부대(成都部隊) 제1정치위원등을 지냈고 <4인방> 추방 직후 쓰촨성(四川省)에서 농업증산과 공업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책임제의 선구자가 되었다
1977년 덩샤오핑(鄧小平)파로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었다
1979년 정치국원, 1980년 2월 정치국상무위원, 같은 해 4월 부총리가 되었다
그해 9월 화궈펑(華國鋒)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하였고 1981년 6월 당부주석, 1982년 9월 정치국 상무위원, 1983년 총리등을 지낸 뒤 1987년 11월 총서기가 되었다
1989년 4월 급진 개혁주의자 후야오방(胡耀邦) 전(前) 총서기의 사망으로 베이징대학 학생들의 보수주의 비난 및 민주화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톈안먼(天安門)사태가 발생 , 같은 해 6월 총서기직에서 실각했다
그 후 자오쯔양(趙紫陽)은 그간 베이징 시내 중심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생활해왔으며 병원에 간간이 입원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자오쯔양(趙紫陽) 전(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2005년 1월 17일 베이징(北京) 시내의 한 병원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85세..
자오쯔양은 덩샤오핑 계열로 그는 자산계급출신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를 추구한 분이지만 학력이 중학교 중퇴등으로 국제적 정세 파악 능력부족이나 서구화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등을 몸소 익히지 못했고 중국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여 실각했다 중국의 미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공존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중국 자국 경제우선 정책으로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 사회의 민주화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노선로 나아갈때는 중국지역의 각 종족(민족)의 분열로 하나의 중국이 무너질 수 있다 동북아 학생운동이 극단주의 운동 한 갈래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다
자오쯔양(조자양, 중국어 간체: 赵紫阳, 정체: 趙紫陽, 병음: Zhào Zǐyáng, 1919년 10월 17일 ~ 2005년 1월 1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였으나,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되었으며, 그 후로 17년간 가택연금 중에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중국 공산당 입당
그는 1919년 10월 18일에 태어났고, 이미 청년 시절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했던 레닌주의자였다. 13세의 그는 중국공산당 청년연맹에 가입했다. 19세에 중국공산당원이 됐다. 1947년까지 고향인 허난성에서 활동하였다. 1949년 중국 공산 정권 수립 뒤, 1965년 광동성 당 서기가 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 당시, 그는 가족의 출신 때문에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된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복권되어 내몽고 자치구 당 서기를 거쳐, 1972년 광동성 서기로 돌아오고, 그 다음 해에 사천성 당서기가 된다. 1977년 이후, 중국공산당 권력의 중심에 스며들었고, 1980년에 국무원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1]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서기로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실각했다
2.진보적 공산당 인사
1989년 4월 15일, 전 공산당 서기 후야오방(호요방, 胡耀邦, 1980년~1987년)이 사망하였다. 그는 덩샤오핑 이후로 실용적 경제 노선을 주장하던 개혁파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덩샤오핑은 그의 후임으로 자오즈양을 임명했다.
3.민주화 운동
1987년 즈음 거세진 중국 내 대학들의 시위 운동을 바라보는 후야오방의 자세는,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우려의 시선을 갖게 하였다. 마오쩌둥 사상의 폐기 등은 당시 중국 지도부 내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었고(지금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덩샤오핑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은 중국의 방향을 놓고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1989년 중국 국무원 회의 도중 후야오방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후야오방의 죽음은 그 당시 중국인민들에게 커다란 실망이었고,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
4.1987년 당시 중국인민
잃어버린 10년, 문화 대혁명을 거친 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기대이고, 당연한 불안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후야오방의 실각 이후에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급격한 물가상승문제로 인민들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개혁개방 이후 공산당 하위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도 불거져 나왔고, 무엇보다, 인민들을 불안하게 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급격히 상승한 실업률이었다. 중국 경제가 순수한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 혼합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 중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5.천안문으로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베이징 시민들을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였고, 동시에 당 간부들의 재산 공개와 인민 민주의 헌법에 따른 민주를 요구하였다. 후야오방의 추모식은 4월 22일, 천안문 광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그들은 후야오방의 추모식 내용에 그의 복권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였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군중들의 당지도부에 대한 적개심은 표출되지 않았다
6.언론의 중립적 보도
당시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자리에 있었던 자오쯔양은, 4월 23일 방북(북한) 일정 중에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계획된 출국이었기에 취소될 수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양으로 떠나자 마자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다. 4월 24일, 베이징 시내 16개 대학들은 산발적으로 휴교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천안문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천안문광장의 분위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차츰 당의 위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언론은 광장의 군중을 제지하지 않았다. 정부가 인민의 요구를 가능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7.중국 공산당의 천안문 시위 시각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시위대를 사회적 혼란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 성명서는 당시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 李鵬, 1928년 ~ )이 직접 공포하였다. 자오쯔양이 아직 평양에 있을 때였다. 하지만 5월 중순까지 중국의 주요 언론들은 시위대를 애국주의라 하며 비난적 어조를 보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전인대 위원이었던 완리는 캐나다를 방문하였을 때, 5월 19일자 인민일보의 보도를 인용하여, 당시 베이징의 상황을 인민들이 시위 결사 자유로 발언권을 행사하는 애국적 민주라고 당시 캐나다 총리에게 설명하였다.
8.자오쯔양의 천안문 운동 옹호
5월 17일, 평양에서 돌아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자오쯔양 총서기는 또한 천안문에서의 시위를 애국 열정이라고 하였다. 리펑과 자오쯔양 총서기는 함께 천안문 광장에 나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하라고 하였다. 이후로 당지도부의 대응은 강경해졌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5월 30일 인민일보는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사설을 실었다. 그리고 당은 시위대를 철수시키려 군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시위대도 물러서지 않았다. 6월 4일 천안문 사태이었다. 정부는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이 미국의 CIA나 홍콩의 반공 조직 등 반정부 조직에 조종당했다고 발표하였다.[2]. 5월 19일 이후, 계엄령 선포에 미지근했던 자오쯔양은 당 지도부 내에서 고립되었다. 계엄령 선포저지에 실패했던 5월19일 새벽 4:45, 그는 천안문 광장으로 나와 말했다.
“ | 미안합니다. 여러분, 내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십시오! | ” |
이후 그는 당 중앙위 총서기 직에서 내려왔고 그는 조사를 받았으며, 2005년 1월 17일,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그의 죽음 뒤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하고 있고 장례식은 중국 정부에 의해 조용히 비공개적으로 치러졌다
10.개혁개방
그의 빠른 성장의 원인은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다. 그의 개혁적 성향이 덩샤오핑의 의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자오쯔양은 사실상 1980년대 후반 중국 경제의 방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공산주의 초급단계론”을 주창한 인물 중 하나이며, “중국식 개방 노선”으로 중국의 정치 개혁과 경제 개혁 사이에 균형을 맞추자는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 전까지만 하여도 덩샤오핑은 당내 권력 다툼에서 자오쯔양의 편에 있었다.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지금 현재 중국의 모습은 그가 생각하던 21세기 초 중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의 숙청과 관계 없이 그의 사상적 바탕을 기반으로 중국이 변화·발전해 왔음을 의미한다
1993년 가택연금 중인 조자양 전 총서기가 집에서 골프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이다
조자양 전 총서기는 중국 지도자 중 드물게 골프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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