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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노조 노동정책 간담회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현대자동차 노조 노동정책 간담회

CIA Bear 허관(許灌) 2012. 8. 25. 22:52

 

손학규후보께서 2012년 8월 7일 울산 현대자동차를 방문하여 노조와 노동정책 간담회를 했습니다 손학규후보는 서울대 졸업 후 구로공단의 전자회사와 목공장, 철공소 용접원등으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생활을 해 온 관계로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후보 중 한 분입니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대선 경선 후보가 7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방문했다. 손 후보는 이날 윤갑한 현대차 대표이사 부사장을 만나 현재 진행 중인 현대차 임금협상 상황을 들었다.
그는 "노조와 상생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 후보는 이에 앞서 현대차 노조 문용문 지부장과 만나 "밤샘 근무 없는 주간 2교대제 실현 등에 힘을 싣겠다"고 말했다.

 

 

 

 

 

손학규(孫鶴圭, 1947년 11월 22일~)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 빈민운동가, 인권운동가, 정치인이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보건복지부 장관2002년부터 2006년까지 민선 경기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민주통합당의 전신이었던 민주당의 대표였다

 

손학규는 1947년 11월 22일 대한민국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교사였던 손병화, 양현자 부부 슬하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병화는 교사로 생활하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그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후 손학규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53년에 입학하여 시흥초등학교에서 4년을 공부한 손학규는 매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1959년에 졸업한다. 1959년 경기중학교에, 1962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손학규는 고 3 때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당시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손학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끝나고 손학규는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았다.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또 무기 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은 손학규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 손학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학규는 1969년 육군에 입대(군번 61006472)하여 1972년에 병장 만기 제대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학규는 한국에서 에큐메니컬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진보 기독교 단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한다. 해방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전태일 열사로부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도시산업선교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다.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학규는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유신독재체제는 박형규, 김관석, 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시켰고 손학규를 검거하기 위해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을 걸었다. 손학규는 2년 동안 숨어 살며 원주의 사과 과수원, 서울의 철공소에서 일했다. 손학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손학규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수사당국에 검거된다. 김해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손학규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봄,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학위 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손학규는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서 박사학위 논문 《Authoritarianism and Opposition in South Korea》(London, Routledge)을 마무리한 손학규는 1988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손학규는 1988년에서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역임했고,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로 역임했다. 교수 시절 동안 손학규는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며 최장집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하여 토론했다.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손학규는 1993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14대 총선 보궐 선거를 통하여 경기도 광명시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원으로써 재선한 후, 1996년 11월에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연소 장관 기록이었다. 1997년 8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손학규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과 결별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 데 역할을 하였으나,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하며 낙선하였다. 2008년 1월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손학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도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여 2008년 4월 통합민주당의 18대 총선을 이끌었으나, 299석 중 8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같은 해 7월 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춘천으로 떠나 칩거했다.

그는 2010년 8월 15일, 춘천을 떠나며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신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시혜적 복지,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강조했으며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로서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할 것"이라며 정계에 복귀했다.

2010년 10월 3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민주당 대표가 된 손학규는 2010년 12월 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전국을 돌며 민주대장정을 전개했으며, 2011년 1월 3일부터 다시 전국을 돌며 시민들의 건의와 주장을 경청하고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희망대장정을 전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 4일, 민주당이 내세운 후보 박영선 의원이 경선에서 패배하면서 손학규 대표가 물러나겠다고 선언했으나[1], 민주당 의원들의 간곡한 만류로 하루만에 대표직 사퇴를 철회하기로 해 논란을 일으켰다.

*약력

1947년 교육자 집안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1950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홀로 된 어머니가 키움. 어머니로부터 사범학교 진학 권유 받음.

1959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규탄시위로 이중 무기정학 처분. 이때 법대의 조영래(작고, 인권변호사), 상대의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와 같이 운동하며 서울대 삼총사로 불림.

1969년 민주화운동 관련 1년 투옥, 4학년 때 군 입대 병장 제대.

197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소설가 황석영과 노동운동 시작. 구로공단의 전자회사와 목공장에 위장취업. 이후 도시산업선교회박형규 목사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 전개. 수배자로 2년간 도피생활. 원주농장에서 막노동.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의 철공소에서는 용접 일을 함. 대학교 3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이윤영과 7년 연애 끝에 결혼. 수배 중 모친 장례식에서 체포. 사건종결후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지금의 NCCK)의 교회와 사회 위원회 간사 역임.

1979년 부마항쟁 진상조사시 마산시에서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어 김해보안대에 수감. 이틀간 취조 없이 구타로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가 박정희 사망으로 풀려남.

1980년 영국 유학 중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 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

1988년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1989년 인하대학교,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

1993년 경기도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제14대) 당선. 금융실명제 대체입법 주장.

1994년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국토개발과 국가경쟁력"이라는 백서 발간.

1996년 제15대 총선에 재선 성공, 5월 18일을 국가 기념일로 건의 시행함.

1996년 11월~1997년 8월 보건복지부 장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3선 성공, 총재 제도 폐지. 상향식 공천제 도입. 당권-대권 분리 등을 주장. 여, 야 모두에서 채택함.

2001년 백봉신사상을 3선 이상 의원으로는 최초 2년 연속 수상.

2002년 6월 13일 민선3기 경기도지사후보로 당선.

2003년 경기 북부 지역의 LCD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100억불 규모의 LG Philips LCD 파주공장 유치, 전국 최초로 영어마을 조성.

2006년 100일 민심대장정.

2007년 5월 14일 '전진코리아 2차 범국민토론회'에 참석해 민심대장정과 '민심대토론'에 이은 "인물대장정"에 나서겠다고 선언.

6월 17일 서울 올림픽공원 선진평화연대 창립대회로 출범식.

7월 1일 2차 민심대장정, "실사구시(실/실업 걱정없는 나라, 사/사교육비 부담없는 사회, 구/구김살 없는 노후생활, 시/시름없는 내 집 마련)" 민생정책을 발표.

9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합민주신당 예비후보로 국민경선에 참여.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현,통합민주당) 대표로 선출.

4월 제17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종로에 출마하여 낙선.

7월 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 퇴임

2009년 4월 29일 대표직 퇴임했으나 보궐선거 지원.

9월 21일 10월 재선거 불출마 선언.

2010년 10월 3일 인천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대표로 선출.

2011년 4월 27일 제18대 국회의원 성남시 분당구 을선거구 보궐선거 당선

 

*학력

196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1987년 옥스퍼드대학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경력

1977년~197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

1986년~1987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1988년~1990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1993년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2년~1993년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1993년~1996년 제14대 국회의원 (1993년 4월 23일 보선 당선)

1996년~2000년 제15대 국회의원

1996년~1997년 8월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0년~2002년 5월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2006년 6월 민선 3기 경기도지사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2008년 2월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

2011년~2012년 제18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