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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엔 대표권 문제, 일본 외무성은 당시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본문
중국의 유엔 대표권 문제, 일본 외무성은 당시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CIA Bear 허관(許灌) 2011. 12. 22. 23:10일중국교정상화교섭에 관한 일본 측의 외교문서가 공개돼 유엔의 중국 대표권이 대만의 국민당 정권에서 북경의 공산당 정권으로 바뀐 1971년, 당시 외무성은 국교정상화에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70년 12월 1일자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경의 공산당정권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나라는 31개국, 대만의 국민당정권을 지지하고 있던 나라는 일본, 미국 등 모두 10개국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듬해인 1971년 2월 20일자 당시 호겐 외무성 심의관이 작성한 '중국문제 처리상의 감상'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호겐 씨는 유엔 총회의 중국 대표권을 정하는 선거에서 국민당 정부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할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고 분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어서 중국 공산당의 유엔 가입을 제안하면서 국민당 정부의 의석도 확보하는 안에 대해서는 두 개의 중국을 만들려는 음모라는 이유로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면서도 국민당 정부가 유엔의 의석을 잃는 것은 이윽고 몰락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이 안에 동의하도록 대만 측을 설득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971년 7월, 미국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바꿔 당시의 키신저 대통령 보좌관이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해서 이른바, 닉슨쇼크라 불리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해 10월의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의 중국 대표권이 대만에서 북경의 공산당 정권으로 바뀌었으며 일본은 이듬해인 1972년에 취임한 다나카 수상이 그 해 9월에 북경을 방문해 주은래 총리와 회담을 갖고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일본 주오대학의 핫토리 류지 교수는 닉슨쇼크도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 외무성은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서 그런 한편 국민들은 정상화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신중한 자세를 바꾸게 한 것이 바로 이듬해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출범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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