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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衣對泣(우의대읍) "거적을 덮고 자다, 부부가 고생을 같이 겪다" 본문
牛衣對泣(우의대읍) "거적을 덮고 자다, 부부가 고생을 같이 겪다"
CIA Bear 허관(許灌) 2011. 8. 7. 18:42牛衣對泣(우의대읍)
◎글자풀이: 소 牛(우), 옷 衣(의), 대답할 對(대), 소리없이 울 泣(읍)
◎뜻풀이: 이불이 없어 언치를 덮고 누워서 마주보며 눈물짓는다는 말로서 부부가 같이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겨이르는 성구이다. 거적을 덮고 자다, 부부가 고생을 같이 겪다.
◎유래: 남자가 현명한 부인의 말을 듣게 되면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고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도박군으로 될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생활경험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반대로 현명한 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큰 코 다친다는 것 역시 생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구 "우의대읍"은 바로 남편이 안해의 두번의 충고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후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서한의 명대신 왕장은 산동 거평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뺴어난 문필로 관리에 발탁되었으며 후에는 임간대부로 임명되었다. 재직시에 강의한 성품으로 권력에 휘둘리지 않았다. 한원제때 중서령인 석현이 조정의 실권을 잡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는데 문무대신들은 석현을 범처럼 두려워했다. 왕장은 어사와 함께 황제에게 석현의 죄를 고발하는 상서를 올렸다가 결국 석현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게 되었다.
한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한후에 왕장은 관직을 회복해 임간대부로 있다가 사록교위로 승진했다. 경조윤인 왕존의 후임자가 일처리가 미숙해 도성의 치안이 크게 어지러워지니 원제의 외삼촌인 대장군 왕봉이 왕장을 황제에게 천거하게 되었다.
왕봉이란 인물도 권세를 믿고 독단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자리보전에만 급급하고 직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장은 왕봉의 천거를 받기는 했지만 왕봉의 악행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다.
당시 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었는데 일식이 생기는 과적적인 도리를 알지 못했고 일식은 재난을 알리는 징조라고 여겼다. 어느 한번 일식이 있은후 왕장은 황제를 만나 "일식이 생김은 왕봉이 나라의 법을 어기고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즉시 왕봉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 죄를 추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에 큰 난이 생길것입니다."하고 고했다.
황제도 왕장의 견해에 동감을 느꼈으나 왕봉을 처리하자니 마음에 걸리는지라 이 일을 잠시 제쳐두기로 했다.
왕장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집에 돌아와 서면으로 황제에게 계속 의견을 고하리라 작심했다. 그의 안해는 왕봉이 황제의 외삼촌이고 큰 권세를 누리고 있어 건드리기 힘든 간신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왕봉을 탄핵하는 것을 반대해 나서면서 이런 방법으로는 남편에게 재난만 가져올 것이라고 도리를 따졌다.
"사람은 만족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생활고로 삼으로 짠 헌 이불을 덮고 마주 보며 울던 때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왕봉을 이길수 없다면 관직도 잃고 우리는 이전의 힘든 세월도 되돌아 갈것입니다."
안해의 말을 들은 왕장은 젊은 시절 장안에서 겪어 왔던 힘든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왕장은 젊은 시절 학문을 하면서 힘든 생활을 해왔다. 안해와 함께 허름한 초가집에 살았는데 어느 한번은 왕장이 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는데 집에는 덮을 이불이 없어서 삼으로 이어 만든 삼이불을 덮을수 밖에 없었다. 왕장이 안해에게 사별을 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목숨을 이어갈수 없을거 같소. 자네한테는 정말 미안하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했구려."
그러나 안해는 한편 성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이 꼭 성공할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지금의 병은 쉽게 나을수 있는 것이옵니다. 힘을 내야 할 남자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니 이 어인 일입니까? 당신이 힘을 좀 더 내고 열심히 글을 읽는다면 꼭 관직에 오를 것입니다. 당신의 재능은 지금 조정의 문무백관들중에도 비할 자가 없사옵니다."
안해의 말에 왕장은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었고 온몸에는 식은 땀이 흘렀는데 병이 저절로 나았다. 이때부터 그는 안해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학문에 정진했다. 끝내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황제의 인정을 받아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왕장은 사리가 분명하고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 성품이라 왕봉을 탄핵하는 문제에서는 안해의 권고를 듣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권세가인 왕봉에게 패하게 되었고 옥에 갇혔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의 안해도 남편의 일로 합포라는 곳에 유배를 갔고 왕봉이 죽은후에야 억울함을 밝힐수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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