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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힐 전 차관보] “미국 재무부의 BDA 조치 사전에 몰랐다” 본문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북 핵 6자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한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과의 협상에 대한 소회를 밝혔습니다. 힐 전 차관보는 지난 10일 가진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북 핵 협상대표로 나서게 된 배경과 대북정책을 둘러싼 행정부 내 이견, 북한 측 협상 상대들에 대한 생각 등을 자세히 공개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힐 전 차관보와의 대담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
만나기 한달 전인 2005년6월에 뉴욕에서 열린 비정부기구 토론회에 참석 중이던 북한 인사와 전화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습니다. 당시 뉴욕에 있던 조셉 디트라니 미국 측 협상 부대표가 북한과의 회담 가능성에 대해 북한 인사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북한 측 인사들은 디트라니 부대표에게 미-북 양자회담이 6자회담 재개 발표로 이어질 것임을 내비쳤습니다.
문1) 힐 전 차관보님, 반갑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약 1년 동안 주한 미국대사로 활동하셨구요. 2005년 초부터2009년 초까지는 6자회담 수석대표로 일하셨는데요.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답1) “Well, actually, I think you need to start the story earlier...”
“저는 사실 말씀하신 것보다 더 빨리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한국 문제를 처음 다룬 것은 1985년 이었습니다. 서울의 미국대사관에서 3년간 경제 관련 업무를 담당했었습니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는데요, 그 경험이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문3)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답3) “Yes, I was...when Condi Rice became...”
“네.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부시 행정부 2기 국무장관으로 내정되면서 제게 워싱턴으로 돌아와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라이스 내정자는 구체적으로 제가 미국 측 북 핵 협상 대표직을 넘겨 받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발칸지역 분쟁을 해결한 협상으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4)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 내정자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답4) “Well, at first, I was not happy with the...”
“우선, 한국을 떠나는 데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004년 여름 주한 대사직을 시작해 좋은 출발을 했다고 생각했고, 대사직을 계속 잘 해나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라이스 내정자가 부시 대통령을 대신해 동아태 차관보 직을 제안한 것이고, 이 제안은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5)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로 부임한 시기는 부시 행정부 2기로,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외교를 통한 비핵화 노력을 천명한 때였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1기 때의 강경 노선에서 대화 노선으로 전환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답5) “Well, I think the Bush administration felt the six party process was”
“저는 부시 행정부가 6자회담을 긍정적인 틀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6자회담은 북한의 핵무기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북한의 모든 이웃나라들의 문제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또 6자회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진전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2005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두 가지 매우 큰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외교를 통해 북 핵 문제를 축소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6) 부시 행정부가 대북 강경 노선에서 대화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 소위 말하는 “1기 때의 실패”나, 북한이 2005년 초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6) “No, I think it was simply a feeling that we needed some...”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부시 행정부가 6자회담이라는 좋은 틀 안에서 진정한 진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국은2005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노무현 정부 뿐아니라 일반 한국 국민들도 당시 미국이 왠지 진실하지 않거나, 협상을 통한 해결을 위해 압박을 가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협상에 대한 훨씬 더 진지한 접근법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문 7)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가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와 비교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습니까?
답7) “Well, I don’t think there was any disappointment...”
“부시 행정부가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에 대해 실망하거나, 또는 그와 어떤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워싱턴 내 보다 폭넓은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미국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과 대화할 필요가 있고, 중국을 통해서만 북한과 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미국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독자적 대화 창구를 보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자회담 틀 안에서의 미국과 북한 간 대화 창구는6자회담의 진전을 위한 필수 수단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문 8) 힐 전 차관보님, 당시 부시 행정부 내부에는 대북 외교 노선에 반대한 당국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또 이런 반대 속에서 어떻게 외교 노선을 추진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8) “Well, I think there were many officials within the Bush administration...”
“부시 행정부 내부에 북한과의 협상을 꺼리는 당국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2005년 초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옮겨 간 존 볼튼 당시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 그리고 국가안보회의의 존 루드와 로버트 조셉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북 협상에 매우 회의적이고, 강경 노선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협상을 통한 과정과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10) 이번에는 북한과의 양자 협상에 대해 묻겠습니다. 북한과의 첫 번째 양자 협상에 앞서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요?
답10) “I read a Bob Gallucci’s book, I read some other books...”
“네.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전 북 핵 협상대표가 쓴 책(Going Critical)과 미국평화연구소가 (USIP) 펴낸 북한 관련 책 등을 읽었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 과거 북 핵 과정이 아주 어려웠다는 것과 앞으로의 북 핵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또 전임자인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 등과도 논의했는데요. 요점은 어떻게 6자회담을 소집하고, 회담에서 진전을 이루며, 널리 퍼져있는 비관론을 어떻게 약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6자회담 참가국들이 모종의 원칙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신속한 접근법을 찾아내기 위해 저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 측 협상대표로 임명된 송민순 씨와 협력했습니다. 송민순 대표와의 협력은 결국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문 11) 한국 측 송민순 대표와의 협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11) “Well, we had lengthy discussions together...”
“송민순 대표와 저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방안을 놓고 장시간에 걸쳐 논의했는데요. 합의를 이행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적어도 과정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밝히는 문제는 6자회담 참가국 모두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는 6자회담 참가국 모두에게 과정이 어디로 갈 것인지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노력이 됐는데요. 저의 이런 발상은 (idea) 보스니아 평화협정에서 비롯됐습니다. 데이튼 합의문의 최종판은 아주 두꺼운 책과 같은 분량이었는데요. 이 합의가 이뤄지기에 앞서 원칙을 담은 성명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보다 일반적인 접근법을 위한 동력을 만들 수 있는 성명들에 대한 일부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개념이었습니다
문 13) 김계관 부상과의 만남은 누가 먼저 생각해 낸 겁니까?
답13) “We talked about, we knew the North Koreans would be in...”
“저는 북한 인사들이 비정부기구와 관련해 뉴욕을 방문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 측은 미국과의 양자회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제기한 질문은 미-북 양자회담이 언론을 통한 북한의6자회담 복귀 발표로 사실상 결론 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북한은 당시 미국에 이렇게 말할 준비가 돼 있진 않았지만, 미국과의 양자회담이 이뤄지면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며 6자회담 복귀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문 14) 김계관 부상과의 첫 회담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또 김계관 부상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답14) “We met in a Beijing Hotel owned by the Beijing Government...”
“저와 김계관 부상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베이징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김 부상 등 북한 당국자들은 매우 경직돼 있었고 솔직히 전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진지해 보였는데요. 미리 준비한 대본도 갖고 있었습니다. 회담은 약 2시간 동안 진행됐는데요. 처음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북한이 평양에서 6자회담 복귀를 발표한다는 합의가 이뤄지면서, 나아졌습니다.”
문 15) 김계관 부상과의 첫 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협상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지요?
답15) “That it would be very difficult, and...”
“북한과의 협상이 매우 어려울 것이고, 북한이 모든 제안을 매우 의심스런 태도로 대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문 16) 2005년에 채택된 9.19 공동성명에 관해 묻겠습니다. 이 성명에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이 담겨 있는데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원칙이 만들어졌습니까?
답16) “I don’t recall who came up with the principles...”
“이 원칙을 처음 제시한 사람이 누군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마도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다른 참가국들과의 논의를 토대로 이 원칙을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6자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목표였습니다.”
문 17) 6자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하루 만인 2005년 9월 20일,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BDA 은행을 ‘우선적 돈세탁 우려대상’ 기관으로 지정하고 은행 내 북한 자금을 동결했는데요. 발표 시점이 적절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17) “Well, these efforts, during the time North Koreans were not...”
“북한이 6자회담에 불참하던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핵 계획과 관련한 북한 정권의 돈줄을 막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의 이 같은 노력과 관련해 자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거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당시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미국의 이런 노력이 6자가 9.19 공동성명에 합의한 시기에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불행하지만 우연하게도9.19 공동성명이 합의된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불법 계획들에 대한 북한의 자금 지원을 막는 방안을 모색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북한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들을 불신하고 있거나, 이중게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문 18) 당시 미 재무부가 BDA 은행을 ‘우선적 돈세탁 우려대상’ 기관으로 지정해 발표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답18) “No, I don’t think anyone was aware...”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재무부의 발표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 불법자금의 근원을 확인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문 19) 만일 재무부의 발표를 사전에 알았다면 이를 중단하거나 연기하도록 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답19) “Oh, I don’t know. I think what we in the negotiating side...”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협상 당사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북한에 대한 제재에 반대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재무부의 발표를 중단 또는 연기시키는 것은 제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부시 대통령에게 제기돼야 합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이 당시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20) 힐 전 차관보님, 북한이 최근 공개한 우라늄 농축 시설이 국제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데요. 차관보 재직 당시 북한의 우라늄 농축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로 파악하고 계셨습니까?
답20) “Well, we had a situation where the intelligence was very incomplete...”
“당시 미국은 정보가 매우 불완전한 상황이어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 능력이 강화됐는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또 이라크의 핵 능력에 대한 미국의 관점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능력 관련 문제를 종결하지 않고 계속 관심을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북한의 플루토늄 계획을 다루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하기로 했는데요. 당시 북한의 플루토늄 계획이 매우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는 것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대해 논의하지 않거나, 그럴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합의하지 않은 겁니다.
문 21) 지난 11월 북한이 미국의 핵 과학자,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일행에게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을 때, 놀라셨습니까?
답21) “No, we knew that they had had programs of this kind...”
“아니요. 놀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여러 차례 진상 규명을 요구했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검증이었는데요. 2008년 가을 6자회담을 결렬로 이어지게 한 문제의 일부는 북한이 미신고 핵 시설에 대한 우리 측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시도한 것은 우라늄 농축 시설일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헤커 박사 일행을 초청해 새로운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한 것은 사실상 핵 신고였습니다. 이번 핵 신고는 북한이 앞서 행한 핵 신고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북한은 사실상 거짓말을 한 겁니다. 북한이 거짓말을 한 데 대해 제가 놀랐는지 여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문제를 종결하지 않은 미국의 정책이 정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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