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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이스라엘 총리 취임축하 본문

Guide Ear&Bird's Eye/이스라엘과 모사드(Mossad)

오바마, 이스라엘 총리 취임축하

CIA bear 허관(許灌) 2009. 4. 2. 13:40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런던을 방문 중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일 베냐민 네타냐후 신임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새 정부 출범과 취임을 축하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이란 및 중동 평화 문제를 포함한 현안에 관해 네타냐후 정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을 기대한다면서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굳건한 약속도 재확인했다고 백악관은 전했다.

 

 

 

 

*이스라엘 새 정부 과제와 전망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는 조각 단계에서부터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강력한 견제를 받은 보수세력 중심의 매파 연립정부다.

   네타냐후 총리의 새 정부는 보수 집권당인 리쿠드당을 비롯,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이스라엘 베이테누당과 `유대인의 집'당,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인 샤스당 등 우파 정당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비록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노동당이 합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새 정부가 팔레스타인 정책 등에 강경한 성향을 보이는 정당들로 짜이다 보니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등은 향후 중동평화 진전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 네타냐후 총리는 31일 새 내각 구성을 승인받기 위해 의회에서 출석,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벌일 준비가 됐으며, 모든 아랍권 국가들과도 `완전한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중동평화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내보였다.

   이런 그의 발언에도 불구, 국제사회는 그가 실제로 팔레스타인과 내실있는 평화협상에 나설 것인지 선뜻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 옆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워 해묵은 유대-팔레스타인 민족의 갈등을 해결하자는 방안인 `두 국가 해법'을 수용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두 국가 해법은 2007년 11월 미국 아나폴리스 중동평화 회담에서 채택된 평화정착 방안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팔레스타인에 `제한적인 주권'만을 부여하는 정책의 옹호자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군대의 보유나 다른 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데 반대하고 있으며, 국경통과소 관리권과 항공관제권 등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런 탓에 유럽연합(EU)의 순회의장국인 체코의 카렐 슈바르첸베르크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의 새 정부가 `두 국가 해법'을 따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네타냐후 정부가 들어서면 중동평화 진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감을 표명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피랍병사= 이스라엘 새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하마스와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1월 18일 22일간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을 종결한 이후 이집트 중재로 하마스와 휴전 협상을 벌였지만,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협상이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한 것은 에후드 올메르트 정부가 2006년 6월 가자지구로 납치된 이스라엘 피랍병사인 길라드 샬리트 상병의 석방 문제와 휴전을 연계해서 풀어가겠다고 방침을 정한 게 주된 이유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은 2년 10개월째 억류생활을 하고 있는 샬리트 상병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하마스가 휴전의 핵심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국경 개방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샬리트 상병과 팔레스타인인 재소자들을 교환하는 협상을 벌여왔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올메르트 정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네타냐후 정부는 하마스와의 휴전협상이나 샬리트 상병의 석방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법으로 내놓고 있지 않다.

   다만,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2월 총선 때 자신이 집권하면 하마스 체제를 붕괴시키겠다고 공언했던 점으로 미뤄 새 정부는 하마스와의 협상보다는 강공 정책을 택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새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은 극우정치인 아비그도르 리베르만도 네타냐후 총리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하마스와의 갈등이 고조될 경우 제2의 가자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타냐후 정부 순항할까=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의 주요 연정 파트너는 리베르만 외무장관의 이스라엘 베이테누당과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의 노동당이다.

   베이테누당은 극우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노동당은 중도좌파 정당으로 분류되고 있는 만큼, 두 정당의 성향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 때문에 이들 정당은 향후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외부적으로 오바마 행정부와 조율하면서 내부적으로 좌우로 치우친 두 정당을 조화시키면서 정부를 이끌어가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은 셈이다.

   베이테누당과 노동당 중 한 정당만이라도 연정을 탈퇴하면 네타냐후 정부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네타냐후 총리와 리베르만 장관이 꾸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불투명하다.

   이집트의 싱크탱크인 알-아흐람 정치정략센터의 이마드 가드 박사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네타냐후 총리가 4년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으로 본다"고 단언했다.

   아흐람 센터에서 이스라엘연구 분과 수석을 맡고 있는 가드 박사는 "네타냐후가 오바마 행정부의 압력으로 팔레스타인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리베르만은 연정 탈퇴를 선언할 것"이라며 "리베르만의 당이 탈퇴하면 연정은 무너지고 결국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0년만에 권좌복귀 네타냐후는 누구

이스라엘의 32번째 정부를 이끌게 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1996년 만 46세의 나이로 최소연 총리가 됐던 강경 보수파 정치인이다.

   1999년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 아랍 강경일변도 정책을 구사했던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달 10일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었던 카디마당에 1석 차로 패했지만,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아 10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이스라엘인들 사이에 `비비(Bibi)'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네타냐후 총리는 선거기간 내내 자신이 집권하면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이란의 대리세력'인 하마스 체제를 와해시킬 것이라고 공언했고, 카디마당이 주축이 되어 추진해왔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도 재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6주일 간의 연정 구성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평화협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약속하고, 아랍권과의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건설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이를 지지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의 갈등을 예고했다.

   1949년 10월 이스라엘에서 출생한 네타냐후는 사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1967년 귀국해 최정예 특수부대원으로 군 복무를 하던 중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으로 납치된 벨기에의 사베나 항공기 구출작전에 참여했다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는 1976년 팔레스타인 무장대원들에 의해 납치된 프랑스 여객기를 구출하기 위한 `엔테베 작전'에서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친형 요나탄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테러리즘에 대한 공부에 전념해 3권의 테러 관련 전문서를 내기도 했다.

   대위로 전역한 네타냐후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건축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1982년 주미 부대사로 정계에 입문해 1988년에 초선 의원이 됐다.

   그는 2003년 아리엘 샤론 총리의 연립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다가 2005년 9월 샤론 총리가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철수를 강행한 데 반발해 장관직을 사임한 바 있다.

   그의 리쿠드당은 2005년 11월 샤론 총리가 지지자들을 이끌고 탈당해 카디마당을 창당하는 바람에 이듬해 총선에서 고작 12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었다.

   네타냐후 대표는 미국식 억양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세번째 부인 사라와의 사이에 자녀 2명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두고 있다.

 

Benjamin Netanyahu

Benjamin Netanyahu
Netanyahu has a talent for political survival

Israeli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is one of the most right-wing and controversial leaders in Israel's history.

He became premiere in March 2009 for the second time, after becoming the youngest person to hold the post in 1996.

Three years later he lost office after defeat at the polls to Labour.

He subsequently lost the Likud leadership to Ariel Sharon, though he served as a sometimes rancorous member of Mr Sharon's cabinet.

His chance came again in 2005, when Mr Sharon - just before a massive stroke that has left him in a coma - split from Likud and set up his new centrist party, Kadima.

Mr Netanyahu won the Likud leadership and became a trenchant critic of the Kadima-led coalition and Mr Sharon's successor, Ehud Olmert.

KEY CAMPAIGN POLICIES

Iran: considers it Israel's greatest threat and wants to thwart any nuclear weapons plan
Hamas: has called for its removal from Gaza, and an end to the threat of rockets fired into Israel.
Peace process: has pledged to work with the US, and wants to pursue a 'workable peace' with Palestinians but not the creation of a Palestinian state

Mr Olmert became engulfed in a mire of sleaze allegations and was unable to win back credibility or popularity after the disastrous 2006 Lebanon war.

The Israeli military offensive against Hamas in the Gaza Strip, launched in late December 2008, slightly narrowed Mr Netanyahu's lead over his rivals in the 10 February election.

Although Kadima narrowly defeated Likud in the poll, it was Mr Netanyahu who President Shimon Peres asked to form the next government.

Land for peace

Mr Netanyahu's three-year premiership was brief but dramatic.

His election, by the narrowest of margins, represented a major turning point in Israeli politics.

Known as Bibi to his friends and enemies alike, he was the first Israeli leader to be born after the creation of the Jewish state.

Politically, he positioned himself to the right of previous leaders of the secular centre-right Likud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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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ok at the career of Benjamin Netanyahu

To his supporters, he came across as young, handsome, energetic, articulate in English and a master of how to handle the Western media.

But as prime minister, Mr Netanyahu, who had said he would not give up land controlled by Israel for peace, did just that under US pressure.

Despite his antagonism towards a peace process that might lead to the creation of a Palestinian state he handed over 80% of Hebron in January 1997 to Palestinian Authority control and signed the Wye River Memorandum on 23 October 1998 outlining further withdrawals from the West Bank.

This alienated his supporters on the right. At the same time, he did not bend sufficiently to keep the support of those in Israel who favoured a land-for-peace deal with the Arabs.

His critics said a more seasoned politician could have avoided many of the difficulties in the first place.

Mr Netanyahu survived rather than prospered, and lost office in May 1999 after he called elections 17 months early.

Life in US

Mr Netanyahu's inexperience reflected his fast rise to power and his long sojourns away from the ruthless and rowdy world of Israeli politics.

LIFE AND TIMES
1949: Born in Tel Aviv
1967-73: Serves as soldier and commando captain
1984: Becomes ambassador to UN
1988: Enters Knesset and cabinet
1996: Becomes prime minister
1999: Loses election
2002-3: Serves as foreign minister
Feb 2003 to Aug 2005: Serves as finance minister, resigning over withdrawal from Gaza
December 2005: Wins back the leadership of the Likud party
March 2009: Becomes prime minister

When he was a teenager, his family moved to the US where he completed his education.

Back in Israel, he spent five distinguished years in the army, serving as a captain in an elite commando unit.

His brother, Jonathan, became a posthumous hero when he was killed leading a raid against a hijacked airliner in Entebbe, Uganda, in 1976.

Out of the military, Mr Netanyahu returned to the US, taking courses at Harvard and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In 1981, he secured a post in the Israeli embassy in Washington, where his friend and future Israeli Foreign Minister, Moshe Arens, was ambassador.

Overnight, Mr Netanyahu's public life was launched.

He became a familiar face on US television and an effective advocate of the Israeli cause.

Mr Netanyahu was equally successful in this respect while serving as Israel's ambassador at the United Nations.

Only in 1988, when he returned to Israel, did he become involved in domestic politics, winning a seat in the Knesset and becoming deputy foreign 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