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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전처 성혜림씨 오빠 성일기씨 실명소설 "북위 38도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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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전처 성혜림씨 오빠 성일기씨 실명소설 "북위 38도선"

CIA bear 허관(許灌) 2009. 3. 15. 14:26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인 성혜림(2002년 사망)과 그의 언니 성혜랑(72) 씨의 오빠 성일기(74, 최연소 빨치산 유격대) 씨를 주인공으로 한 실록소설이 최근 국내에서 출판됐다. 성일기 씨의 50년 지기로, 전직 의사이자 아동문학가인 정원식(74) 씨가 6·25전쟁 때 빨치산 유격대로 활동했던 성일기씨의 구술을 '북위 38도선'이란 책으로 펴낸 것. 소설은 성 씨의 빨치산 활동을 중점적으로 기술했으며 성일기씨와 혜랑, 혜림 씨 등을 실명으로 표시했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성 씨는 아버지 성유경 씨와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기자였던 어머니 김원주 씨가 6·25 때 여동생들을 데리고 월북함에 따라 홀로 남한에 남았다.  성일기씨는 혜랑 씨와는 그가 1996년 서방으로 망명하기 직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주선으로 모스크바에서 극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랑 씨의 아들 이한영 씨는 1982년 남한에 귀순했으며, 1996년 이모인 성혜림이 서방 망명을 시도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97년 12월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됐다.
성일기씨는 조카의 피살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뇌혈관 장애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
혜랑 씨는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에서 정보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혜랑 씨는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작가동맹 활동을 하다 1976년부터 1996년까지 동생 혜림과 김 위원장 사이의 장남인 김정남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정 씨는 현재 혜랑 씨의 거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오빠와 연락이 닿고 있다고 전했다. 정 씨는 "혜랑 씨가 두세 달 전 오빠를 통해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전달해 줬다"면서 "혜랑 씨는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했던 만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글은 최연소 빨치산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실록 소설이다. 강원도 사창리 제200지대 창설 때 성일기는 빨치산 분대장이었다. 양양에 집결하여 방대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대가 거의 전멸하는 바람에 그는 빨치산 소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 뒤 남도부 유격대 사령부가 신설되자 그도 거기에 배속됐다.
1950년 6월 25일 남도부 빨치산 유격대는 인민군의 전면 남침과 더불어 해로로 임원진에 상륙한다. 그들은 동해안을 종주하여 경상남도 언양에 이르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참패당하자 남도부 부대는 신불산 일원에 고립된다. 인민군의 재침을 믿은 그들은 신불산에 빨치산 사령부 숙영소를 설치하고, 예하 3개 전투 부대를 관할 지구로 파견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성일기는 사령부 연락원이 되었다가 비범한 전투력을 인정받아 지도원을 거쳐 작전 참모가 된다.
한편 국군은 이들에게 부산 교두보의 주요 보급로인 군사 도로가 밤낮으로 공격당하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다. 1950년에는 군경 합동 토벌대, 1951년에는 정규군인 백선협의 야전 전투 사령부 군에게 두 차례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번번이 남도부 사령관의 지략으로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남하 후 북으로부터 병력 보충은 물론 아무런 무기의 지원도 없었다. 1950년 한때 300여 명에 이르던 병력은 1953년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으로 급격히 줄어 활동이 제한되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10배가 넘는 군경 토벌대 병력이 그들을 포위하여 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도부 사령관은 이따금 참모장 성일기에게 '이 전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 누군가가 이 진상을 써 남겨야 한다.'며 푸념했다.
빨치산들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근 지역으로 보급 투쟁을 자주 나갔다. 그럴 때면 토벌군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아서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다. 그들은 보급 투쟁이 점점 어려워지자 농민들의 식량을 훔치게 되고, 자신들의 행위가 도둑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의기소침해진다. 이러한 와중에 휴전 협정이 성립되고, 남북 어디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협상했는데, 북한은 자신들이 남파한 빨치산 유격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53년 9월 동해 남부 빨치산 유격대는 부대를 해산하고, 남도부 사령관은 성일기의 본가가 있는 창녕으로 탈출했다. 성일기는 사령관이 왜 명예스러운 자진을 택하지 않고 도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령관이 창녕의 성일기의 본가에서 숨어 지내다가 대구로 떠난 후 성일기는 특무대에 체포된다. 특무대에서 사령관의 거처를 자백하는 일로 고민하던 성은 가족들의 안전 때문에 결국은 연락처를 자백하게 된다. 그러나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령관이 잡혀온 것을 보고 성일기는 그가 잡힌 것이 계획적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성일기를 구명하려는 사령관의 의도였음을 알고 당황한다. 빨치산 고위 간부들이니 잡히면 둘 다 틀림없는 사형이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사령관은 성일기를 살리기 위하여 마지막 도박을 한 것이다. 사령관의 계획은 성공하여 결국 성을 살려냈다. 빨치산 고위 지휘관으로서 김창룡 방첩 부대장의 손을 거쳐 목숨을 건진 인물은 성일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사령관은 사형 언도를 받고 몇 해 후 처형되었다. 그가 전해들은 사실은 사령관이 처형되기 직전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죽었다는 것이다. 인민 공화국을 찬양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을까? 그가 찬양한 것은 그가 꿈꾸던 첫사랑 인민 공화국이지 살기등등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한에 남겨진 성일기는 이산 가족이 되었다. 전쟁 중에 아버지 성유경은 혜림과 혜랑 두 자매를 데리고 월북했지만, 대지주 신분이라는 이유로 문전 박대를 당했다. 어머니도 중앙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출신 계급 때문에 지방 신문으로 좌천됐다가 결국에는 그 일마저 잃었다. 월북한 이남 지식인들은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대부분 숙청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성일기의 가족은 남로당계 대숙청 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큰 누이 성혜랑은 김일성 대학 물리수학과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들 이일남과 딸 이일옥을 두었으나 남편을 교통 사고로 잃었다. 작은 누이 성혜림은 월북 작가 이기영의 큰아들과 결혼하여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진취적인 성혜림은 영화 배우를 지망하여 성공을 거두더니 영화광인 김정일(현 북한 국방 위원회 위원장)과 사랑에 빠진다. 성혜림은 전 남편과 이혼하고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 김정남을 두었다. 김정남의 보육을 위해 외할머니인 김원주가 김정일 관저에 들어갔고, 후에 김정남이 자라자 성혜랑이 남매를 데리고 가정 교사로 입주했다. 성혜랑은 1982년 김정남이 쥬네브로 유학 갈 때 따라갔다. 그 때 같이 갔던 아들 이일남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가 14년 만에 서울에서 어미에게 전화했다. 그 동안 서울에 살면서 외삼촌인 성일기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이상했지만, 이름도 이한영으로 바꾸고 얼굴도 성형하였다고 했다. 그의 존재가 국외로 알려지는 것을 꺼려서 그랬다는 말이 어딘지 어색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어미 성혜랑에게 전화 통화를 했다는 것은 계획된 조작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어미는 아들의 읍소에 져서 탈북을 결심했고, 그 때문에 성일기가 모스크바까지 날아가서 탈북 여부를 확인했다. 1996년 그녀는 탈북했지만 그들 모자의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 이일남(이한영)이 갑자기 1997년 2월 괴한에게 피살된 것이다. 그 이후 성혜랑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유럽 어디엔가 숨어서 산다.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진 성혜림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1974년 이후 모스크바에서 요양하며 외롭게 살다가 2002년 운명했다. 성일기의 어머니인 김원주는 1994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고 한다. 성일기는 올해 74세가 되었고,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누이동생 성혜랑이 남아 있다.

 "잘 듣거래이.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젊은 날 혈기 탓으로 이 길에 들어섰다. 정열도 남달랐고 이상에 불탔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택한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망정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민족이 분열하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분단은 무조건 막았어야 했다. 이 전쟁도 참말로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 이제 와서 누구 책임이냐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누가 시작했든지 간에, 이것을 막지 못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지, 어떤 원한이 있었든지 간에 민족 간의 반목과 분열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손을 잡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심 없이 이야기해서 안 될 일이 어디 있겠나? 전쟁 같은 것은 절대로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후세에 남겨 교훈으로 삼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전쟁을 막지 못한 우리들에게 남겨진 의무이다."(북위 38도선 책 속에서)

 

 

 

1.김정일 국방위원장 첩 성혜림(成惠琳:1937년-2002년, 65세 사망)
성혜림은 1937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창녕 성(成)씨 부자집 집안 부친(父親) 성유경(成有慶,1982년 사망)과 개벽 잡지 기자출신 김원주(김원추,94년 사망)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 서울에서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을 다니다 1948년 부친 성유경(成有慶)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1951년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 작가 이기영(李箕永, 전 문예총위원장 84년 사망)의 장남 이평(李平)과 결혼해 딸 이옥돌을 낳은 뒤 다시 평양연극영화대학 연출과에 입학했다
성혜림은 이 대학 졸업반 때 김일성주석이 호평한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 첫 주인공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인민상>를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화 <백일홍> <인민교원> <안개 흐르는 언덕>등에서 주인공을 맡아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성혜림은 프놈펜 국제영화축전에 두 차례 참가하면서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과 김일성 주석을 자연스럽게 접촉하도록 유도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계기가 됐다고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씨는 1999년 펴낸 자서전 <소식을 전합니다>에서 밝히고 있다
성혜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있던 지난 70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숨은 아내:동거녀>가 됐고 1년뒤 김정남(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을 낳았다
성혜림은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났고 김정남은 성혜림의 어머니인 김원주와 언니 성혜랑이 도맡아 키웠다
성혜림은 1996년 2월 언니 성혜랑과 성혜랑씨의 딸 이남옥등과 함께 신병 치료차 머물렀던 모스크바를 떠나 스위스로 나온 후 잠적했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보호 속에 있으며 성혜림은 2002년 5월 나이 65세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이일남(이한영). 김정남. 이남옥 

2.성혜랑

성혜랑(成蕙琅, 1935년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가이며, 김정일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 영화배우 성혜림의 언니이다.

1996년북조선에서 탈출하여 망명했으나, 망명한 나라가 어디인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경상남도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부부가 함께 좌익 운동을 했던 성유경김원주의 맏딸이다.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부모의 월북에 동행하여 1948년 북조선으로 갔다.

월북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전위〉(1974) 등 단편소설 위주의 작품 활동을 했다. 망명한 뒤 남한에서 출간한 수기 《소식을 전합니다》(지식나라, 1999), 회고록 《등나무집》(지식나라, 2000)이 있다.

이들 수기에는 북조선에서 작가 생활을 한 성혜랑이 가까이에서 직접 본 월북 예술인들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어, 소식을 알 수 없던 김용준을 비롯하여 배운성이정수 부부 등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알려지기도 했다.

슬하에 1남 1녀로 이일남과 이남옥을 두었으나, 남한으로 망명하여 이한영으로 이름을 바꾼 아들은 1997년 경기도의 집 앞에서 피살되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진 경남 창녕성씨 전통가옥의 일부가 경남도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