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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황원 전(前) MBC PD 본문

Guide Ear&Bird's Eye/납북자와 월북자 자료

납북자 황원 전(前) MBC PD

CIA bear 허관(許灌) 2009. 3. 15. 08:06

 영동 MBC(現,강릉 MBC)의 1970년 5월 20일자 이사회(의장 이방우) 회의록에 따르면 당사 납북된 사원 황원(방송부 근무-MBC PD), 김봉주(보도부 근무, 기자)에 대해 영동 MBC 휴직 발령을 냈다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북사원 휴직발령 승인의 건

이사회장 이방우는 정관규정에 의하여 의장이 된다.  의장은 의장석에 좌정하여 부의안건의 설명을 구한 바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로부터  작년(1969년) 12월 11일 KAL기 납북사건으로 피랍된 본 회사사원 황원(방송부 근무), 김봉주(보도부 근무) 2인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금일까지 만 6개월이 경과 되었으며 국제기구를 통한 송환촉구는 그 실효가 언제 나타날지 막연한 형편이며, 특히 피랍사원은 세칙에 의하여 처리될 적당조항이 없는 특수한 경우이므로  부득이 이사회의 의결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어 본회의 소집을 회장에 요청한 바를 고하고 좌기와 여히 조건부 휴직 발령을 의결해 줄 것을 동의한 바 전원일치의 찬동으로 의결된다.
  1. 1970년 5월20일 의결일자로 휴직발령하되 송환되는 경우 송환된 상태에 대한 당국의 의견을 참작하여 재고할 수 있다.
  2. 휴직발령 익월부터 급료지출을 중지한다.
  서기 1970년 5월20일
  영동방송 주식회사
  의장 이사회장 이방우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
  전무이사 김준영〉

 

 

                                                                                         황원 MBC PD의 납북 전(前) 모습 

 

 

                                                        황원 PD의 어린시절 가족 사진,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황원 PD이다       

 

 

                                                                                              1968년 황원 PD 부부의 모습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 여객기(YS-11) 납치

1.1969년 12월 11일날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YS-11)납치 사건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직원 성경희. 정경숙등 4명의 대한항공기 직원과 승객 47명 전체 인원 51명이 탄 대한항공 여객기(YS-11)가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5분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으로 가장 맨 앞좌석에 앉아있던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당시 나이 42세)가 기장실로 들어가 권총으로 기장 유병하씨등을 협박에 의해 납치되돼 이날 오후 1시 18분 원산 근처 선덕 비행장에 착륙했다

납치사건 다응날 북한 김일성 정부는 유병하 기장과 최석만 부기장등 두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통해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사건 발생 65일만인 1970년 2월 14일 납북 민간인 중 39명(남자 32명. 여자 7명)만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고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승무원 성경희. 정경숙등 그리고 승객 황원. 채헌덕.김봉주.장기영. 임철수. 이동기. 최정웅. 조창희(고정간첩)등 12명은 북에 남았다

2001년 2월 26일 제3차 이산가족 남측 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이후덕(여, 당시 나이 77세 성경희의 어머니)씨는 26일 당시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납북된 딸 성경희(여, 당시 나이 55세)씨를 만난 자리에서 항공기 기장이었던 유병하씨와 부기장 최석만씨가 현재 북한 공군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부기장 최석만씨는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성경희씨와 함께 납북된 여승무원 정경숙씨도 평양에서 성경희씨의 인근에 살면서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고 성경희씨가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승객 7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대한항공 여객기(YS-11) 납북사건 북한에 생존자들 자료
(1)1970년 2월 14일 남북 교환 당시 북한정부에 의하여 강제로 남아야 했던 사람들 명단
유병하(기장). 최석만(부기장). 성경희(여승무원). 정경숙(여승무원). 황원(승객). 채헌덕(승객). 김봉주(승객). 장기영(승객). 임철수(승객). 이동기(승객). 최정웅(승객). 조창희(승객-고정간첩)등 총 12명
(2)생존자 명단 자료
ㄱ.유병하(유병화)---납치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 기장(조종사), 현(現) 북한공군 근무
(ㄱ)당시 38세. 서울용산. 조종사
(ㄴ)한국 기독교와 역사 "11호"를 내면서
당시 일행 중에 유병하 공군소령, 복현묵 공군소령이 참가했다
유병하 소령은 수년 후 KAL기로 옮겨 대한항공여객기 YS-11의 기장이 되어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중 무장괴한에 납북되어 생사가 궁금하다가 지난해 말 이산가족방문단에 끼여 평양을 찾아간 여승무원 어머니에 의해 생사 확인 되었다

ㄴ.최석만---납치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 부기장(부조종사), 현(現) 북한공군 근무
당시 37세, 서울 성북, 부조종사
-북한에서 1남 1녀 자녀를 두고 있음

ㄷ.성경희
당시 23세 승무원, 서울 성북, 스튜어디스
-(서울)창덕여고 졸업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 졸업
-1968년 대한항공기 여승무원 입사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여객기(YS-11) 납치와 납북
성경희씨는 사건 당일 비번이었으나 창덕여고 동창생인 정경숙씨가 "강릉에 같이 가자"고 제의해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後身) 구구전선 "구국의 소리" 방송국 "신서연" 가명으로 방송요원으로 활동함
-1992년 8월 성경희씨는 평양방송에 출연해 "의거입북용사"라며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소개함
-3차 이산가족 교환 방문때 평양에서 어머니 이후덕씨와 상봉
ㄹ.장경숙
당시 24세 승무원, 서울 영등포구, 스튜어디스
-(서울) 창덕여고 졸업
-연세대 도서관학과 졸업
-1969년 대한항공사 입사
-1969년 12월 11일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대한항공여객기(YS-11) 납치와 납북


(3)미확인 생존자 명단
ㄱ.김봉주 당시 27세 승객, 강원 강릉. 기자 출신
ㄴ.이동기 당시 47세 승객, 경남 밀양. 합동연쇄소
ㄷ.임철수 당시 49세 승객, 강원 양구. 회사원
ㄹ.장기영 당시 40세 승객, 경기 의정부. 요식업
ㅁ.채헌덕 당시 37세 승객, 강원 강릉. 병원장
ㅂ.조창희(조욱희) 당시 42세 승객, 경기 평택---당시 발표 때 고정간첩으로 함
ㅅ.최정웅 당시 28세 승객, 강원 원주. 한국슬레이트
ㅇ.황원 당시 32세 승객,강원 강릉. 아나운서 출신

http://blog.daum.net/007nis/9907587

 

 

*북으로 보내는 편지 -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1)

남한에 사는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과 이들이 북한에 끌려간 가족들에게 보내는 ‘북으로 보내는 편지’ 오늘은 그 일곱 번째 순서로 지난 69년 남한 대한항공을 타고 있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과 그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이땅에 태어난 것이 비극인 아버지!
식민치하에 년이란 세월이 지나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아버지와 우리가족들은 36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뚫린 아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69년 12월11일 당신은 출장 중에 공중에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시작하였고 1970년2월14일 39명만이 송환이 되고 12명이 돌아오지 못하여 또 한 번 찢어지는 아픔을 가져야 하는 우리 가족들의 운명 !

정부는 혹시나 간첩이 되어 돌아오지 않나 감시나 하고 자신들이 보호했어야할 우리를 오히려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이 모든 갑작스러운 충격에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편집 성 인격 장애와 정신 불안이 되었으며 우리 가족은 참으로 험하게 살아왔습니다.

억울하고 통탄스러워도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침묵만을 강요당했던 우리가족들! 할머니는 평생 당신을 생각하시면서 눈물과 한 만을 가슴에 안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빼앗기기만 하고 무지와 무관심 속에 살아왔습니다. 나라가 아닌 집단이라고 생각하였기에!"나는 국민이 아닌 세금이나 내주는 노예이다"라고 포기하며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금강산이 열렸던 때, 개성공단까지 육로가 열렸다고 할 때, 한반도기가 나부끼며 우리의소원은 통일이라 남과 북이 어우러져 부르짖을 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도 잠시 애써 잠재웠던 저의 마음은 더 크게 아픔으로만 다가 왔습니다.

과거에는 남북대치관계로 어쩔 수 없이 침묵만을 강요당했고, 지금은 통일의 방해자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다 아는 납치사건인데도 북한에는 납북자가 없다는 말에, 우리들을 먼저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우리가족들을 골치 덩어리로만 바라봅니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 발 서울 행 대한항공 ys11기를 타고 출장을 떠난 황원씨는 공중에서 북한으로 납북되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납북된 남한주민들의 수는 승무원 4명을 포함해 모두 51명이였습니다. 당시 남한의 치안국장은 대한항공의 납북은 북한 간첩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자 북한당국은 대한 항공 탑승객 51명중 39명을 남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러나 송환자 명단에는 황원씨를 비롯해 기장과 승무원 등 12명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아 납북 피해자 가족들은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이들 12명이 자진해서 월북했다고 주장 했을 뿐 별 다른 해명은 없었다고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는 말했습니다.

 

황인철: 북한에서 얘기하는 이유가 정당한 게 있는 것은 아니고 그쪽에서 주장하는 것은 의거 입북이라고 하고 당시 남한에서도 유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월북자는 곧 간첩 그리고 가족들은 간첩의 가족들 이라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황인철씨는 당시 3살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을 못하지만, 자라오면서 아버지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황인철: 가슴이 아플 정도가 아니라 피눈물 날 일이다. 3, 4학년쯤 돼서 아버지가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미국에 있는 줄 알았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납북된 사실을 얘기했더니 납북이 아니라 월북 간첩 등으로 소문이 났다...

 

1969년 12월 강릉발 대한항공을 탔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기자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의 편지 내용 이였습니다. 황원씨와 황인철씨의 사연은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북으로 보내는 편지 -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 (2)

남한에 사는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과 이들이 북한에 끌려간 가족들에게 보내는 ‘북으로 보내는 편지’ 오늘은 그 여덟 번째 순서로 지난 69년 남한 대한항공을 타고 있다가 납북당한 문화방송 황원기자의 사연과 그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을 지난번에 이어 계속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가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살아계신다고 하면 달을 보면서 "지금 아버지도 저 달을 보고 계시겠지" 하며 그리움 만이라도 달래 수 있으 련만 돌아가셨다면 제사라도 올릴 수 있으련만 이런 작은 소망조차도 막는 무리들이 원망스럽고 원통합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평상시 제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 하신 것을"네 애비를 생각하면 내 젖 가슴이 지금도 짜르르 하다"고 저를 끌어안으시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말씀하신 한 서린 외마디!
8년전 돌아가시면서
"나를 화장 시켜라. 그리고 뿌려라 응어리진 평생의 한을 풀어 버리련다."
하신 할머니께 둘째인 당신이 돌아오면 눈물을 흘릴 장소가 필요하다고 식구들이 애원하였기에, 눈물과 함께 안장을 허락하신 할머니!
할머니무덤 옆에 아버지의 자리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해자는 없어지고 피해자만 남아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 현실에 당신의 주검만이라도 확인된다면 이곳에 묻고 곁에 나란히 모시고 싶습니다.
두 분이 함께 나란히 누워 계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 할머니! 아버지! 두분 만이라도 평생 보고팠던 한 만은 없어지시겠지요?

 

1969년 12월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출장을 떠났던 문화방송기자 황원씨는 공중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돼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당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자 납북자 51명중 39명을 남한으로 송환했지만 나머지 황원씨를 포함한 대한항공 승무원들 12명은 북한에 억류했습니다.

또 한 차례 시련을 겪어야 했던 황씨의 가족들은 남한정부의 도움은 커녕 오히려 정부의 감시대상이 됐었다고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는 회고합니다.

황씨의 가족을 버린 것은 정부만이 아니었습니다. 황원씨가 몸담고 있던 문화방송도 황씨가 출장 중에 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씨의 가족들에게는 냉담하기만 했다고 황인철씨는 말합니다.

 

황인철: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상사가 있다. 그의 회의록에 의하면 12월10일 ‘본인은 방송부장을 겸하고 있던 터라 본인을 대신하여 황원씨를 출장토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본사에 출장을 가다가 이 사간이 발생했다.

 

황씨가 속해있던 문화방송측은 황원씨가 출장 중에 당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황씨를 휴직처리하고 지급하던 급여마저도 중단해 황씨의 가족들은 살길이 막막했었다고 황인원씨는 말합니다.

얼마 전 황인원씨는 아버지에 대한 배상을 문화방송 측에 요청했지만 지금까지도 문화방송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황인원: 87년도에 군대에 입대를 해야 돼서 납북자 가족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했다. 요번에 사건이 마무리 되지 않았으니 임금과 퇴직금을 요구하자고 했다. MBC측에서 나온 대답은 87년에 사망처리가 돼서 시효가 지나 받을 것이 없다.

 

황씨 가족들은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이 가슴을 앓으며 살아왔습니다. 황원씨의 어머니도 자식을 잃은 한을 품고 얼마 전 세상을 떴습니다.

지금까지 지난 1969년 납북당한 문화방송기자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의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황원 PD 납북 직후 아내와 어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의 아내가 안고 있는 아기가 갓 100일이 지난 황원 PD의 딸. 

 

 

황원 PD의 아들 황인철씨가『북에 계신 아버지가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기사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던 가족사진. 2005년 봄, 경기도 부천의 생태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