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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 납북된 강릉MBC 황원 PD 가족의 비극(월간 조선) 본문

Guide Ear&Bird's Eye/납북자와 월북자 자료

심층취재 - 납북된 강릉MBC 황원 PD 가족의 비극(월간 조선)

CIA bear 허관(許灌) 2009. 3. 15. 09:22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정부는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아직도 납북자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없어지고 피해자만 남아 있는 이 현실에서 당신의 무덤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지난 12월9일 북한인권국제대회장. 1969년 KAL기 拉北사건 때 납북된 아버지 황원(전 영동MBC PD)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아들 황인철 납북자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황씨는 『(우리 납북자 가족들은) 과거에는 冷戰 때문에 침묵했고, 지금은 통일의 방해자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며 『나는 세금을 내는 노예지, 국가의 국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납북된 강릉MBC PD 황원
 

황원 PD의 납북 전 모습.

  『엄마!』
 
  『너 내 딸 맞아?』
 
  2001년 2월26일 오후 4시30분, 평양 고려호텔. 1969년 12월11일 납북된 대한항공 승무원 성경희(당시 55세)씨가 32년 만에 어머니 이후덕씨를 만났다. 성경희씨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인 남편 임영일(당시 58세)씨와 딸(당시 26세), 인민군 복장의 아들(당시 24세)을 상봉장에 데리고 왔다. 32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딸은 부둥켜안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으로 생방송되었다. TV로 모녀의 상봉을 지켜보며 목 놓아 울었던 사람이 하나 있다. 황인철(40)씨. 1969년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납북돼 돌아오지 못한 황원 영동MBC(現 강릉 MBC) 방송부 PD의 장남이다.
 
  『北에서 어떻게 사시는지도 모르는 아버지 생각에 TV를 보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남쪽의 어머니와 북쪽의 딸이 만나는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렇게 손 잡고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습니다. 나는 왜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는지 너무 억울했습니다』
 
  당시 세 살이었던 황인철씨는 이제 아내 박옥순(39)씨와 유진(8)·유정(6)·유림(4) 딸 셋을 둔 家長이다.
 
  『이 기사가 나가면 혹시 북녘의 아버지도 읽어 볼 수 있을까요? 우리 가족사진도 꼭 기사에 내 주십시오』
 
  황인철씨의 첫마디였다. 2005년 11월3일, 경기도 부천시 역곡역 인근 식당에서 황인철씨를 만났다. 황씨는 맵시 있는 양복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빛 바랜 사진 속의 황원씨와 체격·생김새가 비슷했다. 황씨는 『남들이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납치되신 후에, 어머니 혼자서 저랑 제 동생을 키우셨어요. 아버지가 북한에 납치되는 바람에 제 인생은 정말 이상하게 꼬였습니다』
 
  1969년 12월11일 오후 12시25분. 강릉發 김포行 국내선 대한항공 YS-11기가 속초 출신의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공중 납치됐다. 승객 47명과 기장 유병하씨, 승무원 성경희씨 등 총 51명을 태우고 있던 대한항공 여객기는 기수를 北으로 돌렸다.
 
  남한의 여객기가 간첩에 의해 납북됐다는 소식이 전국에 알려졌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강릉·제주 등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정부는 납북자들의 송환을 위한 교섭에 나섰다.
 
  1970년 2월14일, 납북된 51명 중 승객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南으로 돌아왔다. 세 살배기 아들을 등에 업은 채 황원 PD의 아내 양석례씨를 비롯한 황원씨의 가족 모두는 그날 판문점에 있었다. 정부의 끈질긴 교섭에도 불구하고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승무원 정경숙·성경희, 자영업자 이동기, 회사원 임철수, 회사원 장기영, 회사원 채정웅, 의사 채헌덕, 영동MBC 카메라기자 김봉주, 영동MBC PD 황원 등 11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정신장애 생겨
 
황원 PD의 어린시절 가족사진,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황원 PD다.

  황원씨의 동생 황광웅씨는 『51명이 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막상 넘어온 건 39명뿐이어서 온 가족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했다. 황광웅씨는 『당시 정부 관계자들도 왜 안 돌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황원씨는 서울大 철학과를 중퇴하고 방송국에 입사했다. 네 가족이 살기에 어렵지 않은 가정형편이었다.
 
  家長이 납치되자 순식간에 단란했던 「네 가족」은 생활고를 걱정해야 하는 「세 가족」이 되었다. 그들을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픔을 다 이겨 내기도 전에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챙겨야만 했다. 황원씨의 아내 양석례씨는 대한항공에서 받은 보상금 110만원과 知人(지인)에게 빌린 돈 40만원을 합쳐 서울 대방동에 하숙집을 차렸다. 방송국 PD의 편안한 「사모님」이었던 양씨에게 하숙집 주인의 역할은 쉽지 않았다.
 
  황인철씨는 『어머니가 하숙집 운영을 4년 넘게 했지만 집안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하숙을 치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찾으려 애쓰셨지만, 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어르신들한테 들어 보면 학생들 밥 해주고 빨래까지 도맡아 하면서 자주 「허리가 아프다」고 했답니다. 저는 어려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부엌에서 일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저한테 짜증을 많이 내셨던 것 같고요, 심지어 저한테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안 계신 설움을 저한테 종종 푸셨던 것 같습니다』
 
 
  『너, 간첩 아들이지』
 
1968년 황원 PD 부부의 모습.

  황인철씨는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건 경제적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신 황씨가 바닥을 한참 쳐다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버지 납북된 지 얼마 뒤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심한 장애를 겪게 되셨어요. 어머니 심부름으로 정신과에서 약을 타 온 기억도 납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알아보니 어머니는 「편집성 인격장애」를 앓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친척들이 어머니 만나기를 꺼리셨어요. 도움받기도 쉽지 않았죠』
 
  그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이유 없이 항상 불안해하셨어요. 저한테 항상 「누가 잡아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다닐 땐 수업 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누가 잡아간다」고 저를 데리고 나가기도 했어요. 「아버지도 잡아갔는데, 너라고 못 잡아가겠냐」며 친구들이랑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저를 끌고 가셨어요. 저는 친한 친구가 생길 수 없었어요. 항상 어머니 옆에 붙어 있어야만 했어요』
 
  황인철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처음 꺼냈다고 한다. 황씨는 『처음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고 말했다가 친한 친구들한테만 아버지가 비행기에 타고 있다 북한으로 잡혀갔다』고 말했다.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황씨는 「간첩의 아들」이란 소문이 났다고 한다. 친구들이 몰려와서 『너, 간첩 아들이지?』라고 자주 놀렸다고 한다. 황씨는 그럴 때마다 무조건 도망쳤다고 한다.
 
  『그때는 반공교육이 한창일 때예요. 저는 제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친구들이 「간첩 아들」이라고 놀리면 울면서 도망갔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 후로 절대 제가 납북자 가족이란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황인철씨가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건네자 황인철씨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황씨가 처음 아버지의 납북 사실에 대해 들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아버지를 통해서라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이제 너도 알아야 된다」면서 「1969년에 남한의 비행기 한 대가 납치돼서 北으로 갔다」고 하셨어요. 「그 안에 네 아버지가 타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강릉MBC PD였는데, 출장 중이셨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는 지금 北에 계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아버지 칭찬을 한참 하셨어요. 「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셨다. 서울大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셨다. 졸업하기 전에 방송국 시험에 합격하셨다. 아버지 안 계신다고 기 죽거나 그러지 말고 항상 자신감을 갖고 살아라」』
 
 
  『차라리 고아원에 가고 싶었다』
 
황원 PD 납북 직후 아내와 어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의 아내가 안고 있는 아기가 갓 100일이 지난 황원 PD의 딸.

  황인철씨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황씨의 어머니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 안 그래도 빚이 많았던 황씨의 어머니는 이후 빚쟁이들을 피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도피 생활을 5년 넘게 했다고 한다. 황씨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외롭고 가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기료를 못 내서 전기가 끊겼어요. 배가 고파서 쌀통을 열었는데 쌀도 없었고요. 동생은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지 계속 기침을 했어요. 그때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죠. 작은아버지가 우연히 우리 집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동생을 데리고 가셨어요. 여동생은 그때부터 작은아버지 집에서 컸어요』
 
  황씨는 『그 시절 고아원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도망다니면서도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사람들 몰래 집에 오셔서 밥을 해 놓고 다시 나가시곤 했어요. 올 때마다 용돈을 주셨고요. 그때 저는 차라리 청소년 보호 시설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살레지오 수도회」라고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돌봐 주는 곳이 있었거든요. 근데 저는 들어가고 싶어도 어머니가 계시니까 못 들어갔어요. 철 없던 시절이긴 했지만 차라리 거기 들어가고 싶었어요』
 
  작은아버지 손에서 자란 황씨의 여동생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했다. 황씨의 여동생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영어학원 강사였던 영국인을 만나 2000년 결혼식을 올렸다.
 
  『동생은 학창 시절에 아예 아버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살았어요. 중학교 때부터 항상 입버릇처럼 「한국에서 살기 싫다」고 말했어요. 「이런 나라에서 살기 싫다」고 항상 그랬어요. 「아버지 없이, 정신장애 생긴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했어요. 결국 동생은 다른 나라로 갔어요. 가끔 전화통화나 하고 지냅니다. 다시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전혀 없다네요』
 
  동생이 한국이 싫다고 말한 건 황씨의 어머니가 자식들이 모두 속세를 떠나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결혼 자체를 끊임없이 반대해 왔다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황씨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그에게 『사제가 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딸에게는 『수녀가 되라』고 했다고 한다. 황씨는 『나는 정말 사제가 돼야 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도박에 빠졌던 고교 시절
 
  『어머니가 「사제가 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셨죠. 제 인생은 이미 다 결정난 것이란 생각을 항상 했어요. 나는 「사제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도 했고요』
 
  황씨는 『그런 형편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성적은 50명 중 35등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교 연합고사에 떨어진 그는 1년 재수를 하고 김포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집에 아무도 없고, 돈도 없던 그 시절 도박에 빠졌다』고 말했다.
 
  『당시 노량진에 파친코(슬롯머신)가 널려 있는데, 호기심으로 한번 들어갔다가 이후부터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자주 들르게 됐어요. 친척이든 누구든 용돈만 주시면 거기에 가서 다 집어넣었어요. 밥 굶는 줄도 모르고요. 학교에 와서도 하루 종일 파친코 생각만 났어요. 파친코 앞에 앉아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스트레스도 다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아버지 직장 동료의 냉대
 
황원 PD의 아들 황인철씨가『북에 계신 아버지가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기사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던 가족사진. 2005년 봄, 경기도 부천의 생태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황씨는 『高3 때 자퇴를 결심했다』고 했다. 담임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훌륭한 아버지를 좇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늘 있었어요. 집에 안 가고 마음 편안한 수도원에서 자는 날이 점점 많아졌어요. 학교를 다니는 것에 별 의미를 둘 수 없었어요. 高3 때 거의 학교에 나가질 않았어요』
 
  황씨는 『스무 살 때, 아버지 일하던 곳을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 어머니를 졸랐다』고 한다.
 
  1987년 가을, 그는 어머니와 함께 강릉MBC를 찾았다. 황씨는 『어머니께서는 「그곳에 아버지 친구가 한 분 계신데, 총각일 때 우리 집에 와서 밥이랑 술도 자주 먹고, 여자 문제로 괴로워할 때 아버지가 술 따라 주시며 위로도 해 줄 정도 가까운 사이였다」며 그날 만나게 될 사람을 소개했다』고 한다.
 
  황씨는 아버지 친구를 처음 만나 본다는 사실에 들떠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태어나 처음으로 이발소에서 머리도 만져 보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들은 강릉MBC 보도국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아버지 친구분을 만났다.
 
  『도대체 여길 왜 찾아왔습니까』
 
  아버지 친구분은 대뜸 이 말부터 꺼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 있어요』라며 마냥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황씨가 『아버지 서류라도 달라. 내가 간직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오래 전 일이라 아버지 관련 서류는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스물한 살, 軍 입대를 앞두고 있던 황씨에게 황씨의 어머니는 『軍에 가면 누가 잡아갈지도 모른다』며 『아버지 호적을 정리하자』고 했다. 당시 황씨의 어머니는 아버지 호적을 정리하지 않으면, 납북자의 아들은 군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며 불안에 떠셨다고 한다.
 
 
  양화대교에서 자살 시도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정리하냐고요. 어머니는 완강하셨어요. 아들이 軍에 가면 北에 잡혀갈지도 모른다면서, 납북자 가족인 것을 반드시 숨겨야 한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저에게 「너는 군대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황씨의 어머니는 남편의 실종 신고를 했다. 호적 정리를 마친 후에 황씨는 전투방위로 6개월간 복무했다. 그는 『아버지가 호적에서 빠졌다는 게 매우 섭섭했다』고 한다.
 
  황씨는 『제대 후부터 나의 방황이 시작됐다』고 했다.
 
  『사제가 되려고 선교회에 들어갔어요. 1년 넘게 생활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와서 저를 데리고 나왔어요. 제가 그 안에 있으면 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결혼은 물론 연애도 못 하게 하셨어요. 어머니는 「세상이 지저분하니 너를 위해서 혼자 살아라」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뭘 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황씨는 자살을 시도했다. 스물세 살에 그는 양화대교 난간에 올라섰다. 한강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려다 말았다고 한다.
 
  『종교적인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그렇게 양화대교 난간에 올라서기를 한 달에 두세 번씩 했다고 한다. 황씨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3개월을 못 넘기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오직 성당 활동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고 한다. 이때 황씨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둘째 돌아오면 무덤이라도 보게 하라』
 
황원 PD의 장남 황인철씨.

  『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셨어요. 항상 「너만 보면 네 아버지 생각나서 가슴이 짜르르하다」고 하셨어요. 다른 손주들보다 저를 유독 많이 안아 주셨어요. 저를 안고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셨어요. 할머니 돌아가실 때 많이 울었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셨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큰아들이 1965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에겐 北에 있는 둘째 아들 황원씨가 집안의 기둥이었다.
 
  황씨는 『할머니가 「네 아버지는 유달리 똑똑했고,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했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잃고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가 몰래 밀주를 만들어 팔곤 했는데, 경찰이 나와서 술독을 빼앗아 가려니 어린 둘째 아들이 망치로 술독을 다 깨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의 납북 소식을 듣고 바로 기절하셨다는 할머니는 끝내 둘째 아들의 얼굴을 못 보고 1996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평생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恨(한)을 다 풀어 버리고 싶다. 나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황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할머니 화장해 드리면, 아버지 돌아오시고 어디 가서 눈물 흘리겠어요」라고 했더니, 며칠 후에 할머니가 눈물 흘리시면서 그러셨어요. 「그래 그래, 둘째 오면 얼마나 마음 아프겠냐. 그냥 땅에 묻어다오. 둘째 돌아오면 무덤이라도 보게 해라」』
 
  황씨는 이때 비로소 아버지가 돌아온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황씨는 열심히 살아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고, 결혼을 했다.
 
  딸 셋을 둔 황씨는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다』며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만나 뵐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황씨는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놓았지만, 적십자사로부터 『연령 순으로 순번이 돌아오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해도 너무한다』
 
  황인철씨는 1989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아버지 소식을 알려 주겠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황씨의 작은아버지가 안기부 직원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다고 한다. 안기부 직원은 『황원씨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북한 중앙방송국에서 일할 수도 있고, 딸은 셋일 수도 있다』고 흐릿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2005년 1월엔 통일부 직원이 황인철씨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통일부에서 나온 40代 초반의 남자는 현금 50만원을 봉투에 담아 『납북자 가족에게 위로차 드리는 것』이라며 황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황씨가 『아버지 제사라도 지내고 싶으니 생사라도 알 수 없는가』라고 묻자, 통일부 직원은 『생사는 확인할 수 없을 것 같고, 아직 북한에서 아무 소식이 없는데 먼저 제사부터 지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황씨는 『아버지가 납북되신 지 35년이 넘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정보도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황인철씨는 『대한민국이 해도 너무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국가라면 국민을 보호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국민을 보호하는 일은 국민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국가의 의무사항 아닙니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사건을 자꾸 덮으려고만 하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집단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 아버지를 못 데리고 옵니까. 아버지가 미국으로 납치됐어도 이럴 수 있습니까』
 
  황인철씨는 『납북자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서 남겨진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황씨는 『납북자가족지원법안이 제정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황인철씨가 최근 입수한 영동MBC(現 강릉MBC)의 1970년 5월20일자 이사회(의장 이방우)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납북된 사원 황원, 김봉주에 대해 영동MBC는 휴직 발령을 냈다.
 
 
  납북자를 휴직 처리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납북사원 휴직발령 승인의 건.
  이사회장 이방우는 정관규정에 의하여 의장이 된다. 의장은 의장석에 좌정하여 부의안건의 설명을 구한 바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로부터 작년(1969년) 12월11일 KAL기 납북사건으로 피랍된 본 회사 사원 황원(방송부 근무), 김봉주(보도부 근무) 2인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금일까지 만 6개월이 경과되었으며 국제기구를 통한 송환촉구는 그 실효가 언제 나타날지 막연한 형편이며, 특히 피랍사원은 사칙에 의하여 처리될 적당조항이 없는 특수한 경우이므로 부득이 이사회의 의결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어 본회의 소집을 회장에 요청한 바를 고하고 좌기와 여히 조건부 휴직 발령을 의결해 줄 것을 동의한 바 전원일치의 찬동으로 의결된다.
  1. 1970년 5월20일 의결일자로 휴직발령하되 송환되는 경우 송환된 상태에 대한 당국의 의견을 참작하여 재고할 수 있다.
  2. 휴직발령 익월부터 급료지출을 중지한다.
  서기 1970년 5월20일
  영동방송 주식회사
  의장 이사회장 이방우
  대표이사 사장 김준교
  전무이사 김준영〉
 
  강릉MBC는 2005년 10월19일 강릉지방노동사무소에 보낸 「KAL기 납북으로 인한 실종직원 급여 등 내역 송부」 문건에서 「황원의 경우 임금채권 소멸시효가 완성되었고, 김봉주의 경우 급여와 수당, 퇴직 위로금을 합쳐 17만4400원, 이에 따른 지연이자는 연 5% 가산금을 포함하여 27만320원 등 총 44만4720원」이라고 밝혔다.
 
  2005년 11월17일 강릉MBC는 김봉주씨의 동생 김봉옥(63)씨에게 「44만4720원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해 줄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김봉옥씨는 『가족과의 아무런 협상 없이 휴직 처리를 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강릉MBC의 제의를 거절했다.
 
  황인철씨는 1969년 황원씨와 함께 납북된 김봉주 기자의 동생 김봉옥씨와 함께 강릉MBC를 상대로 위 내용과 관련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아버지, 제사라도 지내고 싶습니다』
 
  황씨는 2003년 출판사를 차렸다. 황인철씨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이름은 아버지 황원씨의 이름을 딴 「원북스」. 아버지 이름으로 좋은 책을 많이 내고 싶다고 한다. 납북된 황원씨를 꼭 빼닮았다는 막내딸 유림이가 현재 세 살. 그가 막내딸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제가 세 살 때, 딱 이만할 때 아버지가 납치되신 거예요. 이런 자식을 두고 집에 못 돌아오는 아버지는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이런 자식을 두고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셨으니』
 
  최근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황인철씨는 친구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한다.
 
  『친구한테 제가 그랬습니다. 아버지 장례라도 치를 수 있는 너는 행복한 줄 알라고. 친구 아버지 돌아가셨다는데, 꼭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 밤새 장례식장을 지키며 울었고, 땅에 묻힐 때까지 지켜 드렸습니다』
 
  경포대에서 다이빙을 즐겼다는 아버지. 지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 35명이 다시 南으로 돌아갈 때 「가고파」 노래를 선창했다는 아버지. 황인철씨는 혹시 아버지가 볼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제사라도 지내고 싶습니다』
 
  그는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