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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北, 90년대초 정치범 수용소 3곳→1곳으로 통폐합
CIA Bear 허관(許灌) 2008. 10. 25. 20:14북한이 별도로 관리하던 정치범 수용소중 몇몇 수용소가 통폐합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경제난에 따른 관리 부담, 수용소의 탈출자 들이 늘어나는 불안감, 그리고 국제사회의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 제기 등입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의 면담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중 3개의 수용소를 별도로 관리하다 90년대 초에 하나로 통폐합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북한인권 정보센터의 허선행 사무국장이 전했습니다.
체제부담, 관리 부담, 탈출자의 발생으로 인한 부담 등으로 온성과 회령에 있던 3개의 수용소를 별도로 관리하다 하나로 합친 겁니다. 일부인력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수감자들은) 주로 22호 회령 관리소로 이감하고....
완전 통제구역인 정치범 수용소가 가족들까지 수감하는 수용소로 알려진 개천의 14호 관리소에서 신동혁 씨가 탈출해서 그의 증언으로 밝혀졌는데요, 신동혁씨는 성장기와 20대 초반을 이 관리소에서 보냈습니다.
통제구역은 수감자들 관리제도 등 북한이 하나의 전체적인 틀에 의해서 모두 같이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고 허선행 사무국장이 지적했습니다.
또 정치범 수용소가 처음부터 물 셀 틈이 없이 철통같이 방어를 한 것이 아니라 70년대 초반, 김일성 지시로 전기철조망을 설치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북한의 식량난이 시작되면서 통재가 극에 달한 정치범 수용소도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80년대 후반 들어서 통재가 어쩔 수 없이 이완되면서 여러 군데 정치범 수용소를 관리했을 경우에 지게 되는 북한당국의 부담도 있었을 것이고 탈출자 발생으로 생기는 불안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몇 군데만 집중적으로 수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가 6.25전쟁 당시 형제가 월남했다는 죄목으로 들어간 1960년대 건설된 정치범 수용소 개천 24호는 두 번 다시 사회로 들어가지 못하는 완전통제구역 이라고 신동혁씨는 증언 했습니다. 하지만 외부세계를 알고 준비만 잘하면 탈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고 사니까 그렇지 준비만 잘하면 탈출할 수 있을것 같아요. 여러 가지 외부 세계 상황을 알면 탈출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모르고 그냥 산다면 탈출 할 수 없는 거죠.
정치범 수용소는 그 안의 수용자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자급자족을 해 왔는데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해 정치범 수용소도 상상 할 수도 없는 어려움에 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허 사무국장은 전합니다. 평안남도 개천 시 개천 14호 수용소 출신 신동혁씨는 23년간 수용소에서 노동과 고문을 견디다 탈출했는데요, 신동혁씨의 얘기 들어보죠.
일단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농사짓고 해서 다 먹고 사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질문)의복 같은 것은 국가에서 공급되나요?
우리가 직접 만들어요. 만들어서 다 입어요.
80년대 말 이면 북한이 달러 부족에 경제가 바닥으로 내려가자 수용소 안의 관리자들, 경비대원이나 보위부원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것 이라고 추정합니다. 정치범 수용소로 배치 된 관리자들 역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허 사무국장은 말 합니다.
북한경우는 교화소에 근무만 하다가도 평생을 교화소 에서 근무해야 합니다. 인력유지의 부담도 있고 그 사람들에 대한 의복 등 보급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그런 것들이 부담이 됐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5개가 줄어들었다고 얘기되고 있어요.
신 동혁씨의 증언입니다.
한군데 근무하는 경비병이나 보위부원들이 한 정치범 수용소만 근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일부 증언은 정치범 수용소가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일각에서는 5개로 줄었다고 얘기하지만 아직 정확한 수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줄어든 것은 확실하다고 하는데요, 다시 허 선행 사무국장입니다.
온성에 있었던 정치범 수용소 지금은 없어 졌죠 13호 수용소인데 하나는 확실하게 없어졌지 않아요? 그다음에 경성지역에 있던 관리소도 없어졌다는 보고서도 있고요.
정치범 수용소의 수감된 사람들의 결혼과 아기출생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조사되어야 할 부분 이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일부에서는 수용소 안에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증언이 있지만 수용소 운용목적 자체가 사회체제 이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격리 시키는 것 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안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는 목적이 추가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2세를 낳아 생산인력을 보충해야 되기 때문에 정책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허 사무국장은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완전 통제 구역의 평안남도 개천 시 개천 14호 수용소 출신 신 동혁씨의 말입니다.
정치범 수용소도 한두 곳이 아니니까 내가 살던 곳에서는 제한적으로 표창 결혼이라고 해서 아이가 출산하는데 제가 그렇게 해서 태어났죠.
질문)몇 살 때부터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 하나?
6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그때부터 일을 해요 그냥 그 안에서 전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공부하고 학교 갔다 와 나가서 농촌 지원이나 도로 닦기 이런 것 그때부터 했어요.
질문) 6살 짜리가 어떻게 농촌지원을 나가고 도로공사에 나가요?
그냥 나가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거죠.
표창 결혼은 잘해서 선물로 주는 결혼 이라는 것입니다. 북한 인권정보센터의 허 선행 사무국장은 이런 요소와 함께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그리고 국제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인권문제가 큰 몫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국제사회의 정치범 수용소 문제 제기가 90년대 90년대 초 북한정치범 수용소의 축소 통합 통폐합 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 북한 소식통은 정치범 수용소 수는 줄긴 했지만 이는 통폐합 된 것이기 때문에 규모나 정치범 수감자 수는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는 수감자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다시 신동혁 씨로 부터 들어봅니다.
의식은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의당 이렇게 살아야 된다, 나도 그렇게 살았는데요, 다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질문)하지만 일단 나와서 자유 세상에 나와 보니 너무 억울하고 그렇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나와서도 한동안은 멍멍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눈이 트이고 머리가 터이니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죠.
북한인권 정보 센터는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상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어 왔는지 조사해서 기록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나 앞으로의 북한의 변화 과정에서 가해자들에 대한 합리적인 처벌 등에 활용할 것 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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