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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정 국회의장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 졸업, 민주화 투쟁으로 병역면제, 동아일보 기자.국회의원 역임"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임채정 국회의장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 졸업, 민주화 투쟁으로 병역면제, 동아일보 기자.국회의원 역임"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28. 19:01
출생지-전남 나주
생년월일-1941년 05월 14일
[학력]
59년 광주일고졸
64년 고려대 법대졸
[병역]
임채정(병역의무 종료)--병역 면제
[경력]
69∼75년 동아일보 기자
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상임위원
81∼88년 民統聯 상임위원장·사무처장
83년 교육신보 주간
88년 한겨레신문 창간발간인
88년 평민당 중앙정치연수원장
92년 14대국회의원(서울노원乙,민주당ㆍ국민회의)
96년 15대국회의원(서울노원乙,국민회의ㆍ새천년민주당)
99년 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
2000년 16대국회의원(서울노원乙,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기획단 기획위원장
2002년 同정책위의장
2002년 同정책선거특별본부장
2002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2004년 17대국회의원(서울노원丙,열린우리당)
2004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2005년 열린우리당 의장
2006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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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나주에서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교육자 집안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임채정 의원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자란다. 엄한 가풍 속에 교육을 받던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책을 살 돈이 없으면 몇 군데 서점을 전전하며 책 한 권을 다 읽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 두 배정도 빨리 읽는다. 호남의 명문인 광주서중·일고를 졸업한 뒤, 1960년 고려대 법대를 입학한 그는 4·19 혁명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당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에 눈뜨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정치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관심영역을 넓혀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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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그는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기자'라는 직업을 택해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4·19를 거친 그에게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당시 언론상황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특히 유신헌법 공포를 계기로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실시되면서 왜곡·날조된 기사가 지면을 메우기 시작했다. 젊은 기자 임채정은 독재정권에 굴복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쓰는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불의에 맞서 일어서느냐는 기로에 서게 된다. 독재정권에 빌붙어 아부나 일삼고 현실에 침묵한다면 평안한 삶은 보장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를 결성,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다. 그 결과 1975년, 차디찬 거리로 내쫓겨나지만 독재정권에 맞선 싸움을 그만둘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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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해직된 뒤 그는 교육신보 주간과 도서출판 전예원 사장을 거치면서 출판문예운동과 교육운동에 전념한다. 1979년 유신말기, 그는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재야인사들과 함께 '통일주체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거 반대 국민회의 공동대표'로 소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을 주도한다. 숨막히는 비상계엄령하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유신체제 부활을 반대하는 비밀집회를 개최한 대가로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에게 서울의 모습은 '암울', 그 자체였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찬탈한 5공 정권은 마치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또다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재야의 중심 세력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상임위원장을 역임하며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끈 그의 노력은 '6월 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된다. 이 과정에서 1987년 4·19 기념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구속,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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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이후 변화된 시대상황을 주도하기 위해 1988년 문동환 박사, 박영숙 선생 등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평화통일연구회'(평민련)를 결성, 13대 총선에서 황색돌풍의 기반을 마련한다. 평민련 사무처장과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치 개혁의 초석을 다지는데 앞장선다. 이는 후에 '민주개혁 정치모임'과 '열린정치 포럼'으로 이어진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김용채 후보에게 36표 차이로 뒤졌으나 4개월여에 걸쳐 당원들과 함께 '부정투표 진상규명 투쟁'을 전개해 7월 20일, 재검표 결과 그의 지지표 100장짜리 한묶음이 김후보가 득표한 것으로 잘못 집계된 사실을 밝혀 172표 차이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루며 국회에 진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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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된 이후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 1992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안기부 은닉 예산을 밝혀냈으며, 1993년 대정부질문에서는 정치권에서 최초로 문민정부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등 남들은 4년 임기 동안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대정부질문을 3차례나 한다. 특히 1995년 '한겨레21'이 선정한 통일외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1위로 선정되는 등 모든 언론에서 의정활동 최우수 국회의원으로 주목을 받는다. 한편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평민련을 해소하고 제정구, 이부영,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민주개혁 정치모임' 결성해 이사장을 맡아 '개혁정치' '깨끗한 정치'의 모범을 창출한다. 또한 정치개혁은 투명한 정치자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신념에 따라 부정한 돈을 배격하고 어렵지만 후원회원들이 모아주는 후원금으로 정치활동에 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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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27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영호남 불균형을 시정하자는 취지의 '지역등권론'의 틀을 제시해 당시 야당이 압승하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다. 복귀한 김대중 총재와 함께 창당기획단장을 맡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의 산파역을 수행하며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통일특별위원장, 정세분석실장으로 50년만에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15대 총선에서 8,000여표의 앞도적 표차로 승리한 임채정 의원은 그해 9월 노원구청장 재선거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였던 자민련 김용채 부총재를 노원구청장으로 당선시켜 국민회의-자민련 연합공조의 서막을 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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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정부질의에서는 온국민을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김현철의 국정농단과 한보비리를 전면 제기하며 김영삼 정권의 몰락을 예견한다. 특히 대정부질의중 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라며 김현철의 국정개입을 지적한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으로 기록되고 있다. 1998년 건설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당이지만 不偏不黨 자세로 '피감기관이 뽑은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국민의 편에서 서는 공명정대한 국회의원으로 자리매김한다. 1999년 대정부질의에서는 대북포용정책, 이른바 '햇볕정책'의 이론적·시대적 배경과 과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해 탁월한 정책 식견을 선보인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혁의 추진을 위해 여당의 역할을 강조하며 ‘개혁추진위원회’를 구성을 주도하고, 국회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개혁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집권여당과 정부 사이에서 정책을 책임지는 정책위의장으로 개혁정책과 개혁입법을 총괄한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주춧돌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을 비롯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 특별법’,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등 국민의 기본적 인권신장, 성숙한 민주사회 정착과 생산적 복지의 실현을 위한 그의 철학이 담긴 법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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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6대 총선에서 노원구민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3선 의원이 된 임채정 의원은 '21세기는 통일의 시대'라는 생각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사실상 연합으로 나아가는 평화공존 시대의 개막'을 주제로 輸血式 지원’에서 造血式 경협’을 제시하는 한편 분단의 상징인 DMZ 현장조사, 통일정책자료집 발간, 통일기원 금강산 마라톤 참가 등 국회 남북관계특위 위원장으로 남북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선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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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말 임채정 의원은 연이은 재보궐 선거 패배와 김대중 총재 사퇴로 집권여당이 위기에 처하자 '당 발전과 쇄신 특대위' 부위원장으로 국민참여 경선과 정당운영 민주화 등 혁명적인 정치개혁안을 만든다. 2002년 봄, 1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하여 전국을 뜨겁게 달군 국민참여 경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한단계 성숙시킨 것으로 평가되며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이른바 盧 風 으로 상징되는 국민경선의 열풍의 이면에는 民心이 天心 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국민참여 정치개혁안으로 만들어 낸 임채정 의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함께 두 번째로 집권여당 정책위 의장을 맡은 임채정 의원은 후보단일화, 행정수도 이전 등 굵직한 이슈를 제기하며 12월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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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승리 직후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위원장직을 맡은 임채정 의원은 '국민의 정부' 5년에 대한 반성과 창조적 계승작업을 통해 '참여정부'의 주춧돌을 세운다. '참여정부'라는 모토에 걸맞게 국민으로부터 정책 및 인사 제안을 받고 '다면평가제'를 도입하는 등 수평적이고 활발한 토론문화를 이끌어 정책중심의 새로운 인수위 시스템을 보여준다. 한편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극복해 국민통합을 이루고 전근대적인 정치문화 개혁을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死卽生 각오로 열린우리당에 참여해 선거혁명을 이루고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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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연말 4대 개혁입법 처리 무산으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총사퇴해 위기에 처하자 임채정 의원은 구원투수로 당의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집권여당의 대표로서 임채정 의원은 우리나라가 선진한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선진사회협약’을 제안한다. 또한 행정수도의 후속조치를 통과시키는 등 많은 난제를 해결하며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통해 당의 안정화에 기여한다. 이는 왜 사람들이 어려울 때 임채정 의원을 찾는가에 대한 해답과 그의 진가를 보여준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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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 의원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은 임채정 의원은 2003년부터 준비하고 대표발의한 ‘남북관계발전법’을 통과시켜 대북정책의 법적 기초를 마련하고 남북간 합의서의 법적 실효성을 확보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남북관계가 안정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고 대북정책이 국민적 합의 아래 투명하게 추진됨으로써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가 한층 도약할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선진국의 수준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 현실을 적시하고 공여규모 확대와 이를 통한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강화를 제시하는 자료집을 펴내는 등 우리나라 외교의 선진화를 위한 의정활동에 최선을 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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