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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전쟁--영유권 분쟁의 기원과 1982년 아르헨티나의 침공준비 본문

유럽연합(EU)

포클랜드전쟁--영유권 분쟁의 기원과 1982년 아르헨티나의 침공준비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22. 14:58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남대서양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섬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다.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되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끝난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해전이 벌어진 전쟁이었고 바다에서는 일방적이기만 했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보다 우리에게 해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영유권 분쟁의 기원

         

포클랜드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에서 483km, 남극의 가장 북쪽으로부터 940km 떨어진 약 700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크게 서 포클랜드와 동 포클랜드 섬으로 나뉘고 동 포클랜드의 동해안에 수도 <스탠리>가 있다. 포클랜드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고 18세기까지는 펭귄들이 이 섬의 주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의 역사가들은 각각 자국의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포클랜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포클랜드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사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의 무장상선 선장이었던 이다. 이 네덜란드 사람은 1598년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남아메리카 남쪽 끝의 마젤란 해협을 거쳐 지금의 인도네시아인 몰루카의 향신료 제도로 가려던 5척의 선단 중의 1척의 선장이었다. 그러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다음 거센 바람에 선단이 흩어져 결국 포기하고 같은 길로 돌아오다가 그는 1600년 서 포클랜드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무인도들을 발견하고 라고 이름 지었다. 이 때 선단 중의 다른 1척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까지 갔고 이 네덜란드 배의 항해사였던 영국 사람 윌리엄 애덤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일본에 정착해 대양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어 주었다.

           


포클랜드를 발견한 Sebald de Weert가 속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단

가운데의 가 Sebald de Weert가 선장이었던 배

          

포클랜드는 17세기 중에는 라고 알려졌는데 <포클랜드 Falklands>라는 이름은 1690년 영국 사람 <존 스트롱>이 이곳에 처음으로 상륙하고 이 탐험의 비용을 댄 후원자이고 나중에 영국의 해군장관이 되는 <제5대 포클랜드 백작 앤소니 캐리>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부르는 이 섬의 이름 <말비나스 Malvinas>는 1764년 프랑스 사람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이 프랑스 서부 브레타뉴 지방의 항구 <생 말로 Saint-Malo>에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정착시키고 이 사람들을 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프랑스 사람들이 첫 정착민이고 이들은 지금의 동 포클랜드 섬의 <포트 루이스>에 마을을 세웠다. 그런데 이 정착촌과 여기에 기반한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은 1713년 영국과 프랑스가 남아메리카 대륙과 주변의 섬들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을 인정한 유트레히트 조약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1765년 1월 영국해군 선단이 서 포클랜드 섬의 북서쪽에 있는 손더스 섬에 와서 이곳과 주변의 섬들이 영국의 왕 <조지 3세>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이듬해 1766년에는 <존 맥브라이드>가 약 100명의 정착민을 데리고 와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에 영국 정착촌 겸 요새를 건설했다. 맥브라이드는 250명으로 불어난 포트 루이스의 프랑스 정착촌을 발견하고는 이들이 영국 영토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떠나라고 권유했지만 이들이 순순히 떠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스페인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는 지금까지 동 포클랜드의 프랑스 정착촌을 유지하는데 든 비용을 스페인이 보상하면 이곳을 스페인에게 넘기고 떠나겠다고 동의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이듬해 1767년부터 동 포클랜드를 지배하게 되었고 <포트 루이스> 또한 <푸에르토 솔레다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잠시 서로 맞부딪히는 일이 없이 지냈지만 1769년에는 영국과 스페인 군함이 주변을 측량하다가 마주쳐 서로 자국의 영토에서 떠나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듬해 1770년, 스페인 군함이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로 와서 이곳의 책임자인 영국해군의 <앤소니 헌트>에게 말로 할 때 순순히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헌트는 영국 국왕이 떠나라고 명령하면 떠나지 다른 어느 누구의 철수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곳이 영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 총독의 이름도 헌트이다). 결국 1770년 7월 14일, 5척의 군함에 1,400명의 병력을 태운 스페인 함대가 다시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 앞바다에 나타났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앞에서 헌트와 영국 정착민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고 이 소식이 영국 본국에 전해지자 1771년 1월 22일 영국은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를 돌려주지 않으려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스페인을 위협했다. 남대서양의 외딴 섬에 있는 정착촌 겸 요새 하나 때문에 영국과 전쟁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스페인은 결국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같은 해 9월 13일 2척의 영국 군함이 서 포클랜드에 다시 나타나 빼앗겼던 포트 에그몬트를 되찾았다.

        

영국과 스페인의 철수

      

포트 에그몬트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거나 대서양으로 돌아오는 영국 군함 및 상선에게 식량과 각종 필수품을 공급하는 기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곧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 영국은 전쟁비용을 대느라 재정이 쪼들리게 되었고, 포클랜드처럼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식민지에서는 일단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776년 5월 20일 포트 에그몬트 요새의 지휘관 클레이턴 대위는 영국의 국기와 이곳이 영국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긴 금속제 판을 남겨놓고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를 떠났다. 영국 군대와 정착민이 떠난 포트 에그몬트는 곧 바다표범을 잡으러 온 여러 나라 사냥꾼들의 차지가 되었는데 동 포클랜드의 스페인 식민 당국에서는 영국이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를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곳이 다국적 사냥꾼 소굴이 되었음을 알게 된 스페인 당국은 이들에게 떠나라고 했지만 사냥꾼들은 그냥 무시했고 결국 스페인 식민 당국은 클레이턴 대위가 남긴 금속제 판을 지금의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옮기고 1780년 3월 스페인 본국의 명령에 따라 포트 에그몬트의 시설물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1780년부터 포클랜드의 유일한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도 곧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고 주로 바다에서 영국과 싸우며 막대한 전쟁비용을 썼다. 결국 스페인도 영국처럼 전쟁을 하느라 포클랜드의 식민지를 유지할 돈이 없게 되었고 1806년 스페인의 마지막 총독 마르티네즈도 영국처럼 동 포클랜드의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스페인 국기와 이곳이 스페인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긴 금속제 판을 남겨놓고 떠났다. 총독은 떠났어도 몇몇 정착민은 남았지만 아직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는 없어서 이들은 지금의 우루과이 수도인 스페인 식민지 몬테비데오에서 오는 식량과 물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1807년 영국이 몬테비데오를 공격해 점령하자 포클랜드의 주민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1811년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관할하던 스페인 식민 당국은 남은 정착민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 때부터 포클랜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어부들과 사냥꾼들의 자치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독립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820년에는 아르헨티나 주변의 스페인 식민지는 아르헨티나 소유라고 주장하며 포클랜드가 자국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곧 미국의 범선을 임대해 포클랜드에서 바다표범 사냥꾼들과 고래를 잡으러 온 포경선들을 모두 내쫓았고 1820년 11월 6일 아르헨티나 정부가 고용한 미국 사람 <대니얼 주위트>는 옛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걸었다. 8년이 지난 18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업가인 <루이 베르네>는 3년 내로 동 포클랜드에 정착촌을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동 포클랜드 섬 전체를 개발할 권리와 주변 바다의 어업권을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받고서 자신의 가족과 네덜란드 및 독일 이민자들을 데리고 동 포클랜드로 이주했다. 이 프랑스 사업가는 영국이 이곳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앞으로 영국이 다시 와서 아르헨티나를 쫓아내더라도 자신의 사업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아르헨티나 주재 영국 영사를 찾아가서 영국 정부가 그의 사업을 허가한다는 스탬프도 받아냈다.

            

용의주도하고 사업 수완이 좋았던 베르네는 곧 이곳에서 난 말린 쇠고기와 소금에 절인 생선은 브라질에, 양털은 영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1831년에는 새로운 이민자를 구한다는 광고도 냈다. 그런데 1829년부터 미국 포경선들이 바다표범을 잡으러 이곳에 자주 오기 시작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독점 어업권을 받은 베르네는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군함을 보내 다른 나라의 포경선들을 내쫓아달라고 요청했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르헨티나는 여기에 보낼 군함이 없었고 대신 이 프랑스 사업가를 총독으로 임명해 그가 직접 무장상선을 고용해 포경선들을 내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베르네는 다른 나라의 포경선들을 무력으로 내쫓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되려 크게 당하고 만다.

        

미국 포경선 나포 사건과 미국해군의 보복

    

1831년 7월, 베르네는 미국의 포경선 <해리엣>이 법을 어기고 바다표범을 잡았다며 이 미국 포경선을 나포했고 선장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잡아가서 재판을 받게 했다. 사건이 터지자 아르헨티나 주재 미국 영사는 강하게 항의하며 미국은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군함 <렉싱턴>을 푸에르토 솔레다드로 보내 미국 포경선이 아르헨티나 당국에게 압수당한 물건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되찾아오도록 명령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미국 군함 렉싱턴은 자국 포경선이 뺏긴 물건을 되찾기 위해 푸에르토 솔레다드 앞바다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런데 렉싱턴의 함장은 영사로부터 받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버렸다. 푸에르토 솔레다드를 완전히 때려부수고 포클랜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섬이라고 선언하고는 떠나버린 것이었다.

         

미국 포경선을 나포했다가 유일한 정착촌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엄청난 보복을 당한 베르네 총독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1832년 10월에야 임시 총독이 가족을 데리고 폐허가 된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 때 영국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과 미국의 난폭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곳으로 다시 군함을 보내 12월 20일 옛 포트 에그몬트에 영국 영토라는 표시를 세웠다. 마침 이 무렵, 얼마 되지 않는 푸에르토 솔레다드의 정착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갓 부임한 아르헨티나 임시 총독을 죽였고 여기에 와 있던 영국과 프랑스 배가 도와서 겨우 폭동이 진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며칠 지나고 1833년 새해가 밝자마자 영국 군함 1척이 나타나 죽은 총독에 이어 푸에르토 솔레다드의 책임자가 된 아르헨티나 군함 <사란디>의 함장과 살아남은 20명의 정착민들에게 이곳은 영국 영토이니 당장 떠나라고 통고했다. 이들은 우세한 영국의 무력 앞에 굴복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영국이 포클랜드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영국령 포클랜드

           

정착하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포클랜드는 영국이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영국 사람들이 이민오기 시작해 약 100년이 지난 1930년대에는 주민의 숫자가 2400명에 달했고 이들은 주로 양을 키워 양털과 양고기를 수출하며 생계를 꾸렸다. 19세기에 범선의 시대가 끝나고 증기선의 시대가 오자 포클랜드에는 영국해군의 석탄보급기지가 설치되었고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곧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중국 산뚱 반도의 칭따오에 배치되어있던 독일 동양함대는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호주해군과 일본해군을 피해서 본국으로의 귀환을 시도했고, 이들은 태평양을 동쪽으로 횡단해서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12월에 남대서양으로 들어왔다. 석탄이 부족했던 독일함대는 포클랜드의 석탄보급기지를 덮쳐 석탄을 얻으려고 했지만 이들을 잡기 위해 마침 포클랜드에 와 있던 영국함대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이 <포클랜드 해전>을 제외하고는 포클랜드는 “잊혀진 섬”으로 남았고 1952년에는 포클랜드를 미국에게 넘기는 것까지 영국 정부 안에서 잠시 고려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세계의 모든 식민지에 독립을 주라는 1960년 UN의 <식민지독립부여선언>을 가지고 영국에 대한 외교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전부 영국 사람의 후손인 포클랜드 주민들은 포클랜드가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기를 원했고 UN은 <인민 자결권> 또한 인정하기 때문에 포클랜드 주민들의 조상이 갑자기 영국 사람에서 스페인 사람으로 바뀌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르헨티나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포클랜드를 자국 영토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982년 <말비나스의 해>

          

아르헨티나의 육해공 3군은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이 군사정권은 모든 반대자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더러운 전쟁>을 1978년까지 벌이며 수천 명의 실종자를 만들어냈고 육해공 3군의 최고사령관들로 구성된 <군사 평의회>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육군 장성들끼리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정권을 이어갔고, 1981년 12월 <레오폴도 갈티에리> 육군대장이 세 번째 군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3인 군사 평의회의 1명이 포클랜드를 무력을 써서라도 빼앗아야 한다는 강경파였으니 그가 바로 아르헨티나해군의 최고사령관 <아이삭 아나야> 해군대장이었다. 어릴 때 갈티에리 장군의 학교 친구였던 아나야 제독은 1970년대 초반 영국이 유약한 지도자와 경제불황 때문에 허덕일 때 영국 주재 해군 무관이었고 갈티에리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포클랜드 침공을 내걸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강경파였다.

            

갈티에리 장군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민심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언론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또한 조금이나마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3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유혈 폭동이 일어나 1,500명이 체포되는 등 정치적, 사회적 불안은 여전했고 마침 1833년의 150주년이 되는 1983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83년 1월 이전에 외교적이든 군사적이든 모든 수단을 써서 1982년 중에 포클랜드를 되찾자는 여론이 거세졌고, 갈티에리 대통령이 취임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981년 12월 15일, 이듬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명령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