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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예술영화 <임진왜란> 보기 본문

Guide Ear&Bird's Eye/통일부 정책모니터링조사 패널(수집)

북한 예술영화 <임진왜란> 보기

CIA Bear 허관(許灌) 2007. 1. 28. 15:39
조선예술영화 <임진왜란> 동영상 제1부: <<길은 빌리지못한다>> 보기

 

조선예술영화 <임진왜란> 동영상 제2부: <<홍의장군>> 보기

 

조선예술영화 <임진왜란> 동영상 제3부: <<김응서와 계월향>> 보기

 동작

 

 

*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명종 7) 경남 의령~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개요]

곽재우, 경남 의령군 의령읍 충익사
의령·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월(越)이며, 조식(趙植)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折衝將軍兼助防將)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石門)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전후활동]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守城軍)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察理使)·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응서=김경서[金景瑞]

1564(명종 19)~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장.

본관은 김해.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무과에 급제하여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집안이 미천하여 파직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 방위전에서 대동강을 건너오는 적병을 막았다. 그해 8월에는 조방장(助防將)으로 2개월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에게 점령당한 평양의 공략에 참가했다. 그뒤 평안도방어사로 승진했으며, 1593년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밑에 있으면서 남원 등지의 도적을 소탕했다.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선조의 명에 따라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찾아왔으며, 일본군의 상황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있다가 부정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604년 포도대장 겸 도정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가 되었다. 그뒤 만포진첨절제사·북로방어사·길주목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당시 건주(建州)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무순(撫順)·청하(淸河) 등의 보(堡)를 함락시키자, 1619년 7월 명나라 조정은 조선에서 군사를 파견하기를 청했다. 조선은 사신을 보내어 "본국의 남쪽 변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고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내려 "속히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에 종사하는 공을 이루라"고 하자 5도도원수(五道都元帥)인 참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부원수(副元帥)로 출전했다. 다음해 심하(深河)지방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명나라 군사가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했다.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연락하여 조선과 후금은 본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출정은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남은 병사와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당시 강홍립은 출정 전에 형세를 보아 적당히 향배(向背)를 결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있었다. 김경서는 적진에 있으면서 남몰래 적진의 사정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조만간에 본국으로 보내려 했으나, 이러한 일을 강홍립이 적에게 고발하여 살해당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고향에 그의 충성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계월향
계월향 桂月香 [?~1592]조선 중기의 평양(平壤) 명기(名妓).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신은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