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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 주역 우크라 초대 대통령 크라우츠크 별세 본문
소련 해체의 주역이며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기초를 쌓은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초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88.
우크라이나 집권당 ‘국민의 종’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인 크라우추크가 별세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고 추모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크라우추크가 “단지 정치인 그리고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었다. 항상 현명한 단어들을 찾아내, 모든 우크라이나인이 들을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선언법 통과를 이끌었다. 당시는 소련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며, 소련 체제에 급격히 금이 가던 때였다. 석달 뒤인 그 해 12월 1일 이 법은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됐고, 그는 12월 5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흘 뒤인 12월 8일 벨라루스 벨로베슈스카야 숲의 소련 지도부 별장에 그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벨라루스 최고회의 의장이 모여 소련의 종말과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에 합의했다. 슬라브 3국이 참여한 이 ‘벨라베슈 협정’으로 소련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벨라베슈 협정에 서명했던 이들은 그를 마지막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련 해체 이후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았던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를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1993년 우크라이나에 있던 핵무기 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러시아에 넘기고 경제적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이듬해인 1994년 12월 5일 그의 후임자인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안전 보장과 경제 지원을 받는 대가로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에 반환하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각서와 달리 지난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하고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때문에 핵무기 포기를 그가 저지른 큰 실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신생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당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취약해 핵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당시에 예상하기도 어려웠다는 반론이 있다. 그는 86살이었던 지난 2020년 친러시아 반군이 일부 지역을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 분쟁 해결을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단 대표로 임명돼 잠시 정치 현장에 복귀했다. 지난해에는 심장 질환 관련 수술을 받았고 최근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고 <에이피>(AP) 통신은 전했다.
소련 해체 주역 우크라 초대 대통령 크라우츠크 별세 : 유럽 : 국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1. 아르메니아 2. 아제르바이잔 3. 벨로루시 4. 에스토니아. 5. 그루지야. 6. 카자흐. 7. 키르기스. 8. 라트비아. 9. 리투아니아. 10. 몰도바. 11. 러시아. 12. 타지크.; 13. 투르크멘. 14. 우크라이나. 15. 우즈베크..
레오니드 마카로비치 크라우추크(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러시아어: Леони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1][*], 1934년 1월 10일 ~ 2022년 5월 10일)는 우크라이나의 정치가로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1991년 12월 5일 ~ 1994년 7월 19일)이다.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에 합의, 소련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이다.
1934년 1월 10일 태어났다.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정치국원이 되었고, 1990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인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곧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소비에트 연방 구성 공화국으로서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12월 5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곧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쳐, 12월 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지도자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합의하였다.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92년 8월 정식으로 취임하였으나, 체제 변환기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경제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1994년 선거에서 레오니드 쿠치마에게 패해 물러났다.
우크라이나 사태, 미국이 원인?
1994년, 우크라이나는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과 비핵화 조약을 맺었다. 이를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라고 부른다. 조약을 맺은 후,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는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러시아가 내일이라도 크림반도를 침공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시사했던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현재 러시아의 타깃은 크림반도가 다가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파렴치한 짓과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협박은 어찌 보면 부다페스트 조약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비핵화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이 조약에 찬사를 보냈지만 비핵화는 세계 평화 대신 푸틴의 야욕에 불을 지폈다.
사건의 발단은 1992년 미국이 우크라이나 비핵화 캠페인을 벌이면서부터다.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굳건했다. 하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은 구소련 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러시아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1934년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아버지를 잃고 수십 년간 소련의 지배하에 살아왔었다. 이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조국이 외세로부터 점령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련이 남기고 간 핵무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러시아로부터 조국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크라우추크의 꿈을 이루어줄 유일한 수단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비핵화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압박했고 크라우추크는 비핵화를 조건으로 나토 가입과 같은 안보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수단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똑같은 조건을 요구할게 뻔했기 때문에 미국은 협박하듯이 우크라이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핵무기를 포기해야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구소련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어도 사용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관리할 능력도 없었다. 혹여나 이러한 핵무기가 거래되어 테러리스트 단체에 넘어가게 되면 국제질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때 당시 맺었던 조약은 어찌보면 당연히 맺어야했던 조약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꼴이 되었다. 더 이상 어떠한 나라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간 신뢰가 깨진 순간 세계 평화는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다. 과연 이란과 북한이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고도 핵무기를 포기할까? 미국과 러시아는 사이좋게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평화적인 핵포기의 모범사례: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3개국 협상으로 구소련 핵무기 포기 그리고 안전보장[핵무기 폐기 및 이에 따른 보상원칙을 합의]"
우크라이나는 핵무기가 배치된 소련의 네 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네 공화국은 핵무기보유국의 지위를 러시아에 이양하는 협정을 합의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1,90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군부가 핵무장을 강력히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러시아와 미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안전보장을 희망했고, 그 결과로서 1994년 1월에 3자 선언이 채택되었습니다. 당시 세 나라의 대통령이 서명한 이 선언에서 미국과 러시아 양국은 비핵국인 우크라이나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안전보장을 약속했습니다.
첫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가 사용되는 침략에 희생되거나 그런 침략위협을 받는 경우 즉각 유엔안보리 차원의 지원을 강구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보유국과 동맹 하에 미국과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술적, 재정적인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능력을 해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던 일부 핵능력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영역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핵과학자와 기술 그리고 물질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995년에 우크라이나 과학기술센터가 설립되었는데, 2000년 중반 현재 이 연구센터에는 6,700여명의 과학자들이 290여개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보유국에서 비핵국가로 전환하는 데는 몇 가지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습니다. 첫째, 정권핵심부가 핵무기를 포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막강한 핵전력을 감안할 때, 소규모의 핵무기를 갖는 것이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의 안보우려를 자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우크라이나의 핵능력은 소련 핵전력의 일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한 투명성이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우크라이나가 신생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처음 등장했기 때문에 협정위반이나 기만과 같은 불미스런 전력이 없었고 따라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가 쉬웠습니다.
-1994년 1월 14일에는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3국 정상이 만나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폐기 및 이에 따른 보상원칙을 합의했다
-1991년 2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전술, 전략 핵무기를 이관하기로 합의했고, 1992년 5월에는 전술 핵무기 전량을 러시아에 이관했다. 1994년 1월 핵무기 폐기에 관한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3국 간의 협정을 체결하고 우크라이나 보유 핵무기인 SS-19형 130기, SS-24형 46기, 핵탄두 1840개 전량을 3년 내 해체하기로 했다. 해체된 핵물질은 러시아로 이관하고, 러시아는 이에 대한 대가로 원자력 발전소용 핵 원료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미국은 해체에 따르는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96년 6월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를 폐기 완료했다고 발표했고 2010년 4월에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은 농축우라늄을 전량 폐기했음을 선언했다. 1994년 핵무기 폐기 문제가 타결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국회는 핵확산금지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수탁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이 조약에 가입하는 것을 비준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다.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정상회의에서 핵확산금지조약 수탁국가인 미국과 영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안전보장 각서 교환과 함께 비준서 기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식 핵해법은 핵을 완전 폐기하는 대신 경제지원과 안전보장을 제공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문제 해결 방식.
구 소련(소비에트 연방)에 독립공화국으로 속해있다가 1991년 구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연방에서 탈퇴,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으로부터 176기의 핵미사일과 1800기의 핵탄두를 물려받아 세계에서 3번째로 핵을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우크라이나는 처음에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핵무장 해제를 꺼렸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는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이었고, 우크라이나는 미국, 러시아와의 수년간에 걸친 협상끝에 미국, 영국, 러시아 3개국이 공동으로 우크라이나에 안전보장(security assurance)을 제공하는 다자 안전보장 및 경제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핵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었다.
즉, 우크라이나 모델은 러시아의 안보위협을 이유로 핵무기 폐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영국이 러시아까지 참여한 다자간 합의각서를 통해 집단안전보장을 해줌으로써 핵무기 폐기를 성사시킨 방식이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우크라이나어: Міністерство оборони України)는 소련에게서 독립한 지 1개월 후인 1991년 9월 24일 설립한 군사 기관이다. 이후 우크라이나 내의 모든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 거대한 군은 재편성하는 데만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이후로, 우크라이나는 자발적으로 모든 핵무기를 포기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핵무기 사일로, 이를 기반에 둔 군사 기지 및 참모, 장비를 줄이는 데 대대적인 비용을 사용했으며, 유럽의 보편 군사 조약에 따라서 재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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