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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중국대사관 "한복은 중국 조선족과 한반도는 공통의 전통문화..'문화공정'은 억측" 본문

한중 육로개척자 -延邊 藥山 진달래

주한중국대사관 "한복은 중국 조선족과 한반도는 공통의 전통문화..'문화공정'은 억측"

CIA bear 허관(許灌) 2022. 2. 9. 13:26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의 ‘한복 논란’과 관련해 중국 측이 중국 조선족과 한반도는 공통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중국이 ‘문화공정’을 하고 있다는 지적은 억측이라고 밝혔습니다.

주한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오늘(8일) 한국 언론에 배포한 입장에서 “최근 한국의 여론이 중국 조선족 대표가 민족 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일에 대해 주목하고 있고, 이로 인해 일부 언론에서 중국이 ‘문화공정’과 ‘문화약탈’을 하고 있다며 억측과 비난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대변인은 “중국 조선족과 한반도 남북 양측은 같은 혈통을 가졌으며 복식을 포함한 공통의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전통 문화는 한반도의 것이며 또한 중국 조선족의 것으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중국 측은 한국의 역사·문화 전통을 존중하며, 한국 측도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각 민족 인민들의 감정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대사관 대변인은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라며 “민족 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고도 밝혔습니다.

지난 4일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는 한복을 입은 여성이 중국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중국이 한복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중국 측은 한국 측에 외교 경로로 “개막식 공연 내용은 이른바 문화 원류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올림픽]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개최, 중화인민공화국 국기 입장

4일 저녁 제24회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국가체육장에서 개최됐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각 분야의 대표와 국가공로자, 56개 민족 대표가 손에서 손으로 국기를 전했다.

장이머우(張藝謀·장예모) 감독은 인민일보 인터뷰를 통해 “국기를 전달하는 사람은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순간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고 밝혔다.

 

-중국의 사회는 신해혁명 이후 매우 근대화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에 중국인의 80% 이상은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성들이였다. 만주족, 한족 등 족보 명칭은 소수 귀족 또는 강등된 귀족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에 쑨원은 서양열강들처럼 근대화에선 농노비 해방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일부 족보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성씨를 백성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대대적 민적법을 실행하였다. 인구 다수 였던 농노들을 해방시켜 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민적법에서 백성들이 한족(漢族)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족은 중국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55개의 소수 민족들이 8%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56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나 98%는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민족의 인구는 매우 적다. 한족(漢族)의 비율이 98%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한족(漢族) 단일 민족으로 봐도 무관하나 신분증 표기에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의 구분이 되게 표기되어 있으며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소수민족이 될 수 없으며 원래 살고 있던 매우 적은 인구의 소수민족들이 신분증에 표기되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각 민족 언어와 표준 중국어를 병용한다. 소수 민족 언어로는 좡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이 널리 쓰인다. 그중에는 극 소수의 인구인 나시족(納西族)의 동파 문자(東巴文)와 같은 표의 문자도 있다.

 

표준 중국어와 함께 1990년대 말에 반환된 홍콩에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된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설립 65주년 노래와 춤으로 축하 공연

 

 

 

2017년 9월 3일, 무용공연 "자치주 설립"에 출연한 배우. 이 날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설립 65주년 축하 파티 ·제 1회 연변(延辺,延邊)조선족 문화 관광 축제 개막식이 연변 체육관에서 열렸다.

 

지린 왕칭, 놀라운 ‘태양광 세계’

지린성 왕칭현 130 메가와트 집중식 태양광 발전 사업 [드론 촬영/사진 출처: 인민망]

 2016년부터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朝鮮族)자치주 왕칭(汪淸)현은 2년간 10억 1500만 위안(약 1696억 3천만원)을 투자해 성 전체에 단일 최대 130메가와트의 집중식 태양광 발전 사업을 실시하며 연간 발전량 1억 6천만 킬로와트시를 달성하고 연간 빈곤 구제 수익 1500만 위안을 기록했다. 사업 총면적은 460헥타르이며 밭 위로 태양광판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놀라운 ‘태양광 세계’를 이룬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그림처럼 아름다운 수빙(樹氷)

                                               

 

 

 

 

2016년 11월 28일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선봉 국가 삼림공원에서 촬영 된 수빙(樹氷)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선봉(仙峰) 국가 삼림공원에 있는 로야(老爺)령은 해발 1400 미터 이상에서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한파에 의해 광범위하게 아름다운 수빙(樹氷)이 나타난다. 그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빙수(樹氷):과냉각된 구름이나 안개의 입자가 나뭇가지 등에 부딪쳐서 얼어붙는 현상이나 물이 얼어서  얼음

*爺(아비 야)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 지역 지린성(吉林省)의 자치주. 중국 내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의 38%를 조선족이 차지하고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조선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그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고, 1948년 3월 연변전구를 창립했다. 그후 1952년 9월 3일 연변전구가 철폐되고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으며,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었다. 당시 자치주는 1개시와 5개현을 관할했다.

1958년 10월 지린 시(吉林市)에서 관할했던 둔화 현(敦化縣)을 연변에 귀속시켰다. 1965년 5월 옌지 현 투먼 진(圖門鎭)과 왕칭 현(汪淸縣), 스셴 진(石峴鎭)을 합하여 투먼(圖門市)를 설립했다. 1985년 5월 둔화 현을 둔화시로 고쳤고, 1988년 7월 훈춘(琿春)·룽징(龍井) 2개현이 시로 승격되었다. 1992년 8월 한중 국교수립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결혼이나 이민 등을 통해 한국으로 귀화하는 조선족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옌지(延吉, 연길)·투먼(图门, 도문)·둔화(敦化, 돈화)·룽징(龙井, 용정)·훈춘(珲春, 훈춘)·허룽(和龙, 화룡) 등의 6개시와 안투(安图, 안도)·왕칭(汪清, 왕청) 2개현을 관할하고 있다. 자치주의 소재지는 옌지이다.

 

1.경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러시아·한반도가 인접해 있어 대외무역에 유리한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자치주에는 29가지 공업 분야의 각종 업종에 1,390여 개소의 공업 기업소가 있으며 풍부한 삼림·광물·수력 자원을 이용한 임산·야금·제지·석탄 공업이 주로 발전했으나, 1987년 이후부터는 연변전자공업공사가 설립되는 등 기계·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있다.

농업분야에서는 수확고가 평균 60만~70만t에 달하며 주요농작물로는 잎담배의 연간 생산량이 2만 5,000t, 원삼(元蔘)은 1,000여t, 과일은 15만t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과수원을 보유하고 있는 연변의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상업은 국영상업(8개 업종에 342개의 독립 채산단위 및 538개의 영업소가 있음)과, 농산품의 유통을 담당하는 합작 상업조직으로 '공급판매합작사'가 있으며, 생산물의 유통은 최근 확대되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연변은 변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색으로 인하여 대외무역이 비교적 활발하다. 무역교역국은 1991년 현재 20여 개국에 달하고 연간 외화수입은 1,500만 달러 정도이다. 해산물·쌀·목재·고무·강재·화학·공업 원료 등을 포함해서 140여 가지 정도를 수입하고, 수출품목은 기름과 식료품이 31.6%, 축산물과 지방 특산물이 15.8%, 경공업과 방직업이 35.1%, 화학공업·기계전기제품 17% 등이다.

 

2.문화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문화적 특징은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서 조선족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의식주 생활과 관혼상제의 의식에서 고유한 조선족의 문화적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치주는 1991년 현재 문화(예술)관 9개소, 문화분관 8개소, 문화소 115개소 등의 대중문화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1956년 이후 자치주 내의 각 시·현에는 전문 문공단이 설립되었고, 1991년 현재 13개의 전문 예술공연단체가 있다. 이들의 공연활동은 각종 경연대회를 열기도 하지만 예술 공연, 미술·사진 전람회도 개최하고 있다

문화단체는 1953년 7월 결성된 연변 문화예술계연합회(연변 문련)를 비롯하여 연변작가협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희극가협회·연변미술가협회 등이 있고, 문화유산을 보호·관리 및 발굴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문화유물관리위원회가 있다.

이밖에 연변박물관, 연변조선족민속박물관, 룽징 시 민속박물관, 그리고 둔화·훈춘·허룽·룽징 등의 시와 현 문화유물관리소가 있다.

연변박물관은 고대 역사유물 5,400여 점, 민속문물 2,000여 점, 혁명유물 3,000여 점 등이 있다. 특히 1973년 허룽 현 팔가자북대(八家子北大)의 발해 옛 무덤군에서 발굴된 구리거울, 유약이 칠해진 손잡이 달린 단지, 금으로 도금된 물고기 모양의 장식품, 도기와 벼루 등은 국가의 1급품에 속한다. 또한 연변박물관에서 자체로 발굴한 발해국 정혜공주 묘에 있는 발해 벽화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1)역사

이 곳은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둔화 시에 있던 동모산(東牟山)은 발해 건국의 출발지였다. 이 지역은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큼 현재도 발해 관련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묘(둔화 시 육정산(六頂山) 고분군 제1구역 2호분)와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허룽 시(和龍市)의 룽터우 산 고분군(龍頭山古墳群) 등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81년, 옌볜(延邊, 연변)지역의 조선인은 약 1만명이었다. 1907년에는 옌지(延吉, 연길)에만 조선인 가구수가 5만호(戶)에 이르렀는데 한족(漢族)은 조선인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고, 3·1 운동 전인 1916년에 연변의 조선인은 이 지역 총인구 26만5천명 중 약 20만명이었다. 1930년에는 옌지 현, 허룽 현, 훈춘 현, 왕칭 현 등 4개 현의 조선인은 39만명으로 해당 지역 총인구의 76.4%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2년에 9월 3일에 조선민족 자치구(自治區, 중국어 간체: 自治区)가 설치되었는데, 자치구 성립 직후였던 1954년에 이 지역의 총인구 85만4천명 중 조선인은 53만명으로서 전체의 62%였다. 1955년에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둔화 현이 편입됨과 동시에 자치주(自治州)로 격하되었다.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9월 3일을 기념하여 자치주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하였으며, 매년 구삼절(9.3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201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한국(남한), 북한,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옌지 시 체육관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2)민족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옌지 시(延吉) - 58%

룽징 시(龙井) - 67%

허룽 시(和龙) - 60%

투먼 시(图门) - 58%

훈춘 시(珲春) - 45%

왕칭 현(汪清) - 30%

안투 현(安图) - 25%

둔화 시(敦化) - 2%

한족(汉族) 60.4%

만주족(满族) 2.4%

후이족 (回族)0.3%

기타(몽골족 등) 0.1%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성은 김(金)씨이다.

 

3.언론과 출판

1991년 현재 연변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총수는 35종이며, 매기당 총발행부수는 36만여 부이다. 이들 중 〈연변일보〉는 자치주에서 가장 먼저 창간되었다. 자치주 내의 출판사는 4개사, 잡지사는 7개사, 인쇄공장은 모두 120개사로 이 가운데 연변 신화인쇄공장은 1984년 제판과 인쇄 및 제본에 자동화를 실현했다.

1988년 1년간 자치주 내에서 발행된 도서의 양은 1,394만 권이다.

연변의 라디오 방송은 '연길신화방송국'으로 출발했다. 1948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부터 중국어 지방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조선말 방송과 동일한 주파수로 나누어 방송했다. 이외에 1991년 현재 자치주에는 4개의 무선방송국과 8개의 무선중계방송소가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1973년부터 시작되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 수량은 1991년 현재 약 30만 대에 이르고, 연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매일 3시간 30분씩 방송하고 있다.

 

4.교육

초기의 교육상황은 주로 전통적인 서당교육을 통하여 초등수준의 교육을 실시했으나, 점차 근대적인 성격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가자, 1906년 이상설이 룽징에 서전서숙을 세웠으며, 이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반일 민족교육기관이 계속 설립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항일유격정부인 노동민주정부가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발표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하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1950년대에는 초·중등교육의 확대보급, 단일민족학교 설립, 교원양성과 교과서편찬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65년 소학교는 1,274개교, 중학교 278개교, 중등전문학교 5개교, 대학 3개교로 확대되었다.

1966년 이후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은 연변지역의 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각종의 민족학교들이 해산되어 조선인의 취학률이 80%에서 30%로 감소했으며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연변 지역에 제공되던 교육재정보조가 취소되는 등 교육여건이 급속도로 악화 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1982년 9월 자치주 교육국에서 '연변교육 30년'을 발표하여 민족 교육을 재건하려는 방침을 제시했다. 초등교육 부문에서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일민족학교 운영을 재개하면서, 조선어교육을 강화했고, 초등교육확대정책이 실시되었다. 중등교육 부문에서는 사범교육이 확대되었고, 위생학교·경찰학교·예술학교 등 다양한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고등교육 부문에서는 학교 규모의 확대와 전공학과를 증설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본과생 중심의 교육에서 연구생·본과생·전과생의 3단계 교육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성인고등교육기관·과학연구기관 등의 부속기관이 설치되었고, 1989년에는 연변만이 아니라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건설공사가 착공되어 진행중이다. 이 대학은 한국 민간단체의 지원을 받은 학교로 1993년 9월에 개교할 예정이다

1991년 현재 소학교는 1,302개교(학생 27만 580명, 교원 1만 3,300명), 중학교는 241개교(학생 19만 1,330명, 교원 1만 3,980명), 중등전문학교 9개교(학생 3,998명, 교원 776명), 대학 5개교(학생 5,959명, 교원 2,316명) 등이 있다.

 

"중국 화룡 장백산 진달래(金達萊) 국제문화관광축제" 촬영작품

"봄(春)" 최문식 (崔文植) 촬영

진달래를 중국어(한자어)로는 금달래(金達萊)라고 합니다 진달래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중 진한(신라-김씨 친족국가) 꽃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전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和龍)시에서 "중국 화룡 장백산 진달래(金達萊) 국제문화관광축제 촬영작품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촬영애호가들의 작품 60점이 이번 전시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촬영작품전시회는 연길백화청사주식유한회사에서 주최하고 화룡시 라디오 TV방송국과 화룡시 농촌신용합작연합사에서 주관했으며 연변 촬영가협회와 화룡시 관광국,화룡시 촬영가협회가 후원했습니다.

이번 촬영작품전시회는 전방위적이고 다시각적인 촬영작품을 통해 화룡시의 "평강(平崗)진달래,빙설진달래,변경진달래,살기좋은 진달래,풍정진달래"를 내실로 하는 화룡시 5대 진달래 브랜드의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아름다운 진달래" 최염문(崔艶文) 촬영
"선경의 꿈(仙境一夢)" 이순녀(李順女) 촬영
"진달래 고향(金達萊故鄕)" 유재학 (劉載學) 촬영 
"봄맞이" 석금철(石錦哲) 촬영
"봄의 사절(春的使者)" 설중천(薛重天) 촬영
"천하절경 선경대" 우장흔(于長欣) 촬영
"산촌의 오늘" 장수경(張樹慶) 촬영
" 내일을 향해 " 양옥영 ( 楊玉英 ) 촬영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진달래" 권지용 ( 權智勇 ) 촬영
"명절의 기쁨" 이하(李夏) 촬영

                                                                                                  

金達萊三韓民族(삼한민족의 꽃이 진달래입니다)

진달래는 신라(진한)에서 백제(변한)로, 고구려(마한)으로 올라가면서 봄을 알리는 꽃입니다

진달래는 봄의 꽃으로 삼한민족의 하나됨을 일깨워주는 꽃입니다

진달래는 통일의 꽃, 민족의 꽃입니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聯邦共和國"

 

장백산 기슭의 "조선인삼 명인(名人)"

      

 

 

 

 

장백산 기슭의 "조선인삼 명인(名人) 최장안(崔長安)씨의 모습"

장백산의 오지에 있는 길림성 백산시(白山市) 무송현(撫松県)은 인삼의 산지에서 60대 최장안(崔長安)씨는 여기에서 40년 이상 인삼을 취해왔다 "명인(名人)"이다. 최장안 씨에 따르면 현지에서는 산에 들어가 인삼을 취할 것을 "방산(放山)"고 말했다. 매년 입추(立秋, 초가을) 무렵 야산 삼(野山参) 수확의 시기를 맞이 장인들이 집단으로 산에 들어가  야산 삼(野山参)의 흔적을 찾는다.

"방산(放山)"매우 힘들고 매일 수십 킬로미터 배회하고 산중에서 식사하고 수면을 취한다. 게다가 며칠 찾아도 수확이 있는 것은 아니며,  야산 삼(野山参) 를 찾아 내서 연수(年数) 외형 생장상황(生長状況)에서 수확하지 못할 수도 있다. 최근 인공 재배 기술의 발달로 옛날  야산 삼(野山参) 수확 작업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