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아프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은 누구인가? 본문

탈레반은 2001년 미국 주도 연합군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축출됐다가 최근 몇 달 동안 공격을 개시했고 이제 다시 아프간을 장악했다.
20년간의 전쟁 끝에 미국이 오는 9월 11일까지 철수 완료 준비를 하는 동안 이슬람 무장 세력 탈레반은 주요 도시를 점령한 후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
탈레반은 앞서 2018년 미국과 직접 평화 회담을 갖기도 했고, 지난해 2월에는 양측이 카타르 도하에서 미국 철수 및 탈레반의 미군 공격을 방지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는 탈레반 점거 지역 내에서 알카에다 혹은 다른 무장 세력이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평화 회담을 진행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듬해 탈레반은 계속해서 아프간 정부군과 민간인을 공격하며 아프간 전역으로 진격했다.
권력을 잡다
파슈토어로 '학생'을 뜻하는 탈레반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후인 1990년대 초 파키스탄 북부에서 처음 등장했다.
'파슈툰 운동'은 수니파 이슬람의 강경 사상을 전파하는 신학교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학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 곳이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파슈툰 지역에서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고 엄격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 재시행을 약속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남서부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확장했다. 탈레반은 1995년 9월 이란과 접해있는 헤라트 지방을 점령했고, 정확히 1년 후 소련 점령에 저항했던 아프간의 반군 게릴라 조직 무자헤딘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인 부르하누딘 라바니 대통령의 정권을 전복시키며 아프간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그렇게 탈레반은 1998년까지 아프간 영토의 90%를 장악했다.
소련이 축출된 후 각종 내분과 무자헤딘의 지나친 행동에 지친 아프간인들은 처음엔 탈레반의 등장을 대체로 환영했다.
탈레반은 초기에 부패를 근절하고 불법을 억제하며 상업 번성에 필요한 안전한 도로와 지역을 개발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살인범과 간통범에 대한 공개처형, 절도범에 대한 사지절단 등 샤리아법의 엄격한 해석에 따른 강력한 처벌을 도입하거나 지지했다.
탈레반 체제 하에서 남성들은 수염을 기르고 여성은 몸 전체를 덮는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탈레반은 또 텔레비전과 음악, 영화를 금지했고 10세 이상 소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도 반대했다.
탈레반은 각종 인권침해와 문화적 학대로 기소됐다. 악명 높은 사례 가운데 하나는 2001년 탈레반이 국제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중부의 유명한 바미얀 석불을 파괴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탈레반 조직의 설계자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부인했다. 그러나 탈레반 운동에 가담한 많은 아프간인들이 파키스탄의 종교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파키스탄은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탈레반의 아프간 지배를 인정한 단 3개국가 중 하나였다. 탈레반과의 외교 관계를 가장 마지막에 단절한 국가이기도 하다.
탈레반은 한때 자신들이 지배하던 북서부 지역에서 파키스탄을 불안정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파키스탄에서 이뤄진 탈레반의 공격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고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은 사건은 2012년 10월, 당시 14세 소녀였던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하굣길에 암살하려던 사건이다.
폐샤와르 학교 학살 사건 2년 후 발생한 대규모 군사 공격은 파키스탄 내 탈레반의 영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파키스탄 탈레반의 핵심 인물 최소 3명이 2013년 미국 무인 항공기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이 중에는 조직의 지도자인 하키물라 메수드도 포함됐다.

알카에다 ‘성역’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공격을 받은 이후 세계의 관심은 아프간 탈레반에 집중됐다. 탈레반은 주요 용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운동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1년 10월 7일, 미군 주도의 연합군이 아프간 공격을 개시했고, 12월 첫째 주에 탈레반 정권은 붕괴됐다. 당시 지도자였던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와 빈 라덴을 포함한 고위 인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었지만 체포되지 않았다.
탈레반의 많은 고위급 인사들은 파키스탄의 퀘타시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탈레반을 지휘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소위 ‘퀘타 슈라’로 불리는 탈레반 지도부 회의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외국 군대가 주둔했지만 탈레반은 아프간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갔고 광범위한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2001년 이후 사라졌던 공격 행위도 다시 시작됐다.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수차례 공격했고, 2012년 9월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연합군의 배스티언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탈레반이 2013년 카타르에 사무실 개설 계획을 발표하자 평화 협상에 대한 희망이 제기됐다. 그러나 여전히 불신은 가득했고 폭력은 계속됐다.
2015년 8월, 탈레반은 지속적인 건강 문제로 파키스탄의 한 병원에 머물렀던 오마르의 사망 소식을 2년 이상 은폐했다고 시인했다.
다음 달, 탈레반은 몇 주간의 내분을 잠시 접어두고 물라 오마르의 대리인이었던 물라 마노르를 새로운 지도자를 내세워 결집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탈레반은 2001년 패배 이후 처음으로 지방의 주도를 장악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쿤두즈를 점령했다.
2016년 5월 미국의 무인 항공기 공격으로 물라 만수르가 사망하자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학자 출신의 하이바툴라 아쿤자다를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웠다.
철수 카운트다운
오랜 대화 끝에 지난해 2월 미국과 탈레반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 올해 탈레반의 전술은 도시와 군사 기지에 대한 복합적 공격에서 아프간 민간을 공격하는 표적 암살로 옮겨갔다.
언론인, 판사, 평화 운동가, 여성 권력자 등을 목표로 한 공격은 탈레반이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둔 채 전략만 바꿨음을 암시했다.
아프간 관리들은 국제적 지원이 없이는 아프간 정부가 취약하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오는 9월 11일까지 모든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대해 공격이 발생한 지 20년 만이다.

20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초강대국인 미국보다 더 오래 견뎌온 탈레반은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외세 철수를 계기로 수도 카불에 있는 아프간 정부를 다시 한 번 전복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탈레반에는 최대 8만5000명의 정규직 군인이 있다. 2001년 아프간에서 축출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
탈레반의 전진 속도는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 미국 주도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임무 사령관인 오스틴 밀러 장군은 지난 6월 아프가니스탄이 ‘세계의 우려’라고 불렸던 혼란스러운 내전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부군은 민간인 사상자 발생을 피하고자 항복했고, 탈레반은 전투 없이 주요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같은 달 미국 정보국은 아프간 정부가 미군 철수 후 6개월 이내에 함락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은 누구인가? - BBC News 코리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은 누구인가? - BBC News 코리아
탈레반은 미국 주도 연합군에 의해 아프간에서 축출됐다가 다시 아프간을 장악했다.
www.bbc.com
아프간 무장조직 '탈레반'

“탈레반의 태동”
아프가니스탄 무장조직, 탈레반이 태동한 것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아프간은 소련의 지원과 개입을 거부하는 사회주의자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이 막 집권했는데요. 그러자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해 아민 정권을 몰아내고, 친 소련 괴뢰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에 자유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물론 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소련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는데요.
이런 가운데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은 아프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소련에 저항할 세력을 훈련,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학생이나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탈레반’이라고 불렸는데요. 탈레반이라는 말은 아프간 남부 파슈툰족의 말로, 학생 조직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물라’라고 하는데요. 이슬람권에서는 지도자들 앞에 보통 스승이라는 뜻의 ‘물라’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학생 조직에서 정치 세력으로”
소련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한 탈레반은 이후 미국의 막대한 자금 지원과 파키스탄의 정보, 군사 훈련 등의 지원 속에 끈질기게 소련에 저항했습니다. 결국 소련은 아프간 침공 10년 만인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데요.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 양상이 전개됩니다. 소련과 전쟁하는 동안 다양한 배경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무장집단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는데요. 소련 퇴각 후 이들 간의 갈등이 불거진 겁니다.
하지만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한 탈레반은 다른 무장집단을 빠르게 제압하며 거대한 군사 조직으로 세를 키우기 시작했고요. 1996년에는 수도 카불까지 장악하며 정치집단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이라는 이름의 국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간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습니다.
이 기간,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며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는데요. 특히 여성들의 교육과 직업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서양 음악이나 서적 등 문화를 일절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반할 경우, 손발을 자르거나 돌로 쳐 죽이는 등의 공개 처형을 일삼았고요. 유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1천500년 된 거대한 불상을 비롯해 역사 유적들을 파괴하며 전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무엇보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은 9.11 테러 공격을 자행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거점이었습니다.
탈레반은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했고,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 훈련소와 군사시설을 설치했는데요. 알카에다는 여기서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테러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탈레반 축출과 전쟁의 장기화”
2001년 9월 11일, 3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은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에 있는 것을 파악하고 탈레반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일축했는데요. 이에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단행했고, 탈레반 정권은 그해 12월 축출됩니다. 과도 정부를 거쳐 2004년 아프간에서 민간 정부가 출범하는데요. 하지만 다양한 부족과 배경을 가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집권적인 정부 수립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아프간 국경 지역과 파키스탄 등 주변국으로 도망쳤던 탈레반은 다시 세를 불리기 시작했고요. 아프간 정부군과 미군, 나토군을 겨냥한 공격을 끊임없이 자행합니다.
이렇게 아프간의 불안정이 장기화하면서 미군과 나토군도 당초 계획과는 달리 아프간 정부군 훈련과 지원 등의 대테러 임무를 계속하며 20년이 되도록 아프간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됩니다.
“탈레반의 귀환”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9.11테러 20주년이 되는 9월 11일 전까지는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을 전원 철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한 해 전, 전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탈레반과 전격 평화협정을 체결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취임 직후부터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여러 정책을 돌려놓았던 바이든 대통령은 그러나 아프간 철군에 관한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은 따랐습니다.
다만 애초 5월로 정했던 시기만 몇 개월 늦췄는데요. 미국과 동맹군의 철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5월부터 탈레반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아프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외곽, 국경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탈레반은 점점 세를 불리며 빠르게 점령지를 넓혀갔고, 마침내 지난 8월 15일, 수도 카불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제 사회는 아프간이 순식간에 탈레반에 함락되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망”
1996년부터 2001년 탈레반 정권 시기, 탈레반을 인정한 나라는 같은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UAE) 등 몇 개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현재 탈레반은 여성들의 사회 참여 허용 등 잇따라 유화적인 발언을 내놓으며 과거와는 달리 국제 사회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포석을 놓고 있는데요.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라가 탈레반 정권을 인정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한편 탈레반이 재집권하면 아프간 주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프간 인구의 약 9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는데요. 국제 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탈레반의 경제 활동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향후 중국이 경제적 지원을 앞세워 아프간 내 영향력을 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요. 중국은 최근 탈레반 지도부와 접촉하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극단 이슬람 세력 탈레반 정권이 다시 아프간에 들어서면 중국 북서부 신장지역의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의 분열 움직임이 더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면서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행보도 주목되고 있습니다. 탈레반이 생길 때부터 깊이 개입했던 파키스탄은 그간 전면에서는 미국을 지지하면서 뒤에서는 탈레반을 두둔한다는 의혹을 받아왔는데요.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파키스탄의 영향력이 더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프간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탈레반의 통치를 피해 파키스탄으로 탈출하는 아프간 난민이 급증할 수도 있어 파키스탄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서둘러 철수해 현 사태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조 바이든 행정부는 향후 미국의 태도는 인권 보호와 국제 규범 준수 등 탈레반의 행동에 달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장악하면서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현재 탈레반의 최고지도자는 ‘히바툴라 아쿤드자다’라는 인물입니다. 아쿤드자다는 60대로 추정되고요. 1990년대 이슬람 종교 법원의 수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공개 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행방도 묘연한데요. 2016년부터 탈레반을 이끌고 있으며 탈레반의 정치, 종교, 군사와 관련한 최종 결정권자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탈레반의 이인자는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입니다. 그는 탈레반이 처음 조직될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실용주의적 성향으로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평화협상을 이끌며 국제 사회에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바라다르는 최근에도 이란, 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등을 활발하게 방문하며 사실상 탈레반의 정치,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데요. 일부 언론은 탈레반의 새 통치 체제하에서 그가 대통령직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습니다.
탈레반의 또 다른 핵심 지도급 인사로는 ‘물라 무하마드 야쿠브’가 꼽히고 있습니다. 무하마드 야쿠브는 탈레반의 창설자 무하마드 오마르의 아들로, 탈레반의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전해졌습니다. 무하마드 야쿠브의 얼굴도 공개되지 않았는데요. 30대 초반으로, 탈레반 내에서 최고 지도자 후보감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하카니네트워크’라는 이름의 무장 조직을 이끄는 시라주딘 하키니도 조직 내 지도자급 인물입니다.
소련 점령 치하에 있을 때, 하카니네트워크를 만들어 투쟁했던 잘랄루딘 하카니의 아들로서, 4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며 탈레반의 재정과 군수물자 등을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하카니네트워크는 최근 역내에서 발생한 여러 테러 공격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받고 있으며, 미국 정부가 테러 단체로 지정한 집단입니다.
'Guide Ear&Bird's Eye40 > 아프가니스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레반 제2인자 바라다르 씨, 카타르 외무장관과 회담 (0) | 2021.08.18 |
---|---|
아프간:영국, 탈레반 장악 아프간 난민 2만 명 수용 계획 (0) | 2021.08.18 |
백악관 "탈레반과 민간인 출국 안전보장 합의" (0) | 2021.08.18 |
국제사회 "아프간 '테러 온상' 안 돼...주민 인권 존중해야" (0) | 2021.08.18 |
미 의회, '아프간 철군' 초당적 비판…'전 세계 미군 역할' 논쟁 다시 불거져 (0) | 2021.08.18 |